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선홍/선수 경력

1 데뷔 및 K리그에서의 활약

1988년 11월 7일 이회택 감독이 건국대학교의 무명 선수 황선홍을 대표팀에 발탁했을 때 엄청난 구설에 시달렸으나[1] [2] 데뷔전인 한일전에서 1골 1어시스트를 기록.[3] 이후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골 잔치를 벌이며 차세대 스트라이커로 각광받는다. 이때 또 다른 고려대학교의 국가대표 선수였던 홍명보와 만났고 이후 두 사람은 일생의 벗이자 1990년대 한국축구를 이끈 쌍두마차가 된다.

하지만 1990년 월드컵에서 대표팀이 3패로 탈락하면서 김주성과 황선홍 두 공격수가 비난을 받으면서 첫번째 시련을 겪게 되고 건국대학교를 졸업 후 1991년 K리그의 드래프트 제도를 거부하고 차범근이 활약했던 독일 분데스리가 소속 레버쿠젠에 진출하나 아마추어팀이었고 [4] 1992년 부퍼탈로 이적했지만 9경기를 뛰고 무릎부상(십자인대 파열)로 한국으로 리턴.[5]

이 때 K리그 역사에 길이 남을 기록 하나를 남기게 되는데 바로 "1 VS 8 지명권 트레이드". 이전 해의 드래프트 결과로 황선홍을 지명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던 전북 현대 모터스[6]포항 스틸러스소속 팀 선수 8명과 황선홍 한 명을 바꾸는 사상 초유의 트레이드를 제안하게 된다. 당시 신생 팀이던 전북은 한 명이라도 선수가 아쉬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결국 황선홍은 1993년부터 포항 소속으로 뛰게 된다. 이 때 포항에서 트레이드된 선수 중 한 명이 이흥실이었다.[7]

이후 같은 소속팀의 홍명보, 라데, 최문식, 박창현, 박태하 등과 함께 포항의 1990년대 전성기를 이끌었으며 특히 라데와의 공격 투톱은 지금도 회자가 될 정도. 본인은 신문과 인터뷰 하길 "나와 라데의 투톱을 능가하는 투톱은 이후로 K리그에 없는 듯 하다."라고. 95년에 바로 8경기 연속골 기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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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포항 스틸러스의 FA컵 우승, 1997년 아시아 클럽 챔피언십(現 AFC 챔피언스 리그)에 일조했지만 아쉽게도 정규리그 우승컵은 차지하지 못했다. 1995년의 준우승이 전부. 이후 1998년 J리그세레소 오사카로 이적, 그 이듬해 J리그 득점왕을 차지한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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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수원 삼성 블루윙즈로 국내 무대에 복귀하나 부상으로 정규 리그에서 뛰지 못하고 아시아 클럽 챔피언십에서 같은 팀이었던 데니스와 경기 중 드잡이질[9]을 한 끝에 맞트레이드 형식[10]으로 J리그의 가시와 레이솔로 임대를 가게 된다. 당시 같은 팀에 있던 홍명보, 유상철과 함께 코리안 트리오로서 맹활약. 유종의 미를 거둔 다음 2002년 하반기에 포항 스틸러스의 자매구단인 전남 드래곤즈로 복귀했지만 이적 직후 얻은 무릎 부상으로 인해 2003년 은퇴하였다.

K리그 통산 성적은 64경기 31골 16어시스트. 해외에 나가있었던 시즌도 꽤 되고 부상으로 허비한 시즌도 상당하며, 90년대에는 리그에 대한 배려가 너무 부족해서 항상 국대 차출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8게임 연속골 기록이나 라데와의 투톱이 준 임팩트를 제외하면 명성에 비해 K리그 커리어는 빈약한 편이다. 그래서 선수 황선홍이 한국축구의 레전드라는점은 모두가 인정하지만 K리그 레전드라고 하기는 힘들다. 대신 감독으로서 화려하게 비상하고 있으니 지도자로서 K리그의 레전드가 될 가능성은 충분하다.[11]

2 비운의 미국월드컵

전설의 94년 황선홍

그러나 국제무대에서의 불운은 계속됐다.

1994년 미국 월드컵, 황선홍은 첫 경기 스페인전에서 골키퍼와 일대일 기회를 놓쳐 아쉬움을 남겼다. 하지만 이것은 서막에 불과했다. 볼리비아전에서 그는 여러 차례 기회를 잡아 슈팅을 날리지만 모두 골문을 외면하고 만다.

1994년 미국 월드컵 때까지만 해도 월드컵 출전국의 수는 24개국이었다. 각 조 2위까지 12개 국가와 3위 중 성적이 좋은 4개 국가가 16강에 오르는 방식이었다. 다시 말해 1승 1무 1패로 승점 4점만[12] 올리면 16강이 유력했다. 첫 경기에서 강적 스페인과 비겨 첫 단추를 잘 끼웠지만, 확실한 1승 상대로 여겼던 볼리비아전을 비기고 말았다. 당시 조 편성은 우승후보 독일, 스페인 그리고 첫 진출국 볼리비아였다. 따라서 독일, 스페인과 최대한 비기고 볼리비아를 이기는 게 우리의 전략이었다. 물론 볼리비아도 마찬가지여서 한국-볼리비아전은 사생결단의 혈투가 됐다.[13]

