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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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대구전쟁 당시 아이슬란드 경비정 V/s 오딘(Oðinn)과 영국 호위함 HMS 실라(Scylla).

1 개요

20세기에 아이슬란드영국 간에 벌어진 전쟁. 이 지역에서 대구가 많이 잡히므로 이를 둘러싼 전쟁이라 대구 전쟁(Cod War)--[1]이라 부른다. 아이슬란드에서는 Þorskastríðin(대구 분쟁), 또는 Landhelgisstríðin(영해전쟁)이라고 부른다. 전쟁이라고 하기는 좀 규모가 작긴 하지만, 실제로 포격전도 있었고 사상자도 발생한 전쟁 맞다.

2 전쟁의 배경

19세기까지 덴마크의 식민지였던 아이슬란드는 별다른 산업도, 자원도 없는 매우 가난한 나라였다. 때문에 그나마 아이슬란드에서 사람들이 먹고 살만한 유일한 산업은 어업뿐이었다.

1893년 덴마크 정부는 아이슬란드와 페로 제도에서 50해리까지 외국의 어업을 금지하는 제한을 내렸으나, 영국 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아서 영국 어선과 덴마크 경비정과 몇 번의 마찰이 있었다. 1901년 영국-덴마크간 체결된 협정에서는 아이슬란드의 어업전용수역을 해안선에서 3해리밖에 인정받지 못했다. 게다가 이 3해리 내에서도 영국 어선이 자주 출몰해 어장을 어지럽히고 있던 상황이었다.

20세기에 들어서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영국의 어선단이 군에 징발된 탓에 아이슬란드 근해에 영국 어선이 사라져 아이슬란드 사람들이 좋아했지만, 전쟁의 종결과 함께 영국의 어선단이 다시 출현한다.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처음으로 경비대를 조직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영국 어선은 다시 모습을 감췄지만, 영국의 식량난으로 인해 영국 정부가 국민들에게 대구 기름을 배급하기 시작하자 대구에 크게 의존하던 아이슬란드의 경제는 크나큰 타격을 입었다. 그리고 1944년 아이슬란드는 덴마크로부터 완전 독립하면서 어업 보호를 국가의 절대적 지표로 삼게 된다.

3 제1차 대구 전쟁

1945년 미국은 자국의 해양 유전을 보전할 목적으로 트루먼 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은 대륙붕의 자원은 연안국이 관리한다는 내용으로 그전까지 대륙붕은 어느 나라의 것도 아니었다. 이에 아이슬란드는 살짝 끼어들어 자국의 어업전관수역을 3해리에서 소심하게 4해리로 늘린다고 했다. 그리고 1958년 9월 마침내 마음을 크게 먹은 아이슬란드 정부는 어업전관수역을 12해리로 늘리겠다고 나섰으며 이 수역 내에서는 외국 어선을 배제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영국 정부는 아이슬란드에 대해 '통상의 영해 밖의 어업에 관해 배타적 관할권을 행사하는 것은 해양법에 어긋나는 부당 행위로 인정할 수 없다'[2]고 항의 성명을 보냈다. 그럼에도 아이슬란드 정부가 물러서지 않자 결국 영국 정부는 어업 선단에 구축함호위함을 호위로 붙여 보냈고 아이슬란드는 이에 맞서 경비정을 파견했다. 그러나 원래 트롤(Trawl)어업은 넓은 수역에서 조업을 해야 효율적인데 군함의 호위가 붙은 이상 좁은 곳에 모아놓고 지켜야 했기 때문에 영국 어선들은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

1958년 10월, 아이슬란드의 경비정이 영국의 트롤 어선에 3발의 위협사격을 가해 영국 어선이 도망가는 사태가 있었다. 11월에는 아이슬란드 경비정인 토르가 영국 어선인 핵네스에 정선 명령을 내렸으나 영국 어선은 이를 무시, 결국 아이슬란드 경비정이 2발을 발포했다. 이에 영국의 구축함 HMS 러셀이 다가와 경비정 토르에 대해 물러나라고 했지만, 토르의 함장은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HMS 러셀에서 영국 어선 쪽에 한 발이라도 더 쏘면 격침시켜버리겠다고 위협했고, 결국 체급면에서 도저히 상대가 되지 못했던 아이슬란드 경비정은 후퇴하고 만다.

