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서 넘어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오스만-로마 전쟁의 끝

콘스탄티노폴리스 마지막 공성전. 15세기 프랑스 세밀화
날짜
1453년 4월 2일 - 5월 29일
장소
콘스탄티노폴리스와 그 주변
이유
메흐메트 2세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 욕구
교전국방어군
동로마 제국
교황령
제노바 공화국
베네치아 공화국
시칠리아 왕국
공격군
오스만 제국
지휘관 콘스탄티노스 11세
루카스 노타라스 X
테오필로스 팔레올로고스
조반니 주스티니아니
지롤라모 미노토
메흐메트 2세
자아노스 파샤
쉴레이만 발타오울루
결과
오스만 제국의 완승
영향
동로마 제국의 멸망
교황권의 실추[1]
근세의 시작[2]
병력7,000 - 8,000명150,000 - 300,000명[3]
피해규모불명수만 명으로 추정

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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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0년을 이어 온 대제국은 이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중세의 종말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1453년의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이다. 이 전투에서는 중세의 종언을 고할 만한 무기인 공성포가 사용되었고, 이 전투로 소아시아 및 남유럽과 서유럽 -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지역과의 문화적, 정신적 연결 고리가 끊기고, 유럽 문명의 시조라고 할만한 로마의 마지막 잔재가 이슬람의 손에 넘어갔다. 이 일로 그리스 - 로마에 대한 고전학자들과 그들의 연구결과들이 서유럽으로 넘어가게 되고, 르네상스의 계기를 제공하기도 한다. 또한 콘스탄티노플의 함락과 함께 발칸 반도가 이슬람 국가들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5] 이후 대량으로 유입된 이슬람교와 기존의 동방 정교, 로마 가톨릭이 섞이면서 지금까지도 펼쳐지고 있는 발칸 반도의 갈등의 전조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말하면 콘스탄티노플이 세계를 바꾼 전투처럼 보이는데, 그런 것은 아니다. 동로마 제국 자체는 1204년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함락 때 이미 한 번 멸망했고, 니케아 제국, 트레비존드 제국과 이피로스 공국이 동로마 제국을 계승한다. 이후 니케아 제국이 우여곡절 끝에 콘스탄티노플을 차지하고 동로마 제국을 부활시켰으나, 이피로스 공국은 일찌감치 1330년대에 동로마 제국에 의해 멸망했고(그나마 그 영토는 1340년대 스테판 두샨께서 먹어버렸지만...) 오스만 제국에 의해 동로마 제국(구 니케아 제국), 트레비존드 제국 모두 크게 영토를 뜯기고 만다.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이 벌어진 1453년 즈음에 이미 발칸 반도 대부분은 오스만 제국의 손에 들어가 있었으나, 썩어도 준치라고 재건된 동로마 제국 및 후계국들은 니케아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수복 이후 2백년간이나 생존했다. 그럼에도 이전 시대의 종언을 선고하기에는 충분히 상징적인 사건이다. 그래서 이 전투를 중세의 마지막으로 삼기도.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은 서로마 멸망 이후부터 기록상에는 20번, 유물로 실체가 확인된 것은 16번이나 있다. 이 항목에서는 그 가운데 마지막 공방전이자 역사상 가장 널리 알려진 1453년의 전투만 서술한다.

2 배경

2.1 콘스탄티노폴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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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이스탄불 지도 위에 표시한 콘스탄티노플. 파란색 선 안이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테오도시우스 성벽 안의 콘스탄티노플'로 오늘날 이스탄불의 파티흐(Fatih) 구이다.[6]

콘스탄티노플은 이전부터 경제적, 정치적 중심지로서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아주 중요한 통로였다. 콘스탄티노플의 보스포루스 해협(노란색 구역)은 폭이 1 ㎞가량 밖에 되지 않는 데다가 가장 좁은 폭은 750 m밖에 되지 않는다. 때문에 사람과 물자를 손쉽게 옮길 수 있었다. 지중해를 통한 해운으로 물건을 수송하는 상인들로써는 최대의 경쟁자이면서, 넘을 수 없는 장벽이나 다름없었다. 도시는 아시아와의 교역에서 막대한 지분을 가지고 있었고, 동방의 비단들은 이 통로를 통해 들어왔다. 군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했다. 그리고 해협을 강 건너듯 건너가면 되니, 군대를 옮기기도 쉬웠고, 흑해와 지중해가 만나는 유일한 지점으로, 보스포루스 해협의 통제권을 쥐고 있다면 흑해를 장악할 수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정치적으로도 중요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은 로마 제국 그 자체였으며, 로마 제국의 황제는 이후 유럽에서 다시 없을 대제국의 주인이었다. 중동부터 스페인까지 로마 제국의 황제 직함이 먹히지 않는 곳은 없었고, 유럽의 모든 왕들보다 더 높은 직위였다. 따라서 당시의 군주들에게 콘스탄티노플은 입맛 다시게 하는 도시였다. 또한 서로마를 멸망시킨 오도아케르서로마 제국의 황제를 폐위시킨 뒤 그 자리를 계승하지 않고, 황위와 명목상의 황제로서의 권한을 모두 동로마 황제에게 넘겼다. 그러면서 서한에다가 "로마 제국 황제 폐하께"라고 버젓이 써붙였으니... 따라서 동로마 제국의 황제 지위는 진정한 로마 제국 황제였다. 애시당초 콘스탄티노플의 정식 명칭은 로마 노바, 즉, 새로운 로마였다.

물론 이렇게 중요한 지점이기 때문에 콘스탄티노플이 세워진 이후부터 계속 침략이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의 배후지인 트라키아는 평지 특성이었기 때문에 콘스탄티노플의 입구라고 할수 있는 아드리아노플을 지나고 나면 배후지의 특성상 콘스탄티노플 코앞까지는 쉽게 다다를 수 있었다.[7] 그러나 본격적인 문제는 콘스탄티노플 코 앞에 당도한 뒤부터였는데, 위의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적이 접근할 수 있는 서쪽 통로에는 험준한 산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 쪽은 악명높은 테오도시우스의 3중 성벽(파란색 선)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리 좁다 한들,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는 것은 굉장한 도전이 필요한 일이다. 게다가 건너편에는 한 겹뿐이지만, 콘스탄티노플에서 가장 단단한 성벽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로마군이 이전에 시라쿠사를 점령할때 한 뻘짓을 수 없이 반복해야 했다. 남쪽(빨간색 선 안의 구역 : 마르마라 해)은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나오는 강한 해류의 영향을 받았고, 변변찮은 항구 시설도 없어, 거대한 도시를 점령할 만한 군대를 배치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북쪽의 금각만(검은색 선 안의 구역)이 가장 만만했는데, 방어군도 그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어서, 그곳에는 항상 엄청난 수의 함선이 상주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천혜의 요새였다.

2.1.1 테오도시우스 성벽 : 재래식 성곽의 황제

파일:IQgKMtv.jpg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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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있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 밖으로 도시가 팽창하게 되자, 4세기 테오도시우스 2세가 만들기 시작한 성벽으로 도시의 제1 방어선이었다. 뒤쪽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이 있기는 했지만 867년 지진으로 붕괴되어 그 흔적만 남게 된다. 물론 그런 거 없어도 될 만큼 굉장한 성벽이었다. 길이는 총 6 ㎞였으며, 따라서 지형의 영향을 많이 받아, 성벽의 각 구역마다 특징이 있다.

성벽은 가장 안쪽에 내벽(inner wall, mega teichos, "great wall")이 있고 그 앞쪽에 좀 더 낮은 외벽(outer wall, mikron teichos, "small wall")이 있었으며, 이 외벽과 해자 사이에는 parateichion라고 불리우는 흉벽(胸壁)[8]이 자리하고 있었다. 각각의 벽 사이에는 병력이 기동할 수 있는 공간(내벽과 외벽 사이는 peribolos라고 한다.)이 마련되어 있었고, 성벽 사이사이는 방어용 탑에 나있는 샛문으로 출입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내벽은 높이가 무려 12 m에 두께만 4.5~6 m에 달했다. 벽의 안쪽은 모르타르로 채워졌으며, 지진도 잦았기에 지진을 위한 보강도 행해졌다. 총 96개의 탑이 배치되어 있었고, 이 탑은 높이 15~20 m, 폭 10 m가량이었으며, 20~70 m 간격으로 탑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막벽으로 외벽과 내벽이 50 m간격으로 엇갈렸다.

탑의 최상부 - 그러니까 옥상에는 전투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고, 탑 내부는 2개의 층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아래층은 도시 쪽으로 열려 있었으며 창고로 사용되었고, 위층에는 바깥쪽으로 창문이 나 있어, 적을 향한 사격이 가능했다. 다만 이후 보수 과정 중에 창문과 총안이 사라졌고, 최상부만이 유일한 전투 공간이 되었다.

그보다 낮은 외벽은 두께가 2 m로 페리볼로스 쪽으로 아치형 출입구가 있었다. 높이는 8~9 m가량이었으며, 도시 쪽에서는 정문으로 들어가거나, 안쪽 방어탑에 있는 샛문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외벽의 방어탑은 내벽의 탑의 사이사이에 배치되어 있었으며, 12~14 m 높이에 폭은 4 m였다. 내벽은 최후의 저항, 바깥쪽의 흉벽은 일차 저지라는 의미가 있던 만큼, 외벽의 중심으로 방어에 좀 더 자원이 집중되어, 외벽은 가공할 만한 방어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애시당초 페리볼로스라는 활용 가능한 공간의 양도 적지 않고, 이래저래 성벽의 다른 부분과 연계가 뛰어난 만큼 중요한 부분이었다.

해자는 외벽에서 20 m 떨어진 곳에 위치하였으며, 해자 자체도 20 m였다. 10 m의 깊이로 형성된 해자 안쪽에는 높이 1.5 m의 총안이 갖추어진 흉벽(parateichion)이 갖추어져 있어, 일차 방어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 해자를 가로지는 막벽이 있었지만, 위쪽으로 점점 좁아지는 구조라 다리로 사용하기는 힘들었다. 이 막벽 안쪽에는 수도관이 있어, 해자를 채우는 송수관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그런데 이 해자는 성 로마누스 성문 방면에서는 급한 경사로 인해 유지 보수에 막대한 어려움이 따랐다. 그래서 이 해자는 성 로마누스 방면에서는 끊긴 후에 아드리아누폴리 성문 방면에서 다시 시작되었다.

해자의 모습, 해자를 가로지르는 막벽이 보인다.

그 유명한 테오도시우스 3중성벽이다. 3면이 바다로 둘러 싸여 있고 서쪽의 1면으로만 접근이 가능한 콘스탄티노플은 기본 입지조건부터가 무시무시했다. 더하여 성벽은 기존의 공성법으로는 거의 공략하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두껍고 높은 성곽이었다. 이 성벽은 재래식 성곽 요새의 극치다. 위의 그림을 보며 아래의 설명을 읽어 보자.

우선 성벽은 3중 구조인 서쪽의 육지방면 기준으로 길이 6km 가량이며, 너비 20미터 가량의 해자와 그 뒤의 방벽, 너비 2미터 높이 5미터의 외성벽, 너비 5미터 높이 12미터의 내성벽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또 내성벽과 외성벽에 일정 거리마다 교차되도록 96개씩의 망루가 설치되어 있었다.

해안쪽의 성벽은 평범한 단일 구조로 그냥 성벽 한겹만 있었다. 그러나 한겹의 성벽도 일반적인 다른 성의 성벽보다는 튼튼한데다가 실제로 적군이 이 쪽 성벽을 돌파하기에는 난이도가 만만치 않게 높았다.

남쪽의 마르마라 해 방면 성벽은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밀려오는 강력한 해류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평시에도 항해술을 제대로 익힌 승조원이 있는 튼튼한 선박만 근접이 가능한데다가, 적당한 항구시설이 별로 없어서 배를 접안하기도 어려운 곳이므로 성벽을 건설할 때부터 콘스탄티노플 함락때까지 이쪽 방면에서 적군이 성벽을 넘은 사례가 아예 없다.

동쪽의 하기아 소피아 방면 성벽은 고대부터 비잔티움의 신전이 있던 곳으로 가장 고도가 높고 노출된 정면이 좁으며, 역시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밀려오는 강력한 해류가 가장 강해지는 곳이라서 평시에도 바다 쪽으로는 접근이 매우 어려운 곳이다. 실제로 이 곳이 콘스탄티노플 함락 당시 최후로 함락된 곳일 정도로 방어수준이 높다.

북쪽의 금각만 방면 성벽은 해류의 영향도 받지 않고, 만의 폭도 좁은데다가 건너편 육지에서의 지원사격도 가능해서 확실하게 취약점이었다. 그래서 1200년의 제4차 십자군(...)때 베네치아인들이 이곳을 집중 타격하니 버틸 수가 없었다. 물론 당시 콘스탄티노플은 황제가 반대파에게 끔살되어 교체될 정도로 혼란스럽고 그 덕에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빈약한 방어가 갖추어진 상태였긴 하다. 더군다나 내통자 때문에 성문이 열렸다.(...)

