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 여객기 불시착 사건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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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5월 5일에 중국 민간항공 여객기가 춘천시주한미군공군기지인 캠프 페이지(Camp Page)[1]에 불시착한 사건이다.

2 발단

1983년 5월 5일에 중국[2] 민항총국 소속 영국제 호커 시들리 트라이던트 여객기[3]는 중국 랴오닝 성 선양 공항을 출발하여 상하이 홍차오 국제공항으로 비행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대만으로 망명을 꿈꾼 여성을 포함한 여섯 명의 납치범들은 권총을 이용하여 비행기 기장에게 대만으로 가라고 협박하였다. 기장이 평양(...)으로 비행기를 돌리자 납치범들은 다시 기장에게 협박을 가했다.

결국 납치범에 의해 점령된 비행기는 당시 미수교 적성국인 한국으로 방향을 돌렸고, 지금은 없어진 춘천시의 미 공군 기지인 캠프 페이지(Camp Page)의 비행장에 불시착하였다.[4]

무장 납치범들은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공안부에 의해 조사를 받았다. 그리고 승객들은 쉐라톤 그랜드 워커힐 호텔에 숙박하면서 서울시내와 자연농원(지금의 에버랜드) 구경을 다니고, 출국할 때 컬러TV까지 선물로 받는 등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체제 경쟁이 극심했던 당시로서는 대한민국의 발전상을 공산국가에 홍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기도 했고, 중국과의 외교 정상화를 원했던 전략적 의도도 있었다. 물론 당시 항공여행을 할 정도라면 중국 내에서 상당한 고위직 내지는 특권층이었을 가능성이 높았겠지만, 이 때까지는 한국이 중국에 비해 좀 더 발전되었기 때문에 분명 한국의 전략은 적절했다고 할 수 있다.

3 협상 과정

당시만 해도 한국과 중국은 정상적인 외교관계가 전무한 '적성국'이었다. 따라서 1961년 중국 민항국 소속의 조종사 2명이 귀순한 것을 비롯해 항공기나 선박 납치 사건이 5차례 발생한 적이 있었고 그동안 중국은 교섭대표를 파견하는 등 문제 해결을 서두른 적이 없었다.

그러나 1983년 불시착 사건 때에는 중국 정부가 대단히 이례적으로 문제 해결에 나선다. 사건당일 오후에 바로 민항국장 명의로 교섭 대표단을 파견할테니 착륙을 승인해 달라는 전문을 발송했고[5], 이튿날 33명의 대규모 교섭 대표단이 파견됐다. 대표단원들의 신분은 표면적으로는 민간기구인 '민항국 직원'이었지만 실제로는 중국 외교부와 정보기관의 부국장급 인사를 포함한 실무진들이 상당 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국측과 중국측은 5월 6일부터 회담을 진행하였고, 같은날 3명의 일본인 승객은 일단 본국으로 귀국하였다. 그러나 쌍방의 대표 자격과 국호(남조선과 중공)와 국기 사용 문제 때문에 난항을 거듭하였다. 오로지 북한만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하던 중국으로써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문제였지만, 우리측 교섭 대표단은 '남의 안방에 들어와서 안방 주인에게 인사도 안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는 논리를 내세웠다.

3일 간의 협상 끝에 5월 10일, 한국측 대표 공노명 외무부차관과 중국측 대표 선투[6]는 피랍 승객과 승무원, 항공기를 조속히 송환하며, 부상 때문에 중국으로 출국할 수 없는 부상자는 서울에서 치료를 받은 후 여행이 가능할 정도로 회복된 다음 출국시킬 것에 합의하였다. 합의문서에는 양국의 공식 명칭이 들어갔고, 양국의 국기가 사용되었다. 협상 결과에 따라 중국인 승객들은 5월 16일에 귀국하였다. 무장 납치범들은 한국 법에 따라 처벌하기로 합의했다.

한국의 요구를 중국 대표단이 대부분 수용한 것이다.

