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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개관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책 제목
진실로 백성을 해치는 것이 있다면 공자가 다시 살아나더라도 용서하지 않겠다.- 흥선대원군
공자는 정치가들을 찾아다니다가 실패하자 결국 도덕의 교주가 되었다. 그가 스승 되길 좋아하고 스승을 자처했던 것은 거만하고 천박한 인격에서 비롯된 것이다. 공자는 태평할 때 세상에 나오고 난세에 숨는 처세의 대가였고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였다. 가장 교활하며 가장 실리적이며, 가장 세속적이며 무책임한 정신의 소유자 공자가, 수천 년을 이어 온 중화민족의 성인이자 모범이라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류샤오보, 저작 '류샤오보 중국을 말하다' 中
이 문서에서는 흔히 한국에서 '유교의 전통에 의해서 형성된 문화'라고 간주되는 것 중 실제로는 유교의 변질에 더 가까운 것들과 실은 다른 요인에서 기인하나, 흔히 '유교의 폐단'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서술한다. 변태 유교라고도 한다. 지금으로선 당장에 반드시 없어져야 하는 문화다. 실제로 유교적 전통인 부분도 있지만, 적지 않은 수가 본래 공자의 가르침[1]에서 변질된 양상이고, 또 적지 않은 수는 세도정치 - 외세 침탈 - 일제강점기 - 한국전쟁 - 독재 정권의 암흑기라는 5단 콤보에 의해 세간의 인식이 더 악화되고 현재 유교가 가루가 되도록 까이는 것에서 기인하는 바도 있다. 물론 세도 정치, 외세 침탈, 일제 강점기, 한국 전쟁, 독재 정권을 거치면서 유교가 파시즘, 군국주의, 전체주의, 똥군기 등이랑 결합하면서 왜곡된 채 현재 우리가 알고있는 유교 인식이 생겼다고 해야 옳겠다.
유교논리는 지배층이 받아들이기 시작한 이래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한무제 시절 동중서는 천인감응사상[2]을 주창하여 유교적인 논리를 지배층의 권력 기반을 공고히 만드는 데 사용한다. 이는 유교만 그러한 것이 아니고 정치 권력과 결합한 사상 및 종교가 지닌 모든 문제점이다. 로마 제국만 하더라도 예수 추종자들의 사상을 부정하고 탄압하다가 훗날 오히려 자신들의 지배 이념으로 삼아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였고, 중세에는 왕권신수설을 통해 한층 더 권력기반을 강화하는데 사용하였다.
물론 역사적인 문제, 권력자의 일방적인 이용[3] 등의 요인이 실제로 있었으며, 또한 유교 교리가 변질되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시대에 따라 사상 역시 변천하는 것은 당연하다. 맹자의 민본사상 등 현대적으로 좋은 사례만을 취사선택하는 것은 우습지만, 또 옛날 사람들이 옛날 삶의 방식에 따라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했던 정책이나 가르침을 두고 그들의 업보라고 논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일례로 유교 종단 측에서는 자체 집계 통계로 신자가 1000만 명에 달한다고 터무니없는 주장거짓말하고 있으나, 실제 인구 센서스에서 실시하는 종교인 조사에는 자신이 유교를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10만 남짓으로 나타난다. 안습.[4]
또한 종교는 사회현상이자 문화의 일부분으로서 공동체 내부에서 지속적인 구성과정상에 있다. 특히 종교사회학적인 관점에서 종교는 경전으로 지칭되는 특정한 문헌기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하는 문헌기록과 관련한 해석, 교리 등을 공유하고 재생산하는 공동체의 활동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즉, 경전을 전승한 공동체가 해당하는 경전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과정과 결과 전반이 종교의 범주안에 포괄될 수 있다. 변질된 전통이라고 해서 유교가 아닌 것은 아니다. 각 시기에 이루어진 '변질'은 각 시기에 이루어진 유교의 구성과 재구성에 다름 아니다. 경전이나 그 주석에 기술된 과거의 '유교'도 유교지만, 해당 종교전승을 구성하는 공동체가 '유교'라고 생각하는 것 또한 유교이다. 종교의 변질은 단지 종교의 구성과정이 야기한 현 시점의 결과가 현재사회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기술하는 표현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서술은 몇 가지 오류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반도에서 일제 시대 이후의 영향이라고 알려진 것들에 대해 그 역시 유교의 영향하에 있음이라고 주장하기 위함인 것처럼 보인다. 왜냐면 시간상의 전후 관계를 무효로 하기 위한 진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 서술의 주요 논리 중 하나인 A라는 집단의 대부분이 B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B이다라는 서술인데 이것은 참이 될 수 없는 진술임이 너무나 당연하다. 지구는 예나 지금이나 둥글지만 많은 사람들은 지구가 둥글지 않다고 생각했다. 옛날의 많은 사람들이 지구가 둥글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옛날에는 지구가 둥글지 않았는데 지금 지구가 둥글어진 것은 아니다.
