주연(삼국지)

의 군권 1인자
주유노숙여몽육손주연제갈각손준손침주적정봉육항
오서 「주치주연여범주환전(朱治朱然呂範朱桓傳)」
주치주연여범주환

朱然
(182년 ~ 249년)

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 오나라의 인물. 는 의봉(義封). 본명은 시연(施然). 주치양자, 주적의 아버지.

연의만 알던 사람이 정사를 보면서 세 번 놀라는데 유비군에 털리기만 하던 주연이 개인 열전이 있어서 첫 번째로 놀라고 실제로는 조운에게 죽지 않고 이후로 27년을 더 산다는 것에서 두 번째로 놀라며 강릉에서의 대활약에 세 번째로 놀란다.

2 정사

2.1 초기 생애

주치의 누나의 아들로서 주연의 본래의 성은 시씨이다. 처음 주치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주연의 나이가 13세가 되었을 때, 손책에게 주연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고 싶다고 말했다. 손책은 단양군에 명하여 양고기와 술을 마련하고 주연을 불렀다. 주연이 오군에 도착한 후, 손책은 융성한 예의로써 축하하였다.[1]

주연은 일찍이 손권과 함께 공부하면서 은애의 정을 맺었었다. 손권이 정사를 통솔하게 되자, 주연을 여요현의 장으로 임명했다. 당시 주연은 19세였다. 이후에 그는 산음현의 령으로 승진했고, 절충교위의 관직을 더했으며, 다섯 현을 감독했다. 손권은 그의 재능을 남다르게 생각하고 단양군을 분할해 임천군을 만들고, 주연을 그 곳의 태수로 임명해 병사 2천 명을 주었다. 동문에게 태수 자리는 줘야겠는데 남는 군이 없으니 하나를 새로 만들지 뭐.

그 때 마침 산적들이 분분히 일어났다. 주연은 출병하여 그들을 토벌하러 갔는데, 1개월 쯤 지나서 평정했다.

2.2 216년 ~ 217년 유수구 전투

조조가 유수로 침범해 왔을 때, 주연은 대오와 삼관둔을 방비하고 있었고, 편장군으로 임명됐다.

주태전에 따르면 조조가 유수로 출전하자, 주태가 다시 달려가 공격하니, 조조는 퇴각하였고, 거기에 머물러 남아 유수를 감독하니, 평로장군에 배수되었다. 이 때 주연과 서성 등이 모두 자기의 부(部)에 있으면서 아울러 복종하지 않으니, 손권이 특별히 감찰하러 나와 유수의 성채에 이르러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큰 연회를 베풀었다. 손권이 직접 술을 따르다 주태 앞에 이르러는 주태에게 옷을 벗도록 명하고, 손권이 손으로 상처의 흔적을 직접 가리키며 그 상처가 생겼던 곳에 대해서 물었다. 주태는 번번이 옛 전투의 여러 장소를 기억하여 대답하였고, 그것이 끝나자, 다시 옷을 입도록 하고, 밤늦도록 연회에서 즐거워 하였다. 그 다음날 사자를 보내 어개(御蓋)를 주게 하였다. 이에 서성 등이 곧 복종하였다.

2.3 번성 공방전

주연은 219년에는 관우 토벌에 참가하여 별도로 반장과 같이 임저까지 가서 관우를 사로잡았다. 이 때문에 소무장군으로 승진하고 서안향후로 봉해졌다.

호위장군 여몽의 병세가 위중해지자, 손권은 이렇게 물었다.

그대가 만일 일어나지 못한다면, 누가 대신할 수 있소?

여몽은 대답했다.

주연은 대담함과 지조에 있어서 남음이 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그를 임용할 만합니다.

여몽이 죽자, 손권은 주연에게 부절을 주고 강릉을 지키게했다.

2.4 이릉대전

222년, 유비가 병사를 들어 의도를 공격해왔다. 주연은 5천 명의 병사를 감독하여 육손과 협력해 유비에게 대항했다. 주연은 별도로 유비의 선봉대를 공격하여 무찌르고 그들의 퇴로를 차단시켰다. 유비는 그래서 패하여 달아났다. 손권은 주연에게 정북장군을 제수하고 영안후로 봉했다.

