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이름 | 클로드 마켈렐레 신다 (Claude Makélélé Sinda) |
생년월일 | 1973년 2월 18일 |
국적 | 프랑스 |
출생지 | 콩고 민주 공화국 킨샤샤 |
신체 조건 | 174cm, 70kg |
포지션 | 수비형 미드필더 |
소속 클럽 | 스타드 브레스트 (1991) 낭트 아틀랑티크 (1991-1997)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1997-1998) 셀타 비고 (1998-2000) 레알 마드리드 (2000-2003) 첼시 FC (2003-2008) 파리 생제르맹 FC (2008-2011) |
지도자 | 파리 생제르맹 FC 어시스턴트 (2011-2014) SC 바스티아 감독 (2014) |
국가 대표 | 71경기 0골 |
2005 FIFPro World XI | |||||||||||
FW 안드리 셰브첸코 | FW 사무엘 에투 | ||||||||||
MF 프랭크 램파드 | MF 클로드 마켈렐레 | MF 지네딘 지단 | MF 호나우지뉴 | ||||||||
DF 파올로 말디니 | DF 알레산드로 네스타 | DF 존 테리 | DF 카푸 | ||||||||
GK 디다 |
수비형 미드필더의 교과서
비에이라와 함께 프랑스의 끝판왕급 수비형 미드필더였던 선수[1]
캉테 아빠
1 개요
프랑스의 전 축구선수이자 일명 마홀딩.[2] 엄청난 활동량과 최고 수준의 태클, 상대방의 공격을 읽는 능력과 수준급 센터백 이상가는 대인 마킹능력으로 수비형 미드필더의 자리에서는 최정상급의 레전드로 꼽힌다. 패스는 좀 못해도 괜찮은 그야말로 수비형 미드필더의 정석.[3]
사실 레알 마드리드에서 첼시로 가면서 레알 마드리드 공수의 밸런스가 붕괴된 것으로 마켈렐레의 무게감을 꼽지만 사실 첼시에서의 활약이 오히려 마켈렐레의 무게감을 더해준다. 기네스북에도 등재된 주제 무리뉴의 04-05 시즌 EPL 역대 최소실점(15실점)의 일등공신중 한명도 마켈렐레이다. 사실 축구는 단순하게 보자면 공격과 수비라는 개념을 넘어서 공을 소유하거나 공을 소유하지 못하거나 두 가지의 상황으로 나뉜다. 공을 우리팀이 소유하는 동안에는 사실 수비라는 것을 할 필요가 없어진다.
실점을 할 위험한 상황을 줄이는 동시에 공격을 통하여 득점할 상황의 가능성을 높이기 때문에 많은 감독들은 볼 점유율이라는 수치에 신경써서 팀을 운영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감독들도 있긴하지 이런 관점에서 마켈렐레는 굉장히 빛이 난다. 그저 그런 팀이라면 수비만 뛰어난 미드필더라는 존재는 어찌보면 계륵에 가깝다. 선수 한 명이 후달리는데 그래도 공수 양쪽에서 힘 좀 내라고 넣어놓은 미드필더가 수비만 해제낀다면 수비야 좋아지겠지만 공격에서는 원래 있어야 하는 선수 한 명이 없는채로 뛰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일정 수준을 넘어선 팀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아주 뛰어난 공격자원들이 있는 팀이라면 선수 한명을 늘리는 것보다 그 자원들을 효율적으로 구성하는 방향으로 가는게 더 나을 수도 있는데 이에 대한 증거가 바로 2000년대 중반의 첼시였다.
최근의 트렌드는 매우 달라졌지만 이 당시 첼시가 중원에서 활용했던 전술은 일단 상대방이 공격해오면 마켈렐레는 어느 루트로 오는지에 관계없이 중원 전체를 활동량과 집요함으로 공격을 사전에 차단해버렸다. 이후 본인이 전진패스를 하지 않고 최대한 안전한 패스로 공격력이 뛰어난 램파드나 아니면 왕성한 활동량의 에시엔에게 볼을 줌으로써 공격의 시발점이 되었다.. 볼을 탈취하여 팀의 볼 점유율을 늘림과 동시에 가장 빌드업을 잘 풀어나갈 선수에게 안전하게 패스함으로 볼점유율을 빼았길 확률을 최대한 낮춰 궁극적으로는 팀의 볼 점유율의 상승을 유도하면서 상대방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축구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는 포백의 체력낭비와 실수할 가능성을 매우 줄임과 동시에 양쪽 풀백 웨인 브릿지, 파울로 페레이라, 글렌 존슨, 애쉴리콜등등이 오버래핑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고 그에 따라 공격에서의 숫자 확보도 용이하게 해주었다.
