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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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俊淵
1895년 3월 14일 ~ 1971년 12월 31일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며 호는 낭산(朗山)이다.

1895년 전라남도 영암군에서 태어났다. 영암보통학교, 경기공립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가서 제6고등학교(오카야마),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독법과를 졸업하였다. 1922년부터 1924년까지는 베를린대학에서 정치와 법률학을 연구하였다.

1925년 조선일보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근무하다가 귀국하여, 1926년부터 신간회에 참여하였다. 1927년 보성전문학교의 강사가 되었다. 1928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재직할 때 제3차 공산당 사건(세칭 ML당 사건)에 관련되어 7년 동안 복역하였다. 출감 후 1934년 동아일보에서 주필을 지냈다. 1936년 손기정일장기 말소사건에 관련되어 사임한 뒤, 8.15 광복 때까지 경기도 연천군 전곡면에서 해동농장을 관리하였다.

8.15 광복 후인 1946년 한국민주당 상무집행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민주당 후보로 전라남도 영암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며 1949년 민주국민당 상임당무위원이 되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대한국민당 류인곤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같은 해 대한민국 법무부 장관을 지냈다. 1952년 이긍종 국회의원의 별세로 치러진 연기군 재보궐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이범승 후보에 밀려 낙선하엿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6년 민주당 최고위원과 유엔 한국대표를 역임하였다. 1957년 갑자기 이승만 지지를 선언하며 민주당을 탈당하고 통일당을 조직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0년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 부통령에 출마하였다. 같은 해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5.16 군사정변 후인 1963년 자유민주당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 같은 해 치러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라남도 영암군-강진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이 한일기본조약 추진 과정에서 일본으로부터 금품을 수수하였다는 발언을 하였다가, 민주공화당에 의해 그의 체포동의안이 발의되었다. 그러나 민주당 김대중 의원의 필리버스터로 무산되었다. 1967년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군소정당인 민중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이후 같은 해 치러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중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윤재명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선거종류소속정당득표수(득표율)당선여부비고
1948제헌 국회의원 선거 (전라남도 영암군)한국민주당-당선
1950제2대 국회의원 선거 (전라남도 영암군)한국민주당-낙선
19521952년 재보궐선거 (충청남도 연기군)민주국민당-낙선
1954제3대 국회의원 선거 (충청남도 연기군)민주국민당-당선
1958제4대 국회의원 선거 (충청남도 연기군)통일당-당선
1960제4대 대통령 선거 (부통령)통일당249,095 (2.36%)낙선 (3위)3.15 부정선거로 무효화
1960제5대 국회의원 선거 (충청남도 연기군)통일당-당선
1963제6대 국회의원 선거 (전라남도 영암군-강진군)자유민주당-당선
1967제6대 대통령 선거민중당248,369 (2.2%)낙선 (4위)
1967제7대 국회의원 선거민중당-낙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