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인목후이관

한자 : 楚人沐猴而冠
한자 훈음 : 모형, 가사니무, 매, 초나라 초/사람 인/씻다, 은택을 입다, 머리를 감다 목/원숭이 후/어조사 이[1]/머리, 관직 관

1 개요

초나라 사람은 원숭이의 무리이면서 갓을 쓰고 있다는 뜻으로, 겉만 번드레하고, 실질(實質)이 이에 따르지 않음을 비유(比喩ㆍ譬喩)해 이르는 말한자사전 참조.

부연 설명하자면, 원숭이가 옷 입고 갓 쓰고 사람 행세 한다?.. 그래봤자 원숭이는 원숭이거든? 꼴같잖기만 하거던?! 이런 의미이고, 우리네 식으로는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개 발에 편자와 같은 맥락.

여기서 초나라 사람이란 다름아닌 항우. 감히 항우를 원숭이에 비유한 한생은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초한전쟁 시기에 항우가 이끄는 초나라 군대가 진나라를 멸상시킨 다음, 초나라가 다시 복귀하고도 금의야행의 고사에서, 진나라의 수도인 관중에서 세력을 키우자는 범증이 건의했지만, 항우는 그 건의를 무시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이 때 어떤 유생[2]이 이 말을 내뱉었다가 어떻게 들켜서 결국 기름솥에 삶기는 끔살을 당했다는 이야기. 풀버전은, 인언 초인목후이관, 과연 -人言 楚人沐猴而冠, 果然, '사람들이 말하길, 초나라 사람들은 원숭이가 갓 쓴 꼬락서니라더니, 과연 그렇구나!'의 의미.

항우신안대학살 문서 참고.

후에 이 "목후이관"(갓 쓴 원숭이)라는 말은 여러 차례 못난 소인배를 향해 비꼬는 말로 자주 쓰였는데, 대표적인 케이스가 조선의 대표적 권신 한명회압구정이라는 정자를 짓자 선비들이 비꼰 것이다.지역드립하자니 출신국이 같았다

2 나오는 배경

즉, 항우 이전부터 이 말이 있었고, 그게 옛날부터 형초(荊楚)지방 사람을 야만족이라 하여 깔본 데서 나온 말이다.

전국시대(중국)을 통일한 진나라(秦) 이전의 육국(六國)은 신화 시대나 다름없는 하나라, 은나라, 주나라 이후 봉건제 시대의 지방명을 그대로 딴 지명이었으므로, 각 나라 이름은 진이 육국을 통일한 후에도 그대로 이어져 지방 이름처럼 사용되었다. 한참 후대에도 '연나라 사람'으로 지칭하는 장비의 예가 있고, 현재도 중국의 오토바이 번호판에도 '제(齊)' 어쩌고 하는 식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형초란 중국 남부, 넓게는 삼국지에 나오는 강동 지역까지 전부 포괄하는 말로서 이 때까지만 해도 중국 문화권의 바깥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춘추시대의 국가들 중에서 초나라는 애초에 화북국가들과는 다른 묘족에서 기원한 것으로 추정되서 형지방[3]의 초라고 해서 형초라고 불렸고, 그 초나라보다 더 중원과 거리가 멀어서 책봉을 받았다고 주장은 하는데 기록은 거의 없는 나라가 오월이다. 그리고 그 초나라가 오나라와 월나라를 집어먹은 것이 전국시대의 초나라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야만족 of 야만족이 되었다. 애초에 초와 오월은 단발머리에 문신을 일상적으로 새기는등 화북국가들과는 풍습과 제도가 상이했는데[4] 이 점 역시 강한 개성으로 드러났다. 시경과 서경으로 대표되는 노래와 예술부분도 달라서 사면초가라거나, 전한 궁궐에 초나라 노래가 불렸다[5] 는 등의 일화가 전한다. 반면에 자신들이 정통 of 정통이라고 주장했던 지역이 황하 인근에 똘똘 뭉쳐 있는 한나라, 위나라, 조나라, 제나라 등이었다. 이들은 초만큼 아니라도 연과 진도 일정 정도 무시했다.

3 유방과의 대조

유방은 이와 정 반대의 모습을 보였는데, 중국 통일 후 주나라를 따라 수도를 낙양으로 하려고 했었다. 그러다 징집 영장 나와서 농서로 가던 "누경"이라는 사람이 동향 사람인 우장군을 통해 면회를 청했는데, 유방은 듣도 보도 못하고 의관도 갖추지 못한 평민이 뜬금없이 면회를 청하는 걸 쿨하게 들어주었다. 수도를 낙양으로 한다는 유방의 말에 누경이 조언을 해 줬는데, 그 내용은 대충 '주나라는 원래부터 뼈대있는 가문이 누대에 걸쳐 널리 덕을 베풀어 제위에 오른 거라, 소통에 편리하도록 교통의 요지인 낙양에 도읍한 거 아니요? 그런데도 몇 대 지나서 상황이 안 좋아지니 낙양에서는 통제가 불가능했는데, 폐하로 말하자면 아무 것도 아닌 밑바닥에서부터 전쟁으로 박박 기면서 올라오신 거 아니시오? 그렇게 전쟁질 하시는 통에 아직도 산이며 들판에 폐하가 한 가족의 아버지와 아들들로 만든 시체더미가 가득합죠. 근데 낙양? 차라리 반란이 일어나도 괜찮게 방어하기도 쉽고 경제력도 좋은 진나라 땅 챙길 수 있는 관중 안으로 들어가시죠.' 였다.

