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일본의 조선적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 다만 조선적 학생만 다니는 것은 아니다. 학비가 싸며 한글을 쓰고 차별이 없기에 한국 국적임에도 조선학교를 선택하는 학생들이 적잖다고 한다. 아니 오히려 한국적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조선적은 아주 드물며 최근엔 찾아보기 매우 힘든 정도이다! 드물게 일본 국적을 선택한 재일 조선인이 들어오는 경우도 있는 듯. 이와 비슷하게 대만 교육과정을 따르는 한국의 화교학교도 중국 대륙에서 온 사람들의 자녀가 다니는 경우가 있다. 코렁탕 안먹나?
역사는 일제강점기 때까지 일본내에 거주하는 재일 조선인은 주로 개인주택·혹은 공사립 학교·공장을 임대하는 형태로, ‘국어 강습소’라고 하는 조선어에 의한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교육시설을 전국 각지에 만들었다. 해방 이후 한반도 정치 정세가 악화되자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이 문부과학성을 통해 조선학교폐쇄령을 선포하게 된다. 이에 재일 조선인들은 반발해 반대 운동이 전개되었고 한신 교육투쟁도 여기서 나오게 된다.
1949년 10월에 재일본조선인연맹이 ‘단체 등 규정령’에 의해 해산되면서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백두학원(현재의 건국소학교·건국중학교·고등학교)를 제외한 모든 조선학교가 폐쇄되었다. 이후 1950년대 이후 조총련과 북한이 지원하면서 다시 일으키게 된다.
조총련과 관련있으며 북한의 지원을 받고 있다. 교실이나 교무실에 김일성, 김정일부자의 사진이 걸려 있을 정도. 친북 성향의 교과서[1]의 커리큘럼으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을 왜곡한다는 논란이 있다(6.25 북침설, 김부자 우상화 등, 태양절 기념 행사도 한다).
대개 여학생들의 한복 교복. 하얀 저고리와 검은 치마[2]가 유명하며 치마저고리란 단어가 일본에서도 유명해지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한 학교다. 그러나 혐한들의 눈 때문에 현재는 통학할 때는 블레이저를 입고 교내에서만 그 교복을 입는다고 한다.
2007년경 부터 일본에서는 조선학교 무상화, 보조금 지급 문제가 큰 문제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원래는 보조금을 지급하다가 일본인 납치사건, 핵실험 등으로 대북감정이 악화되면서 조금씩 문제시 되고 있었으며, 여기에 2010년 11월 23일, 연평도 포격 사태가 일어나면서 도쿄도가 보조금 지급을 취소하였고 오사카는 북한 찬양과 반일 사상 등 교육내용에 문제를 제기해 결국 학교측에서 김일성 부자의 사진을 철거하였지만 학생들을 방북시켜 김일성을 찬양하는 공연을 한것이 문제가 되어 보조금 지급이 중지되었다. 일본의 대북 감정은 매우 좋지 못한 편이기 때문에 이런 조치들이 취소될 가능성은 당분간 없다.
한국으로서도 조선학교를 옹호하기는 곤란한 입장이다. 아무리 조선학교가 동포들의 민족의식/한국어/한국사 교육을 도맡고 있다지만, 조선학교에서는 분명 북한 찬양 교육을 하고 있기 때문에 조선학교를 옹호하면 일본 내 북한세력이 커지는 결과가 되는 난처한 상황이 벌어지며 일본의 대북감정을 고려하면 한국에 대한 일본의 시각도 안 좋아지는 결과를 낳는다. 국내 언론보도 역시 언론사의 대북관에 따라 견해가 크게 다르다. 대만인이 외국에서 간체자로 중국어를 가르치는 것이나 비슷할까 남한계인 재일본 대한민국 민단은 아직까지 조선학교와 같은 교육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하고 있다. 일본 전체에 민단 계열 학교가 단 4개 뿐인 반면 조선학교는 오사카부에만 해도 10곳 가까이 있어서 조선학교가 월등히 많다.
전국에 68개의 조선학교가 있지만 원래 지방자치단체에서 보조금을 주지만 북한과의 관계가 갈수록 안 좋아지자 보조금을 주는 것을 미루는 척을 하면서 사실상 지급 중단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
수학여행으로는 주로 북한의 평양을 간다고 한다. 하지만 외국인 취급받으면서 관광코스만 돌 수 있다고. 수학여행코스는 시설도 괜찮고 평양을 방문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특권이기 때문에 학생들의 평도 나쁘지 않다고 한다.
조선학교에서는 조선어를 쓰는 것이 규칙이지만, 교사들조차 조선어 구사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사실상 일본어가 주로 쓰인다. 하지만 교칙과의 이상한 타협(…)으로 선배들과 대화할때 일본어로 문장을 구사한 후 어미에 ~이무니다 정도만 붙여주는게 불문의 룰인 학교도 있다고 한다.(…) 어디서 많이 본거 같은데
운동권 출신의 배우 권해효가 조선학교 지원운동을 꾸준히 하고 있는데, 시기적으로 차인표의 탈북자 구명 운동과 대비되고 있다.
