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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951년 9월 20일 |
출생지 | 대한민국 경상남도 부산시 용당동 |
본관 | 김해 김씨 삼현파[1] |
학력 | 한양대학교 경영학 학사 |
정당 | 새누리당 |
지역구 | 부산 중구·영도구 |
의원 선수 | 6 |
의원 대수 | 15, 16, 17, 18, 19, 20 |
종교 | 불교 |
가족 | 부인과 1남 2녀 |
경력 | 민주화추진협의회 창립참여 前 문민정부 청와대 민정비서관, 사정 비서관, 내무부 차관 제 15,16,17,18,19,20대 국회의원(6선) 前 한나라당 사무총장, 최고위원, 원내대표, 비상대책위원장 前 민주화추진협의회 회장 前 제18대 대통령 선거 새누리당 총괄선대본부장 前 새누리당 대표최고위원 |
별명 | 무성대장(무대), 킹무성, 무쫄리니 |
공식 사이트 | 홈페이지,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 블로그 |
목차
1 개요
제 20대 부산광역시 중구·영도구 국회의원이자 새누리당의 전직 대표 최고위원이며,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차기 대선 주자로 거론되는 정치인.#
다만 2016년 20대 총선 참패 이후 대선 주자 지지율이 많이 떨어진 상태다.
2 생애(정계 입문 전까지)
'전남방직주식회사'의 창업주인 친일파 김용주[2]의 아들로, 부산에서 태어났다.
부산에서 경남중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하여 서울의 중동고등학교를 나와 한양대학교 경영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26세에 (주)동해제강이라는 회사의 상무가 되었고, 그리고 32세에 (주)삼동산업이라는 회사의 사장으로 일했다. 병역은 방위병 출신이라고 한다.
1985년 민주화추진협의회로 본격적인 정계 입문 전까지는 상술한 동해제강과 삼동산업의 경영인으로서 재계에 있었다.
이렇게 젊은 나이에 회사의 상무와 사장으로 잘 나가는 경영인이 된 이유는 일각에서는 흠좀무한 집안이라서 그런 것 같다.
일단 아버지가 (논쟁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친일 행위를 통해 많은 부를 쌓았던 기업가였고, 어머니도 조선일보 방상훈 회장의 고모 되는 故 방연숙 씨다.
즉, 김무성 전 대표는 조선일보 방상훈 회장과 외사촌지간이다. 또한 김무성 전 대표는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의 외삼촌 되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김 대표의 누나인 김문희 용문학원 이사장이 현정은 회장의 생모다.
부인 최양옥 씨는 이승만 대통령의 비서관과 자유당 정권 공보처장, 이후 박정희 대통령 시절 3선 국회의원을 했던 최치환 씨의 딸이다.
슬하에 1남 2녀를 두고 있는데, 아들은 배우 고윤(본명 : 김종민) 씨다. 드라마 아이리스 2로 데뷔했고 영화 국제시장에서 단역으로 출연한 바 있으며 영화 '오늘의 연애'에서 주인공 준수(이승기)의 절친인 재중 역을 맡기도 했다. KBS 드라마 오늘부터 사랑해에서 천재 바리스타인 정윤호 역을 맡기도 했고 꾸준히 여러 드라마에 조연으로서 활동해오고 있다.
그리고 차녀인 김현경 씨는 수원대학교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었으나 너무 젊은 나이에 교편을 잡았다는 것 때문에 아버지의 입김이 분 거 아니냐는 뒷말이 나왔었다가 남편이 여러 마약 전과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집행유예로 풀려난 사실이 드러나면서 교직을 떠난 걸로 알려졌다.
신고한 재산 내역을 보면, 김무성 전 대표의 재산 규모는 현금과 부동산 등을 모두 합쳐 137억 5600만 원이라고 한다.#
3 정치 활동
역대 선거 벽보 |
흔히 1980년대 민주화추진협의회로 처음 정치에 발을 들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보다 앞서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신민당 후보로 경상북도 포항시-영일군-울릉군-영천군 선거구에 출마하려고 공천을 신청한 적이 있었다. 자신이 경영했던 동해제강이 포항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철승계인 조규창에 밀려 공천 탈락하였다.
6월 항쟁 당시 백골단의 습격을 받은 김영삼을 이끌고 나가는 김무성 | 김영삼의 선거 유세 중 태극기를 흔드는 |
이후 전두환 정권 시절에 김영삼이 이끌던 상도동계로[3]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하였고 1985년 민주화추진협의회에 참여하였다.
정계 입문 이후에는 대체로 조직이나 정당 내 실무를 담당하는 정치인으로 커리어를 쌓았다. 또한 유력한 기업가 집안의 자제인지라 주로 상도동계의 자금줄 역할을 하였다. 통일민주당이 창당되자 총무국장으로 당사를 마련해줘 김영삼 총재의 신임을 받기 시작했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때도 김영삼 후보의 재정을 관리하는 선거대책위원회 재정국장을 맡았다. 1990년 3당 합당에 참여하여 민주자유당에 합류하였으며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민주자유당 전국구(비례대표) 50번으로 공천을 받았으나 낙선하였다.[4]
1993년 김영삼 대통령 취임 이후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민정비서관, 내무부 차관을 역임했다. 1995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부터는 부산 남구에서 내리 4선을 했다.
2005년 한나라당 사무총장이 되어 박근혜 당시 대표를 보좌하였다.[5] 이때의 인연으로 친박계의 좌장이 되어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박근혜 당시 후보를 위해서 뛰었으나, 결국 경선은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승리로 끝났다.
당시 친박계는 리더 - 박근혜, 조직 - 김무성, 정책 - 유승민의 삼각편대였으나 박근혜와 김무성 사이에 의견 충돌이 수시로 벌어졌다고 한다.[6]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친이계의 친박계 공천 학살로 탈락하자, 다른 친박계 탈락자들과 함께 탈당하여 무소속 출마를 선언하였다.
