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일치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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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교파로 나뉘어진 기독교를 다시 하나가 되게 하자는 운동. 영어로는 에큐메니컬 운동(ecumenical movement)이라고 한다.

1 개신교 교단들끼리의 교류

18세기 스페너, 프랑케 등의 독일 경건주의 운동과 존 웨슬리의 영국 경건주의 운동, 그리고 미국의 복음주의 대각성 운동은 17세기 개신교 정통주의 속 스콜라주의적 약점을 극복하면서 세계 선교에 눈길을 돌리게 하였다. 19세기로 들어오면서 한 세기 동안의 선교활동은 교회사 2000년간 전개했던 선교활동을 능가할 정도로 눈부신 선교 역사를 이루어왔다. 그러나 19세기 선교활동이 교파적 색채를 띤 기독교 확장의 역사를 가져왔다. 이에 선교현장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은 교파들의 연합과 사귐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기 시작했다. 19세기 중엽부터 선교 단체들간의 연합과 협동의 분위기가 현저하게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러한 교회일치운동은 20세기 선교 및 교회 연합의 방향을 전했던 것이다.

1846년 8월에 개인 자격의 차원에서 복음주의 연맹을 발전시키는 국제적, 초교파적 모임이 영국 런던에서 있었다. 미국, 캐나다, 영국, 아일랜드, 스웨덴,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스위스 등 세계 각국의 52개 교파로부터 800명의 지도자들이 몰려왔다. 복음주의 연맹은 19세기 대각성 운동에서 기원한 유일한 에큐메니칼 조직체가 되었다.

세계복음주의연맹이라는 칭호를 만든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다. 1851년에 런던에서, 1853년에는 뉴욕에서 모임을 가졌으며, 알렉산더 더프가 사회를 맡았던 영국복음주의연맹 연차모임에서 1854년 최초의 국세선교대회를 개최하자고 제안했다.

한편 교파 차원의 화합 운동으로서의 교회일치운동은 1890년대 초에 나타났다. 이것은 각 교파들이 자신들의 공식 대표들을 통해서 상호 다른 점을 해결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구체화된 것은 그린델발트 대회와 Review of the Churches라는 정기간행물에 의해서였다. 특히 Review of the Churches의 편집인 헨리 런은 이 지면을 통해 이질적인 각 기독교 교파들이 재통합 문제를 위해 함께 대면할 것을 강하게 촉구하며, 만남의 장을 주선했다. 그러한 가운데 1892년에서 1895년 사이에 스위스 계곡 그린델발트에서 영국 국내 기독교 일치 논의 대회가 6차에 걸쳐 진행되었다. 이 모임은 종교개혁 이후 처음 열린 대회로 성공회, 침례교, 회중교회, 장로교, 감리교, 퀘이커쿄 신자들이 참석했고, 프랑스와 스위스의 개혁교회 신자들까지도 참석하였다. 이에 교회의 일치와 연합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모든 개신교 교파로 확산되어갔다. 이후 1920년대에 스위스 뮈렌에서 런이 개최한 두 번째 대회는 유럽 대륙의 교회뿐만 아니라 미국 교회의 대표들도 함께 참석하게 되었다.

1895년에는 새로운 교회일치운동이 발생했는데, 이것이 같은 도시인 스위스 그린델발트에서 창립 개최된 세계기독학생연맹이다. 이 학생 운동은 이보다 앞서 조직된 YMCA와 YWCA에 의해 발전된 운동이다. 이 학생 운동의 지도자가 감리교 신자인 존 모트였다. 모트는 미국의 제2차 대각성 운동의 영향을 받고 복음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하여 이후 교회일치운동의 대표적인 지도자로 활약하게 된다. 그는 1886년 무디 부흥운동을 계기로 외국 선교를 위한 학생 지원 운동(SVM)을 조직하고 의장이 되었으며, 1888년 YMCA의 총무가 되어 교회일치운동 경력을 쌓게 되었다. 모트는 이후에도 2년간 세계 곳곳에 있는 대학들을 방문하면서 각종 학생 연합 운동에 영향을 끼쳤다.

이 같은 학생 운동을 통한 일치의 경험으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사이의 약 10년간 전 유럽과 미국, 아시아 및 아프리카에 있는 각 교파 지도자들은 관망적인 자세를 버리고 현대 교회일치운동에 준비를 갖추게 되었다. 그 외에도 세계주일연합 운동 등이 여러 교파들의 교인들을 하나로 묶는 일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렇게 평신도 청년들이 중심이 된 각종 일치운동이 세계교회일치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논의는 1910년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스코틀랜드에 에딘버러에서 제08차 세계선교대회(WMC)가 열렸는데, 여기에 참석한 회원들과 지도자들은 대부분 복음적 대각성 운동의 결과로 생긴 선교단체와 특히 자의적 기독교 운동 단체들(YMCA, YWCA, SCM, WSCF, SVM 등) 출신이었다. 이때 의장이 된 지도자가 앞서 언급했던 미국 감리교 신자인 존 모트였다. 이 외에도 조셉 올드함, 윌리엄 템플 등이 이 회의를 통해 당시 교회일치운동의 흐름을 이끌어나갔다.

