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렌스 나이팅게일

Florence Nightingale
(1820년 5월 12일 ~ 1910년 8월 13일 (90세) )

젋었을 때의 모습[1]노년의 모습

1 개요

영국간호사이자 행정가, 사회 개혁가.[2]

2 소개

한국에서는 백의의 천사라고 알려진 병의원 제도의 개혁자. 크림 전쟁 당시 30여명의 간호사를 데리고 이스탄불에서 활동것으로 유명했으며, 그 유명세를 이용해 현대 간호사의 기틀을 잡고 발전시켰기에 흔히들 "간호학의 어머니"로 칭해지며, 또한 통계학자, 사회 개혁가로도 활동하며 통계의 시각적 표현 관련 성과나 영국 페미니즘의 진전 등등 여러 업적을 쌓았으며, 그러한 업적들을 인정받아 영국 왕립통계학회의 첫 여성 회원이 되기도 하였고, 미국통계학회의 명예 회원이 되기도 했다. 보통 나이팅게일 하면 생각하는 가녀리고 얌전하며 헌신적인 판타지여성상과는 달리 성격은 여러모로 독불장군 내지는 여장군으로 불릴 정도로 고집이 있었다고 하며, 이러한 성격도 그녀가 이루어낸 업적들을 달성하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영국인이지만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플로렌스'라는 이름이 붙었다.[3] 언니 파세노프 역시 나폴리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나폴리의 그리스식 이름인 파세노프라는 이름이 붙었다.

3 일생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1820년 이탈리아 피렌체의 별장에서 부유한 영국 상류층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커가면서 간호사가 되어 다친 이들을 돌봐주는 것을 자신의 인생의 종교적 사명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이 시절의 간호사는 상당히 하대받는 직업[4][5]이었으며, 요양원에서 잡일을 하는 청소부에 가까운 이미지가 있었기에 때문에 당연히 명문가의 딸들은 간호사가 되지 않았는데, 이때 나이팅게일 가라는 꽤나 잘나가는 집[6]의 귀한 막내딸이었던 플로렌스가 가족들에게 '간호사가 되라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다.'라며 사회에서 멸시받는 간호사가 되겠다고 선언하니 집안의 분위기는 당연히 안드로메다로... 이를 막기위해 아버지는 강제적으로 혼사를 여러번 준비했으나 플로렌스는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어쨌든 결국 자신의 뜻을 관철하여 간호사가 된 이후 크림전쟁에 군 간호사로써 참여하게 된다. 위인전에 나오는 나이팅게일의 모습은 주로 이 시절의 모습. 당시 전쟁에서는 총 맞아 죽는 병사보다 죽지 않을 정도의 부상을 치유하지 못해서 사망하거나, 병사 내 전염병이 돌아 사망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이팅게일은 군 위생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위생때문에 병사들이 죽어가고 있으니 지원을 해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각종 통계자료를 만들어 제시하며 끊임없이 보냈으며, 결국 영국의 지원을 받아낸다. 즉, 위생을 처음 도입했다[7]덕분에 영국군의 사망률은 40%대에서 2%로 감소하는 기적을 보게 된다.(!) 이후 나이팅게일이 영국군의 사망률을 눈에 띄게 감소시킨 점, 그리고 밤마다 등을 켜고 병사들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돌아다닌 점 등의 이미지가 합쳐져 '등불을 든 여인'(The Lady with the Lamp)라는 이름으로 각종 언론에서 앞다투어 보도하며 나이팅게일은 유명세를 타게 된다.

전쟁 중 나이팅게일은 지역 풍토병에 걸려 죽을 때까지 침대에서 생활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때 나이팅게일은 크림전쟁에서 얻은 유명세를 이용하여 기부를 받아(더 정확히는 funding을 받아) 자신의 간호 철학[8]을 고스란히 담아낸 최초의 근대식 병원을 설립했다. 당시 전염병에 대해서는 2가지 학설이 존재했다. 하나는 히포크라테스부터 시작된 장기설(나쁜 공기가 병을 만들어낸다)였고, 또 하나는 당시 막 발견되기 시작했던 미생물설(미생물이 병을 만들어낸다)였다.