친박 성향 무소속들을 규합하여 '친박 무소속 연대'라는 이름을 내걸고 선거 연대를 하면서 다시 한 번 당선되었고 곧 한나라당으로 돌아왔다.
이 당시 김영삼 전 대통령은 한나라당의 공천 파동을 전격 비판하면서 김무성을 옹호하였다. 이례적으로 직접 부산 남구 을 선거구를 찾아서 지원 유세를 해주었을 정도.
김무성은 무소속으로 당선되고 복당한 다음에는 한나라당의 사무총장, 최고위원, 원내대표를 두루 거치며 거물로 성장했다.
2009년 이명박 대통령이 '세종특별자치시 수정안'을 들고 나오자, 이를 지지하였으나 박근혜 의원은 세종시 원안 고수를 주장하면서 의견이 갈렸다.
이때부터 원조 친박에서 비박#s-4으로 돌아서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갑자기 박근혜 의원과 결별한 것이 아니라 서로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달라서 생긴 갈등이 쌓이고 쌓이다가 이 세종시 수정안 문제가 기폭제가 돼 결국 결별까지 이어진 듯하다.동아일보에서 소개한 한 일화
이 때문인지 박근혜 의원이 새누리당의 비상대책위원장으로서 전권을 잡았던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또다시 공천에서 탈락하였으나, 이번에는 탈당하지 않고 당의 결정에 따르겠다는 자세를 보여주었다.[7] 그리고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때 박근혜 캠프의 총괄선대본부장을 맡아서 일선에서 뛰며 잠시 갈라졌던 관계를 조금이나마 봉합하는 듯했다.
3.1 새누리당 대표
고생길의 시작
2013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부산 영도구에 출마해 65%가 넘는 높은 득표율로 당선되면서 국회로 복귀하였고, 2014년 7월에 열린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 실시된 최고위원 경선에서 29.6%의 득표율로 1위를 차지해 대표 최고위원으로서 새누리당의 수장이 됐다.
세월호 특별법 정국 아래에서 치러진 2014년 7.30 재보궐선거에서 11:4로 압승을 거두었고 2015년 4.29 재보궐선거에서도 새누리당을 승리로 이끌어 '선거의 왕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새누리당의 홍보본부장이었던 조동원의 제안을 망설임 없이 실행하는 실행력 만으로도 보통 선거의 귀재가 아니라는 평가를 받았었다.
51년생의 정치인이 조언에 따라 반바지에 카우보이 모자를 쓰거나 앞치마를 두르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모의고사에선 줄줄이 만점 맞았지만 정작 중요한 수능에서는(...)
하지만 '할 말은 하는 당대표가 되겠다'던 처음 약속과는 달리 박근혜정부와 의견 차이가 생길 때마다 자신의 뜻을 번번이 굽혀서 사람들이 붙여준 '무대(무성대장)'라는 별명이 무색해졌다는 소리를 듣게 됐다.
그러나 같은 비박계인 유승민 의원이 새누리당의 새 원내대표로 선출되면서 유승민 원내대표와 힘을 합쳐 박근혜정부와 각을 조금씩 세우는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국회법 개정안 파동 당시 유승민 원내대표와 청와대 사이의 갈등에서 아무 역할을 하지 못하면서 당대표 취임사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할 말은 하는 당대표'를 기대했던 사람들에게 또다시 실망감을 안겨주었으며, 유승민 의원이 원내대표직에서 쫓겨난 다음에는 아예 청와대의 뜻에 고분고분 순종하는 모습으로 돌아갔다.
정의당에서 제작했던 인기 시사 팟캐스트 방송인 노유진의 정치카페에서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지금 새누리당 당내 구도를 통해 김무성 대표가 이대로 가면 박근혜 대통령에 의해 축출될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한 바가 있다[8].
유시민 전 장관은 이를 극복하려면 약점이 없어야 하고, 자신의 정치적 자산이 있어야 할 거라고 했는데 김 대표는 태생부터 친일파 집안 출신이고, 국민들에게 피력할 만한 정치적인 업적도 없는데다 박근혜 대통령이나 이명박 전 대통령처럼 당내에 확고한 지지 세력이 있는 상황도 아니다.
게다가 최근 딸과 사위의 마약 투약 및 봐주기 판결 논란까지 불거졌다. 유승민 의원이 원내대표로 재직하던 시절에는 유승민 의원과 함께 힘을 합쳐 박 대통령과 대놓고 맞서기도 했지만 유승민 의원이 원내대표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박 대통령과 친박계에게 계속 저자세를 보였다.
하지만, 추석 연휴를 기해 박근혜 대통령이 UN에서 기조 연설을 하려고 출국한 틈을 타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당대표와 당대표 회동을 통해 국민경선제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고 이를 공표함으로써 기습을 가했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의표를 찔린 청와대에서는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는 중. 이를 어떻게 풀어나가느냐에 따라 대권 행보도 결정될 듯하다.
2015년 10월,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추진 문제에 대해서는 박근혜정부와 김무성 대표 모두 매우 적극적인 자세로 나섰다.
박근혜 대통령이 이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직접 챙기는 일인데다가 역사 문제에 있어서는 본인도 껄끄러운 부분이 있으니 박근혜 대통령의 믿음을 얻음과 동시에 자신의 역사적 약점을 보완하려는 의도일 것이라고 정치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2015년 11월 22일, 김영삼 대통령이 사망한 후 장례식장에서 자신은 고인의 정치적 아들이라고 하면서 서청원 최고위원과 함께 빈소를 내내 지켰다고 한다.
서청원 최고위원은 친박계의 좌장으로서 김무성 대표와 사사건건 대립하는 사이지만, 고인이 정계에서 활약하던 시기에는 같은 상도동계의 일원이기도 했다.
그런데 고인의 둘째 아들인 김현철 고려대 지속발전연구소 연구교수는 과거 본인 트위터에 김무성 대표한테 고인이 1년 동안 입원 생활을 했을 때 한 번도 안 찾아올 수 있냐고 비판했던 적이 있다.