몇 번의 마찰이 계속 일어났지만 최종적으로 1961년 2월, 영국이 아이슬란드 정부가 발표한 12해리 어업전관수역을 인정하는 형태로 1차 대구전쟁은 막을 내렸다. 다만, 또다시 분쟁이 발생할 경우 국제사법재판소의 판결을 받는다는 조약을 맺었다. 12해리까지는 인정하겠지만 이후 아이슬란드의 주장을 원천 봉쇄하기로 결정한 것. 당시 아이슬란드의 야당에서는 이 조약에 반대했으나 결국 체결되고 만다.

1차 대구전쟁에서 아이슬란드의 전력은 경비정 6척과 경비원 100명이 전부였지만, 영국이 파견한 함정은 모두 합쳐 군함 37척에 승무원만 7000명이나 되었다.

4 제2차 대구 전쟁

한편, 그로부터 10년 뒤인 1972년 정권을 잡은 아이슬란드 야당[3]은 어업전관수역을 50해리까지 확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50해리인 이유는 거기까지가 아이슬란드의 대륙붕이 이어진 곳이었기 때문.

이에 대해 영국은 자국 어선의 어획량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타협책을 내놓았지만 아이슬란드는 이를 거부한다. 결국 영국은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겠다고 했으나 아이슬란드 정부는 '이것은 자국의 대륙붕에 기한 행위로 국제문제가 아니다'고 응답했으며 '61년 체결된 조약은 영국의 협박에 의한 것이었는데다 이 문제는 아이슬란드 국민의 사활이 걸린 문제이므로 어떤 외국의 관할권도 인정할 수 없다'고 발표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것이 제2차 대구전쟁이다.

한편 영국과 서독은 이런 아이슬란드의 발표에도 불문하고 계속 어업선단을 보냈으나, 이번에는 군함의 호위를 붙이지 않았다. 지난번에 군함의 호위가 오히려 어선들의 조업을 방해한데다가 냉전 시대였던 만큼 불필요하게 아이슬란드 정부를 자극해 소련측에 붙게 만들면 곤란하다는 미국의 주장도 무시할 수 없었다.[4]

이에 아이슬란드 해안 경비대는 그물 커터를 사용해 트롤 어선들의 어망을 자르기 시작했고 이 조치에 1년간 영국 선박 68척과 서독 어선 15척이 당했다. 영국측이 예인선 4척을 보내 아이슬란드 경비대에 몸통 박치기를 시도하려하자 겁을 상실한 아이슬란드 경비정은 실탄으로 위협사격을 가했다.

이에 빡친 영국 정부는 드디어 군함을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서독은 영국을 후방지원하기로 한다. 그러자 어업에 말 그대로 국가의 명운을 건 눈에 뵈는게 없던 아이슬란드 정부는 NATO 탈퇴와 영국과의 국교단절을 시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참고로 당시 아이슬란드 경비대의 전력은 순시정 6척과 정찰기 1대.

73년 1월 아이슬란드 엘드펠 화산이 폭발하자 아이슬란드 경비대는 인명 구조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일단 물러났지만, 어느정도 구조 작업이 끝나자 다시 전선으로 돌아왔다.

동년 5월 아이슬란드 연해 30해리 부근에서 조업중이던 영국의 트롤 어선 에버튼이 아이슬란드 경비정 에기르(Ægir)의 정선 명령을 받았으나 거부하고 도주한다. 에기르는 처음에는 위협 사격을 가했으나 이를 무시한 에버튼에 대해 결국 47mm 포탄 6발을 발사해 4발이 명중했다. 다만 포탄에 폭약을 넣지 않은 탓에 영국 어선에서 사상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영국의 일간지에서는 이를 두고 공해에서의 해적행위라고 격렬히 비난했다. 다만 영국의 언론에서 일부러 영국 어선에 기자를 태워서 계획적으로 아이슬란드를 도발했다는 설도 있다.

이 사태에 위기감을 느낀 NATO에서는 양국간의 조정 협상에 들어갔지만 8월 영국 선박와 충돌한 아이슬란드 경비정 에기르에서 승조원 1명이 사망(감전사)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더욱 강경해진 아이슬란드 정부는 10월 3일까지 영국배가 50해리 밖으로 물러나지 않으면 국교를 단절한다고 선포했다.

