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호실/역사

본 항목은 대통령경호실의 하위 항목으로 대한민국 대통령경호실의 역사에 대하여 서술한다. 한국 현대사의 예민한 사안들이 많으므로 서술에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

1 제2공화국 이전

1949년 2월 23일 <경무대 경찰서>가 창설되어 국가원수 경호를 담당하였다.

4.19 혁명으로 제2공화국이 수립된 후인 1960년 6월 29일부터는 서울시 경찰국 경비과 특정지역 경찰관 파견대가 설치되어 국가원수의 경호를 담당했으며, 이 파견대는 후에 경호실 창설 후 101경비단이 된다.

제1공화국 당시 곽영주가 경무대 경찰서장이었다는 것은 수치스런 역사이며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조.

2 제3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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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전권을 장악한 박정희가 '국가재건최고회의'를 만들고 의장에 취임하자 박종규 소령을 중심으로 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경호대>가 창설되었으며 이 의장 경호대는 1961년 6월 1일 중앙정보부가 창설되면서 이에 흡수되어 운영되다가 1963년 12월 14일 '대통령경호실법'이 제정되어 동월 17일 박정희가 대통령에 취임함과 동시에 <대통령 경호실>이 정식으로 창설되었다. 그리고 대통령경호실장에 5.16 군사정변에 함께 했던 홍종철이 임명되었다.

PSS라는 영문 명칭도 이 때 제정되었는데 미국 국가원수 경호를 담당하는 재무부 산하(9.11 테러 사건 이후 국토안보부 산하로 전환) 비밀수사국 Secret Service(약칭 SS)의 명칭을 따서 SS 앞에 ‘대통령’을 뜻하는 P(Presidential)을 붙여 정한 것이라 한다. 뭐야 이 따라쟁이들은 실제로 경호실 창설 시기부터 경호처로 바뀐 현재까지도 대한민국의 국가원수 경호는 SS를 많이 벤치마킹하고 있다. 이름은 미국 SS에서 따오고 실제 지향은 다른 SS[1]

1964년 5월 대통령경호실장이 홍종철에서 박종규로 바뀌었다.

1968년 1월 21일 이북 특작부대(124군) 공작원들이 청와대 기습을 시도한 1.21사태가 일어났으며 이는 경호실 창설 이후 최초로 당한 중대 사건으로 청와대 담장 안쪽인 2선까지 털릴뻔한 사례다. 보통 중요시설은 3지대 방어를 하는데 특정지역의 경우 본관/관저 안이 1선, 담장 안쪽이 2선, 담장 바깥쪽이 3선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청와대 앞길과 인왕산, 북악산, 우이령 권역의 민간인 출입을 통제하는 등 경호 체제가 변화되었다. 이 시기에 통제된 곳들 중 청와대 앞길과 인왕산은 1993년, 북악산은 2006년, 우이령은 2009년에 들어서야 민간인에게 개방되었다.

3 제4공화국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경축식 행사 중 암살자(문세광)의 공격에 의하여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사망하는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도 사건이지만, 이 과정에서 경호실이 보여준 모습은 정말 엉망이었다.