육손전에 따르면 또 유비가 백제성에 머물러 있자, 서성. 반장. 송겸 등은 각각 다투어 표를 올려서 유비를 반드시 붙잡을 수 있다며 다시 공격하기를 원했다. 손권은 이에 대해 육손에게 물었다. 육손은 주연과 낙통과 의견을 같이하며, 조비가 대군을 집결하여 겉으로는 우리 나라를 도와 유비를 토벌하려 하지만 속으로는 사악한 마음이 있으므로 결정이 되면 즉시 군대를 돌릴 것이라고 보았다. 오래지 않아, 위나라 군대는 과연 출동했고, 오나라는 삼면에서 적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2.5 강릉 전투

위나라가 조진, 하후상, 장합 등을 파견하여 강릉을 공격했고, 조비는 직접 완성에 머물면서 그들의 지원 세력이 되었다. 위나라 군대는 서로 이어져 주둔하여 강릉성을 포위했다.

문빙전에 따르면 하후상과 더불어 강릉을 포위하였던 때에 문빙은 별도로 면구에 주둔케 하였다.

손권은 장군 손성을 파견하여 1만 명의 병사를 인솔해 강릉 밖에서 방비하며, 강릉을 둘러 보루를 쌓아 주연의 외부 구원병이 되도록 했다. 장합이 병사를 이동시켜 손성을 공격하자 손성은 대항할 수 없었으므로 즉시 퇴각하였다. 장합은 강릉을 에워싸고 지키던 보루를 차지하였다. 그래서 주연은 안팎의 구원이 끊어지게 되었다. 손권이 반장과 양찬 등을 보내 포위를 풀도록 했지만, 적군의 포위망은 풀리지 않았다.

반장전에 따르면 위의 장수 하후상 등이 남군을 포위하고, 선봉의 3만명을 나눠 부교를 만들어 백리주(百里洲)를 건너오자, 제갈근과 양찬이 아울러 병사를 모아 구원하러 갔으나, 어디로 가야할 지를 몰랐고, 위나라 병사들은 날마다 건너오면서 끊이지 않았다.

제갈근전 주석 오록에 따르면 조진과 하후상 등이 강릉에서 주연을 포위하고, 주중(州中)을 나누어 점거하니, 제갈근이 대병을 이끌고 구원했다. 제갈근이 성품이 넒고 급하지 않아, 도리를 미루어 보고 계획을 맡기니, 끝내 기복 화복이 생길한만한 술책은 내지 않고, 병사들이 오랫동안 해이해지지 않으니, 손권이 이것을 존경하였다.

그 당시 주연의 성 안에 있는 병사들은 대부분 종창을 앓고 있었고, 참고 싸울 만한 자는 겨우 5천 명이었다. 조진 등이 흙산을 오르고, 땅굴을 파고, 성벽 가까이에 누대를 세우고 화살을 비오듯 쏘아댔으므로 장사들은 모두 안색을 잃었다. 그러나 주연은 침착하였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었다. 그는 관리와 병사들을 격려하며 적군의 약점을 찾아 진영 두 곳을 공격하여 무찔렀다.

유방전 주석 손자별전에 따르면 강릉이 포위되어 한 달이 지났으나 손권(주연)이 1천 몇 백 명을 가지고 동쪽 문을 지키니 그들의 땅이 붕괴하거나 흩어지는 바가 없었다.

오주전에 따르면 223년 봄 정월, 조진은 군대를 나누어 강릉 중앙의 사주를 점거했다.

위나라는 주연을 포위해 공격한지 총 6개월이 되었지만 물러가지 않았다. 강릉현의 령 요태가 병사들을 인솔하여 성 북쪽 문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밖의 병사는 많고 성 안에는 사람이 적으며 식량이 바닥나려고하는 것을 보고 적과 내통하여 그들을 위해 안에서 호응하기로 음모했다. 그 음모가 시행되려고 할 때, 일이 발각되었다. 주연은 요태를 죽음으로 다스렸다. 하후상 등은 승리할 수 없게 되자, 곧 공격을 멈추고 퇴각하였다. 이로부터 주연의 명성은 적국에까지 떨쳤으며, 당양후로 바뀌어 봉해졌다.

반장전에 따르면 반장이 말했다.

