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튼 존/1980년대

엘튼 존의 음악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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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1970년대198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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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2000년대2010년대

1 침체기

1.1 21 AT 33부터 The Fox까지 (1980~1981)

1979년 8월부터 프랑스 니스로스앤젤레스에서 1979년 12월, 1980년 1~3월까지 21 AT 33를 작업했을때 다양한 작사가들이 참여했는데, 개리 오스본을 포함해 영국의 남성 가수 톰 로빈슨,[1] 여가수 쥬디 쥬크,[2] 그리고 버니 토핀. 1977년 이후 2년 뒤인 1979년 8월 프랑스에서 수록곡 "Two Rooms At The End Of The World", "White Lady White Powder", "Chasing The Crown"을 쓴 걸로 시작해 재회했다.[3]

1980년 9월 13일 센트럴 파크에서

21 AT 33은 1980년 5월에 발매되었고, 미국 13위, 영국 12위로 기록되어 10위 안에 진입하지 못했지만, 프랑스 3위, 호주 7위, 뉴질랜드 3위로 유럽과 오세아니아에선 양호한 성적을 보여 꽤 히트쳤다. A Single Man과 유사한 성적을 거두었다. 당시 발매된 싱글 "Little Jeannie", "Sartorial Eloquence (Don't You Wanna Play This Game No More)", "Dear God" 중에서 "Little Jeannie"는 미국 3위, 캐나다 1위로 기록되어 크게 히트쳤고, 1976년 "Don't Go Breaking My Heart" 이후 미국에서 가장 크게 히트친 곡이 되었다.[4] "Sartorial Eloquence (Don't You Wanna Play This Game No More)"는 영국 44위, 캐나다 57위로 저조하게 기록되었고, "Dear God"는 호주에서만 진입되어 80위로 저조하게 기록되었다. 1980년 8월부터 12월까지 북미, 호주에서 21 AT 33 투어를 진행했고, 투어 밴드의 창립멤버 디 머레이와 나이젤 올슨이 6년 만에 합류했다.[5]

1980년 9월 13일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진행된 공연은 무려 400,000명이나 참석한 무료 공연이다. 이 공연의 제일 압권은 도널드 덕 복장을 입은 엘튼 존. 본인도 웃겼는지 중간에 꽥꽥거리거나 웃음을 못 참기도 했다. 당시 센트럴 파크에서 진행된 공연 중에서 가장 많은 인원이 온 공연이 되었지만.. 1981년에 열린 사이먼 앤 가펑클의 공연이 500,000명이나 몰려 들어 엘튼 존 공연은 2위가 되었다. 1980년 12월 8일, 멜버른으로 가던 비행기에서 존 레논의 사망 소식을 듣기도 했다.[6]

1980년 10월에 프랑스의 여가수 "프랑스 갈"(France Gall)과 프랑스어로 듀엣으로 부른 발라드 "Les Aveux"[7]와 역시 듀엣으로 부른 "Donner Pour Donner"가 싱글 B면에 수록된 채로 프랑스에서만 싱글로 발매되었다. 1981년 1월 프랑스에서 1위로 기록되었고, 600,000장이나 팔려 크게 히트쳤다. "Les Aveux"는 침체기때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싱글 중 하나이지만, 프랑스에서만 발매된 싱글이고, 이후 어느 앨범이나 컴필레이션 앨범에도 수록되지 못한 곡에다 라이브에서도 한번도 부르지 않아서 묻혔다.[8]

1980년 1월부터 6월까지 프랑스와 런던, 로스앤젤레스에서 21 AT 33와 동일한 라인업으로 15집 The Fox를 작업했다. 원래 21 AT 33더블 앨범으로 발매될 예정이었지만, 미국의 게펜(Geffen) 레이블 사와 계약 건을 포함한 여러 이유로 The Fox로 따로 작업하게 되면서 더블 앨범은 무산되었다. 21 AT 33에 수록될 예정이었던 곡들을 The Fox에 수록했고, 1980년 1월부터 10곡 정도를 더 작곡했다. 1974년부터 6년 동안 함께했던 MCA 레이블 사는 1976년 이후로 발매된 앨범과 싱글의 판매 부진으로 엘튼 존에게 강한 압력을 두고 있었다가 이에 엘튼 존은 1980년 말에 MCA와 계약을 끊어버리고 게펜과 계약을 했다.[9]



1981년 The Fox의 장편 뮤직비디오 Visions

The Fox은 전성기 시절의 음악을 연상케 하는 구성을 담은 인상적인 앨범으로 그럭저럭 왠만한 평을 받았다. 작업하고 1년 뒤인 1981년 5월에 발매되었고, 프랑스 5위, 호주 2위로 기록되어 일부 국가에선 히트쳤지만, 미국 21위, 영국 12위로 기록되어 미국에서 20위에 진입하지 못한 첫 앨범이 되었고, 미국에선 200,000장 밖에 팔리지 않아 Victim Of Love, Ice On Fire, Leather Jackets와 같이 미국에서 가장 실패한 앨범이 되었고, 영국에선 겨우 60,000장 밖에 팔리지 못해 영국에서도 가장 실패한 앨범 중 하나가 되었다.[10] 5~7월에 발매된 싱글 "Nobody Wins", "Just Like Belgium", Chloe 모두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Just Like Belgium"은 어느 국가에서도 진입하지 못했고, "Chloe"는 빌보드 40위 안으로 진입, "Nobody Wins"는 빌보드 30위 안에 진입되었다.

