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8년 노벨화학상 수상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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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tz Haber, 1868년 12월 9일 ~ 1934년 1월 29일 |
목차
1 소개
질소 고정법의 개발로 수억의 생명을 구제하고 또 태어나도록 했지만 동시에 빗나간 애국심의 말로를 확실하게 보여준 과학자
과학 기술이 수천만 명의 목숨을 좌우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과학자
과학자가 지켜야할 윤리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세상에 남긴 인물
유대인을 학살한 약품을 만든 유대인
독일의 천재 화학자로 수많은 생명을 살려냈지만, 동시에 수많은 생명을 죽인 인물.
2 빛의 발명 : 암모니아 합성
2.1 맬서스 트랩을 깨다
인구폭발. 1900년대에 16억에 불과하던 인류가 100년이 지난 지금 70억을 넘기게 하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한 과학자
프리츠 하버는 맬서스의 인구론이 정설로 통하던 시대에 태어났다. 당시 인류는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지만 식량생산은 이를 따라잡지 못하게 된다는 멜서스의 인구론을 정설로 받아 들였으며 저소득층의 인구를 감소시켜야 한다는 정신나간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현자로 통하던 시대였다. 이런 미친 소리가 정설로 통한 것은 당시 주요 식량공급원이 농업이고, 농업은 토양의 질소농도에 따라 수확량이 결정되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인데 좀 더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농업에 필요한 비옥한 토지는 질소의 양에 따라 무작위로 결정되는데 질소는 매우 안정한 물질이라 토양에 질소를 충전하는 방법은 번개가 칠 때 공기중의 질소가 토양에 스며드는 것과, 콩을 심는 방법, 반년 정도 농사를 쉬는 휴경지 재배법 세 가지 였다.[1] 번개는 인력으로 어찌 할 수 없는 부분이니 사실상 콩을 심는 것과 휴경지 재배법을 사용하는 것말곤 토양에 질소를 충전하는 뾰족한 방법이 없었고 인구는 매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콩농사와 휴경지 재배법으로 토양의 질을 유지하는 데 한계가 왔을 때 신대륙으로 부터 두 가지가 전해져 유럽인들을 먹여 살렸다.
첫번째는 신대륙에서 건너온 식물인 감자다. 냉해에 강한 감자는 18세기 유럽을 강타한 소(小)빙하기를 타고 전 유럽에 퍼져 널리 재배되었으며 수많은 생명을 먹여살렸다. 하지만 감자만으론 급속도로 늘어나는 인구를 못 부양했다. 감자를 대체식량으로 삼는 것이 한계가 올 즈음, 신대륙에서 또다른 신문물이 유럽에 도착한다.
두번째는 신대륙에서 온 물질인 구아노, 인광석이다. 구아노는 새의 배설물과 알 껍데기가 퇴적되어 만들어진 일종의 광물질로 화약의 제조에 필요한 질산염을 얻는 주요 자원이었다. 그런데 이 구아노가 고효율의 질소비료로 쓸 수 있단 사실이 알려지고 유럽은 몇 해간 풍작을 이어나갔다.
구아노를 사용한 풍작이 계속되며 맬서스 트랩은 과거의 유물이 되나 싶었는데, 구아노는 원래 화약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일종의 군수물자였고 박쥐나 바다새, 펭귄등의 배설물이 오랜기간 퇴적되어 만들어지는 일종의 생물퇴적물이라 공급량이 금방 바닥나게 된다.[2]
몇 년간의 풍작 후 바로 찾아온 흉작[3]에 사람들은 기아의 공포에 시달리게 될 때 독일의 화학자가 놀라운 사실을 발표한다.
2.2 공기로 빵과 폭탄을 만든 과학자
공기중에 존재하는 질소를 인공적으로 농축해 암모니아로 합성, 인공 질소 비료를 만드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안정적인 질소공급이 가능해지자 더 이상 휴경지나 콩농사, 감자농사를 반복할 필요가 없어졌고, 인공질소비료의 공급 3년만에 식량 생산량은 인구증가량의 2배를 기록, 사실상 멜서스 트랩을 폐기 시켰다.