위의 세력이 비로써 성한데다, 강물 또한 얕으니, 더불어 싸울 수 없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통솔하던 자들을 거느리고, 위의 진영 상류 50리 쪽에 도착하여, 갈대 수백만 묶음을 베어 이를 묶어 큰 뗏목을 만들어, 강물을 따라 오며 불을 질러 적의 부교를 불태우고 부수고자 하였다. 뗏목을 만드는 일이 끝나자, 물이 차오르기를 기다려 막 내려가려 할 때, 하후상이 바로 군사를 이끌고 퇴각하였다. 반장은 아래로 내려가 육구를 수비했다.

제갈근전 주석 오록에 따르면 봄물이 날 때쯤에 반장 등이 상류 물가에 성을 쌓고 제갈근은 부교를 띄워 진공하니, 조진 등은 퇴각해 패주하였다.

동조전에 따르면 조비가 완성에 행차하였을 때, 정남대장군 하후상 등이 강릉을 공격하고 있었는데 함락할 수 없었다. 그 당시 강물은 얕고 좁았는데, 하후상은 배를 이용하여 보병과 기병을 강 속의 삼각주에 들여보내 주둔시키려 하였고, 부교를 만들어 남북으로 왕래하게 하고자 했다. 논의하는 자들 대부분이 이렇게 하면 성은 반드시 공략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소는 상소를 올려 말했다.

지금 군대가 삼각주에 주둔하는 것은 주위가 모두 물로 둘러싸여 있으므로 가장 깊은 곳에 들어가는 것이고, 부교로써 건너려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것이며, 한 길로 가려는 것은 지극히 협소한 것입니다. 게다가 강물이 불어나고 있는데 하루아침에 폭발적으로 불어나면, 어떤 방법으로 제어할 수 있겠습니까?

조비는 동소의 말에 깨달은 바가 있어 즉시 하후상 등에게 조칙을 내려 삼각주에 급히 빠져 나오게 했다. 때마침 적병들은 두 갈래로 앞으로 전진해 오는데, 관병(官兵)이 길 하나로부터 퇴각하여 나오는 것은 한꺼번에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장군 석건(石建)과 고천(高遷)만이 가까스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군대가 빠져 나온 지 열흘이 되었는데, 강물이 갑자기 불어나자, 조비가 말했다.

그대가 이 일을 논하였는데, 어찌 그다지도 옳은가! 설령 장량진평으로 하여금 이 일을 감당하게 했더라도 어찌 다시 더 할 수 있으리오.

2.6 손권 휘하

처음에 주연은 주치의 상을 마쳤을 때, 본래의 성을 회복하기를 원했지만 손권이 허락하지 않았다.

보즐전에 따르면 보즐은 당시 형주 경내에서 임무를 맡고 있던 제갈근, 육손, 주연, 정보, 반준, 배현. 하후승, 위정, 이숙, 주조, 석간 11명을 나열하고 그들의 행장을 분석했으며, 상소를 올린 기회에 손등에게 권면하여 말했다.

문빙전에 따르면 손권은 군세 오만을 이끌고 스스로 석양에서 문빙을 포위, 그 기세가 격렬하였는데, 문빙은 굳게 지켜 동요치 않았으므로 손권은 20여일 지나자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문빙이 이를 추격하여 격파하였다.

227년, 손권이 직접 병사들을 지휘하여 석양을 공격했다. 군사를 돌릴 때에는 반장이 적군의 추격을 차단하는 일을 맡았다. 밤에 행군하는 사이에 혼란이 발생했고, 적군이 반장을 추격했다. 반장은 추격을 막아낼 수 없었다. 주연이 즉시 돌아와 주둔하면서 적군에게 대항하여 앞에 있는 배로 하여금 아주 먼 곳까지 가도록 하고, 자신은 천천히 뒤에 출발했다.

229년, 주연은 거기장군 우호군으로 임명되었고 연주목을 겸임했다. 오래지 않아 연주가 촉나라에 있게 되었으므로 주연이 맡았던 주목의 직책은 없어졌다.

2.7 4차 합비 공방전

234년, 손권은 촉나라와 기일을 약속하여 대대적으로 군사를 일으키기로 했다. 손권 자신은 신성으로 향했고, 주연과 전종은 각기 부월을 받아 좌우독으로 임명됐다. 마침 관리와 병사들이 질병에 걸렸기 때문에 공격하지 못하고 후퇴했다.

