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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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A 타이거즈의 캡틴!

KIA 타이거즈 No.25
이범호 (李杋浩 / Lee Bum-ho)
생년월일1981년 11월 25일
신체182cm, 93kg
출신지경상북도 의성군 [1]
출신학교수창초-경운중-대구고-목원대
포지션3루수, 1루수, 유격수[2], 4루수
투타우투우타
프로입단2000년 한화 이글스 2차 1라운드(전체 8순위)
소속팀한화 이글스 (2000~2009)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2010)
KIA 타이거즈 (2011~ )
등장곡리쌍 - YES OK
응원가한화 시절 : 클론 - '발로차'[3]
현재 : 유정석 - '질풍가도'[4]
- '열혈남아'[5][6]
Gipsy Kings 'Volare'[7]
군 복무병역특례
수상 기록

2005년, 2006년 한국프로야구 3루수 골든글러브 수상자
보유 기록
한국프로야구 통산 최다 만루홈런[8][9]
KIA 타이거즈 역대 주장
김상훈
(2013)
이범호[10]
(2014~)
재임중

1 소개

노 타이틀 꾸준함의 대명사[11][12]
기아의 전설의 클린업상상 속 동물 LCK포의 마지막 남은 타자[13]
야구의 꽃인 만루홈런의 꽃 고로 한국 야구의 꽃
KIA 타이거즈3루수.4루수

한화 시절 별명은 '꽃보다 아름다운 범호(줄여서 꽃범호)', '한화의 매력남', '월드추남'[14] 등이 있다. 개그 콘서트오지헌을 닮은 외모를 가지고 있어 붙은 별명들.그리고 묘하게 이분도 닮았다. 본인도 컴플렉스를 느끼는 듯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꽃범호'라는 별명은 이범호를 놀리는 것이 아닌 팬의 애정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화의 매력남이라는 별명은 이범호 전용 응원문구에서 따 온 별명이다.(한화의 매력남은 누구? 이범호!) 웬만한 야빠들 사이에선 이라고만 해도 다 알아듣는다. 홈 경기에서 장내 아나운서 MC이슈의 소개문구는 응원가에도 등장하는 '파워히터'.

등번호는 56번 - 31번 - 7번(이상 한화) - 8번(소프트뱅크 호크스) - 25번(KIA). 1회 WBC 때는 55번을, 2차 WBC에서는 6번[15]을 달았다. 2011년에 KIA 타이거즈와 계약하면서 KBO에 복귀하여 수많은 한화 팬이 이범호 안티로 돌변했다.[16] 그뒤로 이용규가 한화로 이적하자 도찐개찐이 되었다.

한화 이글스에 있을 당시에는 <발로 차>를 개사해서 이범호! 이범호! 한화의 이범호! 로 불렀다. 또, 드라마 '꽃보다 남자'가 방영할 당시에는 이범호가 타석에 들어서면 '꽃보다 남자'의 주제곡을 틀기도 했다. KIA 타이거즈에 입단한 2011년부터는 전용 응원가로 Volare와 질풍가도를 개사해서 총 2개의 응원가를 쓰고 있다.

여태까지 한국프로야구에서 해외 진출을 했을 시 진출 이전 소속팀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범호가 그런 경우를 깬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그리고 2016년까지도 원소속 팀이 아닌 타 팀으로 돌아온 유일한 사례이기도 하다.[17] 게다가 타팀 출신 최초의 타이거즈 주장, 타지역출신 최초의 타이거즈 주장 등 최초로 V10을 달성한 타이거즈 내에서도 굵직한 족적을 남긴 선수. 영호남화합의 일등공신