이런 문제점을 동로마 제국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으며, 금각만 방면에는 동로마 해군이 국가가 멸망하는 순간까지 금각만에 주둔했다. 따라서 그냥 공격했다가는 성벽의 수비군과 동로마 해군의 연합공격을 받게 되므로 먼저 동로마 해군을 제거하거나 적어도 무력화해서 제해권을 쥐어야 공격이 가능했다.

덕분에 콘스탄티노플은 난공불락을 자랑했으며, 3중 성벽이 건설된 시기는 서기 422년인데, 이걸 정면으로 뜷고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는데 성공하는건 무려 1천년 후인 1453년이다. 제4차 십자군의 경우는 당시의 동로마 제국이 혼란의 도가니탕인데다가 성문까지 따주는 내통자가 있었고, 제해권을 쥔 베네치아 공화국이 동로마 해군을 무력화한 후 가장 약한 부위인 금각만 방면 성벽을 집중공격한 뒤에야 겨우겨우 함락할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제해권을 확보하고, 금각만 내부의 동로마 해군을 괴멸 상태로 만들지 않는 한, 공격방향은 서쪽의 육지 방면으로 고정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공격군의 입장에서는 공격 방향이 육상에서는 가장 방어가 탄탄한 곳으로 쏠리게 된다는 불리함을 감수해야 한다. 그래서 일반적인 콘스탄티노플 공성전은 아래와 같이 진행된다.

  • 해자를 넘고 제1성벽인 방벽에 접근하여 기어 오르는 동안 공격측은 제1, 제2, 제3성벽으로부터의 합동공격을 고스란히 당해야 한다. 특히 해자를 일부 구간이라도 메우지 않는 한 공성병기가 성벽이나 성문에 접근하기 어려우므로 난이도가 더 올라간다.
  •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의 고생 끝에 제1성벽을 함락시킬 성 싶으면, 1차 성벽 공략과는 비교도 안 되는 손실이 바로 이때부터 시작됐다. 수비측은 제2성벽인 외성벽으로 후퇴한다. 그리고 제1성벽 위와, 제1성벽을 지나 제1~2성벽 사이로 들어 온 공격측 병력은 제2성벽, 제3성벽으로부터의 공격을 다시금 고스란히 당했다. 더 큰 문제는, 제1성벽의 성문과 제2성벽의 성문이 엇갈려 있어 1성벽을 함락시키는데 사용한 각종 중장비는 여기서부터 무용지물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냥 나무사다리 밖에 쓰지 못한다. 1성벽보다 훨씬 높은 게 2성벽인데! (제1성벽을 넓게 넓게 헐어 버리면 제2성벽에 중장비를 댈 수 있다. 그렇지만 2,3성벽으로부터 돌과 화살이 계속 쏟아지고, 공격측의 병력이 몰려서 북새통인 와중에 그런 대공사가 얼마나 잘 진행될 수 있을까?)
  • 피똥을 싸는 고난 끝에 제2성벽을 함락시킬 성 싶으면 수비군은 제3성벽인 내성벽으로 퇴각한다. 그럼 또 다시 똑같은 과정을 되풀이 해야 하는데, 제3성벽은 제2성벽보다도 높다. 공격측은 그냥 돌아 버릴 지경이니, 이쯤 되면 지휘관도 냉정을 잃게 되며, 부대 전체의 손실률과 사기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곤두박질치게 되고, 병량을 비롯한 보급물자도 바닥을 보이기 시작한다. 여기에 시간이 흘러 전투에 좋은 계절이 아닌 겨울이 되면 추위 옵션까지 붙으면서 난이도가 또 다시 올라간다. 결국 눈물을 머금고 퇴각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기존 항목의 윗부분에는 제1성벽, 즉 흉벽을 외벽으로 착각하고 흉벽과 외벽의 입구가 하나라고 서술한 듯하다. 실제로 하나의 성벽을 공유하는 것은 외벽과 내벽뿐으로 보인다. 물론 같은 성문을 공유한다 할지라도 그 방어능력은 보통의 다른 곳과는 달리 상상을 초월하며, 각종 탑과 방어 시설들이 몰려 있었다.

이러한 성문은 총 9개이지만, 어째서 전해지는 이름은 더욱 많다... 오랜 시간 이어져 온 벽이니 시대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려졌을 수도 있고, 개보수 과정에서 원래 있던 성벽을 폐쇄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런 본성문 이외에도 군사용 문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또한 수없이 많은 샛문들이 있어, 성벽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닐 수 있게 하였다. 6 ㎞에 달하는 성벽이니 당연히 필요한 조치다.

해안 쪽 성벽은 테오도시우스 성벽과 구조는 유사했으나, 한 겹으로만 이루어졌다. 그러나 해안 쪽에 접근하는 것 자체를 막는 각종 설비가 있는 데다가, 마르마라 해 쪽은 강한 해류로 배를 붙들어 놓을 수도 없고, 금각만 쪽은 좁은 입구로 인해 함대의 접근을 손쉽게 막을 수 있었다.

결국 악명높은 테오도시우스 3중 성벽은 마지막까지 완벽한 정공법으론 함락되지 않았다. 수비대장이 부상을 입어 드러 누워 버리는 바람에 지휘체계가 마비되고, 몇 달 동안의 공성포 세례로 간신히 낸 성벽의 구멍을 통해 억지로 밀어 넣은 최정예병력(예니체리)이 맹활약을 펼치는 등, 여러 가지 행운과 호재와 피나는 노력들이 한꺼번에 겹쳐 시너지(…) 효과를 낸 후에야 간신히 함락된 것이다.

그러나 테오도시우스 성벽과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이 공성측의 행운(수성측의 불운) 때문에 일어났다고 보는 것은 약간의 무리가 있다. 수비대가 성문을 못닫은 것은 수비대가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벅찰정도로 정신 없이 밀어붙였기 때문에 나온 것이고, 수비대장의 부상 역시 지속적인 파상공세로 인하여 수비자들의 부대 손실이 높아진 끝에 일어난 일이며, 성벽에 틈 나면 거기로 최정예 병력을 밀어넣어 진출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이야 공성전의 기본 중 기본이다. 요컨데, 막대한 물량과 인원을 동원한 오스만 제국이 '운이 좋아질 때까지' 성을 두들겼기에 공성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혹 성벽을 깔끔하게 개발살 내지 못한 것을 문제삼기도 하는데 애초에 오스만 군의 목적은 도시를 점거하고 자기 것으로 이용하는 것이지 도시를 초토화 시키는 것이 아니므로 최대한 보존되는 것이 오히려 좋다. 설령 점거가 아닌 파괴가 목적일 지라도 일단 전술적으로는 돌파구를 찾아서 저항을 철저히 무력화 시킨 뒤에나 여유롭게 부수는 것이지 공성 단계에서부터 성벽 전체에 대한 파괴를 수단으로 하지는 않는다.

2.2 개전 전의 상황

1204년 십자군에게 콘스탄티노플이 점령당한다. 이때를 기점으로 명목상의 동로마 제국은 멸망하게 된다. 하지만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것은 어떤 군사적 정치적 목적하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저 때문이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은 황위 계승 문제로 시끄러웠다. 삼촌에 의해 쫒겨난 황태자 알렉시오스는 십자군에게 막대한 보상금을 약속하고 용병으로 고용했다. 당시 황제였던 알렉시오스 3세는 적당히 싸우다가 화의를 위해서 십자군을 불러들였고, 시민들은 이것을 항복이라고 착각하고 분노한다. 낌새를 챈 알렉시오스 3세는 제위를 버리고 도망쳤고, 황태자는 알렉시오스 4세로 즉위한다. 그런데 여기서 알렉시오스 4세가 지급하기로 한 보상금 문제가 불거지고, 알렉시오스 4세 또한 죽임을 당한다. 시민들은 알렉시오스 4세가 죽었으니 보상금은 없다고 했고, 도시에 들어와 있던 십자군은 빡돌아도시를 약탈하는 것으로 강제 징수해 버린다. 이로서 동로마 제국은 명목상 멸망했으나, 망명 세력들은 니케아 제국. 트레비존드 제국, 이피로스 공국을 세운다. 이 중 니케아 제국의 황제 미카일 8세가 1261년 콘스탄티노플을 수복하게 된다. 이로써 괴뢰국이나 다름없던 라틴 제국은 멸망했고, 동로마 황위는 다시 이어진다. 그런데 미카일 8세의 이런 원정은 상당한 비용을 소모하는 일이었다. 또한 정통성이 부족한 미카일 8세는 자신의 지지 기반을 위해 영지와 자금을 탕진했고, 이는 니케아 제국의 본거지인 소아시아 방면의 신민들과 유력자의 불만을 사게 된다. 또한 콘스탄티노플을 재건하기 위해 투입한 비용 충당을 위해 높은 세금을 때리게 되고, 이에 후계자인 안드로니코스 2세는 국방력 약화를 감수하고서라도 감세 정책을 폈는데, 하필이면 그때가 오스만 제국이 창건된 때와 딱 겹쳐 버렸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경제적 중심지인 아나톨리아 반도의 땅을 잃게 되면서, 동로마의 황위를 이은 니케아 제국은 무너져 가게 된다. 또한 14세기 중반 동로마 제국을 휩쓴 흑사병에 콘스탄티노플 인구의 절반이 죽고, 이제는 살아있는 게 신기할 지경에 이른다. 1204년 이후 동로마 제국이 회복한 영토는 다시 줄어들게 된다.

그즈음 몽골이 휩쓸고 간 폐허에서 일어난 오스만 제국은 동로마 제국의 아나톨리아 반도를 휩쓸어 버린다. 2대 술탄 오르한 가지는 동로마 제국의 내전을 이용하여 갈리폴리 반도에 교두보를 마련했고, 이후 오스만 제국은 갈리폴리를 교두보로 발칸 반도로 세력을 확장했다. 특히 1389년 코소보 전투에서 술탄이 전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세르비아 군과 무승부를 거둠으로써 세르비아를 굴복시키고[9], 1396년에는 2차 불가리아 제국을 완전히 멸했다. 동로마 제국의 처지는 더욱 악화되어 콘스탄티노플과 펠로폰네소스 반도 일부만이 남게 되었으며, 1371년에는 로마 황제가 다른 나라 군주의 신하가 된다는 사상 초유의 굴욕까지 맛보게 된다.[10] 더욱이 1396년에 프랑스와 헝가리가 주축이 된 십자군을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격파한 뒤로는, 콘스탄티노플은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후 보스포루스 해협에 아나돌루 히사리(Anadolu Hisari)라는 요새를 세우는 등 동로마 제국을 압박했던 바예지트 1세는 1402년의 앙카라 전투에서 티무르에게 패배하여 포로로 잡혔지만[11] 메흐메트 1세가 10년에 걸친 내전 끝에 제위 경쟁자였던 형제들을 모두 제거함으로써 제국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이후 그는 바예지트 1세와는 대조적으로 온건한 정책을 취하여 아나톨리아 반도에서는 현상 유지 정책을 펴는 한편 앙카라 전투 이후 독립해 나간 세르비아 등을 다시 신하국으로 삼았고, 그 뒤를 이은 무라트 2세는 오스만의 세력을 바예지트 1세 때로 되돌려 놓기는 했지만 알바니아의 군주인 스컨데르베우[12]와 헝가리의 유능한 지휘관이자 정치가인 야노슈 후냐디의 저항에 부딪혔다. 결국 그는 헝가리와의 전쟁에서 희생만 클 뿐 성과가 없다는 것을 이유로 아들인 메흐메트에게 양위하겠다고 선언했지만 당시 메흐메트의 나이가 어린 탓에 관료들과 군부의 불만에 부딪혔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린애가 술탄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헝가리는 다시 군대를 일으켜 왔다. 이에 메흐메트는 아버지에게 헝가리 군을 격퇴해 달라고 요청했고, 무라트는 1444년의 바르나 전투에서 승리한 뒤 아들을 폐위하고 복위. 1448년의 2차 코소보 전투 등에서 헝가리군을 연파하여 강화를 맺었다. 이후 무라트는 알바니아 원정에 나섰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퇴각한 뒤 곧 세상을 떠났고, 그 뒤를 이어 아들인 메흐메트가 복위했다.

하지만 복위했을 당시 메흐메트 2세의 입지는 상당히 불안정했는데, 무라트 2세 시대에 오스만 제국의 정계에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본래 오스만 제국은 창건자 오스만 1세 개인의 세력으로 일구어 낸 것이 아니라 여러 튀르크계 부족들의 연합 정권이었는데, 그로 인해 초창기 오스만 제국의 지배층은 이들 튀르크계 부족들의 후예들이었다. 예니체리가 창설된 것도 군사적으로 이들의 영향력을 덜 받기 위한 술탄들의 노력이었는데, 그것이 어느 정도 성과가 있다고 판단한 무라트 2세는 기독교도 소년들을 징집하여 관료로도 부리자고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무라트 2세 치세, 그리고 메흐메트 2세의 치세가 시작되었을 당시 오스만 제국의 관료층은 기득권 세력과 데브시르메 징집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고, 이들은 현 상황을 유지하자는 파(기득권 세력)와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파(데브시르메)로 나뉘어 논쟁을 벌였다. 하지만 무라트 2세의 신임을 받던 재상 할릴 파샤는 기득권 세력. 그것도 기득권층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할릴 파샤는 작금의 오스만 궁정 내 첨예한 정치적 판도가 콘스탄티노플 정복이라는 거대한 사건을 겪으면 권력의 중심이 자신이 대표하는 아나톨리아 기반의 베이[13]들과 대립하는 기독교 피정복민, 즉 루멜리아 출신의 데브시르메 파쪽으로 넘어 갈 것이라 생각하여 콘스탄티노플 점령을 반대하고 있었다.

