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궁

파일:Attachment/b64543a98226cffcbe4eeacab9014a90f603ea66.jpg

義釋曹阿瞞(의석조아만) : 의리로 조아만(조조의 아명(兒名))을 풀어주고,

中牟解印來(중모해인래) : 중모에 관인을 버리고 따라나서네.
誰知白門下(수지백문하) : 어찌 알았으랴 백문아래에 버려질줄이야,
真個負公臺(진개부공대) : 아깝고도 아깝도다 공대여.

陳宮
(? ~ 198)

1 개요

후한 말에 조조장막, 여포를 섬겼던 모사였다. 는 공대(公臺). 연주 동군 사람. 그의 열전은 《정사 삼국지》 <여포전>에 주석으로 달려있다.

2 정사

2.1 연주 구원전

정사에서의 진궁은 조조가 막 거병하였을 때 모사로서 그와 함께 일했다. 연주 구원전에서 진궁의 행적을 찾을 수 있다.[1]

연주자사 유대가 연주를 공격한 황건적에 의해 죽는다. 진궁은 연주 사람들을 설득하여 그들이 조조를 연주목으로 삼아 황건적으로부터 연주를 구원하도록 해보겠다고 조조에게 청하였다.

진궁의 설변을 들은 연주의 포신 등은 이를 옳다고 여겨 조조를 맞이해 연주목을 겸하게 했다. 조조는 황건적을 격파했지만 포신은 전투 중에 죽었다.

2.2 연주에서의 반란

조조가 거병하였을 때 진궁은 모사로서 조조와 함께 일했다. 그러나 진궁은 스스로 의심을 품었다고 한다. 여포전에 주석으로 달린 위씨춘추에 따르면 엄씨가 말하기를, 조조는 진궁을 어린아이처럼 귀하게 대했는데도 불구하고 진궁은 오히려 조조를 떠났다.[2] 조조의 두번째 서주 침공 무렵에 동료 모사였던 왕해, 허사, 그리고 장막의 동생이던 장초와 함께 장막을 설득해 여포를 연주목으로 내세워 조조를 공격하자고 설득한다.[3]

이 무렵 조조의 악명이 워낙 높았던 데다가 장막과 여포 같은 거물들이 합세하여 조조를 공격하였더니, 연주 전지역이 이에 호응하여 조조는 멸망 직전의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하지만 순욱정욱의 활약으로 인하여 조조는 연주의 일부 지역을 유지할 수 있었다. 여포군은 조조를 거듭 공격하여 몰아세웠으나, 그 해 메뚜기떼가 극성을 부려 군량이 부족해졌으므로 결국 결정타를 가하지 못한 채로 군사를 물리어 두 군세가 대치한 채로 싸움은 장기전이 되었다.

틈을 놓치지 않고 군사를 수습한 조조는 이듬해부터 점차 반격을 거듭하여 군현을 되찾기 시작했고, 마침내 정도에서 여포를 대파하여 전세는 조조에게로 기울었다. 비록 연주 전지역이 장막에게 호응했다지만, 맹주의 확고한 지휘력이 미치지 못하는 연합체의 특성상 단합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고질적인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다.[4]

결국 상황이 불리해지자, 여포는 달아나 서주의 유비에게 몸을 의탁하였다. 진궁을 비롯한 장막의 수하들 또한 서주로 달아났다. 정작 장막 본인은 원술에게 구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수춘으로 떠났고, 장초는 장막과 합류하기 위해서였는지 옹구(연주와 남양주의 경계 지역)에 남는다. 하지만 장막은 수춘에 다다르기 전에 부하의 배신으로 인하여 살해되었고, 장초는 조조의 군세에 포위되어 아무런 원군이 없는 상태에서 수 개월간 항전하다가 결국 성이 함락되자 자살했다. 이 과정에서 여포는 영지를 잃어버렸고 진궁은 어쩔 수 없이 여포군 소속이 되었다.

2.3 군주와 반목하는 참모

땅을 잃은 여포는 진궁의 진언대로 원술군과 미리 짜고는 유비군의 뒤통수를 쳐서 성공적으로 서주의 하비성을 획득하였다. 그러나 여포는 유비군을 말살시켜야 한다는 진궁의 진언은 무시한 채, 원술군의 뒤통수를 쳐서 유비군의 생존을 보장하는 실책을 저지르고 말았다.

