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튼 존/1970년대

엘튼 존의 음악 경력
#!HTML " width="80%" />#!HTML " width="93%" />#!HTML " width="93%" />
1960년대1970년대1980년대
#!HTML " width="82%" />#!HTML " width="100%" />#!HTML " width="82%" />
1990년대2000년대2010년대

1 신인 스타

1.1 Elton John부터 Madman Across The Water까지 (1970~1971)

1968년 말부터 1970년 중순까지 무명에서 벗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한창 전성기를 보내던 뮤지션과 별 다를바 없을 정도로 바쁘게 지냈었다. 본인의 곡들을 작곡하면서 녹음하는 반면에 뮤지션들의 곡들을 커버하거나 세션 연주자로 참여해 피아노와 백보컬을 맡으며 활동했다.[1] 당시 잠시 유행했던 커버작들로 구성된 컴필레이션 앨범에도 참여했지만, 발매는 무산되었다.[2] 세션 연주자로 참여한 경우 중에서 예를 꼽자면 1968년 10월 23일 코미디 그룹 "배런 나이츠"의 싱글 "An Oylmpic Record"에서 피아노를 연주했고,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에 맞춰 싱글로 발매되어 영국에서 35위로 올랐다.[3] 한국에서 클리프 리처드의 곡으로 더욱 유명한 영국의 팝그룹 "Vanity Fare"의 1969년 "Early In The Morning"에서 하프시코드를 연주했다.

1969년부터 1971년까지 곡들을 작곡할때 사용된 1910년형 흰색 에이데이 업라이트 피아노[4][5]

1969년 2월엔 기타리스트 케일럽 퀘이, 드러머 로저 포프, 베이스 버니 캘버트와 결성된 연주곡을 연주하는 밴드 "Bread Beer And Band"를 결성하기도 했다. 백밴드로 만들겠다는 본인들의 야심과 달리 당시 제작된 앨범은 미리 발매된 싱글 "The Dick Barton Theme (The Devil's Gallop)"의 부진한 판매로 인해 앨범의 판매를 취소했다.[6] 그해 여름에 음반 매장에서 점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본인은 만약 가수로 성공하지 못했더라면 음반 매장을 운영했을 것이었다고.

1969년 봄부터 버니 토핀과 같이 엘튼 존의 부모님이 거주하던 런던 노스우드 힐의 아파트에서 지내면서 수많은 곡들을 작곡했다. 본인들은 서로가 곡을 쓰는 방식도 자세하게 알게 되었다고 한다. 버니 토핀이 먼저 가사를 쓰고, 엘튼 존이 가사를 보면서 거기다 멜로디를 덧붙여 곡을 작곡했고, 이러한 본인들의 방식을 더욱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이다. 안방에서 가사를 쓰던 버니 토핀이 거실의 업라이트 피아노에 있는 엘튼 존한테 가사를 전달하고나서 엘튼 존이 가사를 보면서 곡을 작곡했고, 다시 안방으로 들어가 다른 가사를 쓰는 방식으로 수많은 곡들을 썼다.[7] 이로써 서로의 협업을 더욱 확연히 느끼게 된 곡이 바로 Your Song.

엘튼 존은 버니 토핀과 곡을 이전보다 더욱 세밀하면서 탄탄하게 쓰기 시작했고, 1969년 내내 30곡을 가뿐히 넘을 정도의 수많은 곡들을 썼다.[8] 1969년 11월부터 2집을 작업할 계획을 세웠다. 2~3집으로 나눠서 수록할 정도로 많은 곡을 1969년 내내 작곡해서 남은 건 바로 앨범 작업이었다. Empty Sky의 프로듀싱을 맡은 DJM 레이블 사의 출판업자 스티브 브라운은 엘튼 존에게 '제대로 된' 프로듀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969년 11월, 런던의 로니 스코츠 클럽에서 스티브 브라운은 엘튼 존과 버니 토핀에게 편곡자 폴 벅마스터를 소개했다.[9] 스티브 브라운의 소개로 서로의 친분이 생기기 시작하여 엘튼 존은 그를 앨범의 편곡자로 영입했다.

폴 벅마스터에게 새 앨범 편곡을 제안했을 무렵 비틀즈의 프로듀서 조지 마틴에게 프로듀싱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했고, 조지 마틴도 편곡을 맡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조지 마틴은 1960년대 당시 음반업계의 전설이었고, 여러 부담감으로 인해 조지 마틴의 제안을 거절할 수 밖에 없었고, 폴 벅마스터를 영입했다. 편곡자를 영입했으니 앨범의 프로듀싱을 맡아줄 프로듀서도 찾게 되었고, 엘튼 존의 팀원이 폴 벅마스터에게 추천할 만한 인물이 있다고 물었더니 그는 이전에 같이 몇 번 작업해본 프로듀서 거스 더전을 꼽았다.[10] 거스 더전은 이미 1969년에 런던의 2층 버스에 붙어 있던 Empty Sky의 광고판과 FM 라디오에서 방영되던 Lady Samantha를 우연히 들은 계기로 엘튼 존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당시 거스 더전의 사무실은 DJM 스튜디오와 불과 5분도 안되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었고, 엘튼과 버니가 그를 만나 그 시기에 작곡된 12곡의 데모를 들려주어 큰 인상을 받게 했다.[11]

그렇게 거스 더전도 앨범 작업에 프로듀서로 합류했다.[12] 2집의 제목을 무명이던 본인의 이름을 강조하기 위해 Elton John으로 지었는데, 거스 더전의 말에 따르면 엘튼 존을 슈퍼 스타로 띄워줄려고 만든 것이 아니었고,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그의 곡들을 녹음하도록 데모를 멋지게 포장한 앨범으로 작업했다고 한다. 2집은 1970년 4월에 발매되었고, 1개월 뒤 영국에서 1970년 5월에 차트에 진입하여 5위로 기록되었다. 22주 동안 차트에 머무면서 5위까지 올라갔던 것. 처음으로 차트에 진입한 엘튼 존의 앨범이 되었지만, 1970년 여름까지만 해도 미국에선 별 반응이 없었다.