국내에서는 이상하게 파트리크 비에이라와 영혼의 듀오로 손꼽는 경우가 많은데, 마켈렐레-비에이라 조합은 잉글랜드의 스티븐 제라드-프랭크 램파드 조합만큼이나 현시창인 경우였다. 막상 둘이서 함께 맹활약한 적은 2006년 월드컵이 유일한데 프랑스의 흑역사였던 레몽 도메네크의 업적이 마켈렐레-비에이라 조합의 완성과, 독일 월드컵 준우승이라는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한다(...).
2 클럽
1991년 스타드 브레스트에 입단하였으며, 바로 다음 해에 1부 리그의 낭트 아틀랑티크로 이적했다. 94/95 시즌에는 크리스티앙 카랑뵈와 호흡을 맞추며 탄탄한 미드필더진을 이끌며 낭트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허나 낭트에서 마르세유로 이적 후 1년 가량 뛰다가 스페인의 셀타 데 비고로 이적하여 2년간 70경기 3골을 기록했다.
사실 이때의 마켈렐레는 개요에 서술된처럼 아주 패스를 못하는 선수도 아니었고 수비 지향적인 선수도 아니었다. 나쁘지 않은 패스에 공격도 종종하는 오히려 비에이라에 가까운 스타일을 구사했던 선수라고 봐야하는게 옳다. 셀타 비고에서 70경기 3골이었지만 실제 2년간 넣은 골은 컵대회까지 포함 6골이었고 이전에 있던 낭트에서 넣었던 골은 컵대회 포함 12골이었다. 약 시즌당 2~3골 정도를 넣었다. 마켈렐레의 영혼의 짝꿍으로 자주 오인램파드-제라드의 수준에 버금가는되는 파크리크 비에이라는 익히 알려지다 시피 수비 일변도의 미드필더가 아닌데 이런 비에이라도 한 시즌에 대략 3~4 골정도 넣었음을 생각해본다면 마켈렐레가 그 당시만 해도 아주 공격을 안하는 선수는 아니었다는 얘기다. 그리고 첼시 이적 이후 그리고 PSG 시절까지 합친 8시즌 동안 넣은 골이 4골이다. 셀타 비고와 첼시 시절 가운데 낀 레알 마드리드 시절이 4시즌 동안 1골을 넣었는데 이 시절부터 확실하게 스타일이 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생각만큼 공격력이 없는 선수는 아니었으나 워낙 쟁쟁한 공격력의 소유자들이 넘쳐났던 레알시절에 공격재능을 일부러 사그라들게 만들었다고 보는게 맞다.
여튼 셀타 비고 시절의 뛰어난 활약을 바탕으로 당시 갈락티코 정책으로 세계적인 미드필더와 공격수를 끌어모으던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 그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2.1 레알 마드리드
그가 뛰던 기간 동안 레알 마드리드는 그야말로 우주마저 정복할 기세였다. 물론 실제로도 우주를 정복할 만한 활약을 보였다. 마켈렐레는 레알의 지나치게 공격적인 성향을 그나마 조금이라도 조율하기 위하여 셀타비고에서보다는 훨씬 더 수비적인 역할을 맡았으며, 수비진이 허술하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의 활약이 있었기에 팀의 공격진이 무너지지 않고 상대 팀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결국 우주방위대급의 공격진과 마켈렐레의 경기 조율을 마탕으로 2002년 레알은 엄청난 전성기를 누리며 2001/2002 챔피언스리그 우승, 2002/2003 리그 우승이라는 업적을 달성했다.
허나 데이비드 베컴이 영입되면서 레알이 상대적으로 네임 벨류가 낮은 마켈렐레를 소홀히 하고당시 레알의 회장이던 플로렌티노 페레즈는 마켈렐레와 같은 평범한 패스를 하는 인간에게는 고액의 연봉을 줄수 없다며 마켈렐레의 주급인상 요구를 단번에 거절함과 동시에 이적시켜버렸다. 이런 패스성애자 베컴을 중요시하자 마켈렐레는 이에 반발하였고, 이에 방출되는데 결국 최대의 병크라 불리게 된다.어디 한번 기둥없는 집에서 잘 살아보쇼!카악~퉷!.to 페레즈 마켈렐레는 당시 로만 아브라모비치의 인수로 스타들을 끌어모으던 첼시 FC로 이적했다. 그의 이적 후 레알은 팀 밸런스가 무너져 06/07 시즌까지 단 하나의 트로피도 들어올리지 못했다.