재미있게도 故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무성 전 대표 모두 故 김영삼 전 대통령의 손을 잡아 정계에 입문했다. 이렇게들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영입돼 정치적으로 크게 성장한 인물들을 모두 묶어서 'YS 키즈(Kids)'라고 부른다.[9] 3당 합당 후 통일민주당 -> 민주자유당으로 이동할 때 노무현 전 대통령은 노태우 정권 및 민주정의당 세력과 한솥밥을 먹을 순 없다며 김영삼 대통령과 결별했고, 김무성 전 대표는 김영삼 대통령을 따라갔었다.
3.2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을 앞두고 김무성 당시 대표를 위시한 비박계는 상향식 공천으로 해야한다는 주장을 줄기차게 이어왔다.
김무성 대표의 처음 목적은 오픈 프라이머리(완전 국민 경선제)였지만 친박계의 견제를 이겨내지 못하고 뜻을 접어야 했다.
대신, 국회의원 후보를 아래에서 위로 공천하는 상향식 공천을 통해 민주적인 공천을 뿌리내려야 한다며 이 부분에 있어서는 양보를 할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내비쳤다.
사실 김무성 대표의 이러한 입장은 총선이 눈앞에 다가오면서 박근혜정부의 연이은 실정 탓에 박근혜 대통령의 인기가 점점 떨어지자, 그에 대한 반사 이익으로 유승민 의원으로 대표되는 비박계의 인기가 올라가던 추세였기 때문에 여론조사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상향식 공천으로 방침을 정할 경우 친박계가 경선에서 우수수 떨어질 것이라는 계산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를 잘 아는 친박계는 위에서 내리꽂는 전략공천과 다름없는 '우선 추천식 공천'을 주장하며 김무성 대표와 강하게 부딪쳤다.
김 대표가 위에서 아래로 가는 전략공천(하향식 공천)을 극도로 꺼리는 이유가 또 있다. 위에 서술되어 있는 속셈도 있지만 본인 스스로도 이른바 "공천 학살"의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두 번이나 공천 배제 대상이 된 사람이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선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한나라당의 당권을 잡은 친이계가 대통령 후보 경선을 거치면서 철천지원수 지간이 된 친박계에 속한 정치인들을 공천에서 대거 탈락시켰다.
친이계의 '공천 학살'에 극렬히 반발한 친박계는 한나라당을 박차고 나와 친박연대라는 팬클럽 정당을 만들었고 친박연대에 가담하지 않은 나머지 친박계 의원들은 '친박 무소속 연대'를 꾸려 18대 총선에 출마했다.
김무성 대표는 이때 친박 무소속 연대의 일원으로 출마해 살아남았다. 이 시기까지만 해도 김무성 의원은 '원조 친박'이자 친박계의 좌장으로 불렸다.
그리고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선 박근혜 의원이 새누리당의 비상대책위원장이 되면서 그간 비주류였던 친박계가 당권을 장악하게 됐다.
이때 김무성 의원은 '세종시 수정안 파동'으로 탈박해 친이계 인사로 분류되던 시기였다.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은 지난 '친박계 공천 학살'에 대한 복수로 친이계를 공천 학살하였고 배신자로 볼 수 있는 김무성 의원도 타깃이 되어 공천에서 탈락했다.
이때 김무성 의원은 신당을 차려 19대 총선에 나가려고 했지만 대선 승리를 위해서 뜻을 접고 당에 남아 다음 기회를 엿보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었다고 한다.#
공천권을 쥐게 되는 당대표가 된 다음에도 김무성 대표는 청와대와 친박계의 등쌀에 밀려 공천을 관장하는 공천관리위원장도 자기 마음대로 임명하지 못했다.
이른바 '살생부' 파문을 포함해 새누리당의 공천관리위원장이 된 이한구 의원은 공공연히 김무성 대표와 각을 세우면서 오히려 '당대표도 공천 심사를 받아야 한다'고 하는 등 독설적인 화법으로 김무성 대표와 비박계를 연신 압박했다.
때문에 이 시기 김무성 대표는 엄청난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그래도 당원과 여론의 지지를 받아서 당대표가 됐는데, 공천관리위원회 심사장에 들어와서 이한구 위원장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면서 심사를 받거나,[10] 당대표의 권한 중 하나인 비례대표 선정에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거나,[11] 심지어 '박근혜의 황태자'란 소리를 들을 정도로 핵심 친박 인사였던 윤상현 의원에겐 취중이라고 주장하긴 하지만 "김무성 그 새X 죽여버려." 같은 망언까지 들을 정도로 안습한 처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자기 세력 지키기에는 성공해서 이재오 의원 등 대표적인 비박계 인사들이 잘려나가는 와중에도 김무성계 의원들은 제3차 공천 학살에서 살아남았다.
때문에 친박계와 거래를 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있었다. 항간에서는 김무성 대표가 몸을 낮춰서 대업을 이룬 한신이 아니냐는 설도 있다. 결과적으로 대업을 못 이루면 말짱꽝
위 글은 최종 공천이 완료된 24일 새벽, 새누리당 당사 인근에 있는 감자탕집에서 당 지도부 인사들끼리 회식을 하는 장면을 박종희 공관위 위원이 본인의 SNS에 올린 것이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새누리당의 공천 전쟁은 친박계의 압승으로 굳어지는 듯 했다. 그러나...
3.2.1 당대표 직인 날인 거부 사태
박근혜에게 날린 김무성의 빅엿
그러나 3월 24일 오후, 김무성 대표는 기습적으로 친박계에 대한 반격을 감행했다.
공천 과정에서 이한구 공관위원장은 유승민 의원과 이재오 의원을 공천에서 탈락시키기에는 명분이 부족하여 역풍이 우려되는데다, 경선을 시키자니 친박계의 승리를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자 공천 마감일이 가까울 때까지도 이들 지역구에 대해 공천 결정을 미루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유승민 의원과 이재오 의원이 탈당한 뒤 이 두 사람의 지역구를 포함해 총 5개 지역구에 친박계 의원 5명을 공천한다는 새누리당 최고위원회와 친박계의 의지가 실현을 앞둔 상황이었다.