  • 이 사건에서 경찰을 포함한 경호당국은 외국인이라는 것에 혹하여 암살자를 2선까지 통과시켰다. 당시 행사장이었던 국립극장을 경비하던 경찰은 차량 비표가 없었는데도 대형 외제차(Ford 20M)에 위축되어 그냥 통과시켰으며, 행사장 안 역시 비표를 단 사람만이 입장할 수 있었음에도 극장 입구를 경비하던 경찰관은 문세광이 일본어를 쓰는 것에 혹하여 초청받은 외국인 VIP로 판단하고 비표가 없는데도 통과시켰다. 이는 경호원이 외국어를 전혀 못할 때 외국인에게 얼마나 약한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 경호의 기본인 육탄 방어에 충실하지 못했다. 사건 당시 중앙 복도 주위에 배치되어 있던 경찰관들은 문세광이 권총을 들고 VIP가 연설중인 단상을 향해 중앙 복도를 유유히 걸어나가는 것을 보고도(VIP가 연설중일 때 일반인은 중앙 복도로 나가서는 안된다)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으며, 단상 위에서도 박종규 경호실장이 권총을 뽑아 대적 자세를 취했을 뿐(이것도 경호 측면에서 보면 병크다. 이유는 본문에 서술) 다른 경호원들은 총소리에 놀라 커튼 뒤에 숨었다가 문세광이 제압된 뒤에야 연단을 에워싸고 호위하는 충격과 공포스러운 장면을 연출했다. 이 과정에서 긴장한 경호원이 총기를 오발하여 합창단원 장봉화를 사망하게 하는 팀킬개막장 행각을 저지르기도 했다.
  • 총에 맞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VIP가 연설을 그대로 하도록 놔두는 세 가지 병크를 저질렀다. 암살자가 제압되고 총에 맞은 육여사가 병원으로 실려간 뒤에도 박정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연설을 계속했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담대한 박정희'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지만 경호 측면에서 보면 이것은 중대한 병크다. 암살자가 제압되었다고 해도 행사장 안에는 제2, 제3의 암살자가 또 있을 지 모르는 일이므로 사건이 일어나면 경호 당국은 무조건, 반드시 VIP를 행사장에서 피신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박종규 경호실장이 물러났지만 그 후임으로 발탁된 인물이 후에 차지철 이었다는 것. 차지철은 차관급이던 경호실장을 장관급으로 격상한 데 이어 현역 중장 또는 소장을 경호차장으로, 현역 준장을 차장보로 임명하는 것도 모자라 유사시에는 수경사(현 수방사)까지 경호실장이 지휘할 수 있도록 법령을 고쳐 경호실을 사실상 사병(私兵)집단화했다. 제11·12대 대통령 전두환과 제13대 대통령 노태우가 모두 경호실 작전차장보 출신. 그것으로는 부족했는지 경호실 지원부대 병력의 복장을 아돌프 히틀러SS를 모방한 가죽 코트와 장식으로 도배하여 박정희 친위대로 만들려 했고, 매주 토요일마다 경복궁 경내 30경비단 연병장에 국회 및 정부 요인, 장/차관 등을 강제 초청해 놓고 국군의 날 사열식을 본딴 이른바 '하기식(下旗式)'이라는 삐까번쩍한 행사를 치르는 등 자기 권력 과시에 열을 올리기에 급급했다. 게다가 정치에 개입하여 1976년 신민당 전당대회 각목 난동 사건을 일으키기까지 하였다.

경호실장부터가 이러했으니 당연히 경호의 질적인 발전은 아웃 오브 안중일 수밖에 없었고 각종 상황에 제대로 대처할 수 있는 능력보다 겉으로 보이는 무도 실력을 중요시하는 풍토도 전혀 개선되지 않았으며 이는 결국 유신 체제의 명을 재촉한 사건의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10.26 사건은 대한민국 최초로 국가원수가 피격/사망한 사건이며 세세히 뜯어보면 경호실의 무능이 백일하에 드러난 사상 최악의 병크였다. 국가원수와 경호실장이 한날 한시에 요단강 익스프레스를 타는 황당하기까지 한 사건에서의 경호상 문제점은 무엇이었을까.

  • 초기의 경호실은 중앙정보부 예하에 있다가 갈라져 나온 기관이었다. 현재도 경호실은 정보기관과 유기적으로 협조하여 임무를 수행한다고 한다. 10.26이 터지기 얼마 전부터는 부마민주항쟁의 대처 방안을 놓고 차지철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대립각을 세우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따라서 냉철한 경호 관계자였다면 이 시점에서 김재규가 대통령에게 접근하는 것을 차단했어야 했지만, 차지철의 경호실은 시덥잖은 권력싸움에만 열을 올렸지, 정작 경호에 중요한 이런 조치를 제대로 하지 못 했다.
  • 더군다나 이 사건 당시 차지철은 위해를 가할 가능성이 있는 자와 국가원수가 함께 대면하는데도 총기를 휴대하지 않았다. 경호실장이니 부통령이니 권력맛에 취한 나머지, 자신도 대통령의 경호관 중 한 명이라는 기본 개념마저도 망각한 셈.[2]
  • 가장 최악이었던 것은 대통령을 버려둔 채 도망치다가 결국 자신도 총을 맞아 죽은 차지철의 추태. 8.15 저격사건 당시 박종규 실장은 암살자와 대적 자세라도 취했다지만......

