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 항목: 대한민국/정당
대한민국의 보수정당 | ||||
민주자유당 | → | 자유민주연합 | → | 국민중심당[1] 한나라당 |
자민련의 로고
1 개요
1995년부터 2006년까지 존재했던 대한민국의 보수정당으로 1990년 3당 합당 이후에 나온 최초의 제2야당(원내3당)이였다. 통칭은 '자민련'(자유민주연합). 연합이 두음법칙 문제상 련->연이라 이렇다.
김종필을 중심으로 창당한 정당으로, 충청도(정확히는 충청남도와 대전광역시)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지역 정당이었다. 이념적 성향은 자유민주주의, 보수주의. 또는 반 신한국당
1995년 3월 30일에 창당돼 2006년 4월 7일 소멸했다. 11년 8일 존속한 정당이었다. 한나라당이 이 기록을 깼지만[2], 2004년 3월 23일 로고를 변경한 것을 감안하면 로고의 지속성 등의 정체성은 더 길었던 정당이다.[3]
2 창당과 약진
1994년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자유당은 1990년 3당 합당으로 인해 민정계[4]+민주계[5]+공화계[6] 크게 3계파로 구성되어있었다. 그런데 YS가 대통령이 된 이후 민주계가 높은 정권 지지율을 등에 업고 본격적인 당권 장악을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민주계의 젊은 의원들은 1994년 말 당시 민자당 대표였던 김종필을 '개혁정권에 어울리지 않는 구시대 인사'라고 몰아세우며 강력하게 퇴진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결국 김영삼 대통령 및 민주계와 갈등을 겪던 김종필 대표는 1995년 1월 자신을 따르는 공화계 의원들을 데리고 민자당을 탈당하여 자민련을 창당하였다. 여기에 민주계에 밀렸다고 생각한 민정계 일부가 가담했다.
그렇게 창당한 자민련은 창당 직후 열린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충청권을 석권하고 강원도지사와 강원도 지역의원 다수를 당선시킨다. 당시 주된 선거 전략은 김종필 대표의 '당 대표 쫓아내는게 세계화냐', '다른 지역에서 충청도를 핫바지로 보고 있다' 등의 말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충청도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핫바지론'과, '북한 쌀 보내기 결사 반대'[7], '김영삼 정부는 사이비 보수, 내가 원조보수다'라는 '원조보수론'으로, 강원도와 수도권 보수층의 민심을 얻은게 주효했다. 근데 이후 DJP로 뒤통수친게 함정 이후 노태우 대통령의 처남인 김복동의 신민당과 합당하는 등 4,5공 세력을 대거 영입함으로써 당시 PK정권이라 불리던 YS집권기 소외감을 느끼던 TK지역을 공략했다.
이후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선 충청권을 석권하고, 당시 반민자비민주 정서가 팽배했던 TK 지역에서 원조보수론을 내걸고 선전하면서[8] 강원도와 수도권 당선자까지 합쳐서 총 50석으로 DJ의 새정치국민회의 다음가는 제2야당의 지위를 굳히며 리즈시절을 찍게 된다. 다만 여기서 한계가 보이기 시작했는데, 보통이면 젊은 의원이나 정치신인에게 주는 전국구 의원 상위순위들을 줄줄이, 민정ᆞ공화계의 노장들로 채워버리는 짓을 했다. 반면 신한국당ᆞ국민회의는 비교적 젊은 정치신인들을 전국구 공천을 주었다.
