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니콜라 다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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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26인 원수
장 란조아생 뮈라루이 알렉상드르 베르티에
앙드레 마세나장 바티스트 베시에르에두아르 모르티에
루이 니콜라 다부니콜라 장드듀 술트미셸 네
장 바티스트 주르당장 바티스트 베르나도트피에르 오주로
프랑수아 조제프 르페브르프랑수아 크리스토프 켈레르만기욤 마리 안느 브륀
도미니크 카트린 드 폐리농장 마티유 필리베르 세뤼리에아드리안 쟈노 드 몽세
클로드 빅토르오귀스트 마르몽자크 마크도날
니콜라 우디노루이 가브리엘 쉬셰로랑 구비옹 생 시르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엠마누엘 그루시
파일:Attachment/루이 니콜라 다부/다부.jpg

Louis-Nicolas Davout
(1770년 5월 10일 ~ 1823년 6월 1일)

강철 원수.
짐승.[1]
장 란, 앙드레 마세나와 함께 나폴레옹 휘하 원수들 중 가장 뛰어난 원수들 중 한 명.

1 개요

프랑스 혁명전쟁나폴레옹 전쟁 때의 프랑스군 장군. 초대 아우어슈테트 공작이자 초대 에크뮐 대공.[2]
그루시 저리가라 할 정도의 열성 보나파르티스트였다.

2 생애

2.1 나폴레옹과의 만남에서 원수가 되기까지

욘느(Yonne) 주의 아노(Annoux)에서 장 프랑수아 다부(1739~1779)의 아들로 태어난 다부는 대대로 군인을 배출한 가문 출신답게 브리엔의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졸업 후에는 기병연대로 배속되었고, 1788년에 입대한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터지자 귀족 출신임에도 혁명을 지지[3] 했으며, 같은 연대 안에 있던 동료들과는 반목했다. 이 때문에 다부는 군적을 말소당하고 투옥당했으며, 그대로 인생이 끝나나 싶었는데 마침 정권이 바뀌어서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고, 다시 군적을 회복하여 복무할 수 있었다.

1792년에는 지원병 군단을 지휘하여 플랑드르 전역에 참가, 각지를 전전하다가 1793년 3월에서 벌어진 네에르빈덴 전투에서 두드러지는 모습을 보여 여단장으로 진급...했지만 직후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에 의해 발동된 "귀족사관추방령"에 의거해 파면(…)당하고, 그동안 활약했던 활약상도 죄다 스크랩 당했다(…). 그 후 약 1년 간을 고향 아노에서 군사연구에 몰두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에 지인의 도움으로 다시 복직하는데 성공하고, 드제 장군 휘하에 들어가게 되고 드제와 친교를 맺었다. 그 후에 드제 장군의 부하로서 6년간 라인 전역과 이탈리아 전쟁, 이집트 원정에도 참여했다. 한편 드제 장군의 소개로 나폴레옹과 만나게 되는데, 다부가 나폴레옹에게서 어떠한 감정을 느꼈는지는 모르지만 나폴레옹에게 절대 충성을 맹세했다고 한다.

1800년 6월에 벌어진 마렝고 전투에서 다부는 친구이자 전 상관이었던 드제를 잃었다. 드제 사후 나폴레옹의 측근으로서 행동하게 되었고 1801년에는 친구 르클레르 장군의 여동생과 결혼했다.

1800년의 마렝고 전투에서 나폴레옹 휘하의 부대를 지휘한 다부는 나폴레옹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고 전투 후 사단장으로 승진, 제1통령에 취임한 나폴레옹으로부터 집정 근위대의 지휘권을 받았다. 독일.폴란드 원정 당시 프랑스 대육군 제3군단을 맡았고, 1805년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는 나폴레옹 휘하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했다.[4] 1806년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는 거의 2배에 달하는 프로이센군을 안드로메다로 관광보냈다.[5] 당시 나폴레옹은 예나 전투에서 격파한 프로이센군이 전부라고 생각했으나 아우어슈테트에 있던 다부로부터 전해진 보고에 의해 놀랐고, 다부는 나폴레옹에게서 큰 칭찬을 받았다.[6] 그리고 이에 대한 보상으로 가장 먼저 베를린에 입성할 수 있는 영예도 누렸다.[7]

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승리한 후 나폴레옹이 다부의 승리를 치하하자 다부는 나폴레옹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떤 경우에라도 기꺼이 폐하를 위해 제 피를 흘리겠습니다. 폐하께서 저를 인정해주시고 따뜻함을 베풀어주시는 그것으로 저는 족합니다."