그 다음으로 이는 유교라는 종교, 사회현상이자 문화의 일부분인 종교라는 특정한 개념을 지칭하므로 다른 경우라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위의 서술에서 해당 종교전승을 구성하는 공동체라는 서술이 있는데, 한국은 유교국가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논어 한 글자도 읽어본 적이 없다. 한국은 일제시대부터 해당 종교전승을 구성하는 공동체가 아닌데 그 공동체가 유교라고 생각하는 것은 유교가 될 수 없다. 한국이라는 공동체의 대부분이 이슬람교라고 생각하는 사회현상에 대해서 이슬람교의 전문가들이 그것은 이슬람교가 아니라고 한다면 누가 옳은 것인지는 자명하다. 변질된 유교적 전통은 유교의 영향이 남아 있다고 하면 옳은 진술이지만, 변질된 유교적 전통은 당연히 유교가 아닌 것이다. 당장 유교는 서구적으로 정의된 종교조차 아니기 때문에 종교사회학으로 정의하기 힘든 범주이며, 유교의 변화나 확산은 각 학자들의 논쟁이나 저작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유교가 그 지속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순간에, 유교에 크게 영향을 받은 어떤 사회가 다른 여런 문화나 역사적 사건과 만나서 변화한 모습을 가지고 유교라고 하기는 어렵다. 2000년을 훌쩍 넘는 유교의 역사 속에서 그러한 일은 없었는데 종교사회학이라는 범주 하나로서 그와 같은 현상 역시 유교라고 단언하는 것은 무리수다.
물론 유교의 원류인 공자의 가르침만이 진실된 언행이며 다른 것은 변질된 유교이므로, 공자가 말한 것이 아닌 기타 악폐습들은 유교가 아니라는 논리를 저격하고 싶은 것은 알겠고 또 타당한 논리이다. 하지만 변질된 유교적 전통을 논하고자 한다면 최소한 현대 한국 악폐습의 유래를 명확히 밝히는 식으로 각을 좁히지 않으면 그냥 스트레스를 풀고 싶거나 허수아비를 샌드백 삼아서 두들기는 것에 불과하다. 전통적인 것처럼 보이면서 비합리적이거나 취향에 맞지 않는 사례를 겪을 때마다 유교의 악습 운운하지만 그것이 사실 유교에서 비롯된 악습이 아니라면 단순히 한 순간의 스트레스 풀이에 불과할 뿐, 진정한 문제해결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떤 악폐습의 근본 이유로 유교를 지적한다는 것은, 그 악폐습이 비롯된 유교 사상에서부터 실타래를 풀어나가면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이므로.[5] 따라서 유교 국가가 아닌 현대 한국에서 유교의 잔재로 여겨지는 악폐습들이 전통 유교의 가르침이나 실천양상과 현재의 행태가 크게 다름을 올바로 지적할 수 있다면, 현존하는 악폐습들의 존재가치는 큰 폭으로 줄어들게 될 것이다.
2 아랫사람이나 연소자를 깔보는 태도
이른바 장유유서. 유교가 상당히 까이는 요소이다. 특히나 유교를 정치에 적극적으로 도입한 한중일[6] 삼국에서는 이러한 이야기가 많이 보인다. 게다가 실제로 한중일은 집단주의 및 상명하복의 논리가 강한 편이라, 유교의 영향을 받은 나라들이 이러한 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의혹이 짙긴 하다.
