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튼 존/1960년대

엘튼 존의 음악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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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2000년대2010년대

1 어린 시절 (1947~1961)

어린 시절의 레지널드

영국 런던 근교의 피너에 위치한 외조부모의 집에서 레지널드 케네스 드와이트(Reginald Kenneth Dwight)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스탠리 드와이트(Stanley Dwight), 어머니는 쉴라 아일린 드와이트(Sheila Eileen Dwight)[1]. 엘튼의 아버지는 영국 공군 중대장으로 어머니와 1945년에 둘다 20살의 나이로 결혼했다. 당시 쉴라 드와이트의 부모님 프레드, 아이비 해리스와 함께 피너의 피너 힐 로드 55번지에 신혼집을 차려 지냈다. 둘 사이에 낳은 자식은 엘튼 존 한 명 뿐이라서 엘튼 존은 친형제가 없다. 부모님 둘 모두 음악적인 소향이 있었는데, 어머니 실라는 음반 수집가였고, 아버지 스탠리는 트럼펫 연주자였다.[2] 엘튼 존은 3살부터 피아노 연주를 시작했고, 어머니와 할머니, 이모가 크게 칭찬했다고 한다. 3살 당시 어머니가 엘튼 존이 에밀 발퇴펠(Émile Waldteufel)의 스케이트 왈츠(Les Patineurs)를 외워서 연주하는 것을 들었고, 5살 때부터 피아노 교습을 정식적으로 받기 시작했다.

6살때 본인의 꿈이 무대 피아니스트라고 말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빌 헤일리의 "ABC Boogie", 엘비스 프레슬리의 "Heart-break Hotel" 싱글 두 장을 들고 집에 와서 엘튼 존이 로큰롤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되었고, 이후로 제리 리 루이스, 리틀 리처드[3]도 들었다. 이후로 쏟아져 나왔던 "Rock Around The Clock", "All Shook Up" 등의 로큰롤 넘버들로 록의 길로 빠지게 된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음악가가 되고 싶어했지만, 아버지 스탠리는 보수적인 성향의 군인이었기 때문에 아들의 직업 선택이나 음악적 성향을 탐탁치 않게 여겼고, 항공 직원이나 은행원 등 안정적인 작업에 종사하도록 엄격하게 다그쳤다. 아들에 대해 크게 신경쓰지 않았을 뿐 더러 직업 상으로 집을 자주 비워 아들과 친하게 지내질 못했고, 상당히 소원했던 사이였다. 심지어 유행을 타던 옷이나 신발도 못 신게 할 정도였다.[4] 그리고 스탠리의 교육 방식에 불만을 가졌던 쉴라와 자주 싸웠고, 엘튼 존은 항상 방 안에 틀어박혀 지내었다. 이러한 환경이 트라우마가 되어 본인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이러한 가정 환경으로 인해 전반적인 성격이나 사고방식에 큰 영향을 끼쳐 소심하고 조용한 성격으로 변했고, 사교성도 떨어졌다.[5] 방 안에 혼자 틀이 박혀 음반을 들으며 지내던 시간이 많았고, 거의 외톨이로 지냈을 정도. 아버지 스탠리는 군인답게 교율을 강조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들이 약하게 자라는 걸 못마땅하게 볼 수 밖에 없던 것. 이후 인터뷰에서 아버지가 무서웠고, 두려웠던 인물으로 여러번 설명했었고, 아버지에 대해 심하게 원망하는 경향이 컸다. 오죽하면, 본인의 후회되던 것 중 하나가 불행했던 어린 시절이었다고.[6]

어머니 쉴라는 다소 엄격하긴 했지만, 아버지에 비하면 더욱 유한 성품의 소유자였고, 어머니와는 사이가 좋았다. 당시 군복무로 바빴고, 아들에게 무관심했던 아버지 대신에 엘튼 존은 주로 어머니와 외할머니에 의해 길러졌다. 1953년에 공군에서 중대장으로 진급한 아버지는 이라크에서 두 번째 파병 근무를 마치고 버킹엄셔 주에 있는 메더넘 공군 기지에서 장기간 근무를 제안 받게 되면서 피너에서 3km 떨어진 노스우드의 포터 스트리트 11번지로 이사를 갔지만, 그 곳에서도 별로 좋은 기억을 가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15살이 된 1962년에 부모는 이혼을 했다. 스탠리가 요크셔 주의 해러게이트에서 근무 할 때 쉴라는 동네 건축업자이자 도배업자인 프레드 페어브라더(Fred Farebrother)와 바람을 피우는 걸 들켰기 때문. 이혼 이후에 스탠리는 해러게이트에서 만난 연구기술자 '에드나'와 몇 달 뒤에 재혼을 했고, 4년에 걸쳐 4명의 자식들을 낳았다. 하지만 한창 사춘기였던 엘튼 존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몇 개월 뒤에 다른 여성과 재혼하여 4명의 자식을 낳고, 금세 새 가정을 꾸린 일이 커다란 상처로 다가오면서 본인의 자존심을 크게 망가뜨렸다고 밝혔다.[7]

