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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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서 「유요태사자사섭전(劉繇太史慈士燮傳)」
유요태사자사섭
수극을 들고 손책과 접전을 벌이는 장면

太史慈
(166 ~ 206)

1 개요

후한 말의 인물. 유요, 손책, 손권 휘하의 장수. 태사향의 아버지.

는 자의(子義). 태사(太史)가 성씨인 복성으로[1] 동래 황현 출신이다.

정사 삼국지 태사자전에 따르면 키가 7척 7촌(당시의 1척은 23.7cm였으므로 182.49cm에 해당)에 수염이 아름다웠고 원숭이 같은 팔에 활을 잘 쏘아 백발백중이었다고 한다.[2]

2 생애

2.1 요동으로 피신하다

무예가 빼어나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면서 군의 주조사로 봉직했다. 군과 주 사이에 의견 차이가 생겨 먼저 올라가는 쪽이 이기는 상황이 되었는데 태사자의 군이 한발 늦었다. 그는 낙양으로 달려가 잠깐 공문을 보자고 했다가 주의 공문을 받자마자 바로 칼로 찢어버린다.

이 문서를 맡은 관리는 이 일로 노발대발하지만 태사자는 "이미 당신도 공문서를 뺏겨서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니 같이 도망가자"라고 말해서 그와 같이 떠나게 된다. 태사자는 관리와 함께 성을 나왔는데 기회를 틈타 다시 성으로 돌아가서 군수의 공문을 올린다(!)

주에서 이 일을 듣고 즉시 관리를 보내 다시 공문을 올렸는데 담당하는 관리는 앞서 공문이 왔다는 이유로 수리하지 않았고 이 사건에 대해서 불리한 처분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태사자는 명성을 얻게 되었지만 주로부터는 미움을 사게 되자 태사자는 이를 두려워해 요동으로 피신한다.

그리고 요동에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병원의 부탁을 받고 유정을 호위하여 돌아오기도 한다.

2.2 공융을 구원하다

북해상 공융이 태사자의 명성을 듣고 그의 어머니를 도와주면서 태사자에 대한 관심을 보이지만 태사자는 공융 수하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이후에 관해가 이끄는 황건적의 잔당이 북해성을 포위하자 마침 고향에 도착한 태사자는 어머니의 부탁으로 공융을 도우러 간다. 당시는 포위가 삼엄하지 않아 밤에 기회를 틈타 성 안으로 들어가 공융을 만날 수 있었다. 당시 공융은 평원상(平原相) 유비에게 구원 요청을 하려고 했는데 성 안의 사람들은 나가려는 자가 아무도 없었지만 태사자가 스스로 임무를 맡을 것을 청했다.

태사자가 북해성 밖으로 원군을 청하러 나갔을 때 밖에서 화살을 쏘고 돌아가기를 반복해 적이 방심하자 그 틈을 타서 빠져나가는 용맹과 지략이 결부된 방법으로 포위망을 돌파한다.[3] 태사자는 평원현의 유비에게 구원을 청해 군사 3천명을 받아 다시 북해로 돌아갔고 황건적은 구원병이 온다는 소식을 듣자 포위를 풀고 흩어져 달아났다.

2.3 손책을 따르다

이후에 양주자사 유요를 섬겼다. 손책이 양주를 침입할 때 유요는 그를 중용하라는 부하의 말에도 불구하고 허소가 태사자를 기용하면 비웃을 거라는 말을 믿고 무시했으며, 태사자에게 정찰만 맡긴다.

태사자는 기병 한 명을 이끌고 출발했는데 기병 13명을 이끈 손책을 만나 그를 상대로 일기토를 벌인다. 손책은 태사자의 말을 찌르고 목덜미를 끌어당기며 수극을 빼앗고 태사자 역시 손책의 투구를 빼앗을 정도로 처절하게 싸우는데 이는 정사에도 기록된 사실이다.[4] 양쪽의 군사들이 몰려왔기 때문에 결판이 나지 못하고 서로 흩어진다.

유요가 예장으로 도망칠 때 태사자는 산 속으로 도망가 단양태수라 자칭해 산월족까지 모으면서 저항하다가 결국 손책에게 사로잡힌다.[5]

손책은 즉시 태사자의 포박을 풀어주고 그의 손의 잡으며 말했다. "신정(神亭)에서의 일을 기억하시오? 만약 그때 경이 나를 붙잡았으면 어떡하셨겠소?"