위진전에 따르면 제갈량이 또 사곡으로 출격해오자, 정남장군이 표를 올려 말했다.

주연 등의 군대는 이미 형성을 지났습니다.

위진은 말했다.

주연은 오나라의 용맹한 장수이므로 반드시 손권을 따라 싸울 것입니다. 세력을 보여 정남장군을 공격하는 것 뿐입니다.

손권이 과연 주연을 불러 거소로 들어가 진군하여 합비를 공격했다. 조예는 직접 동쪽으로 정벌을 나가려 하였으나 위진이 말했다.

손권은 겉으로는 제갈량에 호응하는 것을 보여주지만, 사실 내심으로는 관망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합비성은 견고하므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폐하께서 직접 정벌하여 육군의 비용을 줄일 필요가 없습니다.

조예가 심양으로 왔을 때, 손권은 이미 물러났다.

2.8 1차 조중 정벌

주연전에는 1차 조중 정벌이 242년으로 나와있으나 손성은 여러 상황을 보면 진수가 오나라의 가화 6년을 적오 5년으로 착각했을 것이라고 보았다.

237년, 조중 정벌에 나섰다. 위나라 장수 포충(蒲忠)과 호질은 각자 병사 수천 명을 이끌고 대항했는데, 포충은 요충지를 차단시켜 주연의 퇴로를 끊으려고 했고, 호질은 포충을 위해 계속적으로 지원했다. 이 때 주연이 지휘하는 병사들이 먼저 사방에서 나와 공격했으므로 위나라 군대가 습격해 온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불러들일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주연은 수하의 현재 있는 병사 8백 명을 이끌고 역습했다. 포충은 싸움이 불리하게 되었고, 호질 등도 모두 물러났다.

명제기에 따르면 237년 가을 7월 2일, 손권은 대장 주연 등 2만 명을 파견하여 강하군을 포위하였지만, 형주자사 호질 등이 이들을 공격하였으므로 주연은 퇴각하였다.

2.9 손권 휘하

오주전에 따르면 당초, 손권은 교사 여일을 신임했는데, 여일은 성격이 가혹하고 법을 매우 엄하게 집행했다. 태자 손등이 이 점을 자주 간언했지만, 손권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들은 이 때문에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이후에 여일의 간사한 죄악이 발각되어 참살 당하게 되었는데, 손권은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자책했으며, 곧 중서랑 원례를 시켜 여러 대장들에게 사과의 말을 전하도록 하고, 이 기회에 그 당시의 정사에 있어서 고쳐야만 할 점에 관해 질문했다. 원례가 돌아오자, 손권은 또 조서를 내려 제갈근, 보즐, 주연, 여대 등을 질책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들이 의견을 전부 말하고 직접적으로 간언하는 것이야말로 내가 여러분들에게 바라는 것이다. 나의 허물을 보완하는 것은 나 역시 희망한다.

주유전에 따르면 239년, 제갈근, 보즐이 이름을 나란히 하여 상소를 올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유의 아들 주윤은 죄를 지어 처벌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주유는 과거 적벽에서 조조를 패배시키고, 강릉에서 조인을 도망치게하여 진실로 그를 뛰어 넘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의 아들 주윤을 강등시켜 평민이 되게 하였으니, 그의 죄를 사면시켜 주시고 병사들을 돌려주고 작위를 회복시켜 주십시오.

손권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옛날 주윤이 나이가 어렸으며, 처음에는 공로가 없었는데도 정예 병사를 받아 지휘하고 왕후장군의 작위로 봉해진 것은 주공근을 생각하여 주윤에게 미쳤던 것이오. 주윤은 이러한 것에 기대어 주색에 빠져 스스로 방자하였으며, 앞뒤로 몇 차례 말하여 깨우치게 하였지만, 일찍이 고친 일이 없었소.

제갈근과 보즐은 누차 표를 올렸고, 주연과 전종 또한 함께 진술하여 요청하였으므로 손권은 비로서 이를 허락했다. 이때 주윤은 병으로 죽었다.

2.10 작피의 역

주이전에 따르면 241년, 주이는 주연을 수행하여 위나라 번성을 공격하러 갔을 때, 번성의 외부 포위벽을 무찌를 계획을 건의했다.