엘튼 존은 의붓아버지의 이름 Fred의 철자를 거꾸로 바꾸어서 그를 더프(Derf)라는 애칭으로 불렀고,더프와 상관 없다. 친아버지보다 의붓아버지와 더욱 친하게 지내 왔었다. 스탠리와 에드나는 에식스 주로 거처를 옮겼고, 엘튼 존 가족은 당시 프롬 코트(Frome Court)라 불렸던 8가구 아파트 건물로 이사했었고, 이후 1971년 4집 Madman Across The Water가 차트에 오를때까지 엘튼 존은 그곳에서 살았다.[8] 학교에서도 음악적 재능을 크게 보였으며, 행사에서 제리 리 루이스의 곡을 연주하여 칭찬을 받기도 했다. 1958년에 엘튼 존은 영국 왕립음악원(RAM) 주니어 코스에 장학금을 받으며 입학했다. 당시 그를 지도했던 교사 헬렌 피에나와 좋은 사이를 유지했고, 그 교사는 엘튼 존을 크게 이뻐했다고 한다. 당시 교사는 헨델 음악의 악보 네 장 분량을 들려주자 엘튼 존이 즉시 축음기 녹음을 재생하듯이 그대로 따라 연주했다고 회상했다. 처음에 악보를 보지 못했지만, 귀가 매우 뛰어났고, 악보 보는 법도 즉시 익혔다고 한다.

2 술집 피아노 연주자에서 블루솔로지 활동 (1962~1968)

1965년 블루솔로지, 가장 오른쪽이 엘튼 존이다.

1962년 엘튼 존은 어머니와 양아버지의 도움으로 노스우드 힐스 호텔(Northwood Hills Hotel)의 선술집에서 주말 피아노 연주자가 되면서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 저녁에 연주를 했다. 당시 "레지라는 애칭으로 불렸으며, 짐 리브스의 "He'll Have To Go"[9]부터 "Whem Irish Eyes Are Smiling"[10], "Roll Out The Barrel" 등의 같은 짐 리브스와 레이 찰스 곡들로 다양하게 연주했다. 처음엔 별 반응도 없었지만 얼마 뒤에는 주말마다 술집에 사람들이 채워졌고, 팁도 두둑히 받았다.[11]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학교, 토요일에 왕립음악원에 다녔고, 금요일~일요일 저녁에 3일 간 술집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는 생활로 아주 바쁘게 지냈었다. 당시 내성적이고 열등감이 심했던 성격으로 인해서 본인 모습을 감출려고 했고, 그러한 이유로 안경을 썼다고 한다. 애초에 시력이 나쁜 편이 아니었고, 이런 안경을 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버디 홀리의 모습을 보고나서 큰 안경을 쓰기 시작했다고.[12] 음악원에서 클래식을 배우는 것에 대해 그리 내키지 않다고 생각하기 시작했고, 이후에 클래식과 좀 멀어졌다.[13]

같은 해에 학교 친구들과 함께 블루스 밴드 블루솔로지(Bluesology)를 결성했다. 가수이자 기타리스트 '스튜어트 브라운', 베이시스트 '렉스 비숍', 드러머 '믹 잉크펜', 색소폰 '데이브 머피'[14]로 구성되었고, 엘튼 존은 마찬가지로 피아노를 연주했다. 사람들이 거의 알지 못하던 블루스 넘버들로 바꿔서 부르기 시작했는데, 처음엔 어마어마한 야유를 받았고, 물건을 던지던 중년들 투성이었지만, 그럼에도 이를 이겨내 이후 술집의 밴드로 활약했다. 약 3년간 런던의 여러 호텔 바에서 독주를 하거나 블루솔로지와 함께 연주를 하며 생계를 이어 나갔었다. 1965년 3월 5일, 엘튼 존은 그동안 쌓여 왔던 학업에 대한 스트레스로 인해 피너 카운티 중학교를 중퇴하기를 결심했다. 왕립음악원에 입학한 지 5년이 되어 졸업 시험을 앞두었던 시기였다. 엘튼 존의 사촌이자 축구선수였던 '로이 드와이트'가 음악 계에 연이 닿아 엘튼 존을 도와주기도 했다.[15]



