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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서』 「후비전(后妃傳)」 | ||||
무선황후 | 문소황후 | 문덕황후 | 명도황후 | 명원황후 |
文昭皇后 甄氏
(182년 12월 15일 ~ 221년 6월)[1]
목차
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의 위나라의 인물. 원희, 조비의 아내, 조예, 동향공주의 어머니.
2 생애
2.1 초기 생애
위서에 따르면 견일(진일)은 상산의 장씨에게 장가들어, 3남 4녀를 얻었다. 장남인 견예는 빨리 죽었고, 차남인 견엄(진엄)은 효렴에 천거되어 대중군연과 곡양의 장(長)이 되었고, 삼남인 견요도 효렴에 천거되었다. 장녀는 견강, 차녀는 견예, 삼녀는 견도, 사녀는 견영, 오녀는 문소황후 견씨이다. 그런데 남매 중에서 문소황후만 정확한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녀는 한나라 태보(太保) 견감(甄邯)의 후예로 집안은 대대로 2천석을 지낸 중산국의 손꼽히는 명문이었고 아버지 견일(진일)은 상채의 현령이었다. 불행히도 아버지 견일은 문소황후가 3살 때 죽었지만 문소황후의 집안은 부유했기 때문에 그녀는 딱히 경제적인 어려움은 겪지 않은 것 같다.
위서에 따르면 문소황후의 어머니는 항상 잠을 들 때마다 어떤 사람이 옥의(玉衣)를 들고 있다가 자신을 덮어주는 것을 보고 모두들 괴이하게 여겼다. 아버지 견일이 문소황후가 3살 때 죽어서 사람들이 장례식에 찾아왔는데, 이들도 기이하게 여겼다. 나중에 관상보는 사람인 유량(劉良)이 찾아와 문소황후와 그 자매들을 보았는데, 문소황후를 가르키면서 "이 아이는 말도 못할 만큼 귀한 인물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위서에 따르면 문소황후는 어려서부터 다 자랄 때까지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문소황후가 8세일 때, 말타는 기술을 자랑하는 자가 문 밖에 있어서, 가족들 모두들 옥상에 올라가 그것을 구경했는데, 오로지 문소황후만은 구경하지 않았다. 모두들 이상하게 생각하며 물었더니, 문소황후가 "그것은 여인들이 볼만한 것이 아니오."라고 대답했다. 또한 문소황후가 9세일 때, 독서를 좋아하여 문자의 뜻을 알며 여러번 오빠들의 필기구를 빌렸다. 오빠들이 문소황후에게 여자들이 하는 놀이나 하지 왜 독서를 하냐고 핀잔을 주자 문소황후는 옛날의 현명한 여자들은 과거의 일을 배워 자신을 훈계했다며 옛 일을 알기 위해 문자를 알아야 한다고 대답했다.
이후 중국에 전란이 일어나고 기근까지 겹치자 곤궁해진 백성들은 모두 금, 은, 구슬, 옥 등의 보물을 팔았다. 그 당시 부유했던 문소황후의 집에는 저장된 곡식이 많아서 보물을 많이 사들였다. 당시 10살 남짓했던 문소황후는 어머니에게 그러지 말고 차라리 친지들과 이웃 사람들에게 곡물을 나누어 주어 은혜를 베풀라고 말했고 집안의 모든 사람들은 옳은 말이라고 여기고 곧바로 그녀의 말에 따랐다.
위서에 따르면 문소황후가 14살 때, 오빠 견엄(진엄)이 죽었다. 문소황후는 어머니에게 부탁해서 남편을 잃은 형수를 친자매와 다름없게 처우시켰다.
2.2 원가 휘하에서
이후 원소는 차남 원희를 문소황후와 혼인시켰다. 하지만 원희가 유주자사로 부임하자 문소황후는 원희를 따라 임지로 가지 않고 업에 남아 시부모인 원소 부처를 봉양했기에 실제적인 결혼 생활은 그리 길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원희 쪽에서 가끔 인사차 업에 왔을 가능성은 있지만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유주에 머물렀기 때문. 이 관계는 짧아도 5년에서 길면 8년 동안(...) 지속되었다.
이후 원소가 죽자 막내아들인 원상이 후계자가 되었으나, 조조가 204년에 업성을 함락시키면서 기주를 평정했다. 당시 문소황후는 시어머니와 함께 업성에 남아있는 상태였다.
문소견황후전에 주석으로 달린 위략에 따르면 업성이 격파되고 조비가 원소의 집에 들어가자 두 여자가 황당(皇堂) 위에 앉아있었다. 문소황후는 두려워서 머리를 시어머니 유부인의 무릎 위에 묻고 있었고 원소의 부인 유부인은 양 손을 스스로 포박하고 있었다. 조비가 말했다. "유부인께서는 어찌 이와 같이 하십니까? 명하셔서 신부께 머리를 들라고 하십시오." 유부인은 그 말에 따라 문소황후에게 얼굴을 들라고 했다. 조비가 그녀의 외모를 보고 감탄했다.
