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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개요
북한의 통화. 세계에서 가장 쓸모없는 화폐 이 돈을 만들기엔 종이가 너무 아깝다...[1] ISO 4217 코드는 KPW이며, 기호는 일단 ₩이나 실생활에선 한글로 "원"이라고 쓴다. 일단 북한 정부가 발표하는 공식 환율은 900원/USD이지만, 실제로 시장에서 유통되는 환율은 짐바브웨 달러 마냥 끝도 없이 치솟고 있어 (어디까지나 비유적이지, 상승 속도 자체는 실제 짐바브웨 달러보다 훨씬 느렸다.이미 그딴 것이랑 비교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막장이다.) 아예 미국달러나 유로화, 위안화로 전향한 인민들이 많다.[2] 2013년 이미 장마당의 반 이상이 위안화로 거래되고 있다고 한다.
일단 2016년 3월 기준으로 명목상 900원/USD, 시장환율로는 약 8,150원/USD.(북한 7원 = 남한 1원) 을 가리키고 있다. 유엔제재에도 불구하고 큰 변화가 없다고 한다. 이쯤되면 왠만한 고액권 지폐한장이 고급물티슈보다 가치가 없다 이 화폐는 전세계에서 짐바브웨와 같이 위조비용이 위조로 얻는 돈보다 비싸서 위조지폐조차 만들지 않는 화폐로 악명이 높다. 2016년, 위조지폐 150kg이 발견되었다. 아마도 가까운 미래에 시장환율은 [ 1 미국 달러 = 1천 남한 원 = 1만 북한 원 ]이 될 수도 있겠다.
2009년의 병맛나는 화폐개혁 때문에 인플레가 지독해져 지금은 사실상 휴지조각만도 못한 존재가 되었다. 비단 대한민국 뿐 아니라 인근 나라인 일본이나 대만, 심지어 중국에서 조차 이것의 환전은 불가능하다. 이유는 다른게 아니라 취급이 까다로워 꺼리기 때문(...)[3] 여기엔 명색이 사회주의국가인 북한의 사정도 있어, 외국인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원화 사용금지에 기반한다. 예전엔 태환권이 있었지만, 지금은 폐지하고 소위 원쑤놈들이 사용하는 돈과 그 원쑤놈의 친구들이 사용하는 돈을 공식적으로 외국인용 화폐로 지정한 상태다. 츤데레? 사람은 미워하되 돈은 미워하지 말자는거지 그러므로 남한 사람들은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구경할 일이 없으나 북한 상인과 일반 인민들에 의해 중국의 중개상에게 넘겨져 점차 유출되는 방식으로 퍼져 이 루트를 타면 손 쉽게 구할수 있다. 북-중 국경 근처(단둥시, 도문시)의 가게에서도 볼 수 있고 파주, 고성(강원도) 소재 통일전망대에서도 팔고 있으나 화폐 가치에 비해 굉장히 비싸므로 별로 추천하지 않는다. 가장 저렴한 곳은 다름아닌 이베이(...). 국내 화폐상에서도 약간 가격이 있긴 하다만 나름 간단히 구할 수 있다. 참고로 중국 등 제3국을 통해 북한 화폐를 들여오는 것은 불법이 아니라고 한다.해당 판결 기사
1.1 평양 시내의 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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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 참고용 사진. 2012년 경 북한 최초의 대형마트인 광복지구상업중심이 개장했을 당시 리포터가 식용유, 샴푸와 기타 화장품, 2~3kg 정도의 모듬빵, 음료수 2병, 술 1병을 구입했을 때 상품가격이다. 그런데... 최고액권을 대체 몇장 줘야할 지 모를 숫자가 인상적이다(...)[4] 여담으로 이정도면 북한 노동자의 한달월급과 맞먹는다.
유튜브에서 북한(평양)을 관광 갔다온 외국인들이 찍어서 올린 동영상들을 살펴보면 대략적으로나마 가장 나은 형태로[5] 추정할 수 있다. 2014년 평양 기준으로 호떡이나 밀전병 같은 간단한 간식이 3,500원, 간단한 소형 전자기기들도 50만원 ~ 2백만원에 필적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시장환율로 환산시 대한민국 서울 물가와 엇비슷하다고 추정된다. 물론 평양사람들의 벌이가 서울사람과 똑같지는 않다만 설마 통일 이후 화폐 통합을 대비한 빅 픽처?
