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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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태우 정부는 1987년 12월 16일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노태우 대통령이 이끌었던 정부이다. 제6공화국 최초의 정부로[1] 1988년 2월 25일 출범해 1993년 2월 24일까지 5년간 존속하였다.

2 외교/국방

외치 부문에서는 공이 과를 앞섰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은 냉전체제 설립 이후 최초로 서방국과 공산국가 모두 참여하여 외교적 의미가 컸다. 1990년부터 공산권 붕괴가 가시화되자 기민하게 동구권과 중국 등과 수교를 추진하여 국제적 입지를 크게 넓힌 소위 '북방 정책'[2]은 노태우 정부의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1991년 대선 공약이었던 전시작전통제권 회수를 추진하여 김영삼정부 때 평시작전통제권을 환수하였다. 남북 고위급 회담을 통한 조율로 남북한의 국제연합 동시 가입을 성취한 것 역시 큰 성과.

3 정치/사회

취임 초기부터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되어 여/야 내부에서 5공 청산과 관련하여 압박을 받았다. 여기에 노태우 본인이 전두환과 5공을 수립한 핵심 측근이었다는 전력이 일종의 원죄로 작용하여, 집권 내내 지지도가 부족했던 노태우 정부는 대통령 주도의 힘있는 정책 드라이브를 펼 수 없었고 대통령의 권한도 이전보다는 많이 약해졌으며 대신 치안에 공을 들여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여 내부적인 치안유지를 꾀하였다. 그러나 1989년의 세를 반전시킬 목적으로 공안정국을 일으킨걸 시작으로 세를 역전시킬려고 했고, 당시 재보궐 선거에서의 참패로 궁지에 물려있던 김영삼과 민정당과의 차별화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김종필을 끌어모아서 거대여당인 민주자유당을 탄생시켰다. 하지만 개혁정책이 크게 후퇴한데다가 당내 계파갈등과 연이은 날치기로 지지율은 낮았으며, 1991년에 낙동강 페눌사건이 터지고 수서비리등 부정부패 사건도 속속터진덴다가 물가상승률이 상당한 것이 여전히 문제가 되어서 1991년 광역의원 선거에서 민자당이 대패할것으로 예측되었지만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후에 조작으로 밝혀짐)과 정원석 총리 계란투척사건으로 세를 역전시켰고, 투표율도 58%로 낮게 나오면서 선거에서 기여히 압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1992년 총선에서 민자당은 149석을 확보하는데 그치며 급속히 레임덕에 빠졌고, 이때를 기점으로 김영삼에서 사실상 실권을 넘기게 되었다.

언론자유화를 통하여 보도지침으로 대표되는 언론 통제를 약화시켜 비교적 자유로운 언론보도가 허용되었고 각 언론사에 노조가 설립된것도 노태우 정부때였고 덕택에 언론 자유는 이전에 비해 비약적으로 향상되었고, 이에 미국 프리덤하우스가 1990년에 "언론 자유국" 이라는 지위를 부여하였다. 그러나 3당 합당 직후에 서영훈 사장에게 압력을 가해 퇴진시키고 서기원 사장을 임명시킴으로써 KBS를 다시 친정부적인 성향의 언론으로 만든 일이나 우리가 남이가 사건과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 등에서 보이듯 공작 정치가 자취를 감춘 것은 아니었으며 그리고 중앙일보는 SBS건으로 뒤퉁수를 맞았다는 후문이... 메이저 언론의 '자발적' 편향성도 여전하여, 기자들에게 돈 푼게 직빵이었어요[3]실질적으로 민주화 사회에 걸맞는 정치지형이 갖춰졌다고는 보기 어렵다.

정치공학 측면에서는 3당 합당이 이뤄지며 민주자유당이 거대 여당으로 재탄생, 2010년대 현재까지도 틀을 유지중인 양당 경합 체제가 자리잡았다.

4 경제

노태우 정권하에서 연평균 8.5%라는 고속성장을 누렸고, 1988년의 서울 올림픽 개최는 발전한 한국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단군 이래 최고의 호황'이라는 말 자체가 바로 노태우 정부 당시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렇지만 문제점이 없는건 아니라서 주택[4]값 폭등문제와 급속한 물가상승[5]같은 문제점이 있었다.

5 비판/논란

6 주요 사건

6.1 1988년

6.2 1989년

6.3 1990년

6.4 1991년

6.5 1992년

6.6 1993년

  1. '제6공화국(약칭 6공)'은 종종 좁은 의미로 노태우 정부만을 의미하기도 한다.
  2. 서독동방 정책에서 이름과 콘셉트를 따 왔다.
  3. 실제로 명절때만 되면 여당 정치인들과 정치부 기자들에게 명절선물로 용돈(...)을 주었다고 전해지며, 이를 토대로 메이저 언론에서 이를테면 조X일보라든지... 정부여당에게 유리한 보도를 하게 이끌어냈다고 전해진다. 심지어 궁핍한 야당 정치인들에게도 일정수준의 용돈을 주기도 했다고(...).
  4. 뭐, 주택문제 자체는 5대 신도시 건설로 어떻게든 무마하는데 성공하긴 했다.
  5. 초 인플레이션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매년 상당한 수준의 물가상승이 있었다.
  6. TV방송국은 1991년 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