1978년부터 이어온 슬럼프의 절정을 찍었던 해가 바로 1981년이었다. 당시 엘튼 존은 의욕이 크게 떨어져 앨범과 싱글 홍보에 큰 신경을 쓰지 않았을 뿐 더러 당시엔 투어 활동도 하지 않았고,[11][12] 이전 년도에 비해서 음악 활동이 거의 없었고, 왓포드 FC의 구단주 활동이 대부분이었다. The Fox의 모든 수록곡을 뮤직비디오로 제작해서 스토리가 일일이 이어지는 장편 뮤직비디오로 제작되었다. 1981년 5~6월에 촬영되어 1982년 초 MTV에서 "Visions"로 방영되었지만,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하고 묻혀버렸다.[13]

2 재기

2.1 Jump Up!부터 Leather Jackets까지 (1982~1986)

"Visions" 촬영 이후, 1981년 6월부터 7월까지 카리브해 몬트세랫에 위치한 조지 마틴AIR 스튜디오와 프랑스 파리에서 16집 Jump Up!을 작업했다. 몇개월 뒤 1982년 4월 9일에 발매되었고, 미국과 영국에선 각각 17위, 영국 13위로 기록되어 이번 작도 10위 안에 진입하지 못했지만, 다른 국가들에서 왠만한 성공을 거두었고, 호주 3위, 뉴질랜드 1위로 기록되어 특히 오세아니아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82년 3~7월에 발매된 싱글 "Blue Eyes", 존 레논 추모곡 "Empty Garden (Hey Hey Johnny)"의 상업적인 성공과 전작들에 비해 크게 살아난 음악적인 역량으로 인해 앨범은 꽤 좋은 평을 받았고, 드디어 몇년 간 이어졌던 침체기에서 벗어나 재기에 어느정도 성공했다.[14]

Jump Up! 이후 1978년부터 4년 간 협업을 맺고 있던 개리 오스본이 팀에서 떠났고, 1982년 3월~12월 Jump Up! 투어를 진행하고 있던 사이인 1982년 9월부터 17집 Too Low For Zero 작업에 들어가 1983년 1월까지 작업되었다. 데이비 존스턴의 재합류로 엘튼 존의 투어 밴드는 1972~1974년으로 돌아갔고, 엘튼 존과 버니 토핀은 다시 옛날의 방식으로 제대로 작업하자는 결심으로 앨범의 완성도를 높이려고 노력했다. 모든 수록곡들의 가사는 버니 토핀이 작사했다. 1976년 11집 Blue Moves 이후로 6년 만에 제대로 보인 협업인 셈. 앨범은 1983년 5월에 발매되었고, 미국에선 25위로 전작들보다 낮게 기록되었지만, 호주 2위, 뉴질랜드 2위, 영국 7위로 기록되어 다른 국가에선 좋은 성적을 보였고, 판매량도 크게 늘어났다. 전반적인 음악성도 1970년대를 연상시킬 정도로 수려하고 빼어난 구성을 보여 호평을 받았다.


앨범이 좋은 성적을 거둔 만큼 싱글로 발매된 "I'm Still Standing", "I Guess That's Why They Call It The Blues", "Kiss The Bride", "Cold As Christmas (In The Middle Of The Year)"/"Crystal" 모두 히트쳤다.[15] "I Guess That's Why They Call It The Blues"는 빌보드 4위, 빌보드 어덜트 컨템포러리 2위, 캐나다 9위, 캐나다 어덜트 컨템포러리 1위, 영국 5위, 짐바브웨 1위로 기록되었고, "I'm Still Standing"은 빌보드 12위, 영국 4위, 캐나다 1위로 기록되어 앨범 최대 히트곡이 되었다. "Kiss The Bride"는 빌보드, 영국 30위 안에 진입, "Cold As Christmas"와 더블 A면으로 묶어서 발매된 "Crystal"은 영국 33위, 아일랜드 16위로 기록되었고, "Crystal"은 호주에서만 따로 발매되어 12위로 기록되었다. 앨범과 싱글들, 뮤직비디오들도 히트쳤으므로 1978년부터 5년 간 이어졌던 침체기에서 벗어나 재기에 성공했다.