알아두어야 할 것은 평양 물가가 북한 전체의 물가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평양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6] 지방과의 물가는 괴리될 대로 괴리되어 있다고 한다. 결정적으로, 평양은 상위 5% 정도만 모아 둔 동네다. 쉽게 말해 금수저들만 사는 동네라고 보면 된다.
2 시리즈
북한 원은 5회의 화폐개혁을 거쳤기 때문에 모두 더해 5개의 시리즈가 존재한다. 하지만 개혁을 했어도 ISO 4217 코드는 바뀌지 않았다. 시스템이 막장인데 바꿀 필요까지 있을리가 특이한 점이 있다면, 대부분의 나라에서 화폐개혁을 하거나 디자인을 바꾸면 짧아도 2~3년 정도는 교환을 위해 유예기간을 두는것이 일반적인데 반해 '혹이위대한 원쑤령놈님'께선 언제나 게릴라급으로 내놓고는 딱 1주일 가량의 여유만을 주셨다.
2.1 소련군사령부 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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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면 공통) | (뒷면 공통) |
1945년 여름에 소련국가은행/재무인민위원회/국방인민위원회가 엔화로 표시한 군표의 발행을 제안했으니, 소련 인민위원회의에서 소련군에 대하여 금융지원을 결정하면서 소련군이 점령한 곳에서 소련국가은행의 금루블로 거래하는 행위를 엄금했다. 1945년 가을에 소련 인민위원회의에서 엔화로 표시한 군표의 발행을 지시했으니, 북한 땅을 다스리는 소련군사령부는 조선 엔과 등가로 교환이 가능한 군표를 발행했다. 1엔/5엔/10엔/100엔의 4종류가 발행되었다.
2.2 1기 (1차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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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 앞면 공통) | (전화 뒷면 공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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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는다.)
- 전화 (15전, 20전, 50전) / 원화 (1원, 5원, 10원, 100원) = 7종
아줌마, 25전만 거슬러줘요.[7]
1947년 12월 6일부터 1947년 12월 12일까지 일본 제국의 조선 은행권 1엔을 조선중앙은행권 1원으로 바꾸어 주는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1947년 12월에는 일본 제국의 조선 은행권 20억 엔과 소련군사령부의 군표 80억 엔이 북한 땅에서 돌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 제국의 본토에서 1946년에 실행한 [ 1 : 1 ] 화폐개혁과 소비에트 연방의 본토에서 1947년에 실행한 [ 10 : 1 ] 화폐개혁은 일본 은행과 소련국가은행이 일본 제국의 금엔과 소비에트 연방의 군표에 대하여 보증을 거부하는 명분이 되었으니, 북한의 국민경제를 위해서 화폐개혁을 실행한 것이다. 당시의 화폐 개혁의 원칙은 다음과 같다.
(가) 1세대 단위로 세대주는 500원, 만 18세 이상의 동거가족 1명에 대해서는 200원으로 계산된 금액까지 교환할 수가 있었고, 육해공군/공안당국/민정관청/국유기업/사회단체에서 근무하는 사람들과 국가로부터 생활보조를 받는 사람들은 1947년 11월 봉급과 동액까지 교환할 수가 있었지만, 그들의 가족에 대하여 교환하지 않았다.
(나) 10명 이상의 노동자와 사무원을 고용하는 민간기업소 및 민간단체에 대해서는 교환액이 1947년 11월 지불임금의 50%를 넘지 못했고, 10명 이하의 노동자와 사무원을 고용하는 민간기업가, 수공업자, 소상인 및 자유직업자들은 1947년 11월 납세한 액수에 대하여 시도 인민위원회 재정과장의 증명서를 제출하여 사업소득세 또는 자유소득세의 과세표준액 1개월분의 반액까지 교환할 수가 있었다.