2 플레이 스타일

역대 통산 만루홈런 1위
역대 3루수 통산 홈런 1위
거포임에도 삼진을 적게 당하면서 상대투수를 곤란하게 만드는 타자

너무 뛰어난 외모 덕분에 실력이 얼굴에 묻힌다.
너무 잘생긴게 죄라면 그는 사형

잡아당기는 타격을 장기로 구사하며 공격적인 스윙을 하기 때문에 타율은 약간 낮고 특히 병살타가 많은 편이지만[18] 평균 수치를 월등히 상회하는 장타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2004 시즌 이후에 꾸준히 20홈런 이상을 찍어주는 활약을 보이고 있다. 다만 2008 시즌에 19홈런을 기록하면서 5년 연속 20홈런에는 실패하였다. 그래도 특별히 큰 부상만 없다면 한 시즌 20홈런 안팎은 보장할 수 있는 강타자로 김태균과 함께 통산 300홈런 달성이 가능한 타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36살 시즌에 맞은 제2의 전성기로 결국 2016 시즌에 통산홈런에서 김태균을 역전했다!

특히 플레이오프 등 주요 경기에서 한방 쳐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 많은 투수들이 두려워하는 선수다. 통산 준플레이오프 최다 홈런 기록 보유자(7개).

수비는 본래 평범했지만 유승안 감독 시절 유격수로 구르면서 경험을 쌓아[19][20] 일취월장, 어느 팀에서든 주전하기에는 손색이 없다.[21]

연속출장을 이어가면서 최태원의 최다연속 출장기록에 도전하고 있었지만, 2008년 6월 4일 KIA 타이거즈전에서 선발 명단에 빠져 있다가 갑작스런 폭우로 교체출장할 틈도 없이 강우콜드 선언이 되어버려 어이없게도 615경기에서 연속출장을 마감해야 했다. 그래도 이 기록은 최태원 - 김형석-황재균에 이은 역대 4위 기록이다.

3 프로 선수 시절

3.1 한화 이글스 시절

3.1.1 프로 입단 ~ 2회 WBC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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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풋했던 신인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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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격수로 뛰던 2003~2004년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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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루수 전향 이후.
이 때 이후로 얼굴이 변하질 않는다. 거의 정우성

대구고 시절 이범호는 소속 학교가 전국대회에서 부각되지 못해서 그다지 주목받는 선수가 아니었지만, 당시 한화 스카우트였던 정영기의 안목으로 발굴된 선수. 정영기가 와서 2차 1라운드 지명을 할거라고 이범호에게 알려줬는데, 당시에 이범호는 안 믿고 있었다가 진짜로 지명받자 놀랐다고 한다. 한편, 한화 이글스 구단 관계자들은 "대구 이씨가 왔다!" 라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기대를 표시했는데, 이는 이글스에서 맹활약 했던 이정훈, 이강돈, 이상목 선수가 대구 출신이었기 때문. 전국적으로 인지도가 없었고, 연고지역선수도 아니었던 이범호가 이런 이유로 지명되었다는 카더라 썰이 존재한다.

입단 이후 2루수, 3루수로 출전하면서 2001년을 기점으로 재능을 꽃피웠다. 2004년 유승안 감독은 이범호를 공격형 유격수로 키우기 위해 유격수로 내보내며 타율 0.308, 23홈런을 기록하며 타격은 나쁘지 않았으나[22] 문제는 실책이 30개... 당시 한화의 내야는 정말 개판 수준이라고 봐야 할 정도의 상태였고, 유승안 감독이 물러나고 김인식 감독이 부임한 2005년부터 3루수로 완전히 정착하며 그 해 골든글러브를 수상하였고, 그 활약을 바탕으로 2006년 1회 WBC에 참가했고, 2년 연속으로 3루수 골든글러브를 받으며 2000년대 중후반 리그의 공격형 3루수로 자리잡았다.

07년 삼성과의 준플레이오프 때 오승환에게 홈런을 때렸었는데 그 때 MBC ESPN에서 화면에 꽃장식을 하여 꽃범호의 이미지를 부각시킴과 동시에 수뇌부가 야갤러라는 사실을 공공연히 알리기도 했다.

이때도 좋은 선수였지만, 2회 WBC를 기점으로 한단계 더 발돋움하게 된다.

3.1.2 WBC와 2009 시즌

WBC 대표팀 구성 과정에서 김동주최정에게 밀려 대표에서 제외되었지만, 김동주가 일본 진출 시도와 그 실패 후유증 등으로 대표팀을 고사하면서 다시 내야수 부문에 이름을 올렸다.

