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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漢久
1945년 12월 12일 ~
1 개요
한국의 관료, 경제학자, X맨 정치인이다. 종교는 가톨릭이며 세례명은 토마스 데 아퀴노이다.
2 생애
2.1 정계 입문전
1945년 경상북도 경주군 감포읍에서 태어났다. 경북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영학과를 졸업하였다. 대학 재학 중 공인회계사시험에 합격했고 이후 행정고시도 합격하여 재경직 공무원으로 근무하였다.
그러나 1980년 전두환의 신군부가 집권할 때 해직되었다. 이에 대해 본인은 손윗동서인 김용환 전 재무부(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김종필 쪽 사람이라서 해직에 영향을 미친 것 같다고 회고하였다. 이 때의 일로 김종인 현 더불어민주당 대표와는 악연이 있다. 이후 보스턴 대학교, 캔자스 주립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박사 과정을 졸업하였다. 그리고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과 인연을 맺어서 1989년부터 1999년까지 대우경제연구소에 몸담았다. 1998년부터 2000년 초까지 대우경제연구소 대표이사를 역임하였다.[1] 그리고 대우는...
2.2 정계 생활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대구광역시 수성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장을 역임하였다. 2009년 국회 윤리특별위원장을 역임하였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지역주의 타파를 내걸고 출마한 민주통합당 김부겸 후보에게 신승하였다. 같은 해부터 2013년까지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역임하였다.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불출마를 선언했고[2], 친박계의 추천으로 새누리당 공천관리위원장에 부임했다. 공천 관련 규칙을 둘러싸고 우선추천지역 제도의 적용을 내세워 상향식 공천제도를 강조해온 비박계 김무성 당시 대표와 대립각을 세웠다. 이때 당 대표를 무시하는듯한 독선적인 언행과 직설화법으로 말이 많았는데, 결국 비박 학살 친박 공천을 주도해 비박계 유승민, 이재오 의원 등을 날린다. 물론 더 깊게 파고들면 이때 김무성 대표가 옥새파동을 벌이고 무공천 지역이 되는 등 스토리가 눈물겹지만 널리 알려진 이야기니 패스.(...)
그리고 이한구를 비롯한 이러한 친박들의 독선적인 행태가 결과적으로 대중들에게 밉보였는지, 2016년 20대 총선에서 야권분열이란 절호의 찬스에도 불구하고 새누리당은 대패를 당하고 만다. 그리고 이한구는 다수의 정치평론가들에게 새누리당 참패 1등 공신으로 지목당했다.(...) 뒤에는 그분이 계시고 선거 전만 해도 총리 자리가 내정되었니 어쩌니 세간의 말들이 많았지만 선거에서 참패당하며 그런 말도 쏙 들어간 상황. 다만 애초에 이한구 본인이 선거 불출마를 밝힌 상황이었고, 이미 나이도 2016년 기준 72세의 고령인지라 사실상 정계은퇴를 밟는 상황이었기에 자신을 총알받이로 해서 친박계가 공천을 연출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총선 후 새누리당 전국위원회 위원장 자리에서 사퇴한 후 그는 "유승민 의원이 명예롭게 물러날 수 있도록 불출마선언 등을 할 시간을 주며 기다렸다"며 "유 의원이 왜 끝까지 무소속 출마를 고집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모르겠다"고 말했다가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또 "만일 그때 유 의원이 결단을 내렸다면 정부도, 당도, 자신도 좋았을텐데"라고 말했다. 그리고 공천 파동이 발생한 것에 대해선 다른 위원이 말을 잘못한 것 같다며 공천 당시 X맨 의혹에 반박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