캘리포니아 웨스트 할리우드의 Troubadour 극장

무명에서 빠져나와 스타 반열에 올라간 계기

영국에서의 Elton John의 성공에 이어서 웨스트 할리우드에 위치한 유명 극장 "Troubadour"의 사장 더그 웨스톤(Doug Weston)이 엘튼 존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알아보고, 이 무명의 피아노 연주자를 불러와서 이 극장에서 공연을 진행시키라고 요청했고, 이 편지를 읽으면 즉시 그를 데리고 오라고 보냈다. 딕 제임스는 엘튼 존을 미국에 진출 시킬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무려 18개월 동안 엘튼 존에게 관심 가질 사람을 찾으려 했었다. 처음엔 별 소득은 없었지만, 마침내 뉴욕의 Uni 레이블 사와 라이센스 협정을 맺었고, 2집으로 미국에서 음반 계약을 얻었다.[13] 결정적으로 당시 유니버셜이 DJM이 소유한 밴드 아고시에도 큰 관심을 보였고, 주변의 제안으로 엘튼 존도 같이 계약을 하게 되었다. 아고시와 1만 달러로 계약했지만, 엘튼 존에겐 계약금 없이 넘겼다고 한다.[14]

그렇게 미국 진출을 앞두고 있던 엘튼 존과 버니 토핀은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에서 입국 수속을 마치고 나서 로스앤젤레스로 도착했다. 호화로운 캐딜락 리무진이 본인들을 데려다 주는 걸로 예상했던 것과 달리 정작 공항 터미널을 떠나면서 실제로 본건 런던에서 사용되던 빨간 루트마스터 2층 버스였다. 본인들은 영국적인 걸 벗어나서 미국적인 새로운 것에 경험해보고 싶었지만, 정작 보인건 영국 버스에다 영국적인 이미지가 계속 생각나는 바람에 참으로 당혹스러웠다고.[15][16] 버니 토핀 뿐 만이 아니라 1970년 3월에 3집 Tumbleweed Connection을 작업하면서 결성된 투어 밴드의 1기 멤버 드러머 "나이젤 올슨", 베이시스트 "디 머레이"를 포함한 동료들과 단체로 동행했고, 1970년 8월 25일 "Troubadour" 극장에서 대망의 첫번째 미국 공연을 앞두고 있었다. 첫날 공연 당시 엘튼 존은 나팔 청바지와 흰색 글씨로 로큰롤로 써져있던 빨간 티셔츠를 입었고, 턱수염까지 길렀었다.[17]

엘튼 존이 무려 공연의 첫번째 순서로 되어 있다는걸 보고 크게 놀라 공연 순서를 바꿔주라고 부탁했다. 무려 첫번째 순서였다는 부담감으로 크게 긴장했다고. 8월 25일 첫 공연 당시에 관중석으로 리언 러셀, 캐롤 킹, 퀸시 존스, 비치 보이스의 마이크 러브, 헨리 맨시니 등의 유명 뮤지션들이 다수 참석했고, 6일 동안 공연을 진행하면서 수많은 유명인들이 참석했다고 한다.[18] 닐 다이아몬드가 무대로 나와 엘튼 존을 소개했다. 뜨끈미지근한 반응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엘튼 존의 우려와 달리, 무대에 등장하면서부터 사방에서 어마어마한 환호와 박수로 엄청난 호응을 받았다고 한다. 그렇게 첫번째 공연을 진행하게 되면서 6일동안 이 극장에서 공연들을 진행해 미국 데뷔는 성공적이었고, 당시 로스앤젤레스의 언론에서도 칭찬 일색이었다. 무려 첫 공연부터 이어진 호평과 환대로 이전처럼 주목을 받지 못하던 무명은 가버린 듯 했었다.[19]



1970년 12월 11일 앤디 윌리엄스 쇼에서 부른 Your Song

2집에서 발매된 리드 싱글은 1970년 4월에 발매된 Border Song이고, 빌보드 100위 안에 진입한 첫번째 엘튼 존 곡이 된 업적을 누렸고, 캐나다 34위로 기록되었다. 6개월 뒤인 1970년 10월 26일에 Take Me To The Pilot이 싱글로 발매되었지만, 미국판 싱글에선 B면에 수록된 Your Song이 A면으로 수록하기 더욱 적절하다는 레이블 사의 판단으로 위치를 바꿔서 발매되어서 차트에 진입되지 못했다. 그렇게 발매된 "Your Song"은 미국 빌보드 8위, 영국 7위로 기록되어 히트를 쳐 싱글 차트 10위 안에 진입한 첫 싱글이자 처음으로 제대로된 성공을 거둔 싱글이 되었다. 특히 미국에선 골드 레코드 기록, 그래미상 올해의 음반 부문과 최우수 남성 팝 보컬 부문 후보에 오를 정도로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했고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당시 리언 러셀, 퀸시 존스, 조지 해리슨 등 뮤지션들이 엘튼 존에게 미국 데뷔를 축하하다는 전보를 보내기도 했고, 처음으로 맞이한 상업적인 성공들로 무명에서 벗어나 슈퍼 스타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1971년 8월 7일 스웨덴 고덴부르그

미국에서 본격적인 데뷔를 하고 나서 2개월 뒤인 1970년 10월에 3집 Tumbleweed Connection이 발매되었고,[20] 빌보드 앨범 차트 5위, 영국 앨범 차트 2위로 기록되어 역시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21] 2집이 커다란 성공을 거둔지 얼마 안 돼서 인지도와 상업적인 성공을 그대로 편승 시킨 것이고, 이후에 발매된 앨범들도 마찬가지로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고, 1970년 5월부터 북미와 유럽에서 투어 활동을 본격적으로 진행하기 시작했다.[22]

1970년 9월에 급하게 작업된 영화 Friends의 사운드 트랙 앨범이 1971년 3월에 발매되었고, 1972년 그래미 어워드에 후보로 올랐다. 싱글은 타이틀 트랙 Friends 한 곡만 발매되었고, 미국 빌보드 34위, 캐나다 13위로 기록해 왠만한 성적을 거두었다. 1970년 11월 17일 뉴욕A&R 스튜디오에서 진행된 공연이 1971년 4월에 라이브 앨범 17-11-70으로 발매되었고, 엘튼 존의 첫 라이브 앨범이 되었다. 미국 팝 앨범 차트에선 11위, 영국 20위, 캐나다 10위로 기록. 1971년 시점으로 데뷔한지 2년 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앨범을 무려 5장이나 발매한 상태였다.

1971년 2~8월에 작업된 4집 Madman Across The Water는 1971년 11월에 발매되었고, 미국 빌보드 9위로 기록되었지만, 영국 앨범 차트 41위로 저조하게 기록되었다. 처음으로 10위 안에 진입하지 못한 앨범이고, 영국에서 가장 실패한 앨범 중 하나가 되었다. 1971년 11월에 발매된 싱글 Levon은 미국 빌보드 24위, 캐나다 6위로 기록되어 꽤 히트쳤고, 1972년 2월에 발매된 Tiny Dancer는 빌보드 41위로 저조하게 기록되었지만, 캐나다 19위, 호주 13위로 왠만하게 기록되었다.