결국 박정희는 뇌도, 용기도 없는 잉여인간들에게 자신의 목숨을 맡긴 셈이 되었고, 그 대가는 본인과 경호실장 이하 여러 경호 관계자들의 목숨, 그리고 역사의 대격변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한 경호원 순직자는 경호실장 차지철 포함 5명.

그 해 11월 정동호 준장이 대통령경호실장 직무대리를 맡았다.

4 제5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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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호 준장이 1980년 9월부터 정식 대통령경호실장이 되었다. 그러다가 제5공화국 수립 후인 1981년 7월 대통령이 된 29만원 그 분의 최측근이자 하나회 멤버인 장세동 준장이 제5대 경호실장에 임명되었다. 이 때부터는 국가원수에게 모든 것을 맞추는 경호를 시행했다. "각하의 신변은 물론, 그 분의 심기(心氣)까지도 평안하게 하는 것이 우리의 존재 목적"이라는 장세동의 취임사에서 비롯된 소위 '심기 경호'는 매우 유명한 말.

이는 전 정부 경호실에서 작전 차장보를 역임하여 경호실의 생리를 아는 전두환의 경호원을 대하는 스타일과도 관계가 있었다. 실제로 전두환의 이른바 '베푸는 카리스마'덕에 5공화국 당시 경호원들은 전두환을 상당히 좋아했다고 한다. 예로 경호원의 이름을 외워두었다가 부를 때 항상 이름을 불렀다고 한다. 조선일보 기사 그리고 '아이들은 잘 크는가' 등을 물어보기도 하고 경호원 부인들의 생일을 기억해두었다가 선물을 보내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새벽에 현장 순시를 나가는 일이 잦아서 경호원들이 상당히 힘들어했다고도 한다.

이 시기에 있었던 가장 큰 경호 관련 사건은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을 꼽을 수 있다. 국외에 많이 나가지 않던 박정희와는 달리 전두환은 적극적으로 국외 순방을 다녔는데, 새벽 순시를 많이 나가는 전두환을 경호실이 따라가기 힘들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사건도 경호 측면에서는 경호실이 대통령을 따라가지 못해 생긴 사건으로 꼽히며 경호원 2명이 현장에서 순직했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조.

1983년 6월 청원군 대청댐 준공식에 참석한 전두환이 근처가 경관이 좋다고 해서 동년 12월 대청댐 근처에 대통령 휴양시설(이른바 지방 청와대)인 청남대가 완공되었다. 이 청남대는 국민의 정부까지 4대에 걸쳐 지방 청와대로 쓰이다가 2003년 참여정부 들어 충청북도가 소유하게 된다.

1984년 5월 6일에는 방한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서울 중앙극장앞 노상에서 위해하려고 한 사건도 있었다. 그리고 '전직 대통령과 대통령 당선인(직계 가족 포함)에 대한 경호'도 경호실이 담당하게 된 것도 5공 때부터이다. 전직 대통령과 그 가족의 경호는 1981년 대통령경호실법 개정으로 추가된 사항으로 본인의 의사에 반하지 않는 경우에 한하여 퇴임 후 7년 이내의 전직 대통령과 직계 가족에 대한 경호를 경호실에서 맡게 되었으며 임기 만료 전 퇴임한 경우나 재임 중 또는 퇴임 후 사망한 경우 가족은 2년간 경호실의 경호를 받도록 했다(퇴임 후 사망한 경우는 퇴임일로부터 2년간). 대통령 당선인과 그 가족의 경호는 1963년 대통령경호실법 제정 당시부터 들어있었지만 경호실이 실제로 대통령 당선인을 경호하기 시작한 시기는 1987년 13대 대통령 선거 이후부터다.

