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역사

이탈리아의 역사
Storia d'Italia
고대중세 ~ 근세근대현대








로마
공화국
제국
서로마









베네치아 공화국It.At.

























프랑크
왕국



신성
로마
제국
제노바, 교황령, 토스카나(피렌체), 밀라노, 만토바,
페라라(모데나), 파르마, 몬페라토, 루카, 등등




로마
왕국
사보이 공국사르데냐왕국
베네벤토 공국




나폴리
왕국





































그리스


비잔티움 제국














시칠리아
왕국
비잔
티움
갈루라 왕국, 로구도로 왕국,
아르보레아 왕국, 칼리아리 왕국
사르데냐
왕국
바티칸 시국의 역사
Historia Civitatis Vaticanae
고대중세근세근대현대
고대 로마로마 공국
^(동로마 제국^ ^라벤나^ ^총독부)^
교황령바티칸 포로바티칸 시국
이탈리아의 역사를 다루는 항목.

1 고대사

고대의 이탈리아는 선사시대부터 지중해성 기후와 비옥한 땅으로 인기가 좋았다. 여러 부족들이 포 강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애초에 "이탈리아"라는 이름 자체가 이탈리아 반도의 중부에 살던 고대 이탈리아 부족인 오스키 족의 왕 비탈리우(Vitaliu)에서 유래한 것이다.비탈리우 개꿀 이후 로마 제국이 기원전 1세기 무렵 사비네 족, 삼니테 족 등 이탈리아 반도의 여러 부족들을 통칭하여 이탈리아인이라 표현하였다.

최초로 북이탈리아의 패권을 잡은 것은 에트루리아 왕국이었다. 이들은 북으로는 포 강, 남으로는 지금의 로마 시가 있는 라티움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그 남부는 나폴리(네오 폴리스), 폼페이, 시칠리아(시켈리아)로 대변되는 그리스 식민지였다. 에트루리아는 카르타고와 손을 잡고 그리스를 견제하며 무역적으로 번성하다가[1] 로마의 반란으로 왕정이 무너지면서 도시 공화국들의 동맹 연합체로 탈바꿈하게 된다.

이후로는 로마 제국의 본토로써 이탈리아 최강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으며 이 로마제국은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유럽, 더 나아가 서양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자세한 것은 로마 제국 항목을 참조하라.

2 중세사

로마제국이 멸망하자 이탈리아는 갈기갈기 분열되어 밑바닥까지 떨어진다.(...)

사실 중세 이탈리아의 역사란 것 자체가 없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왜냐하면 각 지역, 각 도시마다 천차만별의 역사적 경험을 겪었기 때문.

그러나 이 문서에서는 편의를 돕기 위해 크게 북부 이탈리아와 중부 이탈리아, 남부 이탈리아로 나누어 대강을 설명한다.

2.1 북부 이탈리아

일반적으로 중세 이탈리아에 대해서 떠올리는 이미지 그대로이다. 이를테면 베네치아메디치 가문같은 것.

고대 로마 제국의 발상지로서 지중해 일대와 프랑스, 영국 남부(잉글랜드) 등을 전부 제패한 거대국가로서 엄청난 위용을 자랑했으나 서로마가 무너진 이후에는 오랜 기간에 걸쳐 고트족, 랑고바르드족 같은 수많은 이민족 들이 들이닥쳤다. 특히 게르만 지역과 가장 가까웠던 북부 이탈리아가 직격타를 맞았다. 이탈리아 중부와 남부의 경우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휘하의 명장 벨리사리우스나르세스의 활약 덕에 어느 정도 질서를 되찾았으나 북부 지역에서의 혼란은 여전하였다.

이후 프랑크 왕국이 힘을 키움에 따라 북 이탈리아도 안정세를 되찾았으며, 신성 로마 제국 영향을 받게 되었으나...