모리 카오루 여사는 조선학교 학생들에게 하악(?)거린 적도 있단다. 정확히는 치마저고리 차림 때문. 역시 복식 덕후.
2 지역별 학교 목록
3 졸업 후 진로
암담하다.
가업을 잇거나 재일교포 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그 안에서만 맴돌며 취업하는 경우가 많다. 예전에는 일반 기업 취직은 상상도 할 수 없었고, 정말 잘 풀려야 예체능이나 학문 쪽에서 두각을 드러내 자리를 잡는 정도였다. 제일 안 좋은 방향으로 가버리면 야쿠자가 되는 것. 그나마 2003년 경부터 조선고등학교 학력을 고졸 학력으로 인정[3]해주도록 일본 문부과학성 방침이 바뀌어 전보다는 숨통은 틔였지만, 조선학교 대부분이 교육보다는 사상 교육에 비중을 많이 할애하는 편이라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상위권 대학 진학도 쉽지 않다. 일본쪽 대학 진학을 원하는 학생은 따로 공부하지 않으면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수준. 조총련에서 지원하는 대학교인 조선대학교[4]가 존재하긴 하나 이곳만으로 대학 교육을 맡기에는 역부족이고, 그나마 이곳조차도 아직 완전히 정식 대학으로까진 승인받지 못한 상태이다. 대학교에 준하는 교육기관 정도의 위상.
사실, 조선학교 출신 외에도 재일교포들이 범죄조직에 가담하거나 도박 및 파칭코 세계를 꽉 쥐고 있어 일본 사회에 큰 고질병이 된 것은 일본이 자신들이 강제로 징용하거나 끌고와놓고 이런 식으로 재일 조선인들을 차별하며 앞길을 막아댔으니 결국 이들이 어둠의 길로 들어가게 되어 자업자득으로 돌아온 것으로 볼 수 있다. 한국은 공권력의 여러 노력 하에 조폭이 제법 기를 못 펴는 국가 중 하나이고 일상 사람들에게는 도박이라는 것도 크게 문제로 다가오지 않으면서 자기네 나라에서 도박 사업을 하고 범죄조직을 만들어 자꾸 사회 문제가 된다고 일본인들이 불만을 털어놓기도 하지만..
축구선수 대부분은 일본이름 없이 한국식 이름으로 활동하는 편이다. 량용기, 리한재처럼 두음 법칙도 당연히 안 쓴다.
4 남한 국적자가 조선학교로 진학하는했던 이유는?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돈문제 때문이다.
남한 국적자들도 물론 한국어를 배울 수 있는 학교로 보내고 싶어한다. 민단에서 만든 '한국인학교'가 있지만, 조선학교에 비해 그 수가 매우 적고 특수학교로 분류되기 때문에 초등학교를 다니더라도 등록금을 내야 한다. 초등학교부터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등록금의 연속이다버틸 수 없다! 물론 국가 보조금이나 대한민국 정부에서 내는 지원금은 거의 없거나 있어도 쥐꼬리만한 수준(...).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서민들이 다니기 힘들고, 외교관과 주재원들의 자녀들이 다닌다.
이에 반해 조선학교는 일단 학비와 등록금이 싸다. 초창기에는 북한에서 지원받았지만 지금은 그런 거 없다. 1970년대만 하더라도 빵빵하게 지원받았지만 현재는 지원금이 10분의 1 수준도 안되게 확 줄어들었다. 미국의 소리 무상교육 시설로써도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등록금이 있긴 있지만, 고급학교(고등학교)기준으로 1년간 50만엔으로 비교적 남한계 민족학교보다는 저렴하다. 참고로 남한계 한국학교의 월 등록비는 10~15만엔, 1년으로 치면 120~170만엔 으로 2~3배나 되는 액수다(...)
물론 일본계 공립학교로 진학하는 경우도 많다. 이 경우는 면제이기 때문에.
5 조선학교 출신 인물
6 조선학교가 등장하는 작품
- ↑ 본국에서 교과서를 가져와서 쓰지는 않고, 자체 제작을 한다. 본국의 학제는 4-6이지만, 6-3-3인 일본 학제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기도 하고.
- ↑ 일명 류관순 교복으로 불리는 그것.
- ↑ 바꿔 말하면 이전까지는 인정을 안해줘서 고교 졸업 후 대입을 보려면 고교 검정고시를 따로 치러야했다.
- ↑ 한국 광주광역시에 있는 조선대학교와는 별개의 학교이다.
- ↑ 릿쇼대학교로 진학
- ↑ 한난대학교로 진학
- ↑ 다큐멘터리 영화로, 영화 감독이 직접 홋카이도의 조선학교로 찾아가 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며 1년간의 학교 생활과 인터뷰를 엮어서 만든 작품으로, 재일 조선인의 생활과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물론 영화 촬영 당시와 사정이 바뀐 것도 많고, 조총련 쪽 시각으로 다소 감성적인 측면에 호소하는 인상도 강하기 때문에 이 작품이 조선학교와 재일 조선인의 생각을 모두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