2 전성기

2.1 Honky Château부터 Here And There까지 (1972~1976)

1973년 3월 22일 영국 런던의 Sundown 극장[23]

최고의 전성기

1971년까지의 음악은 대부분 현악를 주를 이루고 있던 심포니 풍의 곡들로 구성되었지만,[24] 1972년 5집 Honky Château부터 , 으로 방향을 바꾸었고, 무겁고 진지했던 음악에서 더욱 가벼우면서 대중적으로 변했다. 동시에 작사작곡 역량 또한 한층 발달한 모습을 보여 호평을 받았고, Honky Château는 영국 2위, 빌보드 200 1위로 기록되어 처음으로 미국에서 1위로 기록된 앨범이 되었고,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72년 4~7월에 발매된 Honky Cat, Rocket Man이 싱글 차트 10위 안에 진입되어 히트쳤고, 특히 Rocket ManYour Song과 같이 엘튼 존의 대표곡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엘튼 존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곡이 되었다. 이 곡과 앨범으로 통해서 본격적인 전성기가 시작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1971년 Madman Across The Water에 영입된 기타리스트 데이비 존스턴이 1972년에 투어 밴드의 기타리스트로 합류해 엘튼 존의 투어 밴드의 모습도 이 시기부터 각인되고 있었다.

Honky Chateau가 차트에 오르던 시기인 1972년 6월에 다시 앨범 작업에 들어갔고, 프랑스와 영국에서 몇주간 작업된 6집 Don't Shoot Me I'm Only The Piano PlayerHonky Chateau로 한층 바꿔진 그의 음악이 팝으로 탈바꿈해 불과 1년 만에 어둡고 진지한 음악에서 밝고 경쾌한 음악으로 변했다. 그로 인해서 성공도 더욱 늘었는데, 1972년 10월(UK), 11월(US)에 발매된 싱글 Crocodile Rock은 첫 빌보드 1위 곡이 되었고, Daniel은 빌보드 2위, 영국 4위, 캐나다 1위 등 여러 국가에서 10위에 진입해 크게 히트쳤고, Don't Shoot Me I'm Only The Piano Player1973년 영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 되었다.[25]

1973년 1월 자메이카 킹스턴에서 앨범 작업을 시작했지만, 열악한 스튜디오 환경과 치안으로 인해 그해 5월 프랑스 에루빌로 거처를 옮겨 2주간 작업되었다. 1973년 10월에 발매된 7집 Goodbye Yellow Brick Road는 엘튼 존의 첫번째 더블 앨범이 되었고, 평론가들의 혹평에 불구하고 대중적으로 커다란 사랑을 받게 되어 빌보드 200 1위, 영국 1위, 각종 국가에서 5~10위 안에 진입되어 상업적으로 커다란 성공을 거두게 되었고, 1974년 후반까지 차트에 진입되어 단숨에 가장 커다란 인지도를 얻은 엘튼 존의 앨범이 되어 엘튼 존의 최고 명반 중 하나이자 대표작으로 자리를 세우게 되었다. 싱글로 발매된 곡은 Saturday Night's Alright For Fighting, Goodbye Yellow Brick Road, Candle In The Wind, Bennie And The Jets 총 4곡이며 싱글 차트 10위 안에 진입해 역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 중 빌보드 1위로 기록된 두번째 곡인 "Bennie And The Jets"와 빌보드 2위로 기록된 "Goodbye Yellow Brick Road"가 최대 히트곡. 그리고 1971년 Madman Across The Water부터 참여한 퍼커셔니스트 레이 쿠퍼는 1973년 11월부터 밴드에서 퍼커션으로 참여하여 오랜 동료가 되기 시작했다.

1973년 11월 런던의 Trident 스튜디오에서 크리스마스 싱글인 Step Into Christmas와 B면 수록곡 Ho! Ho! Ho! (Who'd Be A Turkey At Christmas)를 녹음했고, 1973년 11월 26일에 크리스마스 싱글로 발매되어 영국 24위, 빌보드 크리스마스 차트 1위로 기록되어 꽤 크게 히트쳤다. 이 곡은 2009년에 영국에서 가장 많이 재생된 크리스마스 팝송 리스트에서 상위권에 꼽히기도 했다.

크리스마스 싱글을 발매하고 2개월 뒤인 1974년 1월, 미국 콜로라도의 Caribou Ranch, Nederland 스튜디오에서 8집 Caribou를 작업했다. 당시 일본, 오세아니아 투어를 돌면서 앨범을 작업하느라 타이트했던 스케줄로 인한 스트레스로 인해 9일 안에 약 20곡을 녹음하고, 준비한거 없이 상당히 급하게 작업한 앨범이라서 본인들은 급조된 앨범이라고 별로 좋아하지 않고, 전작들에 그다지 미치지 않는 완성도를 보인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이 앨범도 빌보드 1위, 영국 1위 등 여러 국가에서 10위 안에 진입해 전작들처럼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고, 1974년 5~7월에 발매된 싱글 Don't Let The Sun Go Down On MeThe Bitch Is Back는 싱글 차트 10위 안에 진입되었다. "The Bitch Is Back"는 빌보드 4위로 기록, "Don't Let The Sun Go Down On Me"는 빌보드 2위로 기록되었고, 이 곡은 1975년 그래미 어워드에서 올해의 노래 상에 후보로 올랐지만, 노미네이트로 그쳤다.



1970년대 대표곡 중 하나인 The Bitch Is Back

Caribou는 엘튼 존이 설립한 레이블이자 대표곡 Rocket Man의 이름을 따온 로켓(The Rocket Company)에서 발매된 첫 앨범이기도 하다. 로켓 레이블은 1973년 5월에 설립되었고, 이 레이블을 통해 1960년대 남성가수 '닐 세다카'가 재기작들을 발표했으며, 영국의 여가수 '키키 디'도 로켓 레이블로 통해서 인기를 가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엘튼 존은 당시 로켓 레이블에 소속한 뮤지션이 아니었다. 엘튼 존은 1974년에 미국의 MCA 레이블에서 다섯 장의 앨범[26]을 발매하는 조건으로 800만 달러라는 커다란 금액의 계약을 맺어서 커다란 기록을 세우게 되었고, 본인 스스로 로켓에 소속해서 앨범을 발매한 것은 1976년 11집 Blue Moves부터였다.

1975년 록 오페라 영화 Tommy에 출연해 핀볼 챔피언 역을 맡았고, 더 후의 "Pinball Wizard"를 불렀다.[27] 엘튼 존 답게 화려한 복장과 안경에 4피트나 되는 거대한 부츠를 신고 나왔다. 주제가 주제다보니 굉장히 과격하면서 커다란 자부심을 가진 성격. 영화에선 주인공으로 나온 로저 돌트리와 관중들로 꽉 체워진 무대에서 게임을 하게 되었지만, 엄청난 점수차로 엘튼 존이 지게 되면서 그 충격으로 쓰러진다. 그렇게 관중들에게 야유를 받으면서 끌려가는 모습이 압권.