또한 공중질소고정법으로 생산된 암모니아를 백금촉매로 산화시키는 오스트발트법으로 질산을 만들고 질산은 TNT 등 각종 화약의 원료가 된다. 대부분의 폭약은 질소성분이 포함되어있어 공중질소고정법은 구아노 등 제한된 천연질소광물로 만들던 화약을 값싸게 대량생산할 수있는 길을 열었다. 그 결과가 1차, 2 차 대전. 그야말로 공기에서 화약을 만들어 낸 것이다.
공중질소합성법은 프리츠 하버를 유럽의 구세주로 만들었고, '공기로 식량을 만드는 과학자'라는 명예가 그에게 붙었다. 여기까지만 했으면 그는 인류 최고의 화학자로 불려도 될 뻔 했으나...
3 어둠의 발명 : 독가스
프리츠 하버는 골수 애국자였으며 전쟁에 대해선 강경파였다. 제1차 세계대전의 전선이 고착되자 하버는 조국인 독일의 승리를 위해 한가지 이론을 세워 발명을 하게 되는데 이게 바로 독가스다.
하버가 독가스의 제조이론을 완성할 즈음, 같은 화학자이자 부인이던 클라라 임머바르는[4] 남편이 완성한 독가스의 위험성을 파악하고 더이상 연구하면 안된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하버는 이를 무시했고 클라라 임머바르는 비탄에 빠져 자살해버렸다. 아내의 자살은 오히려 프리츠 하버의 연구를 진척시키는 촉매가 되었고 하버는 독가스의 실험검증을 마치게 된다. 실험검증을 통해 유효성을 확인한 하버는 전쟁에서 적극적으로 독가스를 사용해야 한다는 제안을 군상층부에 뿌리고 다녔다.
하버가 독가스 사용을 주장한 시대엔 ABC무기의 개념이 정립되지 않았던 시기지만 살상목적의 가스병기는 1899년 국제법으로 금지되었고 1차 세계대전은 1914년 7월 28일 시작했단 점을 고려하면 하버는 조국인 독일이 국제법을 위반해야 한다는 강요를 하고 다닌 것이다. 하버가 대놓고 국제법을 위반하자는 제안을 하고 다닐 수 있었던 건 그의 업적으로 독일의 모든 체제가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하버가 확립한 공중질소고정법은 화약을 만드는 데도 필요했고, 농업에 필수적인 비료를 만드는 데도 필요했다. 즉, 독일은 식량과 무기, 비밀병기를 모두 하버의 화학기술에 기반을 두고 있었던 셈. 게다가 1차 대전 당시 독일 본토는 영국 해군에 가로막혀 해상으로 물자 보급이 막힌 상태였으니 하버의 업적이 없었다면 독일은 전선유지는 커녕 물자보급으로 고사했을지도 모른다.
독가스를 사용하자는 하버의 제안을 확인한 독일군 상층부는 종전 후 국제법 위반을 한 것에 대한 책임론이 제기될 것이라 예측, 하버의 제안을 이런저런 핑계로 거절했고 최종적으론 전쟁은 사람이 하는 것이란 고정관념을 내세워 하버의 독가스 사용 제안을 근본적으로 부정했다. 하지만 상술 했듯 하버는 군대의 상층부에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할 수 있는 업적을 쌓아 올린 인물이고 전선고착이 장기화되자 상층부에서도 "이길 수 있다면 무슨 짓이건 못하겠는가?" 라는 강경론자들의 주도로 독가스가 전쟁터에 투입된다.
그리고 엄청난 효과[5]를 거두며 하버의 뜻대로 독가스는 고착된 전선[6]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당시 주요 전술이던 참호전을 근본적으로 뒤집어 버린 독가스의 유용성은 독일과 대치중이던 연합군도 인정해 최초의 독가스 투입 후 6개월 뒤 연합군도 독일군의 참호에 독가스를 뿌려댔다[7]. 결국 독가스로 인해 양측은 엄청난 인명피해가 나왔고 오죽하면 1차 세계대전에서 사용한 초탄 중 30%는 가스탄[8]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이처럼 하버는 1차 세계대전 당시 대량 살상병기의 제작과 국제법 위반을 주도한 반인륜적인 중죄를 저질러 전범으로 취급받아야 했지만 종전 즈음 찾아온 유럽의 식량위기를 질소비료로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을 전유럽이 인정해 주었고 독가스의 제작과 투입에 대한 책임문제는 연합군도 똑같은 놈들이라 유아무야 넘어갔다.