기존의 이탈리아인 지역과 이민족 지역들이 난립한 가운데 알프스 산맥이라는 지리적인 차단 요소, 신성 로마 제국 황제교황 사이의 미묘한 갈등 덕분에 각각의 도시들이 반독립적인 상태에서 자유롭게 성장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이들은 자유 도시나 공국, 공화국 등 각자의 실정에 맞는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였으며, 독일의 푸거가 등장할 때까지 유럽의 금융과 무역을 틀어잡은 막강한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들 도시 국가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지중해의 작은 깡패 베네치아 공화국. 물론 베네치아 외에도 제노바, 파르마, 모데나, 피렌체, 밀라노, 피사 등이 막대한 부와 강력한 세력을 과시하였다. 특히 제노바의 경우, 한때 지중해 무역에서 베네치아의 막강한 라이벌로까지 성장하기도 하였다.

어쨌거나 이들 도시 국가들은 중세 유럽에서 가장 부유했고, 일단 로마 제국의 중심지였던 지역들이라 각종 문화적 유산이 풍부하게 남아있었던 덕분에 선진적인 종교, 사상, 철학의 수입도 활발하였다. 그리고 이같은 요인들로 인해 르네상스의 발원지가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몰락이 시작되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으나 따지고 보면 핵심적인 요인은 단순했는데, 좁아터진 이탈리아 반도에서 자기들끼리 지지고 볶는 사이에 이웃의 강대국들이 세력을 키워 나갔기 때문. 한국인의 관점으로 보면 대체 왜 이들 도시국가들이 통합되지 못했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사실 위에서 설명했듯이 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게르만 족이 러쉬하는 과정에서 각각의 도시들이 인종적, 문화적으로 극심한 분열을 겪었으며, 이후로도 교황과 황제의 세력 다툼 속에서 한층 더 분열을 겪었던 탓에 도저히 통합이 가능할 수가 없었다. 예를 들어, 베네치아가 외적을 막기 위해 습지에 건설되서 운하 도시가 되었다는 것은 유명한 얘기인데, 그 외적이라는 것이 그렇게 멀리서 쳐들어오는 존재가 아니라 바로 옆동네 옆마을에서 쳐들어 왔던 것이다. 심한 경우 개울 하나 끼고 윗마을은 라틴족 동네인데, 아랫마을은 게르만족 후예라서 서로 몇백년간 말도 안 섞고 살았던 상황까지 있었을 정도.[2]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좁아터진 한반도 안에서 여진족, 몽골족, 예맥족, 삼한족이 따로따로 도시 하나씩 차지하고 지지고 볶으며 살았던 셈.

결국 이렇게 분열된 채로 이탈리아 애들끼리 정치질, 음모질, 쌈박질하는 사이에, 이웃 강대국들이 힘을 앞세워 슬금슬금 밀려들기 시작하였으며, 이탈리아의 숱한 인재들은 보다 더 큰 물인 프랑스나 에스파냐, 독일로 다 빠져나갔고 이탈리아의 부흥기는 막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종국에는 신성 로마 제국 카를 5세의 적극적인 흡수합병 정책으로 대부분의 피렌체, 토스카나 등 리즈 시절 좀 있었다고 방구께나 뀌는 도시들 대부분이 합스부르크에 복속하게 되었으며, 베네치아나 로마 교황령의 영향권에 놓인 몇몇 도시들 정도만 어느 정도의 독자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3]

하지만 이후로도 많은 도시들이 특히 프랑스의 힘을 빌어 이러한 상태를 벗어나려고 시도하곤 하였다. 특히 30년 전쟁이 발생하자 혼란이 가속화 되었는데, 이 도시는 독일 편, 저 도시는 프랑스 편에 붙어 남의 나라 땅에서 자기들끼리 쌈박질하는 막장스러운 상황이 발생하기도.