1965년 7월 23일에 발매된 첫 싱글 Come Back Baby

1965년 7월, 밴드의 존재를 알릴려고 싱글 발매를 고려했다. 밴드는 그때까지만 해도 레이블 사와 계약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비로 녹음할 수 밖에 없었고, 데모를 녹음해서 레이블 사에 돌리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밴드가 아는 가장 가까운 스튜디오인 런던 피너의 잭슨스 레코딩 스튜디오였고, 엘튼 존 작사작곡 Come Back Baby와 재즈 뮤지션 지미 위더스푼의 "Time's Getting Tougher Than Tough", 보 카터의 "Corrina Corrina"를 커버해서 녹음했다. "Time's Getting Tougher Than Tough"와 "Corrina Corrina"에선 스튜어트 브라운이 보컬을 맡았다. 당시 스튜디오의 상태가 무척이나 열악했는지 드러머 믹 잉크펜은 마치 헛간 같았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렇게 녹음된 데모 테이프를 레이블 사를 돌아다니며 관심을 얻을려고 노력했고, 필립스 산하 레이블 폰타나의 기획부서장 잭 배버스톡이 싱글을 녹음하도록 기회를 주었다. 그는 데모 테이프를 듣고서 발매하기에 알맞지 않다고 여겨 필립스의 스튜디오에서 새로 녹음하자고 했는데, 필립스 스튜디오에선 녹음이 전혀 순탄치 않았다고 한다. 피아노 사운드의 오작동, 마이크를 피아노에 연결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고, 장비들이 엉망이었다고. 값비싼 스튜디오에서의 녹음 진행이 잭슨스 레코딩 스튜디오에서 녹음 한 것보다 더더욱 못했다고 밝혔다. 그래서 원본 테이프를 잘 손봐서 그냥 발매했다고. 1965년 7월 23일 필립스 사로 첫 싱글 Come Back Baby가 발매되었고, 18세의 나이로 가수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블루솔로지는 아이슬리 브라더스, 메이저 랜스, 도리스 트로이, 패티 라벨르[16], 블루벨르와 같은 미국의 소울, 리듬 앤 블루스 음악가들의 공연 뒷무대에 섰다. 1966년에 블루솔로지는 당시 영국에서 풍미했던 블루스 뮤지션 "롱 존 볼드리"(Long John Baldry)[17]를 돕는 보조 밴드 일을 하면서 영국에서 카바레 투어를 시작했다. 하지만 엘튼 존은 밴드에서 활동하는 것과 계속해서 클럽과 바에 돌아다니면서 공연을 하는 것에 대해 피곤함을 느끼고 있었고, 당시 발매된 싱글들 "Come Back Baby", "Mr. Frantic", "Since I Found You Baby"이 연달아 실패된 것으로 인해서 밴드에서 나가기를 결심했고, 약 1년 뒤인 1968년 5월 7일 스코틀랜드 공연을 끝으로 블루솔로지에서 나갔다.[18]

3 Scarecrow틴 팬 엘리 (1967~1968)

리버티에서 인재 구함
신인 그룹 결성할 아티스트/작곡가/가수 모집
약속을 잡거나 오디션 테이프를 보내실 분은 런던 앨버말 스트리트 11번지나
메이페어 7362의 레이 윌리엄스에게 연락 바람

1967년 6월 17일, 영국의 음악 잡지 뉴 뮤지컬 익스프레스(NME)에 광고가 실렸고, 이는 당시 리버티 레코드(Liberty Records)의 A&R 매니저 레이 윌리엄스(Ray Williams)[19]가 실린 것이다. 엘튼 존은 이 잡지를 읽고 있었을 당시에는 뉴캐슬에서 블루솔로지 공연 중이었다. 블루솔로지에서 탈퇴하기 몇개월 전부터 솔로 뮤지션으로 움직일려고 했던 셈. 블루솔로지 활동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엘튼 존은 이 광고를 절호의 기회라고 여겨 레이 윌리엄스에게 연락해서 만나게 되었다. 엘튼 존은 녹음 스튜디오에서 짐 리브스 곡들을 골라서 녹음한 5곡을 먼저 선보일려고 했지만, 레이 윌리엄스는 이를 거절했고, 데모 테이프를 만들어 비틀즈를 발행한 딕 제임스(DJM) 스튜디오에 연락해보라고 했다. 또한 첫 만남에서 윌리엄스는 같은 광고에 응했었던 신인 작사가 버니 토핀이 쓴 가사를 그에게 주었고, 엘튼 존은 바로 곡을 작곡해 버니에게 우편으로 부쳤다.