제왕기 주석 간보진기에 따르면 오나라 장군 전종이 작피를 침범하고, 주연, 손륜의 5만 병력이 번성을 포위하고 제갈근, 보즐이 조중을 침범했다. 전종이 이미 파주(破走)하고, 번성이 애워싸여 급박해졌다.

선제기에 따르면 241년 여름 5월, 오나라 장수 전종이 작피를 침범하고 주연, 손륜이 번성을 포위하고 제갈근, 보즐이 조중을 약탈하자 사마의가 몸소 이를 토벌할 것을 청했다. 의논하는 자들이 모두 이르길, 적이 멀리 와서 번성을 포위했으니 창졸간에 함락시킬 수 없고, 견고한 성 아래에서 꺾이어 스스로 무너지는 형세가 될 것이니 의당 장기적인 책략으로 이를 막아야 한다고 했다. 사마의가 말했다.

변경 성이 적의 침범을 받았는데 묘당에 편안히 앉아 있구려. 변경이 시끄럽고 동요되면 민심이 혼란해질 것이니 이는 사직의 큰 근심거리요.

제왕기에 따르면 241년 여름 5월 오의 장군 주연 등이 양양군 번성현을 포위하자, 태부 사마의가 군사들을 인솔하여 이들에게 대항했다.

호질전에 따르면 오나라 대장 주연이 번성을 포위하자 호질은 경무장한 군대를 인솔하여 그에게 달려갔다. 논의하는 자들은 모두 적군이 강성하므로 가서 싸울 수 없다고 생각하였으나, 호질이 말했다.

번성은 지세가 낮고 병력도 적으므로 마땅히 군대를 진격시켜 그 외곽에서 구원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위험에 처할 것입니다.

마침내 병마를 추슬러서 포위된 번성에 다다르자 성안이 곧 안정되었다.

장기전 주석 위략에 따르면 241년, 오나라 장수 주연이 번성을 포위하여, 성 안에서 지키고 있던 장수 을수 등을 구원하는 것이 매우 급박했다. 하후유는 진군하여 등새에 주둔하였는데, 병력이 적어 감히 나아갈 생각조차 못했지만, 태고가 피리를 불어 따르는 자들을 선도하여 주연으로부터 6~70리 떨어졌다가 돌아왔다. 을수 등으로 하여금 이것을 보게 하려고 몇 번이고 반복했다. 한 달여 만에 태부가 도착하여 함께 진군하자, 주연 등은 달아났다.

선제기에 따르면 사마의는 남쪽 지방이 덥고 습기가 많아 오래 끌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경기병으로 싸움을 걸었으나 주연은 감히 출동하지 못했다. 이에 군사들을 쉬게 하고는, 정예를 뽑고 선봉을 모집하며 호령을 분명히 해 반드시 공격하겠다는 태세를 보여주었다. 오군이 밤중에 달아나자 이를 추격해 삼주구(三州口)에 이르렀고 만여 명을 참획하고 선박, 군수물자를 거두고 돌아왔다.

2.11 이궁의 변

이궁의 변에서 주연의 아들 주적(시적)이 손화를 지지했다. 그런데 이 당시 주연의 행적은 보이지 않는다.

오주전에 따르면 244년, 보즐과 주연 등이 각각 상소를 올려 이렇게 말했다.

촉나라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모두 촉은 오와의 맹약을 등지고 위와 서로 내통하려고 많은 배를 만들고 성곽을 수리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 장완은 한중을 수비하면서 사마의가 남쪽으로 향한다는 소식을 듣고도 위나라의 후방이 텅 비었는데도 병사를 내어 적을 견제하지 않고, 오히려 한중을 버리고 성도 부근으로 돌아왔습니다. 응당 방비할 준비를 해야만 합니다.

손권은 상황을 추측해 보고는 이와 같지 않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마의는 이전에 서현으로 들어왔다가 열흘이 지나자 곧 물러났소. 촉은 만 리 먼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어떻게 형세의 위급함을 알고 곧 바로 병사를 내겠소? 또 다른 사람이 자신의 국가를 다스리면서 배나 성곽을 무엇 때문에 수리하여 보호하지 않겠소? 사람들의 말은 매우 믿을 만하지 못하오.

촉나라는 결국 스스로 도모하는 바가 없었는데, 과연 손권이 헤아린 것과 같았다.