볼리비아전 하이라이트를 보면 알겠지만, 몇 번의 찬스에서 어떻게 저렇게까지 뜰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슛이 높이 뜨기는 했다. [14] 이 뜬 슛들이 어찌나 강하게 인상에 남았던지 [15] 경기 이후 황선홍에게는 오랫동안 이름 앞에 '똥볼', '홈런볼'이란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1994년의 황선홍은 단군 이래 가장 욕을 많이 먹은 운동선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온라인도 아니고 오프라인에서 2002년 안톤 오노보다 더한 욕을 먹었으니, 이때 황선홍 선수가 받은 모욕과 협박은 지금 생각하면 어떤 면에서 거의 범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당시 가장 유행하던 말은 "이완용 이래 최고 역적"이다.[16]

하지만 다음 경기인 독일전에서 0:3으로 끌려가던 후반에 추격에 불을 지핀 것은 바로 그였다. 경기 영상을 보면 월드컵 사상 첫 골을 기록했음에도, 그의 표정이 대단히 어둡다. 골을 넣은 후 세레모니는 커녕 굳은 표정으로 땅을 보며 고함을 지르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무릎팍도사에 출연해서 당시의 심경을 밝히길 "왜 이제서야 들어가는 거야..."라고 생각했다고 한다.그러게 말입니다 ㅠㅠ 이후 홍명보가 회심의 중거리 슛을 성공하며 3:2로 따라잡은 것에서 경기가 끝나긴 했지만, 독일전 후반은 사실 한국이 독일을 압도하고 있었다. 엄청난 무더위로 댈러스 경기장은 40도를 넘나들고 있었고, 독일은 체력이 방전상태였다. 경기가 5분만 계속됐어도 한국이 독일을 충분히 이길 수 있었다는 게 많은 전문가의 평가였다.

당시 룸메이트였던 홍명보가 훗날 술회한 바로는 쏟아지던 월드컵전부터 골에 대한 부담으로 심적부담이 상당했던데다가(국민 상당수가 그를 첫골을 넣을 선수로 지명했었다. 월드컵이 끝나고 엄청나게 비난을 받았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그만큼 국민들도 황선홍을 상당히 믿고 있었다는 뜻도 된다.) 볼리비아전 이후로는 무자비한 비난 때문에 트라우마가 생겨 자다가도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나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한다. 후일 밝혀진 바로는 2002년 월드컵 당시, 히딩크 감독에게 '감독님, 저 이번엔 정말 잘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큰일 나요.'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계속 쏟아지는 비난에 얼마나 마음고생 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 본인은 당시에 지금처럼 인터넷이 대중화되어 있었다면 견디기 힘들었을 거라고 회상한다. 굳이 인터넷이 없어도 직접 피부로 느낄 정도였다.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초리가 두려워 집 밖엘 나가지 못할 정도로 마음고생을 했다고 한다.

98 월드컵 이후 J리그에 진출하면서 젊은 선수들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 몸 관리를 더욱 철저히 했다. 모 스포츠 사이트와 이루어진 비공개 인터뷰에서 그 이유를 내비친 바 있는데, '난 은퇴하지 않고 반드시 한국에 다시 돌아갈 것이며, 월드컵에도 가능하다면 꼭 다시 나가고 싶다. 그래서 나를 비난했던 많은 사람에게, '당신들이 틀렸다.'는 것을 반드시 증명해 보이고 은퇴할 것이다.'라고 했다. 상처가 얼마나 컸을까..

이렇게 선수 생활에 있어서 가장 맘고생이 심했던 94 월드컵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월드컵 도전 역사상 90분 내내 풀타임으로 뛰었던 유일한 월드컵이기도 했다. 90년은 교체 출전, 2002년은 선발 출전 후 교체되거나 반대로 교체 출전 및 부상 등으로 풀타임으로 소화하지 못했고, 98 월드컵은 후술하겠지만 월드컵 직전에 큰 부상으로 출전 조차 하지 못했다. 그만큼 기량이 절정이었던 미국 월드컵에서 정말 열심히 뛰었지만 결과가 좋지 않았으니 더욱 한이 맺혔을 법 했다.

3 국제무대에서의 활약과 불운

이후에도 황선홍은 국가대표팀의 붙박이 공격수로 활약한다. 미국월드컵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에 출전하여 8강 토너먼트에서 일본한일전을 벌였는데, 여기에서 역전골과 결승골을 넣는 맹활약을 펼친다. 특히 이 경기는 역대 한일전 중에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명승부 중의 하나인데, 미우라 카즈요시의 선취 골로 끌려가다가 후반전 황선홍의 절묘한 힐패스를 받은 (당시 방송을 보면 신문선이 한정국의 힐패스라고 하지만 이는 그가 착각한 것이다) 유상철이 동점골을 뽑아낸 후에 황선홍의 헤딩 역전골, 그리고 다시 일본의 이하라 마사미가 중거리 슛으로 다시 동점, 하지만 후반 종료 직전 황선홍이 스스로 페널티킥을 얻어 내고 그가 직접 성공시키면서 경기를 3:2 승리로 이끈다. 월드컵에서의 비난을 어느 정도 씻어 내는 맹활약이었다.