엘튼 존과 버니 토핀. 1969년

1967년 6월, 대망의 첫 곡인 Scarecrow으로 둘의 작사작곡 협업이 시작되었다. 이어서 "A Dandelion Dies In The Wind", "Velvet Fountain"도 작곡되어 엘튼 존과 버니 토핀의 첫번째 곡들이 되었다.[20] 서로는 딕 제임스 스튜디오에서 처음 만났고, 얘기를 주고 받으면서 친해지기 시작했다. 1968년 초에 발매될 예정이던 싱글에 표기할 이름을 생각했고, 엘튼 존은 자신의 본명 레지널드 케네스 드와이트보다 발음하기 쉬운 예명을 쓰고자 했고, 당시 레이블 사도 이 이름으로 음반을 낼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블루솔로지의 멤버 엘튼 딘(Elton Dean)과 롱 볼드리(Long John Baldry)의 이름에서 각각 한 단어씩 따 온 엘튼 존으로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21]

엘튼 존은 레이블 사와 계약을 하자고 결심해 1967년 11월 17일 버니 토핀과 함께 런던의 덴마크 거리[22]에 위치한 딕 제임스의 레이블 사 DJM과 계약을 했다.[23] 4개월 뒤에 1968년 3월 1일에 발매된 첫 싱글이자 엘튼 존의 이름을 사용한 첫 싱글 I've Been Loving You가 발매되어 솔로로 데뷔했다. 하지만 엘튼 존과 버니 토핀은 레이블 사의 계약 상과 압력으로 틴 팬 엘리라는 가명으로 특징도 없는 전형적인 곡들을 억지로 작업했고, 커다란 부담감과 피로를 느끼면서 지내었다.

20곡을 넘기는 수많은 곡들을 한꺼번에 쓰느라 많은 시간들을 소비했고, 끼니도 제대로 때우지 못하고 야간 카페에서 졸음을 달아내는 등 힘든 삶을 보냈었다.[24] 그리고 1967년 12월 24일 크리마스 이브 날, 영국 셰필드의 유흥업소에서 만난 여자친구이자 엘튼 존의 비서였던 "린다 우드로"가 1968년 5월에 결정하게 된 갑작스러운 약혼, 결혼 문제로 인한 성적 혼란에 대해서 심적으로 크게 부담을 가졌었다. 결국 자살을 결심해 당시 버니 토핀의 아파트 부엌에서 오븐을 열고 가스를 틀어놔서 자살을 시도했지만, 버니 토핀이 누워있던 엘튼 존을 발견해서 자살 시도는 실패되는 어두운 기간을 겪기도 했다.[25] 1968년에 작곡된 엘튼 존의 "I Can't Go On Lining Without You"를 1969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서 출품해 영국의 여가수 "룰루"가 불렀고, 영국 예선을 통과한 6곡 중에서 6위로 기록되었다. 또한 룰루가 부른 "Boom-Bang-A-Bang"이 당시 대회에서 영국 대표로 참가해 공동 우승을 차지한 것.[26] 당시 본인들이 쓴 곡들로 다른 뮤지션들이 불러서 히트를 치기도 했지만, 정작 당시에도 무명이던 토핀과 엘튼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고, 본인들도 하찮고 진부한 사랑 내용으로 써가며 곡을 쓰는 것에 커다란 불만을 느꼈다.