2.12 2차 조중 정벌

오주전에 따르면 245년 가을 7월, 장군 마무 등이 모반을 꾀했으므로, 그들의 삼족을 멸했다.

이보다 앞서 귀의한 마무가 간사한 마음을 품었다가 발각되어 주살당했다. 손권은 이 일에 대해 매우 분노했다. 주연은 조중으로 출발하려고 하면서 상소를 올려 말했다.

마무는 소인입니다. 그가 감히 은혜와 양육을 저버렸습니다. 신은 오늘 천자의 권위를 받들어 전투에서 승리를 얻을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신이 앞서 한 말을 기억하셨다가 신의 이후 행동의 결과를 꾸짖으십시오.

손권은 이 당시 주연의 상소를 공개하지 않았다.

246년, 주연은 재차 조중으로 출정하였다. 위나라 장수 이흥 등은 주연이 깊숙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보병과 기병 7천 명을 이끌고 주연의 퇴로를 끊었다. 주연은 밤에 출격하여 이홍 등을 반격했다. 주연의 군대는 승리하고 돌아왔다.

오주전에 따르면 246년 봄 2월, 거기장군 주연이 위나라의 조중을 정벌하여 천여 명의 머리를 베고 포로를 잡았다.

주연이 승리를 알려오자 신하들은 천자에게 경하했다. 손권은 곧 주연을 베풀고 음악을 연주하였으며, 주연의 상소를 꺼내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이 이전에 일찍이 표를 올렸었는데, 나는 그의 말대로 실현시키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했소. 오늘 과연 그의 말과 같이 되었으니, 그는 일을 관찰하는 데 밝다고 할 수 있소.

비비디바비디부 그는 사자를 파견하여 주연을 좌대사마 우군사로 임명했다.

2.13 죽음

주연의 신장은 7척도 못되었지만, 일의 옳고 그름에 대한 태도가 분명했으며, 생활에서는 수양을 하여 청결했으며, 아름답게 꾸미는 일에 있어서는 오직 군대의 기계(器械)에만 실시했고 그 나머지는 모두 질박하게했다. 그는 하루종일 국가의 대사를 걱정했고, 언제나 전쟁터에 있었다. 그가 긴급한 사태에 직면했을 때도 대담하고 안정되었던 점은 특히 다른 사람들을 뛰어넘는 부분이다. 비록 세상에 일이 없을지라도 그가 매일 아침 저녁으로 엄격한 규정에 따라 태고(太鼓)를 울리면, 그의 진영에 있는 병사들은 모두 행장을 꾸려 대오에 섰다. 주연은 이 방법으로 적군을 놀려 그들이 어떻게 방비해야 할지 모르게 했기 때문에 출전할 때마다 공로를 세웠다.

제갈근의 아들 제갈융과 보즐의 아들 보협은 비록 각기 부친의 직무를 계승했지만, 손권은 특별히 주연으로 하여금 군사 업무를 총괄하도록 하고 대독(大督)으로 삼았다. 육손 또한 죽게 되자, 공신이나 명장들 가운데 생존하고 있는 자는 주연 뿐이었으므로 그와 견줄 만큼 융성한 대우를 받는 자는 없었다.

주연은 2년 간 병상에 누워 있었고, 이후로 점점 악화됐다. 손권은 낮에는 그 때문에 먹는 것이 줄었고, 밤에는 그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조정의 사자와 의약, 음식물을 그에게 보내면서 길에서 연락이 끊이지 않게 했다. 주연은 매번 사자를 보내 질병 상태를 보고했고, 손권은 그 사자를 불러 만나서 직접 질문을 했다. 사자가 궁궐로 들어오면 술과 음식을 내렸고, 궁궐을 나가면 삼베와 비단을 보냈다. 창업 공신으로 질병이 있을 때, 손권이 마음을 기울인 점에 있어서는 여몽과 능통에 대한 것이 가장 무거웠고, 주연은 그 다음이었다.

오주전에 따르면 248년 봄 정월, 주연이 강릉에 성벽을 쌓았다. 병상에 있으면서도 직무는 수행했다는 것이 충공깽.

주연은 향년 68세, 249년에 세상을 떠났다. 손권은 상복을 입고 장례식을 거행했으며, 그를 위해 매우 슬퍼했다. 아들 주적이 뒤를 이었다.