또한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 축구 대표팀에 와일드카드로 선발되어 나쁘지 않은 활약을 펼친다. 그러나 당시 최용수가 있는데 뭐하러 주전원톱을 둘이나 쓰냐? 라는 황선홍의 와일드카드 선발에 대한 반론이 있었으나 당시 올림픽대표팀 감독이던 아나톨리 비쇼베츠 감독은 자신의 생각을 밀어부쳤고 실제로 최용수는 본선 첫경기 가나전에서 황선홍에 밀려 결장했다. 당시 황선홍-윤정환 콤비는 최용수-윤정환 콤비와는 다른 의미로 일품이었는데 최용수-윤정환 콤비가 윤정환 패스-최용수의 파괴력있는 마무리의 구도였다면 황선홍-윤정환 콤비는 둘다 시야와 패스에 강점을 가진 선수다보니 2:1 패스 등 둘의 패스플레이를 통해 여러차례 가나수비를 위협했었다. [17] 다만 두번째 경기인 멕시코전에서 전반 35분만에 부상으로 이원식과 교체되었고 그 여파로 마지막 경기인 이탈리아전도 결장하고 말았다. 가나와의 첫 경기에서 결승골이 된 페널티킥을 유도하는 등 플레이자체는 나쁘지 않았으나 부상으로 실제로 기여한바는 생각보다 크지 않은 셈.

어쨌든 그 무렵까지 황선홍은 비록 미국 월드컵의 이미지 때문에 욕을 많이 먹기는 했지만 그래도 한국에 아직 그를 능가할 만한 공격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실제 A매치 때마다 쏠쏠한 활약을 보여주는 것도 사실이기에 축구팬들은 그에게 어느정도는 다음 월드컵에서의 활약을 기대하는 분위기였던 건 사실이었다. 황선홍 자신에게도 그건 가장 절실했던 과제이기도 했다.

1998년의 프랑스 월드컵만을 바라보며 절치부심하던 황선홍은 1997년에 또다시 무릎이 아작난다.[18] 그러나 황선홍은 오직 월드컵만을 바라보며 재활에 매달린다.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예선은 황선홍 없이 치러야 하는 상황. 하지만 국민들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가 없는 사이 대표팀 간판 공격수 자리는 무섭게 등장한 신예 최용수가 차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1997년 아시아 최종예선은 그야말로 최용수의 독무대라 할 수 있었다. 그 유명한 도쿄대첩을 비롯하여 대표팀은 황선홍 없이도 승승장구하였다. 그 기간동안 황선홍은 묵묵히 재활에 전념했다. 그리고 마침내 월드컵을 두 달여 앞둔 1998년 3월 말 대표팀에 복귀한다.[19]

공교롭게도 그의 복귀전은 숙명의 라이벌 일본. 도쿄대첩의 성과가 무색하게 그 당시 대표팀은 일본에게 A매치 2연패 중이었다.[20] 일본에게 더 이상 물러설 곳의 없는 벼랑끝 승부. 최악의 분위기 속 황선홍의 컴백. 모든 것이 그에게 맞춰진 시나리오였다. 4월 1일, 비 내리는 잠실 주경기장에서 벌어진 한일전에 선발 출전한 황선홍은 양팀이 한 골씩을 주고 받은 1:1의 스코어에서 후반 27분, 서정원의 절묘한 패스를 받아 골키퍼 가와구치와 일대일 상황을 맞이한다. 황선홍은 침착하게 공을 컨트롤 하면서 골키퍼 앞으로 접근한다. 하지만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와중에 떡진 잔디밭은 축구공이 순조롭게 흘러가도록 놔두질 않았다. 당황한 황선홍은 잠시 주춤거리다가 골키퍼와 일본 수비수들과 뒤엉키는 상황을 연출한다. 이대로 슈팅 찬스가 날아가고 마는구나... 하는 순간, 혼전의 양상 속에서 누가 차 올렸는지 축구공이 위로 튀어오른다. 그 때를 놓치지 않고 황선홍이 있는 힘껏 뛰어올라 바이시클 킥으로 축구공을 골문 쪽으로 날려버린다. 그대로 골이 된 것이다. 골을 확인한 황선홍은 본부석 쪽으로 달려오면서 몸을 날려 슬라이딩 세레모니를 하며 포효한다. 그렇게 황선홍은 그가 출전한 4번째 한일전에서 4번째 결승골을 넣으며 한일전의 사나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증명한다.

황선홍의 화려한 컴백으로 황선홍-최용수 투톱은 월드컵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를 끌어올리기에 충분했다. 당시 피파 랭킹 3위였던 체코와의 친선 경기에서 두 선수가 나란히 한 골씩을 기록하여 2:2 무승부를 거두기도 했으며, 차범근 감독은 "황선홍은 현재 대표팀 전력의 50%를 차지하는 선수다."라 평하기도 했다.

허나 프랑스로 떠나기 직전에 펼쳐진 중국과의 친선경기[21] 에서 황선홍은 골키퍼에게 태클을 당해 부상당하고 만다.[22] 중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지금도 소림축구로 악명이 높지만 1998년에는 훨씬 심했다. 그래서 당시에도 중요한 평가전을 실력이 높은 팀이 아닌데다가 한국에 강한 승부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플레이가 거친 중국팀과 하다가 괜히 중요한 선수들 부상이라도 입으면 어쩌냐는 비난이 있었는데 혹시나가 역시나.. 그 경기에서 중국 골키퍼와의 충돌로 무릎이 박살났다. 당시 인대 끊기는 소리가 경기장에서 들렸을 정도라고 하는데 뭐 어느정도 과장이야 있었을지언정 TV화면 너머로 보는 국민들 눈에도 황선홍의 선수생명이 끝났다는 예감이 스칠정도의 살인태클이었다. 그는 22인의 엔트리에 들어 프랑스로 향했으나, 부상은 심각했다. 단 한 경기라도 뛰어보고자 무릎에 진통제를 여섯 번 맞았다. 그러나 결국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이 때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황선홍을 싫어했으면, "저번 월드컵처럼 실수할까봐 무서워서 경기에 안 나오는 것 아니냐?"는 식의 비난이 있었다고 한다... 자기야. 니들 무릎이 함 아작나 죽어봐야 정신차리지?