3 DJP 연합
15대 총선이 끝나고 바로 다음해인 1997년 치뤄질 15대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DJ와 JP는 혼자선 집권하기 어렵다는 공통인식을 갖게 되었고, 김종필과 자민련은 내각제 개헌을 조건으로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총재로 대통령 후보를 단일화하고, 집권시에 내각을 공동구성한다는 일명 DJP연합에 합의해 15대 대선에서 DJ를 지지했다. 이후 김대중이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자민련은 공동여당이 되었다.[9] 반대로 한나라당은 이인제가 경선불복을 선언하면서 국민신당을 창당해 출마하는 바람에 표가 분산돼버렸다. 마치 10여년전 김영삼, 김대중이 서로 아웅다웅하던 통에 표가 분산되고 그 결과 노태우가 어부지리로 대통령에 당선된 것과 비슷한 일이 다시 재현된 것. 물론 이인제가 양김 정도의 파워는 결코 아니었지만 넘어가자
국민의정부 시절에는 김종필, 박태준, 이한동의 국무총리 3명을 배출하고[10] 국무위원 다수를 배당받는 등 민주당과 밀접하게 협력하였다. 김대중 대통령 취임 직후 열린 1998년의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DJP연합의 연장선상에서 새정치국민회의와 전 지역에서 후보를 단일화하였다. 이런 연합공천의 위력으로 자민련은 자신들의 텃밭인 대전광역시, 충청북도, 충청남도는 물론 인천광역시에서도 승리했다.[11] 강원도에서도 무소속 후보 난립이 아니었으면 승리했을 것이다. 이로서 여당과 야당이 국토 좌우를 딱 나눠먹은 모양새가 되었다. 합산 지지율 시·도지사 선거 49.8%, 시·도 의원 49.6%, 시장·군수·구청장 선거 45%.
참고로 이시기엔 대선과 지방선거의 연이은 승리로 새정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간의 합당이 거론될 정도로 두 당 사이의 관계가 매우 화기애애했다. 오히려 당시엔 한나라당이 김종필 국무총리 인준안을 부결시키는 등 자민련에 대해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며 공세를 펼치고, 서로서로 의원 빼내기를 하는 등 같은 보수이념을 가진 당 맞나 싶을 정도로 날선 각을 세웠다.
그러나 DJP연합이 3년차에 접어들던 2000년대 중반쯤부터 김종필이 내각책임제나 남북정상회담, 기타 여러 문제로 김대중과 사이가 서먹서먹해지면서 일단 두 당은 갈라서게 되고, 총선에서의 연합공천도 무산되었다.[12] 그리고 김종필이 떠난 연정 파트너의 자리는 같은 충청권 출신으로 1998년 민주당에 입당한 피닉제이인제가 차지한다. 그리고 2000년에 치뤄진 16대 총선에서 민주당은 충청권 공략에 성공(8석, 한나라당 4석)하게 된다. 한편 자민련은 충청권 11석을 바탕으로 17석을 획득했다. 쉽게 말해, 민주당이 충청권을 손대지 않았으면[13] 자민련이 충분히 25석 이상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선거구제 개편으로 전체의석이 26석(299->273. 04년 도로 회복) 줄었고, 충청권 의석이 4석(28->24) 줄어든 것도 한 몫 했다. 강원도에서도 민주당에게 밀렸고, TK 지역은 DJ정권 시기 동진정책에도 불구하고 도로 한나라당에게 의석을 내주고 만다.
그렇게 총선에서 텃밭을 민주당에 내주는 바람에 불과 20석도 얻지 못하고 원내 교섭단체가 되지 못하는 굴욕[14]을 겪는가 했는데...2000년 말 민주당 측이 '연정은 아직 깨진게 아니다'면서 의원 4명을 꿔주는 희대의 정치사건이 벌어진다.[15] 이때 송석찬 의원이 한 그 유명한 "여당으로 한 마리 연어가 되어 돌아오겠다."란 말이 두고두고 회자되기도 했다. 결국 자민련은 아슬아슬하게 원내교섭단체로 등록할 수 있었고,[16] 이에 다시 만족한 자민련은 김대중 대통령 임기말까지 연정을 계속하겠다고 밝혔다.[17] 하지만 연정 후에도 민주당 115석 + 자민련 20석 = 135석으로 과반(137석)에서 2석 모자랐던 민주당은 허주 김윤환의 민주국민당(2석)에도 손을 벌려야했고, 민국당의 한승수 의원(강원 춘천)을 외교통상부 장관으로 입각시키며 간신히 원내 과반수를 채웠다. 사실 보면 알겠지만 DJ정부 중기쯤부턴 사실상 내각책임제처럼 운영된 감이 있다. JP의 꿈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후 그럭저럭 유지되던 DJP연정은 2001년 한나라당이 제출한 통일부장관 해임결의안[18]에 자민련이 동조하면서[19]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자 결국 붕괴되고 만다. 그리고 자민련으로 갔던 민주당 의원 4명은 당연히 연정 붕괴에 실망을 표하고 원대복귀했으며, 입각했던 자민련 소속 장관들도 사퇴하였다.[20]그러나 자민련 총재인 이한동 국무총리는 오히려 내각 잔류(!)를 결정했고, 자민련은 현직 총재이자 국무총리인 이한동을 당에서 제명하기로 결정한다. DJP연정이 붕괴되면서 결국은 양쪽 다 타격을 입게 되는데 민주당은 국민의정부 말기 들어서 국정운영에 많은 제약을 받게 되었고, 자민련은 원내교섭단체 지위를 상실하며 당의 존립 여부조차 위태해지게 된다.