(다) 농민들은 현물세를 납부한 농가에 한하여 1호당 700원까지 교환할 수가 있었고, 기숙사에 있는 중등학교 이상의 학생은 교장증명서를 제출하여 500원씩 교환할 수가 있었고, 전문학교학생 및 대학생들은 1명당 1개월분의 국가장학금 지급액에 준해서 교환할 수가 있었다.
(라) 여행하고 있는 사람은 여행증명서를 제출하여 500원까지 교환할 수가 있었고, 세대주가 감옥에서 복역하는 경우에는 동장증명서를 제출하여 500원을 가족이 교환할 수가 있었고, 소련군에 속한 사람과 인민군에 속한 사람에 대해서는 일반교환소에서 취급하지 않았다.
(마) 소련군은 병영에서 소련군사령부의 군표를 조선중앙은행권에 무제한으로 등가교환해 소련군의 주둔비를 북한인들에게 전가했다.
이렇게 해서 동결한 예금 가운데 단체예금은 1947년 12월 5일을 기준으로 하여 육해공군/공안당국/민정관청/국유기업/사회단체의 예금은 전액 지불하고 그 뒤에 입금된 금액은 동결했다. 협동조합과 백화점의 예금은 화폐개혁 직후에 물가가 절반으로 내려갔다는 기준을 적용하여 교환기간까지의 예금총계의 50%를 지불하였다. 민간예금은 1948년 2월 25일에 지불했는데, 1명의 예금자에 대하여 1개의 계좌로 통합하면서 특정한 계산법에 따라 지불액을 산출하고 잔액은 무이자예금으로 동결했다. 민간예금을 새돈으로 지불하는 계산법을 보아라.
(가) 2000원 이하는 전액지불하고, 2000원 초과-5000원 이하는 옛돈 5000원=>새돈 2000원+(3000원X50%)
(나) 5000원 초과-10000원 이하는 옛돈 10000원=>새돈 2000원+(3000원X50%)+(5000원X30%)
(다) 10000원 초과-50000원 이하는 옛돈 50000원=>새돈 2000원+(3000원X50%)+(5000원X30%)+(40000원X20%)
(라) 50000원 초과는 옛돈 100000원=>새돈 2000원+(3000원X50%)+(5000원X30%)+(40000원X20%)+(50000원X10%)
훗날 북한 경제가 말이 아니게 되자, 돈 많은 외쿡인들 돈이라도 뜯어볼려고 이 지폐들을 마구 재발행해 팔아버린 흑역사가 있다. 지금도 이베이나 화폐상을 돌아보면 10달러도 남짓의 똥값으로 발견할 수 있을 정도. 진품은 색깔이 좀 노랗고, 빛에 비춰보면 체크무늬가 보인다. (이를 투문(透紋)이라고 한다. 대한민국 원 지폐에도 그 지폐에 나오는 인물이 투문으로 따로 새겨져 있다.)
2.3 2기 (2차 시리즈)
1959년 2월 13일부터 1959년 2월 17일까지 [ 100 : 1 ]로 무제한으로 교환했는데, 북한판 경제개혁운동의 일환인 천리마 운동의 일부로서 투자재원을 수집하기 위해 도입되었다. 이 화폐가 공식적으로 쓰여졌을때가 북한경제의 리즈시절이기도 하다.[8]
실제로 이 시리즈는 북한 원화 중에서는 가장 구하기 어려우며, 가장 비싸기도 하다. 지폐 6종류와 동전 3종류(10전, 5전, 1전)가 발행되었다. 그리고, 이 시리즈부터 화폐에 한자(漢字)가 사라진 것도 특징이다.
앞면 | 뒷면 | ||
width=100% | 오십전 | - | |
width=100% | 일 원 | 고기잡이 배 | - |
width=100% | 오 원 | 김일성종합대학 | - |
width=100% | 십 원 | 대동문 | 과일 따는 에미나이 |
width=100% | 오십원 | 대동강 | 쌀 수확하는 에미나이 |
width=100% | 백 원 | 흥남종합질소비료사업소 | 금강산 |
2.4 3기 (3차 시리즈)
1979년 4월 7일부터 1979년 4월 12일까지 [ 1 : 1 ]로 교환했는데, 다른 의도는 전혀 없고 디자인만 바뀐 흔한 개혁조치 수준. 50전 지폐가 없어진 대신에 천리마 동상이 그려진 동전이 생겼다. 본격적으로 북한 경제를 지탱하던 천리마 운동의 퇴색 탓으로 추정. 그런데 옛돈을 새돈으로 교환하는 절차는 1명당 1회만 할 수가 있었고, 옛돈을 새돈으로 교환하면서 가능하면 전액을 저금해서 필요한 만큼의 돈을 가끔 인출할 것을 장려했다. 그러니까 무현금유통을 뒷받침하는 은행저축사업을 홍보한 것이다.
