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전쟁/배경

1 일본의 상황

러일전쟁 직후의 일본은 워낙 승리가 화려했던 탓에 외부적으로 열강의 대열에 합류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애초에 중공업 생산 기반이 변변찮고, 농업 기반의 국가였던 당시의 일본은 스스로 해결 불가능한 수준의 막대한 전비와 후유증을 떠 안게 되었다. 몇 년치 예산에 해당하는 전비를 쏟아부었는데, 그 돈의 대부분은 영국과 미국에서 차관(빚) 형식으로 들어왔다. 무엇보다 러일전쟁이 결과가 일본의 승리이기는 한데, 그렇다고 일본이 완전히 이긴 것도 아니어서 장기적으로 가면 불리하다는 애매한 상태로 종결되었기 때문에 러시아는 배짱을 튕기며 단 한푼의 배상금도 지불하지 않을 수 있었고, 일본 입장에서는 조선에 대한 지배권, 남만주의 이권 확보를 제외한다면 사실상 얻은 것이 없었다. 더 자세한 내용은 러일전쟁 항목을 참고하도록 하자.

그 와중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연합군에 참전은 했지만 유럽 반대편에 있던 국가라서 독일령 남양 군도 점령한 것 말고는 군수공장 역할만 충실히 수행했다. 덕분에 1차대전 종전이후 승전국으로서 세력 확장은 물론이고 전후에는 호황세에 접어들면서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시작되는 등 안정세를 되찾는 듯 보였고, 1921년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에 참여하는 등 열강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20년대 말 부터 터진 세계 대공황으로 전 세계가 그렇듯 일본도 대 혼란에 빠지는데, 그 해결책이 독일처럼 군수산업을 통한 부흥책이었다. 때문에 군대의 정치적 입김과 파워가 막강해지고 결국 군부는 5.15 사건으로 총리를 살해하는 등 폭주하다가,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2.26 사건이라는 쿠데타를 벌이고, 도조 히데키가 정권을 잡으면서 완벽한 군국주의 국가로 변모하게 되었다.

즉, 그 당시 일본의 내정 상황은 경제대공황 때에 모두 어떻게 해결해야 할 지 몰라서 쇄국정책으로 펼쳤지만, 오히려 점점 경제가 하락세로 치닫자 만만한 남의 나라의 것을 빼앗아서 살아남자 라는 대전략을 세우는 꼴이 되었다. 요약해서, 군비강화 → 적당한 나라 털어먹기 → 털어먹은 돈으로 군비강화 였는데, 러일전쟁에는 오히려 엄청난 양의 손해만 보았고 인구는 2천만에 육박하는데 자원도 변변찮은 조선은 생각만큼 돈이 벌리지 않는 식민지였고[1][2], 기껏 사탕수수 농장으로 돈 좀 벌리는 대만은 이미 털어먹어서 더 나올 구석이 없었다.

그리고 일본은 이런 경제구조상 자신들의 군수물자를 소비할 시장(?)을 찾게 되고 또 털어먹을 데가 없을까 하고 열심히 검색을 때려 보다가 그 목표로 선정된 것이 중국이었다. 결국 오랜 옛날의 숙원인 만주사변으로 괴뢰국 만주국을 세워서 만주를 사실상의 식민지로 만들었고, 1937년에는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만다. 물론 이 과정도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청일전쟁 당시의 막장 중국군만 기억하던 일본군은 중국을 매우 만만한 상태로 여겨서 만주 군벌 장쭤린이 매우 친일적인 성향을 보였음에도 번번히 도발 행위를 벌여왔고 장쭤린이 북벌에 밀려 만주로 도로 쫓겨오자 황구툰에서 장쭤린을 폭사시키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은 장쉐량 역시 친일정책을 유지했음에도[3] 그를 배신하고 털어먹었다.