결국 자민련의 안습한 상황은 계속되어 2002년 제3회 동시지방선거에선 텃밭이었던 충북과 대전까지 한나라당에 내주는 참패를 당하고 만다. 그리고 2002년 말 제16대 대통령 선거 정국이 되자, 자민련은 한나라당 지지를 거의 선언하기에 이른다. 선거 직전인 11월 7일의 기사 "'이회창-김종필 협력론' 고개". 이로써 자민련은 한나라당과의 합당이 예측되었으나 과거 자신의 국무총리 인준안 거부, 자당의원 빼가기 등으로 한나라당에도 화가 나있던 김종필은 중립을 선언하며 끝까지 이회창을 거부했고, 결국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면서 이후 열린우리당이 창당되는 등 신속한 정계 개편으로 자민련의 입지는 점점 더 애매해져갔다. 그리고 그렇게 자민련의 마지막 시련이 다가오게 되었다.
4 분당과 소멸
탄핵 열풍이 몰아치던 2004년, 김종필은 마지막 순간까지 탄핵을 원론적인 측면에서 반대했으나 소속 당원들은 일제히 탄핵에 찬성했다. 이때 JP를 제외하면 민정계 출신의 비례대표 김종호 의원만이 반대표를 던졌다.[21] 내각제 합의 등이 뒤에서 오간거 아니냔 관측들도 있었는데, 어차피 탄핵과 마찬가지로 내각제도 정족수의 2/3 이상 동의로 개헌이 가능한 것인지라....하지만 탄핵 역풍은 예상보다 거셌고 국민들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내각제의 ㄴ자도 안 꺼내면서 자민련이 가장 피봤는데, 당시 10선에 도전하던[22] 당 대표 김종필이 비례대표 1번으로 나선 상황에서 득표율 2.98%를 얻어 딱 0.02%차로 3%를 채우지 못해 비례대표 의석을 1석도 획득하지 못하는 굴욕을 당했다.[23] 결국 자민련은 겨우 4명의 지역구 당선자에 만족해야 했고, 결과에 충격먹은 김종필은 정계에서 은퇴를 선언했다. 그렇게 한때의 여당이자 제2야당이었던 민주당(2004년)과 자민련은 --동반자살-- 함께 몰락한다.(...) 그러게 왜 헤어졌어 이 선거로 양당은 원내 제3당의 자리를 민주노동당에게 내준다.
김종필 은퇴로 자민련은 당내 구심점이 사라졌고, 당시 충남지사였던 심대평이 당을 탈당하고 자민련을 대신하는 충청신당인 국민중심당 창당에 나서면서 급속히 무너지기 시작한다. 자민련은 결국 충청신당에 흡수되는 식의 합당합의를 했으나, 이 합의가 파기되면서 지역구 의원 4명 중 당 대표를 제외한 3명이 탈당의 방식으로 충청신당으로 가버렸다. 결국 자민련은 마지막 의원 1명(김학원 대표)과 조직, 당 자산 등을 갖고 한나라당과 합당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형식은 한나라당과의 합당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국민중심당이 자민련의 후신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후 이회창과 심대평을 중심으로 2천년대 후반 충청 지역을 잠시 석권했던 자유선진당-선진통일당, 일시적으로 존재했던 국민중심연합의 전신이라고도 볼 수 있다.