2.3 조조 휘하에서
조비는 업에서 문소황후와 결혼하였다. 원희는 네토라레를 당해버린 것이다(...). 세설신어에 따르면 조조가 문소황후가 천하절색이라는 소리를 듣고 그녀를 불렀으나 이미 아들 조비가 데려갔다는 말을 듣고 "이번 싸움은 다 그 녀석을 위한 것이었다."라고 했다. 감견기(感甄記)에 따르면 시동생 조식은 형수 문소황후를 사모하고 있었는데 조조의 명령에 의해 자신과 함께 살지 못했다. 삼부자 모두에게 사랑 받았다는 이야기는 상당히 흥미로우나 딱히 신빙성은 없다.
문소황후는 조비의 총애를 받았으며 조비의 처가 된 바로 다음해인 205년에 훗날 황제가 되는 조예를 출산했다. 또한 이후 동향공주도 출산했다.
위서에 따르면 문소황후는 조비에게 총애를 받았지만 오히려 다른 조비의 후궁들이 총애를 받도록 응원했고 조비에게 많은 측실을 두어 후계자를 많이 낳으라고 권했다. 나중에 조비는 후궁 임씨(任氏)가 자신의 성질을 여러번 건드리자 쫓아내려고 했다. 문소황후는 자신이 총애 받는다는 것을 모두가 아는데 임씨가 쫓겨나면 사람들은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것이라며 울면서 청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비는 임씨를 쫓아냈다.
위서에 따르면 211년 10월, 조조가 관중(關中)으로 마초랑 싸우러 갔을 때 무선황후 변씨도 따라가서 맹진(孟津)에 머물렀다. 조비와 문소황후는 이때 업성에 있었다. 변씨는 병에 걸린 상태였는데 문소황후는 시어머니 변씨를 걱정하여 하루종일 울었다. 주변의 신하들이 변씨가 낫고 있다며 문소황후를 달랬지만 문소황후는 시어머니가 집에서도 항상 아팠는데 밖에서 병이 나을리가 있냐며 믿지 않았다. 나중에야 병이 나았다는 변씨의 편지를 받고서야 문소황후의 마음이 풀어졌다. 212년 5월, 군대가 업성으로 되돌아 오고 시어머니 변씨와 재회한 문소황후는 기뻐서 울었고 변씨는 그녀의 효행을 칭찬했다.
전략에 따르면 태자 조비가 여러 유생들을 불러 연회를 벌이다가 즐거워서 부인 견씨에게 나와 절을 하게 했다. 모두 엎드렸으나 유정만은 홀로 평소대로 쳐다봤다. 조조가 이를 듣고 유정을 잡아들인 뒤, 사형을 감해주고 돌을 가는 일을 하게 했다.
위서에 따르면 216년, 조조가 손권을 공격하러 출병하자 문소황후의 시어머니 무선황후, 남편 조비, 아들 조예, 딸 동향공주 등은 모두 조조를 따라갔지만, 문소황후는 병 때문에 업에 남았다. 다음해 217년 9월 귀환했을 때, 변씨를 가까이서 모시는 사람들은 문소황후의 안색이 좋은 것을 보고 "2명의 아이들과 떨어져 떨어져 있었는데, 전보다 더 안색이 좋은 것은 왜 그렇습니까?"라고 물었다. 문소황후는 "제 아이들이 어머님(변씨)과 함께 가고 있는데, 나에게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라고 총명하게 대답했다.
2.4 죽음
220년 정월, 조비가 왕위에 즉위했다. 그 해 6월, 조비는 남방 정벌에 나섰으나 문소황후는 따라가지 않고 업성에 남았다.
220년 10월, 조비는 헌제에게 선양을 받아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산양공이 된 헌제는 두 딸을 조비에게 시집보내 조비의 빈비가 되게 했으며, 곽여왕 등도 모두 총애를 받았다. 조비의 첩이 늘어가면서 총애가 사그러들자 문소황후는 실의에 빠졌다. 비탄에 잠긴 그녀가 조비를 원망하는 말을 하자 분노한 조비가 221년 6월에 사자를 보내 그녀에게 자결을 명했다.
주선전에 따르면 조비는 푸른 기운이 땅으로부터 하늘까지 이어지는 꿈을 꾸고 주선에게 해몽을 부탁한다. 주선은 이를 듣고 대답했다. "천하에서 고위한 여자가 죽을 것입니다." 이 때가 조비가 문소황후에게 자결 명령을 내렸을 때로 이 말을 듣고 조비는 후회하며 사자를 보내 말리게 했지만 이미 그녀는 자결한 뒤였다.