3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손권이 군주가 되었을 때에 부하가 된 무장의 한 사람으로 이름이 언급된다. 딱히 손권이랑 동문이었다던가 아니면 친분이 있다던가 하는 언급은 안 나온다.

관우를 잡을 때의 활약은 정사와 비슷하게 나와서 반장과 공적을 세운다.

이릉대전에서는 손환과 함께 영격의 임무를 맡아 수군을 이끌고 수로를 지켰다. 그러나 손환이 육지에서 대패했기 때문에 수상에 못박히고 말았고 원군을 요구할 수도 없게 되었다. 육손이 유비를 패주시키자 제장과 함께 유비군을 추격했는데 다른 모든 장수들이 촉군을 상대로 전공을 올릴 때 혼자 유비의 원군으로 온 조운한테 죽는다. 그러니까 정사에서는 249년에 죽는 사람인데 222년에 죽여버렸다. 심지어 정사에선 조운보다 20년을 더 살았다.

또한 연의에서는 주연을 이미 죽였기 때문에 강릉 전투를 넘어가기 위해 주환과 조인의 전투에 초점을 돌리고 제갈근과 여범이 싸운 일만 기록하고 강릉 쪽에 간 병력은 없는 것으로 했다.

그것도 보통 장군이면 모를까 한 나라의 대도독을 죽여서 그 뒤에 오나라의 묘사는 안습. 그의 활동이 오나라의 큰 움직임을 모두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222년부터 249년까지 주연이 한 행동은 전부 말소되어 오나라의 분량은 그 뒤로 엄청난 양이 짤리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이 "제갈량강유가 북벌할 동안 오나라는 뭐했나염? 합비만 공격하고 다른데는 아예 공격도 안 한 이유가 뭔가요?"라는 질문이 나오게 하는 주요 원인.

4 평가

주연을 후임으로 추천한 여몽의 식견은 과연 맞아 떨어져 주연의 일생동안 강릉은 단 한 번도 함락당하지 않았다. 강하를 30년이나 지켜낸 문빙과 함께 최고의 철벽 수문장 중 한명. 후에 아들 주적도 강릉성을 방위하는 역할을 맡는다.

정사에서의 주연의 위치로 보면 조운과 비교가 안 될 정도다. 나라에서 맡았던 지위, 공적, 군을 이끌었던 경험 등 조운에게 전혀 밀리는 점이 없는 명장이다. 오히려 군권 1인자의 보좌를 주로 맡았던 조운에 비해 본인이 군권의 1인자를 맡았던 주연이 이런 비교를 당하는 것이 굴욕일 것이다. 거기에 연의로 평가가 부풀려진 조운과는 달리 오히려 정사에서 활약상이 더 쩔어주는 인물이다. 오죽했으면 나관중이 연의에서 주연을 일찍 조운한테 퇴장시킨거 때문에 오나라가 20여년 분량을 날려 먹었을까(...). 거기에다가 그의 묘는 삼국시대 당대의 역사 유물로서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가지니 현대에 와서도 매우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기억되는 사람이 되었다.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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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연의 묘

1984년, 중국 우저에서 주연의 묘가 발굴되었다. 이미 도굴당한 상황이지만 140점의 자료가 남아있는 벽돌 묘지가 발굴돼서 삼국시대의 생활상에 대해 중요한 정보를 여러가지 제공하게 되었다. 주연의 묘에서 나온 유물들은 지극히 드문 삼국시대의 회화, 조형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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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란문화공원의 주연의 동상

1986년에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주위가 정비되고 주연로, 주연가족묘박물관, 주연문화공원이 생기는 등의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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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연의 명함

그의 무덤에서 나온 명함은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 중 가장 오래된 명함이고 그의 무덤에서 발견된 나무 물품들 또한 가장 오래된 칠된 목공예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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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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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초상화

손권이 술자리를 여는 모습을 그린 그림도 있다. 재미있는 점은 무덤에서 발굴된 회화 중에서 황제나 황후 등을 묘사하는 그림이 있는데 단순한 이미지일 수도 있어서 확실하지는 않으나 주연 생전의 황제는 손권 뿐이었으므로 이것은 손권을 묘사한 당대의 그림일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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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연의 칠기