태사자가 대답했다. "짐작할 수 조차 없습니다."[6]

손책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대업을 마땅히 경과 함께 이루고자 하오" - 태사자전
적극적으로 나아가 일을 성취하는 방법에 관해 물었다. 태사자가 대답했다. "싸움에 패한 군대의 장수에게는 함께 큰 일을 논의할 자격이 없습니다."

손책이 말했다. "옛날 한신은 광무군(廣武君)에게 의견을 구하여 계책을 정했소. 지금 내가 의문점을 해결하기 위해 현명한 이에게 묻는 것인데 그대는 어찌 사양하시오?"

태사자가 말했다. "주(州)의 군대가 방금 무너졌으므로 사졸들의 마음이 어지럽고 만약 이대로 흩어진다면 다시 모으기 어려울 것입니다. 제가 가서 은혜를 전해 안정시키고 싶지만 주군의 뜻에 맞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손책이 무릎을 꿇으며 대답했다. "진실로 내가 바라던 일입니다. 내일 정오에 돌아오도록 하시오."

여러 장수들이 모두 태사자를 의심했으나 손책이 말했다. "태사자는 청주의 이름난 선비로 신의를 으뜸으로 여기니 결코 나를 속이지 않을 것이다."

그 다음날, 여러 장수들을 청해 미리 술과 음식을 준비한 채 장대를 세워놓고 그림자를 살폈다. 정오에 태사자가 도착했는데 손책은 크게 기뻐하며 태사자를 항상 군무를 의논하는 자리에 참석시켰다. - 오역
손책이 태사자에게 물었다. "듣자하니 경은 옛날에 태수를 위해 주의 문서를 빼앗았고, 문거(공융)에게 달려가 현덕(유비)에게 구원으로 청하러 갔다하니, 모두 의열한 행동이요, 천하의 지사라 할 만 한데, 다만 의탁하는 것은 알맞은 사람을 얻지 못했소. 사구(射鉤)[7]와 참거(斬袪)[8]는 옛 사람들도 미워했던 일이 아니요. 나는 경의 지기가 되었으니, 여의치 않을까 걱정하지 마오."

손책이 나가면서 말했다. "용이 날아오르고자 하면, 먼저 척목을 밟아야 하는 법이오." - 강표전

손책은 태사자를 바로 문하독의 관리로 임명하고 오나라로 돌아와서는 병사를 주고, 절충중랑장에 임명한다. 이런 그의 대인배스러운 손책의 의기와 도량에 감복한 태사자는 손책의 막하에 들게 된다.

덤으로 삼국지연의에서는 왕랑과 함께 일기토를 하는 장면이 있어 왕랑의 이미지를 저 먼곳 어딘가로 보내는 역할을 맡는다.

2.4 예장을 정찰하다

197년 착융의 배신 등으로 병에 걸려 오늘 내일하던 유요가 죽자 손책은 예장에 있던 유요의 수하에 있던 무리 1만명이 탐나기 시작한다. 손책은 태사자가 예장의 화흠과 같은 주 출신이기에 그를 불러 예장과 여릉, 파양을 구슬리라고 보낸다.

손책이 태사자에게 말했다. "이전에 유목(유요)이 지난번 내가 원씨(원술)를 위해 여강을 공격했다고 책망한 것은, 그 뜻이 자못 굽어진 것이고, 이치상 용서하기에도 족하지 않소. 어째서겠소? 선군(손견) 수하의 병사 수천여 명은 모두다 원공로(원술)에게 있었소. 내가 대업을 세우고자 뜻을 두었기에 부득불 공로에게 뜻을 굽혀 옛 병사들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었고, 두 차례나 가서야 겨우 1천여 명을 얻었을 뿐이오. 연거푸 나더러 여강을 공격하라는 영을 내리니, 그 때의 사세는 그렇기 행하지 않을 수 없었소. 다만 그 후에 신하의 절개를 따르지 않고, 자포자기하여 참란된 일을 하니, 간언해도 따르지 않았소. 장부가 의로 사귐에 진실로 큰 이유가 있으며, 헤어지지 않을 수 없으니, 내가 원공로와 사귀었다가 관계를 끊은 본말은 이와 같소. 지금 유요가 죽었는데, 그 생전에 그와 함께 같이 변론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소. 지금 (유요의) 어린 아들이 예장에 있는데, 화자어(화흠)가 어떻게 대우하는지, 옛 부곡이 (유요의 아들에게)다시 의지하고 따를지 어떨지 모르겠소. 경은 같은 주의 사람이고, 옛날에 또한 그를 따른 적이 있으니, 가서 그 아들이 어떤지 살펴 보고, 아울러 그 부곡들에게 내 뜻을 전해주겠소? 부곡들 중 기꺼이 오겠다는 자는 함께 데려 오고, 오기 싫다는 자는 또한 안정시키고 위로하시오. 아울러 자어가 예장에서 다스리는 방규가 어떤지 살피고, 여릉과 파양 백성들이 새로 귀부해 올지도 살피시오. 경의 수하의 병사는, 얼마나 많이 거느릴지는 뜻대도 하시오."