실질적으로 이때부터 태환권이 발행되어 환율을 도입했는데, 공식 고정환율로 미국 1달러는 북한 2.18원이었다. 따로 태환권이라는 종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지폐 뒷면에 도장을 찍어서 구분했었다. 사회주의국가출신 외국인에겐 붉은 도장이 찍힌 것을, 자본주의국가출신 외국인에겐 푸른 도장이 찍힌 것을 주었다. 한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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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988년에 조선무역은행에서 위와 같이 내국인용과 완전히 다른 모습의 외화와 바꾼 돈표라는 이름의 태환권을 발행했는데, 매우 조악한 질을 자랑했었다. 분홍색 국제우의전람관[9]이 그려진 것이 사회주의국가용, 청록색 천리마상이 그려진 것이 자본주의국가용이다.
그리고 지폐에 김일성이 그려진 첫 시리즈이기도 하다. 50전은 동전으로 바꾸면서 삭제.
앞면 | 뒷면 | ||
일 원 | 나팔부는 소년, 꽃 든 소녀, 정복 입은 청년, 후프 체조하는 처녀, 세상에부럼[10]없어라 | 한 자위단원의 운명(영화/혁명가극), 꽃파는 처녀(영화/혁명가극), 피바다(영화/혁명가극), 평양거리 | |
width=100% | |||
오 원 | 대학생 및 공업도시 풍경 | 금강산 | |
십 원 | 천리마 동상 | 남포특별시 천리마제강연합기업소 | |
오 십 원 | 주체와 4대 계층(정치인민, 노동인민, 농부인민, 군인) | 개마고원 호수 | |
백 원 | 혁명의 영재이시며 민족의 태양이시며 전설적 영웅이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11] | 혁명의 요람(...) 만경대 고향집 |
2.5 4기 (4차 시리즈)
대부분 "북한돈" 하면 떠올리는 시리즈로, 1992년 7월 15일부터 1992년 7월 20일까지 [ 1 : 1 ]로 교환했다. (그리고 3년뒤 북한은 괴멸적인 경제난을 겪게된다.) 자연인 1명당 400원을 초과한 옛돈을 새돈으로 교환을 거부하면서 400원을 초과한 액수의 옛돈을 조선중앙은행으로 입금했으며, 자연인 1명당 30000원 이상의 옛돈을 저금할 수가 없게 했으니, 처음으로 재정회수를 위해 계획적으로 자행한 화폐개혁이다. 하지만 교체 당시만 해도 김일성이 버젓이 살아있었고, 그 위대하신 수령님이 원하신다는데 선량한 인민들이 무엇을 의심할까, 그냥 당의 선전만 믿고 입금했다 큰 낭패를 보고 말았다.