검소했다는 그의 평가를 볼 때 그의 무덤에 들어있는 칠기 등의 고가의 물품은 손권이 하사한 것으로 추측된다. 승상을 묘사한 칠기도 나타나서 이것이 육손을 묘사한 그림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여담이지만 그의 묘가 저 물건너 백제의 첫 도읍인 풍납토성의 건축연대에 대한 논란에도 기여하고 있다(...).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전문도기 중 가장 빠른 연대의 것이 바로 주연의 묘에서 나온 것이라 풍납토성의 건축연대는 주연이 살아있을 때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기는 힘들다는 것. 거기다가 이 곳에서는 주연과 그 부인의 묘가 같은 곳에 있는 것, 아치형을 사용하고 있는 것, 진묘수의 여부 등이 무령왕릉과 비슷해서 자주 비교되곤 한다.

6 미디어 믹스

6.1 삼국지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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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0,11
삼국지 12,13

코에이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연의 반영으로 손꼽히는 저평가 무장이다. 초기작부터 연의처럼 제갈량의 북벌에서는 죽었지만. 8편부터는 정사가 반영되어 제갈량의 북벌이 끝나고 이궁의 변이 시작할 때의 249년으로 죽도록 나이가 수정이 되었다. 일러스트도 저평가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청렴하기로 정사에 기록되어 있는 무장이 탐욕스럽고 간신배 같은 일러스트로 나왔기 때문이다.

삼국지 3에서는 육지 70/수지 70/무력 75/지력 35/정치 27/매력 60이다. 턱걸이로 장군이 될 수는 있지만 지력과 정치력은 아예 형편없다. 정사가 널리 알려지지 않은 시대인지라 어쩔 수 없는 능력치이다. 게다가 손권과 동갑인데 출생년도가 182년이 아니라 174년으로 손책보다 1살 많다. 후속작부터 나이가 수정이 되었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82/무력 70/지력 65/정치력 62로 나름대로 준수하다. 분투, 연사, 투함, 정란 등 알짜배기 병법들을 보유하고 있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86/무력 66/지력 71/정치력 60/매력 79에 총 능력치 합은 362로 50위 안에 아깝게 못드는 정도. 특기는 무려 12개나 된다. 삼국지 10은 통솔만이 부대의 전투력에 영향을 미치는 데다가 주연이 전투 관련 특기를 잔뜩 지니고 있기 때문에 전투에 관해서는 상당히 좋은 무장이다. 통솔만 놓고보면 그 장비황충과 동급이다. 다만 부대의 행동력에 영향을 미치는 무력과 지력은 평범한 수준이기 때문에 군사 특기의 지휘를 받을 수 없는 총대장보다는 부장으로 출전시키는 편이 더 낫다.

삼국지 11에서는 통솔력 79/무력 70/지력 71/정치력 60/매력 75로 무력이 올랐지만 통솔이 다시 79로 하향을 먹는 등, 총합이 354로 줄어버렸다. 게다가 특기마저 수상전 외에는 잉여인 수장이라서 안습.

삼국지 12의 전법은 기군신속. 하지만 오나라는 기병이 매우 적어서 안습하다.

6.2 삼국전투기

주연(삼국전투기) 문서 참조.

6.3 진삼국무쌍 시리즈

주연(진삼국무쌍) 문서 참조.

6.4 삼국지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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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이름은 손오의 역사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삼국지대전에서도 등장한다. 다행히 몰년을 222년이라고 적지 않고 249년이라고 기재되었다.

6.5 영걸전 시리즈

삼국지 영걸전에서는 문빙과 일러를 공유하며 맥 전투와 이릉 전투에 등장한다. 다행히 이릉에서 조운과의 일기토가 없다. 그래봤자 퇴각시키면 사망 처리.

삼국지 공명전에서도 등장한다.

6.6 이문열 평역 삼국지

이문열이 정사에 대해 설명하면서 "사실 반장과 마충, 미방 등은 죽지 않고 잘 먹고 잘 살았어요."라는 문구가 있지만 여기에서조차 주연은 빠져있다.
  1. 주연은 주치의 양자가 되어 성이 주씨로 바뀌는데 이후 주치는 아들 주재, 주기, 주위, 주만세 등 아들을 줄줄이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