뒤늦게 나마 후회하여 마켈렐레의 뒤를 이을 수비형 미드필더를 찾았지만...결과는 좋지 않았으니 안습.[4][5]
2.2 첼시 FC
첼시 FC의 본격적인 황금기의 시작을 함께하고 이끌었던 선수
첼시 FC로 이적한 후 두번째 시즌부터 그의 두번째 전성기가 순식간에 찾아왔다. 2004년 주제 무리뉴 감독의 부임 후 무리뉴 감독의 지도하에 첼시의 최후방 허리를 맡게 되면서 레알 시절 못지 않은 대활약을 펼치게 된 것이다. 당시 마켈렐레-에시앙-램파드는 EPL 미드필더진의 무덤이라 불릴 만큼 엄청난 활동량과 체력, 압박으로 무장했고 첼시는 수비적인 경기를 한다고 비판받았으면서도 미드필더진의 탄탄한 조직력과 엄청난 강력함을 보여주며 세계 축구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리고 마켈렐레가 첼시에서 뛰며 수많은 트로피를 들고 좋아하는 동안 레알 마드리드 수뇌부들은 트로피 하나 얻지 못하는 현실에 땅을 치며 후회했다.
2.3 파리 생제르맹
허나 나이가 들면서 활동량과 압박이 예전만큼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자 결국 07/08시즌 이후 고국의 파리 생제르맹으로 이적했다. 다행히도 첼시는 레알 마드리드와는 달리 그의 부재에도 미드필더진이 크게 무너지지 않았으나15-16시즌 기준 미켈은 망했지만 그때만해도 미켈이 어느정도는 마켈옹의 역할을 잘 수행했다 대신 잘못된 감독 선임으로 다음 시즌을 거의 말아먹게 된다.[6]
2010~2011 시즌을 마지막으로 파리 생제르맹에서 팀 동료 그레고리 쿠페와 함께 현역에서 은퇴하였다.
3 국가대표
2006년 독일 월드컵 이전까지만 해도 그다지 대표팀과의 인연이 없던 선수였다. 1995년에 대표팀에 발탁되었으나 당시 프랑스는 그가 없어도 될 만큼 엄청난 미드필더진을 거느리고 있었기에 주전 발탁은 꿈에도 꾸지 못할 정도였으며, 1998년 조국에서 열린 월드컵과 유로 2000에도 출전하지 못하며 프랑스의 우승을 지켜보기만 하였다.
유로 2000 이후 국가대표팀 주장이었던 디디에 데샹의 은퇴 이후 2001년부터 점점 국가대표로 출전횟수가 늘어나게 되었고 2002년 한일 월드컵에 드디어 메이저 대회 첫 출전의 기회를 잡았으나 조별리그 덴마크전 단 한 경기에 출전한 것이 전부였고 결과도 2-0으로 패배했고 프랑스는 세네갈의 이변의 희생양이 되며 한 골도 넣지 못하고 탈락했다.
유로 2004에서는 주전 수비형 미드필더로 전경기 출전하게 되었지만 8강 탈락으로 빛이 바랬다. 대회 이후 지네딘 지단, 릴리앙 튀랑과 함께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했으나 1년 후 다시 이들과 함께 국가대표 복귀를 선언하고 2006년 독일 월드컵에 나서게 된다.
33세라는 노장임에도 불구하고 주전 미드필더로 발탁되어 월드컵에서 대활약을 펼쳤다. 조별 리그에는 지단과 마찬가지로 큰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지만 토너먼트에서는 달랐다. 파트리크 비에이라[7] 등 당시 퇴물이라 불리던 다른 노장 선수들과 함께 스페인, 브라질, 포르투갈 등의 정상팀을 박살내는데 기여했다.[8] 안타깝게도 팀은 결승전에서 이탈리아와 격돌, 승부차기 끝에 패배하여 준우승했지만.
월드컵 이후 다시 한번 국가대표를 떠날 것이라고 발표했지만 레몽 도메네크 감독은 곧바로 유로 2008 지역예선에 마켈렐레를 차출하여 국가대표 경기를 뛰게 하였고 당시 첼시 감독이었던 무리뉴는 마켈렐레를 뽑아간 도메네크의 행동을 비난하면서 마찰이 있었으나 결국에는 유로 2008 본선에 데려가게 되었다. 프랑스는 조별 리그에서 탈락하며 8강 진출에 실패하였고 마켈렐레는 대회 직후 국가대표에서 은퇴하였다.