현대에는 미생물설이 맞는 것으로 결론이 났지만, 당시에는 장기설이 조금 더 우세했고, 나이팅게일도 장기설의 강력한 지지자였기 때문에 이 병원에서는 공기를 깨끗하게 하기 위해 창문의 위치, 크기, 간격, 환풍기의 위치, 개수 등 공기를 깨끗하게 하기 위한 조건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나이팅게일이 지지했던 학설이 틀린 것으로 판명되었기 때문에 지금 보면 굳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조건들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병이 전파되지 않기 위한 환자와 환자 사이의 최소거리, 환자가 편안함을 느끼도록 온도, 습도 등을 조절할 수 있도록 할 것, 환자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개인별 조명을 설치할 것 등 현대 병원설계에서도 다수 포함하고 있어 병원 건축에서도 상당히 참고하고 있는 것들도 많다. 그러나 환자와 환자 사이의 최소거리라던지, 간호사 1명당 담당하는 최대 환자의 수[9] 등은 병원의 수익문제로(...) 지켜지고 있지 않은 것들이 훨씬 많지만, 원칙상 지켜야 하기는 한다는게 중론. 참고로 나이팅게일이 세웠던 병원은 다른 병원보다 환자의 만족도나 회복속도가 월등히 좋다고 한다. 그녀의 업적을 기리기위해 국제적십자에서는 매년 세계의 우수한 간호사들에게 나이팅게일 상을 수여하고 있으며 나이팅게일 선서는 간호사들의 좌우명으로 알려져있다.

한국에 퍼진 "백의의 천사"라는 별명 탓에 흰 간호사복을 입은 가녀린 이미지이지만 실제 사진을 보면 전혀 아니다.[10] 그리고 그녀가 남긴 업적을 봐도 현장 근무를 하는 간호사라기보다는 행정가에 가깝다.[11] 성격 역시 온화하고 부드러운 귀족 여인이라기 보다는 독불장군 스타일. 배짱도 좋고 집안도 좋은 그녀가 개혁의 칼날을 휘둘렀기에 그전까지의 전근대적 병원 행정과 간호사의 지위가 진일보했다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

실제로 그녀는 크림 전쟁 종결 이후 한때 봉사한 적이 있었던 구빈원의 의료 복지 체계 확립을 위해 노력했다. 크림 전쟁의 전쟁 영웅으로 대우받은 지라 인맥도 넓었고 꾸준히 주장한 덕에 동조자들 및 조력자들을 쉽게 모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조력자들을 통해 자신의 주장 근거를 더욱 확충하고 논리를 보강할 수 있었고. 중간에 그녀의 제안에 호의적인 자유당이 선거에서 패하는 악재가 터지는 바람에 원안대로 추진하지는 못했지만 결국 자신의 제안을 통과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는 영국에서 1911년에 실시될 국민보험법과 1946년 시행된 전국민 의료복지의 선구적 조치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통계 자료의 시각화에 공헌한 것으로 평가되며, 통계 관련 서적에 종종 등장하기도 한다. 크림전쟁에서 영국군 사망 원인에 관한 도표 가 유명하다. 후에 영국 왕립 통계학회 최초의 여성 회원으로 선출될 정도.

위인전 같은 데서는 크림 전쟁 때 이야기만 나오기 때문에 오해하기 쉬운데, 의외로 크림 전쟁이 터진 뒤에도 꽤 오래 살았다. 사망했을 때 나이가 90살. 당시에는 거의 철인 수준인 수명이다.[12] 사실 이렇게나 오래 살았기 때문에, 말년에는 영국인도 나이팅게일이 아직 살아있다는 걸 알고 놀랐다고 한다. 참고로 말년에 제자인 팬위크[13]와 간호사 면허 제도 때문에 아주 오랫동안 싸웠다. 나이팅게일은 간호란 희생정신, 사랑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면허제도에 거부감을 가졌으나, 팬위크는 전문성을 강조하면서 면허제도를 주장하였다. 결국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숨진 뒤부터, 이쪽 세력은 힘을 잃었다. 1919년 영국에서 간호사 면허시험이 시작되었고, 이때부터 간호사가 되려면 면허 시험을 봐야 했다.[14]

대단히 오래 살았기 때문에 대영박물관 아카이브에 육성이 보존되어 있다.

4 사망

관을 운구하는 모습묘비

나이팅게일은 1910년 8월 13일에 향년 90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공적을 기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으며, 유해는 햄프셔 주 웰로에 있는 성 마거릿 교회 내의 묘지에 안장되었다.

