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 비셔스

프로레슬러 시드 비셔스를 찾아오신 분은 사이코 시드 항목으로.

시드 비셔스
Sid Vicious
1957년 5월 10일 ~ 1979년 2월 2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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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살아가기엔 너무 타락해버렸고[2] 죽기엔 너무 어리다. (Too fast to live, too young to die)

- 비비안 웨스트우드[3]

펑크 록의 영원한 아이콘이자 희대의 또라이
여자친구를 잘못 만난 케이스의 대표적인 인물

70년대 영국 펑크밴드 섹스 피스톨즈얼굴마담 베이시스트. 인터뷰 중 "I just cash in on the fact that I'm good looking, and I've got a nice figure and girls like me.(난 잘생긴 얼굴로 돈 벌어먹는 거임ㅋ 여자들은 날 좋아하지ㅋ)"라고 발언한 적이 있다.

본명은 존 사이먼 리치(John Simon Ritchie). 1957년 5월 10일에 태어나 1979년 2월 2일 21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그것도 헤로인 과다 복용으로. 이러한 짧고 굵은 삶 때문에 인생 자체가 펑크라며, 수많은 중2병 팬들에게 레전설급 인물로 추앙받는다. 시드는 "나는 25세 이전에, 원하는 방식으로 인생을 산 후에 죽을 것이다."라는 말을 했는데, 그걸 그대로 실천해버렸다...

쟈니 로튼이 키우던 햄스터 '시드니'가 쟈니 로튼의 아버지를 깨물자, 쟈니 로튼의 아버지가 "이 햄스터 완전 사납구만.(Vicious!)"라고 한 것에서 예명이 비롯되었다. 그런데 쟈니는 그 햄스터를 '세상에서 가장 복슬복슬하고 부드럽고 나약한 존재'라고 묘사했다고.(...)

밴드를 자주 옮겨다닌 편으로, '수지 앤 더 밴쉬즈'[4] →'플라워즈 오브 로맨스'[5]를 거쳐 섹스 피스톨즈로 영입되었다. 참고로 시드 비셔스는 키도 크고(188cm 위너이시다.) 얼굴도 잘생겼지만 음악가로서의 능력은 제로. 이 당시 시드 비셔스는 드러머였는데 그의 드럼세트에는 심벌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무슨 지거리야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게 오히려 더 '펑크'스러웠다!

2 어린 시절


시드에게도 이런 순수한 어린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본격 타락 전.

시드는 버킹엄 궁전의 보안 요원인 아버지 '존 리치'와 히피 어머니 '앤 비벌리'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 아버지는 시드와 어머니를 남겨둔 채 떠났다. 그 후 앤 리치는 재혼하여 시드는 '존 베벌리'로 개명을 하기도 한다. 한동안은 모자 둘이서 스페인의 이비자섬에서 살기도 했고, 대부분 히피같은 사람들과 우루루 모여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헤로인을 접하고 곧 마약에 중독된 앤은 시드에게 마약을 가르쳐주었고, 시드도 17살부터 마약을 복용하였다고 한다.미친년ㅡㅡ 아들한테 무슨 지거리야! 사실상 타락의 원인 여자친구가 아니라 엄마를 잘못 만났구먼 평소 내성적인 시드는 마약만 빨면 펑크의 화신...이 아닌 가 되어 맹렬하게 날뛰고 자해까지도 서슴없이 하였다.

학교에서 쟈니 로튼과 가까워진 시드는 섹스 피스톨즈의 광팬이 되었다. 시드와 쟈니는 지역 단과대학교(칼리지)의 동창이었다.

시드와 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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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으로, 쟈니가 시드는 사실 패션 잡지 보고 따라하는 찌질이였다고 폭로했다...데이빗 보위의 머리나 따라하는 패션 빅팀이었다고 한다. 우리가 기억하는 펑크 패션으로 완전히 탈바꿈하는 데에는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영향이 컸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6]

3 섹스 피스톨즈 활동


배에 자해한 상처가 남아있다.

1977년 섹스 피스톨즈비틀즈폴 매카트니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베이시스트 글렌 매틀록을 짤라버렸다.[7] 이에 매니저 말콤 맥라렌은 후보를 물색하다가, 팬심 충만하던 시드를 만났다.[8] 시드는 끔찍한 첫인상을 남겨주었고, 베이스도 못치는게 깝치는데는 능했기 때문에 이 똘끼에 반한 맥라렌은 시드를 베이시스트로 데려오게 된다. 베이스를 치지 못하는데도 데려온 것은 단지 펑크정신 때문이라고.