이런 식으로 독일에 묶여 프랑스를 기웃거리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나폴레옹 전쟁이 발발하자 부쩍 힘을 키운 유럽 강국 프랑스가 쳐들어와 모든 도시국가들을 두드려 패고 북부 지역을 하나로 묶어 공화국이라 쓰고 속국이라 읽는다를 세워 드디어 북부가 통합되나 했지만,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다시 오스트리아의 입맛에 맞게 분열 재편되어 다시 원상태로 복귀해버린다(..).

2.2 중부 이탈리아

교황령 항목도 참조할 것.[4]

간단히 말하면, 오랫동안 교황의 땅으로 존재하였다.

일단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정벌이 있었던 서기 500년대 중반 이후 명목상으로는 비잔티움 제국의 땅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교황이 통치하였다. 그렇다고 해도 비잔티움 제국이 나름 강성했던 시절에는 꾸준히 총독을 보내 교황을 견제하였으므로 확실하게 교황의 땅이라고 말하기도 다소 애매했던 상황.

그러다가 700년대 중반 랑고바르드족이 세력을 키워 북부와 중부 이탈리아 전체를 집어삼키는 일이 벌어진다. 이에 따라 비잔티움 제국이 중부 이탈리아에서도 더이상 실질적인 힘을 행사할 수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에 당시 교황이던 자카리아프랑크 왕국피핀 3세에게 SOS를 날렸고, 이에 화답한 피핀 3세가 중부 이탈리아에서 랑고바르드 족을 정리한 뒤 라벤나를 수복하여 로마 교황에게 바친다. 아이러니하게도 교황 자카리아는 교황으로서는 마지막 그리스 출신, 즉 마지막 비잔티움 제국 출신 교황이다. 그러니까 로마인 스스로가 더이상 제국이 중부 이탈리아를 좌지우지할 수 없다는 사실에 쐐기를 박은 것.

이 사건은 이후 중부 이탈리아의 역사 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 역사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원래 라벤나는 비잔티움 제국의 총독부가 있던 곳이며, 랑고바르드 족의 침략 이전까지 비잔티움 제국은 라벤나 총독부를 통해 로마 교황을 통제하였던 것인데, 이 사건으로 비잔티움 제국은 라벤나로 대표되는 중부 이탈리아의 지배권을 영구히 상실했다. 또한 중부 이탈리아와 유럽의 새로운 패자, 새로운 정치적 주체로서 프랑크 왕이 등장하여 교황에게 인정받게 되었으며, 이러한 과정 중에 중부 이탈리아는 아예 확실하게 교황의 영지가 되었다는 것. 이 사건이 바로 역사에서 피핀의 기증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한계가 있었다. 애초에 교황 자체가 세속군주가 아닌 탓에 특정한 영토를 통치한다는 개념 자체가 영 껄끄러웠으며, 혈통을 통해 세습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지위가 불안정하였고, 대놓고 직접적으로 무력을 동원하여 영토확장 전쟁을 벌이는 일도 불가능했던 것.[5]

그런 까닭에 처음에는 중부 이탈리아의 교황령 대부분이 실질적으로는 군소 귀족들의 영지인 상태로 형식적으로면 교황의 통치를 받는 애매모호한 형태가 되었다. 하지만 중부 이탈리아에서 교황과 견줄 만한 정치세력이 성장했느냐면 그것 또한 아니올시다 인데, 애초에 교황들이 자기 턱 밑에서 힘있는 세력이 커나가는 꼴을 볼리가 만무했기 때문.

따라서 오랜 세월에 걸쳐 교황들은 이런저런 수단을 동원하여 중부 이탈리아의 지배를 굳혀나갔으며, 중부 이탈리아 역시 끝끝내 교황의 영향력과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오늘날까지도 중부 이탈리아에 로마 빼곤 이름난 도시가 없는 까닭이 바로 이때문이다.