진궁은 본래 여포와 끝까지 함께 하며 여포의 군세에 예속될 뜻을 품고 있지 않았었기에, 비록 그가 여포의 세력에 소속되었어도 그와 여포는 계속 서로를 믿지 못하며 반목하였다. 그 결과 여포는 진궁이 제시한 의견을 대부분 무시하기 시작했고, 입지면에서 불안함을 느낀 진궁이 학맹, 조성 등과 반란을 계획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학맹의 부장인 조성이 학맹을 배반하는 바람에 학맹과 조성이 서로 싸우다가 서로를 찔러 상처를 입고 학맹은 고순에게 붙잡혀 처형당하였다.

이때 여포 앞으로 간 조성이 사실 학맹은 원술의 계책을 따랐을 뿐이고 진궁도 같이 공모했다고 말하자 진궁의 얼굴이 붉어졌다. 진궁을 제거할 경우 파장이 만만치 않을 것을 우려한 여포는 학맹의 반란 사건을 불문에 부쳤다. 본격 콩가루 여포군

2.4 여포의 몰락

그 후 정치적 상황의 흐름을 읽지 못한 여포가 진궁의 진언에도 불구하고 조조와 연합하는 최악의 자충수를 두었다. 조조와 여포의 연대에 원술이 크게 패했으나 결국 논공행상에서 여포에게 돌아가는 것은 없었고, 여포가 말이 약탈당한 것을 이유로 유비를 치자 조조는 여기에 개입해 여포를 공격하였다. 이때 진등 부자는 조조에게 붙어 반기를 들었으며, 여포는 뒤늦게야 원술과 연합하여 요격을 시도했지만 패하여 성렴이 사로잡히고 하비는 포위되었다. 조조는 여포에게 편지를 보내서 여포의 투항을 유도하였다. 편지에 설득당한 여포가 투항하려고 했으나, 진궁 등이 자신들의 죄가 크다며 저지했다.

물론 진궁이 아무 대책 없이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성을 지키고 여포는 군사를 이끌고 성 밖으로 나가서 기각지세를 이루면 조조를 격파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여포도 이를 받아들였지만, 여포의 부인 엄씨가 진궁은 의리가 없을 뿐더러[5] 고순과 서로 불화하여 제대로 성을 지키기 어렵다고 지적하자 계책을 포기했다.

결국 여포는 하비성에서 고립된 채 농성하며 그저 원술의 원군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최악의 수를 선택했다. 이미 쇠락한 지 오래였던 원술군은 싸움에서 맥없이 무너졌고, 여포 스스로는 내부 결속을 이유로 농성을 선택해놓고도 오히려 제장들 간의 불화를 가중시켜 후성, 위속, 송헌 등이 조조와 내통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후성 등은 진궁을 사로잡은 채 성문을 열어 휘하 군대를 이끌고 조조에게 투항했으며, 여포는 남은 군사들과 백문루에서 저항하다가 끝내 투항했다.

2.5 죽음

조조는 고순 등을 처형한 후 진궁을 대면하였다. 그때 그들이 나눈 대화가 남아 전해져 내려온다. 단 연의에서는 조조가 여백사 때의 일을 떠올리는 부분이 추가되었다.(김홍신 평역판 기준)[6]

고순이 처형당한 후 진궁이 군사들의 손에 이끌려 왔다. 이에 조조는 반가움과 비웃음이 뒤섞인 웃음을 지으며 그를 맞이했다.