시드는 원래 드러머여서 모터헤드의 베이시스트인 레미 킬미스터를 찾아가 베이스를 배웠지만 실패로 끝났다. 시드에 대한 래미의 평은 "음악가로서는 가망이 없는 녀석" 그래서 스튜디오 레코딩에서는 기타리스트인 스티브 존스가 베이스 파트를 연주했고, 공연할 때는 시드의 앰프 볼륨을 0에 맞추고 무대 뒤에서 다른 사람이 베이스를 연주 하였다. 막장. 근데 뮤직 비디오를 보면 시드의 손이 틀린 위치가 아닌 제대로 된 위치를 튕겼다(!)


시드는 공연에서 약을 빨고서 깨진 맥주병, 면도날 등으로 자해를 하여 강렬한 풩크정신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데에 일조하셨다. 또한 매니저였던 말콤이 마약을 못하게 하자 자기 몸에 깨진 병을 그어 '약을 줘'라는 글을 써서 공연중에 호소(...)한 적도 있는데, 팬들은 그저 멋진 퍼포먼스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건 사실 이기 팝이 몇년전에 이미 하던 짓이다. 실제로 시드 비셔스는 라몬즈이기 팝의 엄청난 팬이었기 때문에 베이스 연주는 라몬즈의 베이시스트 디디 라몬의 연주를, 무대 매너는 이기 팝의 방식을 엄청나게 흉내냈다. 다만 이기 팝과 똑같은 막장짓을 해도 시드 비셔스는 잘생겨서 펑크정신으로 똘똘 뭉친 멋진 오빠로 인기가 높았다는 것. 더러운 외모지상주의

후에 발간된 쟈니 로튼의 자서전을 보면, 처음에 시드는 베이스를 배워볼려는 의지가 있었고 그와 더불어 밴드의 분위기도 최고였지만 여자 친구를 잘못 만나면서 밴드가 꼬이기 시작했다라고 평하고 있다.

4 낸시와의 만남


여담으로 낸시 역시 시드처럼 타락 전 어렸을 적에는 이렇게 평범했었다.


시드의 짧은 인생을 논할 때 낸시를 빼먹을 순 없다.

1958년 2월 27일에 태어난 낸시 스펑겐(Nancy Laura Spungen)은 출생 때부터 기이한 아이였다.[9] 어릴 때부터 화를 잘 내고 공격적이어서 11살 때는 박물관에 데려다주지 않는다고 엄마를 망치로 공격했다고...(...) 13살일 때 처음으로 마약을 시도했고, 2년 후에는 완전한 중독자가 되었다. 17살 때는 집에서 쫓겨나기에 이른다.
낸시는 집에서 쫓겨난 후 엄청난 마약값을 감당하기 위하여 매춘부로 일하며 "구역질나는 낸시"로 불렸다. 돈을 벌 수 있다면 별의별 짓을 다 했다고... 미국인인 낸시는 섹스 피스톨즈의 1976년 영국 전국 투어인 "아나키 인 더 유케이 투어"에 게스트로 초청된 쟈니 썬더스의 밴드 쟈니 썬더스 하트브레이커스그루피로서 영국으로 건너온다. 그런 뒤 섹스 피스톨즈를 쫓아다니는 그루피(Groupie) 중 하나가 된다. 그리고, 마침내 이 여자는 시드를 꼬시는 데에 성공했다! 성공한 그루피

참고로 런던 펑크들은 당시에 생각보다 마약을 잘 몰랐다고 한다. 시드 비셔스는 워낙 어릴 때부터 마약과 친숙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런던의 펑크들은 의외로 마약을 많이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쟈니 썬더스[10]가 영국에 도착하고 나서 런던의 펑크밴드들 사이에서 마약의 사용이 급증했다고 한다.[11]

쟈니 로튼은 낸시를 정말로 싫어하고 경멸하여, 시드에게 낸시와 헤어지라고 애원했다. 저 년은 해로운 년이다 하지만 낸시는 시드와 꼭 붙어있었고, 시드도 밴드 생활을 등한시하기에 이르렀다. 어차피 베이스는 치지도 않잖아?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시드의 자물쇠 목걸이가 낸시의 선물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당시 밴드 프리텐더스(The Pretenders)의 기타 보컬을 맡고 있던 여걸 크리시 하인드(Chrissie Hynde)가 준 것이다. 물론 별다른 의미가 있는 선물은 아니었다고 한다.
일본 만화가 야자와 아이의 히트작 나나(NA NA)에서도 낸시가 시드의 목에 어떤 의미를 담아 채웠다는 식으로 나왔는데 그 덕분에 낸시의 선물이라는 얘기가 시드라는 인물을 애초에 몰랐던 만화팬들에게까지 아예 기정사실처럼 굳어졌으나, 사실은 아니다.