...별로 한 것도 없이 원수가 되고 공작이 된 원수1호가 저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8] [9]

그 후 맺어진 틸지트 조약으로 만들어진 바르샤바 공국의 군정관이 되었고, 1807년에는 초대 아우어슈테트 공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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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실에서 동료와 담화를 나누고 있는 다부

거기에 더해서 1809년 에크뮐 전투와 바그람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1809년에 그동안 노고한 공으로 에크뮐 대공이 되었다.

2.2 러시아 원정, 그리고 함부르크 공방전

1812년에 나폴레옹이 대륙봉쇄령을 무시하는 러시아를 정벌하러 군대를 이끌고 원정을 나서게 되는데 다부는 여기서 대육군 제1군단[10]을 지휘했고, 나폴레옹을 따라 활약했지만 결국 나폴레옹이 러시아의 동장군에게 패배하여 돌아오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다부에게 함부르크 군관구의 지휘를 맡겼고, 비교적 러시아의 바깥에 있었던 다부의 제1군단이 함부르크를 거점으로 엘베강 하류지역의 수비를 강화하면서 농성을 시작했다. 마침 1813년에 라이프치히 전투가 벌어지면서 함부르크도 공격받게 되었다.

함부르크는 라인 동부에서 가장 강력한 요새도시였다. 나폴레옹의 명령으로 이곳으로 심심하면 놀러오는 코사크와 동맹군 부대가 출입을 못하게 되어 자유가 되었지만 1813년 5월 28일에 다부가 이끄는 13군단에 의해 점령되었다. 곧 전투가 벌어진다는 것이 확실시 되자 다부는 시내의 모든 자원을 징발해서 함부르크 방어에 쏟아부었다.

다부는 여기서 근성을 발휘하여 1년 이상을 버티면서 완강히 저항했다.[11] 그러다가 1814년에 나폴레옹이 퇴위하고 부르봉 왕조가 복고된 뒤 루이 18세가 나폴레옹 항복했음이라고 하자 함부르크에서 나와서 프랑스에 귀환하게 되는데, 그 때가 나폴레옹이 퇴위당한지 1개월이 더 지난 때였다.

2.3 백일 천하와 그 후의 이야기

1814년에 나폴레옹이 퇴위한 뒤 돌아온 다부에게 루이 18세가 내린 명령은 불명예로운 은퇴 명령이었다. 그에 매우 화가 났던 모양에다 나폴레옹 1세의 열성적 지지자라서 1815년 백일천하 때 나폴레옹의 휘하로 들어가 다시 나폴레옹 황제를 지지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준 자리는 다부가 있어야 할 곳인 전장이 아닌 전쟁장관의 자리였다.[12] 전쟁장관으로 지명되자, 다부는 최대한 빠르게 프랑스군을 재정비하고 조직했다. 그러나 3개월 뒤에 벌어진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패배하자 바로 군대를 이끌고 귀환하는 아군을 맞았다. 그 후 파리를 개방하고 파리 협약에 서명을 했다.