1975년 록 뮤직 어워드에서

1974년 11월 8일에 발매된 첫번째 컴필레이션 앨범 Elton John's Greatest Hits은 커다란 성공을 거두어 가장 많은 판매량을 가진 엘튼 존 앨범이 되었고, 연달아 생긴 상업적인 성공들로 인해 최전성기를 보내고 있었다. 정규 앨범들은 1~2개월 안에 신속히 작업되어 몇개월 씩 간격을 두어 속사포로 작업되어 발매되고 있었다. 본인의 입지도와 레이블 사와 계약에 크게 헌신했던 셈.일벌레

1974년은 또한 존 레논과 우정이 깊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엘튼 존의 초기 경력을 칭찬했던 존 레논과 1974년부터 인연이 크게 닿기 시작하여 당시 서로의 앨범에 참여했다. 존 레논이 "Whatever Gets You Through The Night"가 빌보드 1위로 기록된다면 존 레논이 엘튼 존 공연에 출연한다는 내기를 걸었고, 정말이 이 곡이 빌보드 차트 1위로 기록되자 존 레논은 1974년 11월 28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 추수감사절 날에 열린 공연에 출연해 "Whatever Gets You Through The Night",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 "I Saw Her Standing There"을 불렀고, 이 공연은 레전드가 되었다. 당시 엘튼 존은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을 커버해 1974년 11월에 싱글로 발매했고, 빌보드 1위로 기록되어 크게 히트쳤다.

미국의 유명 테니스 선수 "빌리 진 킹"과 그녀의 소속 프로팀 <Philadelphia Freedoms>을 헌정하는 내용을 담은 필라델피아 소울 넘버 "Philadelphia Freedom"이 1975년 2월에 싱글로 발매되었고, 빌보드 1위로 기록되어 크게 히트쳤다. 이 곡은 빌보드 R&B 차트에서 꽤 히트쳤기 때문에 "Bennie And The Jets"와 더불어서 1975년 5월 17일 "Soul Train"[28]에 출연해서 불렀었고, 처음으로 소울 트레인에 출연한 백인 뮤지션이 되기도 했다.



1975년 5월 17일 Soul Train에 출연해서 부른 Philadelphia Freedom

Caribou가 발매된 시기인 1974년 6월부터 7월까지 Caribou를 작업했던 콜로라도의 "Caribou Ranch" 스튜디오와 Nederland 스튜디오에서 9집 Captain Fantastic And The Brown Dirt Cowboy을 작업했고, 1960년대 말 본인들의 무명에 대한 자서전 앨범으로 작업했다. 이 앨범은 대중과 평론가들에게 커다란 호평을 받았고, 1972년 5집 Honky Chateau와 같이 가장 높은 평가를 받은 앨범이자 Goodbye Yellow Brick Road와 더불어 최고의 명반으로 꼽히게 되었다. 상업적으로도 크게 성공했는데 역사상 최초로 빌보드 200 차트 데뷔 1위로 기록된 앨범이 되어 7주 동안 머물었다. 다른 국가들에서도 앨범 차트 5~10위 안에 진입되었고, 영국에선 2위로 기록되어 9주 동안 머물었고, 1976년 그래미 어워드에서 올해의 앨범 부문에 노미네이트[29], 최고의 남성 보컬 부문에서도 노미네이트되었다. 싱글은 "Someone Saved My Life Tonight" 단 한 곡 뿐이었지만, 캐나다 2위, 빌보드 4위로 기록.

1975년부터 투어 밴드 라인업에 변화가 생겼다. 1970년부터 함께했던 1기 멤버 디 머레이, 나이젤 올슨을 해고했고, Empty Sky부터 Madman Across The Water까지 참여한 초기 세션들 드러머 "로저 포프", 베이시스트 "케니 파사렐리", 기타리스트 "케일럽 퀘이"[30]를 영입, 키보드이자 지휘자인 "제임스 뉴튼 하워드"를 영입했다. 당시 엘튼 존은 본인의 밴드에서 더욱 강력하면서 새로운 사운드를 원해 1975년 초에 나이젤과 머레이를 해고시키고 다른 동료들을 영입한 것. 새로 영입된 세션을 제외한 데이비 존스턴과 레이 쿠퍼는 그대로 남았다.[31] 이 라인업은 1975년 6월 21일 웸블리 스타디움 공연에서 처음 선보였고, 1975년 6~7월에 작업되어 10월에 발매된 10집 Rock Of The Westies에 참여했다.[32]

이 앨범도 Captain Fantastic And The Brown Dirt Cowboy처럼 빌보드 200 차트에서 데뷔 1위로 기록되었고, 마찬가지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리드 싱글 "Island Girl"은 빌보드 1위로 기록되었고,[33] "Grow Some Funk Of Your Own", "I Feel Like A Bullet In The Gun Of Robert Ford"가 각각 1976년 1월 12일에 발매되어 빌보드 14위, 캐나다 8위로 동일한 성적을 거두었다.

1975년 10월 25일 다저 스타디움

1975년 10월 25~26일 다저 스타디움에서 두개의 공연을 열었고, 비틀즈 이후 처음으로 다저 스타디움에서 공연을 진행한 뮤지션이 되었다. 무려 50,000명 이상이나 참석했고, 열기가 아주 뜨거웠다. 다저 스타디움 공연은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어 당시의 실황과 현장이 고스란히 담겨졌다. 엘튼 존 본인이 진행한 공연들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과 함께한 공연들 중 하나라고 했다.[34]

1976년 5월에 두번째 라이브 앨범 Here And There가 발매되었고, 이 앨범에선 1974년 5월 18일 런던 로열 페스티벌 홀과 1974년 11월 28일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의 실황을 담았다. 런던에서 부른 라이브 버전의 Love Song이 1976년 4월에 싱글로 발매되어 빌보드 어덜트 컨템포러리에서 18위로 기록되었다. 1973년 3월 캐나다와 런던, 로스앤젤레스에서 11집 Blue Moves를 작업했고, Goodbye Yellow Brick Road에 이은 두번째 더블 앨범이 되었다. 앨범 작업 1개월 뒤인 1976년 4월 29일 영국 리즈부터 <Louder Then Concorde Tour (But Not Quite As Pretty!)> 투어를 진행했고, 8월 17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까지 4개월 동안 영국스코틀랜드, 미국에서 진행했다. 1975년 라인업과 마지막으로 함께한 투어이기도 하다.



Don't Go Breaking My Heart 프로모 비디오

1976년 6월에 영국의 여가수 "키키 디"와 듀엣으로 부른 "Don't Go Breaking My Heart"가 1976년 6월 21일에 싱글로 발매되었고, 빌보드 1위, 영국 1위, 캐나다 1위, 호주 1위 등 다수의 국가에서 싱글 차트 1~5위 안에 기록되어 막대한 성공을 거두었고, 영국에서 처음으로 1위로 기록된 엘튼 존 곡이 되었다. 미국에선 골드로 기록했고, 곧 엘튼 존의 가장 큰 1970년대 히트곡이 되었다.