하지만 시드와 낸시가 마냥 알콩달콩 연애를 했던 것도 아니다. 그들은 실로 얀데레적인 연인 관계로, 거의 귀를 물어뜯을 정도로 격렬하게 싸우기도 하였고, 시드는 18층에서 창문 밖으로 낸시를 매달은 적도 있다고 한다. 애증으로 얽힌 관계...는 아니고 그냥 둘이 같이 약빨아서 이런거다(...) 실제로 시드는 낸시에게 잘 대해주었고, 낸시도 시드를 잘 챙겨주었다.

그러던 1978년 미국 순회공연 도중부터 낸시는 시드에게 네가 밴드의 리더가 돼야돼!라면서 시드 비셔스를 부추겼고 이예 시드는 공연을 할 때면 하라는 베이스 연주는 안하고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관객에게 쌩뚱맞는 멘트를 날리거나 욕을 해서 관객을 도발시킨 후, 관객이 화가나서 무대로 올라오면 베이스기타로 관객을 구타하는 등 도가 넘은 막장짓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당시 매니저 말콤 맥러렌 또한 밴드가 곡을 쓰거나 재충전을 할 여지를 주지 않고 무리한 투어일정을 잡은데다가 투어 급여를 받으면 '니네들 돈 받으면 어차피 마약 사는데 쓸 거잖아'하면서 급여의 일부로 마약을 사서 주고 나머지는 자신이 꿀꺽하는 등 밴드 자체로도 문제가 많았다고 한다. 심지어 스티브 존스는 "마치 아무동네나 가서 묘기 부리는 곡마단이 된 느낌"이었다고 하니 말 다한듯... 결국 쟈니 로튼은 시드에게 "네 놈이 낸시에 빠지더니 밴드를 소홀히 하는구나"라며 시드를 포함한 나머지 멤버들과 크게 싸우고 다음 날, 공연이 끝나고 미야코 호텔[12]의 로비에서 매니저 말콤 맥러렌과 엄청난 막장싸움을 벌인 뒤 영국으로 날아갔다. 섹스 피스톨즈의 실질적인 해체였다.

5 솔로활동

이후 시드 비셔스는 프랭크 시나트라의 My Way, 에디 코크런의 Somethin' Else, C'mon Everybody 등을 원곡을 제멋대로 부른.리메이크 싱글을 내서 솔로활동을 시작한다.
My Way
Somethin' Else
C'mon Everybody

낸시는 시드의 새 매니저로 자청하고 나섰고, 맨하튼의 유명 락 클럽인 '맥스의 캔자스 시티'이 시드의 공연 스케줄을 잡아주었다. 사람들은 그 유명한 시드 비셔스를 보기 위하여 몰려들었지만, 정작 공연은 엉망이였다. 시드가 '엿이나 먹어라!' 하며 우스꽝스럽게 불렀기 때문.
츄파를 받는데 호응하긴 망정 총을 쏴 10명의 관객들을 죽여버렸다(...)[13] 이 당시 시드 비셔스는 "비셔스 화이트 키즈"라는 이름의 밴드를 이끌기도 했는데 재미있는건 이 당시 베이시스트가 섹스 피스톨즈의 초대 베이시스트 글렌 매틀록이었다(...).

이후 둘은 뉴욕의 첼시 호텔에 머무르며 함께 약을 빨았고 어느 날은 약에 취해서 자신들의 방 침대 매트리스에 불을 질러서 100호실로 방을 옮기는 등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 시점에서 시드 비셔스는 자신이 안전하지 않다고 느끼고 칼을 수집하고 있었고[14] 낸시는 1978년 10월 11일, 타임즈 스퀘어에 있는 칼 가게에서 손잡이에 재규어가 새겨져 있는 5인치 길이의 사냥용 접이식 칼을 사서 시드에게 선물로 주었다.

6 죽음

다음날인 1978년 10월 12일 아침, 낸시는 100호실 화장실에서 검은색 브라와 팬티만을 입은 채 시체로 발견되었다. 낸시의 하복부에는 어제 자신이 시드에게 선물한 칼이 찔려있었고 칼에 찔린 상처로 인하여 과다출혈로 사망한 상태였다. 시드 비셔스는 낸시의 시체를 발견하자 마자 가운 하나만을 걸친 채 울면서 호텔 로비의 카운터에 달려와서 "당장 앰블런스 불러!!!"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경찰이 도착했을때 시드 비셔스는 울면서 호텔 복도를 배회하고 있었다고 한다.