이후 1921년 10월 뉴욕에서 국제선교협의회(IMC)가 조직되었는데, 이는 WMC의 꿈을 보다 발전적이며 지속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IMC는 개신교인들 사이의 범세계적 친교를 육성시키며 복음을 세계에 전파하기 위한 연합 계획과 행동을 촉진했고, 1928년에는 예루살렘의 감람산에서, 1938년에는 탐바람에서, 1947년에는 온타리오의 휘트비에서 모였다. 이후 국가별 혹은 초교파적인 기구들의 공식 대표가 선교협의와 포괄적인 계획을 위해 모이는 기구가 되었으며, 1948년 WCC가 출범하게 되었다. WCC 헌장은 그리스도론을 중심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모든 교회들의 사귐"이라고 못박고 여기에 동조하는 모든 교회들에게 회원 가입권을 허락하였다.

2 가톨릭과 정교회의 교류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는 1274년 리용 회의에서 재일치를 시도했다. 미카일 8세 동로마 황제에 의해 요안네스 벡코스를 대주교로 서임했는데 단 하루 만에 사망했다. 황제 요안네스 5세가 개인적으로 재일치를 원했지만 이뤄지지 못했다. 동로마 교회는 자기들의 전통을 지키면서도 일치와 교류를 반대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가톨릭교회는 양자간 동등한 위치에서 세계공의회를 개최하기를 거절해왔다. 그러다가 1438-38년에 페라라와 피렌체에서 만났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이탈리아에 도착하여 서방의 신학자들과 신학 대화를 했지만 양자 간 기본적인 이슈들에 동의한다는 것이 너무나 어렵다는 것을 보여줬을 뿐이다. 문제는 필리오퀘였다. 가톨릭은 완고하게 필리오퀘를 주장했고, 회의는 결렬되었다.

최초의 일치 시도가 있은 후 여러 차례의 접촉이 있었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고 양 교회는 오랜 세월 평행선을 그리며 지내왔다. 그로부터 약 524년이 흐른 뒤 양 교회에 대화의 물꼬가 열렸다.

정교회는 가톨릭이 개최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공식적인 참관단을 보냈다. 공의회는 "동방 교회에 대한 교령"을 통해 동방 교회의 사제직과 성사들을 인정하고, "교회일치운동에 대한 교령"을 통해 동방 정교회를 "자매 교회"로 지칭하고 "참된 그리스도교적 보화들을 공동 유산에서 이어받은" 교회로 지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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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바오로 6세가 1964년 예루살렘을 방문하면서 동서 대분열 이후 교황으로서는 처음으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인 아테나고라스를 만났고, 그와 평화의 인사를 나누었다. 1965년 12월 공의회 마지막에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에서 축하행사를 열어 1054년 동서방의 분열을 가져온 서로에 대한 파문을 취소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79년 새로 선출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디미트리오스를 만났다. 가톨릭과 정교회 양측의 대표로 위원회가 구성되었고, 1980년 일치의 회복을 목표로 신학적 대화를 위한 연구를 공식적으로 시작했다. 가톨릭과 정교회 사이의 신학적 대화를 위한 연합국제위원회가 그리스 섬 파트모스와 로도스에서 개최된 것이다. 이 위원회는 1982년과 1988년 사이에 교회, 전례와 성사, 사도 전승 문제를 포함한 세 가지 중요한 합의문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상호간의 이러한 긍정적인 대응은 1988년에 러시아 정교회 선교 기념식에 바티칸 사절단이 참가하는 것을 포함하는 가톨릭과 정교회 지도자들 사이에 있었던 여러 차례의 회합들에 의해 증명되었다.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은 2000년대에 들어와 가톨릭과 정교회 간의 교류가 급속히 발전했다. 2003년 11월 29일부터 12월 2일까지 교황청 그리스도인일치촉진평의회 의장 발터 카스퍼 추기경을 비롯한 4명의 평의회 소속 공식 사절단이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에 이스탄불을 방문해 축하했다.

2006년 9월 18일부터 25일까지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에서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모스크바, 세르비아, 루마니아, 조지아, 키프로스, 그리스, 알바니아, 핀란드 등의 대주교 및 사제들과 신학자 30명으로 구성된 정교회 측 인사들과 가톨릭의 인사 27명이 만나 1980년부터 시작된 일치 회복을 위한 신학적 대화를 이어갔다, 이 회의는 1990년 모스크바에서 있은 양자 간 일치위원회의 후속조치로서 그 해 독일의 프라이징에서 그 내용이 마련된 것이었다. 이 기간에 양측은 서로의 미사/성찬예배에 참석했다. 다만 이것은 성사교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상호간의 전례 참관이었다.

양측의 활발한 교류는 2006년 11월 29일부터 30일까지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바르톨로메오스의 초청으로 이스탄불에 있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청을 공식 방문하는 결실을 맺는 큰 밑바탕이 되었다.