어쨌거나 교황령 자체가 민족에 의해 성립한 것이 아닌 탓에 민족국가이탈리아가 성립하는데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이 되었다. 잘 이해가 안 되면 한반도가 남북분단된 가운데 조계종이 경기도와 황해도에 틀어박혀 앞으로 천년 정도 자기 땅으로 통치한다고 생각해보자 결국 이탈리아 통일 전쟁이 발발하자 중부 이탈리아는 철저하게 객체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 교황들은 우리 땅 다 뺏긴다 이놈들아!하며 이만 부득부득 갈았지만, 어떻게든 프랑스를 끌어들이는 것 뿐 다른 수단이 전무. 결국 교황령이었던 중부 이탈리아는 이탈리아 왕국에 흡수되었으며, 교황에게 남은 것은 바티칸 시국이 전부가 되었다.

2.3 남부 이탈리아

나폴리시칠리아 항목을 참조할 것.

그래도 리즈 시절이 있었던 북부나 중부와 달리 이탈리아 남부는 그냥 일찍부터 지중해의 화약고 내지 일종의 식민지 상태. 사실 로마가 카르타고와 싸울때부터 화약고 신세였다는 점은 잊기로 하자.

어쨌거나 남부 이탈리아의 역사는 대략 세 시기로 분류할 수 있다. 1기는 비잔티움 제국의 전진 기지. 2기는 비잔티움 제국을 먹기 위한 서유럽의 전진 기지(..). 3기는 비잔티움 제국 멸망 이후 존재감 제로의 시기(..)이다. 헌터(스타크래프트)의 센터 같은 곳

먼저 유스티니아누스의 서로마 지역 탈환부터 기원후 1000년 경까지 대략 500년 정도는 대체적으로 비잔티움 제국의 땅.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의 세력의 흥망에 따라 온갖 풍상을 겪어야 하긴 하였다. 특히 시칠리아의 경우는 안습인데, 고대부터 유명한 곡창지대 + 이탈리아로 향하는 관문인 탓에 이슬람 세력의 주요 목표가 되었다. 결국 바리 에미르국이 시칠리아에 진출하여 비잔티움과 시칠리아를 양분한 채로 한동안 지배자로 군림하기도. 비단 이슬람 뿐만 아니라 비잔티움 내부에서도 시칠리아나 중, 남부 이탈리아를 근거지로 하는 반란이 종종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래도 그럭저럭 기원후 1000년 경 까지는 비잔티움 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11세기 중반, 즉 1050년 경이 되자 기존의 세력이 아닌 전혀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여 이 지역의 지배자가 된다. 그것이 바로 노르만인들.[6] 로마로 온 스칸디나비아인의 후예 촌놈들전사들이 용병으로 활동하던 중 로베르 기스카르(Robert Guiscard)[7]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등장하였고, 이 인물이 결국 이탈리아 남부에서 노르만인들을 규합하여 국가의 틀을 다지게 된다.

기스카르는 교황의 지지를 받고 남부 이탈리아 + 시칠리아[8]를 다 털어먹고 공국을 세우게 된다. 게다가 기스카르는 궁극적으로 비잔티움 제국을 털어먹는다는 목표를 세운다. 그러니까 이전까지 이슬람이 유럽으로 진출하기 위해 남부 이탈리아를 노렸다면, 기스카르 등장 이후로는 노르만이 비잔티움으로 진출하기 위해 남부 이탈리아를 전진기지로 삼았다는 이야기. 비잔티움으로서는 이슬람과의 투쟁이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 싶었는데, 이번엔 유럽 쪽에서 사단이 나버린 셈(..). 이후 남부 이탈리아를 차지한 거의 모든 힘 좀 쓴다는 나라들이 동로마의 황제가 되기 위해 동로마를 노리게 된다.