그런데 위나라 용비어천가 성향이 있는 왕침의 위서에는 문소황후의 엄친딸스러운 일화가 한결같이 소개되고 있고, 마지막에도 문소황후가 병으로 죽자 조비가 애통해하며 탄식했고 나와있다. 조비가 그녀에게 자결을 명했던 것을 왜곡해버린 것인데 주석으로 이를 인용한 배송지는 왕침이 위나라 왕조를 보기 좋게 꾸미려고 구라를 친게 저 지경까지 이르렀다고 까며 해당 기사 이외에도 무선황후와 문소황후를 필두로 위나라 후비들의 선행으로 적힌 것들이 모두 진실을 말한다고 보긴 어렵다고 평했다.
2.5 사후
한진춘추에 따르면 애초에 문소황후가 주살된 것은 곽여왕이 총애 받아서였다. 문소황후를 초빈할 때는 머리를 풀어헤쳐 얼굴을 덮고 쌀겨로 입을 막게 했다. 조비는 마침내 곽여왕을 황후로 세우고 조예를 기르게 했다.
감견기(感甄記)에 따르면 문소황후가 죽자 평소 문소황후를 사모했던 조식의 생각을 안 조비는 문소황후의 베개를 조식에게 주고 그를 달랬다. 낙수(洛水) 근처에서 조식이 베개를 베고 잠들었는데 꿈에 문소황후가 나와 조식에 대해 사모의 뜻을 전했다. 잠에서 깬 조식은 희비의 생각에 견디지 못하고 결국 감견부(感甄賦)를 지었다. 이후 조예가 이 시를 보고 어머니의 명예를 위해서 낙신부라고 개명했다. 그러나 감견기는 너무 후세의 이야기로 창작의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다.
원래 조비는 죽은 문소황후의 아들인 조예도 폐할 생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조예와 함께 사냥을 나가게 되었는데, 사슴이 새끼 사슴과 함께 튀어나오자 조비가 어미 사슴을 쏜 후 조예에게 새끼를 마저 쏘라고 했다. 이에 조예는 "폐하께서는 어미를 쏘셨습니다. 어찌 차마 그 자식까지 쏠 수 있겠습니까."라며 눈물로 호소했고, 그 말에 마음이 움직인 조비는 조예를 폐할 생각을 버렸다고 한다.
문소황후의 아들 조예가 황제로 즉위하자 어머니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문소황후라는 시호를 올렸다. 또 조예는 꿈 속에서 문소황후를 본 후에 문소황후의 일족을 크게 우대했다. 230년에는 문소황후의 무덤이 낮은 곳에 위치하고 작게 건축되었다하여 문소황후를 조양릉(朝陽陵)에 다시 묻었다.
한진춘추에 따르면 황제 조예가 어머니의 죽음을 알고는, 속으로 항상 원한을 품고, 자주 울며 문소황후가 죽을 때의 상황을 새어머니인 곽여왕에게 물었다. 곽여왕이 말하길 "선제께서 친히 죽이신 건데, 어찌하여 나에게 책문하는 것이냐? 또한 너는 사람의 자식이 되어, 죽은 부친을 원수로 삼고 추궁하며, 전 모친을 위해 그 뒤의 모친을 능멸하고 죽일 수 있느냐?" 화난 조예는 그녀를 핍박하여 죽이고는, 칙서로 곽여왕의 초빈을 문소황후가 죽을 때 받은 초빈과 똑같이 치르게 하였다.
3 이름 논란
한편 그녀의 성씨인 甄을 진으로 읽어야 하는지 견으로 읽어야 하는지 의견이 엇갈린다.
견으로 읽어야 한다는 측의 논거는 다음과 같다.
- 한국에서는 성씨로 사용할 때 견으로 읽기 때문에 견씨라고 읽어야 한다.
- 삼국지 오지(吳志)에 따르면 황제 손권이 아버지 손견의 이름인 堅과 같은 발음인 甄을 진(眞)이라는 발음으로 바꿔 버렸다. 즉 고대 중국에서는 견으로 읽었다.
- 한자 발음의 경우 그 나라 고유의 독법이 있으므로 한국에서 甄씨를 견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견씨가 맞다.
진으로 읽어야 한다는 측의 논거는 다음과 같다.
- 중국어 발음이 Zhen이니 진씨라고 표기해야 한다.
- 삼국지 오지의 내용이라는 것은 실상 중국 위키의 잘못된 인용을 전재한 것으로 단지 장계유(莊季裕)의 계륵편(雞肋篇) 중권(中卷)에 인용된 개인 의견에 불과하다.