2007년 10월 8~14일은 이탈리아의 라벤나에서 열린 가톨릭과 정교회의 신학적 대화를 위한 국제회의가 열렸는데, 이 회의에는 가톨릭교회의 추기경들과 대주교들, 사제들 그리고 평신도 신학자 27명과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모스크바, 세르비아, 루마니아, 조지아, 키프로스, 그리스, 알바니아, 핀란드 등에서 온 정교회의 대주교들, 사제들이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는 교회의 교6의학적, 성서적 측면에서의 전례에 대한 논의를 통해 화해와 교류를 모색했다. 이 회의 역시 이미 1990년에 모스크바의 양자 간 일치위원회에서 제기되고, 20006년 9월 베오그라드에서 마무리되지 않은 대화의 연장선이었다. 마지막 회기가 열린 10월 13일 토요일에 라벤나 대성당에서 열린 가톨릭 미사에 정교회 측 인사들이 참석했으며, 14일 비탈리스 성당에서 열린 정교회의 성찬예배에는 가톨릭 측 인사들이 참석했다.

이러한 대화의 결과 2006년에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청을 방문했던 것과 같이 2008년 6월 7일부터 29일까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바르톨로메오스가 교황의 초청으로 바티칸을 방문하여 양자 간 더욱 친밀한 교제를 약속했다.

3 동방 정교회와 비칼케돈파 동방 교회들의 교류

동방 정교회는 콥트교회를 비롯한 비칼케돈파 교회들과 역사적 경험, 교리와 영성 등에서 어떤 서방교회들보다 가깝게 느낀다. 비 칼케돈파 교회들과의 교류는 1964년 덴마크의 아루스와 1967년 영국의 브리스톨에서 열린 비공식적 회합들에서 양측의 주요 신학자들이 만남으로써 시작되었다. 1970년에는 제네바에서 그리고 1971년에는 아디스 아바바에서 보다 진전된 모임이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 대표들은 "우리는 우리가 서로 하나의 정통 신앙 안에 있는 교회임을 깨달았다. ... 그리스도론적 교리의 핵심에 있어서 우리는 완전히 일치한다"고 했으며, 브리스톨 회합에서는 "우리 가운데 일부는 두 본성, 의지, 힘이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위격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주장한다. 우리 중 일부는 동일한 그리스도 안에 하나로 연합된 신인적 본성, 신인적 의지와 신인적 힘을 주장한다. 그러나 양측은 그리스도의 두 본성이 혼동없이, 변화없이, 나눔없이, 분리없이 연합되었음을 고백한다"고 선언함으로써 칼케돈 신앙 중심으로의 진전을 이루었다. 이러한 회합이 있은 후 두 교회를 대표하는 공식적 연합위원회의 모임이 있었다. 1985년에는 제네바에서, 1989년에는 이집트의 암바 비쇼이 수도원에서, 1990년에는 제네바에서 공식적 연합위원회의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는 양자의 교리적 불일치 부분을 일정 정도 해소했고 상대에게 행했던 과거의 저주들과 비난들을 철회하도록 권고되었다. 1989년의 모임에서는 여전히 상대에 대해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이들이 있는 가운데, "동방 교회들의 두 가족이 서로 오랫동안 교제를 갈망하였으므로, 이제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공통된 신앙을 고백하고 분열되지 않았던 초대교회의 사도적 신앙에 기초한 성사 교류를 회복하기를 기도하고 믿는다"고 말함으로써 양측의 교류가 그 어떤 교회들보다 더 긴밀해졌다. 여기서 양 교회는 네스토리오스와 에우티케스의 신학을 배격하며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온전히 분리된다든지 혹은 흡수되어 사라진다고 명시하지 않기로 결의했다. 협정문은 여기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혼돈 없이, 변화 없이, 구분 없이, 분리 없이 연합하고 있다고 기술하여 해묵은 그리스도론 논쟁의 해결을 시도하였다.

최종적으로 1993년 상호 파문을 철회하기 위한 제안서가 결의되면서 양 교회의 갈등도 최종적으로 정리될 날이 머지 않게 되었다. 물론 현재까지 양 교회가 완전한 상통을 성취하지는 못했으나 적어도 '단성론'과 '황제파'라는 낙인을 찍어온 과거와의 단절을 이뤄냈다는 점에서 큰 진일보라고 여길 만 하였다.

4 개신교와 정교회의 대화

개신교와 정교회 간에 신학적인 만남의 역사는 1573년부터 1581년 독일 튀빙겐 대학교 루터 신학부 교수들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예레미야스 간에 있었던 서신 교환에서부터 시작된다. 한편 칼뱅파와 정교회 간의 만남과 대화는 17세기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키릴로스 루카리스가 만든 신앙고백서가 정교회 내에 일으킨 커다란 소용돌이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키릴로스는 실제로 제네바에 가서 칼뱅의 주장을 깊이 공부하였으며, 그 결과 그가 쓴 조직신학과 신앙고백문이 다분히 칼뱅주의적이었는데, 정교회는 그의 신학사상과 신앙고백문을 '숨어들어 온 칼뱅주의적 이단'이라고 단죄하였다. 키릴로스가 쓴 신앙고백문인 '그리스도교 신앙의 동방교회적 고백'(Eastern Confession of the Christian Faith) 원본은 제네바 도서관에 보관 중이며, 그 신앙고백문으로 야기된 여러가지 신학 논쟁과 스캔들에 관한 기록들도 같이 있다. 키릴로스는 이 신앙고백문을 쓴 일로 인하여 목숨을 잃었다. 결과적으로 17세기 초에 개신교와 정교회 간의 일치를 위한 최초의 대화는 성과 없이 일단락되었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제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국제연합이 창설되는 국제적 상황 변화에 발맞추어 교회일치운동이 본격화되었다. 이러한 현대 교회일치운동의 맥락 속에서 개신교와 정교회 간의 만남도 다시 시작되었다.