결국 10월 2일 NATO의 중재로 인해 국교 단절만은 면하게 되었고 영국 정부는 50해리 바깥으로 어선들을 물리기로 했다. 1973년 11월 8일에 유효기간 2년 한정으로 아이슬란드와 영국간의 협정이 맺어졌다. 영국 어선들은 50해리 수역중 일부지역에 한해서만 조업이 인정되고, 연간 어획량도 13만톤으로 제한받게 되었다.

5 제3차 대구 전쟁

3차례 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전쟁.

1973년 개최된 UN해저평화이용회의에서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34개국이 배타적 경제수역을 200해리로 늘리자는 제소를 했는데 아이슬란드도 여기에 동참하기로 한다.

74년에 들어 아이슬란드 수역에서 대형 대구의 수가 급감하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73년 발발한 제4차 중동전쟁과 이에 따른 오일쇼크로 세계적인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서 아이슬란드 경제도 파탄 상태를 맞는다. 당시 아이슬란드의 인플레이션은 무려 50퍼센트를 넘었고, 무역적자는 1억 5천만 달러를 돌파했다. 이런 사태가 되자 결국 아이슬란드 정부는 75년 10월 15일 어업전관수역을 200해리로 확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여기에 당연하게도 영국이 반발해 3차 대구전쟁이 발생하게 된다. 서독은 아이슬란드 수역에 있어서 연간 조획량을 6만톤 이하로 제한한다는 형태로 전쟁에 참가하지 않는다.[5]

12월 11일 아이슬란드 경비정인 토르가 영국 배인 스타 아쿠아리우스, 로이드먼, 스타 폴라리스를 발견한다. 토르는 영국배에 대해 떠나라고 했지만, 오히려 스타 아쿠아리우스와 로이드먼은 토르에 몸통 박치기를 걸어와 손상을 입혔다. 이에 토르는 47mm 포를 스타 아쿠아리우스에 응사해 명중시켜 버렸다. 결국 영국배들이 물러났고 토르는 거의 침몰할 정도로 심각한 손상을 입었지만 무사히 항구로 돌아간다. 76년 1월 이번에는 영국 호위함인 HMS 안드로메다가 토르에 대해 몸통 박치기를 시도해 토르의 선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고 만다. 안드로메다의 선체는 살짝 패인 정도.

결국 76년 1월 13일 아이슬란드 정부는 영국 군함이 아이슬란드 해협에서 나가지 않으면 15일 국교를 단절한다고 발표하고 이번에도 NATO 탈퇴를 시사했다. 동시에 미국으로부터 고속정을 구입하려 했으나 거절당하자 이번에는 소련의 미르카급 호위함을 구입하겠다는 제안을 한다.

아이슬란드가 소련에 붙을까봐 깜짝 놀란 NATO는 또다시 중재에 들어갔다. NATO가 펄쩍 뛰고 나설 이유는 충분했는데, 아이슬란드가 소련 편이 되면 소련이 이곳에 폭격기와 잠수함 기지를 설치할까봐 겁나서다.[6] 이지스함도 없던 1970년대에는 미국이 자랑하는 항공모함 전단조차 소련 폭격기 편대가 수십 발씩 날려대는 대함미사일 세례를 버텨낼 수 없었다.[7] 무엇보다 아이슬란드를 거점으로 한 소련군 잠수함들이 대서양에 풀려버리면 2차대전 때 독일 유보트를 상대로 한 대서양 전투는 애들 장난일 수준의 위험이 된다. 요컨대 아이슬란드가 소련 편에 붙으면 북미-유럽간의 북대서양 항로가 완전히 절단나서 소련이 유럽을 침공하는 3차대전이 일어나도 미국에서 유럽으로 통조림 하나도 못 보낸다는 소리고(아니면 아프리카 서해안 쪽에서 스페인쯤 상륙해 육로로 독일까지 보내든가... 이러면 몇 개월은 걸리고 그 사이에 전쟁은 끝난다) 그건 3차 대전의 승자가 소련이란 뜻이 된다. 결국 중재에 따라 아이슬란드 정부는 기한을 1월 24일까지로 기한을 늘려 그 때까지 영국배가 퇴거하지 않으면 국교를 단절한다고 최후통첩을 날렸다. 결국 이번에도 영국은 아이슬란드 측의 주장을 받아들여 군함을 철수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24일부터 열린 런던에서의 회담에서 아이슬란드 측은 자국내 영국 어선의 연간어획량을 4만톤 이하로 제한할 것을 주장했고, 영국측은 8만톤을 주장했다. 어업은 당시 영국 정부의 집권 여당인 노동당의 지지기반이었기 때문에 아이슬란드 측의 제안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한편 이렇게 교섭이 진행 중인 와중에도 영국 어선들은 아이슬란드 수역에서 계속 조업을 하고 있었다.

