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어스 니에레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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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의 국가평의회장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므왈리무[1] 줄리어스 캄바라게 니에레레(Mwalimu Julius Kambarage Nyerere, 1922년 4월 13일 ~ 1999년 10월 14일)

탄자니아국부이자 초대 대통령.

1 소개

겉으로 보면 화려하게 잘 한 건 없어 보이지만, 탄자니아란 나라를 안정화시키고 문맹 줄이는데 큰 기여를 하고, 사실상 독재자였지만 권력을 죽을 때까지 독점하지 않고 평화롭게 정권을 양도했다는 점으로도 칭송받는다. 일단 대통령 한 번되면 죽을 때까지 하는 줄 아는 이들이 수두룩한 아프리카에서 이런 사람은 정말이지 대범한거다. 문맹 줄인것만 해도 큰 공을 세운 건데? 탄자니아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 가운데 하나이다.

더불어 탄자니아를 아프리카에서 내전이 거의 없는 나라로 만든 공로자임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엄청난 사람이다. 탄자니아가 아직 통합되기 전, 그러니까 탕가니카잔지바르로 양분되어 있었을 때부터 독립운동에 가담한 사람이다. 그는 1929년 당시 탕가니카 지역으로 영국의 식민지였던 탕가니카에서 아프리카 민족연합(TAA)를 조직하여 탕가니카인들의 권익을 위해 힘썼다. 이후 탕가니카가 독립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해서 1962년에는 탕가니카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탕가니카가 잔지바르와 통합하고 탄자니아가 출범했을 때도 국민들의 그에 대한 지지는 열광적이여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탄자니아 인구의 60%가 기독교인이고 40%가 이슬람교도인데, 비슷한 상황 국가들을 보면 분쟁 없는 게 얼마나 경이로운지 알 수 있다. 침팬지 연구로 유명한 제인 구달의 책에서도 언급되는데, 1960~70년대 탄자니아에서 연구하던 그녀는 국경 근처를 봐도 이웃 나라들에서 화염이 올라오는 걸 자주 본 반면, 탄자니아에선 그런 일을 한번도 겪지 않았다고 썼다(난민들이 오면서 벌어지는 치안 문제로 강도를 당한 적은 있지만). 그녀의 두번째 남편이자 탄자니아 독립 이후에도 남아서 귀화하여 선거로 국회의원이 된 유일한 백인 데보 브라이슨도 이 나라만큼 주변에서 평화로운 나란 없다고 자랑했단다. 참고로 이 브라이슨이 지지하던 사람이 니에레레. 덕분에 니에레레에게 도움도 많이 받았기에 정치에 대하여 별다른 말을 삼가던 그녀는 탄자니아의 안정 및 침팬지 연구 보호에 니에레레의 도움이 너무 컸다고 매우 칭송했다. 침팬지들에게 은인인 셈

이와 반대로 서구에서는 그를 공격하기 바쁜데, 이유는 민족주의를 제창하며 영어프랑스어같은 식민지어가 아닌 스와힐리어를 국어로 삼아 장려하였으며,[2] 나아가 탄자니아 내 외국 자본 독점을 허용하지 않는 등의 탈식민정책을 펼쳤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독립 이전까지 열심히 식민지로 벗겨먹던 당사자들이 이런 말을 해봐야 그다지 설득력이... 또한 많은 독재자들이 강제로 이런 해외 자본을 압수했던 사례(우간다이디 아민짐바브웨로버트 무가베가 유명하다)와 달리 그는 평화롭게, 외국 자본을 무작정 배제하지 않으면서 중립적으로 하려고 노력한 사람이다.

니에레레는 권력에 있는 동안 검소하게 생활했으며, 스스로 권력에서 물러난 뒤 고향으로 내려가 조용히 살다가 말년에 병으로 쓰러졌을 때는 국가에서 영국으로 병치료를 보낼 정도로 존경을 받았다. 1999년 10월 14일, 니에레레가 런던에서 세상을 떠나자, 탄자니아는 이날을 국부기일로 지정했다.

아울러 부족간의 갈등이 팽배한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와 달리 탄자니아라는 하나의 나라로서의 정체성을 만드는데 기여한 공로는 크다고 할 수 있다. 경제 실패는 스스로 인정한 바 있고, 그런 사회체제의 구성 과정에서 탄자니아는 내전이라는 아프리카 최악의 소용돌이를 피할 수 있다. 참고로 니에레레는 윗 나라인 우간다의 이디 아민 축출을 위해 반군을 지원한 바 있고, 나중에는 아예 자기가 직접 반군과 함께 싸우기도 했다.