북한의 국민경제가 점차 나빠지게 될 때에 발행한 것인데, 그냥 보면 매우 복잡한 구성으로 보이겠지만, 처음 도입했을 무렵에는 3차 시리즈를 계승하여 100원, 50원, 10원, 5원, 1원 5종류를 그대로 발행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경제난으로 인한 물가폭등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1998년에 500원권을 추가 하였다. 이것이 1959년 이후로 등장한 첫 고액권이었다. 그 후 2002년 7월 1일의 조치에 따라 1000원권과 5000원권을 발행하면서 2005년에는 200원권을 발행했다. 동전도 마찬가지로 1987년에 1원짜리가 등장한 이후로 계속 변화가 없다가, 2005년에 5원, 10원, 50원, 100원짜리를 급조했다.[12] 이는 2009년에 모두 폐기되어버렸다. 지폐그림 출처이따위 지폐에 SPECIMEN 따윈 안새겨넣어도 된다. 워낙 가치가 없는 돈이라 위조지폐조차 안만든다.[13][14]
지폐 도안 (위 : 앞면 / 아래 : 뒷면) | 앞면 | 뒷면 | |
일원 | 영화 "꽃 파는 처녀"의 주인공 꽃분이(홍영희) | 금강산, 선녀 | |
오원 | 학생과 지구본 | 인민대학습당 | |
십원 | 노동자, 천리마 동상 | 서해갑문 | |
오십원 | (군인이 제외된)3대 인민계층, 주체사상탑 | 백두산 풍경 | |
백원 | 김일성 | 만경대 (김일성 생가) [15] | |
이백원 | 목련화 | - | |
오백원 | 금수산태양궁전 | 금릉 제2터널, 청류교 | |
천원 | 김일성 | 만경대 | |
오천원 |
- 백원(적색), 천원(녹색), 오천원(보라색)은 티끌 하나 다르지 않고 색깔만 다른 바리에이션이다.
컬러링만 보면 나나 빠진 텔레토비다. - 모에모에 북조선 독본에 의하면 이 시리즈의 1원짜리도 모에모에하다 카더라.
2.6 5기 (5차 시리즈)
2009년 11월 30일에 도입, 동년 12월 6일까지만 교체가 진행된(단, 어디까지나 표면적으로) 시리즈. 계획경제의 강화와 팽창된 통화를 회수하기 위해 발행하였으며, 북한 사상 처음으로 실패를 인정한 통화개혁이기도 하다.
구권과 신권을 은행에서 교환하는 비율은 [ 100 : 1 ]인데 누구나 은행에 입금하면 10배 부풀려서 넣어준다는 선전까지 했을 정도로 그 의도가 확실했다. 이것부터 막장이다 하지만 이미 4차 개혁때의 사기극을 모르는 인민이 없었으니 어떻게든 안 넣으려 안간힘을 쓰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당시의 상황은 북한의 화폐개혁항목에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으니, 이쪽을 참고하도록 하자.
앞면 | 뒷면 | ||
width=100% | 오원 | 수력발전소 | |
width=100% | 십원 |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탑 (공식명칭) | |
width=100% | 오십원 | 인민 3대 계층[17] | 조선로동당 창건기념탑 |
width=100% | 백원 | 목련화(북한의 국화) | - |
width=100% | 이백원 | 천리마상 | |
width=100% | 오백원 | 평양 개선문 | |
width=100% | 천원 | 김정숙 생가 | 삼지연 |
width=100% | 이천원 | 백두산 비궁 [18] | 백두산 천지 |
width=100% | 오천원 | 김일성 | 만경대 |
width=100% | 만경대 | 국제친선관람관 |
- 동전은 5종류(1원(김일성화), 50전(김정일화), 10전(진달래), 5전(목란꽃), 1전(철죽꽃)가 있다.
- 신권 5천원권이 등장함으로서 김일성 도안이 은퇴했다.
3 이야기거리
- 국내 모 새터민 토크쇼에서 썰을 풀길, 이집트에서 이 북한 원화를 남한 원화로 혼동하여 잘못 환전해주는 바람에 큰 손실을 입었다는 이야기를 언급했었다.
-
화폐 가치가 화장실 휴지 한쪽보다도 못하여로동신문과 함께 담배잎이나 마약가루를 말아서 피우기 정말 좋다고 한다. 특히 마약피우는데 유용하다.당연히 여기에 나온 대로 정말 북한돈을 마약 피우는데 쓰면 콩밥먹는다마약을 구하는 것도 대단하고 북한 돈을 구한다는 것도 대단하니, 참 여러 모로 대단한 짓이다김일성 도안이 있었을 당시에는 정치범으로 몰릴 가능성이 있어서 조심했었지만 갈아엎은 현재라면 그리 문제가 아니라고.그럼 마약 핀 것은 문제가 아니라는 건가!?김일성>>>>>마약
4 만일 대한민국이 북한을 흡수통일한다면?