이후 만주사변, 또 다시 러허 사변에서도 너무도 쉽게 만주를 침탈한 일본군은 그런 식으로 이번엔 화북을 먹기 위해 찔러본 것이 루거우차오 사건이었는데... 그동안 일본에는 지나치게 저자세를 취하면서 공산당 토벌에만 혈안이 되있다는 비난[4]을 듣다가, 서안 사건으로 감금당하는 굴욕까지 겪었던 장제스 국민당 주석은 태도를 바꿔서 전면적인 대일항전을 선언하였다. 장제스는 루산 담화를 통해 전 중국이 힘을 합쳐 일본에 항전할 것을 선포했고 일본군은 중국군의 차원이 다른 저항에 직면했다. 3개월이면 지나의 항복을 받아내겠다고 큰소리를 치던 일본은 3개월이 지나서 상하이를 겨우 점령했을 뿐이었고 3차례나 증원군을 파견해야 했을 정도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기강이 엉망이던 각지의 군벌은 일본군에 박살나거나 아예 투항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수준급 무장을 갖추고 독일군 군사고문의 엄격한 훈련을 받은 장제스 직할의 중앙군 부대들은 밀리는 와중에도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뜻밖의 큰 피해를 입은 일본군은 눈이 뒤집혀져서 확전하지 말라는 상부의 명령을 무시하고 난징으로 몰려가 대량 살육을 저질렀고 중국과 일본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일본군은 중국국민당 중앙정부와 중국공산당 그리고 각지의 군벌로 사분오열된 중국을 얕잡아봤지만[5], 국민당군의 결사적인 항전과 각지의 반일세력, 공산당 유격대의 저항 때문에 전쟁을 끝낼 수가 없었다. 상하이를 포함한 서부연안지대를 점령하고 우한광저우를 함락시키는데 성공했으나, 병력과 물자의 한계에 부딪혀서 더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일본군은 수차례나 국민당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중국 서부 오지에 대한 무리한 공세를 감행했으나 모두 실패하였고, 1939년에는 오히려 중국군의 거센 공세를 받기도 했다. 1944년 일본군은 병력과 물자를 긁어모아서 대륙타통작전을 시행하여, 화중, 화남의 곡창지대를 점령하고 국민당 정부가 위치했던 충칭 인근까지 도달하면서 중국군에 심대한 피해를 주었지만, 전쟁 자체를 끝내지는 못하였다.

게다가 거대한 점령지 통제와 어마어마하게 넓은 전선을 관리하기 위해 그간 소수정예를 추구하던 일본군은 걷잡을 수없이 폭증했고 이에 천문학적인 군사비가 펑펑 들어가게 됐다. 이런 식으로 엄청난 돈과 목숨을 쳐들이다 보니까 이젠 발을 뺄 수도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 게다가 공산당 유격대 및 항일 지하조직들의 게릴라전으로 인해 점령지도 제대로 관리가 안되는 판이었다.

2 일본의 경제봉쇄

게다가 중국에 대한 계속 침략으로 가뜩이나 안 좋은 시선을 받던 일본은 난징 대학살 등 온갖 전쟁범죄에 앞장선 결과, 국제적인 압력을 받는다.

무엇보다도 거대한 영토와 인구와 각종 자원이 풍부한 중국은 모든 서구 열강이 아시아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지역이다.[6]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가진 최대의 소비시장이자, 최고의 생산기지인데 이렇게 거대한 중국을 Jap들이 혼자서 독점하겠다고 무리한 군사적 침략을 계속하면서 박살내 버린 것이다. 상징적으로 당시 중국에서 가장 번성했던 상하이는 영국, 미국, 프랑스 자본이 수십년 동안 막대한 돈을 투자해서 개발한 지역이었는데 일본군이 여길 박살을 내버렸다. 또한 일본군은 국민당의 주요 무기 수입처인 버마 로드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봉쇄하기 위해 무리하게 하이난 섬을 공격했고 중불국경을 폭격함으로 프랑스의 재산과 인명 손실까지 야기하여 영불의 어그로를 끌었다. 이 때문에 프랑스 3공화국은 크게 화를 내며 일본의 압력 때문에 설정했던 대중국 무기 수출 제한을 풀어버렸고 중불국경에 대한 방비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일본과 영국, 미국의 사이가 틀어지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영국이 중국의 항전을 지원한다는 말이 일본 내에서 나돌며 반영감정이 솟아났다. 이를 시작으로 텐진에서 영국 조계를 포위한 채 통행하는 영국인을 일본 군인이 옷을 벗기며 수색함이 드러나자 영국 내에서도 반일감정이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영국은 독일이 체코를 합병하는 상태에서 시시한 문건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고, 일본이 제안하는 모든 항목을 수락하며 중국에 대한 어떠한 원조도 하지 않겠다는 조약을 맺고서 이는 일단락 되는듯 했다- 다만 이것은 단지 폭풍전야였으니.