1985년 2월 장세동 대통령경호실장이 국가안전기획부장에 임명되면서 안현태가 후임 대통령경호실장에 임명되었다.

5 제6공화국

5.1 노태우 정부

노태우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1988년 2월 이현우가 대통령경호실장에 임명되었다. 전임 대통령과는 달리 보통 사람은 경호원을 잘 챙기지 않았다고 하며 이 때문에 법적으로 신분이 보장되지 않는 별정직인 경호원들은 신분 불안을 절감하게 되었다. 1981년 4월 일반직과 별정직으로만 구분되어 있던 공무원 체제가 현재와 같이 다양화되면서 원래 별정직에 속해 있던 판사, 검사, 군인, 경찰관, 소방관 및 국가안전기획부 직원 등이 특정직 공무원으로 분류되었는데 10.26 사건의 여파 때문에 챙겨주는 사람이 없었던 경호공무원은 여전히 별정직으로 남아있었다. 헌데 경호실 창설 당시 구성원들이 거의 현역 군인이라 언제든 군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한 것이 진짜 이유였다는 말도 있다. 따라서 경호공무원을 특정직으로 바꾸고 공개 채용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고 1988년 8월 22일 경호실 창설 이후 최초로 경호공무원 공개채용이 실시되었다. 하지만 별정직 신분이 바뀐 것은 아니었으며 경호공무원이 특정직으로 전환되는 데는 더 많은 세월이 걸리게 된다.

1988년 3월부터 단체관람에 한정된 것이긴 하지만 청와대 경내 관람을 허용하였고, 대한민국 최초의 대규모 국제 행사인 1988 서울 올림픽을 개최하였다. 1990년에는 관저가, 1991년에는 청와대 신 본관이 준공되면서 경내 경비 및 경호 체제에도 변화가 생겼다.

임기말인 1992년 10월 이현우 실장이 국가안전기획부장으로 옮기고 후임 실장으로 최석립 전 헌병감이 임명되었다.

5.2 문민 정부

출범 초부터 군사정권 잔재 청산에 힘을 기울였던 문민정부에게는 경호 관련 분야도 예외가 아니었다.

우선 현역/예비역 장성이 맡는 것이 보통이었던 경호실장에 경호실에서 잔뼈가 굵은 박상범 경호관을 임명하였다. 박상범 실장은 별명이 ‘불사신’이었는데 8.15 저격사건10.26 사건,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 때 모두 현장에 있었으며 10.26 사건 당시에는 궁정동 안가에서 총을 맞았으나, 확인사살을 당하지 않아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문민정부 초기에는 군사적인 색채를 지우는 의미에서 경호실 사정을 가장 잘 아는 그를 실장에 임명했지만 1년 9개월 정도 뒤인 1994년 12월에 다시 예비역 장성인 김광석 실장이 임명된다.

출범 직후인 1993년 3월 8일 1.21사태 이후부터 일반인의 통행이 통제되었던 청와대 앞길과 인왕산을 개방하였으며, 동년 7월 1일에는 10.26 사건의 현장이었던 궁정동안전가옥을 헐고 그 자리에 공원을 조성하여 '무궁화 동산'이라 이름지었다.

그 외에도 1993년에는 특전사 예하 근접 경호부대였던 27특공대를, 1996년에는 특정지역 외곽 경비부대인 수방사 30경비단을 해체하였다. 이들 부대는 과거 군사정권 시절 하나회 멤버들의 요직이기도 했으며 문민정부는 군사정권 잔재 청산 및 하나회 척결 차원에서 이들 부대를 해체하고 경찰에 그 역할을 넘기게 된다.