사인이 매독이라는 근거없는 소문이 있다.[15] 멋진 징조들에서도 매독사망설을 넣었지만 이는 얼토당토 헛소리. 다만 전쟁 후 눈에 띄게 쇠약해졌고 말년에는 중증 치매로 고생해서 죽기 얼마 전에 에드워드 7세가 훈장을 내렸을 때는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했고 자신에게 무엇을 주는지도 분간을 못할 정도로 쇠약해졌다.

5 백의의 천사와 등불 든 여인

한국에서는 나이팅게일의 별명이 유독 "백의의 천사"로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그녀를 칭하는데 자주 올라오는 명칭은 위에도 설명되었다시피 "The Lady with the Lamp"(등불 든 여인)이다. 이는 크림 전쟁에 대해 써진 타임지의 한 구절에서 유래한 것이다.

She is a "ministering angel"[16] without any exaggeration in these hospitals, and as her slender form glides quietly along each corridor, every poor fellow's face softens with gratitude at the sight of her. When all the medical officers have retired for the night and silence and darkness have settled down upon those miles of prostrate sick, she may be observed alone, with a little lamp in her hand, making her solitary rounds.

그 병원들에서 그녀는 한치의 과장도 없이 "섬기는 천사"였다. 복도 하나 하나를 그녀의 가녀린 모습이 지날 때마다, 모든 이들의 얼굴이 그녀의 모습을 볼 때마다 감사의 마음으로 누그러졌다. 모든 의료진과 군의관들이 밤을 맞아 처소로 돌아가고 적막함과 어둠이 길게 누워있는 병자들 위에 내려 앉을 때면, 작은 등불을 그 손에 들고 홀로 순회를 돌고있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이러한 문구는 또한 미국 시인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의 시 "산타 필로메나"[17]에 다시 등장하면서 더더욱 유명해진다.

Lo! in that house of misery

A lady with a lamp I see
Pass through the glimmering gloom,

And flit from room to room.
오! 저 고통의 집 안에

등불을 든 한 여인이 보이는구나
희미한 어둠 속을 지나가며

방에서 방으로 스치는구나

이러하듯,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그녀의 별명은 보통 "백의의 천사"가 아니라 "등불 든 여인"이다. 다만 한국과 일본에서는 "백의의 천사"로 알려져 있으며 심지어는 간호사라는 직업 자체의 별명으로 고정되었다. 흰색 복장보다는 녹색이나 청색 가운이 더 보기 쉬운 요즘 간호사들의 복장 트렌드를 생각하면 아이러니. 이렇듯 높은 인지도를 자랑하는 "백의의 천사"에 비해 "등불 든 여인"이라는 별칭은 사실상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상태. 심지어 위키백과에서도 "등불을 든 천사"라는 절충(?)안을 별칭으로 쓰고있다. 다만 그 옆에 영어로 써진게 "등불 든 여인"이라 그렇지. 이 백의의 천사라는 명칭은 그녀를 다룬 전기영화중 하나인 "White Angel"(백색 천사)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있다. 자세하게 아는 분이 추가바람

6 이런저런 루머들

여러가지로 '인류의 선'을 대변하고 있는 인물이지만, 이 사람도 자세히 파고 들면 온갖 구린 소문이 돌아다닌다. 위의 사망 이유에 대한 소문은 그것의 단편. 사실 당대에는 나지도 않은 소문이다.

6.1 고평가되었다?

지나치게 고평가되었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는다. 실제로 크림 전쟁 당시 간호사로 현지에서 활동한 시기도 길지 않고, 그나마도 후방 병원에서 있었으며 크림전쟁 이후의 활약도 거의 없다. 끽해야 자문 정도. 높이 평가 받은 것은 고위신분의 백인이었기 때문이라는 것. 그 반대편에 있는 메리 시콜[18]의 재조명과 더불어서 역으로 더 까이고 있기도 하다.