결국 23일 오후 11시경 유승민 의원이 탈당 선언을 하자, 원하는 계획대로 되는가 싶었는데...
김무성 대표는 3월 24일 오후에 기자회견을 열고, 해당 선거구에 대한 공관위의 추천장에 서명하지 않을 것이며, 후보자 등록이 마무리되는 3월 25일 저녁까지는 최고위를 열지 않겠다고 선언한 뒤 자신의 지역구인 부산 영도구로 귀향하였다. 런닝맨 : 옥새를 찾아라! 부산편
이는 선거법상 후보자 추천장에는 당인과 당대표의 직인이 둘 다 날인되어야 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조국, 전원책 예언 적중 도장이 없어졌다면 다시 파면되는 것이지만, 각 당대표의 직인 사본이 전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보관되어 있을 뿐더러, 당대표의 허가 없이 최고위와 원내대표 따위가 멋대로 당대표의 직인을 함부로 쓸 수는 없다.
일말의 가능성이라면 최고위가 당헌 30조[12]를 언급하며 당대표의 권한을 제한하거나, 위임받는 것도 가능하지만, 엄연히 대표가 최고위 개최 거부를 선언한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당헌 당규를 위반하는 일이 된다.
처음에는 도장을 갖고 내려갔다고 알려졌지만, 다음 날 김 대표가 도장은 안 가지고 내려갔다며 인터뷰에서 밝혔다.
즉, 도장의 문제가 아니라 당대표의 권한 문제였다. 당대표의 허가 없이 금고를 뜯어내어(...) 대표 직인을 찍어서 선관위에 제출하는 순간 법적 고발은 불가피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당선된 후보자들도 당선 무효 처리가 되는 초유의 사태까지 일어날 수가 있기 때문.
여기서 "도장"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사실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다. 도장은 그저 공천하는 "권한"에 대한 상징적 행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결국 공식적으로는 당대표의 의사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점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도장만 따로 판다던가 하는 행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런 근본적인 점을 간과하고 새누리당이 공천위를 앞세워 친박계가 전횡하는 것은 법적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행위인 것이다.
기자회견 이후 김무성 대표는 기자들을 몰고 다니며 영도대교에서 인생샷을(...) 찍는 등, 여유롭게 지역구를 활보했다.
원유철 원내대표는 이를 당과 협의 없는 무책임한 기자회견이고, 부산으로 내려가 옥새의 제왕 : 옥새원정대 최고위 개최를 요구할 것이라는 긴급 브리핑을 내놓았고, 서청원, 이인제 등 친박계 최고위원들 역시 김무성 대표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3월 24일 밤 부산에 도착한 원유철 원내대표와 김무성 대표가 부산 자갈치시장의 한 횟집에서 간신히 회동한 뒤 다음 날 상경하였다.
회동 후 각자의 입장차만 유지한 듯, 원유철 원내대표는 최고위 개최를 수락하였다는 발표를 내놓았고, 김무성 대표는 점심을 먹고 당사에 가서 최고위는 열지 않고 당무만 보겠다고 하였다. 기사. 이는 유고라는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당사에 있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그러나 3월 25일 11시 30분에 열린 최고위에 참석해 친박계 최고위원들과 5시간에 걸친 협상 끝에 유승민 의원의 지역구인 대구광역시 동구 을과 이재오 의원의 지역구였던 서울특별시 은평구 을, 그리고 서울특별시 송파구 을에는 새누리당 후보를 공천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대구광역시 동구 갑과 대구광역시 달성군, 대구광역시 수성구 을에는 새누리당 후보를 공천하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대구광역시 동구와 서울 은평구에 기반을 두고, 탈당 후 무소속 출마를 준비 중인 유승민 의원과 이재오 의원의 지역구를 지켜냈다.
즉, 비박계와 친박계의 단순한 3:3 무승부가 아니라 비박계의 승리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유승민계, 친이계의 좌장인 두 의원을 지켜냄으로써, 향후 정국에서 비박계의 구심점을 유지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또한 2년간 지속되어 온 청와대와의 권력 투쟁에서 오랜만에 우세승을 보인 것도 비박계 측에서는 주목할 만한 성과.
결론적으로 이때까지의 무기력한 모습이 아닌 마지막 한 수로 친이계의 좌장 이재오 의원과 반박(反朴)의 아이콘 유승민을 구했다는 대외적인 명분을 가지게 되었고 핵심 친박 정종섭, 추경호를 살림으로서의 친박계에 체면치례는 해주는 방법으로 계파 갈등 봉합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음과 동시에 이면적으로 실제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유승민 의원을 안전하게 연착륙시켜서 대선 후보로의 급부상을 견제하고 실제적으로 무소속으로 출마했을 때 당선이 아주 위험한 이재오를 구제하여 친이계와 손을 잡는 4가지 토끼를 동시에 잡은, 이때까지의 곰과 같은 모습이 아닌 여우같은 행보로 보여진다.
공천, 무공천 대상자가 정해지자 자긴 진박이 아니라는 자아 부정까지 시도한 이재만 전 동구청장은 최고위원들을 만나려고 했으나 진입을 거부당하고 "온 몸에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분하다!!"며 분노를 토해냈으며, 류재길 후보는 법적 대응도 감수할 것이라는 성명을 내놓았다. 유영하 후보는 당의 결정에 승복하겠다며 담담히 받아들인 것과 대조적이다.
이후 중앙일보에서 기사를 통해 밝힌 바에 따르면, 이 공천 협상 결과는 원유철 원내대표가 주도했다고 한다.