타율이 높은 최정과 수비가 안정적인 이범호가 3루를 놓고 다툴 것으로 예상되었는데, 결국은 박진만의 엔트리 하차로 둘 다 올라갔으며, 2회 대회에서는 이대호의 수비 불안 및 빈타 때문에 더욱 주목받았다. 거기다 이범호가 소위 말하는 단기전 크레이지 모드에 들어섰는지 홈런 3방에 고타율을 자랑하는 불방망이까지 휘두르면서 명실상부한 공격의 핵이 되었다.

홈런 말고도 2라운드 일본과의 승자전에서 만루에서 밀어내기 볼넷을 고르는 모습과 결승 일본전에서 9회말 2사 1,2루에서 다르빗슈 유의 슬라이더를 받아쳐 동점타를 쳐내는 드라마틱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야구는 9회말 2아웃부터라는 말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해줬다. 그러나 이후 고영민의 삽질, 임창용의 2실점, 이용규의 플라이아웃, 최정정근우의 삽질 등으로 인해 그의 드라마틱했던 동점타는 아쉽게도 묻히고 말았다.

정규 시즌에서는 부상과 WBC 후유증으로 고생하면서 한화의 추락의 원인이 되기는 했지만, 어쨋든 1년 스탯은 매년 찍어주던 성적을 찍는데 성공했다.

4월 30일, '한국의 쿠어스 필드' 청주구장에서 펼쳐진 LG와의 경기에서 2회 만루홈런, 6회 1점홈런, 7회 3점홈런을 터뜨리며 사이클링 홈런에 도전할 수 있었으나, 8회 2사 1루 상황에서 대타 오선진으로 교체되었다. 공식적으로는 다리가 좀 불편하다는 이유였지만, 크게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상대를 자극하지 않으려는 김인식 감독의 의중이 반영된 듯하다. 이범호도 크게 의식하지는 않는 모습을 보였다.

3.2 FA와 소프트뱅크 입단

2009년 시즌이 끝나고 FA로 풀렸다.

본인은 적정한 수준만 해주면 한화 이글스에 남겠다고 했지만 결국 우선 협상기간인 12일을 넘기고, 일주일 뒤인 11월 19일 일본 프로 야구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 2+1년에 최대 5억 엔에 달하는 계약을 맺었다. 그의 언론 플레이에 실망한 한화팬들은 새로운 별명 월추(월드추남)라고 부른다.[23]

입단 이후 경미한 어깨 부상 등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스프링캠프에서 아키야마 코지 소프트뱅크 감독에게 수비 능력을 계속해서 지적받았고 결국 개막전부터 원래 주전 3루수였던 마쓰다에 밀려 대타 혹은 지명타자 땜빵으로 뛰었다.[24] 그 와중에 마쓰다의 부상으로 3루 수비에 들어가기도 했다. 이는 이범호의 몸 상태도 몸 상태지만 소프트뱅크 고위층에서 아키야마 감독에게 영입 의사를 묻지 않고 독단적으로 진행했기 때문이다. 아키야마 감독이 원치 않은 선수였기에 처음부터 잡음이 많았으며 주전자리 확보도 힘들었다.

그리고 팀 내에서 장타력이 부족함을 느꼈는지 고향 베네수엘라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로베르토 페타지니를 전격적으로 영입했는데, 이는 이범호에게 직격탄으로 날아왔다. 다행히도 페타지니가 몸 상태를 끌어올리느라 2군에서 유예기간을 갖는 동안까지는 1군에 붙어 있었으나, 페타지니의 1군 승격과 함께 곧바로 2군으로 추락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페타지니는 내일 모레 마흔이라는 나이 + 6년간의 일본리그 공백을 상큼하게 씹어먹고 맹활약했다. 허나 소프트뱅크의 중심타자인 호세 오티즈가 무릎부상을 당하며 외국인 슬롯이 하나 비게 되자 8월 5일 오랜만에 1군에 등록되어 두 경기 연속 홈런을 기록했다. 아키야마 감독은 원래 3루수인 마쓰다를 오티즈의 포지션인 좌익수로 돌리고 이범호를 3루수로 잠시 기용했었다.

