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중공업

기업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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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명칭주식회사 한진중공업
영문명칭Hanjin Heavy Industries & Construction Co., Ltd.
설립일2007년 8월 1일
업종명강선 건조업
상장여부상장기업
기업규모중견기업
상장시장유가증권시장(2007년 ~)
종목코드097230
홈페이지

1 개요

한진그룹에서 분리된 한진중공업그룹의 핵심 기업. 한진중공업홀딩스의 자회사이다. 본사는 부산광역시 영도구 태종로 233에 위치해 있다.

조선소는 부산의 영도조선소와 필리핀의 수빅조선소를 보유하고 있는데 영도조선소의 경우 부지가 협소한 사정상 대량건조는 불가한 대신 각종 첨단기술이 적용된 연구선이나 강습상륙함 같은 특수목적선 위주로 건조한다. 수빅조선소는 상당한 규모의 건조시설을 갖추고 있어 대형 선박은 주로 여기서 건조한다. 2016년 들어 한진중공업은 영도-수빅 투 트랙 전략으로 사업재편에 나섰다. 영도는 질을, 수빅은 양으로 승부를 본다고 생각하면 좋을듯하다.

영도조선소의 경우 한진중공업 측이 경제성 있는 특수선에 역량을 집중하고 상선의 비중을 점차 줄여나가는 것으로 수익성 강화에 나섰다. 2015년 2월 말 기준 영도조선소의 수주 잔량은 15척으로 일부 벌크선을 제외하면 대부분 특수선 및 중소형 상선이다. 이 중 6~7척은 지난해 한국해양수산연수원, 조달청 등으로부터 수주한 항해 실습선이다. 일반 상선은 2011년 현대상선으로 부터 수주한 벌크선 한 척 밖에 없다. 이 벌크선은 올해 초 수주자에게 인도되었다.

한진중공업을 공동관리하는 채권단은 영도조선소의 상선 부문 비중을 단계적으로 축소, 2020년까지 특수선 전문 조선소로 전환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한국 해군 최대의 군함인 독도함이 한진중공업 영도 조선소에서 건조되었다. 그리고 후속함인 마라도함(가칭)도 한진중공업이 맡은 상태이다.

2 상세

시작은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이 세운 조선중공업으로 광복과 한국전을 거쳐 대한조선공사로 바뀐다. 이후 외환위기로 인해 한진그룹에 인수되어 한진중공업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한미합작사인 코리아 타코마도 비슷한 시기 한진그룹에 인수된다. 선박을 제조하고 수리하는 조선업체로 출발하여 건설업까지 손을 뻗친 기업. 그러다가 조중훈 한진 회장의 아들인 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이 계열분리하여 빠져나가면서 막장 드라마를 찍고 나가서 만든 기업이다. 한진그룹에서 계열분리되었기때문에 한진그룹 소속이 아니며, 이에 따라 한진중공업도 분할하여 지주회사한진중공업홀딩스를 만들었다.[1]

어느 정도로 사이가 안 좋냐면, 출장갈 때 대한항공을 타지 말라(...)는 내부지시까지 있을 정도다. 오히려 아시아나항공(!)의 자회사인 에어부산과 차라리 관계가 좋은 편이라는 속설도 있다. GS그룹이 필수 인프라 중 하나인 전화망으로 LG유플러스 것을 사용하는 것과는 대조적. 사실 GS그룹LG그룹과 싸워서 헤어졌더라면 전화망을 모조리 SK텔레콤이나 KT로 바꿔버리는 격이다.

조남호 회장이 한진중공업에 취임한 이후에는 조선업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일반 아파트 건설업, 상업시설 건설 등 건설업에 치중하는 모양이며, 실제로 대부분의 매출이 건설업에서 뽑히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업을 소홀히 한다는 건 아니고...

2008년 ~ 2012년 동안 노사분규가 장기화되어 해양플랜트 건설에 많이 뛰어들지 못한게 새옹지마가 되었는지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대우조선해양 등이 줄줄이 플랜트 적자로 신음하는 2015년에도 그리 큰 적자를 보지는 않았다.
그러나 2016년이 되자마자 대출 연장을 받지 못하고 자율협약을 신청하게 된다.

3 노동운동

타 조선업체들에 비해 노사분규가 크게 이슈화되었다. 일제시대부터 이어진 조선소의 기나긴 역사와 궤를 함께한 노동운동의 역사가 존재하는 회사이기 때문이다.

대한조선공사 시절부터 박정희 정권 치하의 대한노총(현 한국노총) 산하 노조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노동자 권익을 위해 활발하게 활동하는 대규모의 민주적 노동조합이 존재했다[2], 1960년대 말 조선공사 민영화 반대 투쟁에서 패배한 뒤 70년대에는 당시 대다수 노조들이 그랬듯이 관제적 성격을 띄게 되나, 중공업 부문에서 민주적 노동조합이 대대적으로 부활한 1987년 이후 한진중공업 노동조합은 다시 부산지역 노동운동의 중심으로 떠오른다. 80년대 이후 활약한 대표적인 노동운동가로는 한국 최초의 여성 용접인 김진숙(이후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있다. 부산지역에서 노동변호사로 활약하던 노무현 역시 한진중공업 노동조합의 활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1991년에는 당시 노조위원장이었던 박창수 씨가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도중 돌연 사망하는 일이 있었다. 더군다나 장례를 치르려던 그의 시신을 경찰병력을 동원해 강제로 빼앗아가는 짓거리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는 안기부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노태우 정부 시기의 대표적인 의문사 사건으로 꼽히며, 당시의 분신정국에 기름을 끼얹는 사건 중 하나였다.

2000년대 들어서는 정리해고를 둘러싼 노사간의 갈등이 두드러졌다, 2003년에는 김주익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이 85호 크레인에서 자살한 사건이 있었으며[3], 얼마 후 곽재규 조합원도 따라서 숨을 거두었다.[4]

2011년에는 희망버스 사건이 있었다. 정리해고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위에서 언급된 김진숙 지도위원의 85호 크레인 농성을 계기로 크게 이슈화되었다. 희망버스 투쟁 이후에는 파업에 대한 거액의 손해배상이 원인이 되어 2012년에는 최강서 조합원이, 2013년에는 또 다른 김 모 조합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있었다.
  1. 조남호와 한진 일가와의 사이가 굉장히 안 좋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2. 이 시기를 상세하게 다룬 연구서로 남화숙 워싱턴대학교 교수의 <<배 만들기 나라 만들기>>가 있다.
  3. 정은임 아나운서가 이 사건을 소개한 라디오 방송분이 있다. [1]
  4.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기는 한때 노동자들의 동반자였던 노무현 정권 때였으며, 노무현 대통령은 이 사건 직전에 일어난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 씨의 분신자살 사건을 두고 죽음이 투쟁의 수단이 되는 시대는 끝났다라는 발언을 하여 수많은 노동자들에게 충공깽을 선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