20세기에 양자간의 최초 만남은 1920년대 초에 루마니아 트란실바니아에서 열린 정교회와 개신교 간 신학 토론을 위한 만남이었다. 이후 1950년대에는 독일에서, 1968~1975년에는 북미에서, 1970년대에는 헝가리 데브레센에서, 그리고 1981년 이후에는 프랑스와 스위스에서 토론의 장이 열렸다. 이와 같은 여러 번의 만남을 통하여 다양한 신학적 주제들이 다루어졌는데, 그리스도론과 성찬론, 신앙고백과 고백문의 역할, 성령을 통한 성화와 구원의 활동, 전례, 하느님의 계시와 역사, 역사적 상대주의와 그리스도교 교리에 있어서 권위, 교회의 사회적 책임, 창조와 자연보호, 혼인과 타종교인의 개종 등과 관련된 사목적 이슈들도 다루어졌다.

이러한 대화 가운데서 각 교파는 자기의 전통을 충실하게 해석하는 동시에 양자간에 공통점이 많음을 서로 확인하였다. 그리하여 무엇보다 삼위일체 교리를 가지고 토론하는 것이 매우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양측은 1979년 이스탄불에서 열린 개신교와 정교회 간의 신학적 만남에서 재확인하였다. 그리하여 19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양자간에 일치점이 더욱 많아졌으며, 공식적인 만남의 비전이 아주 밝아졌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자치권을 가진 모든 정교회에 개신교계와의 만남을 위한 대표자들의 명단을 보내달라고 하였는데, 그 대답이 모두 긍정적이었다. 개신교의 개혁교회 연맹측에서도 15명의 신학자 대표단을 임명하였다. 1988년, 1990년, 1994년에 만남과 대화를 가졌다. 양자간의 주된 대화와 주제를 설정한 것은 1986년 예비적 만남에서 이루어졌고, 양자의 승인하에 마련되었다. 대화는 양측의 공동 기반인 니케아 신경부터 시작되었다. 논쟁의 여지가 많은 구원론이나 교회론을 언급하는 대신 그리스도교의 기본적이고도 공통적인 이해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렇게 근본적인 교리들에 대하여 서로 의견을 교환함으로써 개신교뿐 아니라 정교회도 교회일치운동에 새로운 관점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졌다.

처음 두 회기는 삼위일체론을 취급하는 데 할애하였고, 세 번째, 네 번째 회기는 강생론을 토론하는데 집중되었다. 참석 위원들은 그 성명서를 여러가지 잡지에 다양한 언어로 번역하였다. 처음 두 회기 동안 다루어진 삼위일체론에 대한 문서는 책으로 출판되었다. 개신교와 정교회와의 교회일치적 신학 대화의 중요한 열매는 삼위일체론에 대한 일치성명서를 발표한 것이다. 이 성명서는 양자가 삼위일체에 대하여 신앙하고 고백하는 바의 일치됨을 공표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됨을 재확인하여 형제애를 공고히 함과 아울러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복음의 소명을 다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풀이된다.

5 개신교(성공회 포함)와 로마 가톨릭 간의 대화[1]