이렇게 양쪽 다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에 있던 도중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치명적인 외교적 빌미를 오스만측에 제공해 버린다. 당시 비잔티움의 재상이자 명문가 노타라스 가문 출신의 루카스 노타라스 대공의 위세를 꺾고 술탄 계승 문제로 아직 오스만 측의 입지가 불안정 할 때 황제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콘스탄티노스 11세는 할릴 파샤와 메흐메트 2세에게 당시 술탄위 계승 과정에서 쫒겨나 동로마 제국 내에 망명와 있었던 오스만 왕족 오르한을 먹이고 재워주며 사고 안치게 관리하는 비용을 추가로 내놓으라 한 것이다. 안 그래도 궁정 내 여론이 갈리는 도중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측에서 먼저 이렇게 도발을 하고 나오니 오스만 측에서는 할릴 파샤도 더 이상 콘스탄티노폴리스 원정을 반대할 명분이 사라졌다. 메흐메트 2세는 일단은 동로마 측의 사신에게 아나톨리아의 반란 먼저 진압하고 나서 답을 주겠다고 했으나, 이후 사신에게 따로 할릴 파샤가 내지른 성토를 보면 당시 동로마 제국의 남은 존재 자체가 오스만 제국에게 위험이 되는 이유가 상당히 극적으로 설명 되어 있다.

이 멍청한 그리스놈들아, 네놈들의 교활함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지난 술탄[14] 께서는 네놈들에게 관용을 배푸셨지만 지금의 술탄께서는 생각이 다르시다... 네놈들은 지난 술탄께서 너희들과 체결하신 화평의 먹물이 아직 마르지도 않았는데도 우릴 헛된 망상으로 겁 줄 수 있을거라 생각하는 모양인데, 우리는 힘도 생각도 없는 아이들이 아니다. 네놈들이 뭔가 할 수 있는게 있다면 한번 해 봐라.트라키아에서 오르한을 술탄으로 옹립해 보던지, 도나우 강 넘어 헝가리인들을 불러 오던지,[15] 뭐든지 해 보란 말이다. 다만 이것만 명심하거라, 이런 짓을 한다고 너희들은 고토를 회복하는게 아니라 지금 남은 것 마저도 몽땅 잃을 것이다.[16]

그리고 이 말은 사실이 되었다.

메흐메트는 할릴 파샤를 비롯한 아나톨리아 튀르크계 출신 귀족층을 제압하고, 무라트 2세 때에 정계에 진출한 데브시르메 세력을 친위 세력으로 삼아 전제군주정을 수립하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아직까지 몇몇 유력 귀족들이 일치하는 이해 관계를 바탕으로 같이 군세를 형성하는 유목 제국의 성격이 강했던 초기 오스만 제국 입장에서 이렇게 군주의 권위를 압도적으로 한방에 키우는 방법은 역시 전쟁, 그것도 군침 줄줄 떨어지는 스펙터클한 상대를 향한 대규모 원정 뿐. 이에 따라 그는 동로마 제국을 정복하여 유럽의 지배자를 자처하려는 꿈을 갖고 있었다.[17] 그리고 그를 이루기 위한 방법으로 술탄인 자신이 주도하여 콘스탄티노플이라는 대도시를 정복하는 것을 선택하게 되었고, 그를 위해 1452년에 콘스탄티노플 북쪽 보스포루스 해협 유럽 방면에 새로운 요새인 루멜리 하사르(Rumeli Hisarı)를 건설한다. 이는 바예지트 1세가 건설한 아나톨리아 쪽 요새와 함께 보스포루스 해협에 대한 완전한 장악을 가능하게 했다. 또한 이는 흑해 방면에 있던 제노바 식민지들이 콘스탄티노플을 지원하는 것을 막았다.[18]

이때 동로마 제국에게 남은 영토란 신하국인 모레아 공국이 통치하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콘스탄티노플이 전부였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방어가 가능한 건 콘스탄티노플뿐이었다.

3 개전

1452년 루멜리 히사리 요새가 완성되자, 동로마 제국에 비상이 걸린다. 이제 침공이 임박했음을 모르는 이는 더 이상 없었다.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콘스탄티노스 11세는 교황과의 동맹을 맺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그해 겨울에 관료와 성직자들을 비롯해 콘스탄티노플 주민들도 탐탁지 않게 생각한 동맹이 맺어진다.[19][20] 그러나 교황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구원하고 싶어도 그럴 힘이 없었다. 콘스탄티노스 11세가 원한 것은 예루살렘을 구하러 신성로마제국 황제, 영국 왕, 프랑스 왕 등이 참가했던 3차 십자군 같은 대(對) 이슬람 동맹군의 지원이었으나, 이제 더 이상 교황에게 그런 십자군을 모을 능력도, 권위도 남아 있지 않았다. 거기에 황제를 구원한다는 영광에 자신의 한 몸을 던질 허영과 야심이 가득하며, 원정 나갈 여유가 있는 왕은 이제 남아 있지 않았다.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 전쟁은 이제 결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이베리아 반도(스페인)에서도 이슬람 세력과의 레콩키스타의 마지막 단계가 진행 중이었으며, 신성로마제국은 공국들 간의 전쟁으로 혼란스러웠다. 헝가리와 폴란드는 바르나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에 대패한 뒤였다.

북이탈리아는 조금 달랐다. 제노바가 도시 내부의 자산을 지키기 위해 잘 훈련된 병력 700명을 1453년 1월에 지원 보낸 것. 하지만 7백 명으로 대세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베네치아에서도 함대를 제공하기로 했고, 금각만에 정박하고 있던 베네치아 소속 상선들도 전투에 참가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베네치아 본국 평의회에서 함대 파견에 대한 회의가 길어지면서[21] 실제 파견은 1453년 4월경에나 이루어진다. 이때는 이미 전투가 시작되었고, 제노바 함대는 참가하지 못하게 된다. 제노바의 해외 식민지 가운데 하나인 키오스 섬의 영주로 자원해서 콘스탄티노플에 찾아온 지원군의 지휘관인 용병 대장 조반니 주스티니아니(Giovanni Giustiniani)[22]는 용병료만 받을 수 있다면 도시를 방어해 낼 것을 맹세한다. 콘스탄티노스 11세는 그를 당장 고용하고, 육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황제인 자신 바로 다음가는 권한을 부여한다. 콘스탄티노스 11세는 마지막 수단으로 메흐메트 2세에게 선물을 바치며 친선 관계를 요청했지만, 반응은 싸늘했다. 외교적 수단은 수포로 돌아갔고, 이제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공방전만이 남아 있었다.

콘스탄티노스 11세는 금각만 쪽으로 접근을 막기 위해, 만의 입구를 가로지르는 두꺼운 사슬을 설치한다. 이로써 금각만은 일단 방어할 수 있었고, 바닥을 드러내기 직전의 금고를 탈탈 털어 성벽을 강화하는 등으로 공성전을 준비하며 외국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버티기로 다짐한다.

메흐메트 2세는 오스만 군을 데리고 4월 2일 도시 서쪽에 자리 잡았으며 1453년 4월 5일에는 그의 마지막 부대까지 성벽 앞에 집결했다.

3.1 오스만 군의 상황과 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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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해협을 넘은 오스만 군의 규모는 15만 가량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군대는 오스만 최고의 정예보병인 예니체리 1만명[23]과 수천의 기독교 군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기독교 군대는 발칸의 종속국에서 온 군대로, 콘스탄틴 미하일로비치가 이끄는 1,500명의 세르비아 기병대가 포함되어 있었다. 다만 당시의 세르비아 공작 주라지 브란코비치(Đurađ Branković)는 몇 달 전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의 보수에 자금을 지원하는 등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할 뜻이 없었지만, 오스만의 신하국인 이상 지원군을 파견하라는 요구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술탄의 군대는 당장 투입가능한 전투병력만 도합 15만에 달했고, 유럽인들은 30만이 넘는다는 과장섞인 평가를 하기도 했는데, 당대에는 비전투병력을 군이 투입가능한 인력에서 제외했기에 15만으로 봤지만 비전투병력을 합치면 30만이 아니라고 하기도 어렵다.

이 술탄의 군대는 당시에는 상상하기 힘든 War Machine, 즉 시스템화된 군수 체계를 갖춘 군대였다. 도로 공사, 취사, 운송을 담당하는 후방 지원부대가 따로 편성되어 있었다. 이 중 전문 의무대까지 갖춘 예니체리는 전체 오스만 군의 축소판이라 할 만큼, 체계화된 오스만 군의 견본이나 다름없었다. 따로 자잘한 업무들을 수행할 비정규군도 모집되어, 전투 병력은 본연의 전투 임무에만 충실할 수 있었다. 이런 군대를 운용하기 위한 거의 모든 작업이 관료와 장교들의 손에서 이루어졌으며, 이런 war machine은 서유럽에서는 구스타브 아돌프의 개혁 이후에나 비로소 형태를 갖추게 된다.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군대였고, 그만한 전투력을 제공해 주었다.

메흐메트 2세는 도착하자마자 바다 쪽에서의 공격을 위해 함대를 건조했다. 이 함대의 규모에 관해서도 100척부터 430척까지 목격자들의 기록은 천차만별이지만 적어도 200~300척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 함대는 6척의 대형 갤리선과 10척의 갤리선, 15척의 소형 갤리선, 75척의 소형 보트, 20척의 말 수송선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함대의 운용은 갈리폴리의 그리스인들에게 맡겨졌다. 바다쪽에서의 적의 준비는 철저했지만, 그래도 바다만 점령한다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은 어려운 일도 아니었으니 도전해 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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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는 이 공성전을 위해 대형 공성포인 우르반 거포[24]도 동원되었다. 이 거포의 수송을 위해서는 30대의 수레와 60마리의 소, 200명의 거포 관리 인원이 필요했으며, 250여 명의 병사들이 투입되어 앞서서 도로 공사를 진행해야 했을 정도로 거대했다. 길이는 대략 8 m에 달했으며, 무게는 19톤을 자랑했다. 발사 후 포 자체의 가열로 인해 재장전에만 3시간이 넘게 걸렸고, 하루에 7발이 한계였으며, 그 이상 쏘면 포신이 엿가락처럼 휘어져 영영 못쓸 각오를 해야 했다. 대략 300 ㎏의 돌덩이를 1.6 ㎞ 넘게 발사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 발사체를 구하기가 굉장히 어려웠다.

이 무기는 헝가리[25] 우르반이 주조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처음에 이 무기는 동로마에 판매될 예정이었다. 만일 판매되었으면 공성전 난이도는... 그러나 비잔티움 정부는 우르반에게 비용을 지불할 수 없었다. 이에 우르반은 메흐메트 2세에게 가서 "바빌론의 성벽도 무너뜨릴 수 있다"라는 언플을 시전했고, 밀덕 마호메트 2세는 당장 이를 주문한다. 막대한 자금과 재료를 제공받은 우르반은 3달 후에 거포를 제작했으며, 오스만 군대를 위해 다른 공성포들도 제작해 주었다.[26]

이렇게 거대한 군대를 동원한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해안 방면을 완전 봉쇄하는 것은 제 아무리 오스만 군이라도 힘들었다. 바탕이 유목민족인 데다가, 그리스인을 동원한다고 해도 자체적인 해군 선원 양성이 없는 한 대규모 함대를 시간에 맞춰 건조하는 것은 무리였다. 거기에다가 튀르크인이 지휘권을 쥐고 있는 해군의 질도 그리 좋지 못해서[27], 금각만의 봉쇄는 번번이 실패했다. 따라서 마냥 포위를 하는 것도 의미가 없었을뿐더러 천천히 공성전을 진행하는 것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아버지인 무라트 2세가 종횡무진으로 뛰어다니면서 오스만 제국에 평화를 가져다주었다고 해도, 발칸 반도의 종속국들이 언제 반기를 들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완전 점령이 아닌 제패의 형식으로 이루어진 정복이기에 맘 먹고 봉기한다면 위협이 될 수는 있었다. 물론 바르나 전투와 제2차 코소보 전투로 위협적인 서양의 중기병들은 거의 궤멸되다시피 했고, 당시 중기병은 훈련, 양성하는 데 막대한 시간과 비용이 드는 병종이었다. 고작 10년으로 회복이 가능할 리 없으나, 소수라도 끌고 왔을 때 여젼히 그 위력은 오스만 군에게는 치명적이었다.[28]

하지만 굳이 전면전을 벌일 필요 없이 보급선만 공격해도 술탄의 군대는 와해될 수 있었다. 물론 당시의 군대가 필요한 물자는 현대군에 비하면 엄청나게 적다. 보급 며칠 없다고 군대가 와해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만큼 보급 효율도 개판이었다. 수송하는 데 드는 비용이 수송을 해서 얻는 이익보다 훨씬 크니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격이었다. 따라서 보급 비용은 매우 높았고 따라서 최대 30만의 군대와 수백척의 함대를 유지하는 것은 여러모로 여러운 일이다. 보급선 하나만 무너뜨려도, 오스만 군의 전투력은 수직하강할 수 있었다. 물론 일반적인 성이라면 누가 올 걱정은 별로 할 필요 없었다. 애시당초 당시는 재래식 공성기술이 당시 가능한 극한까지 발전되어 있었고, 굳이 우르반의 거포가 아니더라도 공성포는 여럿 마련되어 있었다.[29] 게다가 콘스탄티노폴리스 하나 구하겠답시고, 술탄의 군대에 빅엿을 날릴 나라는 없었다. 그러나 메흐메트 2세의 앞에 있는 것은 지난 1000년간 단 1번만 적의 침입을 허용한 테오도시우스 3중 성벽[30][31](...). 안일하게 대처하다가는 공성이 몇 년이 될 지 알 수 없었고, 따라서 차근차근 공성전을 진행하다가는 지친 오스만 군을 쌈싸먹어, 제국에 빅엿을 날릴 결심을 할 사람이- 주로 발칸에서 - 나오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그러다가 군대라도 날려먹을 때는 무라트 2세가 쌓아놓은 왕권을 무너뜨릴 수도 있었다. 특히 재상인 찬다를르 할릴 파샤는 공방전 도중에도 여러 번 포위를 풀고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했으니까. 따라서 여러모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반드시 점령해야하는 곳 중에 하나이면서, 1453년만큼 오스만의 대내외적인 상황이 맞아떨어지는 시기도 없었다. 그러니 오스만 군 입장에서는 정복할 것이라면 지금, 확실하게 해둘 필요가 있었다. 안일하게 대처하기에는 테오도시우스 3중 성벽은 너무나도 큰 산이었고, 고려해야 할 변수는 너무나도 많았다.