프랑스 월드컵이 끝나고, 사람들은 이제 '황선홍의 월드컵 인연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이미 그 시점에서 한국나이 31세였으니 다음 월드컵을 기약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23] 그래서 그를 동정하는 사람도 많이 없었고 그는 결국 도망치듯 일본 J리그로 건너간다. 하지만 그렇게 건너간 J리그에서 1999년 득점왕을 차지하며 희망을 되살리게 되었으니.. 절망을 안고 건너간 일본이 그에게 희망을 되살려 준 셈이 되었다.

4 2002월드컵에서의 부활

이렇게 불운하기만 하던 황선홍의 국가대표 커리어였지만, 자신의 인생의 마지막 대회였던 2002년 월드컵에서 황새는 날개를 폈다. 히딩크는 황선홍을 전적으로 신뢰하였으며, 첫 경기인 폴란드전에 선발 투입힌다. 황선홍으로서는 인생 마지막 최후의 도전인 셈이었다. 더군다나 월드컵 개막 직전에 기자회견을 통해 "이번 월드컵을 마지막으로 은퇴하겠다"는 선언까지 한 상태였다.[24]

4.1 폴란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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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방에 인생역전
끝이 좋으면 다 좋다

황선홍으로서는 평생 잊지 못할 경기가 되었다. 전반 25분 경에 이을용의 낮은 크로스를 논스톱으로 골문 구석으로 차 넣어 선취골을 뽑아낸다. 당시 리버풀의 주전 골키퍼인 두덱도 꼼짝 못하게 만들었던 기술적인 골이었다. 그의 경험과 센스를 확실히 보여주었던 장면. 이을용의 크로스를 왼발로 툭 갖다대서 방향만 바꿔놓는 것으로 골을 넣었는데, 웬만큼 슛 기술이 뛰어나지 않고서야 못 할 슛이다. 더군다나 본인의 주발인 오른발이 아닌 왼발이었고, 쇄도하던 방향과 다른 방향으로 골대를 향해 몸통을 비틀어 차야 했었는데도 깔끔한 피니쉬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무릎팍도사에서 황선홍은 이을용이 애매하게 줬었다고 그 상황에 대해 농반진반으로 살짝 불만을 드러냈었다. 황선홍은 곧바로 벤치에 있는 박항서 코치에게 달려가 선수들과 함께 포옹한다. [25] 결국 이 한 골은 폴란드전의 결승골이 되었고, 황선홍의 인생골이자 명예회복의 한 판이 되었다. 이 경기는 한국의 월드컵 역사상 첫번째 승리이다. 첫 승의 포문을 연 첫 골, 결승골을 작렬시키며 제대로 인생골을 집어 넣었다.

덤으로 이 날 경기 후반전에서는 그동안 1:1 찬스를 자주 놓쳐 홈런왕이라고 조롱받던 유상철 역시 오른발 강슛으로 쐐기골을 뽑아냄으로서 마찬가지로 그동안의 안타까움을 씻어버리는 명예회복의 한 판이 되었다. 미국전에서 최용수까지 골을 넣었더라면 그야말로 모두가 해피엔딩이었겠지만 결과는 아쉽게도...

4.2 미국전

미국전은 여러 모로 아쉬운 경기였다. 이상하게 게임이 잘 풀리지 않았는데, 전방 공격수인 설기현은 뭘 잘못 먹었는지 계속 똥볼만 죽어라 날려댔고, 송재익은 이를 비난하느라 바빴다(...) 황선홍은 미국월드컵때 자신의 모습과 닮아 보였는지(...) 계속 설기현을 독려했다. 하지만 전반 중반에 미국 선수와의 충돌로 머리가 찢어지는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그래도 투혼을 살려 붕대를 두르고[26][27] 그대로 경기에 임했으며 심지어는 머리를 다친 그 상태로 헤딩까지 했다. 그리고 전반 막판에는 페널티킥을 그가 직접 얻어내기까지 했다. 물론 결과는 이을용의 실축으로 끝났지만(...). 후반전 들어 안정환으로 교체되어 그라운드에서 물러났는데, 관중들은 30대 중반 노장의 투혼에 기립박수로 화답하였다.

참고로 이 경기가 A매치 99경기째였는데 다음 포르투갈전에 출전하면 100경기 출전으로 센츄리클럽에 가입할 수 있었다. 월드컵을 끝으로 대표팀에서 은퇴한다고 밝혔기 때문에 만약 포르투갈전에 출전하지 못하고 한국도 16강에 못 올라간다면 그걸로 A매치 100경기 출전은 무산될수도 있는 상황. 히딩크 감독의 자서전에 의하면 당시 히딩크 감독도 박항서 코치를 통해 황선홍이 포르투갈전에 출전하면 센츄리클럽에 가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한 선수의 출장 기록이 경기보다 중요할 순 없다며 황선홍이 스타팅에서 제외된 원래 계획을 고수했고 그가 뛰어야 되는 상황이 생겨야만 투입하겠다고 마음 먹었다고. 사실 이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다. 월드컵이라는 중요한 대회에서 그것도 토너먼트 진출이 결정되느냐 마느냐 하는 경기에 한 선수의 출장기록을 배려해 원래 계획을 수정할 정신나간 감독이 있을까?