태사자가 대답했다. "저에겐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는데, 장께서는 제환공이나 진문공 같은 도량으로 지나치게 대우해 주셨습니다. 옛사람들은 죽음으로써 생전에 보답하고, 절개를 지켜 다하며, 자신이 죽은 연후에 끝났습니다. 지금 아울러 병사들을 휴식시키고 있는데 병사들은 의당 많을 필요는 없고, 수십인만 거느려도 갔다가 돌아오는데는 족합니다." - 강표전

주위 사람들은 태사자가 배반할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손책은 태사자를 믿었고 그 믿음대로 태사자는 돌아왔다. 태사자의 보고에 따라서 작전을 짜 행동하니 결국 손책은 얼마 안가 예장을 평정한다.

처음 손책이 태사자를 파견할 때 사람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해 태사자를 믿을 수 없다고 했는데, 어떤 자가 말하기를 화흠과 같은 주 출신이라 그쪽에 남아 계책을 꾸밀까 두렵다고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자가 의심하기를 서쪽으로 황조에 의탁하거나 길을 빌려 북쪽으로 갈 것이라는 등 태사자를 파견하는 것은 실책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말했다.

손책이 말했다. "제군들의 말은 모두 틀렸으며, 나의 결단은 자세하다. 태사자의가 비록 용기있고 담렬이 있지만, 그러나 제멋대로 구는 인물은 아니오. 그 마음에 선비의 책모가 있고, 뜻은 도의에 지나고, 약속을 귀중하게 여기니, 한번 뜻으로 허락한 지기는 죽어도 서로 배반치 않으니, 제군들은 다시는 걱정하지 마시오."

태사자가 예장으로부터 돌아오니 비로소 의논하던 사람들이 승복했다. 태사자가 손책에게 보고했다. "화자어(화흠)는 훌륭한 덕을 가진 인물이지만, 주략(籌略)의 재주는 없고, 다른 방규도 없이 스스로 지킬 뿐입니다. 또 단양의 동지는 여릉에서 제멋대로 하고 있으며, 조서를 받아 태수가 되었다고 거짓말하고 있습니다. 파양의 백성들 중 우두머리들이 따로 종부를 세워, 험한 곳에 병사를 두여 경계를 지키고 있는데, 화자어가 파견한 장리들은 받지 않으며 말하길 '우리들이 따로 군을 세운 것은 모름지기 한 조정에서 보낸 진짜 태수를 기다려 마땅이 이를 영접할 뿐이다.'라 합니다. 자어는 능히 여릉과 파양의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하고, 인근 해혼에 있는 상료에 보루를 쌓아, 5~6천여 가구를 서로 모아 종오를 지어, 다만 군에 세금을 들이고 있을 뿐이며, 한 사람도 내거나 징발하여 얻지 못하니, 자어 또한 이들을 지켜볼 따름입니다."

손책이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고 겸병(兼幷)할 뜻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예장을 평정했다. - 강표전

2.5 동오의 명장

유표의 조카인 유반이 계속 공격하자 손책이 유반을 막기 위해 202년에 해혼, 건창 및 주위의 여섯 현을 나누면서 태사자는 건창도위가 되었으며, 해혼이라는 지역을 중점적으로 지켜 태사자는 이 지역에서 유반을 상대해 다시는 침범하지 못하게 했다.

태자사가 손책을 따라 마보(麻保)의 도적을 토벌하러 갔을 때, 둔영 안의 어떤 도적이 망루 위에서 욕을 했는데 손으로 망루의 기둥을 잡고 있었다. 태사자가 활로 그를 쏘았는데 화살이 손을 관통하여 기둥에 박히니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그의 활솜씨를 칭찬했다.