1983년 10월 남아프리카에서 진행한 투어가 그해 유일한 투어 일정이었다.[16] 요하네스버그의 선 시티에서 로드 스튜어트와 같이 동행해 일주일간 공연을 진행했다. 당시 아파르트헤이트가 몰락해가고 있던 시기로 1984년 18집 Breaking Hearts의 5번 트랙 "Passengers"의 영감을 얻기도 했다. 1984년 2월 14일 발렌타인 데이 날에 Too Low For Zero, Breaking Hearts에 참여한 사운드 엔지니어이자 독일인 여성인 레나타 블라우엘과 결혼했었다.

1984년 Too Low For Zero/Breaking Hearts 투어[17]

1983년 12월부터 1984년 4월까지 몬트세랫에서 작업된 18집 Breaking Hearts가 1984년 6월에 발매되었다. 영국에선 2위로 기록해 간만에 5위 안에 진입했고, 호주 1위, 뉴질랜드 2위, 스위스 1위로 기록되어 유럽과 오세아니에서 크게 히트쳤지만, 미국에선 20위로 기록해 여전히 미국에선 고전하고 있었다. 1970년대와 달리 영국과 미국에서의 성적이 역전했던 셈. 판매량은 전작 Too Low For Zero가 더 높지만, 차트 성적은 이 앨범이 더욱 좋았고, 차트 성적만 보자면 근 몇년 만에 가장 높은 성적을 거둔 앨범으로 봐도 무방하다.[18]

싱글은 1984년 5월부터 1985년 1월까지 "Sad Songs (Say So Much)", "Passengers", "Who Wear These Shoes?" "In Neon", "Breaking Hearts (Ain't What It Used To Be)" 총 5곡이 발매되었고, "Sad Songs (Say So Much)"가 빌보드 5위, 영국 7위, Passengers는 영국 5위, 호주 9위로 기록되어 10위 안에 진입해 크게 히트쳤고, "Who Wear These Shoes?", "In Neon"은 싱글 차트 30~40위 안에 진입되었다. 타이틀 트랙 "Breaking Hearts"는 1985년 2월 14일 발렌타인 데이 날에 영국에서만 발매되었지만, 59위로 저조하게 기록되었다.

1985년 7월 13일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AID 공연에서 저녁 시간대에 출연해 "Bennie And The Jets", Rocket Man, 키키 디와 듀엣 "Don't Go Breaking My Heart"를 불렀고, "Don't Let The Sun Go Down On Me"를 연주했다.[19], 마빈 게이의 "Can I Get A Witness"[20] 총 5곡을 불렀다.

1985년 1월부터 투어 밴드에 또 다시 변화가 보였다. 1980년에 재합류한 나이젤 올슨과 디 머레이는 10년 전인 1975년처럼 다시 해고되었지만, 데이비 존스턴은 1982년 재영입 이후로 여전히 본인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퍼커셔니스트 레이 쿠퍼가 다시 합류했고, [21] 베이스 데이비드 페이턴, 드럼 찰리 모건[22]을 영입, 키보드는 1984년 Breaking Hearts 투어에서 키보드를 맡았던 프레드 만델이 그대로 맡았다. 그리고 1976년 11집 Blue Moves 이후로 9년 만에 거스 더전이 다시 프로듀싱을 맡았고, 1986년 20집 Leather Jackets까지 함께 했다. 그해 초에 새롭게 바꿔진 라인업으로 19집 Ice On Fire를 작업했고, 7월 13일 AID 공연으로 바꿔진 라인업을 처음 선보인 것.

Ice On Fire는 1985년 1월에 작업되었고, 해의 끝자락인 1985년 11월 4일에 발매되어 영국 3위, 독일 5위, 노르웨이 2위, 호주 6위로 기록되어 오세아니아와 유럽의 대부분 국가에서 차트 10위 안에 진입해 좋은 성적과 판매량을 보여 크게 히트쳐 Too Low For Zero, Sleeping With The Past와 같이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엘튼 존의 1980년대 앨범가 되었다. 하지만 캐나다에선 49위로 기록, 미국에선 48위로 저조하게 기록되어 미국에서 가장 낮은 성적을 거둔 앨범 중 하나가 되었고, 처음으로 북미에서 저조한 성적을 거둔 앨범이 되었다.다음작은 말할 것도 없지만


여가수 밀리 잭슨과 듀엣으로 부른 "Act Of War"는 앨범이 발매되기 5개월 전 1985년 6월에 싱글로 발매되었지만, 영국 32위, 호주 50위, 캐나다 94위로 저조하게 기록되었고, 미국에선 진입하지 못했다. 하지만 1985년 10월(UK), 1986년 2월(US)에 발매된 "Nikita"는 영국 3위, 미국 7위, 오세아니아와 유럽의 다수 국가에서 1위로 기록되어 크게 히트쳐 엘튼 존의 1980년대 최대 히트곡이 되었다. 1976년 "Don't Go Breaking My Heart"에 이은 대히트곡. 1970년대에 발매된 왠만한 히트 싱글들보다 더욱 큰 성공을 거두었고, 80년대에도 70년대 못지 않은 히트 싱글들을 보여준 예 중 하나이다.