아무튼 황선홍은 포르투갈과의 경기에 출전하진 않았지만, 대한민국팀은 박지성의 결승골에 힘입어 포르투갈을 1:0으로 격파하는 이변을 만들었고 조 1위로 16강에 안착할 수 있었다. 황선홍은 이탈리아와의 16강전에 출천하며 100경기 출장을 기록하고, 센츄리클럽에 가입하게 되었다.

4.3 이탈리아전

이탈리아전은 후반 한 골차로 지고 있던 상황에서 교체투입되었고, 후반 막판 절묘한 2대1 패스로 설기현의 동점골에 기여했다.
연장전에서는 수비벽을 쌓고 점프하는 선수들 밑으로 허를 찔러 깔아 찬 절묘한 프리킥을 보여 주기도 했다. 부폰의 선방이 아니었다면 골도 가능했다. 그런데 그 프리킥은 의도하고 찬 게 아니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당시 코치였던 최진한의 인터뷰에서 J리그에서도 그렇게 몇 번 그런식으로 찬적이 있어서 일부로 노리고 찬것이라고 좀 더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는걸로 봐선 원래 의도한 바가 맞다. 외부링크 의도하고 찬 게 아니라는 말은 남자의 자격에서 유상철이 황선홍한테 한 농담이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이탈리아전의 황선홍은 골을 넣지 못했을 뿐 폼은 이때까지 출전한 월드컵 경기 중 가장 좋았다. 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활발하면서 노련한 움직임으로 팀의 활력을 불어넣어줬고 연장 후반 막판에 이영표의 크로스때 절묘한 위치 선정으로 문전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뭐, 결과는 알다시피 크로스가 안정환의 머리에 정확하게 배달되어 극적인 골든골로 끝났지만.[28]

4.4 스페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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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전에서는 승부차기 1번 키커로 나섰다. 경험 많은 베테랑이어서 히딩크가 1번으로 세웠는데, 결국 침착하게 골을 성공시켰다. 골키퍼 카시아스가 방향을 잘 잡았지만 겨드랑이 사이로 공이 빠져나가는 바람에(...) 다행히도 골이 되었다. 황선홍이 훗날 밝히기를, 그 킥은 제대로 차지 못한 실패한 킥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5번 홍명보까지 골을 성공시키면서 한국은 사상 초유의 월드컵 4강 신화를 달성한다. 4강이 확정되는 순간 황선홍과 홍명보가 힘껏 포옹하는 장면은 한국축구사에 영원히 기록될 명장면이다. 그동안 불운과 좌절도 많았지만 대한민국 축구선수로서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위치에서 화려하게 선수생활을 마무리 할 수 있었으니, 그 누구보다도 행복했던 선수였다고 할 수 있겠다.

5 선수로서의 평가

선수시절 황선홍은 최전방 공격수로서 갖춰야할 모든 덕목을 두루 갖춘 만능형 공격수였다. 우선 그는 최소한 아시아 기준에서 훌륭한 피지컬(키, 주력)을 바탕으로 온갖 종류의 슈팅 테크닉을 실전에서 시도할 수 있는 수준[29]의 공격수였다. 그리고 쓸만한 발밑 기술로 공을 지켜내거나 상대 진영으로 드리블을 시도하는데 무리가 없었으며, 비교적 넓은 시야와 역시나 비교적 좋은 패싱 능력까지 갖추어 연계 플레이 역시 뛰어났다. 요약하자면 개인 전술의 폭이 매우 넓었다는 것. 거기에 그는 넓은 활동반경에 지능적인 오프더볼 움직임 역시 갖추고 있었다. 그야말로 토탈 패키지. 이것이 그가 선수로 활약하던 당시 한국 국가대표팀의 모든 감독들이 결국은 황선홍을 기용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다.[30]

다만 이것은 그의 선수생활을 총 망라한 평가. 그의 피지컬은 결국 아시아 레벨에 그쳤고, 젊은 시절 그의 플레이는 여느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피지컬적 한계와 심리적 압박감에 의해 상당한 기복[31]이 있었다. 국가대표로서 무수히 많은 골을 기록했음에도 그에 대한 의문과 비아냥이 끊이지 않았던 것은 그가 출전했던 여러 중요한 경기들에서 결승골을 넣지 못했다는 것보다도 사람들이 기대했던만큼의 플레이를 보여주지 못한 것이 더 큰 이유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으로, 황선홍은 과도한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대가를 너무나도 혹독하게 치러야만 했다.[32]

또한 한국에서는 근성, 저돌 같은 후진적 단어로 대표되는 축구 실력과는 거리가 먼 이유 때문에 대중들에게 강인하지 못하다며 폄하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는 황선홍 자신도 인터뷰에서 수차례 밝혔던 바 있다. 또한 축구인생에 전환기를 맞이할 즈음이면 공교롭게도 크고 작은 부상이 닥쳐와서 선수생활 내내 부침이 극심했다. 그것을 모두 극복했다는 것 자체가 매우 근성있다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플레이스타일 때문에 폄하되는 측면이 있었던 것이다. 동시대 공격수인 '독수리' 최용수가 A매치 67경기 27골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황선홍보다 더 활약했다고 착각하는 이들이 가끔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실 이 문서에 기록된 것도 상당히 순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1994년 미국 월드컵 볼리비아전 직후 황선홍의 위치는 거짓말 조금만 보태면 제2의 이완용정도였다. 당시 경기를 지켜봤거나 당시 그의 팬이었던 사람들은 무슨 뜻인지 알 것이다. 그리고 언론의 설레발이 어떻게 사람 하나를 병신으로 만드는지도... 한국 축구 역사상 '가장 욕을 많이 먹은 선수'라는 평가가 있다.

