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용

틀:12.12의 주역들

150px
鄭鎬溶
1932년 9월 10일 ~

대한민국 육군제3야전군사령관
6대 황영시7대 정호용8대 박희도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
24대 황영시25대 정호용26대 박희도
역대 대한민국 국방부 장관
24대 이기백25대 정호용26대 오자복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때리느냐" 너희가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었으니까 사람을 때리지

우리가 남이가 [1]

1 소개

대한민국의 전 군인, 관료, 정치인이다

2 일생

2.1 청소년기까지

1932년 대구에서 태어나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후일 육군사관학교의 동기가 되는 노태우는 경북고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낸 오랜 친구이자 동창이었다.

2.2 군인 시절

1951년에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6.25 전쟁육군에 병사로 입대하여 참전하였다. 그 뒤 육군사관학교에 입교, 1955년 육군사관학교를 11기로 졸업하고 육군 소위임관했다. 전두환, 노태우가 육사 11기 동기생이다. 1964년 전두환, 노태우, 손영길, 김복동 등과 사적 모임인 하나회 조직에 참여하였다.

1977년 육군특수전사령부 참모장을 거쳐 준장으로 진급하였다. 1978년 제50향토보병사단 사단장이 되었다. 12.12 군사반란 이후 정병주의 뒤를 이어 특전사령관에 취임했다.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광주서울을 3차례 오가면서 공수부대로부터 보고를 받거나 현장 상황을 확인했다. 5월 27일 상무충정작전 직전 육군본부로부터 가발, 수류탄 등 군수품을 지원받아 현지의 공수부대에 제공했다. 이 때 발포 명령자라는 논란이 있었다.

1981년 대장으로 진급하였고 그 해 12월 제3야전군사령관이 되었다. 1983년 12월 황영시의 뒤를 이어 육군참모총장에 취임했다.

2.3 관료 시절

1985년 12월 예편한 다음 일해재단 연구위원에 임명되었다.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초기 수습책으로 김종호의 뒤를 이어 내무부장관에 임명되었다가 [2] 4개월 만인 그 해 5월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축소 의혹이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 등에 의해 폭로되면서 민십 수습 차원에서 개각이 일어나 노신영 국무총리, 장세동 국가안전기획부장 등과 함께 경질되었다.

6월 항쟁6.29 선언 이후인 같은 해 7월 국방장관으로 내각에 복귀하여 전두환 대통령 퇴임 때까지 임명되었다. 짧은 재임기간 때문에 국방장관으로서 눈에 띄는 치적(?)은 없었지만, 해병대 사령부의 재창설이 실현된 것 정도가 그나마 기억될만한 성과.

2.4 정치인 시절과 구속수감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대구직할시 서구 갑에서 출마해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그러나 여소야대 국회에서 제5공화국 비리와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청문회로 사회 여론이 공직사퇴요구를 제기하자 결국 1990년 1월 8일에 국회의원직을 사퇴했다. 이후 명예회복을 위해 자신의 지역구 보궐선거에 다시 출마했지만 정치적 부담을 느낀 노태우 정부의 압력에 의해 후보직에서 다시 사퇴했다.

1992년 다시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고 후에 민주자유당에 입당하였다. 이후 민주자유당 김영삼 후보의 대통령 선거운동을 도왔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의 과거청산 작업에 따라 1996년에 다시 12.12 군사반란5.18 민주화운동 관련 혐의로 구속되어 유죄가 확정됨과 동시에 의원직을 상실했다.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 옥중에서 대구 서갑에 출마하였으나 2위로 백승홍에게 석패하였다.

재판소에서, 5.18 민주화운동 당시 정호용은 5.18 당시 전두환과 지속적으로 접촉하고 수 차례나 광주와 서울을 오갔다. 또한 정호용은 특전사령관이었기 때문에 특전사 소속 부대의 잔혹행위를 둘러싸고 훗날 책임론이 제기됐다. 1989년에 열린 광주특위 청문회에서 정호용은 당시 특전사 소속의 진압부대들은 당시 광주 상무대에 있던 전투교육사령부에 배속됐기 때문에 자신의 책임은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신군부는 공식적인 지휘계통을 무시하고 사조직 하나회의 인맥에 의한 명령을 내리는 일이 빈발했음을 고려해야 한다. 1996년 1월에는 5.18 검찰 수사 결과 정호용이 5.17 내란에서의 내란모의참여와 5.18 민주화운동 진압 과정에 관여했다는 것이 밝혀졌고, 이에 따라 이듬해 1997년 4월 대법원은 정호용에게 내란모의참여죄, 내란목적살인죄 등으로 징역 7년을 선고했다.

김영삼 대통령이 12·12, 5·18 관련자를 사면하면서 석방된 정호용은 별다른 활동 없이 지내다가 2002년에 종친인 정몽준의 대통령 선거 출마를 돕기도 했다.

3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선거종류소속정당득표수(득표율)당선여부비고
1988제13대 국회의원 선거 (대구 서 갑)민주정의당52,847 (54.3%)당선 (1위)1990. 1. 8 의원직 사퇴
19901990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대구 서 갑)[3]무소속-후보사퇴
1992제14대 국회의원 선거 (대구 서 갑)무소속50,533 (51.5%)당선 (1위)민주자유당 입당
1996제15대 국회의원 선거 (대구 서 갑)무소속19,583 (26.8%)낙선 (2위)옥중출마
  1. 대구지역에서 김영삼의 대통령 선거운동을 도우면서 한 말.근데 김영삼 집권후 토사구팽
  2. 당시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때리느냐"냐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3. 전임자 정호용(본인 맞다) 의원직 사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