2010년대 들어선 선진통일당도 2012년 새누리당과 합당하면서 충청지역 기반정당은 사실상 사라졌고, 구성원 전원이 현재는 새누리당과 민주당계 정당으로 뿔뿔이 흩어진 상태다.
5 트리비아
특이점으로는 창당 후 한 번도 당명과 로고를 바꾸지 않았다는 점이다. 덕분에 위키러들이 편하다 정당명을 자주 갈아치우는 한국 정치에서는 참 희귀한 경우. 다만 당명의 잦은 교체는 잦은 이합집산 탓인 경우가 많고 이 당도 결국 이합집산을 거쳐 창당과 소멸의 과정을 겪었기 때문에 그 점에서 보면 희귀한 게 아닐지도...어쨌든 덕분에 한나라당과 합당될 당시를 기준으로 존재했던 정당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같은 이름을 써온 정당으로 기록되었다.
자민련 이후 참여정부 시기엔 원내교섭단체를 이룬 제2야당은 없었으나[24], MB정부가 들어서면서 각종 야당이 난립하고 특히 그 중 자유선진당이 제2야당의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25] 이후 2016년엔 국민의당이 38석으로 원내교섭단체를 가뿐히 넘기며 제2야당의 입지를 다지게 된다. 다만 국민의당은 안철수라는 구심점과 기타 호남기반 정치인들이 뭉친 정당으로 자유민주연합-자유선진당과는 뿌리부터가 다르기 때문에 충청-합리적 보수계 정당의 맥은 자유선진당에서 끊겼다는 것이 중론이다.[26] 이후부터 충청 지역은 반기문, 안희정 등 그냥 충청 지역 정치인을 좌우 가리지 않고 밀어주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역시 캐스팅보트
6 역대 선거결과
-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 광역단체장 4/16
- 기초단체장 23/230
- 광역의원 86/875
- 제15대 국회의원 총선거 50/299 16.2%
- 제15대 대통령 선거 김대중 40.3% 당선 (선거연합에 따른 것)
-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
- 광역단체장 4/16
- 기초단체장 29/232
- 광역의원 82/616
- 제16대 국회의원 총선거 17/273 9.7%
-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
- 광역단체장 1/16
- 기초단체장 16/232
- 광역의원 33/682
-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 4/299 2.9%
7 관련 항목
- ↑ 충청기반 정당 승계
- ↑ 1997년 11월 21일~ 2012년 2월 1일까지 약 14년.
- ↑ 참고로 광복 이후 국내에서 오래 존속한 정당은 1963년 2월 26일 창당하여 1980년 8월 신군부에 의해 강제해산당한 민주공화당(17년 8개월)이고, 2위는 신민당으로 13년 8개월, 1969년의 재창당을 고려하면 11년 1개월 존속했다. 물론 국내 기준. 미국과 서유럽 등의 민주주의 선진국에선 한 정당명으로 역사가 백년이 넘어가는 정당도 여럿 있다.
- ↑ 옛 민주정의당 출신. 군부와 검찰/정보기관 출신이 상당수였다. 다만 민정당 출신 중에서도 김윤환을 중심으로 김영삼을 지지했던 통칭 '신민주계' 의원들이 대략 20여명 존재하였다.
- ↑ 옛 통일민주당 출신. 김영삼 대통령이 집권하자 민자당의 주류가 되었다.
- ↑ 옛 신민주공화당 출신. 김종필이 당대표이긴 했으나 세 계파 중에서 가장 세력이 미약하였다.
- ↑ 대북 식량지원을 시작한 것은 의외일지 모르지만 김영삼 정부 시기였다. 1995년 북한에 15만톤의 식량을 지원하면서 대북식량지원이 시작된다. 사실 이건 우루과이 라운드 관련(WTO가 1995년 1월 출범했다)으로 쌀수입문제와 추곡수매 등이 엮여서 남아도는 쌀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책 때문이기도 했다.
- ↑ 대구 총 13석 중 무려 8석을 휩쓸었다. 다만 경북은 신한국당이 11석으로 무난히 1당을 차지했다.