그래도 독일전에서 제대로 알까기를 선사한 골키퍼 최인영의 활약 덕분에 그나마 그 정도 선에서 끝난거다. 정말 4년동안 벼르고 별러 출전하고자 했던 1998년 월드컵은 대회 직전 중국과의 평가전에서 얻은 부상으로 뛰지 못함에도, 새가슴이라 출전을 거부했다는 루머때문에 천하의 개쌍놈으로 낙인이 찍혔다. 신문 한켠에 장기적으로 부상을 더 악화시킬 수 있는 진통제를 수차례 맞아가며 경기에 나서고자 했다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으나 큰 반향은 없었다.

사실 황선홍은 선수시절 명예회복이라도 했으니 다행이지만...최인영은 월드컵 후 2년만에 은퇴하는 바람에 그의 전설적인 알까기는 낙인처럼 찍혀버려 현재까지도 축구팬들 사이에 안주거리로 씹히고 있다.

이 시절 그의 이야기는 2006년 5월 22일 방송된 지식채널e 어떤 스트라이커의 1승편에 잘 표현돼있다. 선홍이형 그동안 까서 미안해 ㅜㅜ 1990년대부터 그를 지켜본 축구팬이라면, 1994년 월드컵의 그를 본 사람이라면 2002년 정말 죄책감을 느낄수 밖에 없을 것이다.

대표팀 센터 포워드 계보는 이회택-차범근[33]-최순호-황선홍-??? 으로서 그 다음 자리에 들어갈 선수로는 많은 논란이 있다. 이동국이 많이 거론되지만 국제수준에서는 좀 미흡한 점이 있고, 플레이 스타일이나 국제무대의 성과로 보아 가능성이 더 높았던 박주영도 아스날 이적 이후 꺾였다. 그리고 현재는 그 뒤를 이을 포워드 재목이 나오지 않고 있다.

여하간, 02년 이전에는 이동국+박주영+염기훈+오범석과 동등 혹은 그 이상으로 까였다. 사실 이 서술조차 부족한 게, 한때는 '대한민국 역사상 김일성 다음으로 욕을 많이 먹었다'고 할 정도이다. 적어도 2014년 1월 현재까지는 욕먹은 거로는 비교가능한 선수가 없다. 동네축구에서도 누군가 똥볼을 차면 '이런 황선홍 같은 xx'란 욕이 횡횡하던 적도 있을 정도였다. 지금은 김정일이 2위, 김정은이 3위. 근데 박주영이 이번에 제대로 눈도장 찍어서 어찌될지 모른다.

그러나 마무리가 좋으면 후대 평가도 다 좋아진다는걸 잘 보여준 사람. 물론 그간 황선홍을 깠던 것이 정당한 비판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 마무리의 기회도 받고 또 2002 월드컵에서의 좋은 활약으로 정당한 평가를 받게된 것이다.