1928년에 가톨릭개신교에서 시작된 교회일치운동에 관해 처음으로 공식적인 의견을 제시하였다. 교황 비오 11세의 회칙 <Mortalium Animos>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의 완전한 사회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유권적으로 해석하고 권위 있게 가르치며 은총의 샘인 성사를 거행하는 직무자들이 있는 가시적 교회(가톨릭 교회)를 세웠다. 그런데 이 교회와 관련 없이 개신교의 교회 일치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계시 진리의 내용과 상관없는 교의를 아무런 어려움 없이 만들어 내고 있다. 그들이 의도하는 교회는 그들 각자의 의견과 판단을 그대로 유지한 채 구성되는 연합(Federation)일 뿐이므로 그리스도께서 원하신 교회 일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에, 그들이 공동으로 내세운 교의들은 가톨릭 교의와 동등한 입장에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교황은 사도로부터 합법적으로 계승된 이들의 유권적 해석이 아니고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데 오류를 범할 수 있으며, 잘못된 교의를 기반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일치는 기대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에 가톨릭 신자들이 개신교의 교회 일치 운동에 참석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1951년 교황 비오 12세는 회칙 <Sempiternus Rex Christus>에서 교회가 일치해야 하는 2가지 당위성을 제시한다. 곧 요한 복음서 17장 21절에 근거하여 그리스도는 성부에게 “그들이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기 때문에 일치는 그리스도의 뜻이었다는 것과 이 세상에 그리스도교적인 모든 것을 제거하려는 그리스도교 ‘공동의 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교황은 그 당시 2차례 세계 대전을 통한 고통의 체험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허무주의적 인생관을 갖게 되었고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유물론적 사관으로 사람들이 복음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분열된 상태로는 반그리스도적 세력을 대처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이 회칙은 일치의 당위성을 간절하게 표현하는데, 곧 가톨릭 교회가 교회 일치를 위해서 더욱 현실적인 문제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1959년에 교황 요한 23세는 회칙 <Ad Petri Cathedram>에서 교의와 제도와 신심의 차원에서 일치를 위한 3가지 원칙을 제시하였다. 회칙에 따르면, "교의적 입장에서 그리스도교의 진리는 성전과 성서의 전통에서 말씀을 유권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가톨릭 교회에 의해서 믿을 교리로서 정의되기 때문에, 일치를 위한 참된 교의는 가톨릭 교회 안에서 찾아진다. 제도적 입장에서, 하느님의 백성을 다스리기 위한 합법적인 직무 계승이 오늘날까지 온전히 가톨릭 교회 안에 보존되어 왔음을 밝힌다. 신심의 입장에서, 하느님의 백성은 성사를 통해서 초월적인 양식을 취한다. 특히 성체성사는 그리스도께서 제정한 일치의 성사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형제들이 함께 먹고 마심으로써 신앙의 일치를 이루게 되는데, 성체성사는 가톨릭 교회 안에서 합법적으로 계승된 사제직을 수여받은 사람만이 거행할 수 있다."

1964년 교황 바오로 6세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의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Unitatis Redintegratio)을 승인함으로써 이전의 교황들보다 보다 개신교에 개방적이며 일치를 위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일치교령에 따르면, 과거의 분열을 누구의 탓으로 돌리기보다 상호간의 신뢰와 함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일치의 노력이 선행되어야 하고, 불목했던 과거에 대해서는 서로 용서할 수 있도록 하느님의 은총을 구해야 한다고 말하고 일치의 당위성을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주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는 단일 유일한 교회로되, 많은 그리스도 교단들이 각각 자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계승자로 사람들에게 제시하며, 스스로 주님의 제자라고 선언하면서도 생각하는 것이 서로 다르고 걷는 길이 서로 다르므로, 마치 그리스도 친히 분열되신 것 같이 보인다. …… 이 분열은 모든 조물에게 복음을 전할 사명 수행에 지장이 되고 있다.

그리고 이 교령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개신교인들에 대해 "갈라진 형제"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일치운동에 관한 교령, 제20항). 이와 같은 표현은 제2차 바티칸 공의희 이전의 교리서와 비교해 보면 상당한 변천을 느낄 수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 가톨릭 교회는 개신교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었다.

가톨릭 교회는 프로테스탄트를 '열교(Haeresis)' 혹은 '이단'이라고 하고 그 신봉자들은 열교인이라고 한다. ... 성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단자는 한두 번 경고해 보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거든 그와 관계를 끊으시오. 그대도 알다시피 이런 사람은 옳은 길을 이미 벗어나서 죄를 짓고 있으며 스스로를 단죄하고 있는 것입니다>(티토 3:10). 여기서 이단자란 열교를 뜻한다."

- 천주교 서울대교구 윤형중 마태오 신부, 상해 천주교 요리(상) (서울  : 가톨릭출판사, 1992), pp 258-259.

이와 같이 이단 열교도인 프로테스탄트 신자를 "갈라진 형제들"이라고 표현한 것은 놀라운 변천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바오로 6세는 또한 회칙 <Ecclesiam Suam>에서 이전 교황들보다 더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 준다. 그러나 교황의 수위권(首位權)이 일치에 큰 장애임을 인식한 교황은 가톨릭 교회가 교황권을 결코 철회할 수 없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교황이 없어진다면 가톨릭 교회는 이미 가톨릭(보편적)이 아니다. 더욱이 효과적이요, 권위 있는 베드로의 최고 사목직이 없다면 (그리스도교회의) 일치는 붕괴되고 말 것이다. 그리스도 친히 세우신 진정한 원리 이외에 다른 일치의 원리를 찾는다는 것은 헛된 일일 것이다. 성 예로니모가 옳게 본 바와 같이 교회 안에는 성직자 수만큼의 분열이 있을 것이다.