다만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나이팅게일의 진짜 업적은 위생의 도입이다. 위생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지만, 병상과 병원의 위생을 확립하는 데에 공헌이 있다. 특히 이 과정에서 사망자 비율과 위생의 연관 관계를 통계를 통해 한 눈에 보여 준 것으로 유명하고, 이로 인해 과학동아 통계 디자인 관련 기사에서 언급되기도 했다. 다만 위인전 등에서 나이팅게일의 활동을 실제와는 다른 방향으로 묘사하고, 이를 지나치게 미화해서 이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나이팅게일의 진짜 업적도 폄하되는 것. 다른 의미의 '빠가 까를 만든다'에 가깝다.

그 외에도 위인전 때문에 잘못 알려진 사실도 많다. 마치 나이팅게일이 20대 즈음의 묘령의 나이에 크림 전쟁에 간호사로 나간 것처럼 묘사된 경우가 많다. 나이팅게일 뿐만 아니라 뉴턴이나 에디슨 등 개인 성품이 매우 괴팍했던 인물들도 매우 선한 사람으로 그려지는 것이 위인/역사 만화의 특징이다. [19]특히 해당 인물을 집중 조명하지 않고, 잠시 짚고 넘어가는 식으로만 다루는 역사 만화에서 그러한 점이 더 심하며, 이 때문에 나이팅게일이 20대, 심한 경우 10대에 종군 간호사로 활동한 줄 아는 사람까지 있다. 하지만 크림 전쟁이 일어난 것은 1853년, 거기다 그녀가 간호사들을 이끌고 간 것은 1854년이다. 이때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이미 30대 중반이다.

6.2 독신을 강요했다?

나이팅게일에 대한 구린 소문의 근원은 그녀가 당대로서는 드물게 독신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레즈비언이 아닌가 하는 먼 훗날의 호사가들의 말이 있긴 했지만 나이팅게일의 여러 개혁이 탄력을 받았던 것은 그녀의 활약이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낭만성과 결합했다는 것이 지배적이다. 다시 말해 성모 마리아 사촌동생 급의 지나친 미화는 있을지언정 당대에는 구린 소문은 없었다는 게 지배적이다.

하지만 행정적인 측면에서는 대단히 독선적인 점이 있었다. 크림 전쟁 후반기에 영국에서 또다른 간호부대가 파견되었는데 간호부대의 책임자가 자신과 동급이라는 이유로 마구 간섭하고 왕따 항의해서 결국 이 책임자는 자신의 부하 직원을 남기고 영국으로 소환된다.

후임자로 온 의사와 간호사들은 직책으로는 동급이지만 사실상 졸개 나이팅게일의 부하직원 취급을 받았었다…

7 그외

  • 터키 이스탄불의 위스퀴다르(Üsküdar) 부근에 그녀가 크림전쟁당시 근무했던 야전병원이 남아있다. 본래 오스만 군대가 병영으로 사용하던 곳으로 전쟁이후에도 한동안 병영으로 쓰였다가 현재는 버려진상태. 조만간 터키정부에서 박물관을 세울 예정이라고 하나 언제 완성될지는 알 수 없다. 오늘날 이름은 하미디예 병영으로 항구에서 멀지 않은곳에 있다.
  • 만화나 위인전에서는 마냥 자애롭고 가녀린 것으로 묘사되기 일쑤이지만 실제로 그녀는 매우 강단있는 독불장군 같은 신여성(?)이었다. 그녀의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는 다음과 같다.
크리미아 전쟁에서 의료물품이 부족해 짜증이 난 나이팅게일은 군의장관 존 홀에게 덤벼들었다.

"미스, 군대의 규정을 모르시는 것 같군요. 이 상자는 위원회 허가없인 열 수 없습니다. 참고로 위원회는 3주 뒤에 열립니다."
그 순간, 나이팅게일은 주먹으로 상자뚜껑을 때려부쉈다. 그리고 아연실색한 홀에게 그녀가 말했다.
"열렸네요. 갖고 갈게요."[20]

