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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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헌정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소추 국회결의.

2004년 3월 12일 대한민국 16대 국회에서 의결된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결의와 그에 따른 탄핵심판청구사건을 헌법재판소가 기각할 때까지 일어난 초유의 사태.

2 탄핵소추결의안의 상정과 가결

2004년 3월 11일 당시 새천년민주당의 주도로, 한나라당, 자유민주연합 등 야당이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당시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이 강력히 반대하면서 이 때의 상정은 일단 무산되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을 제외한 야당은 반드시 탄핵소추안을 통과시켜야 한다며 국회를 압박했다. 결국 다음날인 12일 국회 본회의장을 점거한 열린우리당 의원들과 이를 풀고자 하는 야당 의원들의 몸싸움이 벌어졌고, 박관용 국회의장이 경호권을 발동하여 열린우리당 의원들을 몰아낸 후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상정하였으며, 열린우리당의 불참 속에 찬성 193명, 반대 2명으로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결의안이 가결되었다.

3 탄핵소추결의의 배경

유감스러운 것은, 한번도 한나라당이 노무현 대통령을 국민의 대통령으로 인정한 적이 없습니다. 지금 이 탄핵 사태가, 어느날 갑자기 발생한 것이 아니라... 제가 이 데이터를 다 찾아왔습니다. 보시면요, 처음으로 탄핵얘기가 나온게 언젠지 아십니까? 작년(2003년) 3월 10일, 취임 14일 후입니다. 왜 했냐? 대북송금 특별법을 거부하면 탄핵 검토하겠다. 이때 시작된 겁니다. 그리고 지난 1년동안 언론에서 보도된것만, 탄핵 관련 발언만 한나라당 민주당 합쳐서 114건입니다. - 유시민, 2004년 3월 11일[1] 백분토론 中

새천년민주당이 탄핵을 주도하게된 배경에는 2002년 새천년민주당 대선 후보 국민경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대중 정권 후반 민주당은 대선 흥행을 위해서 국민경선을 통해 대선 후보를 선출하기로 하고 2002년 3월부터 국민 경선을 시작하게 된다. 2001년 11월 기사를 보면 경선 시작 전 이인제 후보가 1위로 점쳐졌으나 제주특별자치도를 시작으로 경선이 계속될수록 당선권 밖이던 노무현 후보가 돌풍을 일으키며 새천년민주당대선 후보가 된 것. 애초에 국민경선이란게 흥행을 위해서 계획한 이벤트였기에 이인제한화갑정도가 되지 않겠는가 싶었는데 뜬금없이 당내에 비주류중에서도 비주류인 노무현이 대선 후보로 결론이 나자, 민주당 주류 집단으로서는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이리하여 경선이 끝난 후에도 민주당 내에서는 끊임없이 노무현 흔들기가 계속된다.
2002-06-12 노무현 "후보 재신임 받을것"
2002-07-31 후보사퇴 절대 안한다
2002-08-06 노무현 “후보사퇴 안한다”
2002-08-15 反盧 “盧-韓사퇴 서명작업” 親盧 “先사퇴불가…정면돌파”
2002-10-15 민주 노무현 후보, 후보직 사퇴 안해
2002-10-22 [자신감 회복한 盧 '후보 흔들기' 경고장보내며 '개혁 드라이브' 선언]

애초에 노무현이라는 사람이 대학도 안 나온 고졸출신이라 운동권 인맥도 없는데다 전라도 출신도 아닌 말 그대로 진성 비주류였다. 그러니 민주당에서 선거 직전까지 노무현을 끌어내리려고 사력을 다할 수 있었던 것.

이렇게 대선 전부터 노무현과 민주당 간에는 반목이 싹텄고, 대북송금 특검을 계기로 민주당 주류 인사들의 대부분이 몰락하며 돌이킬 수 없는 관계로 치닫게 된다.[2] 사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이 됐다고 한들 행정부 수반으로서 기반이 불안할 수 밖에 없었다.여당인 듯 여당 아닌 야당같은 너 노무현이 당을 새로 만들어서 자기 정치를 하려고 나선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었고 실제로 열린우리당 창당 후 노무현 대통령이 당적을 옮기자 민주당은 닭 쫓던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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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천년민주당은 노무현 대통령이 탈당 후 신당 열린우리당에 가입한 것에 크게 분노하고 있었다.[3] 거기에 민주당은 대통령이 먹튀를 했다고 판단하고 있었는데 대선 때 사용한 경비 44억 원은 고스란히 민주당 몫의 으로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졸지에 야당으로 전락한데다가 열린우리당이나 노무현 대통령은 변제는 커녕 쭈욱 모르쇠로 일관하거나 오리발을 내밀었기에 악감정이 쌓일 수밖에 없었으니 저기서 돈 내놔라라고 피켓을 든게 무리는 아니었다.[4]