4 Lady SamanthaEmpty Sky (1968~1969)

대망의 첫 앨범 Empty Sky

1968년 12월, DJM의 출판업자 "스티브 브라운"의 조언으로 엘튼 존과 버니 토핀을 도와주었다. 당시 엘튼과 버니를 도와주던 이는 몇 명 더 있었고, 영국의 남성 가수 "로저 쿡"과 "로저 그리너웨이" 작곡팀도 응원을 해주었다. 당시 실의에 빠져있던 엘튼과 버니에게 기운을 복돋워줄 생각으로 새로 쓴 곡이 있으면 들려달라고 했고, 당시 작곡된 Skyline Pigeon, "When I Was Tealby Abbey"를 그들에게 들려주었다. 로저 그리너웨이는 본인이 프로듀서로 맡고 있던 듀오 "영 앤 렌쇼"로 "When I Was Tealby Abbey"를 녹음했고, 로저 쿡은 "Skyline Pigeon"을 녹음하여 딕 제임스는 로저 쿡이 부른 곡을 출판했다.[27]

1968년 12월 스티브 브라운이 프로듀싱을 맡았고, 케일럽 퀘이[28]가 기타를 참여해서 녹음한 Lady Samantha를 1969년 1월에 싱글로 발매했다. 이 싱글도 차트 진입에 실패했지만, 실제 판매에 비해 라디오에서 많이 방영되던 이른바 "턴테이블 히트곡"이었다. 이 곡으로 인해서 당시 업계에서 엘튼 존이라는 이름을 알게 되었고, 딕 제임스 또한 엘튼 존의 의도를 이해하게 되어 시덥지 않은 음악을 만드는 생활에서 벗어났다. 그렇게해서 첫 앨범 작업을 하기 시작했고, 1968년 12월부터 1969년 4월까지 작업되어 그 해 6월에 1집 Empty Sky로 발매되었다. 1집이 발매되기 2개월 전인 1969년 4월에 후속 싱글 It's Me That You Need가 발매되었고, 이 곡도 엘튼 존의 잠재력을 크게 확인 할 수 있던 곡으로 평가를 받았지만, 차트 진입에 실패했다.