일단 흡수통일을 달성한 독일의 경험을 살펴 보자. 동독 마르크와 서독 마르크의 환율에 대하여 동독의 법정 환율( 서독에서 동독으로 여행할 때에 쓰이는 환율 )과 서독의 시장 환율( 동독에서 서독으로 여행할 때에 쓰이는 환율 )이 있었다. 동독의 독일국가은행에 따르면 1989년 10월까지 동독의 특수은행에서 합법적으로 거래하는 동독 마르크와 서독 마르크의 법정 환율을 [ 1 : 1 ]로 유지했지만, 서독의 독일연방은행에 따르면 1989년 10월부터 서독의 외환시장에서 합법적으로 거래하는 동독 마르크와 서독 마르크의 시장 환율이 [ 10 : 1 ]에 이르렀다. 그런데 동독이 서독에 통합한 1990년에는 정치적인 이유로 결단을 내려 [ 1 : 1 ]로 교환하는 바람에 가치가 매우 낮은 동독 마르크의 가치가 갑자기 몇배 이상 폭등했고 동독 마르크를 [ 1 : 1 ]로 서독 마르크와 교환한 동독 주민들은 처음에는 행복했으나 동독계 기업의 부실화와 동독계 일자리의 감소에 행복하지 못했다. 다행스럽게도 서독산 소비재의 대량 공급과 독일연방은행의 고금리 정책에 힘입어 옛 동독 지역의 물가는 가까스로 안정을 유지했다.
'북한 화폐 정리 사업'은 대략 6가지의 시나리오가 있다. 가장 먼저 구글 도서의 원문 검색과 외국어판 위키피디아를 활용하면서 데일리엔케이 웹사이트와 한국은행 경제통계 웹사이트를 꼼꼼하게 살피고, 그 다음에 일반인들이 국회도서관이나 RISS에서 공짜로 다운로드가 가능한 논문들( 북한의 화폐개혁에 관한 연구 ; 이진욱 / 화폐통합이론과 남북한에의 적용 ; 서양원 / 남북한 통화 및 임금통합에 관한 연구 ; 강석준 / 통일독일의 경제통합 정책과 남북한 경제통합 ; 조윤수 )을 꼼꼼하게 살펴야 추측이 가능하다.
4.1 북한의 화폐를 남한의 화폐로 바꾸기
- 교환이 전혀 없는 무효 처분 : 1939년에 소련군이 점령한 폴란드 영토에서 금루블( 1947년의 [ 10 : 1 ] 화폐개혁 이전의 소련국가은행권 )로 거래하면서 즈워티( 1939년 이전의 폴란드 은행권 )를 그냥 0으로 없애버렸다. 그런데 북한에서 인민폐( 1955년의 [ 10,000 : 1 ] 화폐개혁 이후의 중국인민은행권 )로 거래하면서 북한 원(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중앙은행권 )을 잔돈으로 쓰고 있다. 독하게 마음만 먹으면 실천이 가능한 일이다.
- [ 1 : 1 ] 교환 : 북한 원(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중앙은행권 )을 남한 원( 한국 은행권 ) 으로 자연인 1명당 1억 원까지 [ 1 : 1 ]로 교환하면서 1억 원을 초과한 금액은 모두 0으로 처분한다.[19]
북한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이 교환하는 액수의 상한선에 대하여 불쾌한 경험을 회상하면서 반발할 수가 있다.
- [ 10 : 1 ] 교환 : 남북한의 달러-원 환율( 1 미국 달러 = 1천 남한 원 = 1만 북한 원 )의 차이[20] 및 남북한의 1인당 국민소득( 3만 미국 달러 vs 3천 미국 달러 )의 차이를 반영한, 남한 원( 한국 은행권 )과 북한 원(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중앙은행권 )의 무제한 교환 비율.
- [ 100 : 1 ] 교환 : 남북한의 국내 총생산( 1조 미국 달러 vs 100억 미국 달러 )의 차이 및 남북한의 가장 비싼 매월 임금의 차이( 1억 남한 원 vs 1백만 북한 원 )를 반영한, 남한 원( 한국 은행권 )과 북한 원(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중앙은행권 )의 무제한 교환 비율.