4 결과

무장 납치범들은 대한민국에서 재판을 받고 각각 4~6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후 약 1년을 복역하다가 형집행정지로 출소한 뒤, 인도적 차원에서 그토록 원하던 중화민국으로 추방 형식으로 망명하였다. 항공기의 불법납치 억제를 위한 협약(헤이그협약)에 따라 항공기 납치는 엄벌에 처해야 할 중범죄[7]이지만, 당시 전두환 치하 철저한 반공국가였던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는 심정적으로 저들의 입장을 이해 못하는 바가 아니었고, 그때까지만해도 혈맹이나 다름없던 대만과의 관계도 감안하여 이 정도 선에서 절충한 것.

대만에서는 반공투사의 귀순이라며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고 '6의사'라고 불렸다. 하지만 그 중 3명은 대만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유괴살인범이 되어 2명은 사형, 1명은 무기징역 선고를 받고 저세상으로 갔다.

협상 과정에서 보듯 중국 정부는 대단히 이례적으로, 아주 신속하게 한국과의 협상을 조기에 체결하고 귀국했다. 이유는 당시 여객기 중에 중국의 최고 군사기밀을 쥐고 있는 미사일 전문 학자가 탑승해 있었기 때문이라고. 이래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중국인 탑승객들이 한국 호텔에 투숙한 뒤 가장 먼저 자신의 신분증을 잘게 쪼개어 화장실 변기통에 버렸다고 한다. <외교열전> "불시착機에 中 미사일 전문가 탔었다"

한편, 전두환은 이 사건에서 이례적으로 국가안전기획부가 군을 지휘하게 하였다. 사건이 일어나고 대한민국 육군 제2군단이 캠프 페이지에 들어가려고 하였으나 주한미군의 제지로 들어가지 못했다. 이 보고를 받은 전두환미국과의 외교 문제도 걸려 있으니 외교 문제에 능통한 노신영 국가안전기획부장이 군을 지휘하는 게 좋겠다고 하였다. 장세동 대통령경호실장이 군의 사기가 걸려 있어서 안 된다고 만류하였으나 전두환은 강행하였다. 물론 합동참모의장육군대장 김윤호 장군 등의 군 수뇌부는 반발하였으나 결국 노신영 국가안전기획부장은 박세직 제2차장과 군을 지휘하여 사건을 해결하게 하였다.

5 여담

방송인 출신 정치인 이계진이 방송인 시절 썼던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딸꾹' 책에 따르면, 이때 북한이 공습을 한 줄 알고 민방위 사이렌이 울려대면서 "국민 여러분! 이것은 실제 상황입니다!" 라고 외쳐서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게다가 하필 저 때 미그기 귀순이 많았던 때라...

당시 KBS 반공 드라마 지금 평양에선에서도 이 사건을 다루었는데 평양으로 오던 중국 여객기가 방향을 틀어 한국으로 가버리자 김정일이 손수 오진우 등 군 고위층을 두들겨패는 묘사가 나온다. 해당 항목 참고.

6 의의

이 사건의 가장 큰 의의는 바로 1953년 7월 휴전 이후 한중 양국이 최초로 공식적인 외교적 접촉을 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태극기'와 '오성홍기'가 장식된 회담장에서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이란 공식적 칭호를 사용하면서! 당시 대한민국중화민국중국의 유일합법정부로 인정하고 있었고, 반대로 중공은 북한을 한반도의 유일합법정부로 간주하고 있던 시절이다. 다음해인 1984년 중국은 공산권 국가 중에서 가장 먼저 1986 서울 아시안 게임1988 서울 올림픽 참가 선언을 하게 되었고, 특히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는 아시아의 공산권 국가들 중 유일하게 참가했다. 이후 대한민국 역시 1990 베이징 아시안 게임에 참여하는 등 스포츠를 통한 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이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한중수교는 2000년대 들어서 늦게 맺어졌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8]

당시 승객 및 승무원들이 서울에 머물면서 받은 충격은 상상 이상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한중 교류가 반세기 가까이 끊어지면서 중국 본토인들이 한국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길은 대부분 북한의 선전물이었기 때문에, 당시까지만 해도 '한성(서울)은 전깃불도 제대로 안 들어오고 거지들이 우글거린다더라'는 수준의 인식이 팽배해 있었다. 그러던 그들이 당시 중국의 그 어느 대도시보다도 화려하고 발전된 서울 및 근교의 모습, 한국 공안당국의 극진한 대접을 접하고 받은 충격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9] 특히나 중국 상류사회에서 이들의 한국 경험담은 꽤나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중국의 대한(對韓) 외교정책 전환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 중국과 급속도로 외교적 거리가 줄어들면서 이에 반비례하듯 중화민국과의 관계는 나빠졌다.[10] 이런 흐름이 계속 이어져 2년 뒤인 중국 해군 어뢰정 망명사건 때 중국 정부는 신속히 자신들의 실수를 사과하고 한국 정부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1992년에 한중 국교 정상화(수교)를 이끌어 낸다.(물론 자연히 대만과는 국교 단절.)