따라서 오스만 군에게 총력을 다한 공격이 최선이었다.[32]

3.2 콘스탄티노플 방어군의 상황과 배치

그에 반해 콘스탄티노플 방어군의 병력은 7000명에 불과했다. 당시 징집을 위해 도시 전체를 뒤졌으나, 무장할 수 있는 인원은 5000명에 불과했고, 2000명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장사를 하던 상인 등 외국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 중에 제노바인 용병부대가 훈련과 무장이 가장 훌륭했고, 바다에서는 베네치아 상인들의 함대가 가장 강력했다. 나머지는 소수의 훈련된 병사들과 무장한 시민, 선원, 외국인 자원자, 그리고 수도사들까지 포함되었다. 방어군에게는 소구경 포탄이 몇 있었으나, 성벽 위에 올려두고 쏘다가 반동 때문에 성벽이 무너지면 큰일이라는 이유로 사용되지 않았다. 당시에는 주변에서 몰려온 난민들을 포함해 5만명의 시민들이 있었고, 병사들을 제외한 나머지 시민들은 벽을 보수하고, 망루에서 경계임무를 맡았다. 식량배급이 시작되었고, 교회에 있는 금이란 금, 은이란 은은 다 뜯어와, 외국인 병사 2000명에게 줄 급료를 마련했다.

해안 쪽 방면의 4분의 1은 황위계승에서 밀려나 동로마 제국에 망명해 있던 오스만 제국의 황족 오르한 첼레비(Orhan Çelebi)에게 맡겨졌다.[33] 그가 이끄는 오스만인은 대략 600명으로, 이들은 전투가 끝날 때까지 제자리를 지켰다. 해안 방면의 성벽은 금각만이 점령당할 때까지는 안전했으므로 부족한 군사를 아끼기 위해 보초병을 배치한다는 느낌으로 듬성듬성하게 배치되었고, 금각만 방면에서는 베네치아와 제노바 함대가 베네치아인 가브리엘레 트레비사노(Gabriele Trevisano)의 지휘 아래 배치되었다. 4월 5일에 술탄의 군대가 도착하자, 방어자들은 자리를 잡게 된다. 방어벽 전체에 병력을 배치하는 것은 무리였고, 결국 외벽에만 병력을 집중시키기로 한다. 콘스탄니노스 11세와 그의 군대는 벽의 중앙부인 메소티히온에 배치된다. 이 벽은 방어벽 중에서 가장 약한 부분으로 여겨졌고, 이곳에 적의 공격이 집중될 터였다. 주스티니아니는 황제의 북쪽 방면인 카리시우스 문(Charisian Gate)에 배치된다. 황제의 남쪽에는 제노바인 카테네오(Cataneo)가 방어를 맡았고, 황금 문(Golden Gate)와 페게 문(Pegae Gate)은 베네치아인 필리포 콘타리니(Filippo Contarini)에게 맡겨졌다.

여러모로 힘든 상황이었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유럽에서 가장 잘 방어된 도시였다. 제 아무리 오스만군이 많다고 하더라도 전력을 다하지 않는 한 함락하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이들을 최대한 막으면서 외부 증원군을 기다리는 것이 방어군의 유일하면서도 가장 강력한 방어전략이었다. 비정규부대 아잡, 시파히를 비롯한 정규군의 파상공세와 뒤를 이은 예니체리의 공격은 오스만 군의 장기였지만,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그걸 견뎌낼 수 있는 난공불락의 성벽이었다.[34]

3.3 공성전 - 격전의 5월

4월 5일 술탄의 마지막 부대까지 합류하자, 메흐메트는 그의 정예병들을 후방에 있는 동로마 성채를 공격하도록 시지했다. 마르마라 해 쪽에 있는 스투디우스의 작은 성들은 금세 함락되었고, 보스포루스 해협의 테라피아 요새도 며칠 안에 무너졌다. 마르마라 해에 있는 섬들은 쉴레이만 발타오울루(Süleyman Baltaoğlu)가 이끄는 오스만 함대가 점령한다. 그 기간 동안 오스만 군의 우르반 거포가 성벽을 두들겼으나, 당시 화약무기가 으레 그랬듯 참말로 거시기한 정확도에 무지막지하게 긴 장전시간까지 곁들어져, 동로마 부대는 충분한 수리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고, 거포는 기대를 따라주지 못했다.[35]

해안에서의 싸움도 맘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술탄도 그의 빈약한 해군을 데리고 금각만을 돌파할 생각까지는 없었다. 금각만 입구에 쳐놓은 방어용 사슬 때문에 배들이 만으로 진입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함대는 기본 임무인 해안 봉쇄도 제대로 해놓지 못했다. 4월 20일에 4대의 선박이 치열한 싸움 끝에 봉쇄망을 뚫고 만으로 진입했다. 이 선박들 가운데 세 척은 교황의 의해 지원된 제노바 함선이었고, 한 척은 동로마 제국의 함선으로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식량을 구하기 위해 크레타 섬에 보내졌었다. 이들의 무사귀환으로 방어자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고, 술탄은 오스만 함대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된다. 결국 발타오울루는 해임되고[36] 새 제독으로 함자 베이가 임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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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배를 언덕 너머로 옮겨 금각만에 진입하는 오스만 해군.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 실사판)

메흐메트는 이 금각만이 계속 열려있는 한 공성의 성공이 묘연하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돌파구를 탐색한다. 그는 금각만 북쪽 갈라타에 기름칠된 통나무들을 놓아 그 위로 배가 지나갈 수 있는 지상통로를 만든다. 이 통로를 통해 갈라타의 언덕 너머로 함선을 옮겨 금각만에 진입한다는 대담한 작전[37]. 4월 22일에 전체 함대 가운데 절반이 이 길을 통해 금각만으로 진입하는데 성공한다. 이는 명목상 중립이었던 금각만 건너편의 제노바인 식민지 페라에서 오는 보급을 위협할 수 있었고, 방어군 사이에서는 불안감이 퍼지게 된다. 28일 저녁 방어군은 오스만 함대를 화공선으로 공격하려 하지만 제노바인의 밀통으로 인해[38] 오스만 군은 이를 미리 예상했고, 방어군은 오히려 심한 피해를 입고 퇴각한다. 40명의 이탈리아인 선원이 침몰하는 함선에서 탈출해 금각만 북쪽에 다다르지만 오스만 군에게 사로잡혀 방어군이 보는 앞에서 처형당한다. 방어군은 보복으로 260명의 오스만 군 포로 전원을 참수한다. 이 오스만 군 함대는 계속 금각만에 주둔하게 되고, 결국 방어군은 선원 가운데 일부를 성벽에 올리는 등 금각만에 면한 성벽에도 병사들을 다수 주둔시켜야 했다. 5월 3일 동로마 내부의 물자들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12명의 병사가 임무에 자원했고, 소형 선박 하나가 야음을 틈타 방어선을 피해 베네치아 함대에게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빠져나간다.

해안에서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지상에서는 오스만 군의 공세가 이어졌다. 그러나 지상에서의 방어는 테오도시우스 성벽에 힘입어 철통같았고, 예니체리가 중심이 된 공세는 번번히 실패한다. 계속되는 포격은 분명 적의 성벽에게 큰 피해를 입혔으나, 모르토르로 안 쪽이 가득찬 성벽은 좁은 틈새만 허용했을 뿐이었다. 이곳으로 병력들이 누차 투입되었으나, 성벽의 방어 체계 앞에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5월 6일 성 로마누스 문 방면이 포격으로 붕괴했다. 문제는 이쪽의 성벽이 리쿠스 강이 흘러드는 지역이라, 다시 성벽을 보수하는 것은 버거운 일이었다. 역으로 리쿠스 강이 만들어낸 골짜기로 인해 해자를 형성하기도 어려운 이 곳은 공격도 쉽지는 않았다. 주스티니아니는 뒤쪽에 새 성벽을 쌓는 것으로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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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7일 메소티히온에 2만 5천의 오스만 군이 투입되었지만, 그보다 10배는 적은 방어군에 의해 3시간의 격전끝에 격퇴된다. 물론 이런 공세로 인해 지상군의 부담이 커지고 결국 금각만 방면의 해군에서 또다시 일부 병력을 빼와야 했다. 12일 다시금 공세가 재개되었고, 이전에 투입되지 않은 나머지 병력들이 공세에 투입되었다. 이번에는 성벽에 꽤 커다란 구멍이 생겼고, 이 쪽으로 병력들이 투입된다. 황제의 근위대까지 동원되어 입구를 틀어막았으며 결국에는 방어에 성공한다. 5월 18일 공성탑을 동원하여 해자를 넘어 외벽에 적은 피해로 접근하는데 성공했지만, 그날 저녁 수비대가 놓여있던 공성탑을 죄다 불살라 버린다. 동로마는 그새에 다시 성벽을 보수하는데 성공한다. 답이 없다. 역시 공성전 최종보스 레이드는 쉽지 않다.

성과없는 정면 공격이 계속되자, 오스만 군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갱도 건설을 계획한다. 5월 중순부터 공사가 시작되었고, 세르비아의 광산인 노보 브르도(Novo Brdo)에서 일하다가 세르비아가 파견한 지원군에 속해 끌려온 광부들이 주가 되었다. 이들은 자아노스 파샤(Zağanos Paşa)의 지휘 아래 공사를 진행하나, 방어군 측 기술자 요하네스 그랜트(Johannes Grant)가 이 땅굴과 이어지는 또다른 땅굴을 팠고, 동로마 병사들이 그곳을 통해 공사 인부들을 공격한다. 방어군은 5월 16일, 오스만 군이 판 갱도를 차단하고, 21일, 23일, 25일에 다른 갱도들을 차단하는데 성공한다. 그리스의 불의 투입과 치열한 전투 끝에 이 땅굴들은 파괴된다. 방어군은 5월 23일 2명의 오스만 장교들을 사로잡았고, 고문끝에 이들은 모든 갱도의 위치를 발설한다. 위치의 발설로 모든 갱도들이 방어군의 손에 파괴되면서, 갱도를 이용한 돌파도 실패한다.

일이 이렇게 돌아가자, 오스만 군 지휘부도 애가 타기 시작한다. 메흐메트 2세가 공성군에게 막대한 보상금을 걸어보기도 하고, 공성기로 성벽을 공략하기도 해봤으나 전부 무용지물. 날짜가 바뀔수록 성벽 공격의 주력인 예니체리 부대의 손실은 점점 커져갔다. 제국의 최정예나 다름 없는 예니체리를 이렇게 소모하는 것은 여러 모로 이득이 아니었다. 제국에게는 여전히 적이 많았고, 나중을 생각하면 예니체리 부대는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결국 메흐메트 2세는 황제에게 사절을 보내 항복할 것을 권유한다. 도시 내의 모든 거주민과 황제의 재산의 보호, 황제가 가진 모레아 공국(펠로폰네소스 반도)에 대한 권리 보장 및 통치 위임, 도시에 남을 이들의 안전 보장 등을 골자로 한 내용으로 이 항복 권유는 도시 공략에 계속 애를 먹는 술탄으로서는 진심으로 한 제안이었을 것이다. 이 항복 권유를 받고,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술탄의 호의와 관대함에 커다란 경의를 표했으며, 아나톨리아 및 그 외의 술탄의 모든 점령지에 대한 권리를 인정한다. 하지만 항복 권유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정중히 거절한다.