다만 이범호가 이렇듯 팀에서 홀대를 받은 가장 큰 이유는 최악의 수비력 때문이다. 타격만 따지면 2군에서 타율 .277, 출루율 395, 장타율 .535, OPS.929로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으나, 수비에 대해서는 기본기가 안 되어 있다는 혹평을 받았다. 참고로 2군에서 필딩률이 .907다.[25]

때문에 이범호가 1군에서 2경기 연속 홈런 등으로 활약하자 주전 3루수인 마츠다를 좌익수로 컨버젼시키면서까지 자리를 마련해주었을 때도 불안한 수비와(1군 필딩률 .930) 침묵한 타격으로 팀에게 제대로 찍히면서 사실상 일본생활이 끝이 났다. 사실 수비력만 준수했어도 기회를 더 부여받았겠지만, 9할 초반대의 수비력으론 어림도 없는 얘기였다.

하지만 오로지 '돈'만 본다면 일본 진출은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에서 2년 동안 벤치만 뎁혀도 고연봉이 보장되며, 국내 복귀시 또 상당한 연봉거품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2010 시즌 성적은 48경기/타율 .226/28안타(4홈런) / 1도루.

그리고 시즌 종료 후, 우선 보류명단에는 포함 되었었으나 구단측에서 보유 의지가 약하다는 기사가 연이어 터지는 등 시즌 종료 후의 거취가 불안정했다. 소프트뱅크 스프링캠프에는 참가하였으나 이후에도 국내 복귀로 교섭이 계속 되었던 듯 하다.

결국 소프트뱅크 측의 양해를 얻어 원 소속 팀이였던 한화와 수차례 교섭을 하였으나, 서로 밀고 당기는 병림픽신경전을 벌여온 끝에 교섭이 결렬되었다. 이 과정에 설레발 기자의 찌라시와, 팬, 구단 간의 신경전으로 제법 큰 병림픽으로 발전하는 등, 영 좋지 못한 전개가 근 2개월간 계속되었다.

3.3 KIA 타이거즈 시절

3.3.1 한국 복귀, 그리고 KIA 타이거즈 입단

2011년 1월 27일, 뜬금없이 KIA 타이거즈 입단으로 매듭지어졌다. 소프트뱅크 측에서는 내년분 연봉인 1억 엔을 지급하는 것으로 계약을 종료하였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국내에 복귀하였으나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였다. 당장 KIA 타이거즈의 포지션 이동이 일어나는 건 당연한 일이고, 한화 이글스 팬들은 KIA와 계약한 이범호를 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능한 한화 이글스 프런트를 까는 데 혈안이 되었다.

표면상으로는 계약 기간 1년에 계약금 8억 원, 연봉 4억원 등 총 12억 원에 계약하기로 합의하고, 이범호가 신변을 정리하고 일본에서 귀국하는 즉시, 최종 계약을 하기로 했으며 1월 29일 KIA 타이거즈의 스프링캠프에 합류, 시즌 준비 태세에 들어갔다.

이범호 본인은 KIA 입단에 대해 말을 극도로 아끼는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였는데,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어려울 때 KIA가 손을 내밀었다."라고 말한 대목을 봐서는 한화와의 협상이 실제로도 매우 험난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한화의 보상선수 지명권에 대해 신인이 자동보호 되는지의 여부로 인해 시끄러웠지만 KBO가 신인선수는 1년 이내에 트레이드를 제외하고는 이적을 금지한다는 야구 규약 109조를 인용해 유권해석을 하며 자동보호가 되어서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한화에서 장고 끝에 지명한 보상선수는 안영명. 이로써 안영명은 트레이드 8개월 만에 친정팀인 한화 이글스로 복귀하였다.

3.3.2 2011 시즌

국내 리그 복귀 첫 해 괴물 모드의 전반기를 보여주었으나 아쉬운 부상

부상으로 시즌 후반에 아웃되기는 했으나, 전반기에 엄청난 활약으로 팀 타선을 이끌며 팬들을 기쁘게 해준 시즌.