1972년 이후로 꾸준히 빌보드 앨범 차트에서 1위로 고수하고 있었고, 왕성하게 이어진 투어 활동으로 인해 6년 동안 무려 500회의 공연을 진행, 5년 연속 골드 레코드 기록 상, 1975년 10월 21일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입성하는 등 막힘 없이 이어지던 성공으로 화려한 전성기를 보내고 있었고, 대중은 이 시기를 엘튼 존의 시대라고 평했다.[35] 1976년에도 변함없이 이어지던 성공들로 모든 면에서 완전히 절정을 찍었고, 누구도 부정할수 없을 정도의 커다란 거물이었다. 하지만 1975년부터 개인적인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점차 내리막길을 걸었다.

3 커밍아웃은퇴 선언 (1976~1977)

1976년 10월 7일에 발행된 엘튼 존의 커밍아웃 인터뷰가 실린 롤링 스톤

침체기의 서막

1970년 이후로 한 번도 쉬지 않고 이어왔던 왕성한 활동[36]으로 인해서 음악 활동에 흥미를 잃어 커다란 피로와 번아웃 증후군을 앓았고, 심리적인 부담들로 인한 불안장애로 한동안 고생했다. 1975년 10월 21일 오클랜드 공연 바로 다음 날인 1975년 10월 22일, 로스앤젤레스에 위치했던 본인의 맨션에서 신경안정제 60알을 삼키고 실내 수영장으로 뛰어들어 자살을 시도했고,[37] 마약을 하기 시작했다.

버니 토핀의 아내 맥신 파이벨만이 1975년에 집을 나가 밴드의 베이시스트 케니 파사렐리와 살림을 차렸고, 이로 인해 버니 토핀은 술을 더욱 가까이 해 한동안 알코올 중독으로 고생하기도 했다.[38] 결국 1976년 초에 이혼을 했고, 이에 대한 원망을 품은 가사를 상당수 썼다. Blue Moves의 대부분 수록곡들이 당시 버니의 감정을 노골적으로 반영하고 있고, 특히 Blue Moves의 11번 트랙 "Between Seventeen And Twenty"에서 확연히 알 수 있다.[39] 엘튼 존은 <Louder Than Concorde> 투어를 마치고, Blue Moves가 발매되기 전인 1976년 10월 7일 롤링 스톤에서 개인적인 얘기를 털어놓는 인터뷰에서 양성애자 커밍아웃했다.[40]

갑작스러운 커밍아웃으로 인해 화제를 일으켰고, 한동안 앨범과 싱글의 판매량이 크게 줄어진 원인이 되었다. 커밍아웃을 하고 몇주 뒤 10월 22일에 Blue Moves가 발매되었지만, 빌보드 200에서 3위, 영국 3위로 기록되었다. 여러 국가에서 10위 안에 진입하긴 했지만, 1위로 기록된 국가는 없었고, 1972년부터 4년 간 1위의 자리를 빼앗겼다. 차트 성적, 판매량 등으로 전작들에 비해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거기다 이 앨범은 발매 당시 혹평을 받았고, 대중들의 반응도 시원치 않아 처음으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앨범이 되었다. 대중적인 요소들로 체워진 전작들에 비해 이 앨범은 실험적이면서 비대중적으로 작업된 면이 크고, 대부분 우울한 분위기의 진지한 곡들에 대중적으로 큰 반응을 끌만한 곡들이 드물었다. 거기다 커밍아웃의 영향까지 합쳐 악재가 되었던 것.[41]

수록곡들 중에서 그나마 대중성이 큰 "Sorry Seems To Be The Harest Word"는 1976년 11월 1일에 싱글로 발매되어 빌보드 6위, 영국 11위로 기록되었지만, 차트 정상을 차지했던 이전 싱글들에 비하면 처져진 성적. 거기다 1977년 1~2월에 이어서 발매된 "Crazy Water", "Bite Your Lip (Get Up And Dance!)"도 싱글 차트 20~30위 안에 기록되어 한동안 차트 성적이 시원치 않았었다. 1977년은 엘튼 존에게 1981년과 같이 성공을 맛보지 못했던 해 중 하나였고, 1977년 9월에 발매된 컴필레이션 앨범 Elton John's Greatest Hits Volume II도 상업적으로 부진했다.

1977년 11월 3일 웸블리 아레나 공연의 리허설

1960년대 말부터 거의 10년간 이어온 음악 활동을 멈추었고, 화려한 복장과 선글라스를 두고 어두운 색안경과 칙칙한 복장, 베레모에 금발 가발을 착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6년부터 구단주로 활동하기 시작했던 왓포드 FC에서 더욱 크게 집념하기 시작했다. 1977년 4월에 왓포드 FC를 헌정하는 노래 "The Goaldigger's Song"이 자선 싱글로 발매되었고,[42] 1977년 5월 2~7일 런던의 Rainbow 극장에서 레이 쿠퍼와 2인조 투어를 진행, 특별한 장소에서 작은 공연을 열거나 다른 가수의 공연에 찬조출연하기도 했다.[43]

1977년 10월 필라델피아, 시애틀에서 필라델피아 소울, 디스코가 크게 가미된 The Thom Bell Sessions를 작업해 "Nice And Slow", "Country Love Song", "Shine On Through"[44], "Mama Can't Buy You Love", "Are You Ready For Love" 총 6곡을 필라델피아 소울 계의 전문 작곡가들과 작곡하면서 녹음했지만, 녹음 작업이 원활하게 진행하지 못해 불만족스럽다고 여겨 그 해에 발매되지 못했고, 1979년에 EP로 발매되기 전까진 2년 간 보류해 두었다.

이 시기의 음악 활동도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고, 1977년 한 해를 왓포드 FC의 구단주, 공연 활동으로만 이어가다가[45] 1977년 11월 3일[46] 영국 웸블리 아레나에서 데이비 존스턴의 그룹 밴드 "China"[47]의 멤버들로 급히 밴드를 차려 공연을 열었다. 이 공연은 불우 아동을 위한 축구 시설 건립에 힘쓰는 자선단체 클럽을 위한 자선 공연이다.[48] 키키 디가 참석해 "Don't Go Breaking My Heart"을 불렀고, 스티비 원더가 공연의 마지막에 참석해 "Bite Your Lip (Get Up And Dance!)"을 같이 불렀다. 그런데 엘튼 존은 "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를 부르기 전에 피아노를 연주하면서[49] 돌발 은퇴선언을 했다.