비잔티움으로선 다행히도 기스카르는 비잔티움 정벌에 들어가기 직전에 병사한다.그래도 용병대장 출신으로 남부 이탈리아를 먹었으니 여한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로 기스카르의 일족들이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의 왕위에 오르면서 시칠리아 왕국이 탄생하였고, 이들 시칠리아 왕들의 제1차 목표는 여전히 비잔티움. 시칠리아 왕 중에 직접적으로 이러한 목표를 이룬 사람은 없었다지만, 노르만인들은 이후 십자군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고, 예루살렘이나 안티오키아 등지에 왕국, 공국 등을 세우며 늘 비잔티움의 골칫거리로 작용하였다.[9]

이후 1200년 경 노르만인들의 왕위가 단절되었는데, 마침 혼인을 통해서 인연이 닿은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가문인 호엔슈타우펜 가문에서 잽싸게 시칠리아 왕위를 차지한다. 독일 황제들 역시 동로마의 제위를 노려 비잔티움과 썩 좋은 관계는 아니었으므로, 남부 이탈리아는 여전히 비잔티움으로 향하는 전진 기지 신세. 그러나 불과 50년이 채 지난 시점에 프리드리히 2세콘라트 4세의 사망으로 호엔슈타우펜 가문이 단절된다. 프리드리히 2세의 사생아 출신인 만프레디가 국왕에 올랐지만 이참에 신성로마제국의 세력을 약화시킬 기회를 잡은 교황청은 영원한 독일의 라이벌 프랑스 쪽에 남부 이탈리아를 넘기기로 결정, 루이 9세의 동생인 앙주 백작 샤를의 뒤를 밀어주었고, 이에 따라 1266년 앙주 백작 샤를이 형의 지원을 엎고 만프레디를 격파하여 시칠리아의 왕 카를로 1세로 등극한다. 문제는 카를로 1세 역시 서유럽 노르만의 영원한 로망, 이렇게 된 이상 콘스탄티노플로 간다는 마음가짐이었다는 것. 이렇게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는 지배자만 바뀔 뿐 비잔티움으로 향하는 전진기지 노릇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 보였는데..

그러나 여기서 생각치 못하던 반전이 일어났으니.

대놓고 노림 받는 비잔티움 제국 쪽에서 신의 한수를 둬버린 것. 당시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였던 미카일 8세가 기가 막힌 외교력과 정치공작, 스파이질을 통해 만프레디의 딸과 결혼하여 호엔슈타우펜 왕가의 계승권을 갖고 있던 아라곤 왕 페드로 3세와 손을 잡고 시칠리아에서 민중 봉기를 일으켜 카를로 1세를 쫓아내버린다. 시칠리아 왕위에는 페드로 3세를 앉혔다. 비잔티움 입장에선 군사 한명 동원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해버린 것(!)

이 사건으로 카를로 1세는 시칠리아에서 쫓겨나 이탈리아 반도 남부 지역으로 만족해야 했으며, 시칠리아섬을 탈환하기 위해 교황 및 조카인 프랑스왕과 손잡고 아라곤 십자군 까지 일으켰지만 도리어 패배하여 노르만 인들은 비잔티움 제국을 정복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을 영원히 상실하였다. 얼마나 아쉬웠던지 카를로 1세와 그의 후예들은 시칠리아가 없는데도 자신들의 왕국을 시칠리아 왕국으로 자처했다. 서기 1282년에 일어난 이 사건이 바로 역사에서 시칠리아의 만종이라 불리는 유명한 사건이며, 역사가들은 이 사건이 서유럽인들의 그리스, 발칸, 중근동으로의 러쉬가 좌절되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된 사건으로 평가한다.

당연하지만 이 시칠리아 없는 시칠리아 왕국은 남들에게는 왕국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들은 이라 주장했던데다가 시칠리아도 없는데 시칠리아로 부르기도 영 이상하므로, 다들 편의상 그네들의 수도 이름을 따서 나폴리 왕국이라 부르게 되었다.