해당 항목으로.

3.3.3 2012 시즌

돈 내놔라 먹튀야
이범호 야구인생 최악의 암흑기

3월 17일 SK 와이번스와의 시범경기에서 손목 통증을 호소하여 팬들을 걱정하게 만들었다. 이후 좋아지나 싶더니 왼쪽 허벅지 통증이 일어나며 전력 이탈. 별다른 3루수 대체 자원도 없었던 데다 김상현(1980)마저 손바닥 골절로 전력에서 이탈한 상황. 때문에 4월 기아의 부진의 원인으로 지목받고 있다. 김기아 타선의 귀환

팬들은 이러다 먹튀가 되는 게 아니냐며 걱정을 하였다. 심지어 KIA 타이거즈 갤러리에서는 나왔다 들어갔다 한다며 두더지라고 까였다. 뜬금없이 태국 마사지 기사까지 뜨면서 팬들을 더 심란하게 만들었다.[26]

5월 초부터 퓨처스리그에서 몸을 가다듬으며 복귀를 준비하였다. 그간 지명타자로만 출장하다가 5월 13일에는 시즌 첫 3루수 선발 출장을 하였다.

5월 17일 오랜만에 1군 선발 출장을 하였다. 5타석 4타수 무안타 1볼넷 2삼진을 기록, 아직은 기대한 만큼 성적이 나오지 않고 있다.

5월 19일 사직야구장에서 열린 롯데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4타수 2안타 1타점 1홈런 1득점을 기록, 이어서 5월 20일에는 3타수 3안타 3타점 1홈런 1득점 1도루를 기록하며 부활을 알렸으나, 팀이 연패하는 바람에 빛이 바랬다. 그나마 이범호가 부활했다는 사실이 팀에게는 위안이 될 듯.

복귀 후 클린업의 한 축을 담당하며 맹타를 휘두르고 있다. 다만 햄스트링 부상이 워낙 재발성이 높고 위험한 부위이다보니 무리한 베이스러닝은 자제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부상 여파로 인해 타격폼이 불안해져 시간이 갈수록 방망이도 시들해지는 상태.

결국 햄스트링 부상을 완치하지 못한 탓인지 7월 9일 다시 2군행.

담당의사의 말에 따르면 부상부위는 완쾌되어 운동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한다. 그런데 본인이 '다시 다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제대로 뛸 수가 없다고. 햄스트링 부위 자체가 한 번 부상을 입으면 회복된 후로도 심심찮게 재발하는 부위긴 하지만, 하필 팀이 타선의 침체로 4강의 문턱에서 꼴깍꼴깍하던 와중이라 순전히 본인의 '느낌' 때문에 경기에 출장하지 않고 있다는 이유로 팬들로부터 먹튀라며 욕을 엄청나게 얻어먹었다.

결국 이 부상 때문에 시즌이 끝날 때까지 1군은 커녕 2군에서도 더 이상 경기를 뛰지 못했고, 마무리 캠프 합류도 늦어지게 되었다.# 11월 21일 늦게나마 캠프에 합류. #

태업하며 놀러다니기만 한다는 일부 팬들의 비난도 있었지만, 그래도 시즌 내내 재활을 게을리하지는 않은 듯하다. 12월에는 아예 서울로 올라와 재활에 전념한다고. 한 달동안 처가살이하면서 재활

3.3.4 2013 시즌

해당 항목 참조.

3.3.5 2014 시즌

3월 29일 삼성 라이온즈와의 개막전에서 1회초 2루 주자 김주찬을 불러들이는 적시타를 쳐 2014년 프로야구 1호 타점을 기록했다.

5월 20일 LG 트윈스와의 경기에서 정현욱을 상대로 만루홈런을 치며 부상에서 복귀한 후 첫 안타를 만루홈런으로 장식하였다.[27]

5월 24일 롯데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앞선 수비실책을 만회하는 투런홈런을 쳤다. 실책이 호투하던 임준섭의 실점으로 이어졌기에 더 가치있는 홈런이었다.