"공대! 오랜만이군.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가?"
"보는 바와 같다. 그대가 간악하고 불충하여 그대를 버리고 떠난 건데 무슨 말이 필요한가?"
진궁이 매섭게 말하자 조조는 정색하고 진궁에게 물었다.
"그대는 평소 스스로 지혜가 있어서 남들보다 낫다고 말했는데,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나?"
이에 진궁은 여포를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승부는 시운(운)에 달렸을 뿐, 다만 이 사람이 내 말을 듣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런 꼴을 당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럼 그대를 어떻게 하면 좋겠나?"
이에 진궁이 결연히 외쳤다.
"오직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어서 내 목을 베라!"
이 때 조조는 갑자기 과거의 회상이 떠올랐다. 중모현에서 의기투합해서 같이 도망간 진궁이 지금 자신의 앞에 묶여 있는 것이다. 여백사를 죽이자 그대와 같이 냉정한 자는 따를 수 없다고, 자고 있는 조조를 베어버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떠나버린 진궁이 아닌가. 이에 조조는 진궁의 마음을 돌릴 생각으로 물었다.
"공에겐 노모와 자식이 있지 않은가. 그들은 어떻게 할 건가?"
이에 진궁은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결연히 말했다.
"무릇 효(孝)로써 천하를 다스리려는 자는 남의 부모를 해치지 않고, 인정을 베풀려는 자는 남의 후사(자손)를 끊지 않는다 하였다. 나는 이미 패장인 몸, 죽기만을 바랄 뿐이다."
조조는 그 말을 듣자 더욱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진궁은 조조의 갈등을 알아채고는 여포에게 차가운 눈빛을 던진 후 스스로 형장을 향해 걸어갔다. 조조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몇 걸음 따르다가 주위에게 그를 붙잡으라 하였다. 하지만 진궁은 그들의 손길을 뿌리치고는 형장으로 계속 걸어갔다. 조조는 계속 몇 걸음 뒤따르다 눈물을 흘리며 명령을 내렸다.
"진궁의 노모와 가족을 여기로 모셔서 극진히 받들라. 이를 어기는 자는 목을 베리라."

진궁은 이 말을 들으면서 목을 내밀어 칼을 받았고, 주위 사람들 역시 조조의 슬픔과 진궁의 당당한 죽음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이래저래 말은 많지만 최후의 일화만큼은 폭풍간지.

3 진궁은 여포의 심복이었는가?

본디 진궁이 장막에게 여포를 맞아들이자고 한 요지는 여포가 싸움을 잘하니 그를 연주목으로 추대하여 조조를 물리친 뒤 일정 지분을 주어 떼어내고, 연주를 기반으로 패업을 이루자는 것인데, 이 말인즉, 장막이 형식상으론 여포를 연주목으로 추대하는 모양새지만 실상은 여포를 월급사장으로 삼아 그 권위와 군사 지휘력을 이용하다가 적당한 시기에 해고하자는 말이라 진궁은 장막의 충실한 심복이라면 몰라도 여포의 심복이라 보긴 어려웠다.

진궁은 여포를 따랐다기보다는 조조에게 반기를 들기 위해 여포를 선택했다는 쪽이 훨씬 신빙성이 높다. 2차 창작물에서야 여포의 충신 혹은 유일한 이해자로까지 그려지는 모습을 보이나, 애시당초 진궁이 선택한 주군은 장막이며 여포는 용병대장에 지나지 않았다. 장막 사후에는 갈 곳이 없으니 완전히 여포에게 편입되는 모습을 보이지만 여포는 진궁을 소외시켰고, 진궁도 원술과 연계해 반란을 도모하는 등 그마저도 상호 견제에 가까웠다.

여포는 동탁을 죽인 뒤로 장안 조정에서 명예직이지만 삼공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고, 당시 장안 조정을 장악했던 이각, 곽사 등도 슬슬 여포를 회유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리던 상황이었다. 반면 조조는 연주자사 유대의 죽음으로 자사가 공석인 상황에서 연주 호족들의 추대로 연주자사 대리를 맡아 혼란을 수습하고 조정의 정식 인가를 받았다는 것이 정사의 서술이지만, 실상은 정식 연주자사 금상을 내쫓고 연주를 점거한 것을 관동의 실력자였던 원소가 연주자사라 인정해준 것으로 대놓고 불법적이다. 조정에게서 이를 추인받는 것은 그 이후의 일.