그리고, 한나라당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업의 병풍 사건과 민주당 설훈 의원허위사실 유포이회창 후보의 패배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인식하는 터라 노무현 대통령에게 좋은 감정을 지닐래야 지닐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의 원인은 바로 노무현 대통령 본인의 '열린우리당 지지 논란'과 '개헌 저지선 논란'이었는데, 이에 옛 친정 정당격이었던 새천년민주당이 노무현 대통령의 이런 행동에 분노를 표하며 탄핵소추를 제안했고 한나라당자민련의 공조를 얻게 되었다.

당시의 노무현 대통령은 "나의 불법 대선자금이 한나라당의 1/10을 상회하면 대통령직을 사퇴하겠다"[5]며 검찰 측에 사실상의 수사 가이드라인을 내림[6]과 동시에 차떼기 사건으로 조소에 시달리던 한나라당의 약을 잔뜩 올려놨고, "민주당 찍으면 한나라당 돕는 꼴"이라는 발언과 "개헌 저지선이 무너지면 어쩔 수 없다"는 발언으로 논란의 대상이 되었는데 이것이 곧 열린우리당을 지지해달라는 해석으로도 인식됐다. 그리고 방송기자클럽과 가진 자리에서는 "국민들이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을 지지해줄 것으로 기대한다"는 발언이 뇌관이 되어서 새천년민주당, 한나라당, 자유민주연합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거기에 중립을 지켜달라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권고를 "나는 계속 열린우리당을 지지할 것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라고 무시하면서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노 대통령이 권고를 무시하고 중립성을 또 위반하면 한단계 더 높은 수준의 조치를 취할 것이라며 강경한 입장을 밝혔다.
결국 탄핵안 찬성세력은 노 대통령의 사과가 없다면 탄핵안을 제출할 것이라 경고했고 노 대통령은 사과를 거부하며 탄핵안은 국회를 통과한다.(다만 청와대 홍보수석이 "잘잘못을 떠나 국민 여러분께 오늘과 같은 대결국면의 탄핵정국에 이르게 된것을 참으로 죄송하게 생각한다."라고 발표했다)

4 가결 당시

"비리로 점철된 16대 국회는, 이제 대통령의 권한을 정지시킨것입니다."

- 6분 52초부터 나오는 엄기영 앵커의 브리핑

당시 탄핵소추안 가결 이후 뉴스데스크이다. 워낙 사상 초유의 사태인지라 1부[7] 임에도 불구하고 2시간 가까이 된다. 동영상에도 나와있지만 8시부터 시작해서 10시 반까지 2시간 반으로 진행했다. 앞에 오프닝 보면 제공에 광고 목록이 끝없이 나오는 이유도 연장방송으로 인한 비용을 광고로 다 메워야 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광고를 30초, 1분도 아닌 자그마치 4분간 하였다.

오죽했으면, 11분 08초 쯤에는 이를 도저히 보다못한 카메라맨이 "저 양아치들!"이라는 말까지 한다. 그야말로 목불인견.

11분 30초에 만신창이가 된 유시민이 울면서 "이러면 안됩니다 안돼여!" 하는 걸 보면 유시민이 노무현을 향한 마음을 알 수 있다.

여담으로 당시 탄핵을 결사 반대했던 정동영 당시 열린우리당 의장과 탄핵을 추진했던 추미애 당시 민주당 의원이 나오는데, 정작 2016년 현재 기준에서 놓고 보면 정동영은 친노와 각을 세우고 있고, 추미애는 친노계파의 일부인 친문과 손을 잡고 재기에 성공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아이러니하다.

5 가결 이후의 국민반응과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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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 정국 당시, 조선일보를 읽고 있는 새천년민주당추미애 의원.