"여러분에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을 꺼내기가 몹시 힘들군요. 오랫동안 공연을 돌지 못했고 다시 무대로 돌아갈지말지 결정하느라 힘들었습니다. 오늘 밤 아주 즐겁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나의 공연활동을 모두 접기로 했습니다. 이해하시겠죠? 공연을 도는 것 말고도 나에게 종요한 일이 많습니다. 공연은 이제 하고 싶지 않습니다.[50]

이는 음악 활동을 잠시 멈추고 다른 활동에 집념하다가 나중에 돌아온다는 의미라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이후 인터뷰에서 당시 힘들었던 상황에 대한 회고를 들어보면 정말로 그만둘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이날 엘튼 존은 화려한 복장들과 대비되는 베레모에 어두운 선글라스, 검은색 가죽 자켓을 입으며 공연을 진행했고, 평소와 달리 어떠한 농담도 없이 차분하게 공연을 진행했다.[51] 거기다 이 은퇴선언은 엘튼 존 본인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엘튼 존의 돌발선언을 듣고 동료들은 충격을 받았다.[52]

1970년부터 함께한 엘튼 존의 동료들 대부분 떠났고, 심지어 버니 토핀과 이 시점부터 결별했다. 1967년 이후 10년 동안 협업을 맺었으니 자연스레 헤어질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것이다.[53] 엘튼 존도 음악 활동을 중단함으로서 점차 내리막길로 향하고 있었다. 결국 본인이 좌초한 것이지만, 위기가 상당히 빨리 찾아왔던 셈. 이로써 4년 간 이어졌던 전성기는 막을 내렸고, 소위 말하던 엘튼 존의 시대는 끝났다고 해도 무방했었다. 사실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한다.#

3.1 A Single Man부터 Victim Of Love까지 (1978~1979)

웸블리 공연 이후 4개월 뒤인 1978년 3월 21일에 컴백 싱글 "Ego"가 발매되었다. 비싼 돈을 들여 뮤직비디오도 제작되었지만, 이 곡은 영국 34위, 미국 34위로 저조한 성적을 거두어 큰 반응을 모으지 못했다. 이후 엘튼 존은 1978년 3월부터 "Ego"를 녹음한 영국 버크셔 주의 "Mill" 스튜디오에서 8월까지 12집 A Single Man를 작업했다. 버니 토핀은 1977년에 떠났기에 1960년대 말부터 알고 지냈던 작사가 "개리 오스본"을 영입해 버니 토핀 대신에 엘튼 존의 작사 파트너로 맡아 가사를 쓰기 시작했다.

반년 정도 천천히 작업된 A Single Man은 1978년 10월에 발매되었고, 미국 15위, 영국 8위로 기록되었다. 미국에선 10위 안에 진입하지 못한 첫 앨범이 되었고, 북미와 영국에선 성공적이었던 전작들에 비해 처진 성적을 거두었지만, 유럽에선 좋은 반응을 얻었다.[54] 싱글은 "Part-Time Love"[55] "Song For Guy"[56]가 발매되었고, "Part-Time Love"는 빌보드 21위, 영국 15위로 기록되었다. "Song For Guy"는 영국에서 4위로 기록, 유럽의 여러 국가에서 크게 히트치게 되어 침체기 기간때 가장 큰 성공을 거둔 곡 중 하나가 되었다.[57]

1978년부터 화려한 복장과 안경을 내려두었고, 1977년에 이어서 칙칙한 옷과 베레모를 착용했다. 기존의 이미지 탈피를 위한 시도였다고.[58] 그리고 창법도 약간 바꿔지기 시작했다. The Thom Bell Sessions을 작업하던 시기에 프로듀서 "톰 벨"은 엘튼 존에게 너무 높게 부른다는 이유로 보컬 톤을 좀 낮추라고 조언했고, 엘튼 존 본인도 너무 높게 부른다는 점을 인지하여 톰 벨에게 잠시 보컬 레슨을 받았다. 특유의 하이톤 보컬은 여전했지만, 1976년에 비하면 톤이 약간 낮다. 좀 더 깊으면서 소울 있는 창법으로 불렀다. 이전에 사용할 일이 거의 없었던 깊은 보컬을 이 시기부터 사용하기 시작해 1980년대부터 제대로 적용하기 시작했다.

1977년 11월 3일 웸블리에선 다신 공연을 하고 싶지 않다고 선언했지만, 다행히 이후 생각을 바뀌어 약 1년 뒤인 1978년 10월 14일 뉴욕과 10월 20일 프랑스 파리에서 작은 공연을 열었다. 무대에서 진행하는 투어 활동을 다시 본격적으로 열기 시작한 건 1979년부터였다. 퍼쿠션 레이 쿠퍼와 같이 피아노 반주에 타악기가 들어가는 독특한 형식의 2인조 투어를 열었고, A Single Man의 이름을 사용한 투어를 진행했다.[59] 1979년 2월 5일 스웨덴부터 시작해서 1979년 12월 7일 호주 퍼스까지 10개월 동안 진행되었고, 유럽, 북미, 오세아니아를 돌아다니면서 200개의 공연을 진행했다.[60] 1979년 5월엔 이스라엘소련에 처음으로 순회 공연을 진행한 서양 뮤지션이 되기도 했다. 소련에선 5월 20일부터 28일까지 머물었고, 당시 공연의 일부분 실황과 8일간 지내는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가 방영되었고, A Single Man이 "Elton John Sings' In Russian"로 제목이 수정되어 발매되기도 했다. 소련에서 발매된 첫 서양 뮤지션의 앨범인 셈.[61]



1970년대 마지막 히트곡 Mama Can't Buy You Love

1977년 9월에 작업되었지만, 불만족스러운 사운드로 인해 2년 간 보류하고 있던 The Thom Bell Sessions을 사운드 엔지니어 클라이브 프랭크스와 같이 프로듀싱을 맡아 리믹스했고, 1979년 6월에 "Are You Ready For Love", "Mama Can't Buy You Love", "Three Way Love Affair" 총 3곡으로 수록된 EP로 발매되었다. "Are You Ready For Love", "Mama Can't Buy You Love"은 1979년 4월, 1979년 7월에 각각 싱글로 발매되었다. "Are You Ready For Love"는 영국에서 44위로 저조하게 기록되었지만, "Mama Can't Buy You Love"는 빌보드 9위, 캐나다 10위, 뉴질랜드 20위, 빌보드 어덜트 컨템포러리 1위로 기록되어 꽤 히트쳤다. 이 곡은 1980년 그래미 어워드에서 최고의 R&B 보컬 부문에 올랐지만, 노미네이트에 그쳤다. 참고로 1977년에 녹음된 나머지 3곡 "Nice And Slow", "Country Love Song", "Shine On Through"[62]은 1989년 2월에 확장판 The Complete Thom Bell Sessions로 발매되기 전까진 12년 동안 미발매로 보류되었다.[63]