1985년에 스티비 원더, 도니 워릭, 글래디스 나이트와 같이 참여한 "That's What Friends Are For"가 1985년 11월에 싱글로 발매되었고, 1986년 1월 빌보드에서 1위로 기록되어 4주 동안 자리를 차지해 크게 히트쳤다. 비록 엘튼 존이 작사작곡에 참여한 곡은 아니고, 본인 곡도 아니지만 피쳐링한 점으로 1976년 "Don't Go Breaking My Heart" 이후로 10년 만에 빌보드 1위를 가지게 된 것. 이 곡은 1987년 그래미 어워드에서 팝 협력상 부문에 후보로 올랐지만, 노미네이트로 그쳤다.

1986년 1월, 6~7월, 9월에 Ice On Fire와 동일한 라인업으로 20집 Leather Jackets을 작업했다. 1985년에 Ice On Fire를 작업하면서 짧은 기간 안에 약 20곡을 넘는 상당수의 곡들을 녹음했는데[23] 당시 작업하면서 앨범에 수록되지 못한 몇 곡을 Leather Jackets에 수록했고, 1986년 1월 네덜란드에서 앨범을 작업하면서 25곡을 더 작곡했다. 1979~1980년 21 AT 33/The Fox와 유사한 경우인 셈. 그리고 개리 오스본이 1982년 Jump Up! 이후로 4년 만에 참여해 일부 곡들에서 작사를 다시 맡기도 했고, 엘튼 존과 마지막으로 작업한 경우가 되었다.

엘튼 존은 Ice On Fire 투어를 1985년 11월 아일랜드부터 시작해 1986년 10월 로스앤젤레스까지 거의 1년 간 투어 활동을 했고, 앨범은 작업되고 몇개월 뒤이자 Tour De Force가 진행되기 2일 전인 1986년 11월 3일에 발매되었다. 하지만 캐나다 38위, 영국 24위, 미국 91위로 기록되어 저조한 성적을 거두었고, 가장 낮은 판매량을 보여 가장 실패한 엘튼 존 앨범이자 미국에선 가장 저조한 성적을 거둔 앨범이 되었고, 13집 Victim Of Love와 같이 졸작으로 평가 받는다. 클리프 리처드와 듀엣으로 부른 "Slow Rivers"는 영국에서 44위로 기록되었고, "Heartache All Over The World"는 영국 45위, 미국 55위로 저조하게 기록되었지만, 호주에선 그나마 나은 7위로 기록되었다. 1987년 1월에 "Paris"가 프랑스에서만 프로모션 싱글로 발매되었지만, 차트에 진입되지 못했다.[24]

1986년 12월 14일 호주 시드니[25]

1986년 11월 5일 호주 브리즈번부터 12월 14일 시드니까지 진행된 Tour De Force 투어는 멜버른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참여했다. 초반에는 밴드와 진행되다가 중반부부터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같이 진행되는 대형 투어. 1986년 6월부터 기획하고 있었고, 그해 10월에 LA에서 Ice On Fire 투어를 마치고 일행들과 같이 호주로 갔다.[26] 하지만 1986년 9월부터 목상태가 심히 나빠지던 엘튼 존은 이 시기에 성대결절이 생겼었다. 1975년부터 꾸준히 이어온 마약 복용에 끈임없이 이어질 정도로 지나쳤던 투어 활동으로 영향, 목관리를 소홀히 해 성대결절이 생겨버렸고, 특유의 가성을 전혀 내지 못해 숨도 크게 짧아졌던 상태였다. 역대 최악의 보컬로 꼽힐정도로 무척이나 좋지 않던 보컬로 투어를 진행했다. 그럼에도 투어는 성공적으로 끝냈고, 1987년 1월 5일 호주 시드니의 성 빈센트 병원에서 성대 수술을 했다. 이 수술로 인해 보컬이 크게 바꿔졌다.

Tour De Force의 마지막 공연인 12월 14일 시드니 공연이 풀버전 영상으로 촬영되어 DVD로 발매되었고, 당시 투어의 제작 과정이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어 1986~1987년 호주에서 방영되었고, 1987년 7월 6일에 라이브 앨범 Live In Australia With The Melbourne Symphony Orchestra으로 발매되었다. 이 공연에서 부른 라이브 버전의 Candle In The Wind, Your Song, "Don't Let The Sun Go Down On Me", Take Me To The Pilot이 1987년 12월~1988년 1월에 싱글로 발매되었고, 나머진 전부 저조한 성적으로 기록된 반면에 "Candle In The Wind"는 영국 5위, 미국 6위로 기록되어 크게 히트쳤다. 오히려 1974년 2월에 발매된 원곡 버전보다 더욱 크게 히트친 셈.