탄핵소추결의안의 가결에 따라 국회의 탄핵소추의결서가 헌법재판소에 접수되었고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의 권한이 정지되어 직무에 임할 수 없게 됨에 따라 당시 국무총리였던 고건이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게 되었다.

탄핵소추결의안에 반대를 하였던 열린우리당은 모든 의원들을 총동원하여 국회 상정저지를 위해 고군분투를 하였지만 야당들의 기습적인 처리를 막지 못하였고,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의 만행에 분노와 비분강개함을 금할 수 없다며 대국민사과를 하였다. 반면,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 자유민주연합은 당연한 결과이자 국민의 명령이라며 지지를 호소했다.

그러나 민심은 야당 연합의 기대와는 다르게 흘러갔다. 당시 기사에서 보듯 KBS의 여론조사 결과에서는 대통령이 열린우리당 지지발언을 한 것에 사과해야 한다는 의견이 62.5%를 차지했지만 연합뉴스 여론조사 기준 탄핵반대 의견은 78.2%였고 찬성은 21.5%에 불과했었다.

즉, 대통령의 잘못은 있지만 탄핵은 지나치다는 것이 다수 국민의 의사였던 것인데, 탄핵소추결의안이 상정되고 가결까지 되면서 국민들은 그야말로 큰 충격에 빠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에 경악한 민심은 "우리가 뽑은 대통령을 감히 너희들이 뭔데 맘대로 끌어내리냐?"라는 야당 연합에 대한 분노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건 전국적으로 공통된 현상이었다. 2년 전 대선에서 노무현에 대한 지지가 가장 낮았던 대구, 경북에서조차 반발 여론이 거셌는데 한 중년 남성이 "대통령은 국민이 뽑았지, 국회의원이 뽑지 않았다! 국민들의 의견을 듣고서 해야지? 무작정 멋대로 하는 건 말이 안된다!"라고 열변을 토하는가 하면, 한 주부는 "지역 경제가 그렇잖아도 힘든데, 정국이 시끄러워져서 걱정이다."라는 반응을 내놓았다. 즉, 노대통령 정부의 정책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의회가 정국을 뒤흔들어서 국민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행위는 더더욱 싫다는게 지역 민심이었던 것이다. 대구, 경북이 이 정도니 다른 지역이야 오죽했겠나?

국회의 탄핵소추안이 비난받은 이유는 크게 두가지였는데, 첫번째는 전국적인 투표로 뽑은 대통령과 특정 선거구에서 선출된 국회의원간의 민심의 선택은 그 무게가 다르기에 국회의원이 민심도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멋대로 대통령 탄핵안을 통과시킬 자격이 있느냐는 논리였고,[8] 심적으로 또 하나는 온갖 비리나 철새정치 등 그 막장성을 보여주는 것은 대통령보다는 국회의원이 더하면 더했지 못한 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명분을 내세워 탄핵을 했으니까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격이다"라는 것이었다.

결국,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거리로 쏟아져나와 탄핵무효 민주주의 수호를 목적으로 민중가요 대한민국 헌법 제1조를 부르며 노무현 대통령의 복귀를 요구하는 촛불집회[9]를 갖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탄핵 반대시위는 전국 각지로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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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3월 20일 광화문 촛불집회 사진이다. 광화문 네거리부터 덕수궁 대한문까지의 길 전체가 시민들의 촛불로 가득하다.

한국의 보수 지지층의 이념적 특징은 유교적인 성향이 강한 편이라, 경제나 정책보다는 국가와 현 체제 및 정권의 안정을 가장 우선으로 여기는 경항이 강하다. 이러한 특징은 보수층만이 아니라 중립층에도 팽배해 있는 의식이기에 대통령 탄핵같은 초유의 정국에서는 기존 한나라당 지지층마저도 등을 돌리게 된 것이다. 당시의 시민 여론은 탄핵으로 대통령을 축출하는 행위를 과거 군부의 쿠데타와 동일시하여 바라봤다.