당인도 김무성 대표가 밝힌대로 당사에 있었다고 한다. 이 사건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은 김무성 대표가 '30시간의 법칙'[14]을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고, 유승민 의원의 지역구 같은 경우는 청와대에서 동의를 해준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왜냐하면 현재 유승민 의원의 지역구 여론은 무소속 유승민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높은데, 이 경우 청와대에서 사실상 직접 공천한 이재만 후보가 패배하게 되면, 청와대의 입지가 좁아지기 때문. 그래서 청와대에서 딜을 해줬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새누리당에서는 공식 유튜브 채널을 통해 이 사태를 선거홍보에 써먹는 비범함을 선보였다(...) 옥새 들고 나르샤
여담으로 옥새 투쟁으로 김무성 대표가 지원하려고 한 무소속 후보들은 결말이 좋지 못했다. 새누리당 후보 공천을 추인했지만 속마음으론 무소속 후보를 밀었을 대구광역시 수성구 을에선 컷오프에 반발해 무소속으로 출마한 주호영 의원만 생존했고, 새누리당 무공천 지역에서는 유승민 의원만 생존하고 이재오 의원과 김영순 전 송파구청장은 낙선했다.
김영순 전 송파구청장은 새누리당 출신 군소 후보가 1명 있는데도 새누리당 후보가 없는 틈을 타 '유일 보수 후보'라는, 사실과 다른 발언을 하다가 허위사실공표죄 선거법 위반 논란에까지 휩싸여 버렸고, 선거법 문제를 빼놓더라도 새누리당 우세 지역이었던 곳에서 참패를 당해 재기가 어려워졌다.
만약 김무성 대표가 '진실한 친박'(진박)으로 알려진 유영하 후보를 공천했다면 김영순 후보가 그런 발언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떨어졌더라도 재기할 수 있는 기회가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야당이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의 분열로 인해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누리당이 원내 제1당 자리를 지킬 가능성이 매우 높아보였고, 박근혜 대통령의 임기도 슬슬 끝나가는 레임덕이나 다름없으니 김무성 자신이 유력한 차기 대권후보로서 존재감을 과시하고 20대 총선을 승리로 이끈 뒤 정국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 "박근혜 대통령보다 더 존재감이 강한 모습을 보여줘야 했으니까 일부러 옥새런을 일으키면서 승부수를 던진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왔다.
그러나, 20대 총선에서 우리나라 선거 역사상 손에 꼽힐만한 반전이 일어나는 바람에 사실이든 아니든 이러한 예측들은 죄다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3.2.2 총선 패배 이후
한때 새누리당은 국회선진화법을 완전히 무효화시킬 수 있는 180석을 예상하기도 했고, 운이 좋으면 헌법 개정까지도 밀어붙일 수 있는 200석 이상의 절대 다수 의석을 얻을 거라는 예측이 있을 정도로 확실한 우위를 점했다.
그러다가 총선 막바지에 가서 공천 파동 등으로 점점 기대치가 낮아지면서 한때 엄살 논란이 일었던 자체 여론조사에서 135석을 예상했으나,[15] 20대 총선 결과 현실은 그보다도 못한 122석을 차지하며 원내 제1당 자리를 더불어민주당에게 내주고 마는 폭망을 맛보고 만다.
나중에 탈당 후 당선된 의원들이 복당하며 의석 수가 129석으로 늘어 다시 원내 제1당의 자리를 되찾긴 했지만 그것조차도 130석이 안 된다. 반면 야권 의석을 무소속 의원들까지 모두 합하면 무려 171석에 달한다. 그야말로 폭망.
김무성 대표 자신도 부산 중구·영도구에서 당선되었으나 더불어민주당 김비오 후보에게 40%가 넘는 지지율을 허용하는 성적을 받아들었고[16], 자신의 지지 기반인 부산에서도 김무성계가 대거 낙마하는 끝에 더불어민주당이 5석이나 차지하면서 리더십에 위협을 받았다. 그나마 본인이라도 당선되었기에 망정이지, 본인마저 낙선했으면 아마 그의 정치 생명은 끝났을 것이다.
선거 운동 중에는 안철수 의원에게 도전장을 내민 이준석 후보 지지 유세 때 안철수를 찍어 달라는 말실수를 하고, 유럽의 어떤 반도 국가의 전 총리가 생각난다[17][18] 박근혜 대통령을 '전직 대통령'이라고 은근히 소망 말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김무성 대표는 전국 지원 유세를 다니며 새누리당 후보를 업어주는 소위 '어부바 유세'를 했는데, 김무성 대표가 업어준 30명의 후보들 중 무려 28명이 낙선하는 흠좀무한 결과가 발생하기도 했다. 마이너스의 손?
다만 이건 100% 당선이 거의 확정되는 새누리당 강세 지역구에는 주로 친박계 후보들이 공천을 받아 김 대표 입장에선 이들을 업어주면서까지 선거를 도울 마음도, 이유도 없는 반면 그 외의 격전지에서 비박계가 공천 받은 탓에 김무성 대표가 비교적 진심으로 유세를 도왔으나 새누리당에 대한 반감이 워낙 컸던 탓에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해석도 있다.
이걸 믿을지는 위키러의 몫. 어찌됐든 이 결과에 누리꾼들은 김무성 대표의 어부바 유세에게 '거부바 유세'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게다가 공천 파동 등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민심을 크게 잃어버렸다.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새누리당의 전통적인 강세 지역이었던 서울 강남구, 송파구, 부산광역시에서 부진한 성적을 낸데다가, 새누리당의 철옹성이나 다름없었던 대구에서 김부겸 후보에게 관광을 제대로 당했고,[19][20][21] 공천 문제로 더불어민주당에서 탈당해 무소속으로 당선된 홍의락 후보에게도 의석 한 자리를 내주는 등 더불어민주당에게 대참패를 당하면서, 선거가 끝나고 얼마 안 있어 김무성 대표를 비롯한 새누리당 지도부는 총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전원 사퇴했다.