"미안하오만, 이 도시를 넘겨주는 일은 나뿐만 아니라 이 도시에 살고 있는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의사에 따라 죽기로 결정했고, 목숨을 아끼지 않을 것이오.[39]

항복 권유가 거절당한 뒤, 메흐메트 2세는 휘하 장수들을 모두 불러 모아 앞으로의 공성에 대해 논하고자 참모회의를 열었다. 재상(Vezir-i âzam)이었던 할릴 파샤(Halil Paşa)는 이전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공격에 반대해왔다. 그는 이미 오스만 군의 피해가 막심하며, 더이상의 공격은 무의미하다며, 공성을 포기할 것을 주장했다. 반면 메흐메트가 황자였던 시절부터 수행해 온 오른팔에 해당하는 부재상(Vezir-i sani) 자아노스 파샤(Zağanos Paşa)는 술탄과 제국의 위엄에 타격을 입을 것을 들어 할릴 파샤의 주장에 반대했으며, 계속 공격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메흐메트 2세는 자아노스 파샤의 손을 들며, 보다 잘 정비된 군으로 수비군을 압도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미 오랜 공성전으로 방어군 측의 피로는 극에 다했다고 판단한 술탄은 지금까지의 공세와는 달리 이용가능한 모든 병력을 투입한다고 결정했다. 재상까지 반대하는 마당이었으니, 이 공격마저 실패할 경우 술탄은 철수를 감행할 수 밖에 없었다.

5월 24일은 보름달이 뜨는 날이었다. 달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상징이기도 했는데 때마침 그 날 개기월식이 있었다. 이를 콘스탄티노폴리스 측에서는 도시가 패망할 흉조라고 여겼다. 또 이당시에 로마 제국은 첫 황제의 이름과 같은 사람의 치세동안에 멸망한다는 전설도 사람들 사이에 퍼져있었는데, 당시의 황제는 콘스탄티노스 11세. 로마 노바, 즉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건설한 황제이자 동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로 여겨지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같은 이름이었다. 그리고 이미 1000년 전 서로마 제국이 로마의 건국자였던 로물루스와 이름이 같았던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 멸망한 전례가 있으니. 또한 며칠간 도시엔 엄청난 뇌우가 퍼부었고 짙은 안개가 자욱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이 도시가 패망할 불길한 징조로 여겨져서 방어측의 사기가 땅에 떨어졌다[40].

5월 26일 오스만 군은 총공세를 위한 준비에 들어간다. 준비는 공세 결정이 내려진 후 36시간동안 계속되었으며, 오스만군은 가능한 모든 전력을 배치하고 공세를 계획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5월 27일에는 5월 3일 몰래 포위망을 빠져나갔던 베네치아 함선 특공대원 12명이 귀환하였으며, 주변 해역을 샅샅이 수색했지만 더 이상의 서방 지원군은 없다는 소식을 전해듣는다. 오스만 군 쪽 첩자가 공세 일시를 알려주었지만 방어군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5월 28일 공세의 성공을 위해 대규모 이슬람교 의식이 행해지고, 이맘들은 투입될 병사들을 독려하며 시간을 보낸다. 같은 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하기아 소피아 성당에서는 황제가 주선하는 예배가 열린다. 황제는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 양측을 대표했다. 같은 날 황제는 수비군과 지휘관들을 모아놓고 연설을 했는데, 일부분을 가져오면 다음과 같다.

수비군 전원에게

죽음을 감수할 만한 명분에는 크게 네 가지가 있다. 신앙, 고향, 가족, 조국이 그것이다. 이제 그대들은 목숨을 걸고, 이들을 지키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짐 역시, 짐의 목숨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느니라.

지휘관들에게

짐은, 우리의 신앙의 적들이 우리를 위협하는 이 때가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소. ... 짐은 이 아름답고 이름 높은 도시와 짐의 나라를 지키는, 그대들과 그대들의 자질을 믿소. ... 만일 짐이 본의 아니게 그대들에게 무례를 저질렀다면, 지금 사죄하는 바이오.

서유럽인 지휘관들에게

오늘 이 순간부터, 라틴인과 로마인은 같은 신앙으로 뭉쳐진 한 백성들이오. 그리고 신께서 도우신다면, 우리는 이 도시를 지켜낼 수 있을 것이오.

이 날의 공세가 제국의 수도를 둘러싼 서로의 마지막 총력전이 될 것임을 두 제국은 예감할 수 있었다. 29일 자정, 오스만 측의 총공격이 시작되었다.

3.4 5월 29일 - 최후의 공세

5월 29일. 1000년 동안 제국의 심장을 지켜주던 테오도시우스의 성벽이 드디어 무너지다.[41]

29일 자정, 1차 공격대로 오스만 군 측 기독교 병사들이 선봉으로 성벽을 향해 돌격했고, 그 뒤를 이어 비정규 아나톨리아 지역 튀르크 궁수들인 아잡(Azap)의 공격이 뒤를 이었다. 블라혜르네(Blachernae) 방면은 11세기에 지어진 곳으로 가장 약하다고 판명되었고, 이미 일전의 포격으로 거의 무너져가고 있었다. 1차 공격대는 이 구역의 벽 틈새로 비집고 들어갔으나, 수비군이 빠르게 재배치되어 적들을 몰아내었다. 여명이 밝아져 올 때까지 격전이 이어졌고 아잡으로 대표되는 비정규군과 기독교 군대의 전투는 성과가 없었다. 이에 오스만 군 측 정규군인 아나톨리아 군단으로 구성된 2차 공격대의 공격이 이어졌다. 도시의 북서쪽 방면에 집중된 이 파상공세에 동로마 병사들은 결사항전하며 이들을 막아냈지만, 자정부터 이어진 공격에 지쳐가고 있었다. 오스만 정규군은 앞서온 1차 공격대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싸움을 이어갔고, 방어군은 파상 공세에 점차 힘이 딸려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방어선은 무너지지 않았다. 이에 오스만 군은 제 3차 공격대로 준비되어있던 예니체리 부대를 전부 투입한다. 이미 날은 밝아오고 있었고, 전투는 계속 되었지만, 방어군은 겨우겨우 버텨내고 있었다. 이것이 마지막 공세라는 것은 방어군도 알고 있었고, 이번만 버티면 제국의 미래는 보장될 것이었다. 그들에게 노바 로마는 1000년 전 위대한 로마의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자 이교도 이슬람에게 넘겨 줄 수 없는 크리스트교와 그리스의 자존심이었다. 그러나 계속된 전투로 피로에 찌든 방어군에게 쉬지 않고 계속해 몰아붙이는 오스만 군은 이미 이길 수 없는 적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이 처절한 공방 와중에 수비대장 조반니 주스티니아니가 복부에 심한 중상을 입게 된다. 그가 부상당해 후송되자, 그의 직속 부대인 제노바 군대도 뒤로 물러난다. 그의 지휘 아래 지옥같은 공성전을 버텨내던 방어군의 사기는 바닥까지 떨어지게 된다. 제노바 군대가 철수한 뒤, 콘스탄티노스 11세는 그의 근위대와 함께 싸움을 이어간다. 그러던 와중 시민들의 출입구로 이용되던 비밀 쪽문 케르카포르타(Kerkaporta)가 열리는 일이 발생한다. 성벽 안으로 진입할 절호의 기회를 노리던 예니체리.군단은 이 문으로 돌진한다. 아비규환 속에 이 문은 제대로 닫히지 못하고, 오스만 군은 이 문을 통과해 방어탑을 점령하고, 성문엔 오스만 군기가 세워진다. 1000년동안 단 한 번 밖에 적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던 철벽의 테오도시우스 성벽이 어이없게도 방어군의 실수로 인해 적의 침입을 허용한 것이었다[42]. 이미 성벽의 다른 지역도 압도적인 병력에 서서히 무너져가고 있었고, 마침내 깃발까지 올라가자, 방어군은 패닉에 빠지게 된다. 한편 그와 같은 때, 남쪽의 성벽에서도 울루바틀르 하산(Ulubatlı Hasan)이 가장 먼저 성벽에 올라 제국의 깃발을 꽂았다. 그는 그 직후 전사하였으나 오스만의 깃발이 꽂힌 것을 본 수비군은 패배를 직감했고, 오스만군은 동료의 시신을 넘어 성벽 전체를 제압하기에 이른다[43][44]. 동로마 병사들은 성벽을 포기하고 그들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집으로 달려갔고, 베네치아인들은 그들의 배를 찾아 항구로 모여든다. 나머지 병사들은 항복하거나, 성벽 아래로 투신하는 것으로 각자의 공방전을 마감하기 시작했다.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이런 아비규환 속에서, 그의 자주색 망토를 집어던진 후, 다가오는 오스만 군에게 단신으로 돌격하여, 거리에서 싸우는 그의 병사들과 삶을 마감했다고 전해진다[45]. 2,200년을 이어온 제국과 운명을 같이 한 그의 최후에 관해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그 무엇도 그의 최후를 정확하게 설명하지는 못하고 있다.

도시로 진입한 오스만 병사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메흐메트 2세는 그가 기독교 지역을 총괄할 관리를 임명하는 상징적 장소로 성 아포스토리 교회를 원했기 때문에 그곳으로 근위대를 보내 약탈을 막도록 명령했다. 메흐메트가 중요 건물로 지정한 건물 외의 나머지 지역은 모두 약탈의 대상이 되었다. 몇몇 운 좋은 시민들은 탈출할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베네치아 인들이 탈출하려 시도했을 때는 이미 금각만 쪽 성벽이 점령당한 시점이었지만, 병사들은 약탈에만 관심이 있었지 살육에는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은 덕분에 도망칠 수 있었다. 베네치아 지휘관들은 금각만 쪽 문을 부수고 나왔고, 난민들과 병사들을 싣고 금각만에 정박한 배들이 탈출하기 시작했다. 그 흐름에 황제의 휘하에 있던 배들도 항구를 빠져나갔다. 오후쯤에 오스만 해군이 금각만을 통제했을 즈음에는 이미 거의 모든 배가 빠져나가 있었다.

도시 내부에 있는 시민들은 하기아 소피아 성당으로 대피하였다. 병사들은 그 앞 광장에 모여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 시민들은 병사들과 하기아 소피아의 청동 문이 그들을 보호해주리라 믿었지만, 청동문은 결국 오스만 군의 손에 열리게 된다. 이들은 모두 노예로 팔리게 된다.

치열한 싸움으로 인한 오스만 제국군의 사상자는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대다수의 학자들은 총공세까지의 전투 상황으로 보아 상당한 사상자가 발생했으리라 보고 있다. 도시가 함락된 후 오스만군의 약탈에 대해 베네치아 의사 니콜로 바르바로는 이렇게 전한다.

(도시에 흐르는 피가) 마치 갑작스런 소나기 후의 도랑 속 물길 같았다. 튀르크인과 기독교인들의 시체는 바다 위에 마치 운하 속 과일들처럼 떠다녔다[46].

4 정복

점령된 콘스탄티노플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공격 이전부터 이미 이 도시를 오스만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삼기로 마음먹었던 술탄은 도시가 완전히 폐허가 되는건 원치 않았기에 도시의 주요 건물에 호위병을 보내 지키게 했다. 그러나 이미 도시에 열린 헬게이트는 술탄도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다. 오스만 군대는 메흐메트 2세가 허락한 사흘동안 살육, 약탈과 강간등을 저질렀다. 당시 도시엔 약 40000명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 중 살해당한 사람은 약 4000명 정도로 보인다. 나머지 시민들중 대략 3만이 노예로 팔려나가거나 도시를 탈출한 것으로 보인다. 일부 기록에서는 이를 본 메흐메트 2세가 충격에 빠져 하루 만에 약탈을 금지시켰다고도 하지만 확실히 많은 동로마 문화유산들이 소실되고 말았다.

그 어떤 것도 이 끔찍한 상황에 비견될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소리를 지르며 그들의 집에 나갔고, 그 후 그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도 알지 못한 채 오스만군의 칼에 죽어나갔다. 누군가는 그들이 숨으려던 집과 성당에서 죽어나갔다. 분노한 오스만군은 자비가 없었다. 그들은 집을 털고, 죽이고, 겁탈했다. 그보다 훨씬 많은 이들이 남녀노소와 성직자를 가리지 않고 모두 노예로 팔리기 위해 잡혀갔다. 백발의 노인들은 저항도 못하고 머리채를 잡힌 채 끌려나 왔고, 갓난아기들은 어머니의 품에서 낚아채어졌다. 여자아이들은 강제 결혼의 대상자들로 끌려갔다. 성당들은 파괴되고 약탈당했다. 성물들은 바닥에 내팽개쳐 졌고, 십자가들은 뜯겨졌다. 성소들은 더럽혀졌다. 다른 끔찍한 이들이 더 벌어지고 있었다.
메흐메트 2세가 이 폐허들, 파괴되고 버러진 집들과 쓰러지고 폐허가 돼 버린 모든 것을 보았을 때, 그는 큰 슬픔을 느끼고, 이러한 모든 파괴와 약탈에 사죄했다. 눈물이 그에 눈에서 흘러나왔고, 그는 그의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꼴인가. 우리가 이 모든 파괴를 저질렀단 말인가!"
그의 영혼은 비탄에 가득 찼다. 그것은 진심이었다. 그 정도로 상황은 선을 넘어있었다.[47]

도시의 혼란이 진정된 이후, 술탄 메흐메트 2세는 모든 약탈을 중지시키고 그의 군대를 벽 밖으로 내보냈다. 동로마 역사학자인 요르요스 스프란지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의 상황과 술탄의 행적을 묘사했다.