이 사건을 두고 훗날 외교라인에서 '봉황이 날아 들었다'고 표현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 양국간 외교 관계에 굉장히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사건이다.
  1. 춘천역 앞에 있으며, 지난 2005년에 춘천시에 반환되었다.
  2. 당시는 '중국'의 정통성이 중화민국(대만)에 있다고 보아, 대만을 '자유 중국'으로 부르는 한편, 대륙의 중국에 대해서는 일개 정당이 점거 중인 것으로 보아 '중국공산당'의 줄임말인 '중공'이라고 불렀다.
  3. 1960년대 초반 미국보잉 727에 대항하여 영국의 호커 시들리사가 개발한 중형 삼발 여객기이다. 그러나 낮은 인지도와 엔진 문제로 인해 보잉 727은 물론 후에 나오는 소련제 삼발기인 Tu-154와도 제대로 경쟁 해보지 못한 채 117대만 생산되고 단종되었다.
  4. 활주로를 50여m나 지나 가까스로 멈췄을 만큼 꽤 위험했던 불시착이었고, 이는 '비행기의 수리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협상을 지연시킨 한국의 좋은 핑곗거리가 되었다.
  5. 1953년 한국전쟁 휴전 협정 체결 이후 처음 한국으로 발송된 외교 전문이었다.
  6. 예전 언론 기사에 '쉔투', '센투'라는 표기가 자주 보인다. 외래어 표기법/중국어에 의하면 沈圖(Shen Tu)는 일단 '선투'가 맞다. 똑같이 沈을 쓰는 선양을 센양, 셴양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7. 헤이그협약 제2조에는 '각 체약국은 범죄를 엄중한 형벌로 처벌할 수 있도록 할 의무를 진다.'라고 되어 있다. 이에 따라 국내법으로도 항공기납치는 무기 또는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며, 사망자나 부상자가 발생한 경우에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한다. (당시나 지금이나 법정형량은 같다) 몇몇 국회의원들이 그들을 자유의 투사로 보아 재판 없이 대만에 송환하자는 주장을 하였지만, 그 논리대로라면 '납치'가 아니라 '공산 학정에 시달리는' 인민들을 자유 대한으로 '구출'해 온 거지만 아무리 냉전시대라 하여도 헤이그협약을 지키지 말자고 주장하는 것은 국제적인 병크다.
  8. 단, 이 부분에 대해서는 반론도 있다. 일단 중국이 서울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올림픽에 일찌감치 참여를 선언한 것 자체가 소련과는 따로 노는 독자행보를 보인 점이 가장 컸고, 한편으론 2000년 올림픽 유치를 위해서는 우선 1990년 아시안게임을 성공적으로 개최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 만일 서울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에 불참할 경우 1990년 아시안게임이 반쪽 행사가 되어 결과적으로 2000년 올림픽 유치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정작 올림픽 개최는 8년 늦게 이루게 되지만 게다가 이미 덩샤오핑이라는 경제 개혁파가 집권한 시기였으므로 굳이 중공 여객기 불시착 사건이 아니었어도 한중 양국은 필연적으로 관계를 개선할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반론도 있다.
  9. 이들이 상류층들이므로 정보의 접촉이라는 면에서 일반인들보다 우위에 있을 수 있었겠지만, 당장 88올림픽을 통해 해외에 소개된 한국의 모습은 동구권은 둘째치고 같은 서방 사회에조차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질 정도였다. 아직도 한국 거기 전쟁 중 아니냐고 물어대는 판인데 뭘
  10. 중국은 자국과의 외교 정상화의 선제 조건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중국과의 외교 관계가 정상으로 다가갈수록 대만과의 관계는 나빠질 수 밖에 없다. 대한민국도 실리를 위해 중국을 인정한 것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