시드는 "내가 죽였어요. 왜냐하면 난 더러운 개거든요.(I did it because I'm a dirty dog.)"라고 진술했지만, 유죄나 무죄를 입증할 아무런 알리바이도 없었고 다른 용의자도 나타나지 않았다. 길고 지루한 법정 공방만 이어지다가, 결국 1979년 2월 1일 시드는 5만 달러의 보석금을 내고 풀려났다. 그리고 다음날인 1979년 2월 2일, 시드 비셔스는 그의 어머니가 석방을 축하한다면서 가져다준 대량의 헤로인을 투여하여 영원한 잠에 빠져들었다.

유골함이 히드로 공항 바닥에 떨어져 박살이 난 바람에 뼛가루가 에어컨 바람으로 공항 사방팔방에 흩어진 것은 시드의 죽음을 더더욱 막장스럽게 장식했다.[15] 어찌 보면 참 끝까지 기구한 인생일지도...지못미...후에 쟈니 로튼이 자서전에서 그의 죽음에 대해 불쌍한 녀석. 죽어서도 안식을 찾지 못하다니.라고 평했다.

참고로 낸시의 죽음에 관해서는 마약 판매상의 짓이다, 낸시와 싸웠던 누군가가 복수를 한 것이다 등 여러 가지 설이 많다. 당시 시드 비셔스가 살던 방에는 마약상들이 수시로 드나들었고, 시드 비셔스는 완전히 약에 취해 있을 때가 많아서 정황을 알기 힘들다고 한다. 쟈니는 시드가 낸시를 죽일만한 인물이 못 된다며 그가 유죄일 리 없다고 굳게 믿었다.

7 영화 <시드와 낸시>

알렉스 콕스 감독의 1986년작 영화. 첫 주연을 맡은 게리 올드먼은 외모와 더불어 연기 면에서 시드와 상당한 싱크로율을 자랑한다. 특히 My Way를 부르는 장면은 실제 시드의 동영상과 거의 비슷하다. 심지어 눈 까뒤집는 것까지도.(...)
My Way 시드 비셔스 ver.
My Way 게리 올드먼 ver.

그런데 낸시의 경우는 클로이 웨브가 맡았는데, 이거 캐스팅이...(...) 낸시 역 캐스팅에서 코트니 러브"내가 낸시다!"라며 당차게 나왔는데 떨어져서 낸시 친구 그래천이라는 단역으로 출연했다는 안습한 에피소드가 있다.

배우들과 실제 커플을 비교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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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Chloe Webb & Gary Oldman      (우) Nancy Spungen & Sid Vicious

쟈니 로튼은 영화를 제작할 때 자신을 포함한 섹스 피스톨즈 멤버들에게는 연락도 한번 안하고 섹스 피스톨즈와 앙숙이었던 더 클래시 멤버들이나 시드 비셔스의 어머니의 증언만을 참고해서 사실을 지나치게 미화시켰다고 싫어하였으며, 시사회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시드의 어머니는 영화 촬영에 협조해주어 시드의 그 유명한 자물쇠 목걸이를 올드먼에게 빌려주었다고 한다.

OST는 더 클래시의 조 스트러머가 담당하였다.

이 영화에 쓰인 Too fast to live, too young to die라는 문구가 유명해졌다. 이 명언은 이 분의 등짝에도 새겨져있다.시드 비셔스를 오마주하려면 늦었어. 이미 21살은 지나갔잖아? 안될거야 아마...

8 여담

퀸의 보컬 프레디 머큐리와 사이가 나빴다고 한다.
시드 비셔스가 프레디 머큐리에게 형씨, 당신이 관객들 앞에서 발레를 했다는게 사실입니까? 라고 도발을 한게 원인이었다.[16] 프레디는 그래,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라고 받아치기도 했으나 후에 말싸움에서는 배에 할퀸 자국은 뭐냐? 병신. 자해한거냐? 씨발놈아, 그래서 어쩔껀데?라고 강하게 맞받아쳤다.


만화 나나의 등장인물 혼죠 렌의 모티브가 되었다...는데 외적 설정만 비슷할 뿐 성격은 판이한 듯.

만화 디트로이트 메탈 시티의 펑크 그룹인 딸랑이 걸즈의 보컬인 니나가 동경하는 뮤지션이기도 하다.(장르가 펑크여서 그런듯.) 그 해당 에피소드에서 주인공 네기시 소이치가 얼떨결에 시드를 패러디했다.[17]


김종민+천명훈
펑크 아이콘이라고 하여 마약에 쩔은 미치광이의 모습만을 상상하기 쉽지만, 의외로 바보스럽고, 천진난만하고, 해맑은(...) 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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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FWCW를 오가며 활동한 206cm 144kg의 빅맨 프로레슬러 시드 레이먼드 유디의 링네임중 하나였다. 시드 비셔스는 초창기이며, 사이코 시드나 시드 저스티스등으로 활동했지만 가장 유명한 네임은 시드 비셔스.

