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타키투스가 98 CE 년 경에 집필한 인류학 저서이며 게르마니아 지역의 문물과 풍습 등에 대한 기록이다. 원제는 라틴어로 De Origine et situ Germanorum이며 해석한 의미는 본 항목의 표제이나 현재는 소재가 되는 지역의 이름을 따서 게르마니아라고 줄여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총 46 장(Chapter)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 ~ 27장까지는 게르만족의 영역과 법 그리고 그들의 관습에 대한 묘사로 시작하고 후반부에서는 다양한 게르만 부족들의 상대적인 위치와 특성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다.
2 집필 의도
타키투스의 유년기부터 청년기 시절 로마는 극도로 혼란스러웠다.[1] 이후 네르바와 트라야누스 시기에 접어들면서 로마의 정치는 황금기를 맞이했지만, 사회적으로는 사치와 향락이 만연했으며 이혼과 근친까지도 성행했다. 엄격한 도덕주의자[2]였던 타키투스는 이러한 로마의 현실에 개탄하면서 로마인들이 돌아갈 하나의 이상향을 제시하기 위해서 <게르마니아>를 저술하게 된다. 이러한 의도는 저서 곳곳에서 드러나는데, 타키투스는 게르만 인들이 보여주는 호전성과 복종심, 일부일처제, 혼전순결 등에 대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 우호적인 태도로 서술하고 있다.[3][4] 또한 몇몇 연구자의 경우 타키투스가 게르만인들의 견실함을 칭찬함으로써, 로마인들에게 게르만에 대한 잠재적 위험성을 일깨워주려고 시도했다고 보기도 한다.
3 후대에 미친 영향
지난 2천년 동안 인류 역사상 가장 위험한 책.[5]
저자의 의도를 간과하고 멋대로 텍스트를 해석했을 때의 위험성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 책.
3.1 게르만 민족주의에 미친 영향
게르만족은 어디에서 시작하는가? 또 어디에서 끝나는가? (...) 하지만 맥주는 마실 것이다. 아니, 게르마니아의 참된 후예라면 반드시 마셔야만 한다. 타키투스가 특별히 게르마니아의 맥주 세르비시아를 언급했을 정도니까. - 하인리히 하이네, 독일 민족주의자들의 <게르마니아> 열풍을 비꼬는 풍자시에서
다른 많은 고대의 저서와 마찬가지로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도 중세를 거치면서 소실될 뻔 했다. 그런데 1425년 이탈리아의 한 수도승에 의해서 <게르마니아>의 필사본 하나가 발견됐고, 거기서 모든 재난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가톨릭 교회 측이 <게르마니아>에서 묘사된 충성스러운 게르만 족의 모습을 바탕으로 독일 농민들에게 너희 조상들도 해봐서 알잖아 각종 부역과 세금을 강요한 것을 시작점으로, 수많은 독자들이 타키투스의 의도는 신경쓰지 않고 제멋대로 자기 입맛에 맞게 텍스트를 해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곡해는 종교개혁과 프랑스 혁명전쟁 등을 거치면서 민족주의가 대폭발을 일으킨 19세기가 되면 더욱 심해져서, <게르마니아>는 모든 독일 민족주의자들에게 바이블로 자리잡는다. 무수히 많은 독일 민족주의자들은 <게르마니아>에서 묘사된 충성스럽고 용감하며 명예를 존중하는 고대 게르만 족의 모습에 깊은 감동을 받았고, 사회적으로 '고대 게르만족 시절의 모습으로 회귀하자'라는 목소리가 곳곳에 울려퍼졌다. <게르마니아>가 이웃국 프랑스와 달리 수많은 소규모 공국으로 갈라져 한 번도 통일된 중앙 집권 국가를 가져보지 못한 독일인들에게 '상상의 공동체'[6]를 제공해 준 셈.
3.2 나치즘에 미친 영향
우리는 다시 그렇게 될 것이다. - 하인리히 히믈러, 청년 시절 <게르마니아>를 읽고 난 뒤 일기장에
나치는 1933년 자신들의 집권 이후 <게르마니아>에서 묘사된 고대 게르만 족의 모습을 20세기 현대 독일 사회에 다시금 재현시키기 위한 노력을 거듭한다. <게르마니아>는 공교육의 필수 교재로 사용됐으며, 아예 독일 국내 법에도 <게르마니아>가 인용되는 지경이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뉘른베르크 법으로 게르만 민족이 타민족과의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게르마니아> 속 묘사를 근거로 나치는 유대인과 독일인 사이의 결혼 및 성관계를 범죄로 규정해버렸다.