조조도 그의 명성을 듣고 당귀(當歸)[9]를 보냈다. 참고로 이 당귀는 당시 중국에서는 귀하기로 소문난 고구려산이다.

2.6 죽음

삼국지연의에서는 합비 공방전에 참전해 그 곳을 지키던 장료의 계책에 빠져 화살을 맞고 전사한다. 그러나 이는 허구다.

정사에선 적벽대전이 일어나기도 전에 죽은데다가 40살에 사망했다.

태사자가 죽을 때 오서에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고 이는 삼국지연의에서도 사용되었다.

대장부로 세상에 태어나 7척 칼을 지니고 천자의 계단에 올라야 하거늘, 아직 그 뜻을 실현하지 못했는데 어찌 죽으랴!

「丈夫生世, 當帶七尺之劍, 以升天子之階。今所志未從, 奈何而死乎!」

여기서 칼을 지니고 천자의 계단에 오르겠단 말은 황제가 되겠다는 뜻으로 오해되기도 하는데, 이 말의 실제 뜻은 검을 휴대하고 천자를 배알하겠다는 뜻이다. 고대 중국에서 신을 신은 채 검를 지니고 황제를 배알하는 것은 일명 검리상전으로 지위가 엄청 높은 신하들에 대한 예우였다. 쉽게 말해서 사내대장부로서 부귀공명을 이루어 세상에 널리 이름을 떨쳐야 하는데 일찍 죽어 그러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는 말.[10]

3 기타

파일:Attachment/태사자/big lion big grave.jpg
태사자의 묘는 중국 강소성 진강시 북고산 서남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삼국지 오서에서는 군벌인 유요 등과 열전이 함께 나열되어 있거나 공융의 수하에 있기를 거절한 점, 죽기 직전에 태사자의 야심을 보여준 유언, 오나라의 체계가 완전히 잡혔다고 할 수 있는 적벽대전 이전에 사망한 것 때문에 부하 무장이 아니라 동맹 관계에 있는 독립 군벌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여담으로 실제 행적과는 관계없이 이름이 굉장히 멋지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배우 김희선도 그 이유 때문에 같은 소속사 후배였던 태사자(아이돌)의 이름으로 추천했다고 한다.

4 미디어 믹스

  1.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태씨인 줄 안다. 이런 오해를 사는 다른 인물이 수호전의 108호걸 중 한 명인 호연작. 이 쪽은 호씨가 아니고 호연(呼延)씨이다.
  2. 비장이라고 불렸고 전한의 불운한 명장 이광도 팔이 원숭이처럼 길어 활을 잘 쏘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정말로 팔이 길었는지, 아니면 활을 잘 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원숭이를 비유로 끌어들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3. 허구로 착각하기 쉬운데, 삼십육계 중 1계인 만천과해를 설명할 때면 빠지지 않는 실제 사건이다.
  4. 이 장면은 삼국지연의에서도 채용되어 두 젊은 장수의 용호상박의 혈투는 연의 안에서도 손꼽힐 정도의 명장면이 된다.
  5. 오력에서는 태사자가 신정에서 붙잡혔다고 하는데 배송지는 이건 개소리라고 무시하라고 말한다.
  6. 말 그대로 당돌하다 못해 무모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대답.
  7. 춘추시대에 제양공이 혼미해졌을 때, 관중은 공자 규를, 포숙은 공자 소백을 각자 섬기고 있었는데, 제양공이 죽고 난뒤, 다투어 제로 들어가 임금이 되려 할 때, 길에서 관중이 소백의 허리띠의 갈고리를 쏘아 맞춘 일. 소백은 임금이 되어서 옛 원한을 잊고 관중을 재상으로 삼았다.
  8. 발제(勃鞮)가 진문공을 죽이려다 죽이지 못하고 옷소매만 베었던 일.
  9. 한자를 해석하면 고향인 북쪽으로 돌아와 자신에게 귀부할 것을 권유한 것이다. 아내가 남편에게 보내는 약재이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흠좀무. 이 당귀를 보낸 것은 강유의 어머니가 강유를 권유할 때도 있었다.
  10. 하지만 실제 검리상전을 실현한 사람들은 살아 생전에 황실의 권위를 능멸하고, 자식 대에 이르러서 황위를 찬탈한 조조, 사마소라서(...) 이것도 나름 문제. 물론 실제 태사자의 속마음이 뭐였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