영국 내에서의 반일감정은 그래도 수그러들지 않았고 미국이 영국을 동정하며 관심도 없던 아시아에 관심을 보이며 반일감정이 악화되기 시작한다. (일본도 똑같이 반영감정이 수그러 들지 않았다.) 그로 인해 미국과 일본이 1911년 이래 유지해왔던 미일통상항해조약에 대해 1939년 조약을 연장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미국에서 밝혀 왔다. 그리고 국교조정회담에서 일본이 중국을 침공함으로써 미국 경제에 막대한 피해를 주고 있다는 입장을 밝힌다. 이에 대해 일본에서는 강경한 반발 입장을 유지했고 1940년을 기해 미일통상항해조약은 해지된다.

더욱이 이 시기 일본은 동남아시아에 눈독을 들이는데 이유는 본래 일본의 주적이던 소련과주적이 뭐 이렇게 많아? 1939년에 할힌골 전투를 벌였다가 개박살 난 후 일본은 소련과의 전쟁은 최소 2년의 준비기간이 필요하다고 결론을 내리고 러일전쟁이후 품어오던 북진정책을 거두고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반대로 새로운 전쟁을 준비하려던 찰나 거기서 눈을 돌려 남방을 노리게 되는데 자원도 풍부한데다가 때마침 식민지를 통치하던 유럽국가들의 상황이 개판[7]인지라 소련보다 방어도 느슨해서 쉽게 먹을 수 있는 땅덩어리였다.

1940년 일본은 일본 제5사단을 인도차이나에 진군시켰고 그 유명한 추축국 동맹인 삼국 추축 동맹을 체결한다. 이 삼국동맹은 소련을 겨냥한 1937년의 삼국방공혐정과 달리 당시 일본과 독일은 소련과 각각 중립조약과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고 있었기에 이 동맹의 겨냥점은 미국과 영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거기에 즈음 독일이 네덜란드를 공격 함락시키자 일본은 남방에 있는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를 압박하면서 인도네시아에서 생산되는 90%의 물자 독점권을 요구했고, 프랑스가 함락되고 괴뢰국 (비시)프랑스가 들어서자 일본은 인도차이나로 들어가던 중국의 보급물자 공급을 막는 동시에 프랑스의 식민지를 압박했고, 나중에는 일본은 동남아시아에 병력을 주둔시켜서 완전히 삼킬 야욕까지 내비치기 시작했한다. 결국 미국은 이에대한 보복으로 중국에 1억달러의 차관을 제공하였고 영국 역시 1만 파운드의 차관을 중국에 지원한다.하지만 일본은 미국이 압력과 경고를 줘도 일본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마냥 설쳐댄다.

1941년엔 결국 미국(America), 영국(Britain), 중국(China), 네덜란드(Dutch)[8] 이 4개국은 일본에 전략물자수출을 금지하는 소위 말하는'ABCD 포위망'을 형성시켰다. 이것이 일본 입장에서는 치명타였는데, 전력물자에는 당연히 석유도 포함되었고, 당시 일본 전체 석유 수입의 80% 이상을 미국에서 수입하는 상황이었다는 것.[9] 당시 일본은 석유재고량은 평시 3년분, 전시 1년 반이었고, 중일전쟁중이라 석유가 더 필요한 상황인데 미국의 석유수출 금지는 일본에게 치명타였다.

여담 비슷한 이야기지만, 십여년 전에는 적백내전에 참전하여 3만에 달하는 사상자[10]를 내고 북사할린 유전 개발권을 얻었는데 블라디미르 레닌이 죽고 나서 흐지부지 되어 버린 일도 있었다.