그러나 유교의 초대 성현들은 직접적으로 '나라에서 가장 높은 것은 백성, 가장 낮은 것은 왕(맹자)'라거나, '신분이 낮은 사람에게서도 배울 것이 있다(공자)'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즉 초창기의 유교는 위정자들이 몸을 굽혀 백성을 섬길 것을 설파했었다. 물론 후대로 가면서 천자와 제후의 권위가 강조됨에 따라 이 또한 변질된 감이 있다.
이황과 기대승의 사단칠정 논쟁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여기에서 보면 당시 이황은 58세의 대사성이며 기대승은 갓 과거에 급제한 32살의 새내기였음에도 서로를 존중하는 가운데 치열한 철학적 논쟁을 전개했다고 되어 있다. 즉, 나이 하나만 갖고 무작정 하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성과 한음은 5살 차이였다. 또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친구를 사귈 때에도 나이를 크게 안 따져서, 아버지가 아들을 일찍 낳아 나이차가 20살 아래면 아버지의 친구가 아들과도 친구가 되는 사례도 종종 있었다.
맹자는 후에 중국에서 '혁명 사상의 근본'이라고까지 칭송했던, 당시로서는 매우 위험한 "왕이라도 잘못하면 쫓겨날 수 있다!"라는 이야기를 하기까지 했다. 실제로도 맹자는 왕을 내쫓는 데에 지대한 역할을 한 적이 있는데 맹자 때문에 쫓겨난 왕이 다름아닌 자지이다. 조선에서도 반정 때마다 같은 논리를 내세웠다. 실제로 이에 기반해 조선의 정약용은 탕론이란 저서를 집필하는데, 이걸 한자 문화권에서 유럽과는 독립적으로 사회계약설이 발전했다는 증거로 내세우는 사람도 있다.
흔히 삼강오륜(三綱五倫) 중 오륜(五倫)에 속하는 장유유서(長幼有序)의 예를 들어서 유교는 근본적으로 연소자를 깔보는 사상으로 오해하곤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장유유서를 말하기에 앞서서 가장 먼저 선행돼야 하는 것이 어른다운 행동이다. 이를 정명(正名)이라 한다. 유교의 근간이 되는 사상으로 맹자는 이를 계승하여 역성 혁명을 주창하게 된다. 즉, 장유유서를 거들먹거리며 연소자를 깔보는 순간 어른답지 못한 행동을 한 놈이니 유교적인 논리에서도 까일만한 대상이다. 그게 심지어 왕이라고 할 지라도. 유교경전들은 끊임없는 자기반성과 자기수양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타인의 자발적인 존중을 얻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권위의 형태라고 가르친다. 즉 올바른 권위란 한 사람을 자발적으로 존중하고자 하는 타인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이지 자신이 타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이용하는 것이 아니다. 조선은 신분제 사회였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신분제사회에서는 나이보다 상대방의 신분,격을 더 중요시 했다.
물론 현대의 연소자와 하급자를 깔보는 문화는 정확히는 구 일본군이 하루만 일찍 들어와도 선임으로 군림하려고 했던 것이, 구 일본군의 악습이 일본 사회와 그 식민지였던 조선 사회에 급속도로 퍼진 것이다. 하지만 해방 전후 일본은 징병제가 폐지되고 문민 정부가 세워져 군국주의의 잔재가 빠르게 사라진 반면,[7] 한국은 80년대 후반까지 군사독재가 이어졌으며 현재도 징병제를 실시하고 있어 사라지지 않았다. 상명하복의 군대문화 잔재라는 것. 물론 이것도 위로 올라가면 일본에서 변질된 유교적 전통이 우리나라로 넘어왔다고도 볼 수 있다. 특히 메이지 시대 일본은 유교적 가족국가 체제를 도입하면서 유교 가치관을 극도로 강조했었다.
3 성차별
3.1 남아선호사상
80-90년대에 만연했던 여아낙태의 주된 원인이면서 현재 2030대 남성들의 결혼대란을 만든 원흉
유교의 경전엔 "남자가 양이고 여자가 음이다"라는 섹드립 구절이 있는데, 이건 사실 남녀의 상호 간의 존중과 조화를 뜻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옛날에 성행했던 남성우월주의와 결합해서 남아선호사상을 만들었다. 어 이거 어디서 들어본 소리인데?