4.2 남북한의 화폐를 모두 갈아치우기
- [ 10,000 : 1 ] 교환 : 가장 먼저 남한에서 화폐개혁( OLD 1만 원 = NEW 1원 )을 실행하여 남한 원( 한국 은행권 )을 배포하면, 그 다음에 북한에서 화폐개혁( OLD 1만 원 = NEW 1원 )을 실행하여 북한 원( 조선 은행권 )을 배포한다. 남북한의 전역에서 달러-원 환율에 대하여 [ 1 미국 달러 = 1 남한 원 = 1 북한 원 ]으로 개정하면, 부당이득을 청산하면서 수출입을 뒷받침할 수가 있다.
- [ 1,000,000 : 1 ] 교환 : 남북한의 전역에서 120년 동안의 도매 물가를 하루아침에 삭감하면서[21] 일본 제국의 금엔( 1円 = 1백 錢 = 1천 厘 = 1만 文 )처럼 [ 순금 1그램 = 1백 미국 달러 = 1백만 원 = 1환 ] => [ 순은 1그램 = 1 미국 달러 = 1만 원 = 1백 전 ] => [ 순동 1그램 = 1센트 = 1백 원 = 1전 ]으로 규정한 무제한 교환 비율.[22]
남북한이 정치적으로 통일되더라도 남북간 경제 격차가 너무 큰 탓에 화폐 통합은 일단 뒤로 미루고 남북이 화폐를 따로 발행하는 과도 기간을 설정할 수도 있다.#[23] 실제로 중국의 경우 중국 위안화(인민폐) 외에 홍콩 달러, 마카오 파타카를 따로 존치하고 있고, 영국처럼 본토 지역 외에 속령이 있는 국가들의 경우도 비슷하게 속령마다 독자 화폐를 두고 있는 경우가 적잖이 있다.[24] 따라서 1국가 2화폐 정책이 특이한 건 아니다. 단 통일 후 노동 시장이 급속히 한데 통합돼 버릴 경우(또는 북한의 정치 상황이 바뀌어 통일 전에 북한의 노동 시장이 개방될 경우) 이 방식을 도입하기도 쉽지 않다. 화폐가 제각각이면 인적·물적 교류상 오히려 손해가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 ↑ 그래도 소말리아 실링이나 과거 짐바브웨 달러만큼은 아니다(...)
이게 자랑거리라고 하는 소리인지는 묻지말자. - ↑ 정확하게는 교통비나 쌀 값같은 기초 생활비는 북한돈을 쓰기는 하지만 재산축적용으로 쓰기엔 인플레가 너무 심해서 외화로 저축하고 있는 것. 중국 자본이 많이 진출해있는 라선특별시는 장마당(=재래시장)에서도 중국 위안화가 일상적으로 쓰인다고 한다. 두부 한모에 1위안 이런식으로...
- ↑ 가치변동이 너무 심각하다. 예를 들면 오늘 대한민국 원으로 만원으로 북한 원 십만원을 교환할 수 있었으나 다음날 백만원까지 폭락하는 등(...) 언제 무슨 연유로 단 하루만에 보유한 금융자산이 1/10로 떨어지는 사태가 북한에선 충분히 일어날 수도 있다.
- ↑ 짤방 속 가격은 360780.00원(소수점을 잘 봐라.)이다. 최고액권 72장을 내고 780원을 더 내야 한다.
- ↑ 남한에서도 세계각국의 물가를 이야기할 때 수도(首都)의 물가를 기준으로 삼는다. 다만 북한의 경우는 지방물가와 수도물가가 심각하게 차이가 난다는게 문제(...)
- ↑ 여행증 항목 참고. 단순 경유만으로도 허가 없이 입경하면 처벌을 받는다!
- ↑ 5전, 10전, 25전만 만들 수 없고, 다른 것 (예: 1원 25전)은 조합을 통해 만들 수 있다.