결국 일본은 미국과 교섭을 시도하고, 1941년 11월 26일 미국국무장관 코델 헐과 주미일본대사 노무라 기치사부로사이에서 협상을 벌인다. 미국은 추축동맹 파기, 점령지의 군경 철수 및 이권포기, 만주국의 해체 등을 내걸었다. 하지만 일본은 협상자리에서 미국은 유럽의 전쟁에 중립을 지키고 태평양에서 일본의 팽창을 묵인할 것, 만주국의 승인, 경제 협력 강화, 필리핀의 독립을 보장할 것, 중국이 중일전쟁에서 항전을 포기하도록 공동으로 압력을 가할 것 등 한마디로 일본에게 끼어들지 말라는 정신나간제안을 했다. 이에 미국은 만주국은 승인하되 중국에서의 철수와 동남아에 대한 침략을 중지하라는 타협안을 내놓지만 일본은 타협은 없다 라는 자세를 유지 Yes와 No 둘 중 하나만 선택하라는 압박을 넣었다. 당시 일본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인 추축동맹 파기, 점령지의 군경 철수 및 이권포기, 만주국 해체 등을 내걸며 석유금수조치를 취한 미국의 강경노선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태평양 전쟁이 독일의 상승세에 자극받아 아시아-태평양권을 홀랑 집어 삼키려던 일본의 야욕에서 비롯된 결과라는 점은 변함없다. 못된 짓을 하지 말라고 경고했는데도 이걸 씹고 만행을 벌이다가 처지가 안좋게 되니까 협상을 하자는데, 그 동안 만행으로 턴 재산과 권리는 다 가지고 간다는 작자가 과연 정상적인 자인지 생각해보자.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고 일본은 전쟁을 계속하기 위한 자원을 얻기 위해서는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여서 경제봉쇄를 풀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고 누구도 예상못한 초특급 이벤트를 준비한다...

3 미국을 공격한 이유

사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그때만 해도 미국은 '열강 중의 하나'라는 정도의 이미지로, 미국이 스스로 의도 혹은 자초한 결과이기도 하였다. 물론 공업 생산량이나 경제 규모로 보나 여러가지 측면에서 미국대영제국을 뛰어넘은 것은 훨씬 전이었으나, 대외적으로 미국이 초강대국이라는 이미지가 형성되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미국은 이미 20세기 초반에 영국과 프랑스, 독일 등 유럽열강을 모두 합한 정도의 경제규모에 도달했지만, 스스로 세계 최강국이라는 인식이 부족했다. 17세기부터 내려온 서유럽 중심의 세계 패권 경쟁에는 도전하지 않으면서 미서전쟁으로 쿠바푸에르토 리코, 그리고 태평양 지역의 몇 개 섬을 획득하는 선에서 만족하고 있었고 앞마당인 카리브해와 중남미 지역에서만 골목대장 놀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먼로 독트린을 스스로 깬다는 것은 여러모로 도전(한마디로 '손해')이기도 했다. 미국은 중남미와 태평양 지역의 패권만 유지해서 본토의 안전만 확보하면 된다는 고립주의 노선이 득세하게 된 것이다. 실생활에서 실천하는 복불복 정신, "나만 아니면 돼!!!" 나치 독일의 팽창에 대해서도 대체로 불간섭주의 위주였다.[11][12] 그래서 일본이 독일과 동맹을 맺고 미국에 도전했던 것이다. 다만 간과한 것이 있다면 태평양 지역은 바로 미국의 직할 영토이며, 이는 미국의 안전과 직결되므로 고립주의자들도 어떻게든 사수하려고 했던 지역이었다는 것. 당시 세계 최강국은 자타공인 해가 지지 않는 제국 대영제국이었는데, 이쪽은 독일과의 전쟁으로 정신이 없었다.

덤으로 일본에서 대미 경계론이 먹히지 않았던 것은, 추축국 독일의 기세가 워낙 강세였기 때문이다. 독일은 열강국 가운데 하나였던 프랑스를 완전히 먹어버리고, 다른 유럽 국가들을 모조리 짓밟아 유럽의 패자로 떠오르고 있었다. 남은 적은 오직 영국소련 정도였다. 그나마 영국은 섬에 틀어박혀서 독일의 공습을 겨우겨우 막아내는 처지였고, 소련은 독일에게 탈탈 털리는 시점이었다. 즉, 독일의 세계 정복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고, 일본 역시 여기에 숟가락을 얹어야 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이러한 세계정세와 분위기에 막연하게 편승하려는 생각만 강해 구체적으로 추축국간의 긴밀한 공조를 꾀하려는 노력이 부족했는데, 일본과 싸우는 중국이 독일한테서 독일제 무기를 받아 싸웠다던가, 일본이 소련을 후방에서 공격해줄것이라고 막연하게 기대했던 히틀러같은 경우를 보면 동맹을 꾀했지만 정작 그 동맹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비젼조차 없고 그저 서로에게 은연 중 기대하는것에만 그쳤던 엉성한 결속력으로 그저 독일이 지금 압도적이니 자신들의 전선에도 뭔가 좋은 영향이 있을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은게 잘못이었다. 정작 독일은 소련도 정복이 목표가 아니라 우랄산맥 동쪽으로 쫓아내 위협을 제거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미국 정복 따위는 생각도 안 하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결정적으론 미국과 미국의 여론에 대한 심각한 오판을 했다는 점이다. 일본의 시각에선 미국은 당시 경제 대공황으로 경제의 뿌리까지 흔들리고 있었기때문에 전통적으로 미국 스스로를 옭아매고있던 먼로 독트린과 맞물려 미국을 더욱 고립주의 성향으로 빠뜨렸고 또한 유럽을 바라보는 미국민들의 원망어린 시선 역시 컸다. 미국 국민들의 인식은 당장 자신들이 겪고있는 경제 대공황도 세계 1차대전이라는 유럽동네 쌈박질에 참견했다가 얻은 병이라는 인식이 있었고, 아직 그때의 무기랑 빚도 갚지 못했으면서 그새를 못 참고 또 다시 전쟁을 벌이는 유럽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때문에 유럽 전체가 불바다가 되는 상황에서도 미국 내 여론은 극소수 루즈벨트파를 제외하면 국민,의회 모두 절대적으로 참전반대.고립주의노선 여론이 압도적이었다. [13]