사실 남성우월주의는 청동기 시대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그때는 농업이 탄생하여 잉여 생산물이 나오기 시작하였지만 아직 농업 기술이 발달하지 못해 부족한 잉여 생산물을 갖고 누가 차지하냐를 다투면서 싸움에 이긴 자가 승리하면서 빈부격차가 생겼고 계급이 고착됐다. 남성은 전쟁에 나가 싸워 이기면 모든 것을 차지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대받았다. 그것이 남성우월주의의 근본이였다.
자세한 문제점에 대해서는 80-90년대의 여아낙태 문제 항목 참조.
3.2 남자는 음식을 하지 않는다
참조
'남자가 음식 하면(혹은 부엌에 출입하면) 성기가 떨어진다'로 대표되는 레퍼토리로, 현대에 제사 음식을 여자가 하는 것과 어느정도 연관되기도 한다. 상디 여자설 그러나 조선시대 궁중음식을 만드는 사람은 모두 남자인 대령숙수였으며, 오히려 궁녀들은 음식을 하지 않았다.[8] 의안대군의 아들 이교는 워낙 음식을 잘 만들기로 유명해서 중국 사신이 올 때마다 오로지 대접할 음식을 만들기 위해 상경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홍길동전의 작가인 허균, 율곡 이이, 정약용, 서거정, 박지원, 박제가 등 이름난 사대부들도 스스럼없이 음식을 만들고 즐겼다는 것이 기록에 남아있다. 그것도 본인들이 직접 남겼다. 연암 박지원은 직접 밥을 짓고 반찬을 해서 제자들에게 먹였으며, 환갑이 넘어서도 장을 담그고 반찬을 만들어 자식들에게 전했다. 율곡 이이는 직접 온갖 나물을 캐서 음식을 만들기도 했으며, 정약용은 직접 장을 담그고 음식을 했을 뿐만 아니라 참외 농사도 지었다. 조선 후기에 베이징에 갔다가 카스테라[9]를 맛본 학자들이 직접 만들어봤지만 모두 실패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박제가는 대식가이면서 자신이 직접 음식을 만드는 것을 즐기기도 했는데, 친한 사이였던 정약용에게 자신의 개고기 조리법을 알려주기도 했고 그걸 다시 정약용이 형 정약전에게 알려주는 편지가 남아있다. 이는 일부 유별난 양반들의 행적인 것이 아닌게, 오히려 아무렇지 않은 것이기에 사대부인 이들이 직접 나물을 캐거나 농사를 짓고 음식을 했다는 것이다.
3.3 육아는 여자들의 전유물이다
조선시대 사대부였던 이문건의 양아록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여자들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조선시대에는 부모들이 자식에게 과한 기대치를 내걸며 부담시킬 것을 염려해서 교육은 주로 조부모가 맡았다. 이미 자식들을 키운 경험이 있는 데다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쌓인 지혜를 손자들에게 전수하고 가르치는 것이다. 조선시대 풍속화를 보면 갓 쓴 선비나 남자들이 아이를 업고 있는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남자도 육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3.4 제사 때 며느리들의 노비화
조선시대의 제사는 지금처럼 과한 허례허식이 아니라 음식을 가정 형편에 맞게 올렸으며, 평소 먹던 반찬을 그대로 올려도 문제되지 않았다. 또한 우환이 있으면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형편이 안 좋은데 상다리 부러지게 제사상 차리거나 우환 있는데 무리해서 제사 지내는 꼴을 조상님들이 보고 싶어 하실까 제사의 의의 자체가 후손으로서 조상께 예를 다하는 것이기에 그 후손인 남자들이 직접 음식을 하고 제사상을 차렸다. 그 집안 후손이 아닌 며느리들은 원래 시가의 제사에 참여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전까지는 딸도 제사에 참여했다. 시집간 누나가 자신의 집에서 제사상 차리고 남동생이 누나의 집으로 방문하여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3.5 남자는 상에서, 여자는 바닥에서 밥을 먹는 것
지금은 보기 힘든 광경이지만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원래 전통적으로 밥을 먹을 때든 회의를 할 때든 독상을 받았다. 앞에 상이 놓여야 하는 상황이면 일단 독상을 받았다. 사람이 많이 몰리는 연회에서조차 어지간해선 독상이었다. 겸상 자체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문화다. 전통적으로 괜히 소반같이 작은 상을 많이 사용한 것이 아니다. 큰 상을 많이 펼쳐놓기는 힘든 데다 어차피 혼자 받을 상인데 큰 것을 사용하면 여러모로 비효율적이니 자연스레 작은 상을 쓴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독상에서 겸상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즉 독상을 받는다는 인식이 남아있으나 신분제가 사라져 너나나나 할 것 없이 양반을 자청하게 된데다 전쟁으로 황폐하고 가난하던 시절에 남성우월주의와 결합해서 생겨난 문화다. 집안의 웃어른인 남자들(할아버지, 아버지)만 독상을 받고 나머지 식구들은 바닥에서 먹거나 남자들은 상에서, 여자들은 바닥에서 먹었다.