이 선수는 초크 슬램의 원조로 알려져 있다.
  1. 년도는 다르지만(각각 1979년, 1959년.) 시드가 죽은 날 다음 날짜인 2월 3일은 버디 홀리가 요절한 날짜다.
  2. 옛말이라 거의 쓰지 않지만 fast에는 "타락한, 문란한, 망가져버린"이라는 뜻이 있다.
  3. 원래는 1972년 웨스트우드가 말콤 맥라렌과 함께 열었던 패션샵의 이름이었다. 하지만 이 문구가 시드의 삶과 너무나도 매칭이 잘 되었기에 시드의 사후에 개봉한 영화인 <시드와 낸시>에서 이 문구가 인용되기도 했다.
  4. 제대로 데뷔하기 전의 수지 앤 더 밴쉬즈로서, 1976년 9월에 열렸던 "100클럽 펑크 페스티벌"(런던펑크 붐의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되는)에 출연했다. 놀라운건 이게 이 밴드의 첫 공연이었다. 아마도 섹스 피스톨즈와의 개인적 친분에 의해 라인업에 올려진 듯. 친목질 이때는 그냥 그런 펑크록 밴드였으나 후에 재정비를 거쳐 어두운 분위기의 펑크록 밴드가 된다. 이 밴드는 포스트 펑크/고쓰 컬쳐의 파이오니어 밴드가 된다.
  5. 상당히 괴상한 음악을 연주했던 밴드로, 변변한 공연은 한번도 못했다고 한다. 딱 한 번만 공개 연주를 벌이고 해산한 초단명 밴드. 훗날 레인코츠(Raincoats)의 멤버가 되는 비브 알버틴이 이 밴드에 있었다고 한다.
  6. 비비안 웨스트우드와 섹스 피스톨즈의 관계는 섹스 피스톨즈 문서 참조.
  7. 글렌의 어머니가 밴드 활동을 반대해서라는 설도 있지만, 사실은 밴드 내에서 음악적 주도권 다툼에서 쟈니 로튼이 승리한 것. 실제로 쟈니 로튼은 섹스 피스톨즈를 무언가 혁신적인 밴드로 만들고 싶어했지만 글렌 매틀록은 상업적 성공에 더 관심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섹스 피스톨즈는 밴드의 히트송을 다 작곡한 훌륭한 작곡가를 한명 잃는다 자세한 것은 섹스 피스톨즈 항목 참조.
  8. 원래는 쟈 우블이 거론되었다. 쟈 우블이나 시드 비셔스나 둘 다 쟈니 로튼의 친구였으나, 시드 비셔스가 좀 더 멋있다는 이유로 영입되었다.밴드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자의 횡포가 돋보이는 부분 쟈 우블은 훗날 쟈니 로튼이 본명인 존 라이든으로 돌아온 뒤 결성한 포스트 펑크밴드 퍼블릭 이미지 리미티드에 베이시스트로 영입되고, 이때 훌륭한 베이시스트로서 활약한다. 아마 시드 비셔스가 아닌 쟈 우블이 밴드에 합류했다면 섹스 피스톨즈의 역사는 엄청나게 달라졌을 것이라고 록 역사가들은 주장한다.
  9. 참고로 유대계 미국인 중산층 가정의 딸이다. 그것도 독실한 유대교 집안이다.
  10. 뉴욕돌즈 시절부터 워낙에 유명한 졍키(마약중독자)였다고 한다...
  11. 이 부분은 쟈니 로튼의 자서전에 나오는 내용이다.
  12. 현재는 호텔 가부키로 이름이 바뀌었다.
  13. 이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논란이 많다. 대부분은 그냥 관객들의 협조하에 벌인 퍼포먼스라 생각한다.
  14. 당시 뉴욕은 거의 지옥같았다. 치안도 불안하고 거리 곳곳에 불량배들이 드글대는 도시였다. 이 당시 풍경을 잘 그린 영화가 바로 택시 드라이버서머 오브 샘.
  15. 후에 로튼은 재결성 인터뷰에서 이에 대해 고인드립(진공청소기가 필요했겠군!)을 시전했다.
  16. 프레디를 깐게 아니고 그의 초중기때 입은 우스꽝스런 복장을 깐 것이다.
  17. 사실 관객들에게 휘말린 것과 독감에 걸린 것 때문에 얼떨결에 된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