2 문제점

집단체제를 구성하려다 대차게 실패하면서 경제를 크게 말아먹은 전적이 있다. 그러나 니에레레는 정책의 실패를 인정하고 시장경제 중심 체제로 방향을 선회하였다. 그리고 후임 정권을 잡은 인물에게 나처럼 경제적으로 말아먹지 말라고 충고를 하며 자신의 실패를 다시 한번 인정하고 뉘우쳤다. 정책실패에 대한 변명이나 하기 바쁘거나, 변명도 안하는(…) 이웃 여러 나라들 권력자들과는 비교된다.

1964~1985년까지 21년이란 그의 집권기간도 비판의 대상으로, 독재자라 불리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였다. 1965년 선거에서 니에레레는 96% 득표로 당선되었고 의회도 여당이 전석을 차지했으며, 니에레레가 물러난 뒤에도 일당 독재체제는 1995년 선거 이전까지 계속되었으며 그 이후에도 1955년~1993년까지의 일본처럼 일당 독주체제이다. 그럼에도 죽을 때까지 대통령 해먹거나 법적으로 대통령 임기를 정해놓지 않는 주변국의 사정을 보면, 현지에서는 나름대로 받아들일 만한 수준. 니에레레 같이 스스로 정권에서 물러난 경우는 아프리카에서 좀처럼 없다.물론 이를 함부로 긍정했다간 '한국식 민주주의' 드립도 긍정해야 하므로(...) 상당히 어렵고 민감한 문제이다.

탄자니아 주변 다른 나라들 국가내용을 보면 진짜 천지차인데, 1970년대 당시 탄자니아와 국경을 접한 모든 아프리카의 국가들이 독재자들이 통치하는 독재국가들이었다. 이디 아민우간다, 모부투 세세 세코자이르, 헤이스팅스 반다말라위, 사모라 마셸의 모잠비크 등등.

건국 초기의 장기 독재는 민주주의, 공화주의, 사회주의 국가들 가릴 것 없이 종종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심지어 프랑스 혁명기의 쿠데타와 주변 국가들에 있어서 나폴레옹 집권기의 역할 등을 생각해보면 결코 쉽게 간과할 수는 없는 부분이다. 민주국가 및 국민 정체성을 확립하고 사회의 초반 기틀을 자리잡는 상황에서 정권이 여러번 바뀌게 되면 정책과 제도, 그리고 그에 대한 의식이 자리잡지 못하고 쿠데타로 뒤덮인 군사국가가 되기 십상이다. 장기 독재가 결코 좋다고는 못 하지만 '초대 대통령'이란 다른 국가 지도자들보다 더 어려운 과제를 당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다. 그러나 역시 이것도 잘못하면 이승만 독재도 긍정하게 된다. 그래서 민주주의자의 입장에선 미국조지 워싱턴을 빨 수밖에 없다

사실 서구에서 비난한 거 외에도 깔만한 점은 꽤 많은 편이고 본인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주변국 지도자들이 죄다 너무 막장이라서 그 반대급부로 띄워진 면도 있고.# 사실 아프리카의 지도자들이라는 자들의 수준을 보면 착복왕 모부투 세세 세코라던가, 테러 자행하고 여성 경호원을 두고 해외 순방 갈때 텐트 치고 자는 등 온갖 기행들을 저지른 무아마르 알 카다피라든가, 식인설까지 돈 희대의 폭군 이디 아민이라던가, 안 그래도 가난했던 나라를 더욱 나락으로 떨어트려버린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이라던가, 국가 말아먹은것으로도 모자라 아예 조국을 무정부 상태 전세계 공인 파탄국가로 만드는데 큰 기여를 한 시아드 바레라든가, 지금도 학살을 통치의 한 방법으로 활용하는 오마르 알 바시르라던가, 기본 경제 상식조차 없으면서 생일마다 자기 나이만큼의 무게를 자랑하는 케이크를 제작하는 로버트 무가베라던가 하는 작자들로 구성되어 있기에 그들에 비하면 니에레레는 경제정책을 실패한 것과 독재 성향이 좀 있었던 것 빼고는 넘사벽으로 괜찮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3 기타

탄자니아에서의 인지도는 굉장해서, 오늘날에도 그의 이름은 탄자니아의 국제공항과 문화센터에 남아있다.

여담으로 니에레레는 하츠 오브 아이언 시리즈의 모드 Wind Blow에서 케냐, 탄자니아, 우간다에서부터 (플레이하기에 따라) 마다가스카르, 잠비아, 로디지아(짐바브웨), 모잠비크까지 아우르는 동아프리카공화국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4 관련 문서

  1. 스와힐리어선생님이라는 의미이다.
  2. 영어는 스와힐리어에 버금가는 제 2의 공용어로 지정되어 쓰이고 있다. 그러나 국어가 아니며 스와힐리어만 국어로 지정되어 있다. 니에레레 본인은 스와힐리어 문인으로서 셰익스피어의 희곡인 베니스의 상인줄리어스 시저 그리고 네 개의 사도행전을 스와힐리어로 번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