- 위나라의 관구검도 甄을 진으로 읽고 시의 압운에 사용한 예까지 보인다.
- 호삼성의 음주의 내용에서도 甄은 之人의 번자라고 하였으므로 진이라고 읽는게 타당하다.'라고 했다.
현재 나무위키에서 문소황후는 견씨, 진씨 둘 다 표기되고 있고 문소황후의 일족인 진일, 진엄, 진상은 진씨로 표기되어 있다.
4 미디어 믹스
반삼국지에도 짤막하게 언급된다. 조비의 부인으로 등장하지만, 조비가 설영운이라는 첩을 얻게 되면서, 그녀를 멀리했다는 이야기가 언급된다.
삼국전투기에선 로젠메이든의 스이긴토로 등장했다. 한동안 출연이 없었다가 조비가 자결을 명하는 부분에서 재출연했다. 이 때 조비의 첩들은 로젠메이든의 다른 인형들로 등장했다.
창천항로에서도 등장한다. 조조가 취하려고 했지만 조비가 먼저 스틸(...)한다. 조식이 문소황후를 연모한다.
이문열 평역 삼국지에서는 견씨가 아니라 진씨라고 표기했다.
허문순 삼국지에서는 조식이 문소황후를 연모했다는 설을 적극적으로 채용했다.
4.1 삼국지 시리즈
삼국지 10,11 |
삼국지 12,13 | 삼국지 13 PK |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견씨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일본어판에서 甄의 읽기가 견에 해당하는 ケン이 아닌 진에 해당하는 シン이므로 이는 오역이며 진씨가 정확한 번역이라 할 수 있다.[2]
삼국지 9에서는 콘솔판 챌린지 모드 통상 시나리오인 후계자 싸움을 클리어하면 신무장으로 등장한다. 능력치는 35/26/76/75로 평범한 문관형이지만, 혼란, 배반, 그리고 환술 등의 고급 병법을 소유하고 있다..
삼국지 10에서 202년 이후 조비를 총대장으로 업성을 함락시키면 견씨와 결혼 이벤트가 발생한다.
삼국지 11의 능력치는 통무지정매 순으로 15/4/71/66/94. 특기가 경국이라는, 여성이 없는 부대에 한해 계략 성공률이 두 배가 되는 엄청난 특기를 들고 나왔기 때문에 사마의 등과 조합하면 위군의 미니 제갈량이 탄생한다(...).
게다가 코에이는 등장하는 여성 무장들의 지력/매력 등의 능력치를 대체적으로 높게 평가해주기 때문에 개별 부대로도 쓸 만하다. 본래 지력이 낮은 부대가 지력이 높은 부대에 계략을 걸면 성공률이 20퍼센트 대로 떨어지지만, 이 특기를 가진 견씨와 초선은 그런거 없다. 시나리오에 첫 등장하는 것은 원소군의 휘하 무장으로서인데, 무특기인 전풍, 철벽을 가진 심배 등보다 견희가 더 쓸만하다.
삼국지 12에서의 능력치는 35/4/72/66이며 전법은 문무저하로 다른 무장들의 통솔, 무력, 지력을 일시적으로 낮출 수 있지만, 대전판 이외에서는 낮은 능력치로 인해 전장에 나갈 일은 없을 것이다. 원소군에서는 곽도가 문무저하를 가지고 있으니 곽도가 자주 참전할 것이다. 대전판에서는 SR 카드로 병력 11000에 1 코스트이다. 1 코스트 중에서 최고 통솔인 39를 찍는데다가 병력도 1000 더 많아서 필수 카드 중의 하나로 취급 받는다. 친애무장은 유일하게 한 사람만 등록되어 있는데 그게 실제 남편인 조비도 아니고 시동생 조식이다(...). 코에이 이놈들이 낙신부 모델 견씨설을 엄청 좋아하나 보다. 참고로 조식의 전법도 문무저하다(...).
여기서도 결혼 이벤트가 있는데 먼저 관도대전 이벤트와 창정 전투 이벤트 후 원소가 사망하고 원상과 원담 분열 이벤트가 뜨길 기다린다. 그 다음 견씨가 있는 성을 쳐서 견씨를 포로로 잡고 군주를 견씨가 포로로 있는 성으로 이동시키면 이벤트가 뜬다. 사실 이건 꼭 위의 과정을 거칠 필요도 없고 조조와 조비만 해당 이벤트가 뜨는 것도 아니다. 원소가 하북을 평정한 이후 다른 세력으로 원소를 쳐서 견씨를 사로잡으면 이 이벤트가 뜨는 경우가 있다.
삼국지 13 PK에서는 신규 일러스트를 받을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