가뜩이나 그간 여러 전쟁을 겪고 호전적으로 변한 일본의 눈에 먼로 독트린을 표방하는 미국은 제대로 된 전쟁 한번 겪어본적 없는, 힘이랑 덩치만 큰 겁쟁이아메리카 대륙의 소심한 히키코모리라는 인식이 자리잡게 되었는데, 거기에 까지 걸려서 골골대고 있는 판이었기 때문에 자기들이 선제공격을 해서 미 태평양 함대주력을 일거에 소탕해 기선을 제압한다면 저자세로 협상해올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앞섰던것. 덤으로 섬나라로 출발해 청나라와 러시아를 차례차례로 격파해 현재에 들어 대륙에 손을 뻗는 열강축에 들어섰다는 자부심은 일본을 더욱 근거없는 자신감으로 가득차게 했고, 노력과 근성으로 청나라와 러시아를 이겼던것처럼 이번에도 노력과 근성으로 미국을 상대할수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 그리고 자신들이 근대화의 여정의 끝에 도달하기위해 넘어야될 마지막 산으로써 100년전 자신들을 개항시킨 미국을 지목함으로써 격세지감과 같은 환상에 빠졌던것일지도 모른다.미국 : 나는 너희의 시작이었으니..또한 끝이리라. 설령 예상과는 다르게 참전해온다고해도 미국 내 고립주의 여론이 너무 절대적이었던지라 전쟁이 나도 민주주의 국가 특성상 여론에 발목이 잡혀 제한적으로 일어날것이라는 예상이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끌고가면 일본이 불리할테지만, 한편으론 미국 입장에서도 미국내 반전여론에 의해 대선을 의식한 루즈벨트가 전쟁을 중도에 포기할지도 모른다는 기대에서였다.

또한 미국과의 전쟁무대는 태평양이라는 점이다. 드넓은 태평양에서 싸울려면 해군없이는 성립이 안되는데, 미 태평양 주력함대에게 어떻게든 기습을 가해 치명상을 안겨 잠시만이라도 해군력에 공백을 만들어버릴수있다면, 국력과는 무관하게 미국이 자신들에게 건너올 수단이 당분간은 없어지는 셈이니 그 사이 남방작전으로 동남아 일대와 미국령 필리핀을 점령해버리고 태평양의 주도권을 선점한뒤 점령지의 방어선을 굳혀 방어전 위주로 버틴다면, 미국이 뒤늦게 함대를 재보강해 반격을 펼치려고한들 이미 필리핀을 포함해 대부분이 넘어가버린 전선에 경제 상황도 최악인 미국이 아주 손을 떼버릴수도 있다는 판단도 있었을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반응은 일본이 예상했던것과는 정반대, 아니 그 이상이었다. 오랜 경제 공황과 굶주림에 찌들어 냉소적이고 소극적인줄로만 알았던 국민들이 일본의 파멸을 외치며 성인 남성들의 자진입대율은 90%로 치솟았고[14] 국회는 사실상 만장일치[15]로 국민.정부 모두가 순식간에 일본과 추축국에 대한 응징으로 태도를 바꿔 전쟁에 참전했다. 아메리카대륙의 히키코모리가 전쟁깡패, 세계의 경찰로 거듭나는 순간

4 대미 전략

일본의 군부는 연합국에게서 조건부 항복을 끌어내려 했습니다. 조건부 항복을 끌어내려면 연합국에게 한번은 심한 타격을 줘야 한다는 게 일본의 생각이었어요. 그 후에 평화협상을 하려 한 거죠.