3 최악의 시기

3.1 더 선과의 싸움, 이혼과 커밍아웃 (1987~1988)

하지만 엘튼 존에겐 1987년은 최악의 해가 되었다. 1987년 2월 25일에 악명 높은 찌라시 집단 더 선에서 엘튼 존이 뉴욕에서 십대 남창들과 마약, 섹스 파티를 즐겼다는 헤드라인으로 장식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발행 다음 날인 26일에는 변태적인 슈퍼스타 엘튼 존 100달러 지폐로 코카인을 흡입하는걸 좋아한다라고 보도를 했고, 엘튼 존 본인은 이 두 얘기를 부정하고, 문서 비방죄 영장을 가져왔다고 했지만, 다음날 선 지에선 당신은 거짓말쟁이라고 헤드라인으로 크게 장식했고, 몇개월 동안 근거없는 악성 루머들로 계속해서 보도 해서 엘튼 존을 공격해서 엘튼 존의 경력과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혔다. 기자들은 취재를 할려고 엘튼 존의 집 주변에 침입하는 등 엘튼 존은 당시 대인기피증과 불안증으로 인해서 한동안 집에서 나오지 못해 정상적인 활동을 거의 하지 못했었다.[27] 결국 이러한 공격에 더이상 참지 못한 엘튼 존은 선 지의 마지막 공격인 1987년 9월 28일 엘튼 존의 비밀스러운 조용한 개들 보도 이후로 명예훼손 죄로 더 선 지를 고소하게 되어 소송으로 이어졌고, 1년이 지난 1988년 10월에 엘튼 존 측이 승소를 하게 되어 피해 보상은 100만 파운드, 한화로 18억 3천만원 정도 받았다.[28]

1988년 10월 더 선에선 SORRY ELTON이라고 헤드라인에 표기해 사과의 표시를 보였고, 엘튼 존과 더 선의 악연이 끝났다.물론 더 선은 이후에도 엘튼 존에 대한 조롱이 끝난건 아니다. 명불허전 더 선 재판에서 승소해 명예를 회복했지만, 이후 언론으로부터는 흥미의 대사(Ambassador of Fun)라는 불명예스런 타이틀을 얻게 되었고, 1개월 뒤인 1988년 11월 17일에 레나타 블라우엘과 4년 간의 결혼 생활을 끝으로 이혼을 했다. 이 결혼은 엘튼 존의 성적 논란에 대해서 잠재우기 위한 일종의 위장 결혼이었다고 밝혀졌다. 이혼 이후로 1988년 12월에 한 잡지에서 다시 한번 커밍아웃을 했고, 본인이 동성애자라고 제대로 밝혔다.[29]

1년 내내 시달린 정신적인 피해와 이혼, 거기다 십수년 간 이어졌던 약물 중독과 폭식증으로 인해서 40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상당한 노안이었고,[30] 음악적으로도 모든게 침체기였다. 당시 상황들이 엘튼 존 본인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쳐 최악의 시기를 보내었고, 더 선과의 악연으로 인해서 악성 기자파파라치를 혐오하는 계기가 되었다.[31]

3.2 Reg Strikes Back부터 Sleeping With The Past까지 (1987~1989)

약간의 안정을 찾은 1987년 가을부터 1988년 봄까지 앨범을 작업했고, 그해 6월에 발매된 21집 Reg Strikes Back로 복귀했다. 자칭 컴백 선언의 의미를 가진 앨범.[32] 이 앨범은 미국 16위, 영국 18위, 캐나다 6위, 호주 12위로 여러 국가에서 20~30위 안에 진입되어 3위로 기록된 이탈리아를 제외하면 상업적으로 그리 크게 성공하지 않았고, 당시 영국에선 스캔들의 영향으로 엘튼 존의 이미지가 잠시 악화되었기 때문에 한동안 영국에선 앨범과 싱글의 판매량, 차트 성적이 좋지 않았다.

싱글은 "I Don't Wanna Go On With You Like That", "Mona Lisas And Mad Hatters Part 2", "Town Of Plenty", "A Word In Spanish" 총 4곡이 발매되었고, "Mona Lisas And Mad Hatters Part 2"는 싱글 차트 진입 실패, "Town Of Plenty"는 호주 95위, 영국 74위로 저조하게 기록되었지만, "A Word In Spanish"는 캐나다 10위, 빌보드 19위로 기록되어 꽤 히트쳤고, "I Don't Wanna Go On With You Like That"는 빌보드 2위, 캐나다 1위로 올라 엘튼 존의 1980년대 북미 최대 히트곡 중 하나가 되었다.