또한 <게르마니아>는 친위대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친위대원의 벨트에 새겨진 문구 'Meine Ehre heißt Treu'(충성심이 나의 명예다)도 <게르마니아> 속 문장에서 따온 것이며 장신에 금발, 푸른 눈을 가진 사람 위주로 친위대원을 뽑은 것도 <게르마니아>의 영향.
3.3 언어학에 미친 영향
비교언어학에서 언어를 분류할 때,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게르만어파의 서게르만어군은 Ingvaeonic languages, Istvaeonic languages, Irminonic languages 3가지로 나뉘고 있다. 현재까지도 사용되는 이 명칭들은 타키투스가 이 책의 2장에서 Ingaevones, Istaevones, Herminones[7]으로 다양한 게르만 부족들을 크게 3갈래로 분류한 데에서 유래한다.
4 비판 및 평가
타키투스는 게르마니아에 가까운 갈리아에서 군단장으로 근무한 적은 있지만 한 번도 간적이 없으며 단지 이 지역을 방문했던 사람들에게 들었던 이야기만으로 기술되었다는 점에서 그 신빙성이 의심된다.
5 여담
- 정작 히틀러 본인은 이 책을 읽고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그래봤자 그리스인들이 아크로폴리스 짓고 있을 때 우리 조상들은 석기로 생활하고 있었다'라고 힘러에게 말했다나 뭐라나...
- 1425년 발굴된 필사본의 경우 이탈리아의 한 지역 귀족이 저택에 소장하고 있다가 지금은 이탈리아 정부 측에게 기증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귀족 가문은 1920년대부터 이 책을 반환해달라고 요구하는 독일 파시즘 지지자들에게 갖은 시달림을 당했다고(...) 히틀러는 총통 직에 오르자마자 무솔리니에게 이 책을 독일로 반환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독일군이 이탈리아를 점령한 2차대전 후기에는 아예 히믈러[8]가 이 사본을 약탈하려고 친위대를 보내서 이 귀족의 자택을 털었다고 한다. 다행히 그 귀족이 독일군이 온다는 소식을 미리 파악하고 은신처로 대피해서 무사했다고.
-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반 나치 계열 작가였던 하인리히 뵐마저 이 <게르마니아>를 읽고서는 '억ㅋㅋㅋ 우리 조상님 좀 킹왕짱인듯?' 이라는 뉘앙스의 글을 1970년대 잡지에 기고해서 엄청난 비난을 받기도 했다.
- 비록 타키투스가 그 당시 오늘날의 독일 일대에 살고 있는 무수히 많은 부족들을 '게르만'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묶었다고 할 지라도 현대 독일인과 당시 게르만족 사이의 어떤 혈연적 관계가 있는지 명확히 파악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 ↑ 네로의 재위 시기에 태어났으며, 그가 8살일 때인 64년에는 내란이 발발해 한 해에만 네 명의 황제(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베스파시아누스)가 즉위하기도 했으며 성인이 된 후에도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공포정치 시기를 거쳤으니 제정 초기 로마의 혼란은 모두 경험해 본 셈.
- ↑ 유명한 어떤 아마추어 역사가 여사께서는 저서에서 '고지식하고 근엄한 타키투스 선생'이라고 빈정거렸을 정도이다.
- ↑ 대놓고 로마인들보고 게르만들을 본받자고 비교질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누가 보더라도 로마인들에게 이들을 본받자고 말하고 싶어하는 타키투스의 마음이 글 곳곳에서 느껴진다.
- ↑ 그렇다고 칭찬만 한 것은 아니다. 어쨌든 자신도 로마인의 일원으로 게르만족이 야만인으로 보였는지 게르만족의 인신공양, 폭음 같은 점들은 신나게 까주고 있다.
- ↑ 아주 틀린 말도 아닌게, 과장하자면 이 책에서부터 나치가 탄생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정도이니.. 실제로 아르날도 모밀리아노라는 저명한 인류문명학자는 이 책을 인류 역사상 가장 위험한 책으로 꼽기도 했으며, 크리스토퍼 크렙스라는 미국의 사학자가 게르마니아 오독의 역사를 정리한 자신의 저서 명을 이걸로 짓기도 했다.
- ↑ 정확히 말하자면 '독일'이라는 나라 자체가 1871년 독일제국의 성립이전까지 한번도 없었던 나라이다. 당장 프랑스에서도 1871년까지는 '독일'이라는 단수 명사가 없이 '독일들', '독일어 문화권'같은 표현을 썼다.
- ↑ Herminones은 Irminones이라고도 한다.
- ↑ 알다시피 히믈러는 온갖 게르만 신화 및 역사에 환장하던 인간이었으니, 이 책의 사본을 가만 내버려 둘 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