다만 진궁을 비롯해 장막을 중심으로 뭉친 연주 호족들은 자신들의 지역적 기반인 연주에서의 영향력을 잃고 쫓겨난 데다, 그 구심점이었던 장막까지 사망한 상황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여포 휘하에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여포도 이런 진궁 등을 예쁘게 볼 리 없다. 이 때문인지 여포가 서주를 점거하고 세력 구성이 다양해지자[7] 진궁 등은 점차 발언력을 잃고 괄시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는 원술과 연합해서 조조를 견제하자는 진궁 등의 헌책이 번번히 가로막히고, 오히려 조조와 연대해 원술을 칠 것을 주장하던 진규, 진등 부자의 진언이 연이어 채택되는 모습에서 확인되는데, 진궁이 딱히 여포에게 충신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실제로 당시 여포의 입장에서는 조조보다는 원술과의 연대가 필연적이었고, 원술 또한 매우 호의적인 태도로 여포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진궁뿐만 아니라 왕해, 허사 등 기존 장막 계열의 인물들은 대부분 이쪽에 가까웠다.

하지만 여포가 장안에서 실각하고 원술에게 망명했으나 내쳐진 일을 원망했다고 하는데, 처음에 원술이 여포를 극진히 환대했으나 여포가 지독히 방자하고 영내에서 노략질을 일삼는 등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데 질려한 일을 들어 원술을 꺼려했고, 진궁이 계책을 내놓아도 진규와 진등이 번갈아 반박하여 계속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입지의 불안을 느꼈는지 원술의 사주를 받고 학맹 등과 공모하여 여포에게 반란을 계획하기도 하지만, 무력 봉기에 나선 학맹이 여포를 죽이는 데 실패하고 여포가 고순의 활약에 힘입어 학맹의 난을 조기 진압한다. 이때 진궁은 모르는 척 회의에 참가했으나 조성의 증언에 의해 그 자리에서 공모 사실이 드러나는 수모를 겪는다. 여포는 후폭풍을 두려워했는지 진궁이 일군을 이끄는 대장이라는 이유로 이 사실을 불문에 부쳤지만 이후 진궁의 입지는 완전히 추락한 듯하다.

하지만 여포가 그렇게 잘 보이려 노력했던 조조는 원술이 약해지자마자 여포를 쳤고, 그 주선자였던 진규 부자 역시 조조에게 붙어버렸던 만큼[8] 원술과의 연대를 주장하던 진궁의 내부적 입지는 급상승했으며[9] 주전론으로 기울어진 것도 이런 영향 아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포는 끝까지 진궁을 믿지 못했고 이는 최악의 결과를 불러왔다.

4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조가 여백사 일가를 죽일 때 동행했다거나 도겸을 공격하는 조조를 설득하려는 장면이 추가되었다. 그리하여 조조의 비정함을 표현한 짧은 일화의 등장인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연의에서는 본래 중모현의 현령을 지내고 있었는데, 동탁을 암살하려다 실패하여 도망치던 조조가 중모현을 지나다가 암살자 조조를 찾는 검문에 걸려 체포되었다. 진궁은 십상시 건석의 아비를 때려 죽인 조조의 높은 의기와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는, 밤 늦게 조조와 은밀하게 대면하였다. 평소부터 맹덕의 의기에 감동받아왔던 그는 벼슬은 물론 가족까지 버리고[10] 조조와 뜻을 함께하여 같이 도망가게 된다.

이리 저리 잘 도망다니던 중, 조조는 잠시 몸을 숨기기 위해 부친의 의형제인 여백사의 집에 들렀다. 여백사는 그들을 융숭히 대접하기 위하여 술동이를 사오려고 시장으로 가서 잠시 자리를 비우게 되었다. 진궁과 조조는 손님을 위한 방에서 쉬고 있던 중, 칼을 가는 소리와 함께 묶어서 죽일까 아니면 그냥 죽일까라는 대화를 엿듣게 된 조조와 진궁은 함께 여백사의 가족을 먼저 죽이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집안의 종들이 돼지를 잡으려던 것뿐이었다.

이에 조조와 진궁은 실수를 자책하며 집을 떠났지만, 시장에서 술항아리를 사서 돌아오던 여백사와 마주치게 되었다. 그들에게 호의적이었던 여백사가 단순한 오해로 인하여 그의 가족들을 죽인 조조와 진궁에게 역정을 내며 관가에 신고할 것을 두려워한 조조는, 후환을 방지하기 위해 여백사의 관심을 다른 곳에 돌린 사이에 곧장 그를 베어버렸다. 평소 조조의 의기를 신망하고 있던 진궁은 이와 같은 광경에 조조의 무자비함을 책망하지만 조조는 자신이 천하를 저버릴지언정, 천하가 자신을 저버리게 할 수는 없다며 자신을 변호하였다.