이러한 과거가 있어서인지 국대 스트라이커들에 대해 연민의 감정을 많이 표시한다. 예를 들어 박주영이 한창 까일 때에도 이 정도는 너무 부당하다는 의견을 내비친 적도 있고, 이동국의 경우에는 포항 출신이라는 것 이외에도 많은 공통점이 있어서인지 과거의 자신과 겹쳐보는 듯한 발언을 많이 한다. 2013년 올스타전에서 제 2의 황선홍으로 노장 축에 속하는 이동국을 뽑기도 했다. 이 올스타전에서 이동국은 '축제'라는 경기 특성 상 잘 쓰지도 못하고 잘 쓰지도 않는 개인기를 선보였었는데 경기장에서 노골적인 야유를 들었고, 저 발언 이후에 웅성웅성거리는 소리도 많이 들렸다.
  1. 당시 황선홍은 청소년 대표팀 경력도 한번 없던 그야말로 무명 대학선수에 불과했다.
  2. 그리고 시간이 흘러 이름만 바뀌어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당시 웬 명지대의 듣보잡 선수를 뽑았다가 허정무 감독은 욕을 먹게 되는데...
  3. 참고로 황선홍은 현역시절 일본과의 A매치에 총 4경기 출전해서 5골을 넣었다. (도움도 몇 개 있다) 더 놀라운 것은 4경기 모두 결승골을 넣었다는 점.
  4. 전반기 10경기 10골을 득점하며 좋은 활약을 보여서 후반기 1군 선수들과 함께 훈련했지만 경기에는 내보내주지 않았다고
  5. 첫번째 십자인대 파열로 인해 6개월을 재활로 보낸 뒤 복귀하였는데 다시 두경기만에 무릎 연골 파열로 2차 수술행. 황선홍은 이때 지금의 부인인, 당시 독일로 어학연수를 와있던 정지원씨를 만나게 된다. 아는 후배들을 따라 대학 축제에 놀러갔던 그는 지금의 와이프를 보고 첫눈에 반해버렸고, 후배를 보채서 소개팅까지 성공. 첫 만남 후 무릎 부상을 당해버려 거동이 힘들다고 도와달라고 부탁했고, 정지원씨는 어학연수 일정이 끝났음에도 6개월간 귀국을 늦춰가며 병수발을 했다. 귀국 후 그 해 크리스마스에 결혼식을 올린다.
  6. 이 때는 사실상의 전신인 완산 푸마. 이듬해 전북 버팔로로 구단명이 변경되었고 자금난으로 해체된 후 현대자동차의 스폰서로 현재의 전북 현대 모터스로 재창단된다. 그러나 전북 버팔로와는 엄연히 별개의 팀으로 되어 있다.
  7. 단, 이흥실은 전북에서 1경기도 뛰지 않고 바로 은퇴했다.
  8. 이로부터 16년이 지난 2014년의 AFC 챔피언스리그에서 포항 스틸러스의 감독으로 세레소와 경기를 치루자 적장임에도 엄청난 콜을 받을정도로 사랑받았다.
  9. 그 경기때 황선홍은 어깨 탈골 부상을 당했다. 그런데 부상정도를 자세히 모르는 데니스가 황선홍을 건드리고 말았고, 황선홍은 데니스의 멱살을 잡았다. 데니스로서는 걱정해서 그랬다가 드잡이를 잡힌 나머지 빡쳐서 성질을 냈고 그 결과 황선홍의 임대가 결정되었다. 수원 입장에선 팀에 온지 얼마 안 되는 황선홍 보다 데니스가 전력적으로 더 중요하기 때문에 남겼다.
  10. 이 트레이드가 이후 개그적인 상황을 야기했다. 이 트레이드 전에 수원은 당시 유고 특급 용병 샤샤를 가시와로 먼저 보냈다. 샤샤와 절친이었던 박건하는 매우 아쉬워 했는데, 얼마 후 박건하도 가시와로 임대갔다.(...) 그러다 일본에서 적응하지 못하던 샤샤가 황선홍과 맞트레이드 되면서 두 사람은 다시 작별을 나누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박건하도 다시 수원으로 돌아왔다.(...) 덕분에 둘 다 상당히 멋쩍은 반응이었다고. 박건하는 샤샤보고 '이제 너 얼굴 보는 것도 질림ㅋ'라는 반응을 보였다.
  11. 비슷한 케이스가 홍명보. 황선홍처럼 부상이나 여론의 비난으로 부침이 있진 않았지만 명성에 비해 K리그 커리어가 빈약한 편이고 J리그 활약상이 더 돋보인다는 점은 황선홍과 같다. 게다가 K리그 입단과정에서 파문을 일으키고(이거야 포항구단도 한통속이었다지만) 선수생활 말년에 LA갤럭시 이적을 통해 포항을 엿먹이며 K리그를 완전히 물로 보는 행동을 했기에 지도자로서의 행보를 빼더라도 황선홍보다 평가가 훨씬 안 좋다. 그래서 이쪽도 국대팬, 라이트팬이 아니면 한국축구 레전드 대우는 해줘도 K리그 레전드로 꼽지는 않는다.
  12. 승=3점. 무=1점. 1986년부터 1994년까지 우리의 월드컵 본선 전략이었다. 최대한 비기기. 단, 승리시 승점 3점이 주어진 것은 1994년 월드컵부터다. 그전까지는 승리시 승점 2점.
  13. 여담으로 볼리비아전 당시 주심이 무슨 생각인지 전반전에 5분, 후반전에 8분, 합쳐서 무려 13분의 추가시간을 주었다. 이 경기의 여파로 FIFA에서 추가시간에 관한 규정을 만들면서 현재와 같이 주심의 재량권을 제한하고 대회 주최 측에서 추가시간을 공지하는 방식이 도입된다.
  14. 이 경기에서 황선홍은 총 5번의 슛을 시도했고 이 중 페널티 에어리어 밖에서 때린 3개의 슛이 모두 높이 떴으며 이 중 2개는 잘 차기만 하면 들어갈 수도 있었던 찬스였다. 나머지 2개의 슈팅은 머리에 잘 맞췄지만 골키퍼 정면으로 가고 만 헤딩슛과 상대 수비의 실수로 얻어낸 딱 한 번만 더 치고 들어가면 넣을 수 있었던 GK와의 1:1 찬스였다.
  15. 심지어 이 경기는 스페인전의 선전으로 기대가 커진 국민들이 최초의 월드컵 1승을 달성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경기였다.
  16. 사실 볼리비아전의 임팩트가 커서 그렇지 다른 플레이는 상당히 괜찮았다. 실제로 당시 월드컵에서 한국팀이 기록한 4골 중 2골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는데, 스페인전에서 문전으로 파고드는 홍명보의 패스를 수비수를 등진채 적절한 위치로 리턴해줘서 그가 서정원의 골을 도움하는데 기여했고, 후술하겠지만 독일전에서는 자신을 마크하는 수비수의 중심을 빼앗아 떨궈내는 순간적인 페인팅과 적절한 공간침투 그리고 이어진 기술적인 칩슛으로 직접 골을 기록하기도 했다. 결국 어떤 공격수든 지나칠 정도로 안 풀리는 경기가 있을 수 있음에 비추어볼 때 그에 대한 비난이 너무나 가혹했음은 분명하다. 볼리비아전이 그만큼 엄청나게 중요한 경기이긴 했지만...