1976년 2월 5일 영국의 군함 2척이 다시 아이슬란드 수역에 진입했다. 그리고 2월 18일 영국의 호위함 로스트후트가 아이슬란드 경비정 토르와 충돌사고를 일으켰고 결국 다음날인 2월 19일 아이슬란드 정부는 영국과의 국교를 단절해버렸다. 한편 이 때 EC에서 유럽 200해리수역 법안을 통과했으며, 미국 의회도 이 법안에 가결했다.

한편 아이슬란드 수역에서는 계속 충돌사고가 일어나 5월 6일에는 HMS 폴모스가 티르를 들이받아 거의 침몰하는 수준의 손상을 입혔고, 5월 12일에는 경비정 에기르가 영국 어선 프라이메라에 대해 포탄 3발을 발사했다. 이런 사태에 발끈한 영국 정부는 마침내 1만톤급 미사일 순양함에 출동대기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미 국제 여론은 배타적 경제수역 200해리가 대세가 되었고, 영국에 대해서는 NATO를 분열시킨다는 비난이 흘러나왔으며, 영국 내부에서도 그깟 대구 따위로 너무 나가는 거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기 시작했다.

마침내 1976년 6월 노르웨이오슬로에서 양국은 국교를 정상화한다. 영국은 200해리 내에서 자국어선은 최대 24척, 연간어획량 5만톤이하라는 조건을 내건 아이슬란드 정부의 주장을 승인했다. 그러나 영국 어선 최대 24척이라는 제한으로 인해 실제로 잡을 수 있는 어획량은 5만톤은 커녕 3만톤 이하에 불과했다. 결국 대구 전쟁은 아이슬란드의 완승으로 끝난 것이었다.

6 전쟁 이후

영국은 북대서양 어업에 대타격을 받아 1500명의 어부와 7500명의 어업 관계자가 실직했다.

아이슬란드는 사실상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대구 자원의 감소는 끝내 막지 못했다. 무얼 위해 싸웠단 말인가 대구의 어획량이 감소는 21세기까지 이어져 현재에도 오직 제한된 수의 대구만이 잡힐 뿐이다.

전쟁 이후 영국과 아이슬란드의 국교는 정상화되었고, 지금은 그럭저럭 사이가 나쁘지 않은 편이다.

대구전쟁은 세계 각국이 200해리 배타적 경제수역을 선포하는 계기가 된다. 이어도 분쟁도 200해리 배타적 경제수역에 관련된 분쟁이니 한국도 이 전쟁과 무관하지 않은 셈이다.

역사상 전쟁이란 걸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수백년간 무적을 자랑하던 로열 네이비의 콧대를 꺾었다고 내심 자랑스러워 한다고 한다. 영국인이 들으면 기가 차겠지만 아직도 아이슬란드 내셔널 데이(6월 17일 - 1944년 아이슬란드가 독립한 날)에는 대구 전쟁을 기념하는 행사가 벌어지곤 한다.

중국의 게임 전함소녀의 2016년 이벤트 발키리 작전의 E6은 이 대구 전쟁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보상은 보급함 오딘.

7 아이슬란드의 주요 전력

배의 이름은 주로 북유럽 신화에서 가져왔다.

7.1 경비정

Ægir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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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s Ægir(에기르) - 바다의 거인. 에기르의 연회 항목 참고.

V/s Tyr(티르) - 전쟁과 법의 신.
1120톤, 무장 57mm 호치키스포 1문(1989년 40mm 보포스포 1문으로 개장), 최대속도 22노트.

V/s Oðinn(오딘) - 북구 신화의 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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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s Þor(토르) - 천둥의 신. 현재 이 함의 이름을 이어받은 4000톤급의 새로운 경비정이 취역했다.
925톤 무장 57mm 호치키스포 1문(1989년 40mm 보포스포 1문으로 개장), 최대속도 19노트.