"정복 3일째가 지나자, 술탄은 그의 승리를 축하했다. 그는 포고령을 내렸다. 도시의 탈출하려고 애쓰는 모든 시민들에 대한 적발을 중지했고, 그들을 숨어있는 곳에서 나오게 했다. 그들은 자유민으로 남을 것이며, 그들이 무엇을 했는지는 묻지 않았다. 그는 도시의 버려진 모든 집과 재산들의 복구를 선언했다. 공성전에 도시를 떠난 이들의 것도 마찬가지였다. 떠난 이들이 돌아왔을 때, 그들은 그들의 신분과 종교를 보장받을 것이었다. 마치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은 것처럼."

막 정복한 이 도시를 오스만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선포하고, 제국의 대성전이자 랜드마크인 하기아 소피아는 이슬람 모스크로 개조되었다. 그러나 그리스 정교회 성당들은 보존되었고, 새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에는 그리스인이며 동서교회 통합 반대파인 옌나디오스 스콜라리오스(Gennadios Scholarios)가 임명되었다. 주인이었던 로마 제국이 사라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이제 새 주인 오스만 제국을 470년 동안 섬기게 될 운명이 온 것이다[48].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이후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재상이자 대공(Megas Doux)이었던 루카스 노타라스는 항복 이후에 메흐메트 2세의 요구들을 대부분 거절했고, 2개월 후 메흐메트가 남색을 목적으로 14살짜리 아들을 궁정에 보내라는 명령도 거부했다. 이에 메흐메트 2세는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는 놈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 방해가 된다는 명목으로 루카스 노타라스와 그의 두 아들을 붙잡아 처형했다. 다만 그는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전 딸인 안나 노타라스와 여성 가족들을 베네치아로 피신시켰고, 안나 노타라스는 베네치아에서 비잔티움인 망명지구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5 여파

콘스탄티노플 정복은, 오스만 제국에게 크게 세 가지 의미가 있는 사건이었다.

먼저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함으로써, 제국의 영토가 하나로 통합되었다. 이 이전까지는 비록 아나톨리아 반도를 영유하고 발칸 반도에도 광대한 세력을 뻗치고 있었지만, 오스만 제국의 영토는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사이에 두고 둘로 분열되어 있었다.동로마의 위엄찬 위엄찬동 따라서 수도도 한 군데에 두지 못하고 아나톨리아 반도의 수도 부르사(Bursa), 발칸 반도의 수도 에디르네(Edirne)로 두 군데 두어야 했는데,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 그리고 영토가 하나로 통합되었다는 말은 당연히 통치가 보다 편리해지고 국력이 강해진다는 말이고, 이를 바탕으로 오스만 제국의 세력은 더욱 멀리까지 뻗어나갈 수 있었다. 만일 콘스탄티노플이 로마 제국의 수도가 아니었고 대도시가 아니라 성벽을 두른 시골 마을사실 콘스탄티노플 함락 직전 콘스탄티노플은 인구 5만에 불과했으니 이미 시골에 가깝기는 했지만 당시5만이면 절대 시골은 아니다 전성기 때 인구가 50만이었잖아... 이라고 하더라도, 메흐메트는 그곳을 제국의 수도로 삼았을 것이다. 물론 지리적인 여건이 좋으니까 로마 제국의 수도가 되고 대도시가 된 것이기는 하지만

다음으로, 오스만 제국이 세력을 확장할 때에 배후를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는 위의 내용과도 어느 정도 통하는데, 이전까지 오스만 제국은 발칸 반도에서든 아나톨리아 반도에서든 영토를 확장할 때에 항상 콘스탄티노플 부근을 주시해야 했다. 서유럽의 어느 나라가 이교도 박멸을 외치며 십자군을 일으킨다고 할 때 대(對)오스만 십자군의 전진기지는 당연히 콘스탄티노플이 될 수밖에 없었는데[49], 오스만 제국의 입장에서 이 말은 제국 영토 한가운데에 적군이 떡하니 나타난다는 말이었기 때문. 즉 군사력을 집중하기가 아주 어려웠다는 말인데, 이제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마지막으로 황제가 주도하여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함으로써, 황제의 권위가 수직상승했다. 바로 아래에 나오는 로마 황제 선언도 바로 이와 관련된 것으로,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메흐메트는 공방전 도중에도 끊임없이 철수를 주장하며 훼방을 놓았던 재상 할릴 파샤를 처형. 데브시르메 징집자 출신인 자아노스 파샤(Zağanos Paşa)를 신임 재상으로 임명했다. 이는 데브시르메 출신자로서 재상이 된 최초의 사례였으며, 이로써 메흐메트는 데브시르메 징집자를 일종의 여당으로. 기존의 기득권 세력이었던 튀르크계 귀족들을 야당으로 삼아 서로 경쟁하게 함으로써 전제군주정을 확립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방침은 쉴레이만 대제가 데브시르메 세력에게 너무 큰 힘을 실어주는 바람에 튀르크계 귀족들이 완전히 몰락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제국 쇠퇴기에 황제의 권위가 땅바닥에 떨어지고 예니체리가 황제를 마음대로 갈아치우는 상황에서도 오스만 제국의 황제는 문서상으로나마 '신하의 생사여탈권까지 한 손에 틀어쥔, 전제군주' 로서 군림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 한 메흐메트 2세는 스스로를 로마 황제(Kayser-i Rum)라고 선언한다. 이것은 동방 정교회 대주교에게는 인정받았지만, 가톨릭 교회는 이를 부정했다. 그는 동방 대주교가 주관한 즉위식에 참가했고, 동방 정교회 대주교는 그를 로마 제국의 후계자로, 즉 콘스탄티노스 11세의 후계자로 인정한다. 팔레올로고스 왕조 뒤를 이은 동로마 제국 오스만 왕조 메흐메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서로마 멸망 이후부터 지금까지 로마 제국의 수도라고 선언했고, 이는 영원할 것이라고 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오스만 제국의 2대 황제인 오르한이 동로마 제국의 황녀와 결혼한 사실도 있었으니[50], 팔레올로고스 황가와 오스만 황가는 먼 친척이기도 했다. 하지만 메흐메트 2세는 로마 노바에 결코 만족하지 않았고, 그가 죽는 날까지 이탈리아에 있는 로마 시(市)를 점령하려는 야망을 감추지 않았다[51].

동로마 제국의 팔레올로고스 왕조 또한 후사가 끊기게 되었다. 마지막 황제인 콘스탄티노스 11세는 후계자를 남기지 못한 채 공방전 와중에 사망했으며, 후술할 모레아 공국의 군주이자 그의 형제인 디미트리오스와 토마스 형제는 1460년 오스만군에 의해 쫓겨나 한 명은 로마로 망명하고 다른 한 명은 포로가 되어 일생을 마쳤다. 그의 조카들도 망명하였으나 제위를 주장하지 않았다. 남은 이들은 메흐메트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점령 이후에 술탄을 위해 일하는 길을 택했다. 가장 나이 많은 조카는 무라트(Murat Paşa)로 개명했고, 메흐메트 2세의 총애하는 최측근이 된다. 그는 베일레르베이에 임명되었으며[52] 그에게 발칸 반도가 주어졌다. 그보다 나이 어린 조카는 메시흐(Mesih Paşa)로 개명했으며, 오스만 제국 함대 제독과 갈리폴리의 통치자로 임명된다. 그는 나중에 메흐메트 2세의 아들인 바예지트 2세 때 대재상(Vezir-i âzam)에 임명되기도 한다.

메흐메트는 점령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그의 제국의 수도로 삼는다.

오스만 제국의 손에서 도망친 그리스 학자들은 동로마 제국의 학문과 문헌을 가지고 도피처를 이탈리아 도시국가들로 정하게 된다. 이 도시들은 1396년 콜루치오 살루타티(Coluccio Salutati)에 의해 시작된 문화 교류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들은 그리스 고전에 대한 방대한 자료와 연구결과를 가지고 있었고, 이전에는 이슬람을 거쳐서, 아니면 수없이 중역된 고전들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해야만 했던 라틴 학자들에게 단비가 되어주었다. 이것은 후일 르네상스의 발판이 된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남아있던 학자들의 최후도 나쁘지 않았다. 그들은 주로 갈라타에 모여 살며, 오스만 술탄들에게 다양한 조언을 해주게 된다.

5.1 모레아 공국[53]의 최후

제국의 수도가 술탄의 손에 넘어가 동로마 제국이 사실상 멸망한 이후에도 제국의 잔재는 아직 남아있었는데, 멸망할 당시 콘스탄티노플과 함께 제국의 둘 뿐인 영토였던 모레아 공국, 13세기 제 4차 십자군으로 인해 동로마가 일시 멸망했을 때 트레비존드에 세워진 동로마계 국가인 트레비존드 제국이 아직 남아 있었던 것. 하지만 술탄은 이미 멸망한 제국의 잔재를 남겨둘 인물이 아니었다.

제국 멸망 직전인 1450년 경의 모레아 공국. 자주색 영토가 형 디미트리오스의 영토. 보라색 영토가 동생 토마스의 영토이다.

미스트라스에 수도를 둔 모레아 공국은 1348년 설립되어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영역으로 한 동로마 제국의 신하국으로, 황제의 동생이 공작에 취임해 왔다. 동로마 제국이 멸망할 당시 모레아 공국은 콘스탄티노스 11세의 형제들인 토마스 팔레올로고스와 디미트리오스 팔레올로고스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다[54].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당시 모레아 공국은 위기에 처한 수도를 구원하려 했으나 몇 년전 술탄의 선왕인 무라트 2세의 공격으로 입은 피해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고 수도까지 너무 멀리 떨어져있었기에 수도의 함락을 그저 바라보고 있어야만 했다.

문제는 수도마저 무너진 마당 속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공국의 공동 통치자였던 토마스와 디미트리오스가 서로 반목하고 있었다는 점. 아예 공국의 수도(형 디미트리오스는 미스트라스, 동생 토마스는 글라렌차)를 따로 두고 영토까지 반으로 나눠 각자 다스리고 있었는데, 이는 두 사람의 외교적 입장 차이가 문자 그대로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토마스는 친오스만에 반서유럽이었던 반면, 디미트리오스는 친서유럽에 반오스만이었던 것. 이러니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리 없었고, 결국 형제간의 지긋지긋한 대립에 지친[55] 공국의 알바니아계와 그리스계 주민들이[56] 반란을 일으켰다. 위기에 빠진 두 공작은 메흐메트 2세에게 구원을 요청하게 되고 오스만 군의 지원을 받아 토마스와 디미트리오스는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성공한다. 반란 진압의 대가로 1454년 모레아 공국은 메흐메트 2세 휘하의 조공국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후 잠시 동안 오스만 제국과 모레아 공국 사이의 평화가 이어졌다.

그런데 이미 한 번 반란을 겪어 술탄의 지원으로 겨우 반란을 진압했음에도 이 양반들이 정신을 못차렸는지 토마스와 디미트리오스의 반목이 계속되었다. 게다가 반목이 계속되다 보니 조공조차 바칠 수 없을 정도로 나라 살림이 엉망이 되었고, 결국 메흐메트 2세는 토마스를 몰아내달라는 디미트리오스의 요청을 빌미로 1460년 모레아 공국을 침공. 모레아 공국을 멸망시킨다. 반오스만이라면서 오스만에게 도움은 잘도 요청하네 토마스는 로마로 망명하여 거기서 교황과 제후들에게 동로마 제국의 망명 황제로서 대우받다가 1465년 사망했고, 디미트리오스는 공작위를 유지하는 대신 투옥되어 1470년 에디르네에서 사망했다[57].

5.2 트레비존드 제국의 멸망

이후 술탄의 칼날은 동쪽의 트레비존드 제국한테로 향했고, 트레비존드 제국은 백양왕조 등의 주변 세력 및 서방 가톨릭 국가와의 연계를 통해 오스만을 막으려 했으나 모레아 공국이 멸망한 이듬해인 1461년, 메흐메트 2세는 트레비존드 제국을 침공해 멸망시킨다. 트레비존드의 마지막 황제인 다비드 2세는 오스만군에게 붙잡혀 아들들과 함께 처형당했으며, 황실 여자들은 노예가 되거나 하렘으로 끌려갔다. 다비드의 막내아들인 요르요스가 조지아로 탈출했으나, 이후 행적에 대해 기록이 없다.

이로써 제국의 잔재는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6 평가와 의의

오스만 제국 후예인 터키에서는배가 산으로 가서 무척 자랑스러워하는 역사로 기억한다. 2012년 터키 영화 <정복자(Fatih) 1453>이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했는데 문제는 메흐메트 2세야 멋지게 그렸다 쳐도, 성실하고 최선을 다한 군주인 콘스탄티노스 11세를 정치모략을 일삼는 간사한 군주로 왜곡하여 그리스에서는 무척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2014년 개봉한 드라큘라: 전설의 시작에서는 반대로 메흐메트 2세가 루마니아를 핍박하는 막장 쓰레기 폭군으로 그려진다(...). 영화에서의 콘스탄티노스 11세에 대한 평가는 아무것도 아닐 정도. 딱히 어느 한쪽이 잘못되었다기보다는, 쌍방 모두 아직까지 역사에 대한 내셔널리즘 프레임이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옳을 것이다.