6월 26일에 SK 와이번스와의 경기에서는 김광현을 상대로 시즌 9호 홈런을 때리는 등 3타수 3안타 1홈런 3타점 2득점으로 맹활약하며 팀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시즌 최종 성적은 105경기 406타석 350타수 94안타 19홈런 82타점 47득점 2도루 52사사구 타율 0.269 출루율 0.360 장타율 0.497 OPS 0.857으로 마무리하였다.

3.3.6 2015 시즌

전반기에는 부진했으나 후반기부터 엄청난 각성 모드를 보여주며 팀 내 타자 WAR 1위를 달성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

3.3.6.1 2015 시즌 후 FA

2015 시즌 후 두 번째 FA 자격을 얻었고 우선협상 기간 마지막 날인 11월 28일 오후에 원소속팀 KIA와 4년 최대 36억(계약금 10억, 연봉 6억 5000만)에 계약을 맺고 잔류하게 되었다. 본인도 KIA에 남길 강력하게 원했으며 다만 협상 과정에서 이견이 있던게 계약기간이었다고.

3.3.7 2016 시즌

혜자범호
커리어 첫 3할-30홈런-100타점
나지완, 김주찬, 서동욱과 함께 타선을 이끌며 팀을 5년 만에 가을야구로 이끌다

해당 항목 참조.

4 기타

그리고 라이언 사도스키가 깨알같이 깠다.(...)
  • 2013년 마구마구에서 파워 79의 스페셜 카드를 부여 받았다. 그보다 적게 홈런을 친 강정호나지완이 레어를 받았는데 문제는 이들보다도 파워가 낮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2할4푼의 낮은 타율인 것 같다.4년전의 브룸바도 비슷한 성적을 기록했는데 그쪽은 레어가 나왔다 그러나 기올유저들은 환영하는 입장. 구름 속의 존재인 김상현(1980)과 플래툰이 가능하므로..
2016년 6월에 13레어 이범호가 나왔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