-'2차 세계대전 종전 70주년 기획 다큐 5부 태평양 전쟁' 중 켄 고타니(일본 방위성 방위연구소 강사)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41년 일본에선 미국과의 총력전을 구상하고 준비 과정과 예상 결과를 파악하기 위해 젊은 엘리트 인재들을 모아 총력전 연구소를 설립해 연구하게 한 바 있다. 연구진들이 내린 결론은 당연하게도 '일본의 필패'였다. 연구진들은 일본의 공업 생산력과 자원, 특히 석유의 생산 및 수송 능력[16]을 볼 때 도저히 미국을 총력전으로 이길 수 없다고 정확히 판단하였다. 이 결과를 보고받은 도조 히데키는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책상에서 이루어진 연습으로서, 실제 전쟁이라는 것은 제군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다릅니다. 러일전쟁에서 우리 대일본제국은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지요. 하지만 이겼습니다. 그 당시에도 열강에 의한 삼국간섭으로 어쩔 수 없이 제국은 일어선 것이지, 이길 수 있는 전쟁이라고 생각해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쟁은 계획대로 되지 않지요. 생각 밖의 일이 승리로 연결되어 갑니다. 따라서 제군이 생각하는 것은 책상 위 공론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어디까지나 그 의외성이란 요소를 고려한 것은 아닙니다. 또한 이 책상연습의 경과를 제군은 경솔하게 입 밖에 내서는 안 됩니다."

쉽게 표현하면 "그 전에 한 전쟁도 어찌어찌 이겼잖아? 이번에도 될거야." 인 것. 국가의 최고통치자가 이런 발언을 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일본군이 얼마나 전쟁에 대해 안일한 생각을 하는지를 알 수 있다. 러일전쟁은 사실 러시아의 세력확대를 견제하기 위해서 미국과 영국 두나라가 일본을 내세워서 치른 대리전쟁에 가깝다. 또 하나 당시 러시아의 차르 정권은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도저히 전쟁을 지속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차르 입장에선 후방의 러시아 민중들 그리고 전선의 병사들에게 희생을 강요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종전을 결정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전후 상황을 모두 무시하고 그저 우리 황군이 잘해서 이긴 것이라고 자뻑한 것이다.

더구나 일본은 미국이 제대로 빡쳐서 나올 경우, 얼마나 무서워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다. 당장 야마모토 이소로쿠 연합함대장관이 진주만 공습의 성공을 보고받은 후 "어쩌면 우린 잠자고 있던 거인을 깨운 것인지도 모르겠군."이라고 독백을 한 것과 상당한 대조가 된다.

일본은 이미 1937년 중일전쟁의 늪에 빠져서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는 상황에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또 다른 적을 공격하는 것은 양면전쟁을 스스로 일으키는 무모한 행동으로, 군사학이나 병법까지 찾아볼 것도 없이 2:1로 싸울 때 어떤 편이 유리한지만 생각해 봐도 미친 짓이라 하기에 충분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미국유럽태평양에서 양면전선을 형성했고, 이기기까지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미국이니까 가능한 것이고 태평양과 유럽에서 필요로하는 군종이 다른점도 있었다.[17]게다가 독일이 이미 멍청하게 소련을 침략하면서 동부전선으로 엄청난 전력이 투입되어 있기도 했고.

5 만약 일본이 미국이 아니라 소련을 쳤다면

사실 당시 일본이 전략적으로 선택해야 할 최적의 선택지는 미국이 아니라 소련이였다. 당시 소련은 히로히토의 친구놈인 히틀러가 기습공격을 해서 폴란드에서 모스크바 까지 소위말하는 개돌을 하던 상황이였다. 덕분에 소련은 인구 대다수가 있는 우랄산맥 서쪽 대부분을 잃은 상황이였고 때문에 몇년 전과 달리 일본군이 털릴 위험이 적었다고 하지만 일본군이 공세를 취하기엔 곤란한것이 중국전선으로 끊임없이 투입되는 병력과 물자의 문제로 소련에 의한 공세를 취하기엔 무리가 많았다.