투어 활동을 잠시 중단한 1979년 8월부터 새 앨범들 작업에 들어갔는데, 독일 뮌헨의 Musicland 스튜디오에선 13집 Victim Of Love, 프랑스 니스의 Superbear 스튜디오,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Sunset Sound 스튜디오에선 14집 21 AT 33을 작업했고, 서로 같은 기간에 작업되었다. Victim Of Love은 처음으로 엘튼 존이 작곡에 참여하지 않았고, 실베스터 르베이 등의 전문 작곡가들이 곡을 작곡했다. 디스코 열풍에 철저히 따라간 사운드로 작업되었지만, 상업적으로 크게 실패했고, 극악스러운 완성도로 인해 역대 엘튼 존 앨범들 중에서 Leather Jackets와 같이 최악의 앨범으로 꼽히게 되어 흑역사로 자리 잡았다. 1979년 11~12월에 타이틀 트랙 "Victim Of Love", 척 베리의 대표곡을 디스코로 망친커버한 Johnny B. Goode가 싱글로 발매되었고, "Victim Of Love"는 빌보드 33위로 기록, Johnny B. Goode는 차트 진입에 실패했다.
  1. 1969년부터 1970년까지 녹음한 커버곡들이나 세션연주자로 참여한 곡들은 무려 30곡에 달한다. 당장 유튜브에서 검색하면 많은 영상들이 나온다. 1970년 1~3월 2집 Elton John, 3집 Tumbleweed Connection 작업 이후에도 커버곡들을 녹음했다. 예를 들어 1970년 2월에 비지스의 Don't Forget To Remeber Me를 커버하거나 사이먼 앤 가펑클Bridge over The Troubled Water를 커버했다.
  2. 이 앨범은 1994년에 뒤늦게 발매되었다.
  3. 당시 애비로드 스튜디오에서 녹음했었고, 같은 날에 폴 매카트니와 만나기도 했다. 당시 폴 매카트니가 피아노에 앉아 Hey Jude를 부르는 것을 라이브로 봤다고.
  4. 엘튼 존은 1972년 5월에 당시 살던 아파트의 이웃에게 이 피아노를 주었다. 이후 이 피아노는 영국의 한 박물관에 보존되었다.
  5. 엘튼 존과 버니 토핀은 피아노에 이런 말을 써놨다. "브라이언, 나네트, 새러와 에마에게 사랑을, 엘튼 존, 1972년 5월 31일, 많은 성공을 함께한 오리지널 피아노입니다. 이 피아노 안에는 100곡의 노래 유령들이 있어요. 그들을 잘 보살펴줘요. 그들은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행운이 함께하길, 노래 가사를 쓴 버니 토핀."
  6. 당시 프로듀싱을 맡은 프로듀서 크리스 토머스는 1981년 15집 The Fox부터 참여해 17년 간 엘튼 존의 프로듀서로 활동하기도 했다.
  7. 이에 대한 내용으로 쓴 곡이 1975년 9집 Captain Fantastic And The Brown Dirt Cowboy의 8번 트랙 Writing.
  8. 이 시기에 1970년 2집 Elton John의 모든 수록곡들이 작곡되었고, 3집 Tumbleweed Connection의 절반 정도의 곡들이 이때 작곡되었다.
  9. 당시 뛰어난 재능을 가졌던 영국의 프로듀서였고, 마일스 데이비스와 친분도 있었다. 거기다 그가 4살때 엘튼 존이 다녔던 영국왕립음악원에 다녔었다.
  10. 데이비드 보위의 "Space Oddity"에 거스 더전과 함께 참여해 편곡과 프로듀싱을 맡은 바 있다.
  11. 당시 거스 더전은 본인이 찾고 원하던 뮤지션을 드디어 찾게 되었다고 했고, 모든 곡들이 놀라웠다고 한다. 하지만 처음에 아무도 소개해주지 않아서 이 둘을 헷갈려 했었고, 버니를 엘튼, 엘튼을 버니로 생각했다고.
  12. 그 결과 거스 더전은 엘튼 존의 대부분의 1970년대 앨범에 프로듀싱을 맡은 프로듀서로 크게 활약했고, 엘튼 존의 대표적인 프로듀서라는 이미지가 강해졌다.
  13. Uni 레이블의 사장 래리 우탈은 Empty Sky를 그냥 넘겼다. 이로 인해서 1집이 1975년에 뒤늦게 발매된 것.
  14. 당시 유니버셜은 아고시에 더 큰 관심을 가졌지만, 아고시는 그 후로 소리소문 없이 사라진 밴드가 되었다.안습.
  15. 그리고 버스에선 '엘튼 존 도착'이라고 적혀있는 현수막도 걸려 있다고 한다. 지나가던 일부 사람들은 변기 광고로 착각했다고(...).
  16. 이는 2006년작 Postcards From Richard Nixon에서 묘사되었다.
  17. 이때 당시의 모습을 촬영된 사진들 중에서 한 장을 1972년 5집 Honky Chateau의 표지로 사용했다.
  18. 해당 공연은 풀버전 영상이 없고, 다큐멘터리에 수록된 짧은 영상 밖에 없다. Sixty Years On 라이브.
  19. Empty Sky는 당시 미국에 발매되지 않았고, 1975년 1월에 발매되기 전까진 2집 Elton John이 그의 데뷔 앨범이라고 생각한 미국인들이 많았다. 참고로 엘튼 존은 1975년 8월에 이 극장에서 미국 데뷔 5주년으로 며칠간 공연을 진행하기도 했다.
  20. 1970년 3월에 작업되었고, Elton John이 작업되고 2개월 뒤에 작업 되었다. 미국에선 1971년 1월 발매.
  21. 이때 발매된 싱글은 단 한 곡도 없다. Country ComfortLove Song이 프로모션 싱글로 발매되긴 했지만, 정식으로 발매된 것은 아니다.
  22. 1970~1971년 동안 무려 200개의 공연들을 진행했다.
  23. 영상으로도 남아있는데, 보다시피 여성팬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1973년 당시 엘튼 존이 십대 아이돌였다고 할 수 있는 부분.
  24. 이 시기엔 글램 록 뮤지션으로 분류되기도 했다.
  25. 당시 싱글로 발매되지 않은 Teacher I Need You, Elderberry Wine 등의 수록곡은 1973년 미국의 여러 FM 라디오에서 한동안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도 했었다.
  26. Caribou, Elton John's Greatest Hits, Captain Fantastic And The Brown Dirt Cowboy, Rock Of The Westies, Here And There.
  27. 엘튼 존이 커버한 버전은 2년 뒤 1976년에 싱글로 발매되었다.
  28. 70년대 초반부터 방송된 흑인음악 전문 프로그램이고 노래에 맞춰서 스테이지 위에서 많은 흑인들이 춤을 추는 것이 특징. 흑인 음악에만 관련되는 프로그램에서 백인 뮤지션이 출연했다는 건 당시 시점으로 꽤 이례적이었다.
  29. 빌보드 앨범 차트에서 최초로 데뷔 1위로 기록된 기념적인 앨범인데 겨우 노미네이트에 그친게 말이 되냐는 원성도 있었다.
  30. 1967년부터 1971년까지 함께했던 초기 동료