가톨릭 교회는 교황의 수위권이 정교회, 또 개신교와 대화하는 데에서 해결해야 할 가장 큰 난제임을 인식하지만, 수위권을 계시 보존과 그리스도인의 일치를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원리로 이해하기 때문에 그 뜻을 포기하면서 일치를 이룬다는 것이 과연 진정한 일인가를 자문하고 있다. 이 점에서 교황은 개신교인들이 수위권의 당위성과 그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도록 유도하고 가톨릭 교회의 입장에서는 수위권의 본질적인 면을 잃지 않으면서도 개신교인들의 요구를 융통성 있게 받아들이기 위한 신학적 연구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한국 천주교한국의 개신교는 1968년부터 ‘교회일치기도주간’을 제정하여 번갈아 가면서 일치기도운동을 벌였다. 1970년 명동성당에서는 1,000명이 넘는 그리스도인(천주교인과 개신교인)이 함께 모여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기도 하였다. 천주교인과 개신교인이 하나[一體]가 되어서 교회와 민족을 위해 기도를 드리게 된 것은 현대 한국종교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한국 천주교와 개신교의 일치운동의 성과 가운데 하나는 성경을 함께 번역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두 전통은 1968년 ‘성서공동번역위원회’를 조직하여 성서를 공동번역하는 일에 착수했다. 1971년 부활절에 신약 성서를, 1977년 부활절에 구약 성서를 각각 번역해 냄으로써 천주교와 개신교의 ‘공동번역 성서’가 탄생할 수 있었다. ‘공동번역 성서’는 일반 신자들이 성서의 메시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평이한 문체로 번역되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이와 같이 의미 있는 공동번역 성서는 한국 그리스도교계에서 두루 사용되지 못하고 있다.

한국 천주교와 개신교의 일치운동은 민주화 운동과 학술운동을 통하여 활성화되기도 하였다. 1972년 10월 유신을 계기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민주화 운동과 인권 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와 같은 운동 과정에서 천주교인과 개신교인은 다름[異體]을 뛰어넘어 하나[一體]가 되어 권력이라는 이름의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결기를 보여 주었다. 오늘날에도 노동·인권운동과 환경운동 등 사회운동 부문에서 천주교와 개신교의 협력은 지속되고 있다.

학술운동 부문에서도 천주교와 개신교의 일치운동이 이루어졌다. 1971년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열린 “현대 성서학의 동향” 심포지엄에 천주교와 개신교의 성서학자들이 함께 참여하여 활발한 토론을 벌였는가 하면, 천주교 쪽의 서강대학교 종교신학연구소와 개신교 쪽의 한국신학연구소의 공동노력으로 『하나인 믿음』을 발간하는 결실을 맺기도 하였다. 이 책의 내용을 중심으로 한 “가톨릭과 개신교의 신학적 접근” 심포지엄이 개신교 신학 잡지인 「신학사상」을 통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1999년 10월 31일에 가톨릭교회와 루터교, 감리교 세 교파는 독일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에서 '의화(義化) 교리에 관한 공동 선언문'에 서명하였고 이 가르침에 대한 교리적 동의를 선언하였다. 비록 본질적인 면에서 완전히 동일한 것을 논한 것은 아니었고 아주 기본적인 진리에 대한 상호 이해를 바탕으로 내놓은 공동 선언문이었으나, 적어도 가톨릭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개신교 교단들과의 합의를 통해 결과물을 내놓았다는 점에서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얻게 되었다.

매년 1월 18~25일인 ‘그리스도 일치기도 주간’에 가톨릭교회와 정교회, 개신교가 번갈아가면서 합동 기도회를 열고(한국의 경우 에큐메니컬 기도회는 주로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에서 열린다), 2000년부터 매년 그리스도교 일치 포럼을 개최하고, 교단 대표들과 함께 성지순례와 피정, 체육대회를 통한 교류를 갖고 있다.

6 보편 가톨릭과 성 비오 10세회의 대화

프랑스어권 아프리카 주재 교황대사였으며 프랑스 튈의 대교구장이었던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가 중심이 되어 발족된 성 비오 10세회(이하 SSPX)는 가톨릭 전통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가톨릭 전통주의자들이 1970년에 회를 설립한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바로 1969년에 교황 바오로 6세가 승인한 로마 미사 경본(Missale Romanum) 때문이었다. 새로운 미사 경본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전례 개혁의 정신을 담고 있었으며 예전의 전통적인 미사와 상당히 많이 달라졌다. 이제 모든 가톨릭 교인들은 라틴어 뿐만 아니라 자국어로도 미사를 봉헌할 수 있었고, 벽에 붙은 제대를 바라보며 진행되던 미사는 이제 사제와 평신도들이 식탁과 같은 제대를 마주보고 둘러 서서 드리는 미사로 점차 바뀌게 되었다. 또한 미사 경문과 전례문의 많은 요소가 삭제되거나 새로이 추가되기도 했고, 전례력의 대대적인 변경도 이루어졌다. 또 개신교의 영향을 받아 성령쇄신운동도 도입되었다. 이러한 교회의 급진적인 변화는 가톨릭 전통주의자들로 하여금 전통의 의미가 퇴색되었다는 믿음을 주기에 충분했다.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은 1970년 대주교의 친구이기도 한 프리부르 주교 프랑소와 샤리에르와 접촉하여 스위스의 에콘에 신학교 설립 승인을 요청했고, 이와 더불어 성 비오 10세회의 설립을 인준받았다. 보통 가톨릭 교회 내의 신앙 단체는 몇 단계의 심사와 활동 기간을 거친 뒤에 정식 단체로 인준을 받게 되었으므로 처음 몇 년간은 교회의 감독 하에서 보수적인 신앙 단체로서 활동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혁에 열심인 프랑스 성직자들은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와 그 신학생들 및 그들의 활동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바라보았으며 트리엔트 미사에 집착하는 자들이라는 비판을 하곤 했다.