참고로 선박앞에 소속을 나타내는 접두사(Ship prefix)인 V/s는 아이슬란드어로 경비정을 뜻하는 Varðskip의 약자이며 대구전쟁 당시에는 이쪽을 더 많이 썼다. 물론 아직도 아이슬란드 내에서는 V/s로 표기하기도 하지만 최근에는 영어식 표기인 ICGV(Icelandic Coast Guard Vessel)를 더 많이 쓴다.

7.2 무장어선

어선에 경화기 등을 장착하여 간단한 무장을 한 배. V/s Baldur, V/s Ver, V/s María Júlía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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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의 하얀 배가 Baldur, 오른쪽은 에기르.

8 기타

유로 2016에서 16강전으로 아이슬란드 vs 잉글랜드의 시합이 결정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대구 전쟁을 떠올리는 사람들도 많았다. 특히 아이슬란드인이 이 경기를 보는 시각은 딱 4th Cod war... 유튜브 이 아이슬란드 아저씨의 비웃는듯한 말을 번역해보면, "영국놈들은 당연히 지네가 이길거라며 자신만만한데 우리는 이 시합을 네번째 대구전쟁으로 보고 있고, 대구 전쟁에서 영국을 이겼듯이 우리가 1점차로 이기거나 동점뒤 승부차기로 이길 것."이라는 내용. 그리고 그 말대로 아이슬란드가 2-1로 잉글랜드를 이겼고, 대대적으로 거리응원[8]까지 한 레이캬비크는 온 동네가 축제분위기가 되었다.유튜브

9 관련항목

  1. 재미있게도 대구 전쟁이 있었던 기간은 냉전 기간과도 겹친다.
  2. 지금이야 영해가 기준선에서 12해리(22.2km)까지라는게 상식이지만 이는 1982년 유엔해양법회의에서 결정된 조항이고, 그전까지는 국제법상 영해에 대한 국제적인 합의가 없었다. 다만 18세기부터는 영국, 미국, 프랑스 등 주요 서방국가들에서는 관습적으로 3해리까지를 영해로 인정했는데 이는 18세기 당시 대포의 사정거리였다. 따라서 국가마다 3해리나 여기서 조금 더한 정도를 영해로 선포했는데 20세기 중반무렵부터는 12해리를 영해로 선포하는 국가가 늘어났다.
  3. 사회민주당, 진보당 등 연립정권
  4. 아이슬란드는 소련 해군의 북대서양 진출을 저지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미국은 특히 소련 잠수함이 북대서양으로 진출해서 미국과 유럽간의 해상운송로를 봉쇄하는 상황을 우려해 냉전 시기 내내 아이슬란드에 미군을 주둔시켰다.
  5. 참고로 아이슬란드와 영국은 대구에 목숨걸었지만, 독일인들은 볼락을 더 좋아했기 때문에 연간 조획량 6만톤중 대구는 5천톤만 잡고 나머지는 주로 볼락을 잡는다고해서 아이슬란드와 쉽게 타결할 수 있었다. 이 때 서독은 영국에 대해 '우리처럼 볼락을 잡는게 어때?'하고 제안했지만 피쉬 앤드 칩스에 목숨을 건 영국은 거절한다.
  6. 충분히 그럴만도 하다. 3차 전쟁이 일어나기 한참 전에 소련이 쿠바 땅에 미사일 기지를 세우려고 했던 쿠바 미사일 위기가 핵전쟁 위기까지 초래했던걸 감안하면 유럽 입장에서 쿠바 위기 시즌 2가 반복되어서 나타나는게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거기에 시기도 하필 냉전 시기인데다가 만약 정말로 아이슬란드에 소련의 군사기지가 설치된다면 소련군이 육지와 해상에서 서유럽을 동시에 압박할 수도 있는 여건도 갖추어지므로 충분히 겁을 낼 만한 문제였다. 헐...
  7. 소련군 시절에 비해 규모가 크게 감소된 2010년대 현재에도, 러시아 공군/해군항공대의 대함 전력은 미국 항모전단조차 골치아프게 만드는 위협이다.
  8. 레이캬비크는 인구가 13만 밖에 안 되는데 무려 1만5천명이 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