그런 이유들로, 탄핵소추 결의의 역풍은 실로 엄청났고 때마침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있던 시기였던지라 다수 국민의 반감을 산 야당 연합은 그야말로 궁지에 몰렸다. 한나라당은 회초리 맞는 CF를 내보내고 거대 여당의 독주를 막기 위한 견제론을 내세웠다. 즉, 우리가 잘못했지만 그래도 이대로 가면 열린우리당이 독재여당이 될 수 있으니까 독재를 견제하기 위해서 자신들을 지지해달라는 논리였다. 실제로 여론 조사를 살펴보았을 때 열린우리당은 과반은 따놓은 당상이었고, 최대 180석에서 헌법을 바꿀 수도 있는 200석 확보도 꿈은 아닐 만큼 상황이 좋았다.

이렇게, 한나라당은 사과하면서 지지를 호소했지만 한나라당의 텃밭이라고 할 수 있는 영남, 그것도 대구·경북에서조차 열린우리당이 한나라당을 10% 이상의 차이로 제치고 여론조사에서 1위를 차지했고 한나라당의 주 지지층이라 할 수 있는 50대 이상의 노년층마저도 열린우리당 지지를 외치는 사태가 벌어졌다. 민주당 등지에서도 박태영 당시 전남지사 등의 집단탈당이 이어지면서 세력이 크게 흔들렸다.

비록 선거 3주 전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이 저지른 "60대 이상 70대는 투표안해도 괜찮다"는 발언이 노인들을 폄하한 것이라는 여론의 질타를 맞아 열린우리당의 잘 나가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어 버리지만[10] 국민들은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이 과반 이상의 의석을 확보하는 압승[11]을 거두게 하며 탄핵을 주도한 야당 세력을 사실상 심판해 버렸고, 탄핵 주동자들로 지목되었던 조순형 새천년민주당 대표,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 김종필 자민련 총재, 박관용 국회의장[12] 등이 줄줄이 참패하면서 사실상 정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나마, 한나라당은 텃밭인 서울 강남 3구와 영남지역 등에서 겨우[13] 승리를 거둬 체면을 세울 수 있었고, 후에 제18대 대통령이 되는 박근혜가 전 대표였던 최병렬의 후임으로 당 대표를 맡으면서 당 수습에 나설 수 있었다. 하지만 자유민주연합은 당의 구심점이었던 9선 국회의원 김종필 총재를 비례대표 1번으로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지지세를 제대로 확보하지 못해 김종필 총재조차 당선시키지 못하는(...) 치명타를 입는다.

새천년민주당 또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고향인 전남 신안, 목포, 무안 등지에서 그나마 지지세를 확보하였지만, 텃밭인 호남지역에서 열린우리당에 크게 밀리면서 원내 제2당의 자리를 내줌은 물론 민주노동당에게까지 밀려서 원내 제4당으로 전락하는 수모를 겪게 된다. 반면, 탄핵 찬성을 당론으로 하지 않았던 민주노동당은 지역구 2석 포함 총 10석을 확보하면서 원내 제3당으로 약진하게 된다.

6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청구 기각결정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헌법재판소/주요 헌재결정례 요약 문서를 볼 것.

2004년 3월 헌법재판소는 국회의 탄핵소추의결서를 접수함에 따라 대통령(노무현)탄핵심판청구사건에 2004헌나1이라는 사건번호를 부여하였고, 1차 변론을 시작으로 해당 사건에 대한 심리를 하게 되었다. 헌법재판소법 제23조제2항에 따르면 탄핵심판청구사건의 경우 헌법재판소 재판관 9명 중 6명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만 탄핵결정을 하도록 하고 있으나 탄핵에 필요한 찬성수에 도달하지 못함에 따라 결국 2004년 5월 14일 탄핵심판청구를 기각하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고[14] 그에 따라 노무현 대통령은 그 권한을 회복하고 직무에 복귀하게 되었다.