1988년 9월 6일 런던 소더비에서 열린 경매의 포스터

Reg Strikes Back 발매 이후, 본인의 삶을 돌아보게 되었고, 1988년 5월에 본인의 거의 모든 물건들을 경매로 내놓을 것이라고 결심했다.[33] 그렇게 엘튼 존은 저택에서 1970년대부터 꾸준히 모으면셔 소유하고 있던 2,000여점의 수많은 복장들을 그해 6월에 Reg Strikes Back이 발매되고 3개월이 지난 1988년 9월 6일 화요일 오후 영국 런던의 소더비 쇼룸에서 전부 내놓았다. 당시 소더비 쇼룸에선 전세계 각지에서 온 음악 팬들, 미술 애호가들, 다양한 전문 수집 전문가들이 참석했고, 4층까지 꽉 체워져 있을 정도로 입찰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당시 내놓은 엘튼 존의 2,000여 점이나 되는 물건들은 대부분 라이브 공연에서 자주 입었던 화려한 복장들과 다양한 종류의 선글라스들, 도자기들, 가구들, 그림들, 시계, 보석들과 엘튼이라고 써져있는 자동차 번호판들, 1970년부터 꾸준히 받던 골든 레코드들 등의 전성기 시절부터 모았던 수많은 물건들. 당시 경매에선 거의 모든 물건들이 낙찰되는데 경쟁이 치열했고, 물건들이 각각 입찰자들에게 낙찰되는데 꽤 신속히 진행되었다고 한다.

왠만한 안경들이나 복장들은 대략 1,500파운드, 한화로 270만원 정도 낙찰되었고, 그중 1975년 Tommy에서 입은 "Piball Wizard" 대형 부츠도 같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 부츠는 영국의 제조업자 Doc Martens에게 20,000파운드(한화로 3700만원 정도)로 낙찰되었다.[34] 이어서 Captain Fantasic 주크 박스는 30,000만 파운드에 낙찰되었고, 대부분의 자켓들과 화려한 복장들, 안경들은 1500~2000 파운드 정도 낙찰되었고, 골드 레코드, 주크 박스, 번호판, 가구 등의 특별한 물건들은 더욱 비싼 가격으로 낙찰되었다.[35]

그렇게 모든 물건들이 낙찰되고 나서 이 경매로 얻은 총 금액이 5백만 파운드, 한화로 92억 정도 될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더욱 높은 820만 파운드, 한화로 150억 정도 했었다. 이후에 이 막대한 금액으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자세히 서술된 바는 없지만, 아마도 기부나 후에 설립된 에이즈 제단에서 크게 사용되었다는 추측이 있다.엘튼 존은 이 금액들로 다시 2,000여점이나 되는 물건들을 다시 구매했을 거라는 농담도 있었다.[36] 경매가 끝나고 나서 엘튼 존은 여러 인터뷰에서 이 수많은 물건들을 경매에 내놓은 것이 후회되지 않고,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고 밝혔고 경매로 내놓기 전인 5월에 이 복장들을 다시 한번 착용하거나 같이 사진들을 촬영하기도 했다.

Reg Strikes Back과 히트 싱글, 1988년 9월부터 다시 진행되기 시작한 투어 활동으로 재기에 성공했어도, 1987년 스캔들의 여파로 인한 정신적인 피해와 실패한 결혼 생활, 30대 전부를 보내온 약물 중독으로 인해서 여전히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온갖 굵직한 문제들에서 벗어나 겨우 안정을 찾은 1988년 11월부터 12월까지 1개월 간 새 앨범 작업에 들어갔다. 덴마크의 유틀란드 반도 동부의 항구도시 라네르스(Randers)에 위치한 Puk 스튜디오에서 22집 Sleeping With The Past를 작업했다.

앨범은 1988년 11~12월에 녹음되었지만, 약 1년 뒤인 1989년 8월 29일에 발매되었다. 이는 당시 뜨근미지근한 성적을 거둔 Reg Strikes Back 때문에 미국 레이블 MCA에선 앨범을 거의 1년간 발매하지 못하도록 이러한 만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이미 10년전인 1979년부터 Song For Guy의 참담한 미국 성적 이후로 엘튼 존에게 압력을 주기 시작했다. 그런 이유로 MCA에 나가서 1980년 말부터 게펜과 계약했지만, 7년 뒤 1987년에 게펜에서 나가고 나서 1988년에 MCA과 다시 계약을 했다. 10년 전과 별 다를 바없는 레이블 사의 만행으로 인해 엘튼 존은 불만을 낼 수 밖에 없었다.[37]