4 사농공상
유교적인 관점에서는 상인과 기술자를 유학자-관료나 농민보다 천하게[10] 여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기저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존재한다.
우선 사농공상(士農工商)에서 사(士)는 국가 행정을 유지하는 기반이 되는 관료와 공권력을 실행할 수 있는 군대를 말한다. 이들이 없으면 국가라는 형태를 유지할 수 없으니 최우선적으로 중요시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음으로 농민은 식량을 생산하는 주체이다. 먹을 것이 넘쳐나는 지금의 대한민국도 식량 안보와 관련해서 골머리를 앓는데, 화학비료도 없고 모내기도 없고 콤바인도 없었던 과거라면 어땠겠는가? 반면에 공과 상은 사와 농이 안정된 뒤에야 원활하게 기능하는 계층이다. 그러다 보니 유교적인 관점에서 자연스레 공과 상의 우선 순위가 낮아진 것이다. 하지만 사실 이 주장은 어느 정도 맞는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 세계 베스트셀러 2위인 에덤 스미스의 국부론에서는 국가의 부의 가장 중요한 원인을 노동으로 잡는데 이는 프랑스의 유명 경제학자의 국가 부의 원천의 농업의 상위 호환으로 농업과 공업에 사용되는 모든 행위 즉 노동이 국가의 부를 측정하는 계기가 될정도로 경제학상으로 볼 때 사농공상은 그 경제학상으로 짜여진 초창기버전 신분제로 보는 것이 맞는다.
다만 유교 문화에서 상인을 최하위 계층으로 놓는 것은 "본인이 직접 생산 활동은 하지 않으면서, 남이 만들어놓은 물건을 그저 옮기기만 하면서 돈을 받는다" 라는 상업 자체의 성격을 가치의 도둑질 비슷한 것으로 보면서 천시했음이 컸다.[11][12] 그랬기 때문에 일단 뭔가를 자기 손으로 스스로 만들기는 하는 공업이 상업보다 더 위에 놓인 것이다.
이것과 비교하면 재화의 생산 못지 않게 재화의 분배도 훨씬 더 중요하다고 가르치는 현대 경제학의 관점이 훨씬 더 합당하게 보이며 사리에도 들어맞아 보이며 유교의 비판점으로도 보이지만, 사실 현대 경제학과 현대 문명의 발달을 막연하게 동치로 놓은 후 유교 이론을 엄밀하게 판별하지 못해 생긴 오류다. 현대 경제학이 재화의 분배를 훨씬 더 중요하다고 가르치건 어쩌건 현대 기업은 물론, 상인은 현대와 고대를 막론하고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예컨대 창렬, 혜자 같은 2010년대 초반의 인터넷 유행어나, 질소과자로 대표될 수 있는 수출품이 오히려 더 싼데 똑같은 제품의 국내 가격은 더 비싼 소비자 기만이 그렇다. 상인은 그 속성상 본질적으로 절대 분배를 중요시하지 않으며, 최대 이윤을 중시한다.현대로 들어와서는 최대 효율이나 유연성과 같은 가치로 조금 말이 바뀌었을 뿐이지 본질적으로 이 말들도 최대 이윤을 가리키고 있다.