7 정치 풍자

탄핵 사태 당시 인터넷을 중심으로 정치 풍자 및 패러디가 유행했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탄핵을 주도한 야당 인사들과 그들의 발언이나 행동을 풍자하는 이미지, 영상, 노래 등이 유행하였다. 그 유명한 '물은 셀프' 패러디도 이 당시 등장한 것이다. 배꼽을 뽑아 그들에게 던져라
  1. 탄핵 소추 하루 전이다.
  2. 노무현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제동을 걸 수 있었던 특검이었지만, 노무현 대통령이 거부권을 사용하지 않아, 당시 특검을 발의했던 한나라당조차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을 정도였다.# #
  3. 노무현 대통령은 민주당의 주류 계파에게 자기가 왕따를 당했다고 생각했기에 그런 것인데, 정작 노무현 대통령 본인은 창당을 반대했다는 주장도 있다.
  4. 추후 열린우리당은 호남지역의 표가 필요해서 낮은 지지율을 만회하고자 민주당과 합당을 계획하기도 했지만 이 빚을 승계하기 싫어서 그냥 없었던 일(...) 로 돌려버리기도 했다. 어쨌거나 우여곡절을 거쳐서 2008년 통합민주당으로 둘이 합당을 하긴 했지만 민주당 계열 정당 내에서 친노와 비친노간의 갈등이 계속 이어져 왔고 이로부터 10년이 넘게 지난 2016년에도 더불어민주당국민의당으로 분열양상이 계속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5. 검찰의 조사결과 총 113억 원 가량으로 집계되어 1/10을 넘기며 한나라당의 1/8에 이르렀고, 노무현 대통령은 사퇴하지 않았다. 탄핵사실상 강제퇴임후 퇴임 때까지 모르쇠로 버틴다(...) 열린우리당 역시 당 해체시까지 뻔뻔하게 버티기는 마찬가지였다.
  6. 당시 검찰은 한나라당의 차떼기 사건과 함께 최악의 정치스캔들을 들여다봐야 했다. 그러나 차떼기 사건과 이 사건의 수사는 비교적 검찰이 소신껏 수사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특히 최근 들어서...
  7. 해당 일자 뉴스데스크는 1, 2부가 나뉘지는 않았지만 동영상 업로드한 사람이 편의상 1, 2부로 나눈 것이다.
  8. 대의제 민주주의 하에선 대표자들이 개별 국민의 뜻(소위 민심) 하나하나에 얽매일 의무가 없기 때문에 가능하다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설의 하나일 뿐 직접선거를 통해 배출된 공직자들에 대해선 그 권한의 행사가 제한됨이 마땅하다. 기실 대의제는 정쟁 등을 위해 국민의 의사를 배제시키라는 논리가 아니라 국가와 국민 그리고 공익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권한을 대신해서 행사하되, 지역주의 등에 매몰되지 말라는 의미로 채택된 수단이지 국민의 의사에 반하는 행동을 하여도 지탄받지 아니하다는 논리가 아니다.
  9. 사실, 촛불집회의 효시는 미선이 효순이 사건 때라고 할 수 있으나, 이 시기에 최고조에 달하며 시위 문화의 주류 중 하나로 자리잡게 되었다.
  10. 총선 결과 한나라당의 텃밭인 영남권에서 선전하던 후보들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대부분 낙선한다.
  11. 총 299석중 152석을 확보했고 한나라당은 121석을 차지한다. 만약 정동영 의장의 발언 문제가 없었다면, 열린우리당이 개헌까지도 가능하게 하는 2/3의 의석을 확보할 수 있었을 거라는 견해도 적지 않았다.
  12. 지역구가 당시만 해도 한나라당의 아성이었던 부산인데다가 본인이 탄핵소추안 처리 이전에 이미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13. 이 때 열린우리당은 한나라당의 진정한 텃밭인 대구, 경북에서 두 곳을 제외한 나머지 지방에서 평상시의 두배정도인 무려 20%-40%(구미시 을!)의 득표율을 기록했고. 또 다른 텃밭인 울주군을 빼앗았다.
  14. 단, 해당 결정서에는 헌법재판소 재판관 개개인의 찬반의사가 실명으로 표시되지 아니하였고, 대통령의 탄핵에 각각 몇명의 헌법재판소 재판관이 찬성과 반대를 하였는지 또한 표시되어있지 않다. 이는 당시 헌법재판소법에 재판관 의견표시의무에 대한 명시적 근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탄핵이라는 굉장히 민감한 정치적 사안이었기에 헌법재판소 재판관 본인들의 의견을 꺼려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결정서에 각 재판관들의 의견표시가 나오지 않은 것은 문제가 있다며 비판받았고, 이후 "심판에 관여한 재판관은 결정서에 의견을 표시하여야 한다."(헌재법 제36조 제3항)고 헌법재판소법을 개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