레이블 사와 약간의 불화가 있었음에도 이 앨범은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해 제대로된 재기작이 되었다. 호주 2위, 뉴질랜드 1위, 프랑스 2위, 스위스 1위로 기록되어 여러 국가에서 5~10위 안에 진입되었고, 영국에선 1위로 기록되었고, 플래티넘 3장을 기록해 영국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엘튼 존의 앨범들 중 하나가 되었다. 영국에선 1974년 8집 Caribou 이후로 15년 만에 1위로 기록된 앨범.[38] 앨범의 상업적인 성공뿐 만이 아니라 앨범의 전체적인 완성도와 음악적으로 또한 큰 호평을 받았고, 1980년대 내내 다소 부진했던 음악성이 부활해 1983년 17집 Too Low For Zero와 같이 엘튼 존의 1980년대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싱글은 "Healing Hands", "Sacrifice", "Club At The End Of The Street", "Whispers", "Blue Avenue" 총 5곡이 발매되었고, "Healing Hands"와 "Sacrifice"는 1989년 8월에 싱글로 발매되었다. "Healing Hands"는 빌보드 13위, 빌보드 어덜트 컨템포러리 1위, 캐나다 8위로 기록, "Sacrifice"는 빌보드 18위, 호주 7위, 네덜란드 3위, 프랑스 1위, 아일랜드 2위, 노르웨이 2위로 기록되어 크게 히트쳤고, 엘튼 존의 대표적인 1980년대 곡 중 하나가 되었다. 두 싱글은 여러 국가에서 큰 성공을 보였지만, 영국에서만 40~50위 안에 진입해 저조하게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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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1990년 5월 "Healing Hands/Sacrifice" 더블 A면으로 수록된 싱글로 영국에서만 발매되었고, 영국에서 1위로 기록되어 영국에서 가장 큰 히트를 친 엘튼 존 곡 중 하나가 되었고, 1976년 "Don't Go Breaking My Heart" 이후로 13년 만에 영국 싱글 차트 1위로 기록된 경우이다. 사실 "Don't Go Breaking My Heart"는 키키 디와 듀엣으로 부른 곡이고, 본인 명의로만 발매된 곡이 아니기 때문에 "Healing Hands/Sacrifice"이야 말로 엘튼 존 솔로로 처음으로 영국 1위로 기록된 곡이자 데뷔 21년 만에 1위를 가진 곡이라 할 수 있다.