2009년 이스탄불에 새롭게 문을 연 파노라마 1453 박물관도 이 전투 자료를 상당히 보여주고 있다.

7 기타

7.1 미디어에서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2012년에 개봉한 <정복자 1453>에서 이를 소재로 삼았다. 평가에서도 보듯이 왜곡이 매우 심하지만 공방전 장면은 나름 볼만하다

일단 거의 천년 전 예언자 무함마드(얼굴이 안 나온다)가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을 예언한다. 메흐메트 2세가 태어난 해에 오스만 제국에서는 과일나무에 과일이 무성히 열려 가지가 휘어지고, 말은 쌍둥이 망아지를 낳으며, 밭에서 이모작이 가능해지는 길조가 나타나는 반면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선 일식이 일어난다.

기술자 우르반은 똑똑한 여자를 양녀로 삼고 있는데, 이 여자는 이슬람교도로 어릴 때에 십자군의 학살로 부모를 잃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노예로 팔리다 이를 불쌍히 여긴 우르반에게 양녀로 들어간 사정이 있다. 덕분에 기독교 국가를 매우 싫어한다. 동로마 제국의 재상 노타라스는 우르반에게 대포를 주문하지만 우르반은 무기를 만들고 싶지 않다고 거부한다. 그러자 노타라스는 밤중에 군사를 보내 우르반을 죽이려는데 오스만 제국의 군사가 이를 구출해내고 우르반은 고맙다며 양녀와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킬 대포를 만든다.

메흐메트 2세는 권력 기반이 불안정하고 적들에게 유약한 군주라며 얕보이는 상황에서 동로마와 내통하는 할릴 파샤와 반기를 들었던 카라만공국을 용서해주는 대인이다. 꿈 속에서 오스만을 건국한 오스만 1세를 만나고 신이 자신에게 사명을 주었다는 생각 끝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공격한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지 않고 공방전이 길어지자 좌절하여 천막에서 수일 동안 나오지 않지만, 위대한 백색의 이맘에게 격려받은뒤 배를 산으로 옮기고 대공세를 펼친 끝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킨다. 죽은 로마 황제를 로마인 방식대로 장례를 치를 것을 허가해주고,하기아 소피아에 들어가 공포에 질린 동로마 민간인들에게 자유를 보장하고 활짝 웃으며 여자아이를 안는 것으로 영화가 끝난다.

전반적으로 동로마 귀족들은 교활하게 정치공작을 일삼고, 향락에 젖어있으며, 절대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지 않는다는 오만함에 찌들었으며 동로마 민간인들은 카톨릭의 약속을 믿느니 술탄의 관용을 믿는 것으로 묘사된다. 동로마 병사들은 도발하기 위해 투르크 포로들을 모욕하고 성벽에 목매달아 죽이는 등 부정적으로 그려진다. 그래도 제국 재상 노타라스는 통찰력이 좋은 것으로 묘사되며, 황제도 능력은 부족하지만 최후의 순간에 노타라스의 도망 권유를 받고도 명예를 지켜야 한다며 도망가지 않는 것으로 연출되는 등(죽는 순간이 나오지는 않았다) 터키인기준으론 나름 공평하게 표현하려 애쓴 것으로 보인다.

로마빠이자 동로마까인 카이사르 동인녀 시오노 나나미 할매도 해당 전투에 관한 서적을 낸 적이 있다. 다만 곳곳에 무지와 편견이 묻어나는 졸작이므로, 소설 읽듯 킬링 타임용으로나 볼 정도 시간을 죽여도 그렇게 죽이고 싶진 않구먼[58].