문제는 시칠리아 없는 남부 이탈리아는 그냥 별볼일 없는 촌동네에 불과했다는 점. 이후로 유럽 역사에서 별다른 역할을 수행하지는 못했다. 일단 시칠리아의 만종 사건으로부터 100년 쯤 지난 1380년 경부터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났고, 1400년대 중반 경에 매의 눈으로 기회를 엿보던 아라곤이 잽싸게 냠냠. 한편 아라곤은 시칠리아를 바탕으로 지중해 진출에 앞장섰고 한때는 그리스 남부에까지 전진기지를 설치했으으며 콘스탄티노플의 황좌를 노렸으니 고마해 이 미친놈들아 또다시 서유럽인들의 러쉬가 시작된 거 아니냐고 하면, 이 당시 비잔티움 제국은 처절하게 몰락하고 오스만 제국에게 최후를 맞기 일보직전이었으며 아라곤으로서도 이 오스만 제국은 버거운 상대였다. 결국 아라곤은 지중해 진출 대신 카스티야 왕국과 동군연합을 이루면서 스페인을 만들고 신대륙 진출로 관심을 돌렸다.

한편 시칠리아는 페드로 3세가 시칠리아의 왕이 된 뒤 한결같이 아라곤 - 스페인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렇게 기묘하게 지배자는 같지만, 지역 자체는 분리된 채로 동군연합으로 살아가다가 이탈리아 통일 전쟁 이전에 양 시칠리아 왕국이라는 이름으로 통합되었다.

어쨌거나 이런식으로 지배자들이 계속 바뀐 탓에 이탈리아 남부에서는 이슬람 문화, 그리스 문화, 노르만-프랑스 문화가 뒤죽박죽 엉키게 되었으며, 이탈리아 북부와도 언어, 문화적인 차이도 제법 커 그냥 이정도면 서로 다른 나라오늘날까지 그 흔적이 남게 되었다.

3 근대사

위의 기묘하고 혼란스러운 이탈리아의 중세사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탈리아는 북쪽의 군소 국가들, 중부의 교황령, 남쪽의 두 시칠리아 왕국이라는 형태로 오랜 세월을 겪었다. 이 구도는 이탈리아 통일 직전까지도 크게 변하지 않는다.

사실 남쪽의 두 시칠리아 왕국 모두 결국 아라곤 왕국에 복속되었고, 아라곤 역시 카를 5세를 왕으로 모시면서 합스부르크에 귀일했는데, 북부 역시 합스부르크의 영향 하에 있었으므로, 결국 교황령을 제외한 남북 이탈리아는 모두 합스부르크의 영향 아래 놓여 있던 상태였다. 문제는 군주가 같다고 해서 다 같은 상태는 아니었다는 것. 서로의 위상, 입장, 역사 발전 단계가 다 제각각이고 다들 고만고만한 꼬꼬마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북이탈리아를 지배하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와 남이탈리아를 지배하는 스페인의 합스부르크는 얼마 못 가 갈라져 서로 제 갈 길 갔고, 북이탈리아와 남이탈리아는 각각 오스트리아와 스페인의 부속물 같은 처지였다.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조가 단절되고 그걸 부르봉 왕조에서 대체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이탈리아(반도)란 지리적 표현에 불과하다"'라는 메테르니히의 한마디처럼, 그야말로 안습 상태였다는 것.

그렇다고 해도 이탈리아 반도 자체가 유럽의 다른 지역과 다른 어떠한 정체성을 갖추긴 갖추고 있었던 상태. 결국 1870년에 이르자 우리도 합스부르크 애들한테 벗어나 한데 뭉쳐봐야 되지 않겠음?이라는 여론이 커졌고,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10]의 주도로 교황령을 포함한 대부분의 도시가 뭉쳐 독립 & 통일되었다(이탈리아 왕국). 이탈리아의 국민적 영웅인 가리발디가 활약한 때가 이 때.

당시 오스트리아의 개입을 막기 위해 나폴레옹 3세와 손을 잡고 롬바르디아 지역에서 오스트리아를 몰아낸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제서야 이탈리아가 통일될까봐 겁이 난 나폴레옹 3세가 프랑스군을 빼버리고 오스트리아와 불가침을 약속하며 뒤통수를 치는 바람에 더 진군하지 못했다. 이 사건으로 사르데냐 왕국의 재상이었던 카보우르는 사임을 선언했고,[11] 프랑스와의 동맹에 담보로 내걸었던 사보이와 니스 지역은 나중에 사르데냐 왕국이 토스카나와 에밀리아로마냐를 합병할 때 프랑스에 내어준다.