"Club At The End Of The Street"는 1990년 5월에 발매되어 영국 33위, 빌보드 43위, 빌보드 어덜트 컨템포러리 1위, 덴마크 1위로 기록되었다. "Whispers"는 유럽에서 프로모 싱글로 발매되어 프랑스 11위로 기록되었고, "Blue Avenue"는 1990년 11월에 유럽과 오세아니아에서만 발매되었고, 네덜란드 50위로 기록되었다.
  1. 톰 로빈슨은 동성애자이고, 대표곡 Glad To Be A Gay 같은 호모포비아에 대해서 직설적이고 크게 비판하는 내용을 담은 곡들로 알려져 있다. 당시 엘튼 존과 작업하면서 작곡된 곡들 Elton's Song, Sartorial Eloquence, Never Gonna Fall In Love Again, Reach Out To Me는 전부 동성애적인 코드를 담은 곡들이다.
  2. 당시 신인이었고, 1979년 로켓 레이블과 계약하게 되었을때 21 AT 33에 잠시 참여하여 Give Me The Love의 가사를 썼다.
  3. 하지만 떨어져 있던 기간동안 달라져버린 작사작곡 실력으로 인해 한동안 전성기 시절같은 협업이 그다지 돋보이지 않았고, 이에 대한 내용을 담은 곡이 Two Rooms At The End Of The World.
  4. 영국에선 33위로 기록.
  5. 데이비 존스턴은 1979년에 팀에서 나갔고, A Single Man~The Fox까지 참여한 세션연주자 팀 렌윅과 리치 지토가 대신 리드 기타와 리듬 기타를 맡았다. 데이비 존스턴은 1982년 Jump Up! 투어로 다시 합류했다.
  6. 호주의 공연 일정들 때문에 당장 뉴욕으로 갈 수 없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호주 공연의 일정을 마치고 나서 12월 말, 멜버른의 한 교회에서 추도식을 열었다. 거기다 당시 투어의 레파토리 중 하나가 바로 Imagine이었기 때문에 추모곡으로 불렀었다.
  7. 원래 제목은 Reach Out To Me였고, 1980년 5~6월 사이 The Fox를 작업하면서 작곡된 미 수록곡이다. 프랑스 갈과 그녀의 남편 마이클 배거가 엘튼 존과 작업하고 싶다면서 요청해 그해 8월 15일 프랑스 남부에서 두 곡을 녹음한 것.
  8. 대신 Donner Pour Donner는 1991년 To Be Continued...에 수록되었고, 1993년 루폴과 듀엣으로 부른 Don't Go Breaking My Heart B면에 수록되었다.
  9. 엘튼 존은 게펜과 1986년 20집 Leather Jackets과 1987년 Elton John's Greatest Hits Volume III까지 함께 했다.
  10. 음악성은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후에 재평가를 받아 저평가를 받은 수작으로 꼽히게 되었다.
  11. 1981년 4월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우에서 한 차례의 공연을 열었다. 21 AT 33 투어의 마지막 일정인지 불명.
  12. 다이애나 스펜서/찰스 왕세자 결혼식이 열리기 몇주 전인 1981년 6월 윈저 성에서 앤드류 왕자의 21번째 생일을 축하하던 공연이었다. 사운드 엔지니어 클라이브 프랭크스에 의하면, 당시 공연에서 작은 핸드백을 팔에 끼고 엘리자베스 2세필립 마운트배튼과 같이 춤을 추었다고 한다. 당시 앤 공주엘비스 프레슬리의 Hound Dog에 맞춰 춤을 추었고, 여왕은 Rock Around The Clock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고 한다.
  13. 자세한 내용은 The Fox 문서 참고.
  14. 1982년 9월에 발매된 Ball And Chain은 빌보드 록 차트 14위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1982년 9월에 영국에서만 발매된 다이애나비를 헌정하는 Princess와 1982년 11월에 발매된 All Quiet On The Western Front는 싱글 차트 진입 실패.
  15. 1984년 2월에 발매된 타이틀 트랙 Too Low For Zero는 유럽의 일부 국가에서만 진입했고, 50위 안에 진입하지 못했다.
  16. Jump Up!의 마지막 일정이라고 한다.
  17. 당시엔 바버숍 4중창 분위기의 복고적인 복장만 입고 활동했다.
  18. 1980년대는 미국보다 유럽과 영국에서 큰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1992년 23집 The One부터 다시 판매량과 차트 성적이 좋아지기 전까진 미국에서 좀 고전했다.
  19. 당시에 엘튼 존은 피아노만 연주했고, 노래는 조지 마이클이 불렀다. 이 둘은 1991년 3월 웸블리 아레나에선 듀엣으로 선보였고, 이 버전은 1991년 말에 싱글로 발매되어 세계적으로 커다란 히트를 쳤다.
  20. 1985년 Ice On Fire 투어의 앙코르였다.
  21. 1979년 A Single Man 투어 이후로 6년 만이고 밴드 투어에선 1977년 이후로 8년 만이었다.
  22. 1998년까지 13년 동안 함께했다.
  23. 1985년 6월 인터뷰에 따르면 1985년 1월에 4일 동안 18곡을 작곡했다고 설명했다.
  24. 이 곡이 당시 재즈 FM 라디오에서 약간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25. Tour De Force의 마지막 공연에서 모짜르트로 분장한 모습.깨알 같은 점
  26. 그냥 엘튼 존의 거처를 호주에 옮겨도 무방할정도로 거대한 라인업이었다.
  27. 1987년 초반에 발매된 여가수 제니퍼 러쉬와 듀엣 싱글 Flames Of Paradise, 조지 해리슨Cloud 9에서 피아노 연주, 웸블리에서 열린 록 페스티벌 공연에 두번 정도 참석한게 전부이다. 그리고 왓포드 FC 구단주 자리에서 물러나가기도 했다.
  28. 당시 영국 역사상 가장 커다란 피해 보상이었다고 한다.
  29. 본인이 오랫동안 숨겨왔던 성 정체성에 대해서 제대로 밝힌게 속편하다고.
  30. 마약의 영향으로 인해서 1990년까지 3번이나 머리가 하얗게 셌었다고 하지만, 이는 금발 염색이다 그럼에도 나이가 더욱 들어보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31. 당시 언론들과 악연에 대한 내용은 1995년 Made In England에서 나타냈다.
  32. 제목의 레지(Reg)는 엘튼 존의 본명 레지널드(Reginald)의 애칭.
  33. 그래서 Reg Strikes Back 앨범 커버가 엘튼 존의 온갖 화려한 복장들과 모자들로 가득 체워진 사진이고, 엘튼 존 본인에 관한 자전적인 의미와 당시 9월의 경매를 미리 예고하는 의미이다.
  34. 이 부츠를 전시해서 사용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35. 당시 뉴욕, 시드니, 도쿄 등의 세계 여러 군데에선 전시 판매가 가능한 사전 홍보를 받기도 했다.
  36. 사실 틀린 말은 아닌게, 이 경매 이후에도 엘튼 존은 여전히 물건들을 구매하며 엄청난 수로 모으고 있었다.
  37. 이후에도 레이블 사와 여러 크고 작은 마찰들이 있었다. 특히 2006년 29집이자 Captain Fantastic And The Brown Dirt Cowboy의 후속 앨범 The Captain & The Kid의 작품성이 아닌 오로지 상업적으로만 생각했고, 상당히 탐탁치 않게 여긴데다 홍보도 제대로 하지 못한 이유 등, 여러모로 거장 뮤지션한테 예의가 보이지 않은 Interscope 레이블 사의 만행으로 인해서 엘튼 존이 매우 분노해 'Interscope' 레이블과 계약을 해지하게 되었고, 2010년 30집이자 리언 러셀과 작업한 합동 앨범 The Union이 발매되기 전까진 앨범 작업을 하지 않았다.
  38. 미국에선 23위로 기록되어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처진 성적을 거두었다. 캐나다와 미국에선 각각 23위로 기록되었는데, 10위로 진입하지 못한 국가는 북미 뿐이었다.
  39. 유튜브에 가장 높은 조회수를 가진 엘튼 존 영상이기도 하다. 2016년 8월 시점으로 조회수가 7천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