- ↑ 남한은 이 시절만 해도 엄청난 경제혼란으로 고심하고 있던 세계적인 후진국 중 하나였다. 반대로 북한은 소련의 막대한 물자지원과 동독의 기술지원(동독도 기술력 세계제이이이...일인 나치독일의 후신이다.)으로 적어도 굶주리진 않던 전성기였다. 아니 굶주리긴 커녕 탈북자 노인의 증언을 들어보면 이 시절에는 별별 먹을 것들을 무상으로 가득 먹고 전기도 남아돌던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옆 동네에서 미증유의 병크가 터지는 바람에 옆 동네의 조선족들이 국경을 넘어서 먹을것을 달라고 하던 시절이었다! 실제 통계를 보면 두자릿수 경제성장을 매년(1950년대 후반~1960년대 중반) 기록했을 정도. 남북한의 경제력이 뒤집히는 시기는 70년대 중반이다.
그놈의 주체교때문에 - ↑ "국제친선전람관"이라고도 한다. 평안북도 향산군 묘향산에 위치한 박물관 비슷한 곳으로 세계 각국에서 김일성에게 보낸 선물들을 보관해 선전에 자주 쓰는 편이다. 예를 들면 "전세계가 김일성 주석을 위대하게 여겨 이런 공물(...)을 바쳤다"라는 식.
현실은 그냥 관례상 보낸 선물인 경우가 대부분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는 것은 물론, 신발 신고 들어가도 안 된다! - ↑ 북한에서는 부러움의 줄임말로 쓰인다.
- ↑ 손발이 오그라들겠지만, 정말로 이렇게 썼다(...). 현재까지 등장한 근대이후 화폐 중에서, 이 지폐만 직접 긴 선전설명글을 넣었다.
- ↑ 실물을 보면 알겠지만, 디자인도 그렇고 동전 질도 그렇고 심각하게 조악하다.
- ↑ 북한돈 5천원의 가치가 미국 50센트에도 못미친다. 쉽게 설명하자면 북한돈 최고액권의 가치래봐야 남한돈으로 따지면 오백원 주화 한닢에 불과하다.
- ↑ 참고로 앞의 주석은 2010년도 기준이다. 2014년도 현재에는 그 가치가 더 하락했기 때문에 오히려 남한 돈 오백원 주화가 북한돈 오천원권 지폐보다 가치가 높다(...). 결론적으로 북한돈 100원부터는 한국돈 1원보다도 가치가 낮다. 이걸 위조지폐를 만드는게 얼마나 배보다 배꼽이 더 큰지는 설명조차 아깝다.
- ↑ 3차에 달려있던 긴 수식어는 빠졌다.
- ↑ 여담으로 세 사람의 얼굴 생김새가 매우 흡사하다.
- ↑ 여담으로 여기도 세 사람의 얼굴 생김새가 매우 흡사하다.
- ↑ 김정일 생가라고 주장하는 별장이다.
- ↑ 남한의 국회의사당에서 예금자 보호법에 대하여 예금을 보호하는 최다 금액을 1억 원으로 인상하는 개정안을 지지하는 국회의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 ↑ 북한 국내의 암시장 환율 기준이다. 북한 정부에서 가끔 발표하는 국정 환율은 1996년부터 북한의 현실과 괴리되어 있다.
- ↑ 한국 은행과 낙성대 경제연구소 및 기획재정부 통계청과 서울특별시청 서울연구원에 따르면, 1901년부터 2020년까지 남한과 북한의 도매 물가 지수, 생산자 물가 지수, 쌀값, 밀값, 보리값, 금값, 은값, 구리값, M1, M2, M3, L은 1억 배만큼 올랐다.
- ↑ 2000년대에 북한 국내의 노동자들은 자연인 1명당 100만 원을 초과한 현금을 보유했고, 2010년대에 북한 국내의 사업소에서 받을 수가 있는 가장 비싼 매월 임금이 100만 원이다.
- ↑ 물론 북한이 남한 주도로 통일될 경우
반대 상황은 끔찍하니 생각하지 말자북한 지역에 통용될 화폐에서는 기존의 북한 체제를 선전하는 도안을 폐기하고 새로운 도안을 채택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화폐를 따로 발행한다 하여 반드시 남북이 별도의 감독·발행 기관을 둘 필요도 없을 것이다. 아무래도 한국은행과 한국조폐공사에서 남북의 화폐를 모두 관리하는 방식을 채택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 ↑ 외국의 사례를 들지 않더라도, 일제시대에 조선은행권이 따로 발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