전국에 5군데나 있던 이른바 '지방 청와대'라 불리는 대통령 별장을 청남대와 거제시 저도의 청해대만 남기고 모두 용도 폐기 후 해당 지자체로 이양했다. 청해대는 해군 휴양시설로 1993년 대통령 별장에서 공식적으로는 해제되었으나, 2013년 현재까지도 해군이 관리하며 대통령 휴가가 없는 시기에는 해군 병과 그 가족들이 쓴다고 한다. 참여정부 시절 청남대가 지자체에 반환되어 시민에 개방 된 뒤부터는 주로 청해대로 휴가를 많이 떠나며, 이명박 전 대통령이 특히 즐겨 찾았다고 한다.

5.3 국민의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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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2월 안주섭 예비역 중장이 대통령경호실장에 임명되었고, 유일하게 김대중 대통령의 5년 임기를 같이 했다.

국민의 정부 시기 경호실의 가장 큰 변화는 '경호공무원의 특정직 전환'이라 할 수 있다. 1999년 12월 경호공무원을 별정직에서 특정직으로 전환하는 내용의 대통령경호실법 개정안이 통과되어 2000년부터 경호공무원도 판사, 검사, 군인, 경찰, 소방, 국가정보원 직원과 같은 특정직 공무원으로 신분과 정년을 보장받게 되었고 이 때부터 신규 임용되는 경호공무원은 모두 7급으로 공채하게 되었다.

더불어 경호공무원에 무도인의 진출이 줄어들고 명문대 출신이 늘어나기 시작한 때도 이 시기이며 미국 SS와의 교류도 늘어나서 외국어에 능통한 경호공무원도 늘어난 것은 물론 SS의 경호 철학과 노하우를 접목하여 경호 체계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덕분에 2000년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과 역사상 최초로 26개국의 국가 수반이 한국 땅에서 한 자리에 모인 아시아 유럽 정상회의(ASEM. 이 2000년 ASEM회의 이전까지 복수의 외국 정상이 한국 땅을 밟은 일이 없었는데 이는 경호 미비로 국가원수가 사망한 10.26 때문에 더 그렇기도 했다), 2002 한일 월드컵 등 범국가적인 대형 행사를 큰 사고 없이 치러낼 수 있었다. 그 외에도 1998년 5월부터 단체에 한하여 허용되던 청와대 경내 관람을 개인에게까지 확대했고, 2001년에는 칠궁도 개방하였다. 칠궁(七宮)은 조선 500년 동안 아들이 왕위에 오른 후궁 7명을 모신 사당으로 궁정동에 위치하는데 1.21사태 이후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었다.

이 시기의 수치스런 역사로는 1999년 6월 3일 김포공항에서 일어난 김영삼 페인트달걀 투척사건이 있다. 김영삼이 김포공항에서 일본으로 출국하는 길에 박의정이라는 70대 노인이 투척한 적색 페인트가 든 달걀을 맞은 사건으로 당시 경호를 경호실이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치가 맞다. 범인 박의정은 법원에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다.

5.4 참여 정부

사상 최초로 경찰공무원 출신의 김세옥경찰청장이 경호실장으로 임명되었으며 대선 공약이었던 청남대 반환 및 개방이 출범 직후 실현되었다. 뿐만 아니라 1.21사태 이후 통제되어 왔던 북악산 권역 중 숙정문과 촛대바위 권역을 2006년 4월 1차로 개방한 데 이어 북악산 정상을 포함한 전 권역을 2007년 4월 개방하였으며, 도로 교통의 불편을 우려하여 헬기 이동을 늘리는 등 좀더 탈권위적인 경호를 표방하기 시작했다.

경호공무원 채용에도 변화가 생겨서 경호공무원의 학력 및 병역 제한을 완화하고 최초의 여성 경호공무원 공채를 2004년에 실시하였다. 2000년 ASEM 회의에 이어 2005년 21개국 정상이 참석한 아시아 태평양 정상회의(APEC)을 개최함에 따라 APEC 경호안전통제단을 구성하여 방한 정상들과 행사장 경호경비를 주관하였으며, 2007년에는 2차 남북 정상회담을 치렀다.