상인의 이와 같은, 사회 전체를 바라보지 않고 자기 자신 혹은 내부 집단의 최대 이윤을 중요시하는 특징은 유교뿐 아니라 서양에서도 널리 경계되었다. 그리스 정치철학을 거쳐 기독교 문화의 중세에 이르기까지 서양 역시 상업을 통제하려 열심이었다. 상업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금융 분야는 서양에서도 유대인이나 담당하는, 일종의 천역이었으며[13] 유대인도 행정력이 필요로 할 때마다 돈, 기술을 위해 쥐어짜이거나 심하면 추방당하거나 죽으며 고초를 겪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서양에서 상공업이 꽃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특수한 역사적 배경, 봉건 영주와 국가와 자유민과 자유도시가 서로 통합되고 발전되어 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미묘한 알력, 더불어 구교와 신교 간의 알력이 역사적으로 진행되어가며 얻어진 결과에 가깝다. 토지의 생산력이 안정된 이후 상공업에 통제와 제재의 욕구를 드러낸 것은 서양도 동일하나[14] 상공업 세력은 네덜란드나 벨기에 등지로 피신할 수 있었고, 또 이들 국가는 좁은 국토로 인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국력의 한계를 극복하고 자유와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번영이 필요했으며, 상공업의 자유로운 발전은 국토가 좁고 해안을 넓게 끼고 있어 도시와 무역 위주로 행정력을 집중해 극대의 효율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들 국가에 잘 들어맞았다. 또 여기에 신대륙으로부터 넘어오는 막대한 재화가 제동장치를 무력화시켰으며 신교의 발흥과 인문철학의 발달이 도덕적 정당성을 가져다 주었다. 결국 서양의 상공업 세력은 이렇게 벌어들인 시간을 이용해 막대한 번영을 유럽 세계 전체에 과시할 수 있었고 그러자 서양 각국은 풍성한 열매로 맺힌 이 달콤한 번영을 굳이 거부할 이유도 없었으며, 오히려 이 달콤함을 거부했다간 끊임없는 거듭되는 쟁패에서 뒤처질 위험성이 있었다. 인문철학 역시 이 번영을 등에 업고 비합리적인 도덕적 낙인을 끈질기게 제거해 갔으며, 날로 번창하는 식민지 사업과 끊임없는 각국의 쟁패는 서양 각국의 정력이 내부통제에만 몰두하기보다 외부로도 충분히 투사되고, 효율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재화의 분배는 본래가 국가, 행정력의 직무이며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이 상인의 역할로 넘어가게 된 것은 서양에서도 아담 스미스로 대표될 수 있는 고전경제학의 대두, 그리고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희대의 슬로건이 상인과 유산계급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공자왈 맹자왈처럼 가가호호[15] 울려퍼진 덕분이다. 현대 경제학에서 재화의 분배가 재화의 생산을 넘어선 것은, 현대는 오히려 생산력이 지나치면 지나치지 모자라지는 않는다는 평을 받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간혹, 이 사농공상의 공상 천대문화 때문에 동양에서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태동이 불가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그렇다면 상업을 제일직업으로 삼고, 아예 중개무역으로 존재하던 중동에서는 어째서 산업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나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결론만 말한다면 중동은 상업이 아니라 공업을 천시했기 때문이다. 산업혁명이 실제로는 공업의 발달에서 초래되었다는 것을 생각하자.[16]- ↑ 하지만 주자가 바꿔놓은 게 더 많다
- ↑ 서양의 왕권신수설과 비슷한 면이 있다.
- ↑ 과거 중국의 권력층의 유교 장려에 대해 '유가의 탈을 쓴 법가'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사실 공자의 '정명사상'만 봐도 '위에서 똑바로 안 하면 그것도 당연히 지탄받아야 한다'는 생각이기에 권력층에서 좋아할 내용은 아니다. 게다가 맹자는 왕조 시대를 기준으로 할 때 상당히 급진적인 민본사상을 주창하는 구절이 많다. 그래서 철저한 황제 독재를 추진한 명의 주원장은 아예 맹자의 3할 가량을 덜어낸 맹자절문을 만들어 과거 교재로 쓰게 했을 정도.