요약하자면 근본도 없고 여태까지 한 건 전쟁질로 사람 죽인 것 밖에 없는 양반이 주제넘게 덕 있는 주나라 흉내 내지 말라는 것. 누가 들어도 빡칠 만한 말을 듣고도 유방은 화내기는 커녕 곧바로 신하들과 논의했고, 다른 이들은 모두 반대했지만 장량이 누경의 의견을 지지하자 곧바로 관중을 수도로 삼고 누경에게도 포상과 직위와 유씨 성 등을 하사해 보답했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자신을 비판하고 반대하는 의견을 내는 자를 잡아다 죽이는 인물치고 명군, 명장, 명관인 사람이 드물다...[6] 특히 곱게 죽인 것도 아니고 끓여 죽였으니 더욱 항우의 옹졸함이 빛나는 고사로 평가되는 견해가 많다.

4 인종 차별

초인목후이관은 흑인은 게으르고 멍청하다고 비하하는 인종차별, 혹은 함경도 놈들은 상종할 수 없을 정도로 난폭하고 미개하다는 일종의 지역드립이다. 초나라가 반 이민족 취급받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양자를 모두 포괄할 수 있다. 이 때문에 한생과 누경의 경우를 단순비교하는 것은 어렵다고 할 수도 있다. 누경의 경우 '유방 개인만 욕하는 행동'이었으나, 한생의 경우 모욕 대상이 항우 개인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초나라 사람 전부에 해당한다. 항우 군세의 핵심인원은 물론 구성원 대부분이 초나라 사람이었으니 '그들 모두를 모욕한 것'이었다. 게다가 당시는 초나라가 진나라의 압제에 신음하다가 가까스로 재흥하여, 감정이 극도로 폭발하여 흥분해있는 기간이다. 이럴 때 타국 출신 선비가 저런 발언을 내뱉고 다녔던 것이니 항우가 아닌 누구라도 큰 벌을 주었을 가능성이 높다. 항우가 벌을 주지 않았다면 오히려 초나라 출신 장수나 병사들이 '우리 장군이 초나라를 모욕하는 놈에게 아무 벌도 주지 않는다'고 불만을 품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확실한건 이렇게 지역드립까지 행하며 유생들이 결사 반대한 초나라 귀향을, 사람을 끓여가면서까지 끝내 시행한 항우에게 돌아온 것은 초나라 대의의 파멸과 항씨가문의 몰락, 그리고 초나라 장병들과 자신의 비참한 죽음이었다.[7]

여담이지만 항우는 이 말을 처음 듣고 그 뜻을 몰라서 옆에 있던 신하에게 그 뜻을 물어봤다고 한다. 항우는 옛 초나라 최고의 명문 귀족가의 적자로 그에 걸맞는 교양을 갖추고 있었다고 하니 무식해서 그런것은 아닐것이고, 2000년 전의 사람인 만큼 현대인보다 비유법이나 돌려까기에 능숙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귀족 젊은이인 만큼 딱히 욕설에 익숙했을 것 같지는 않다.

5 기타

유의어로 영서연설(郢書燕說)이라는 말도 있다. 영에 사는 사람의 글을 연나라 사람이 풀이한다는 말로, 사리에 안 맞는 말을 억지로 맞는 것처럼 끌어댄다는 뜻. 영(郢)은 초나라가 일어난 지역으로, 초나라진나라에 밀려 수춘으로 쫓겨 가기 전까지 수도이기도 했다. 그리고 연나라는 춘추 전국 시대 중국에서 가장 깡촌 구석에 있던 나라... 현대어로 풀자면 덤 앤 더머 정도 된다. 쌍으로 지역드립.
  1. 해석할대에는 "~가, ~를"로 해석된다.
  2. 초한춘추와 법언에서는 채나라 출신, 한서에는 한나라 출신의 유생이라 나온며 사기에서는 한생이라고 한다. 사기가 정확할 듯..
  3. 삼국시대에는 형주가 되는 곳인데, 주나라의 기반인 화북과 멀리 떨어져있기 때문에 깡촌이라는 의미에서 붙인 지명 수식어이다.
  4. 주왕의 제후라고 칭한 화북국가들과 달리, 초와 오월은 처음부터 왕을 자칭했고, 화북에서 전차 위주로 발달한 중원국가들과 달리 오월은 보전이 발달하였다. 사실 이들끼리도 서로 까고 깐다. 초에서는 오보단 우리가 낫다. 오에선 월보다는 그래도 우리풍습이 낫다 이런식.
  5. 한고조 유방을 포함한 건국세력들은 대부분 초나라에서 일어났다. 한고조 유방은 후에 자신이 초나라 출생이 아니라 위나라에서 이주하였다고 주장하면서 일부러 위나라와 위나라 출신 전국사군자신릉군 위무기를 띄워준다.
  6. 조조원소에게 대승한 이후 허도의 인물들이 원소와 주고 받은 서한을 획득한 이후 모조리 불태운 일화를 생각해 보자.하지만 조조는 양수, 최염, 누규, 공융, 순욱 등을 자기 비위에 거슬린다고 죽였다
  7. 농담이 아니라 이렇게 아무 생각없이 버린 관중 지역이 훗날 유방의 근거지가 되어 한나라 대업에 끼친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생각하면 이 선택이 항우의 파멸을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