그리고 일본이 시베리아를 거쳐 모스크바로 진격할 능력이 없다고 반론이 있지만, 사실 일본군은 모스크바까지 진격할 필요가 없었다. 일본이 소련을 잡기위해서는 모스크바가 아니라 코앞의 블라디보스토크만 점령하거나 하다 못해 원래 우세했던 해군력으로 항구만 봉쇄하면 그만이였다. 2차대전때 소련으로 가는 렌드리스의 미국 물자는 대부분은 블라디보스토크에 내려주는 상황이였는데(영국에서 만든건 주로 이란으로 내려줬다)[18] 만약 블라디보스토크를 봉쇄한다면 랜드리스의 절반은 봉쇄하는 상황이였고 이렇게 된다면 소련의 생명줄을 막아 승전이나 적어도 추축국에게 훨씬 유리하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미국 루즈벨트 입장에서도 반공주의가 심한 미국에서 공산주의자 때문에 참전하기에는 명분도 지지도 부족한 상황이라 미국내 반대 때문에 방관하거나 적어도 가볍게 참전하는 선에서 끝났을 것이다.

더군다나 일본군이 극동에서 소련의 어그로를 잔뜩 끌고 있으면 소련군이 극동의 병력들을 빼내서 유럽 전선으로 빼내는 짓을 못 했을거고, 자칫하다간 모스크바가 점령당할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다.[19] 상징적으로도 그렇고 경제적, 정치적으로도 최고 요충지였던 모스크바를 독일군이 점령했다면 소련은 체계적인 반격의 여지가 거의 남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면 아예 강철의 대원수가 포로로 잡히면서 독일군의 양면전쟁 상황이 해소됐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리고 추축국이 이렇게 승리했다면 동남아시아를 지배하던 프랑스, 네덜란드는 일찌감치 독일이 점령했으니 이렇게 일본은 소련 공격과 동남아시아 식민지를 빅딜해볼만한 상황이였다.

5.1 반론

독소전쟁후 10개사단 이상의 병력이 독일과의 전투를 위해 이동하였지만 여전히 30개 사단이 넘는 소련군이 여전히 극동에 남아있었다. 대소전이 개시된다면 일본군은 개전과 동시에 요새포와 관동군 직할의 대구경포로 시베리아 철도를 차단하고 3일에서 15일 이내에 블라디보스토크.하바로프스크,치타에 대한 공세를 취하여 소련 극동군을 격멸후 바이칼 호 방면으로 주력이 이동하여 서시베리아나 유럽에서 올 소련군과의 결전을 벌여 종전으로 간다는 계획을 잡았지만 관동군 또한 중국의 강력한 저항으로 꾸준히 중국전선으로 인력이 짜내지는 상황에선 도저히 저런 목표를 달성할 가능성이 없었다.

실제로 1940년대 이후 관동군은 후터우나 하이리얼등의 거점요새를 통한 지연 방어로 방침을 변경했다는 점을 보면 일본군은 할힌골 전투 이후 공세적인 계획자체를 포기한 셈이다.

또한 일본 육군은 이렇다 할 적이 거의 없는 만주-동남아시아 전선에서나 선전했지 중국 내륙으로는 진출도 못하던 약체였다. 실제로도 말레이시아 점령 이후로는 인도육군을 상대로도 패전만 거듭했다.[20] 전통적으로 해군이 강한 일본군의 특징을 살리려면 해군이 활약할 여지가 없는 러시아 내륙전선에서의 싸움은 자살이나 다름이 없었으므로 안한 것이 아니라 못한것이라 보는 것이 맞다.