이후에는 마저 수복하지 못한 티롤, 베네치아, 이스트리아, 달마티아 지역을 탈환하기 위해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독일과 동맹을 맺었다. 동맹 직후 터진 보오전쟁에 참여하여 베네치아를 일단 획득했으며 보불전쟁에서 프랑스가 빠져나간 틈을 타서 로마 교황령을 합병하여 로마 제국 이래 2천여년 간 분열되었던 이탈리아의 통일이 실현된다.

4 현대사

통일 이후 이탈리아는 리비아, 소말리아 등을 합병하는 등 열강의 말석에 올랐으나 극심한 통일의 휴우증 및 티롤, 이스트리아, 달마티아 등의 고토회복을 위하여 제국주의적 우경화를 띄었으며 1882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독일제국과 더불어 삼국동맹을 형성했으나 1914년, 제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전쟁을 일으키는 데에 사전 협의가 없었다는 명목으로 중립을 유지한다. 이후 1915년, 런던 조약을 통해 협상국 측에 서서 전쟁에 참여하게 되는데, 사실상 전선에 기여를 했다기 보다는 병크(...)를 치곤 했다. 특히 12차까지 벌어진 이손초 전투가 그 대표적인 예인데, 12번째 이손초 전투, 카포레토 전투라고 부르는 이 전투에서 이탈리아군은 무려 사상자가 65만 명이 나는 쾌거(?)를 올린다. 이 숫자는 1차부터 11차까지의 사상자 총합보다 많은 수. 카포레토 전투 이후, 이탈리아군은 문자 그대로 군대 자체가 붕괴해버린다. 하지만 그래도 어째 서부전선에서 연합국이 승리해버린지라 승전국의 대열에 끼게 된다. 이후 티롤 북부 지역과 달마티아를 제외하고 모든 영토를 획득했다. 그 밖에 이로써 대체적인 이탈리아 왕국의 영역이 확정되었다. 이러한 이탈리아의 대외정책을 신성한 이기주의(Sacred Egoism)라고 하는데, 대전 당시 총리였던 살란디노의 연설에서 처음 등장한 용어다.

그 뒤 제1차 세계대전 말 독일-오스트리아 군에게 처절하게 발리며 짓밟힌 자존심과 회복되지 않는 경제 때문에, 파시즘이 흥기하여 영국 스파이질이나 하던 베니토 무솔리니로마제국의 부활을 외치며 국가의 영도자(일 두체)로써 정권을 잡기에 이른다. 이후 경제를 어느 정도 회복시키고 알바니아를 합병하는 등 기세가 괜찮았으나 에티오피아 침공부터 삐꺽거리더니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제대로 병크를 터뜨리며 이탈리아의 이미지를 개판으로 만들어놨다(…). 무솔리니는 결국 전쟁 도중 축출되어 감옥에 갇혔다가, 독일군의 구조로 살아나고, 다시 게릴라 부대에게 붙잡혀 처형당함으로써 그 판타스틱한 삶을 마감했다.

그리고 2차 대전에서 패배하는 바람에 1차 대전 당시 얻은 이스트리아 지역은 트리에스테 자유지구로 재편되었고, 1951년 리비아도 독립시켜야 했다. 트리에스테 A 자유지구 대부분은 50년대에 회복하였으나, A 지구 일부와 B 지구를 유고슬라비아가 가져가서 오늘날의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까지 이어진다. 발칸 반도의 범위를 최대확장시키면 이 이탈리아의 트리에스테까지도 발칸 반도에 포함되기 때문에 이탈리아도 발칸반도에 영토 일부를 걸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어쨌거나 막판 갈아타기로 패전국 신세를 겨우 면한 이탈리아는 대전 직후 공화정으로 전환되어,[12] 50년대 초고속 경제 성장을 통해 G8에 드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13] 그 뒤 정치 혼란[14] 과 둔화된 성장, 심각한 남부 빈부격차 등으로 삐꺽거리기는 하지만 여전히 세계에서 손꼽는 부국 중 하나이다.