8 관련항목

  1.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이슬람의 유럽 진출을 막지 못한 가톨릭의 수장 교황의 권위는 바닥으로 떨어지고 종교개혁에 영향을 준다...
  2. 오스만 제국이 동지중해를 장악하면서 동방에서 들여오던 물자의 시세가 폭등하여 새로운 항로 개척의 욕구가 가중되면서 결국엔 신대륙이 발견되는 계기가 되며, 중계무역으로 재미를 보던 제노바 공화국과 베네치아 공화국 등 지중해 상권이 몰락하고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대서양 상권이 눈부시게 발전한다. 이 외에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탈출한 그리스 학자와 예술가, 기술자들이 이탈리아로 건너가면서 르네상스의 시작에 영향을 준다...
  3. 다만 30만이라는 건 유럽 측에서 남긴 기록으로, 오늘날 학자들은 당연히 과장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오스만 제국군이 인해전술로 밀어붙였던 데다 비전투병력도 엄청났기 때문에 대체로 15만 안팎으로 본다. 5만이라는 건 순수 전투병력. 그 중에서도 예니체리 및 술탄 직속병력만 해당...
  4. 이스탄불에 있는 파노라마 1453 박물관에 있는 그림으로 여러 화가가 그렸는데 그림은 엄청 크다.벽 여러 면을 장식할 정도.
  5. 다만 이렇게 쓰면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됨과 동시에 발칸 반도 전체가 오스만의 손에 떨어진 것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사실과는 다르다... 이후에도 스컨데르베우가 이끄는 알바니아와 헝가리 왕이 다스리는 크로아티아, 헤르체고비나 등의 저항이 있었기 때문. 다만 '여파' 문단에 소개되어 있듯이,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오스만 제국은 이들의 저항을 제압하기 훨씬 유리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6. 6.0 6.1 구글맵
  7. 이런 이유로 아드리아노플은 콘스탄티노플을 방어하는 마지막 관문이자 동로마 제국의 중심 도시 중 하나였다.
  8. 또는 흉장(胸牆), 나무위키 공성전 항목에는 방벽이라고 되어 있으나, 방벽은 일체의 방어용 벽을 모두 지칭하는 것이니, 흉벽이 좀 더 적합함
  9. 전투 자체는 무승부였으나, 오스만 제국에게는 아나톨리아 반도의 주둔군이 있었던 반면 세르비아에게는 남은 병사가 없었다.
  10. 이 관계는 동로마 황제 마누일 2세가 오스만에게 저항함으로써 깨어진다. 당시 오스만의 술탄이었던 바예지트 1세는 오스만의 위엄을 드러내고자 동로마를 비롯한 신하국들을 빡빡하게 대했는데, 제 아무리 오스만이 강력하다고는 해도 마누일의 입장에서는 '이건 정말 아니다'였던 것.
  11. 이전 항목에서는 '세르비아와 타타르의 배신'이 패전의 요인이라고 되어 있었으나, 세르비아 기병들은 오스만을 배신하기는커녕 마지막까지 분전했다. 오히려 오스만 제국에게 일시적으로 멸망당했던 튀르크계 소국들이 등을 돌렸고, 티무르는 당시의 세르비아 공작인 슈테판 라자레비치 휘하 세르비아 기병대의 활약에 대해 '마치 사자처럼 싸웠다'라고 칭찬했다.
  12. 영어식으로 스칸데르베그라고도 한다. 본래 지방 영주였으나 알바니아의 모든 귀족들을 한데 모아 '레즈헤 동맹'을 결성하고, 오스만에게 25년 동안이나 저항했다. 오늘날에는 단 한 번도 한데 뭉친 적이 없던 알바니아를 잠시 동안이나마 하나의 깃발 아래에 모은 업적이 높이 평가받고 있으며, 알바니아에서는 알바니아 민족의 정체성 그 자체로 추앙받는다.
  13. bey 혹은 beg, 튀르크족 특유의 영주 개념이라 보면 된다.
  14. 무라트 2세
  15. 1444년의 바르나 원정의 사례를 두고 하는 말이다
  16. Donald M. Nicol 작, The Last Centuries of Byzantium에서 발췌
  17. 실제로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오스만 술탄들은 모두 로마 황제를 겸했다.
  18. 금각만 너머의 갈라타(페라) 지역에 제노바인 거류지가 있었다.
  19. 동맹은 동방 정교회가 교황의 아래에 복속되는 것이 조건이었는데, 동로마 제국의 재상이었던 루카스 노타라스는 이 협상을 주도하고 교황청과의 동맹을 성립시키는 데에 큰 역할을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조건에 대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라틴인의 추기경모로 뒤덮이는 것을 보느니 술탄의 터번을 보겠다."는 말을 남겼다. 노타라스는 공방전 동안 황제를 보좌했으나 동로마 패망 직후 메흐메트 2세에게 처형되었다.
  20. 1204년 4차 십자군의 전례가 있었던 만큼 노타라스 같이 저 모친상실한 교활한 라틴인에게 고개 숙이느니 차라리 이교도에게 정복당하고 말겠다라고 생각하며 서방 주도로 이루어진 피렌체 공의회를 반대하는 세력은 콘스탄티노폴리스 각계에 퍼져 있었다. 오스만 치하 초대 정교회 총대주교가 되었던 철학자 옌나디오스 스콜라리오스를 비롯하여 이러한 반서방-친오스만 파 사제, 귀족, 관료들은 오스만의 정복 이후 새로운 제국의 수도로 자리 잡는데 핵심 역할을 했다.
  21. 동로마 제국이 존속하는 게 여러모로 낫지만, 이미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는 교역 상대였던 오스만을 대놓고 적대할 수도 없었기 때문. 실제로 이들은 공방전이 끝난 뒤 오스만에 사절을 파견하면서, '공방전에 참가한 베네치아인은 어디까지나 개인 자격으로 그러한 것이며 본국 정부와는 무관한 일'임을 주장했다.
  22. 그는 방어전의 전문가로 이름 높았다.
  23. 한 국가의 최고의 정예 보병을 1만이나 동원할 수 있는 경우는 흔치 않다.
  24. 구닥다리라고 무시 못할 게 국군방송에서 방영한 과거 무기를 재연하는 프로에서 이 포를 복원하여 위력을 측정하였는데 근거리에서의 위력이 현용 120mm 활강포에서 쏘는 포탄 보다 더 강력하다(!)
  25. 독일인이라는 주장과 스웨덴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26. 이후 그는 공방전에도 참전하여 대포의 각도를 맞추는 등 활약하지만, 공방전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에 따라 학자들은 공방전 도중에 대포가 폭발했고(실제로 종종 있었던 일이다), 그에 휘말려 죽었다고 본다.
  27. 함선 자체가 베네치아나 제노바의 배를 보고 급조한 것이라 크기가 작았다. 사실 전통적(?)으로 오스만 해군은 영 질이 안 좋긴 했다. 1411년 콘스탄티노플 포위 때도 오스만 해군이 동로마 해군한테 쳐발려서 수도 근방 해역에서 물러났던 일까지 있으니...아직 함포가 주력으로 쓰이지 못하고 선상 백병전을 벌이던 시대라는 것을 감안하면, 함선의 높이가 낮다는 건 엄청난 패널티로 작용한다.
  28. 다만 '완전 점령이 아닌 제패의 형식으로 이루어진 정복'이었기에 오스만이 그렇게 빨리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 완전 정복보다, 일단 제압해 두고 신하국으로 삼는 게 반발이 더 적기 때문. 한편 이전 문서에서는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당시 티무르 제국이 골칫거리라고 되어 있었으나, 당시 티무르 제국은 제위 계승을 둘러싼 분열 끝에 나라가 아예 갈갈이 찢겨 있었다.(...)
  29. 오스만 제국은 1420년대에 이미 소형 대포를 사용했다.
  30. 이것은 1204년 십자군 때인데, 이때도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넘은 것은 아니다. 금각만 방면이 주요침투루트였고, 여러가지 상황이 겹쳐 사실상 방어전이라 할 만한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31. 사실 한 차례 더 있다. 1261년의, 니카이아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탈환이 그것. 다만 이때는 병사 8백 명이 내부의 호응이 있는 가운데 밤중에 몰래 성벽을 넘은 것이라, 정공법으로 성벽을 넘었다고 하기는 조금 뭣하다. 이런 의미에서인지 오늘날에는 보통 '아무도 없었다' 라고 해주는 경향이 있다.
  32. 다만 여기까지의 서술은 '틀렸다' 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다소 과장되었다고는 할 수 있다. 오스만 제국은 1453년 이전에도 세 번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한 적이 있었는데, 1411년의 포위는 오스만 제국이 내전 중이어서 공격측도 오스만군, 방어측의 일원도 오스만군이었으니 제외하고 나머지 두번도 모두 때가 나쁘지 않았기 때문. 먼저 바예지트 1세 때인 1390년부터 1402년까지 느슨하게 포위했을 때에는 발칸 반도 대부분이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떨어진 상황이었고, 티무르 제국이 아나톨리아에 손을 뻗치리라고는 예상하기 어려웠다. 또 알바니아는 오스만 제국에 완전히 편입되어 있었고, 헝가리도 이때는 오스만이 굳이 쳐들어오지 않는다면 이쪽에서 공격할 필요도 없다는 입장. 1422년의 포위도 발칸 반도의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고, 티무르 제국에서는 황위 계승 문제로 산발적인 반란이 일어나는 상황이었기에 먼 서쪽까지 신경을 쓸 여유는 없었다. 단 포위를 오래 할 여건이 안 되었다는 점에서 1453년보다 상황이 조금 안 좋긴 했다. 참고 요컨대 1453년 당시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할 여건은 분명 갖추어져 있었지만, '1453년 못지 않게 오스만의 대내외적인 상황이 맞아떨어지는 시기' 는 이전에도 두 번 더 있었다.
  33. 오스만 황족에게 방위를 맡긴다고 하면 위험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당시 오스만 제국에서는 황위에 오르는 자가 자신의 형제들을 몰살하는 관습이 있었다. 즉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면, 영락없이 죽은 목숨이고 실제로 함락 이후 붙잡혀 목이 날아갔다.
  34. 이전 항목에서는 오스만 제국군이 '공성에는 쥐약이었다' 라고 되어 있었으나, 1453년 당시는 세르비아가 오스만 제국에 굴복한 상태였고 2차 불가리아 제국은 40년 전에 멸망한 상태였다. 오히려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서 오스만 제국군은 대포를 사용하는 한편 성벽 아래로 갱도를 판 다음 화약을 폭발시켜 성벽을 파괴하려는 등 상당히 뛰어난 공성 전법을 사용했으며, '요새 공성전을 30년간 진행한 적도 있고' 라는 부분도 있었으나 이는 오스만 1세 때. 즉 제국이 막 창건되었을 당시의 일이다. 당시 오스만 제국의 '공성전의 역사' 는 충분히 길었으며, 수비측도 '외부의 지원이 올 때까지 버티면 이긴다' 라는 생각이었지 '튀르크족 따위 별 것 아니니까 충분히 이길 수 있다' 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35. 다만 성벽에 제대로 명중하면 그야말로 '박살' 이었으므로, 수비군은 낮에는 적군과 싸우고 밤에는 성벽을 수리해야 하는 나날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이로 인해 수비군은 신체적, 정신적으로 조금씩 한계에 이르게 되었으므로, 우르반의 거포는 기대보다는 시원치 않았지만 밥값은 한 셈.
  36. 당시 오스만 측이 동원한 함선은 30여 척이었음에도, 네 척의 적함에게 쩔쩔맨 꼴. 이 사태에 화가 날 대로 난 메흐메트는 쉴레이만 발타오울루를 당장 끌어내어 참수하라고 명령했지만 고관들은 물론 쉴레이만의 부하들까지도 대충 싸운 게 아니라 쉴레이만 본인도 부상당했을 정도로 열심히 싸웠는데도 그 모양이 된 것이라고 변호했고, 결국 메흐메트는 그렇다면 쉴레이만의 모든 작위와 재산을 박탈하고 그 재산은 예니체리들에게 나누어주라고 명령했다.
  37. 이처럼 배가 산으로 간 전례가 아주 없는 건 아니다. 베네치아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15년 전에 육지로 함선을 옮기는 작전을 쓴 적이 있었고, 오늘날 학자들 가운데에는 메흐메트가 여기에서 착안한 것이 아닌가 추정하는 경우도 있다. 또 그리스 신화의 내용이기는 하지만, 황금 양털로 유명한 이아손과 선원들이 아르고 호를 등에 이고 북아프리카의 리비아에서 알제리까지 행군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38. 원래 작전은 베네치아인들만 참가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당시 제노바인들 가운데에는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스만과 밀통하는 자들도 있었기 때문. 하지만 베네치아의 작전에 대해 전해들은 제노바인들은 자기네들도 끼겠다고 항의했고, 제노바 함선 세 척이 오스만 함대 수십 척을 상대로 멋지게 싸웠던 것을 기억하는 황제 콘스탄티노스는 베네치아에 제노바도 끼워달라고 요청했다. 결국 황제의 요청을 뿌리치지 못한 베네치아는 제노바도 끼는 것으로 했지만, 그 결과는 좋지 못했다.
  39. 원문 - Τὸ δὲ τὴν πόλιν σοῖ δοῦναι οὔτ' ἐμὸν ἐστίν οὔτ' ἄλλου τῶν κατοικούντων ἐν ταύτῃ• κοινῇ γὰρ γνώμῃ πάντες αὐτοπροαιρέτως ἀποθανοῦμεν καὶ οὐ φεισόμεθα τῆς ζωῆς ἡμῶν. 본문의 내용은 이 영어 번역문을 토대로 글 내용에 어울리도록 좀 더 매끄럽게 번역했다. Giving you though the city depends neither on me nor on anyone else among its inhabitants; as we have all decided to die with our own free will and we shall not consider our lives.
  40. 이 밖에도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의 꼭대기에 붉은 빛이 나타났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다른 모든 징조들과는 달리 이 불빛은 오스만 제국측 사료에도 기록되어 있다. 즉 오스만군의 눈에도 보였다는 말인데, 이 빛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정설이 없는 상황.
  41. Jose Daniel Cabrera Peña라는 사람이 CGsociery에 올린 그림이다. 무장 방면에서 고증이 훌륭하다.
  42. 한편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에 대해서는 다른 이야기도 있는데, 먼저 마지막 전투에서 콘스탄티노스는 배수진을 친다는 생각으로 내성으로 통하는 모든 문을 걸어 잠그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교전 중에 조반니 주스티니아니가 치명상을 입어 후송되었는데(당연히 콘스탄티노스에게서 열쇠를 받아서), 황제 다음으로 육군을 총지휘하던 인물이 후송되자 수비군들의 사기가 완전히 꺾였다는 것.
  43. 이후 이들은 황제가 있는 메소티히온 성벽으로 몰려가, 메소티히온 수비군은 앞과 옆에서 동시에 공격받는 형태가 된다. 베네치아측 사료에서는 주스티니아니의 후송이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으로 이어졌다고 되어 있으나, 오늘날 학자들 가운데에는 수비군이 협공을 받은 때야말로 도시의 함락이 결정되었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44. 이 전공으로 인해, 울루바틀르 하산은 평범한 시파히 병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터키의 민족 영웅...까지는 아니지만 거의 그 정도 급으로 추앙받고 있다. 이 때문에 아래의 '평가와 의의' 문단에 언급되는 터키 영화 <정복자(Fatih) 1453> 에서는 메흐메트 2세의 최측근이자 무술 스승으로까지 그려지는데, 생전의 그가 누렸던 지위에 비하면 주인공 버프를 받아도 제대로 받은 것. 사실 주인공은 메흐메트지만, 그런 거 알 게 뭐야
  45. 콘스탄티노스 11세 항목에 소개되어 있지만, 그가 전사하지 않았다는 사료도 있다. 오스만 제국측 사료에는 겁을 먹고 도망치려다가 끔살당했다고 되어 있고, 서유럽측 사료에는 오스만 제국군이 성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목을 맸다고도 되어 있다... 또 공방전에 직접 참가했던 피렌체의 상인 자코포 테달디는 '누구는 그가 자결했다고 하고 또 누구는 참수당했다고도 하는데, 아마 자결한 다음에 목이 잘린 거 아닐까' 라는 기록을 남기기도.
  46. 도시가 함락된 후에도 오스만군이 한동안 학살을 계속했기 때문에 이런 기록이 나오는데, 당시 오스만군은 수비군이 완전히 와해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두 달 동안 우리 대군을 쩔쩔매게 한 적군이 아직 남아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반 시민이건 누구건 눈에 보이는 동로마인이나 서유럽인은 무조건 학살하고 다녔던 것이지만, 이윽고 상황을 파악하자 학살보다는 노예로 잡아 파는 데 주력하게 된다.
  47. Routh, C. R. N. They Saw It Happen in Europe 1450-1600 (1965)에 나온 목격 증언
  48. 다만 동서 교회의 통합을 반대했던 옌나디오스는, 공방전 훨씬 이전부터 '제국을 지키고 종교가 더럽혀지느니 차라리 참된 종교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즉 오스만 제국을 470년 동안 섬기는 대신 종교 생활을 인정받는 게, 그들이 원하던 일인 것(물론 제국도 종교도 지키는 게 가장 나았겠지만). 그리고 오스만 제국은 널리 알려진 것처럼 밀레 제도를 고안하는 등 종교적으로 폭넓은 관용을 베풀었으므로, 근대에 민족주의가 발흥하기 전까지 로마인들은 '무슬림 황제' 의 지배에 크게 반발하지 않았다.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조카로 사실상의 황태자였던 메시흐 파샤(Mesih Paşa)가 황제 메흐메트의 시동이 되어 해군 총사령관이 되었다가 후에 재상까지 오른 것이, 지배에 반발하지 않았음을 입증할 수 있는 좋은 예(물론 아예 반발이 없었다는 말은 아니다).
  49. 1366년부터 1367년까지 사부아백국의 공작이 이끈 사부아 십자군(Savoyard crusade)이 바로 이런 케이스다.
  50. 다만 오르한의 뒤를 이은 술탄 무라트 1세의 어머니는 다른 사람이어서, 철저히 혈통적으로만 따지고 보면 메흐메트의 몸속에 동로마 황실의 피는 흐르지 않았다. 참고로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 '버트리스 스몰'의 '아도라'이다.
  51. 실제로 메흐메트 2세 치세 오스만 제국의 마지막 군사 원정이, 이탈리아 반도 남부에 위치한 항구도시인 오트란토를 점령한 것이었다. 이는 당연히 로마 시(市) 진격을 위한 것이었고 교황을 비롯한 유럽 각지의 군주들도 그렇게 받아들였으나, 이듬해에 메흐메트가 세상을 떠나면서 군사 대부분이 철수하는 바람에 금세 탈환되었다.
  52. 19세기 중엽 이전까지 오스만 제국의 지방행정단위는 현대 미국의 주 정도의 자율권과 자치권을 가지는 에얄레트(Eyalet)와, 그 밑에 에얄레트를 맡아 다스리는 지방관인 베일레르베이(beylerbey)의 통솔을 받는 군부대가 관리하는 군구인 산작(Sancak), 그리고 산작이 주둔하지 않는 향촌 지역은 부족장이나 현지 유력자들이 자치하는 형태였다. 여기서 에얄레트의 사법권은 지방 법관이 행사했으나, 베일레르베이는 관할 구역에 대한 행정권과 군사권을 행사했다.
  53. 모레아 '전제군주국' 이라 하는 경우도 많고 본 항목에도 그렇게 되어 있었다. 이는 'Despot(δεσπότης)' 라는 말을 직역하면 '전제군주' 가 되기 때문이고 동로마 제국에서도 그렇게 사용되었으나, 제국 말기가 되면 황태자 이외의 황자들을 지방 총독으로 내려보내며 수여하는 칭호로 의미가 바뀐다. 즉 '공작' 으로 의역하는 것이 맞으며, '모레아 공국' 이라는 이름이 영 어색하다면 황제가 지방 각지에 왕을 파견하는 중국의 예에서 착안하여 '모레아 왕국' 이라고 하는 게 옳다. 다만 왕국이라고 하는 경우는 지금까지 못 봤다
  54. 원래 토마스가 공작이었는데, 콘스탄티노스 11세가 디미트리오스를 공동 공작으로 삼으라고 명령했다. 콘스탄티노스가 즉위하기 이전에 디미트리오스는 황위에 대한 욕심이 있었고. 동서 교회의 통합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내세우며 콘스탄티노스의 즉위에 딴지를 걸었는데, 이들 형제의 모후가 나서서 교통정리를 해준 덕에 콘스탄티노스 11세가 탄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콘스탄티노스는 언제 문제를 일으킬지 알 수 없는 동생을 수도에 계속 둘 수 없다고 판단하여, 모레아로 보낸 것.
  55. 이는 사실 명분에 불과했고, 배후 조종자가 따로 있었다. 원래 모레아 공국은 황제 요안니스 6세가 창건했는데, 그는 팔레올로고스 황가가 아니라 칸다쿠지노스 가문에 속했다. 그러다 보니 이후 모레아는 칸다쿠지노스 가문이 다스렸는데, 후에 칸다쿠지노스 가문의 황제들이 폐위된 이후 팔레올로고스 황가의 군대가 모레아를 점령, 칸다쿠지노스 공작을 몰아냈다. 그리고 그 후손은 대대로(...) 앙심을 품고 있다가, 이때 반란을 배후조종한 것.
  56. 그리스 땅인 모레아 반도에 왜 알바니아계 주민이 있냐면 1300년대 후반 모레아 공국의 공왕인 테오도르 팔레올로고스가 공국 경제를 일으켜 세워보겠다고 알바니아계 주민들의 공국 이주를 적극 장려했건 것.
  57. 디미트리오스는 당연히 이의를 제기했지만, 메흐메트는 쿨하게 무시했다. 당시 관료들 가운데 메흐메트에게 왜 디미트리오스를 공작으로 삼지 않는지 물어본 인물이 있었는데, 메흐메트 曰 '그런 자는 어떤 왕국을 맡더라도 제대로 통치해내지 못할 것이다.' 술탄 말이 맞네.
  58. 다만, 시오노 나나미의 전쟁 3부작 1부인 '콘스탄티노플 함락'은 (지독한 동로마 안티인) 시오노 할매의 작품 치고는 놀라울 정도로 동로마에 대해 우호적이다. 이것이 자신이 빠질하던 로마의 마지막 흔적마저 몰락한 데 대한 감상 때문인지, 아니면 동로마까지만 오스만 까인 할매의 성향 때문인지는 독자의 판단에 맡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