  • 일본 애니메이션 만화 세계 옛날 이야기에서도 몇몇 위인들 이야기가 나왔는데 나이팅게일도 나왔다. 여기선 위에 일화가 각색되었는데 의료물품을 넣어둔 창고에 간호사들을 데리고 닥돌한다! 경비병들이 거절하자 나중에는 총기를 들고 경고 사격을 하여 숫적으로 밀린 경비병이 데꿀멍하여 열게하고 싸그리 물품을 가져가버린다.
  • 2015년 유비소프트에서 제작한 어쌔신 크리드: 신디케이트에도 출연한다. 이비 프라이를 만난 클라라 오데아가 가짜 약으로 인해 쓰러지자, 이비는 황급히 주위에 도움을 요청하게 되고 이때 이비의 부름에 응답한 사람이 바로 나이팅게일. 이비에게 진짜 약을 찾아달라는 부탁을 하게되는데 템플기사단을 족쳐 진짜 약을 구해다 주는것이 이비를 플레이하는 플레이어들이 수행해야할 임무. 이비가 진짜 약을 구해다주자 그 약으로 바로 클라라를 치료하는데 성공한다. 등장은 여기서 끝인데 당시 시대에 영국에 위인들이 꽤나 많았던지라 나이팅게일도 벨을 제외한 다른 실존 인물들처럼 서비스차원에서 등장한 인물인듯.
  • 크루세이더 퀘스트에도 나이팅게일이 있다. 모티브가 모티브인 만큼 죽어가던 용사도 살려내는 데다가 심지어 죽은 용사도(...) 살려낼 수 있는 소생 스킬을 해금시켜준다.
  1. 이라곤 해도 얼굴만 봐도 알겠지만 이 때도 나이가 꽤 들어있었다. 제리 베럿이 이후 나이팅게일의 모습을 보고 당시의 상황을 상상하여 그린 그림이 있는데, 그 그림에서도 비슷한 얼굴로 나온다. 즉, 사진은 못해도 크림 전쟁 종결 이후 찍었다는 것이며, 36세는 넘은 사진이다. 참고로 네이버 캐스트에 1858년에 찍은 나이팅게일의 사진이 있는데, 위와 거의 일치한다. 링크
  2. 사실 그녀의 업적의 대부분은 행정가이자 사회 개혁가로서의 활동 도중 이루어진 것들이다. 영문 위키피디아에선 그녀를 "사회 개혁가이자 통계학자, 그리고 현대 간호학의 창시자"로 칭하고 있다.
  3. 피렌체를 영국에서는 플로렌스라고 부른다.어쌔신 크리드 2에서 에지오 고향이 플로렌스로 나오면서도 이름 뒤에는 '다 피렌체'가 붙는 이유베네치아는 베니스, 밀라노는 밀란, 나폴리는 네이플스… 하지만 역사적으로는 피렌체보다 플로렌스가 더 오래된 이름이다. 로마 시대에 피렌체의 이름이 플로렌티아 였고, 플로렌스는 플로렌티아를 영어식으로 읽은 것이다.
  4. 일부 병원을 제외하고 병원이라는 공간 자체가 그 당시에는 그다지 좋은 인상이 아니였다. 의사가 되려던 음악가 베를리오즈는, 아버지가 "직접 병원에 가보라"고 말해서 18살의 나이에 프랑스 파리 대병원을 방문했다가, 쥐가 넘치고 지저분한 병원을 보고 구역질을 하며 의사를 포기하고 작곡가가 되었다. 이처럼 당시 유럽을 포함한 웬만한 나라들의 의료계가 이랬다. 부잣집은 병원에 가느니 아예 실력 좋은 의사를 찾아 직접 주치의로 고용하여 병원이라는 곳을 기피했을 정도였고, 사실 실력이 좋다면 이런 식으로 개인에게 고용되는 게 의사에게도 병원에 들어가는 것보다 여러모로 이득이였다.
  5. 또한, 당시에는 낮은 임금을 주기 위해 교육수준이 낮은 여성들을 간호사로 주로 고용했기 때문에 간호사들의 직업능력이나 의식도 매우 떨어지는 편이라 전문 직업으로 인정도 받지 못했다. 안타깝지만 간호사는 아직도 처우가 나쁜 직종이다.
  6. 아버지는 꽤 부자였으며 지역 시의원이었기에 그 지역에서 명문 집안으로 그녀도 어릴적부터 아가씨 소리 들으며 귀하게 자랐다. 아버지는 나중에 주지사 선거에도 나갔으나 낙선했다.
  7. 이미 1600년대부터 위생의 개념이 있었으며 1800년대 초중기에 위생법 등이 발효되었으나, 실제로 실행에 옮긴 것은 그녀라고 봐도 무방하다.
  8. 요약하자면 '쾌적함을 느끼는 환경에서 환자의 회복이 더 빠르다. 간호사는 환자의 회복을 돕기 위해 쾌적한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
  9. 간호사가 환자의 이름, 가족관계, 몸상태 등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고 하며, 이를 위한 최대 환자 수는 12명이라고 규정하였다.