그 후 다시 왕정복고가 일어났고, 다부는 또다시 파면당하면서 경찰의 감시를 받고 살게 되었다(…). 그러다가 옛 동지였던 원수가 재판을 받게 되자 스스로 변호인을 자청하여 네를 적극적으로 변호함으로 파리에 다부의 이름이 널리 퍼졌다. 그 때문에 부르봉 왕가에 의해 체포되어 감금당하는 곤욕을 치르게 되지만 3년 뒤인 1819년에 다시 전직 원수로서 명예회복을 하게 되었다. 그 4년 뒤인 1823년 6월 1일 다부는 지병인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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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부의 무덤

2.4 이야기거리

다부는 말 그대로 강한 군대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다부는 매우 엄격했으며, 병사들에게 강도높은 훈련과 복종을 요구했고, 그대로 실행했다. 일례로, 다부는 병사들에게 적국의 마을에 대한 약탈행위를 금지시켰는데, 이를 어긴 병사는 사형에 처했다. 그래서 다부가 맡았던 제3군단은 다른 부대에 비해 아주 질서정연했다고 한다. (나폴레옹 토탈워에 붙은 유럽 캠페인의 다부 원수의 특성중 한가지는 번역기준으로 '호랑이 교관'이다.)

다부는 고집이 세고 완고한, 그리고 말수도 적었던 전형적인 사나이 스타일이었다. 특히 베르나도트와는 결투 직전까지 갈 뻔했다.[13] 그나마도 나폴레옹의 중재가 아니었다면 정말로 둘 중 하나가 죽었을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다부는 사교나 사회활동보다는 가정에 충실한 성실한 가장이었다.

고집세고 완강한 성격 때문인지, 다부는 군대 내의 많은 동료들과 많이 반목했다. 베르나도트는 말할 필요도 없고, 뮈라와는 러시아 원정중이던 1812년에 심하게 갈등을 빚었던 적이 있고, 루이 알렉상드르 베르티에와도 반목했다.

하지만 친구 없는 사람은 없듯이, 미셸 네 원수와는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그 외에 다른 원수들 - 니콜라 우디노, 로랑 구비옹 생 시르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14] 다부와 가장 친했던 친구는 샤를 에티엔 구딘 드 라 사블로니에르라는 사람인데, 1812년에 스몰렌스크에서 전사했다.

나폴레옹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충성심과 복종을 보였다. 거의 숭배에 가까울 정도로 충성을 했다. 나폴레옹도 그런 다부를 가장 신뢰했고, 전장에서 보인 신기에 가까운 활약으로 다부는 더욱 존경을 받았다. 그랬기에 다부는 제1차 왕정복고가 일어나자 부르봉 왕가에 대해 대놓고 적개심을 드러냈고, 나폴레옹이 귀환하자 나폴레옹의 밑으로 다시 복귀했다.

다부는 나폴레옹과 프랑스에 모든 것을 바쳤다. 그는 빈틈없는 전술가이자 엄격한 기강의 준수자로 어리석은 행위를 간과하지 않았다. 그 결과, 병사들과 보좌관들로부터는 존경을 받았으나, 동료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없었다. 그는 나폴레옹에 버금가는 프랑스의 위대한 전략가였고, 명장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단 하나 갖추지 못한 게 있었으니, 바로 당당히 "그것은 아니됩니다" 라고 황제에게 직언할 수 있는 기개였다. 그는 나폴레옹의 계획에 항상 찬성했다. 이점에서는 아쉽다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다른 나폴레옹의 원수들에 비하면 그나마 편안하게 임종을 맞은 사람으로서[15] 나폴레옹에게 끝까지 충성을 다했으며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를 충실히 이행한 사람으로서 매우 존경받을 자격과 가치가 있다.