다만, 김무성 대표는 총선 이전부터 총선이 끝나면 당이 이기든 지든 대표직에서 물러날 것임을 시사해 오기도 했고, 대선에 출마하려면 어차피 당대표에서 물러나야 하기 때문에 새삼 놀라울 것도 없다는 냉담한 반응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총선 대참패로 입지가 제대로 추락하며 차기 대권 도전 가도에 빨간불이 켜졌다.
선거 당일날 이런 결과를 이미 예상했는지 선거 당일날 자기 지역구에서 투표를 한 뒤 총선 지원 유세를 돌면서 과로하였다는 이유로 여의도 성모병원에 하루 입원하였다가 총선이 끝난 4월 14일 퇴원했다.#
김 대표는 당초 전날 밤 늦게라도 당사에 나와 상황을 지켜볼 것이라고 알려지기도 했으나, 결국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후 한동안 자숙의 의미로 조용하다가 5월 24일 정진석 원내대표, 최경환 의원과 단일성 집단지도체제에 대한 합의를 이루면서 언론에 모습을 비췄는데, 이로서 아직 당내 비박계 거물이라는 여전한 영향력을 입증했다.
6월 20일에는 아버지의 묘소를 방문해 함께 참석했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새누리당이 너무 극우적으로 가고 있다. 그런 이념으로는 도저히 나아갈 수가 없게 된다."고 당에 일침을 놓았다.#
이에 누리꾼들은 '그간 당대표를 하면서 써내려간 어록들을 모두 잊으셨나'하며 조롱조의 반응을 보였다.
7월 14일에는 당대표 당선 2주년을 기념해 지지자들과 만찬을 함께하는 자리를 열었다. 서울 영등포에 있는 한 컨벤션센터에 마련한 이 만찬에서 김무성 전 대표는 '30시간의 법칙'을 비롯해 그동안 자신을 향해 쏟아진 부정적인 평가들을 열거하면서 'X신 소리를 들어가며 참고 또 참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름 앞으로 우리나라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며 '제가 선봉에 서겠다'고 선언하는 등 사실상 대선 출정식이나 다름없는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8월 4일 민생 탐방을 목적으로 경남 거제시를 방문하였는데 뒤집어진 런닝구를 입고 손빨래를 하는 모습이 공개되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130억 원대의 재산을 가진 그가 그동안 그와 새누리당이 비판했던 보여주기식 정치, 서민 코스프레 쇼를 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근데 사실 그가 문재인 전 대표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설도 있다.(@) 참고로 문 전 대표의 고향은 경남 거제다.(...) 이후에도 며칠 동안 계속 여러 곳을 방문하다 별 반응이 없자 다시 국회로 돌아왔다.
당대표에서 물러나고 약 4개월 후인 2016년 8월 9일 진행된 새누리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비박계 단일 후보인 주호영 의원을 공개 지지했었는데, 결과적으로 친박계 이정현이 주호영 의원을 큰 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되면서 정치적으로 꽤 큰 타격을 받았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비박’ 김무성·오세훈 대권가도 타격. 안 그래도 암담한 대권 가도에 더더욱 먹구름이 낀 것이다.
10월 24일에 대통령이 개헌을 추진하겠다고 밝히자 김무성 "朴대통령 개헌 추진, 애국의 결단"이라면서 제일 먼저 반겼다. 그리고 최순실이 대통령의 연설문 등을 사전에 받아보고 검토했다는 의혹이 사실로 드러나게 되자 여야 가릴 거 없이 다들 난리인 상황에서도 혼자 침묵하였으나 다음날 조용히 입장표명을 하였다.# 솔직히 타이밍이 너무 안 맞는 거 같다. 이러면 대통령 개헌 발언에 찬성한 사람들은..
10월 26일 위의 최순실 파문을 단독 보도한 JTBC 뉴스룸에서 김종인·김무성 등 VIP 보고용 인물평가 보고서까지 최순실에 전달되었다는 보도를 하였다. 여기서 김무성은 "만약 (다보스포럼에) 정치인을 보낸다면 선거 때 총괄본부장으로 수고했고 차기 정부에서 어떤 임명직도 맡지 않겠다고 선언했으니 고려해 보실 만한 카드"라고 평가 되어 있다.
10월 27일 새누리당 의원들 중 최순실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는 발언으로 발목을 잡았다. 이는 매우 정치적인 의도로 발언한 것이다. 20대 총선 결과, 친박계는 여당의 텃밭인 경상지역 위주로 국회에 입성한 반면, 비박계는 그 기세가 크게 꺾였다. 게다가 이후 전당대회에서 새로 당대표가 된 인물은 현재 친박계의 좌장이라 평가받는 이정현이다. 때문에 최순실 게이트라는, 김무성 입장에서는 눈엣가시같은 박근혜 대통령과 친박계열을 한방에 공격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친박계는 최순실 게이트 때문에 앞으로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할 확률이 매우 높고, 친박계가 지지를 잃는다면 그 반사이익을 자신이 얻으므로 김무성 입장에서 최순실 게이트는 새누리당 입장에서 보면 큰 위기이지만 자신의 입장에서 본다면 당 내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이기에, 친박을 공격한 것이다.
또 김무성 "그래도 대통령은 구해야 하지 않겠나?" 라는 발언을 하였다.
4 논란
김무성/논란 항목 참조.
논란항목이 따로 작성되는 무성갓
5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 | 선거종류 | 소속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1992 |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50번) | 민주자유당 | 7,923,718(38.5%) | 낙선 | 승계 전 청와대 입각 |
1996 |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남구 을) | 신한국당 | 38,970 (62.0%) | 당선 (1위) | |
2000 |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남구) | 한나라당 | 75,215 (66.9%) | 당선 (1위) | |
2004 |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남구 을) | 한나라당 | 38,826 (54.9%) | 당선 (1위) | |
2008 |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남구 을) | 무소속 | 26,265 (46.7%) | 당선 (1위) | 친박무소속연대 2008.6 한나라당 복당 |
2013 | 2013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부산 영도구)[22] | 새누리당 | 27,981 (65.7%) | 당선 (1위) | |
2016 |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중구.영도구) | 새누리당 | 43,447 (55.8%) | 당선 (1위) |
6 트리비아
- 반대로 더불어민주당의 전 대표이자 대권 경쟁자인 문재인 전 의원도 몇 년 전부터 명왕과 외모가 비슷하다며 합성짤 등이 나돌았다.