  1. 애초부터 16세기부터 조선은 일본보다 경제력이 딸렸다(인구와 영토를 생각해 보면 당연하다). 게다가 지배층이 수십 년 동안 열심히 망가트려 놨으니...
  2. 알다시피 조선-대한제국은 지지리도 가난한 나라였어서(...) 철도, 항만, 발전소 같은, 근대화를 위한 SoC를 건설하는 투자비용이 왕창 들어가 당장 처음에는 수익도 거의 없었고, 석유같은 전략자원도 별로 없었다.
  3. 세간에 알려진 장쉐량 반일설은 장쉐량이 만주사변까지 처맞은 다음이다. 동북역치, 만주사변 문서 등 참조.
  4. 이것은 국민당군의 공격과 대장정 와중에 위기에 몰렸던 중국공산당의 선전이었지만, 당대 중국내 민족주의 지식인들과 민중들 그리고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입고 있던 각지의 군벌에게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 서안 사건을 촉발시켰다. 일본의 계속되는 영토 침탈, 이권 침탈에 장제스 국민당 정부가 '공산당 토벌'이 우선이라면서 무저항 방침을 고수하는 모습이 중국의 민중과 민족주의 지식인들에게 큰 반발을 사고 있는 상황이었다.
  5. 당시 국민당의 장제스 정권은 명목상으론 중화민국의 중앙정부로 중국대륙 전역의 통치권을 확립했다고 하지만, 실제적으론 중앙정부 주변 지역만 통치하고 있었고, 대부분 지역은 사실상 군벌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군벌들은 중앙정부로 조세수입을 보내지 않았다. 또한 서안 사건 이후로 명목상으론 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졌지만, 공산당 무장부대들은 사실상 별도로 활동하고 있었다.
  6. 18세기 이래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모든 서구 강대국들의 아시아 정책에서 제 1순위는 중국 시장에서의 자국의 영향력을 유지하는 것이다. 한반도와 일본은 중국으로의 접근로 혹은 중국에서 밀려났을 경우에 견제를 위한 근거지로 2순위이다. 이것은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그러며,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7. 프랑스 & 네덜란드: 나치 독일이 점령, 영국: 독일과 본토 항공전.
  8. 당시 네덜란드는 유럽 본토가 독일군에게 털렸지만 본토보다 훨씬 넓은 인도네시아 식민지는 영국으로 망명한 네덜란드 정통정부의 통제 하에 있었다.
  9. 중동의 유전이 개발되기 전이어서 2차대전 당시 미국은 세계적인 산유국이었다.
  10. 병사 대다수가 전투보다는 추위 속에서 얼어죽거나 동상으로 팔다리가 썩어들어가 장애인이 되면서 군인으론 다시 활동할 수가 없게 되었다.
  11. 대표적인 인물이 존 F. 케네디의 아버지로 당시 주영국대사였던 조지프 케네디와 당시 부통령 존 낸스 가너.
  12. 정반대의 경우가 중국으로 서구 열강은 청나라를 '잠자는 사자'라고 생각하여 건드리지 않았으나 아편전쟁으로 청의 유약함이 드러나자 앞다투어 뜯어 먹겠다고 찾아왔다. 그 결과가 오늘날의 홍콩, 마카오.
  13. 그도 그럴게 우리나라로 치면 IMF가 터진 상황에서 북한하고 전쟁을 하겠다고 하는것과 마찬가지인데 어느 누가 함부로 찬성하겠나?
  14. 신체조건미달로 입대불가 판정을 받은 청년이 낙담해 자살했던 일이 있을만큼 미국내 남성들 사이에선 전쟁에 안 나가면 남자도 아니다. 라는 비슷한 인식이 있었던 모양
  15. 평소 반전주의 입장을 고수하고 제 1차 세계대전 때도 반전 운동을 벌인 제닛 렌킨 하원의원 한명 만이 반대표를 던졌다.
  16. 미국으로부터 석유를 공급받을 수 없으니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지역의 유전지대를 개발해서 일본 본토로 수송하는 형태를 가정하였다. 이 총력전 연구소를 분석한 논픽션인 '쇼와 19년 여름의 패전'의 저자는 책에서 이를 두고 '구멍뚫린 양동이로 물을 퍼가는 식'이라고 표현했다.
  17. 미 육군의 주력은 유럽에서 작전했지만 해군의 주력함들은 태평양에서 작전했다. 대서양에서는 크릭스마리네나 이탈리아 해군같은 별 볼일 없는 해군만이 존재했고 동맹국인 영국이 혼자서 저 둘을 바르고 다녔으니... 물론 유보트가 설쳐서 미국한테 대량의 호위항공모함을 얻어가기는 했다.
  18.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자 미국은 렌드리스 물자를 미국 서해안으로 옮긴뒤 소련 배에 옮겨서 날라주는 방법을 써야했다.
  19. 실제로 모스크바 전투 당시 독일군은 크렘린 궁의 첨탑이 보이는 위치까지 진군했다.
  20. 이는 바보같은 지휘관탓도 있었지만 기갑전력이나 보급로도 형편없었고, 야전 장비도 부실했으며 육군 항공대도 없고 제공권도 장악하지 못하는 등 그냥 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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