진궁은 조조와 함께 어딘가에서 자다가 조조가 세상의 만민을 구원할 구세주가 아니라 단지 야망에 불타는 간웅이었음을 깨닫고 자신의 선택을 후회한다.[11] 그러나 그런 간웅을 내려준 것 또한 하늘의 뜻이라 여기고 조조를 둔 채 도망가게 된다.

이후 진궁의 행적은 불분명하나 조조가 조숭의 죽음을 기화로 서주 대학살을 일으키며 도겸을 정벌하려 하자, 진궁이 나타나 조조에게 가서 그를 대면하여 군사를 돌리라고 설득한다.

조금만 더 신중히 생각하시오.도겸 어르신은 그대와 같은 자가 아니오. 그대와 같이 온정을 베푼 자를 죽이지도 않을 뿐더러 탐욕 때문에 인의를 지는 자가 아니란 말이오.

하지만 조조가 벌컥 화를 내며 거절하자, 물러나온 후 장막에게 몸을 의탁한다. 이후 사방에서 쫓겨다니던 여포를 거두는 방책이 세력 확장에 좋다고 설득하여 장막에게 여포를 끌어들이게 하고는 여포의 모사가 되었다.

이후의 행적은 정사와 흡사하다.

5 평가

5.1 정사의 모습 평가

진궁 본인의 방향성이 여포와 같지 않았고 그 처신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었지만, 여포도 할 말이 없는 게 그는 조조원술의 대립 구도에서 조조를 지지하여 천하 판세를 읽음에 있어 커다란 헛다리를 짚고 있었고, 진궁을 대신한 인선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부하들의 처와 사통하는 등 스스로 자신을 옭아매었다. 천하의 형세를 제대로 읽고 여포에게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해준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여포에겐 과분했던 인재다.

여포는 판단을 잘못했다. 196년 이후 조조와 원술의 대립 구도에서 이미 원술은 끝내 불리한 상황을 마주하게되었고, 이로인해 한결 홀가분 해진 조조는 아쉬울 것이 없었다. 사세상 (실제로도 그랬지만) 여포가 조조에게 붙었다 한들 제거 시점이 늦춰지는 정도였던 반면, 원술이 유독 여포에게 우호적으로 접근하고, 스스로는 칭제라는 무리수까지 두었던 이유는 내부의 결속과 우방군벌 확보를 위한 몸부림이었으므로 여포가 원술에게 협력하고 함께 조조와 대적하면 서로에게 유리했다. 조조는 길길히 날뛰며 여포를 시샘하였지만, 원술은 동맹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여포는 조조를 선택하였다. 이러한 그의 선택은 상식적으로 납득되지 않는다.

여포가 주인을 여러번 갈아치웠던 것도 모자라 때 이른 죽음에 이르게 한 소인배였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여포는 궁리하여 상황을 따져본 결과 조조가 점차 유리해진다고 판단을 하였고, 곧 이어 자신과 조조의 세를 비교해보아 자신은 조조를 못 이긴다는 결론에 이르자, 아마도 그는 조조에게 깨끗이 항복하고 '사람 중 여포'라는 무장으로서의 자신의 명성과 능력을 사람을 씀에 있어서 허울보다는 능력을 중요시 하였던 조조에게 맡길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포는 조조라는 인물에 대해 별달리 아는바가 없었는데, 반면에 공대는 한때는 조조와 함께 일하며 연주 지방의 여러 고을을 설득하여 조조의 영향력을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초나라 땅에 모여있던 조조의 기반을 다진 공로가 있는 인물이었다. 여포의 이러한 결정에서 비춰 볼 때 여포는 조조의 서주 침공 중 여포가 조조의 많은 고을을 점령하는 등 민폐를 끼친 행각들을 망각한 것 같지 않은가?