- 참고로 두 사람은 경남중학교 1년 선후배 사이로[24], 정당을 떠나 사적으로는 꽤 친한 사이라고 한다. 새누리당 대표 시절 김무성 대표 딸의 결혼식에 문재인 의원이 불쑥 찾아왔는데, 자당 의원들조차도 구설수에 오른다며 오지 말라고 했던 김무성 대표가 문재인 의원 만큼은 환영해줘 딸과 인사도 시키고 반갑게 맞이해줬다고 한다.
- 디시위키에서는 무성애 드립의 대상이 되었다.(...) 디시위키의 무성애 문서
그리고 이 논란을 언급하다 틀:읍읍이 붙었다
- 의외로 사형에 반대하거나 법인세를 올려야 한다는 등, 진보적인 면도 있다. 사실 과거만 하더라도 논란 항목에 써있듯 '난 노무현이를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5.16은 혁명이다' 등 수구 & 보수 진영의 대표적인 저격수로서 명성(?)을 떨쳤으나, 비박계의 대표 주자가 된 2010년대 중반쯤부턴 노 전 대통령이 묻힌 봉하마을도 들르고 '임을 위한 행진곡' 열창과 함께 5.18 민주화 운동도 추켜세우고 있다.[25]
- 과거 발언들에 대해서도 '내가 돌 맞아도 할 말 없다'는 식으로 사과하는 등 급전향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나자 "난 그분의 정치적 아들"이라고 하며 고인의 차남인 김현철 교수와 함께 상주를 섰을 정도.[26] 2016년엔 새누리당에 극우적 냄새가 짙어졌다거나, '난 경제는 중도, 안보는 보수'라며
경제는 진보, 안보는 보수라고 한 안철수 의원 코스프레까지 했다경제적으로 좌클릭해야한다는 뉘앙스도 내비쳤다. - 이에 대해 '대권병 걸려서 좌우 가리지 않고 추켜세우고 있다'고 비웃는 사람들도 있으나, 대권을 생각해 중도 & 진보 쪽의 마음을 얻기 위한 행보인 것인지 아님 진짜로 심정적 변화가 있는 건지는 본인이 아닌 이상 알 수 없는 노릇.
- 반다송으로 안 좋은 의미로 화제를 이끌었다.
- ↑ 김해 김씨 삼현파(三賢派) 22세손, 수로 70세손 '坤'자 항렬이지만 항렬자를 쓰지 않는다. 아버지인 김용주는
한자가 다르지만수로 69세손 '容'자 항렬이고 아들인 고윤(본명은 김종민)은 수로 71세손 '鍾'자 항렬이다. - ↑ 김용주 문서에 자세히 쓰여져 있지만 대표적 조선인 친일 단체였던 '조선임전보국단' 소속이었으며 일본군에게 위문 편지를 보내는 운동을 제안하고, 일본군에게 비행기를 헌납하고, 야스쿠니 신사에 우리 자식들을 바치자고 주장하는 등 여러 곳에서 친일 행위를 한 정황이 포착되고 있는 인물이다.
- ↑ 이전 문서에는 막내라고 되어있었고 실제 언론에서도 막내라고 많이들 표현하지만, 사실 이성헌이나 김영춘 같이 김무성보다 나이가 적으면서 상도동계에 더 늦게 합류한 경우도 있었다. 김영춘은 이후 더불어민주당 소속으로 넘어가긴 하지만. 상도동계 핵심 인물 기준으로 본다면 김무성이 막내가 맞긴 하다.
- ↑ 이후 민주자유당 전국구 의원들의 사퇴와 탈당 등으로 낙선한 민주자유당 전국구 후보가 승계 권한을 가지게 되었고 그 규모가 큰 나머지 마지막 번호를 받은 후보인 54번 후보까지 의원직을 승계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결국에는 빠져나간 인원이 남은 후보자보다 많아지고 그만큼 의원 정수가 감소하는 사태까지 발생하나 김무성은 그 이전에 입각을 위한 탈당으로 인하여 승계 자격이 사라져 원내 입성을 다음 총선으로 미루게 된다.
- ↑ 당시 대표 비서실장은 박근혜의 경제 참모가 되는 유승민 의원이었다.
- ↑ 박근혜는 보스와 부하 같은 철저한 상명하복식 '묻지마 충성'을 요구하였는데, 김무성은 둘 사이를 수평적인 동지 관계로 생각했기 때문에 상당한 괴리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두 사람의 갈등이 촉발된 것이 원내대표 파동. 당시 한나라당에서 김무성에게 원내대표를 제의했는데, 김무성 측에서는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정작 박근혜 쪽에서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결국 두 사람이 갈라선 계기가 되었다. 거기에 결정타로 2009년 하반기 세종시 수정안을 놓고 원안 고수 입장을 밝힌 박근혜와 달리 김무성은 수정안을 지지하며 김무성과 박근혜는 완전히 갈라서게 된다. 한편 박근혜와 유승민의 관계는,19대 총선 전까지는 유승민이 친박 핵심으로 통할 정도로 가까운 관계였지만 대선 기점으로 결국 유승민과도 결별하였다.