  31. 나이젤과 머레이는 5년 뒤 1980년 21 AT 33 투어로 다시 합류했다.
  32. 이 라인업으로 1975년 8월부터 10월 26일까지 Captain Fantastic And The Brown Dirt Cowboy, West Of The Rockies 투어를 진행했다.
  33. 이 곡이 1위로 기록되기 전에 1위였던 곡이 닐 세다카의 Bad Blood인데, 이 곡은 엘튼 존이 작곡해준 곡이다.팀킬
  34.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참석한걸로 알려진 공연들은 1980년 9월 센트럴 파크의 400,000명, 1982년 7월 세인프 폴의 760,000명 공연이 있다.
  35. 1975년 당시 전세계 음반 판매량의 2%가 엘튼 존의 몫이었다.
  36. 정규 앨범 작업 뿐만이 아니라 다른 뮤지션들에게 약 30곡 정도 되는 곡들을 쓰거나 피쳐링도 많이 했었다. 무명이었던 60년대 말부터 세션 뮤지션으로 바쁘게 지내왔었고, 전성기를 보내던 시점에 정말 왕성하게 활동했기 때문에 과장하자면 10년 정도의 경력을 5년 안에 해치운 것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37. 10월 21일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이름이 걸린지 바로 다음 날이었고, 10월 25~26일 다저 스타디움 공연이 진행하기 며칠 전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엘튼 존 문서의 '건강' 항목 참고.
  38. 케일럽 퀘이에 의하면, 당시 스튜디오에서 버니와 케니 둘 사이에 긴장감이 있었는지 잘 몰랐다고 했지만, 당시 버니 토핀이 술을 더욱 과하게 마셨고, 평소보다 말수가 줄었다고 한다. 결국 버니 토핀은 70년대 말에 알코올 중독 때문에 요양원에서 잠시 요양하기도 했다.
  39. 그런데 버니 토핀은 그 이후에도 케니 파사렐리와 친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고.상남자
  40. 동성애자가 아니라 양성애자로 커밍아웃을 했던 이유는 2000년대 후반의 디테일즈 인터뷰에서 밝히길, 당시엔 커밍아웃의 필요를 느끼면서도, 동성애자라고 밝힌다는 건 한창 누리던 전성기에 가는 타격이 너무 클까봐 한편으로 두려웠기 때문에 저지른 비겁한 과오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1978년 인터뷰에선 엘튼 존이 스스로 양성애자인 면이 있다고 했고, 자신보다 연상의 여성에 매력을 느낀다고 밝혔다.
  41. 이후 재평가를 받는 추세이고 뛰어난 음악성을 담은 엘튼 존의 명반으로 평가받는다.
  42. 이 곡은 11월 3일 웸블리 공연에서 부르기도 했다.
  43. 1977년 9월 센트럴 파크에서 진행된 키키 디 공연에 출연해서 "Don't Go Breaking My Heart"를 불렀다.
  44. 1976년 3월 Blue Moves를 작업하면서 작곡된 곡이고, 가사가 없고 멜로디만 있던 미완성곡이었다. 톰 벨과 작업하면서 개리 오스본이 마저 가사를 작사해서 완성했다.
  45. 10월 말에는 더 머펫 쇼에 출연하기도 했다.
  46. 1일 전인 11월 2일에는 아르헨티나의 팝 가수 크리스 디 버그가 여기서 공연을 진행했다.
  47. 데이비 존스턴은 1973년부터 로켓 레이블에서 솔로 활동을 잠시 하기도 했었다.
  48. 그래서 이 공연에서 엘튼 존이 왓포드 FC를 헌정하는 의미로 "The Goaldigger's Song"을 부른 것이다.
  49. 이때 Don't Let The Sun Go Down On Me의 선율을 연주한 것으로 보인다.
  50. 관객들은 "안된다"면서 "돌아오라고" 소리쳤다.
  51. 당시 경호원 중 한명이 한 관객에게 엘튼 존은 기분이 아주 안좋으니 말을 걸지 말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52. 위 사진만 봐도 엘튼 존만 얼굴이 어둡다. 엘튼 존의 은퇴선언으로 인해 이 공연을 끝으로 결성된 밴드는 하루 만에 해산했다.
  53. 사실 Blue Moves 발매 이후로 버니 토핀과 사이가 조금 소원해져 1977년에는 둘이서 작업한 곡이 Nice And Slow 하나 밖에 없다. 버니 토핀은 1977년 여름부터 1978년까지 앨리스 쿠퍼와 협업을 가졌다.
  54. 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가 1976년 당시 유독히 유럽에서 큰 반응을 모은 곡이고, 프랑스에서의 인지도도 70년대 말부터 커지기 시작했다. 12집은 프랑스에서 2위로 기록되었고, 1979년 초에 발매된 Return To Paradise가 프랑스 싱글 차트 2위로 기록되었다는 말이 있다. Song For Guy는 프랑스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엘튼 존 곡들 중 하나.
  55. 처음으로 싱글로 발매된 개리 오스본 작사의 곡이다.
  56. 엘튼 존의 첫 연주곡 싱글이기도 하다.
  57. 영국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엘튼 존의 싱글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미국에선 빌보드 110위로 기록되어 처음으로 100위 안으로 진입되지 못한 싱글이 되었다.
  58. 베레모는 1979년까지 착용했지만, 그 후로 다시 쓰지 않았다. 1978년부터 1984년까지 거의 안경을 착용 안한 채 활동했지만, 가끔씩 안경을 착용한 경우도 있었고, 1985년부터 다시 안경을 착용하기 시작했다.
  59. 1977년 5월 1~7일 영국 런던에서 먼저 이런 식으로 진행한 적 있었다.
  60. 그리스, 덴마크, 서독, 동독, 네덜란드, 벨기에, 스위스, 스페인, 아일랜드 등의 거의 가본적 없거나 한번도 가보지 않은 나라에서 공연들을 진행했었다. 9~11월 미국에서 투어를 진행했을땐 Back In The USSA로 표기 되었다.
  61. 수록곡 Big DipperPart-Time Love이 각각 동성애, 간통에 관련된 가사로 인해서 금지곡으로 처리되었지만, "Part-Time Love"은 당시 투어의 레파토리였고, 소련 공연에선 제외하지 않았다.
  62. 이 곡은 예외로 1978년에 재녹음되어 12집 A Single Man에 수록했다.
  63. Nice And Slow는 로켓 레이블 사의 여가스 룰루가 1978년에 커버한 버전으로 먼저 공개된 적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