  10. 못생겼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물론 가녀린 이미지도 아니고.
  11. 나이팅게일은 현장에서 묵묵히 일하는 전문가라기보다는 행정가, 정치가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12. 참고로 나이팅게일과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5살 차이밖에 안 난다.
  13. 나이팅게일이 간호학이라는 학문의 시초인 이유는 간호사 제도를 확립했기 때문이라기보다 간호 철학을 확립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서 팬위크는 현대 간호사의 제도적인 부분에 많은 발전을 가지고 왔다. 영국간호사 협회의 창립자이자 ICN(International Conference of Nursing)의 초대 회장이다.
  14. 결과적으로 간호사들이 전문직으로 대우받는데 큰 기여를 했기 때문에 현대 간호학자들의 입장은 나이팅게일과 팬위크 둘 다 큰 기여를 했다는 것. 물론 대중적 인지도나 간호철학에서의 영향력은 팬위크가 나이팅게일에게 상대가 되지 않고, 간간히 간호학 개론에서 이름을 보이는 수준.
  15. 매독에 걸리면 보통 일찍 죽는다고 하지만 매독에 걸리고도 82살 장수를 누린 스페인 화가 고야라든지 덴마크의 여화가인 카렌 블릭센이나 슈만의 아내인 클라라 슈만도 매독 증거가 꽤 끈질기게 있음에도 둘 다 77살까지 살았다든지 하는 예외는 있다.(세 사람에 대하여 매독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반대 의견도 오래 살아서이다.) 다만, 나이팅게일은 주장이 다르긴 하지만 대다수 의사들에겐 매독 사망은 낭설이라는 게 대세.
  16. "그 천사들은 섬기는 영"이라는 내용의 히브리서 1:14절을 인용한 어구이다.
  17. 성녀 필로메나, 살아있는 묵주의 수호자라고 불리는 인물로, "막 개종한 그리스의 왕의 딸로 태어나 어렸을 적 맹세한 순결 서약을 지키기 위해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청혼을 거절하고 그 대가로 고문을 받았으나 고문의 상처 (채찍 맞음, 화살 맞음)가 금세 치유되는 기적들을 보이고 감옥에서 오히려 더 아름다워지자 로마인들이 회심하는걸 두려워한 황제의 명으로 처형, 결국 순교했다"는 이야기를 성녀로부터 직접 들었다고 나폴리의 수녀 마리아 루이사가 주장했다. 참고로 이 주장 자체가 좀 흠좀무한게, 성녀 필로메나의 유해는 10살에서 13살 정도로 되는 어린 아이의 유해이기 때문이다.미친 (참고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기독교를 박해한 로마 황제중 하나이다.) 기도를 잘 전구해준다(하나님에게 전달해준다)는 것으로 유명하며, 19세기 초반, 유해가 발견된 후 순교 사실 빼고는 사실상 밝혀진 것이 없는 인물(위의 이야기는 한 수녀의 "주장"이다) 이 순전히게 "중재 기도가 강력하다(?)"는 사실만으로 시성된 인물이기도 하다.
  18. 1805~1881.당시 영국식민지였던 자메이카 태생 흑인으로 크림 전쟁의 참상이 알려지면서 간호사로 갈 것을 결정했으나, 영국에서도 크림 전쟁 현지의 나이팅게일 간호사단에서도 흑인이라서 탈락. 자국에서는 군의로 활동하는 등 경력도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래서 전방에서 응급치료에 나서서 결국 현지 병사들의 제보에 의해서 터키, 영국, 프랑스 3개국에서 훈장을 받았지만 재정적 지원이 없어서 결국 사비로 의료소 운영하고 크림전쟁 끝난 다음에는 빈곤속에서 병으로 사망. 워낙 삶 자체가 드라마틱했고, 초상화가 최근 발견되면서 근래에 와서야 주목받고 있다. 그 영향으로 EBS 지식채널 e에도 등장했다.
  19. 위인전 때문에 에디슨이 테슬라를 견제하기 위한 병크들을 몰랐던 사람들이 많다.
  20. wotopi.jp/archives/371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