그리고 그리스에 이어 우려하던 경기 붕괴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 11월 10일 기준 국채금리 7%를 넘어서면서 구제금융 신청의 암묵적인 데드라인을 돌파했다. 이 그리스 경제 위기로 인해 EU 내에서 포르투갈, 스페인, 아일랜드와 함께 위기를 맞았다. 아일랜드는 위기를 탈출했으나, 문제는 스페인과 이탈리아는 전체적인 경제규모가 매우 커서(이탈리아는 한국보다 좀 더 경제력이 크고, 스페인은 한국보다 살짝 아래) 이들이 위기로 휘청거릴 때마다 EU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1. 사실 그리스의 패권이 무너지기 전까지는 로마 연합체제도 친 카르타고를 지향했다.
  2. 북부 이탈리아의 한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한 신부님 신부님 우리 신부님을 읽어보면 이상할 정도로 옆 마을과 사이가 나쁘다는 묘사가 빈번히 등장하는데, 다 이런 이유가 있는 것이다.
  3. 특히 카를 5세는 자신의 첫 영지였던 부르고뉴를 북이탈리아와 맞바꿀 정도로 이탈리아에 대한 집착이 강했고, 경쟁자인 프랑스를 누르고 유럽 세계를 평정하다시피 한 능력있는 제왕이었기에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레벨로는 상대조차 되지 못했던 것이다.
  4. 다만 나무위키의 교황령 항목은 부실하므로 위키피디아의 교황령 항목을 참조하는 것이 더 낫긴 하다.
  5. 교황의 사주로 A도시가 B도시에 전쟁을 일으킨다거나..하는 일은 비일비재하긴 하였다. 그래도 이런 식으로 일을 벌이는 게 직접 쳐들어가는 것보다 얼마나 까다로왔을지는...상상에 맡긴다.
  6. 이 시기는 노르만인들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 때가 바로 윌리엄 1세가 영국을 먹은 그때 쯔음이다.
  7. 이 이름은 프랑스식인데, 대부분의 역사 서적에서는 프랑스 식 이름으로 주로 기술된다. 이탈리아식으로는 로베르토 귀스카르도(Roberto il Guiscardo)가 된다.
  8. 기스카르의 등장 직전 시칠리아는 비잔티움과 이슬람이 사이좋게 양분하고 있던 상태였다.
  9. 그리고 결국 중근동에 진출한 노르만인들은 베네치아와 짝짜꿍이 되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함으로써 비잔티움 제국의 몰락에 결정타를 날려주었다.
  10. 원래는 프랑스계의 사보이 공국이었지만, 16세기 이후에는 이탈리아에 동화되었다. 이후 이탈리아의 통일까지는 이탈리아에서 거의 유일하게 자주독립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피에몬테-사르데냐를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 통일이 가능했다.
  11. 몇달 후에 카보우르는 다시 재상에 임명되었다.
  12. 당시 국왕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무솔리니의 전횡을 조장했고, 또 그를 축출한 뒤에 독일군이 이탈리아에서 계속 전쟁을 벌이는 상황에서도 이를 막지 못하는 등의 삽질로 인해 국민들에게 분노를 사 국외추방.
  13. 심지어 그 이후 1980년대 후반에는 영국과 프랑스를 따돌리고 서독 다음으로 세계 제 5위(자본주의 진영 제 4위)의 경제규모를 자랑하기도 했다.
  14. 1960년대~1980년대에는 납탄 시대라 해서 정부군과 좌익단체, 우익단체가 무장 교전을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