  17. 당시의 경험 때문인지 황선홍은 현역시절 호흡이 잘 맞는 선수로 윤정환을 여러차례 꼽기도 했었다.
  18. 1997년 5월, 발목부상 후유증으로 오른쪽 십자인대가 파열되었다. 파열의 원인이 된 발목부상은 아마도 그 전년도인 1996년 12월에 UAE에서 열린 아시안컵 조별예선 쿠웨이트전에서 시작됐거나 잠재적 위험요인으로 자리잡은 듯 하다. 당시 리그, 국가대표, 상기한 올림픽대표 와일드카드까지 96년 한해에만 60여경기를 뛰며 혹사당한데다가 쿠웨이트전에서 후반막판 상대의 살인태클에 발목을 다치고 말았다. 골때리는건 심판이 그 장면에서 퇴장이나 경고는 커녕 파울조차 주지않았다는 것. 당시 경기를 보면 분노한 고정운이 바로 보복태클을 들어가고 또 당시 국가대표 감독이었던 박종환이 흥분해서 "저거! 저거!"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아무튼 1997년에 파열된 그 무릎은 1992년 십자인대와 연골이 파열되었던 바로 그 오른쪽 무릎이었다. 그리고 이후 굉장히 아끼는 후배는 몇년 뒤 그보다 더 심한 혹사를 당하게 된다
  19. 프로경기에는 97년 10월에 복귀했다. 하지만 부상후유증을 완전히 떨치지 못해 출장과 결장을 반복하며 몸상태와 경기감각을 끌어올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20. 잠실 주경기장에서 벌어진 최종예선 2차전에서의 0:2패배, 그리고 98년 초에 벌어진 다이너스티컵에서의 패배.
  21. 1998년 축구협회가 얼마나 정신 나간 집단이었는지 알 수 있다. 프랑스로 떠나기 전날야간 경기를 잡았다. 실전 대비라고 설명하기 힘든, 약체 중국과 경기를 잡은 것은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당시 축구협회의 병크는 월드컵 대회 도중 차범근 감독을 경질하면서 정점을 찍었다. 헌데 브라질 월드컵을 겪으면서 또다른 정점을 찍어버렸다. 자세한 것은 대한축구협회 항목 참조.
  22. 이 경기를 계기로 한국 축구팬은 한중전만 열리면 부상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23. 부상이 많았던데다가 당시는 지금보다 평균선수생명이 짧았다.
  24. 축구선수로, 그것도 공격수로는 환갑에 가까운 35살의 나이였고 선수생활 내내 달고 다녔던 여러 부상때문에 경기를 풀타임으로 뛸 체력은 부족했고, 대회 내내 안정환과 번갈아가며 원톱 역할을 맡았다.
  25. 히딩크는 황선홍이 자기에게 달려오는 줄 알고 기다렸는데 박항서에게 안기는 걸 보고(...) 약간 서운했다고 훗날 술회했다. 안습. 대신 박지성이 안겨줬잖아요
  26. 머리에 씌우는 걸로 빠르게 응급처치가 가능한 그물붕대를 사용하는 것도 가능했지만, 당시 치료를 맡았던 최주영 의무팀장이 붕대를 두르고 뛰는 모습을 보여줘 다른 선수들의 투지를 불태우기 위해 일부러 붕대를 사용했다고 한다. 근데 붕대를 감는 사이, 10명으로 뛰던 우리 대표팀은 골을 먹어버렸다(…). 그 와중에 방송중에 관중석에 있던 황선홍의 딸 황현진 양(당시 9살)이 우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는데, 자기 아버지가 피를 철철 흘리고 있으니 그럴만도 하다.
  27. 다만 2012년 최주영 의무팀장의 인터뷰에선 그물붕대가 있었음에도, 당황해서 기존에 사용하던 탄력붕대를 꺼내들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28. 안정환 항목을 들어가보면 알겠지만, 안정환은 사실 헤딩을 잘하는 선수는 아니었다. 세리에 A에 진출하면서 헤딩 기술도 많이 늘어서 헤딩골도 잘 넣는 선수가 되었지만. 황선홍도 무릎팍 도사에 출연하며 회상했는데, 강호동이 안정환이 골든 골 넣을 때 황 선수는 바로 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고 안 선수(안정환)에게 골든골 기회를 뺏긴게 아니냐며 장난삼아 놀리자 황선홍은 "정환이 걔, 사실 헤딩골 잘 넣는 선수는 아니었어요;;;"라며 진땀을 뺐다(...)어쨌든 이겼으면 된 거 아닙니까
  29. 프로선수쯤 되면 상상할 수 있는 앵간한 기술은 다 구사할 수 있다. 이걸 실전에 써먹을 수 있느냐가 문제지.
  30. 국가의 자존심이 걸려있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자국에서 벌어지는 월드컵의 역사상 첫 승을 노리던 첫번째 경기에서 35세의 노장 선수가 선발 원톱으로 나왔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31. 현재 기준으로도 높은 수준의 득점 장면과 동시에 낯 뜨거운 똥볼을 함께 보여주었다.
  32. 사실 90년대 한국축구계의 선수육성, 관리수준은 심리, 신체 기타 모든 측면에서 팬들의 기대에 비해 그야말로 참혹한 수준이었다. 그래서 히딩크도 자서전을 통해 그가 (다소 립서비스가 포함되어 있겠지만) 베르캄프나 반 바스텐을 연상시키는 좋은 움직임과 슈팅 감각을 가졌다며, 조금 더 일찍 유럽에서 체계적인 과정을 거쳤으면 훨씬 대단한 선수가 되었을 거라고 언급한바 있다. 물론 이것은 동시대 다른 선수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이야기겠지만, 그는 대표팀 부동의 공격수였기에 훨씬 큰 기대에 부응해야만 했고 또 비난받아야만 했다.
  33. 흔히 차범근이 센터 포워드가 아니라는 소리가 있는데 그건 잘못 알려진 사실이다. 차범근은 국내 대표팀에서는 윙 포워드였지만 독일 분데스리가에서는 센터 포워드로 뛰었다. 다만 독일에서 마지막 2년은 미드필더로 뛰었다. 본인의 인터뷰에서 나오는 얘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