- ↑ 자신처럼 비박계 & 친이계란 이유로 공천에서 탈락한 한나라당 국회의원 약 30여명과 외부의 자유선진당, 국민생각과 힘을 합쳐서 비박계 범우파 신당을 창당하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탈당 기자회견 직전에 포기하였다고. 영남에서 한나라당과 신당이 경쟁하게 되면 어부지리로 야권이 총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크게 높아지고 그렇게 된다면 대선은 해보나 마나라는 예상 때문이었다고 한다. 실제 영남 특히 부산의 경우 야권 단일 후보들이 40%가 넘는 득표율을 기록한 지역이 제법 많았던 점을 보면, 만일 우파 신당이 출현해서 여당표가 분산됐으면 야권이 총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커졌을 것이다.
- ↑ 새누리당 당헌 당규상 최고위원들이 과반 이상 사퇴할 경우 대표 최고위원도 함께 물러나야 한다. 그렇게 되면 새누리당은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려 당을 이끌도록 하고 있다. 이때 김무성 대표를 제외한 최고위원들 모두가 친박계이거나 박근혜 대통령에게 대놓고 대립각을 세울 만큼 비박 성향이 뚜렷했던 사람들은 아니었기 때문에 청와대의 지시만 떨어지면 언제든 김무성 지도부는 해체될 수 있을 거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그렇게 될 경우 비상대책위원장직에 친박계 좌장으로 꼽히는 최경환 경제부총리를 앉힐 거라고 예상했다.
- ↑ 상도동계의 라이벌이었던 동교동계는 참여정부 이후 힘을 많이 잃은 상태지만, 김무성, 노무현을 비롯한 상도동계 출신들도 2000년대 들어서 독자적인 노선으로 갈라졌고, 사실상 국민의정부 끝 무렵에 양김 시대는 끝났다고 보고 있다. 동교동계, 상도동계 모두 목적이었던 민주주의를 달성한 후 각자의 길을 찾아 새누리당 혹은 민주당계로 들어감으로써 양김 시대는 그들의 임기와 동시에 끝난 셈.
- ↑ 이에 대해 전원책 변호사는 도대체 투표로 뽑히지도 않은 공천관리위원장이 무슨 자격으로 당원들의 투표로 뽑힌 당대표를 심사하냐며 당내 민주주의를 철저히 기만하는 행위라고 노발대발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군말 없이 심사받은 김무성까지 같이 디스한 건 덤 - ↑ 이는 썰전 특별편 이준석 전 새누리당 비대위원의 발언을 통해 밝혀지는데, 이준석 당시 후보 지원 유세 중 동석했던 비례대표 후보들의 얼굴과 이름조차 몰라볼 정도였다고 한다.
- ↑ 당 대표가 사고나 해외 출장 등으로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 원내대표 등의 순서로 직무를 대행한다.
- ↑ 효력정지 가처분신청으로 인해 추천장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 ↑ 김무성 대표가 자신이 한 말을 30시간 이내에 철회한다는데서 나온 법칙.
- ↑ 공표는 135석 내부에서는 125석.
- ↑ 2013년 재보선에서 두 사람이 처음 맞붙었을 때에는 김무성 후보가 65.2%, 김비오 후보가 22.3%로 크나큰 격차가 났었다.
- ↑ 당시 야권 연대를 경계하던 새누리당 측은 야권 연대를 거부하던 안철수 후보 측을 선거기간 내내 치켜세우는 전략을 취하고 있었다.
- ↑ 물론 다수는 빡센 유세 스케줄 때문에 컨디션 난조 속에서 그런 말실수를 한 거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이준석 측은 속에서 천불이 날 일(...)
- ↑ 그것도 아슬아슬하게 진 것이 아니라 62.3% VS 37.7%라는 현격한 차이로 패배했다. 제대로 관광을 당한 셈.
- ↑ 수성구 갑 선거구는 대구의 부촌 중 하나인 범어동이 있는 구역이다. 그렇지 않아도 서울에서는 부촌인 강남구와 송파구에서 제대로 털렸는데 수성구에서도 제대로 털렸으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 다만, 수성구는 부자 동네라서 그런지 유연한 선택을 하는 곳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친노 인사인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도 무소속으로 30%대의 득표율을 기록한 적도 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인기가 바닥을 찍었던 18대 총선에서 말이다.
- ↑ 전임자 이재균 선거법 위반으로 당선 무효
- ↑ 원피스 세계관의 절대 권력인 '세계정부'라는 조직을 세운 20명의 후손들이다. '세계귀족'이라고도 하는데, 이들은 그야말로 최고의 특권을 누리며 비리와 부패의 온상으로 자신들만이 존귀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챠를로스 성은 이 축생들 중에서도 극악무도하기로 탑 클래스에 속한다.
- ↑ 김무성이 선배다.
- ↑ 김영삼 총재 밑에서 민주화 운동을 함께 하는 걸로 정치 인생을 시작했기 때문에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른 수구 & 보수 진영 정치인들과는 다를 수도 있다. 물론 이 부분에선 김무성 말고도 비슷한 입장을 보이는 보수 정치인들이 꽤 있긴 하다만.
- ↑ 다만 김현철 교수와는 원래 사이가 나쁘기로 유명했다. YS가 투병 생활을 하고 있을 때 김현철 교수가 '김무성 의원은 친박, 비박 사이에서 줄타기나 하지 말고 1년 이상 입원 중인 아버님 병문안부터 하는 것이 도리일 것이요'라고 디스한 적이 있었을 정도. 이후 김무성이 병문안을 하긴 했지만 YS의 정치적 아들을 자처한거치곤 정작 YS가 투병 중일때 소홀했었단 비판이 나올 수 있다. 즉, 이러한 옛일을 미루어 볼 때 YS가 세상을 떠난 뒤 그리 지극정성을 보였던 건 고인에 대한 존경심도 있겠지만, 친박/비박 갈등이 고조되고 자신이 친박에서 비박으로 포지션이 바뀌면서 고인이 과거 가지고 있었던 PK 지역의 지지세를 노린 정치적 제스처였을 공산도 배제할 수는 없다.
애초 YS의 정치적 아들이란 사람이 YS와 철천지원수 지간이었던 박정희를 권좌에 올린 5.16 쿠데타를 찬양하는 것부터가 모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