4 플레이 스타일
개요에서 서술된 바와 같이 사실 수비형 미드필더 중에서도 아주 수비에 특화된 선수이다. 쉽게말하면 뒤에 두명의 센터백을 세워두고 조금 앞으로 나가서 플레이하는 센터백이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센터백을 보기에는 신체적인 조건이 매우 불리했다. 헤더는 두말할 필요도 없고 사실 몸싸움도 아주 강했던 선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단점을 특유의 활동량으로 커버했다. 마켈렐레의 발에 페인트를 묻혀서 경기동안 경기장 바닥을 얼마나 돌아다녔는지 확인해보면 마켈렐레의 발자국이 없는 지역이 없다는 그 유명한 활동량과 두개의 심장 세개의 심장을 넘어서는 철인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의 체력으로 온 필드를 경기 내내 휩쓸고 다녔다. 포백을 보호한다는 말이 상시적으로 쓰이고 있지만 진정한 포백 보호자의 대표라고 할만큼 상대방의 공격이 포백에 닿기 전 혹은 역습이 시작되는 타이밍에 벌써부터 상대편 공을 가진 선수에게 달려가서 압박과 태클을 끊임없이 가했다. 엄청난 활동량과 체력 그리고 게임을 읽는 눈이 매우 뛰어남을 알수 있다. 여튼 이러한 집요함으로 상대방의 볼을 탈취해내고 하프라인 근처에서는 어떻게든 볼을 지켜내 공격력이 좋은 동료에게 볼을 연결해주었다. 공격을 직접적으로 진두 지휘하지 않지만 상대편으로부터 공을 뺐는 것이 공격의 시작이라고 한다면 항상 마켈렐레는 첼시 공격의 시발점을 담당하였다. 이 점에 감명을 받았는지 공을 키핑하고 패스하는 능력이 뛰어난 한 선수물리학자에게 후임을 맡기지만 수비적인 부분에서는 거의 기대할 수 없었다. 하지만 위에 서술했다시피 패스가 굉장히 평범한 수준이었기에(혹은 그것은 본인의 역할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인지) 전진패스를 시도하거나 하지 않고 람파드나 에시엔 혹은 윙어들에게 볼을 연결해주는데 그쳤다.
활동량과 체력, 투쟁심은 정말 세계 최고의 수준이었고 그외에 태클 또한 의심할 여지가 없는 월드클래스였다. 패스와 태클은 반비례? 레알 시절 동료부터 회장까지 비난했던 그 평범한 패스기술에 비해서 태클기술은 월드클래스라는 말이 모자랄정도로 굉장히 깨끗하고 볼을 탈취해내서 그런지 태클로 인하여 카드를 받는 경우는 드물었다. 아주 깔끔하게 볼을 빼내고 공격을 저지했다. 스콜스의 대척점?
최근에 그와 정말 플레이 스타일이키가 빼닮은 은골로 캉테가 나와 화제를 모으고 있다.실은 양아들이랜다.
그렇게 캉테는 첼시를 가고....어...?
5 스태프
은퇴 이후 2011년 파리 생제르맹 FC에서 어시스턴트로 선임되었다. 2014년 5월 23일 SC 바스티아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계약기간은 2년간이다. 그러나 성적부진으로 2014년 11월 3일 경질되었다.- ↑ 다만 마켈렐레는 홀딩형 미드필더로 전형적인 수비형 미드필더라 할 수 있었지만, 비에이라는 박스투박스 미드필더로서 다소 공격적인 역할까지 수행했다.
- ↑ 마지우개란 별명은 FM2006에서 대인 마킹만 붙이면 마킹한 선수를 담궈버리던 하비에르 마스체라노에게 붙은 별명이다.
- ↑ 뻔히 보이는 패스 이상의 것을 기대하는 것은 과욕이었다. 좋은 패스가 아주 안 나오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단&피구&라울 등의 플레이를 보던레알팬들은 마켈렐레의 패스를 '뻔히' 보인다며 깠다고 한다.배가 불렀다그럼 볼란치가 공 몰고 나가리? - ↑ 그의 이적 후 물색하여 찾아낸 수많은 수비형 미드필더 중 한 명인 라스 디아라 왈 '날 마켈렐레랑 비교하지 말라능!', 또 다른 미드필더인 에스테반 캄비아소의 경우 오히려 레알에서 인테르로 이적한 뒤 포텐이 터졌다;;
- ↑ 마케렐레 이후 레알을 거쳐간 미드필더는 미친개 토마스 그라베센, 파블로 가르시아, 리옹에서 미친 활약을 보여줬던 마하마두 디아라, 상기한 캄비아소, 세리에와 분데스리가를 씹어먹었던 당시 최고의 수미중 한명인 에메르손, 주목받던 영건인 페르난도 가고
아무도 기대 안 한 이과인이 더 잘 컸다을 영입하지만 기대 이하였고, 라스 디아라를 영입하고 겨우 중원이 진정된다. - ↑ 첼시는 미드필더진에 큰 변화가 없었지만 레알은 이 때 마켈렐레만 갈아댄 것이 아니다. 그나마 중원을 잡아줄 플라비우 콘세이상, 스티브 맥마나만도 바이바이.
- ↑ 마켈렐레-비에이라 조합이 동시에 제대로 가동된 유일한 때기도 하다(...)
- ↑ 특히 브라질전에서는 그 유명한 판타스틱 4를 막아내며 팀의 1-0 승리에 큰 공헌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