결국 하버는 1차 대전이 종전한 년도인 1918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한다.
4 전후 : 비참한 말년
조국을 위해 일한 자신에게 책임을 전가하려고 한 독일 상층부의 움직임에도 하버의 애국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되려 독일의 패전배상금을 해결할 방도를 찾아내기 위해 바다에서 금을 찾는 방법을 연구하고 이론을 완성시킨다. 하지만 바다 속에는 사람들이 측정한 자료보다 더 적은 금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곤 채산성 문제[9]를 검토한 후 적자가 확실시 되자 연구를 포기했다.
열성적으로 임하던 금 추출연구를 갑자기 관둬버리자 주변에선 “죽은 마누라가 말렸냐?”라고 비아냥 거리기도 했다고 한다.
5 나치당 집권 시기
나치당의 집권 때, 그에게 위험이 닥친다. 1933년까지 카이저빌헬름 물리화학·전기화학연구소의 소장으로 재임하며 독일 화학의 발달을 주도하였던 그는 나치가 유대인[10] 공직 추방 명령을 발부하며 인생이 꼬인다. 당시 지식인들은 말도 안되는 요구라 거절했고, 하버도 처음에는 거절하며 시간을 끌며, 자기 휘하의 유대인들을 미국이나 영국같은 나라로 탈출시키는데 도와준다. 이때 하버는 1차대전때 독가스를 이용하게 한 경력을 인정받아[11] 나가지 않아도 됐으나 대부분의 훌륭한 과학자가 유대인이었던 독일인 만큼, 연구소는 망했다고 판단, 조국의 명령이라면 기꺼이 받아 들인다는 말과 함께 자기 연구실을 뒤집어 엎고 연구소장직을 떠난다. 그의 하야 소식을 접한 케임브리지 대학교는 그를 교수로 초빙했고 유대인 박해가 심해지자 애국심이 동난 건지 하버는 독일을 떠나 영국으로 향했다.
하지만 하필 출퇴근하는 곳 주변이 1차 세계대전 참전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던 동네라 심신이 시달렸고 대학내에서도 "저 새끼는 배울 점도 많고 머리도 좋은데 정신이 썩었어" 라는 혹평을 받았다. 시달림을 참지 못하고 연구직에서 물러날 것을 생각하던 하버에게 같은 화학자이자 이후 이스라엘의 초대 대통령이 되는 하임 바이츠만(Chaim Weizmann, 1874∼1952)[12]에게 새로 창립되는 다니엘 시프 연구소(Daniel Sieff Research Institute, 지금 이스라엘의 Weizmann Institute of Science)의 소장을 맡아 달라는 제안을 받아 영국을 떠난다.
영국을 떠난 하버는 연구소의 개소식에 참석하기 위한 여정 도중 스위스의 바젤(Basel)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고, 화장되어 유골은 그곳에 묻히며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무리한다.[13]
6 평가
멜서스 트랩에서 인류를 구원한 과학자이며 결과적으로 수 억의 생명을 인류에게 선물하였지만 동시에 국제법 위반과 대량살상 병기를 만들어냈다. 보는 시점에 따라선 비운의 과학자이기도 하다.
조국인 독일에 엄청난 애국심이 있었고, 독일의 발전과 번영, 위상을 위해 동분서주하였고 노력에 걸맞는 성과도 거두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반인륜적 대량살상병기를 만들었다고 평생 비난 받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참전국 중 가스병기를 사용하지 않은 진영은 없었다.[14] 도찐개찐 평생동안 조국인 독일의 앞날을 위해 살았지만 자신의 정체성과는 전혀 무관한 유대인 혈통[15]을 가지고 있단 이유로 조국에서 일방적으로 추방과 다름없이 망명길에 올라 온갖 험한 꼴을 겪다 고향에서 먼 타지에서 쓸쓸히 죽어 그곳에 묻혔다.
어떻게 보면 정말 운이 따라주지 않아도 이렇게 안 따라줄까 하는 느낌.