- ↑ 그러나 이 과정에서 안택수 당 대변인을 비롯한 몇몇 의원들이 DJP연합에 반발해 탈당하기도 했다. 참고로 안택수 당 대변인은 대구 지역 의원이었다. 헌데 의외로 자민련내에서 DJP연합을 처음 적극 권유한 것도 TK중심의 민정당계였다고 한다. 자세한건 DJP연합 항목 참조.
- ↑ 다만 이한동 국무총리는 이후 2002년에 자민련을 탈당하고도 총리직에 있다가 대선출마를 앞두고 사임한다.
- ↑ 단 인천의 최기선 당선자의 경우 애초에 국민회의 간판을 원했다가 막판에 양당간의 조율로 자민련 후보로 결정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 항목 참조.
- ↑ 다만 김대중이 약속대로 내각책임제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고 하더라도, 개헌엔 전체 의원의 2/3 동의가 필요한 만큼 야당인 한나라당이 반대하는 한 통과는 불가능했다.
성의표시라도 해주지 - ↑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국민회의와 통합민주당은 충청에서 한석도 얻지 못했다.
- ↑ 교섭단체가 되지 못하면 국가로부터 각종 보조금을 지원받지 못하고, 국회 상임위의 위원장이 될 수 없는 등 여러가지 불이익이 있다.
- ↑ 말 그대로 남의 당 국회의원을 빌려왔다.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 4명이 탈당하고 자민련에 입당하는 식. 송석찬 의원(대전 유성), 배기선 의원(경기 부천원미을), 송영진 의원(충남 당진)이 자민련으로 1차 입당했다. 그런데 자민련 부총재인 강창희 의원(대전 중구)이 이에 반발하여 교섭단체 등록을 거부하자, 당시 원내 교섭단체의 자리가 급했던 자민련은 강 의원을 출당시키고 민주당에서 다시 장재식 의원(서울 서대문을)을 데려와 20석을 채웠다. 이들의 당적 자체는 당연히 자민련이지만 사실상 소속은 여전히 민주당이었다. 이 행위 자체를 막을 법적 수단이 없는, 합법적이면서 편법적인 수단이다. 의원 꿔주기를 반대한 강창희 의원은 제명된 후 2001년 말 김용환 의원과 함께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 ↑ 정말 간신히 20석. 재밌는 사실은 이미 민주당이 16대 국회 개원 이후 자민련을 위해 원내 교섭단체의 조건을 10석으로 낮추려고 무려 날치기(...)를 시도하다 실패했다는 것이다. 만일 성공했다면 2004년 민주노동당도 덕을 봤을 것이고, 2008년 자유선진당도 20석 만드느라 창조한국당과의 연합을 안해도 되었을 것이다.
- ↑ 이후 자민련은 김대중의 배려로 장관 3명을 입각시켰다.
- ↑ 8.15 평양축전에 사람들의 방북을 허용했다는 이유였다.
- ↑ 민주당과 연정 상태였으나 대북관에 관해선 의견차이가 컸다. 기본적으로 자민련은 보수우익 정당이라 햇볕정책에 회의적으로 대북강경책을 주장하였다.
- ↑ DJP 연합이 깨진 무렵에 민주국민당도 새천년민주당과는 사실상 결별했다. 한승수 외교통상부 장관은 연합내각이 해체되자 얼마 못가서 한나라당으로 복당했다.
- ↑ 당시 충북 괴산.진천.음성 지역구에 출마하려고 정치적 계산을 했다는 비아냥이 있긴 했지만, 일단 김의원 본인은 탄핵 사유가 말도 안된다고 판단해서 반대표를 던졌다고.
- ↑ 9선으로 YS와 함께 역대 최다선이었다.
- ↑ 사실 지역구 의석이 5석 이상인 정당은 3% 제한에 걸리지 않기 때문에 저 득표율로도 비례대표 당선자를 낼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한 석이 모자라면서 FAIL.
- ↑ 교섭단체는 아니었지만 원내3당은 민주노동당이었다.
- ↑ 다만 자유선진당만으론 원내교섭단체 수립이 안되어서 창조한국당과 연합해야 했다. 그나마도 1년만에 다시 비교섭단체가 된게 함정이지만.
- ↑ 다만 JP는 안철수 의원에게 관심이 있는지 2016년 본인이 먼저 냉면 회동을 제안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