더불어 그는 사람을 잘못 썼다. 여포는 진궁을 믿지 않았는데, 진궁 또한 여포를 진정으로 따르지 않았다, 진궁은 당시의 형세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으므로, 여포가 진심으로 진궁에게 협력했다면 최소한 그렇게 일방적으로 이용당하다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5.2 연의의 모습 평가

연의에서도 기구하긴 마찬가지인데 목숨을 건 도주라는 극한 상황에서 극단적인 가능성을 생각하고 여백사를 죽인 조조의 행위를 도덕적 기준에서 혐오해서 조조를 떠나 놓고 선택한 게 자기 양아버지 둘의 목을 딴 데다 취미가 배반이었던 성 셋 가진 종놈 여포였다는 것 때문에 이해할 수 없다는 의견도 많다. 이문열같은 경우는 유비의 뒷통수를 치자는 계책을 진언하는 진궁이 난세에 쓸려 씁쓸하게도 타락했다고 해석했다.

다만 적어도 당시에 큰 악행을 저지른 군웅은 동탁이나 연의에선 선인으로 나오지만 본래는 진짜 막장이였던 공손찬 정도를 제외하면 조조가 유일하였고 학살의 규모로 따지면 조조가 1위였다.[12] 또한 진궁이 원술에게 우호적이었던 것은 원술이 황제를 참칭하기 전부터였다. 대강 정리해보면 악인 조조를 처리하기 위해 차악인 여포, 원술을 택한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정작 여포군에선 살벌한 동거를 하며 지냈고 결국 계책을 간언해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 이후 조조군에 잡혀서 죽었으니 안타깝다면 안타깝고 운명이라면 운명이라고 할 수 있겠다.

6 미디어 믹스

진궁/기타 창작물 항목 참조.
  1. 연주 구원전에 관한 내용은 《정사 삼국지》 <여포전>에 달린 주석이 아닌 《정사 삼국지》 <무제기>에 실려있는 내용이다.
  2. 진궁이 조조를 배신한 이유에 대해서 알 길이 없다. 조조의 서주 대학살에 실망했다는 견해가 있다.
  3. 일반적으로는 연주의 인사들이 여포에게 귀의한 것으로 인식되어 있으나, 실상은 이름값이 높은 여포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운 것에 불과하다. 이들은 사실상 장막과 여포의 연합 관계였다고 봐야 타당하다.
  4. 관중 십장을 규합하면서 폭발적인 위세를 보였지만, 전세가 장기화되자 구성원들 간의 내분으로 인하여 지리멸렬하다가 패한 마초와 비슷한 맥락이다.
  5. 연의에서는 충의지사인 진궁의 말을 여포가 부인의 말만 듣고 무시했다는 식으로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일리있는 의견이다.
  6. 조비의 《전론》에서도 나온다. 하지만 내용은 완전 다르다.
  7. 정원이나 동탁 휘하 부터 함께했을 고참 부하들과 진궁을 비롯한 연주 호족들의 잔당이 여포의 기존 세력이였다. 그런데 서주 점령 후 장료, 장패 같은 객장들에 유비에 반기를 들며 여포를 추대한 조표, 왕해, 허탐 등 단양 출신의 구 도겸파 인사들과 진규, 진등 부자 등 기존 서주 토호들이 합류했다. 고순은 배경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진궁과의 갈등을 근거로 여포의 고참 수하로 추측하고 있다.
  8. 사실 여포는 진등도 믿지 않아서 진등의 동생들을 인질로 잡고 있었으며 진등은 이에 굴하지 않고 여포와 싸웠다. 여포가 진규 부자를 신뢰했다는 건 연의 설정이다.
  9. "조조는 진궁을 맏아들처럼 총애했는데 지금 당신(=여포)이 진궁을 대하는 것은 그보다 더하다." 는 엄씨의 발언에서 확인된다.
  10. 다만 다음에서 서술할 여백사 일가 살인사건 직후 조조를 떠났다는 서술이 나오기에 다시 중모현으로 돌아간 걸로 추정된다.
  11. 김홍신 평역판에서는 아예 죽여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12. 사실 조조가 도겸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여서 복수심에 눈이 멀어 제정신이 아닌 상황이라지만 아무런 상관도 없는 서주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는 것은 엄연히 폭군이라 할 말 없는 만행이다. 실제로 서주 시민들이 도겸이 사망하자 유비가 서주목이 되기를 빌었을 것을 생각하면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