7 트리비아
유일하게 막스 플랑크가 하버를 인정했지만 아돌프 히틀러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아이러니 하게도 히틀러는 유대인의 학살에는 그가 만든 치클론 B를 쓴다. 그리고 그의 친척들이 이 독가스로 학살을 겪는다.
즉, 저런 엄청난 공을 세워놓고도 전범이었기 때문에 위인전에 나올 리가 없고 언론에서 칭찬할 수도 없어서 묻혔다. 과학사를 배우면서 과학자의 도덕성을 설명할 때 단골로 나온다.[16] 그래도 일반인들은 잘 모르지만. 여담으로 1924년에 세계여행을 다니면서 일본이 점령한 대한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흑집사에서 현재 고인이 된 지클린데 설리번의 아버지가 이 인물을 모티브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에서 그의 삶과 업적 등을 다룬 책이 있다.- ↑ 거름을 뿌리는 방법도 있지만, 당시 거름은 성능이 영 안 좋았다.
- ↑ 채집을 하려면 퇴적물을 만드는 생물이 서식하는 곳을 찾아가야 하는데 방문과 채집을 하는 과정에서 생물의 서식환경이 파괴되고 개체수가 줄어들어 최종적으론 생산환경 자체가 파괴된다.
- ↑ 엄밀히 말해 평작.
- ↑ 그녀 역시 유태계였고, 브레슬라우 대학에서 화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최초의 여성이었을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었다.
- ↑ 살상 능력 이전에, 당시 막 보급되던 연막탄을 독가스인양 자신만만하게 쏴대면 상대측이 쫄아서 도망치는 일종의 공포효과가 나왔다.
- ↑ 당시 주요 전술은 참호전이었는데 독가스를 참호에 뿌리면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 죽어버린다. 독가스가 오면 좋건 싫건 참호전을 더 이어갈 수 없는 셈.
- ↑ 이때 연합군의 가스전을 주도한 사람이 1912년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빅터 그리냐르
- ↑ 물론 모두 독가스탄은 아니다. 연막이나 신호연막등도 이에 포함된다.
- ↑ 독일의 부채를 탕감하기 위해 진행하니 무조건 흑자가 나야한다.
- ↑ 프리츠 하버는 유대인이었으나 이미 어린 시절에 기독교로 개종했고, 유대인이라는 자각이 없었다.
- ↑ 나치 초기에는 1차대전때 군인으로 참전했던 유대인은 나치도 건드리지 않았다. 나중에는 그런 거 없지만. 단적인 예로 안네 프랑크의 아버지인 오토 프랑크가 포병 장교로 1차대전에 참전했었다.
- ↑ 바이츠만은 영국 태생 유대인으로 1차 세계대전 당시 화약 제조에 필수적인 아세톤 생산법을 개선한 공로가 있었다. 진영은 반대였지만 하버와 똑같은 일을 한 것이라 동병상련의 감정이 들었는지도…
- ↑ 주치의가 높은 산에는 올라가지 말라고 했으나 자신은 연설을 해야 한다며 올라갔고, 연설이 끝나고 내려오다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 ↑ 하버 입장에서 좀 억울할 수 있는게, 나치와 일제의 넘사벽급 악행 때문에 상대적으로 선악이 명확했던 2차대전과 비교할 때, 1차대전의 독일은 유럽에 널리고 널린 제국주의 국가 중 하나일 뿐이었다. 오히려 하버 역시도 나치의 피해자 중 한명이다. 또한 '과학자의 윤리적 책임'이라는 개념이 보급된건 원폭의 개발 이후이다. 그리고 유럽은 2차대전을 겪은 후에야 과도한 국가주의가 인류를 끝장낼 수 있다는걸 비로소 깨달았다. 따라서 하버의 독가스 개발을 악행이라고 할 수 있을지언정, 그 책임을 하버 본인에게 온전히 전부 덮어 씌우기는 어려울 것이다.
- ↑ 심지어 유대교를 믿지도 않았다. 그는 기독교인이다.
- ↑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앙투안 라부아지에가 나온다. 앙투안 라부아지에가 더 유명한데 왜 더 깊이 들어가야 나오냐면, 업적은 드러나지만 프랑스 혁명의 배경이냐고 할 만큼 문제가 많던 그의 일생과 행적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