- ↑ 일단 종교계에서 자체적으로 밝히는 신도 수들은 기본적으로는 믿을 게 못 된다. 기본적으로 모든 신도를 합치면 대한민국의 인구로 파악되는 수보다 많은 사람이 한국에 살아야 한다. 즉 신뢰성이 바닥이라는 것. 이는 각 교회, 절, 신전 등에 복수 등록된 데이터까지 한꺼번에 다 묶어서 발표하거나 실제 종교를 믿지 않는데도 등록이 돼 있거나 이미 이탈한 인원까지 넣어서 계산한다든가, 심지어 종파가 다른 경우도 같은 카테고리로 묶어서 발표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군대 훈련소 등지에서 종교 활동 때 등록된 인원을 그대로 넣어 발표하는 것을 생각하보면 이해가 빠르다.
종교활동마다 나오는 간식을 찾아 그랜드 슬램을 찍는 훈련병들은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포교하는 입장에서는 자신의 교단이 크면 클수록 유리하다고 생각하니까. 단, 유교가 종교인가 아닌가 자체가 떡밥인 상태의 논쟁거리다. 한국의 유림 내부에서도 종교인지 아닌지 자체로 정체성 논란이 벌어지며 성균관을 종교법인으로 해야하는지 내부 논란이 치열한 정도로 유림 인사들 중에도 종교를 물으면 유교 대신 무교나 다른 종교를 대는 경우도 있다. - ↑ 예컨대 일본군에서 비롯된 똥군기 역시 유교에서 비롯된 악습이라고 주장하는 논리는 일본이 유교국가라고 생각한다면 일견 타당하다. 하지만 일본이 유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지만 진정한 유교국가였는지는 의문스러운 사항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선생님이나 부모님한테 귀에 못이 박이도록 교육받는다고 해도 그대로 하라는 법은 없다. 미국에서 10대 백인 청소년이 마약을 했다면 부모나 학교 교육의 잘못일 수가 없으며, 만약 잘못이라면 교육의 어떤 부분이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명확히 밝혀야 설득력이 생긴다. 그냥 교육이 잘못이라는 말 한 마디로 끝낼 거면 애초에 지적을 할 의미조차도 없다.
- ↑ 일본의 경우 에도시대 전후.
- ↑ 다만 일본 또한 일상생활 속에서 상명하복 문화가 사라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국과 함께 조직에서 상명하복 문화가 강한 국가 중 하나이다, 표면적인 사회체계에 국한시켜서 보면 될것이다
- ↑ 궁녀들의 여러 보직 중 수랏간이 하급 보직에 속하는 것을 생각해보자.
- ↑ 가수저라 혹은 설고라고 한다.
- ↑ 공자의 수많은 제자 가운데 자공이 상인 출신이긴 했지만 어쨌든 그 본인도 상인의 급을 그리 높게 여기진 않았다.
- ↑ 개그영화기는 하지만 전우치(영화)에서 현대사회에 깨어난 전우치와 3도사의 대화에서 이런 사상이 드러난다. 왕이 없는데 누가 백성을 먹여살리냐는 전우치의 질문에 막내 도사는 "기업... 그러니까 상인들이 먹여살립니다." 라고 대답했고, 이때 전우치가 "상인들은 자기들 이익만 챙기는 족속들인데 그런 자들이 백성들을 먹여 살린다니 말세가 다 왔구나..." 라는 식으로 독백한다.
- ↑ 흥미롭지만 서양에도, 극히 적지만, 이런 상업은 도둑질이라는 관점이 은근히 있었다, Clarence Darrow, "Crime and Criminals: Address to the prsoners in the cook county jail" 이 대표적인 예
- ↑ 공업 분야도 유대인의 비중이 상당히 높다.
- ↑ 스페인, 프랑스 등.
- ↑ 영국에서. 그리고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건 표어는 아담 스미스는 지나가듯이 언급한 정도인데, 이 슬로건의 완벽한 함축성과, 이 표어의 은유에 내재하는 세계관이 지닌 미적인 아름다움, 그리고 이 제창이 자신들에게 가져다 줄 이로움에 감명을 받은 유산계급들이 입이 닳듯이 언급했다.
- ↑ 산업혁명에 대해서 산업혁명은 문명의 발달이나 어떠한 진흥책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촉발되는 종류가 아니라, 그냥 우연적으로 그 시대 영국에서 발생한 사건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