5 연도별 성적

역대기록
연도소속팀경기타수타율안타2루타3루타홈런타점득점도루4사구장타율출루율
2000한화 이글스6974.16212701311111.297.267
200171138.196277131622213.326.263
2002111296.26077202113541527.453.320
2003107323.23877191113846252.406.343
2004133481.308148
(9위)
35
(1위)
3
(9위)
23
(6위)
7480
(10위)
651.536
(4위)
.371
2005126444.27312127
(3위)
126
(3위)
6869
(10위)
662.514
(4위)
.357
2006126421.25710825
(8위)
120
(4위)
73
(6위)
53072
(7위)
.463
(6위)
.363
2007126418.24610314021
(6위)
6357277
(8위)
.431.361
2008125434.27612021319
(5위)
77
(9위)
80
(6위)
1270
(7위)
.470.374
2009126436.28412421025
(7위)
7964360.505.369
년도소속팀경기수타수타율안타2루타3루타홈런타점득점도루4사구장타율출루율
2010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48124.22628404811112.355.294
년도소속팀경기수타수타율안타2루타3루타홈런타점득점도루4사구장타율출루율
2011KIA 타이거즈101318.3029621017
(9위)
77
(7위)
63282
(2위)
.528.440
201242140.293417021917128.386.404
2013122436.24810817024
(4위)
73
(10위)
56071
(5위)
.452.350
2014105350.26994230198247252.497.360
2015138437.27011825028
(7위)
7960373.519.372
2016138484.31015023033
(4위)
108
(9위)
93176.562.391
한국 통산(15시즌)17665630.271152431212283
(9위)
96485548877.481.365
일본 통산(1시즌)48124.22628404811112.355.294
역대수상
년도수상내용
2005년골든글러브 3루부분 수상
2006년골든글러브 3루부분 수상
  1. [1] 16분 50초 참고
  2. 프로 초년기때는 유격수였다. 2004년 기록한 23홈런은 무려 경상도 출신 유격수 한시즌 최다홈런 기록이다. 한시즌에 유격수로 이범호보다 더 많은 홈런을 기록한 선수가 장종훈, 이종범, 틸슨 브리또, 강정호가 전부다. 그러나 유격수수비는 불안한 편이라 3루수로 포지션 변경. 때문에 유격수 자원이 고갈되면 종종 유격수로 선다. 2011년 8월 4일이나 2015년 6월 18일 경기에서 유격수로 출장한 바 있었다.
  3. 이범호~ 이범호~ 한화의 이범호~
  4. 기아의~! 이범호~ 한화있던파워히터 이범호~ 거친 파도에도 굴하지 않게~ (잘!생!겼!다!이!범!호!) 기아의~! 이범호~ 파워히터 이범호~ 꽃보다 멋진 너~ 이범호~ 가사에도 꽃이 들어간다
  5. 기아 이범호 뜨거운 힘이 솟아나 두려울 게 없어 기아 이범호 기아의 승리를 위해 파워히터 기아 이범호~
  6. 질풍가도와 열혈남아 모두 쾌걸 근육맨 2세 오프닝으로 쓰였던 음악이다.
  7. 이범호! 오오~ 이범호! 오오오오~ 파워히터 이범호~x4 오재일 응원가와 원곡이 같다. 그쪽은 훨씬 우울하다 이후 열혈남아 응원가가 나오면서 공식 폐기.
  8. 15개
  9. 종전까지는 심정수와 함께 12개로 타이 기록을 이루고 있었다.
  10. 타이거즈 최초로 타팀 이적생 출신 주장이다.
  11. 이범호는 단한번도 개인커리어에서 타격에 관련된 모든 것들 중에 타이틀 1위를 한적이 없다. 즉 개인 타이틀 수상이 없는것 그러나 개인통산 900타점 800득점 280홈런 1500안타를 훌쩍 넘긴 한국 프로야구의 대타자이다. 다행히 골든글러브는 받았다.
  12. 이범호가 얼마나 꾸준한지 알 수 있는 지표. KBO 전체 WAR 26위이고, 현역 중엔 4위다. 그 위에 있는 선수들이 이병규(17위), 임창용(21위), 박용택(25위)이다. 더 무서운 건 바로 밑인 27위의 인물이 바로... 심지어 정성훈(28위), 홍성흔(29위), 최정(30위)이 전부 그보다 아래에 있다.
  13. 최희섭은 은퇴, 김상현은 검열삭제 짓거리 때문에 임의탈퇴로 나락으로 떨어졌기 때문에 LCK중에서 이범호는 유일하게 필드에 남아있는 선수다. 게다가 최희섭과 김상현은 역대급 플루크라는 불꽃만 태우고 아스러졌다(...).
  14. 소프트뱅크 입단 당시 언론플레이에 실망한 한화팬이 지어준 별명.
  15. 프로농구 울산 모비스 피버스에서 뛰고 있는 양동근과 절친한 사이다. 그래서 국가대표 한정으로 이 둘의 번호를 서로 바꿔 달았다. 이범호는 2009년 WBC 때 6번을, 양동근은 국가대표에서 7번을 달고 뛰었다.