여담이지만 다부는 전혀 불륜을 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물론 첫번째 부인이 있었기는 했지만 이후 친구의 여동생을 신부로 맞이한 뒤에는 서로 금슬이 좋았다고 한다.
  1. The Beast.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2. 정식명칭은 1st Duc de Auerstaedt, 1st Sovereign Prince de Eckmühl.
  3. 이게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지위가 정규 사관귀족의 입장이기 때문에 그렇다(…).
  4. 이때는 병사들을 48시간 강행군을 시켜놓은 뒤에 이어진 공세를 끝까지 버텨냄으로서 승리에 공헌했다. 다부의 병사들에 대해 잠시 애도.(...)
  5. 다부의 제3군단은 28,000명이었고, 다부가 맞아 싸운 프로이센군은 63,000명이었다. 게다가 대포의 수도 너무 열세였다. 다부는 대포 45문을 가지고 있었던데 비해 프로이센군은 230문(!)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전투 초기 프로이센 지휘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눈에 총상을 입고 전선에서 이탈했으며 그 뒤를 이어받은 빌헬름 3세는 완강하게 버티는 다부를 보고 나폴레옹의 본대라고 착각하여 겁을 집어먹고 후퇴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전력차를 두고도 승리한 다부는 진짜로 대단한 지휘관.
  6. 나폴레옹은 다부로부터 전해진 보고를 듣고는 "그가 유령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했다. 왜냐면 다부가 눈이 매우 나빠서 그렇게 말했다고.. 다부 혼자서 아무런 지원없이 프로이센 본대를 격파해버린 것을 처음에는 완전히 못 믿었지만 전투후 상황이 더욱 확실해지자 다부를 아주 굉장히 칭찬했다.
  7. 훗날 역사가들은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를 이렇게 평한다. "나폴레옹은 예나에서 이길 수 밖에 없는 전투를 이겼고 다부는 아우어슈테트에서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전투를 이겼다"
  8. 참고로 베르나도트도 다부와 함께 아우어슈테트 전투에 참전했었다. 베르나도트는 다부를 원조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무시하고 전투가 끝날 때까지 아무 것도 안했다(…). 심지어 아우어슈테트와는 엎드리면 코 닿을 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 일로 인해 다부와 사이가 매우 틀어지게 된다.
  9. 사실 아우어슈테트 전투 이전부터 다부와 베르나도트는 사이가 매우 나빴으며, 이는 베르나도트가 아우어슈테트에서 다부를 지원하지 않은 주요한 이유 중 하나이다. 이 둘은 서로 대척점에 있었는데, 둘 다 원래 혁명 지지파 출신으로 나폴레옹과 결혼을 통해 간접적으로 맺어진 인척이었다. 다부는 나폴레옹의 여동생의 남편의 여동생의 남편,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의 형의 부인의 여동생의 남편...이었으나, 다부가 나폴레옹 지지파인 반면, 베르나도트는 반대파였고, 나폴레옹은 집권과정에서 다부를 통해 베르나도트를 견제했다. 이 때문에 베르나도트가 다부에게 증오심을 가지게 되었다.
  10. 7만명이 넘어가는 규모의 대군단이었다. 그야말로 대육군.
  11. 공방을 벌이고 있을 당시 함부르크의 상태는 심히 열악했다. 초기에는 어느 정도 넉넉하고 그럭저럭 버틸만 했는데 심심하면 쳐들어오는 동맹군으로 인해 인력은 점점 줄어드는데다 다부의 E 덕분에 빈약한 방어도와 쥐꼬리만큼의 식량밖에는 없었다고 한다(…).
  12. 이에 대해서는 나폴레옹이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수도인 파리를 맡기고 싶어서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차라리 그루시가 더 나았을 것이다. 그루시는 나폴레옹에게 헌신적이고 충성심이 강한 남자였고 군보다는 사단의 지휘에 적합한 사람이었다.
  13.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후, 다부는 자신을 도우러 오지도 않고 그냥 멀뚱히 서서 구경만 했던 베르나도트를 죽일듯이 노려보며 결투를 신청했다! 심지어는 다부의 무덤에서 베르나도트에 대한 강렬한 분노를 알 수 있다고 한다(…).
  14. 우디노 원수는 나폴레옹도 인정한 잔혹하고 병사들에게 무자비한 원수다.(…)
  15. 베르티에는 의문사, 란과 베시에르는 포탄에 맞아 사망, 뮈라와 네 원수는 붙잡혀서 총살, 다른 원수인 에두아르 모르티에는 코르시카인 혁명가 주세페 피에스키의 기관총 난사에 맞아서 순직, 포니아토프스키는 익사 등등. 예외가 있다면 마크도날과 주르당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