이 모든 상황은 1974년 스위스 에콘의 성 비오 10세 신학교를 교황청에서 파견한 두 명의 벨기에 사제가 시찰하게 되면서 급격하게 뒤집어지게 된다. 르페브르 대주교는 이들의 신학이 너무나도 급진적이고 진보적이며 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교회에 가져다 준 해악의 산물이라는 논지의 선언을 했다. 1974년 11월 21일 선언으로 불리워지는 이 선언으로 인해 교회는 발칵 뒤집어지게 되었으며, 프리부르의 후임 주교 피에르 마미는 SSPX의 인준을 철회할 의향을 교황청에 전했고, 르페브르는 3명의 추기경으로 구성된 위원회에 소환되었다. 결국 SSPX의 인준은 1975년에 철회되었고, 르페브르는 신학생들과 자신과 함께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함께 항의하는 뜻에서 로마로 향했다. 그러나 교황청 사법기관은 르페브르의 항소를 기각했고, 공의회의 가르침을 준수하라는 명을 받았다. 심지어 1976년에 교황 바오로 6세는 공개적으로 르페브르 대주교를 비난했는데, 교황이 특정 가톨릭 성직자를 공개적으로 비난한 것은 근 200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르페브르 대주교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모든 상황은 SSPX로 하여금 교황청을 설득하는 일을 그만두게 하였다. 이들은 순명해야 할 교황에 맞서 트리엔트 미사와 공의회 이전의 모든 전통적인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가치를 지키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르페브르 대주교는 1976년 12명에 대한 사제 서품을 진행하였다. 이것으로 인해 르페브르 대주교는 성무 집행 정지 처분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대주교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많은 일들을 진행해 나갔다. 문제는 그의 나이가 많아서 그가 죽게 되면 SSPX는 주교 없이 활동하는 빈약한 단체로 전락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에게 주교 서임을 위한 좋은 구실이 만들어졌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3년 사도 헌장을 발표하여 기존의 교회 법전을 수정하였다. 또한 정교회와 여러 개신교 종파들과 함께 다양한 교회 일치 운동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다양한 기독교 교파 지도자들 뿐 아니라 힌두교, 시크교, 불교, 유대교, 이슬람교, 아프리카와 북미의 정령 신앙, 신토, 조로아스터교, 바하이교 지도자들까지도 함께 모여 1986년 10월 27일 이탈리아의 아시시에서 세계 평화를 위한 금식 기도회를 가진 것이었다. SSPX는 교황의 이같은 조치에 종교다원주의라면서 크게 반발하였고, 르페브르 대주교는 1988년에 네 명의 사제를 주교로 전격 임명하였다. 이는 사도좌로부터의 자동 파문 조치에 해당하는 중대한 교회 분리 행위였다.

성 비오 10세회의 활동은 로마 교황청의 골칫거리였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정 사항을 이제 와서 도로 물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또 그것이 사회의 요구에 대한 적절한 응답이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교회 내의 많은 전통주의자들이 그 변화를 부정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요컨대 SSPX의 존재는 전통과 현대 사이에서 적절한 위치를 잡지 못하던 교황청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이었다. 성 비오 10세회는 공공연히 자유주의와 현대주의를 공박했으며 교황의 에큐메니컬 운동과 진보적인 신학적 변화를 거부하였다. 또한 이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혁이 지나치게 급진적이어서 가톨릭 교회의 기존 전통을 훼손하였으며 전례의 의미가 혁파되고 사제의 기능이 축소되었으며 이로 인해 가톨릭 교회가 개신교가 가진 오류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위기에 처했다고 주장했다.

성 비오 10세회와의 화해를 위해 가장 노력한 사람은 요한 바오로 2세 재위 시절에 신앙교리성성의 장관이었던 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였다. 추기경 시절 신앙교리성 장관으로서 성 비오 10세회와의 협상을 맡기도 했던 그는 자의 교서를 내려 모든 가톨릭 사제의 트리엔트 미사 집전을 자유롭게 전면 허용한다는 조치를 취해 화해의 길을 터놓았다. 그는 르페브르 대주교에 의해 서품된 네 명의 주교에 대한 자동 파문을 철회하는 조치를 단행했고, 많은 접촉이 잇따르게 되었다. 현재 SSPX는 아직까지 인준받지 못한 상태로 남게 되었다. 교황청의 성 비오 10세회에 대한 규정은 하느님의 교회 위원회 의장인 귀도 포조 대주교가 언급한 바 있듯이 가톨릭의 일부이지만 비정규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7 성 비오 10세회와 반에큐메니컬 보수 개신교측의 비판

전통 가톨릭 성향의 성 비오 10세회와 반에큐메니컬 계열의 보수적인 성향의 개신교 측 모두 교회일치운동을 그들식 표현으로 "종교혼합주의"라 하여 비판하기도 한다. 양측 모두 교회일치운동에 대해 그들의 표현에 따르면 '신앙의 순수성', 즉 참된 기독교 신앙을 해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특히, 개혁주의 계열 보수 개신교에서는 '올바른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교회[2]의 통합보다는 분리가 더 성경적이라는 입장을 보이기도 한다.