  16. 그냥 안티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적대시하는 사람도 생겼다. 지나친 언플 이후 한화와 안 좋게 결별한 탓에 팬들의 기대가 한순간에 배신감으로 바뀐 게 크다. 사실 언플은 FA시절부터 계속 해댔지만... 심지어 2011시즌 첫 대전한화전에서 한화팬들이 이범호 욕하는 소리가 중계에 다 들렸을정도.
  17. 이는 대체로 한국의 프로야구선수들이 해외로 진출할 때에는 원 소속구단의 동의 하에 진출한 뒤 임의탈퇴 신분으로 전환되는 경우가 많고, FA 자격으로 진출했을 경우에도 원 소속구단과의 관계가 좋았을 경우에는 별 탈 없이 원 구단으로 복귀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 여담으로 FA로 해외에 진출한 뒤 복귀한 팀이 원 소속구단이 아닌 다른 구단일 경우에는 원 소속구단이었던 선수와 계약한 것이 되어 외부 FA 영입과 같은 조약을 적용받는다.
  18. 2008 시즌은 18개로 병살 1위.
  19. 2004년에 유격수로 출전, 3할을 찍긴 했으나 실책이 무려 30개. 이는 1986년 유지훤의 31개에 이은 역대 2위 기록이다.
  20. 이는 몇 안되는 명백한 유승안의 공이고, 김인식 시절에 2군이 황폐화되면서 오늘날의 암흑기를 잉태한 것도 사실인지라 한화 팬덤들은 암흑기의 시작을 놓고서 유승안 시절이 시작인지, 김인식 임기말년이 시작인지를 놓고서 종종 내전을 벌이곤 한다.
  21. 2009년 WBC나 일본 진출을 통해 수비가 성장했다는 주장도 있는데 대체 단기전으로 숨가쁘게 치뤄지는 국제전에서 무슨 실력 향상을 이뤄진다는 걸까? 이시기 이범호는 이미 완성된 선수였고 이를 바탕으로 일본에 진출했다가 실패해서 1년만에 리턴했다. 그게 다다.
  22. 이 해 35개의 2루타로 이 부문 1위에 오르기도 했다.
  23. 이 때의 언론플레이에서 한화팬들이 실망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한화에 남기 싫다는 티를 냈다. 인터뷰에서 '우승 할 수 있는 팀으로 가고 싶다.'거나 '롯데도 좋다.'라거나 FA기한이 다 되어가고 김태균이 '돌아올 땐 한화로 돌아오겠다'는 인터뷰를 하자 급하게 '해외로 나가지 못한다면 한화에 남겠다.'고 인터뷰를 한 뒤 다음날 에이전트를 교체한다거나... 그리고 결국 한화로 돌아오지 않으면서 한화 팬들과는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된다.
  24. 그 이전에 아키야마 감독은 3루수 영입 의사가 없었다. 기존 3루수 마쓰다 노부히로가 기복이 심하고 출루율이 낮은 약점이 있지만, 주루 능력과 장타력을 겸비한 인재고 실제로 2010년엔 19홈런 71타점의 기록을 남겼다. 팀의 간판타자인 고쿠보와 마쓰나가가 나이와 부상 문제로 기량이 떨어지자 대체 전력으로 쓸 거포 1루수를 필요로 했던 것을 이범호가 1루를 볼 줄 안다는 말에 영입했던 것이다.
  25. 이게 얼마나 심각한 수비율이냐면, 데뷔 초창기 타격은 천재, 수비는 둔재 소리 듣던 밀워키 브루어스라이언 브론이 112경기 나와 26개의 에러를 기록하며 기록한 필딩률이 .895였다. 3루수로서 저 에러개수 자체가 경악할 만한 숫자인데 문제는 이범호는 1군도 아니고 2군에서 저 실력이라는 것. 보통 수비 평균적으로 못한다고 보는 선수들 필딩률이 .950이하인 경우가 많은데 그것에도 턱없이 못 미치는 수치이다.
  26.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태업하고 있다는 비난을 하는 팬들도 있었지만, 몸이 다 낫지도 않은 상황에서 무리하게 출장하여 부상 재발로 골골대느니 완벽히 몸상태를 갖추고 나오는 게 차라리 낫다는 의견도 제기되었다. 그래도 뜬금없는 태국 마사지는 좀 거시기하다
  27. 이 홈런은 이범호의 개인 통산 8호 만루홈런이기도 하다.
  28. 정치적 성격을 떠나 크보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전두환은 의도치 않게 얼떨결에 야구리그를 만들게 된 것 뿐이다.
  29.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실제로 이범호는 기아 입단 후 2013년 4월 21일에 처음으로 번트를 댔다. 근 6년만에 댄 번트라고.
  30. 이는 티웨이항공이 광주공항에 취항한 기념으로 광주광역시를 연고지로 삼고 있는 KIA 타이거즈의 선수 중 이범호를 홍보모델로 채택했고 비슷한 시기 대구국제공항에 취항하자 대구광역시를 연고지로 삼고 있는 삼성 라이온즈구자욱을 홍보모델로 채택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