Empty Sky는 DJM 스튜디오 지하에 있는 8트랙 녹음 장비를 사용해 신속하게 작업되었다. 1집은 사이키델릭 록의 분위기가 보이면서 소박한 구성을 가진 괜찮은 수준의 앨범이고, 고유의 스타일을 가지기 전의 신인다운 자리를 잡지 못한 사운드를 담은 작품이다. 엘튼 존의 잠재력을 보이던 앨범으로 그럭저럭 무난한 평을 받았지만, 역시 상업적으로 실패했다.[29] 몇년 간 이어진 상업적인 실패들로 인해서 상실감을 느낄법 하지만, 1967~1968년보다 한층 나아진 상황에 놓여진 상태였고, 충분히 다른 때에도 본인들의 잠재력을 쏟을 수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별 걱정 없었던 걸로 보였다.
  1. 이전 성은 '해리스'(Harris)
  2. 스탠리의 아버지, 엘튼 존의 할아버지인 에드윈 드와이트가 당시 전선 제조 회사에서 사내 금관 밴드에서 코넷을 연주했었다.
  3. 이후 리틀 리처드는 엘튼 존의 1993년작 The Power에서 듀엣으로 불렀다.
  4. 이후 엘튼 존은 특유의 화려한 무대 의상과 연주가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서 받았던 제약에 대한 반항의 산물이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당시 아버지와 사이에 대한 곡이 1981년작 Nobody Wins가 있다.
  5. 학교의 대부분 친구들도 여학생들이었다.
  6. 아버지는 트럼펫 연주자였기 때문에 도대체 음악적으로 왜 반대하는지 이해가 가지 못한다고 했다. 재밌는 점은 엘튼 존이 음악적인 재능을 물려 받은 것은 아버지에 관한 영향이 적지 않았던 것.
  7. 엘튼 존 가족의 일부 지인은 이 사실에 대해 반박하기도 했다. 스탠리는 이혼 비용을 모두 부담했고, 1963년 2월에 68파운드를 주고 중고 피아노를 사주었다고.
  8. 엘튼 존과 버니 토핀이 대부분의 초기 곡들을 작곡한 곳이기도 하다.
  9. 이 곡은 이후에도 1979년 A Single Man 투어, 1989년, 1992년 등으로 꽤 자주 불렀다.
  10. 이 곡을 부르지 않으면, 술집의 손님들이 술잔을 던졌다고.
  11. 술집의 피아노 연주자로 활동했을때 한 빨간 머리의 십대 소녀가 엘튼 존에게 푹 빠졌다고 한다.
  12. 결국 도수가 높은 안경을 자주 쓰게 되면서 시력이 급격히 나빠졌다. 이후 엘튼 존은 안경 착용에 질려해 2000년대 초에 라식 수술을 시도할려고 했지만, 생각이 바뀌었는지 이 수술은 포기 했고, 이후 안경은 변함없이 잘 쓰고 다닌다.
  13. 어린 시절때 클래식을 배운 것은 훌륭한 결정이었다고 밝혔다.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이해하게 되었고, 본인이 곡을 작곡하는데 도움이 크게 되었다고. 1970년대 초기 음악에서 봐도 확연히 알 수 있지만, 엘튼 존의 음악은 클래식이 크게 가미되어 그 영향을 보인다.
  14. 1966~1968년까지 여러 멤버들이 합류하고 탈퇴하는 변천사를 보였고, 그 중 엘튼 딘이라는 색소폰 연주자도 1966년에 들어왔다.
  15. 물론 친아버지 스탠리가 이를 알고나서 자신을 속였다며 화를 냈고, 새 가족과 함께 영국 위럴로 이사를 가버렸다.
  16. 이후 1975년 10집 Rock Of The Westies의 오프닝 트랙 "Yell Help/Wednesday Night/Ugly"의 백보컬을 맡기도 했다.
  17. 1960년대 당시 영국에서 상당히 대단했던 인물이었다. 영국의 클럽에서 블루스를 연주하면서 최초 기록을 세우거나 그가 공연을 진행했던 곳에는 무명의 믹 재거, 찰리 와츠가 연주를 했고, 에릭 클랩튼이 존 볼드리의 공연을 보고 뮤지션이 되기를 마음 먹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리고 당시 무명이던 로드 스튜어트까지 발굴해서 스타로 만들어주거나 폴 매카트니와 상당한 친분을 가진 등 1960년대 영국 음악 계에서 많은 영향력을 보였다.
  18. 카바레 투어를 하면서 지내온다는 것에 대해 크게 불평했지만 그럼에도 즐거웠던 시절이라고 회고했다.
  19. 1947년생으로 엘튼 존과 동갑이다. 2010년대 근황 사진들을 보면 70이 아니라 40~50대로 보일 정도의 엄청난 동안이다.
  20. Scarecrow는 이후 1975년작 Curtains에서 언급되었다.
  21. 1967년부터 1971년까진 예명으로 사용되었지만, 1972년 1월 6일에 엘튼 허큘리스 존(Elton Hercules John)으로 법적 개명했다.
  22. 웨스트 런던에 위치한 음악거리, 한국으로 따지면 낙원상가와 비슷한 곳.
  23. 딕 제임스는 본인의 이름을 딴 DJM(Dick James Music)레이블의 대표자이자, 비틀즈의 출판회사 'Northern Songs'의 社공동 대표자이다. 비틀즈 덕에 크게 성공했다가 결국 뒤돌아서 배신해버린 인물.
  24. 당시 DJM 레이블에서 일한 기억들과 무명 시절의 기억들은 1975년 9집 Captain Fantastic And The Brown Dirt Cowboy에서 자서전 식으로 묘사되었다. 이렇게만 보면 딕 제임스와 그의 레이블 사는 혹독한 곳으로 볼 수 있겠지만, 당시 딕 제임스는 엘튼 존과 버니 토핀의 잠재력이나 재능, 그들의 원하는 바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거나 알지 못한 것으로 보는게 더 맞다. 이후 엘튼 존은 딕 제임스를 존경한다는 식으로 회고한 바도 있고, 딕 제임스가 당시 엘튼 존의 미국 진출을 위해 무려 18개월 동안 미국의 레이블 사를 돌며 노력한 걸로 보면 그저 상업적인 면 뿐만이 아니라 엘튼 존의 재능으로써 크게 인정했을 가능성이 높다.
  25. 1974년에 자살에 대한 내용을 담은 곡이자 자신을 크게 도와준 롱 존 볼드리를 헌정하는 Someone Saved My Life Tonight를 작곡했다.
  26. 이 곡은 엘튼 존이 작사작곡한 곡인데, 본인은 가사가 워낙 진부해 형편없는 곡이라고 싫어한다.
  27. 이후에 로저 쿡은 "Skyline Pigeon"을 엘튼 존의 클래식이라고 칭찬했고, 놀라운 곡이라고 회고했다.
  28. 1967년 말부터 DJM 스튜디오에서 만나 친한 사이로 발전했고, I've Been Loving You에서 기타, 프로듀싱을 맡았다. 또한 1968년에 공동 작곡으로 곡을 쓰기도 했고, 이후 1975~1976년까지 엘튼 존 밴드의 기타리스트로 활동했다.
  29. 영국에선 고작 2,000장 밖에 못팔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