참여정부 시기 경호실이 직면한 가장 큰 사건은 2004년 일어난 사상 최초의 대통령 탄핵 사태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고건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 대행에 취임하였으며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이 기각되어 노무현이 대통령 업무에 복귀한 5월 14일까지 경호실은 사상 최초로 대통령 권한 대행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호를 실시했다. 이 당시 대통령경호실법에는 대통령 권한 대행의 경호에 대한 사항이 명문화돼있지 않아서 법 제3조 제①항 4호 '경호실장이 특별히 호위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국내외 요인' 규정에 따라 경호를 실시했다가 2005년 대통령경호실법을 개정하여 대통령 권한 대행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호를 법에 명문화했다.

2005년 11월 25일 '경호활동에 대한 총괄 지원업무' 분야에 대하여 ISO 9001 인증을 획득하였다. 그리고 2007년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국제경호책임자협회' 총회를 계기로 경호실의 경호 노하우를 배우고자 하는 외국 경호기관들이 늘어난 결과, 카타르 왕실 경호대와 베트남 경호 사령부 등의 수탁 교육을 시작으로 경호 노하우 수출의 길이 열리기 시작하였다.

임기 말인 2007년 3월 김세옥 경호실장의 후임으로 경호공무원 출신의 염상국 경호실 차장이 임명되었다.

5.5 이명박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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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범 직후 독립 기관으로 존재하던 경호실을 대통령실(전 대통령비서실) 산하의 경호처로 격하(장관급이던 실장도 차관급인 처장으로 격하)하였으며 '대통령경호실법'도 '대통령 등의 경호에 관한 법률'로 바뀌었다. 이 과정에서 경호실의 격한 반발이 있었으나 결국 데꿀멍. 관련 기사 그리고 김인종 전 2군사령관을 경호처장에 임명하였다.

2009년 노무현, 김대중 두 전직 국가원수의 국장(노무현의 경우 국민장) 행사와 2010년 2010 G20 서울 정상회의, 2012년 2012 서울 핵안보정상회의 등의 큰 행사를 치렀다. 그리고 북악산 권역이 개방되었음에도 1.21사태 이후 계속 개방되지 않고 있던 우이령 권역을 2009년 7월 10일자로 개방하였다.

2011년 4월에는 전직 대통령 및 가족의 경호 기간을 퇴임 후 7년에서 10년으로, 임기 만료 전 퇴임한 경우나 재임 중 또는 퇴임 후 사망한 경우는 2년에서 5년으로 경호 기간을 연장하는 것으로 '대통령 등의 경호에 관한 법률'이 개정되었다.

참여 정부 말기부터 시작된 경호 노하우 수출도 본격화되어 경호안전교육원에 '국제경호안전과정'을 개설하였고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요르단, 아랍에미리트 등 국가의 경호 관계자들에 대한 수탁 교육을 실시하였다. 2011년 4월 15일에는 러시아와도 경호 교류 협정을 체결하였다. 관련 기사

2011년 10월 어청수 전 경찰청장을 경호처장에 임명하였다. 에라이

5.6 박근혜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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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가 출범하면서 대통령실을 다시 대통령비서실로 환원하였고 경호처 역시 다시 독립기관인 대통령경호실로 승격, 환원되었으며 경호실장의 직급도 경호처 설치 이전과 마찬가지로 장관급으로 승격되었다. 이는 부모님을 모두 암살로 잃고 본인도 테러로 중상을 입었던 박근혜 당선인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조치라고 하며, 이로 인해 대통령령인 대통령비서실 직제와 대통령경호실 직제 등 관련 법령도 따로 만들어졌다. 경호실 부활 후 첫 경호실장에는 박흥렬 전 육군참모총장이 임명되었다.에라이22

6 나무위키에 항목이 개설돼 있는 역대 경호실장

제2대 경호실장.
제3대 경호실장.
제4대 경호실장.
제5대 경호실장.
제6대 경호실장.
제7대 경호실장.
제10대 경호실장.
  1. 차지철 항목 참조.
  2. 이에 대해서는 박정희 대통령이 연회장에서 술맛 떨어지니 차지철에게 권총을 휴대하지 말라고 했다는 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