성 비오 10세회의 교회일치운동에 대한 반대 논거는 다음과 같다.

  • 진정한 에큐메니즘이란 영혼들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회심시켜 그들이 참된 양떼로 뭉친 울타리와 유일한 참된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오게 하려고 애쓰는 참된 전교의 정신, 다시 말해서 가톨릭교회로 일치시키려는 정신을 말한다. 참된 일치란 일치된 신앙(세기를 통하여 이어져 내려오는 가톨릭교회의 똑같은 가르침과 교정권), 일치된 지배(교회의 우두머리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 대리자인 교황) 밑에서, 숭배의 일치(똑같은 신품권의 영향권 하에서 성총을 얻는 방법, 예를 들면 똑같은 성사, 똑같은 기도, 영원히,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똑같은 미사)를 의미한다. 참된 일치는 또 참된 사랑(천주를 사랑하되 똑같이 십계명을 실천하는)과 참된 박애(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한 아버지로 인정하는)를 의미한다.
  • 개신교는 그 자체가 가톨릭 신앙을 반대하여 저항하기에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 안에서, 사도들로부터 전승되는 신앙을 분명히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가톨릭으로 개종을 해야 하고, 개신교 지위를 벗어야 한다.

반에큐메니컬 계열 보수 개신교 측에서는 아래와 같은 개혁주의 개신교의 핵심 교리를 따르지 않는 교회일치운동은 의미가 없다고 본다.

  • 성경은 축자적으로 영감을 받았다. - 성서비평X
  • 하나님은 성부·성자·성령 삼위가 한 분이시다(삼위일체).
  • 예수님은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하셨다. - 천주교의 성모마리아 교리 X
  • 중생하지 않고는 구원이 없다.
  •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죽음으로써만 구원이 가능하다. - 성찬식에서의 성변화 X[3]
  • 믿음으로써만 의롭게 된다. - 천주교의 의화론 X
  • 최후에는 영생과 영벌뿐이다. - 연옥 X
  • 교회는 구원받은 사람으로 구성되는 영체다.
  • 교회건축은 아무것도 없이 극도로 심플해야 하며, 예배를 위한 최소한의 기구들만 있어야 한다. - 성상, 성화 X[4]

WCC 가입을 두고 대한민국 최대 개신교 교단인 대한예수교장로회가 통합측과 합동측으로 갈라지게 된 것이 1959년의 일이었다. 이후 대한예수교장로회의 보수교단(합동, 합신, 고려 등) 측은 WCC 활동을 원색적으로 비난해 왔는데, 2013년 부산에서 열린 10차 총회를 앞두고 한국 개신교계 상황은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특히 현재는 군소협의체로 전락해버린 한국기독교총연합회에서 WCC가 열리는 박람회장 근처에서 반대 집회를 개최하는 등 국내 개신교계는 양분이 된 상황 속에서 교회일치운동을 지속해야 했다.

또한 교회일치운동은 교파 간의 상호존중으로 선교 경쟁을 지양(현지 교회와 선교 교회 간 경쟁과 교파 간 개종을 지양)하기에 성 비오 10세회와 보수 개신교 목회자들이 이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한다.

에큐메니컬 계열 개신교 진영 내 일부 보수파[5]에서는 교회일치라는 궁극적인 사명의 달성의 의의는 인정하지만, 묻지마식의 교회일치운동은 오히려 비성경적이라고 비판하는 경우가 있다.
  1. 아직도 로마 가톨릭교회성공회를 포함한 개신교 신자에게 가톨릭 교회 내에서의 영성체를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경직된 부분이 있기에 '교류'가 아닌 '대화'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교류'라는 건덕지라도 보일만한 것은 로마 가톨릭 사제가 성공회로, 성공회 사제가 로마 가톨릭으로 옮길 때 타 개신교회 목사가 로마 가톨릭이나 성공회로 옮기는 경우와 달리 사제서품을 다시 받는 것에 대한 사실상의 특례(로마 가톨릭 신자들은 이것을 '특례'라 안하고, 교황의 사목적 '배려'라 표현함)가 적용되는 것 정도 뿐이다.
  2. 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개교회 예배당 의미보다는 교회 공동체.
  3. 개혁주의 개신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단회성 대속을 중시하는데, 로마 가톨릭의 미사는 그러한 교리에 어긋나기 때문에(일종의 희생제사이므로) 싫어한다.참고글 또한 이쪽에서는 화체설을 비성경적인 우상숭배 내지는 신비주의로 부정적으로 본다. 그러나 가톨릭이 미사 의식을 통해 희생제사를 재현한다고 해서 대속이 한 번 뿐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4. 그런데 대한민국에서는 반에큐메니컬 성향의 교회라도 생각보다 잘 안지키는 경우가 많다. 정 반대로 미국이나 스코틀랜드, 네덜란드 등에 소수 존재하는 보수 개혁교회들은 이 원칙을 정말 칼같이 지켜서 십자가조차 달지 않는다.
  5. 자신이 속한 교단의 노선에 개의치 않고 에큐메니컬 운동 자체에 반대(WCC 반대 등)하는 극보수파 제외. 특히 예장통합에서 이런 이들이 일부나마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