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철

"일곱살때 좋아하던 것 중 아직까지 좋아하는게 있니?"

"응 야구, 그리고 정민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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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해설자!! 넥타이가 주황색인건 .

이름정민철(鄭珉哲 / Min-Chul Jung)
생년월일1972년 3월 28일
국적대한민국
출신지대전광역시[1]
출신학교신흥초-충남중-대전고
포지션투수
투타우투좌타
프로입단1992년 빙그레 이글스 고졸연고계약[2]
소속팀빙그레/한화 이글스 (1992~1999)
요미우리 자이언츠 (2000~2001)
한화 이글스 (2002~2009)
1994년 한국프로야구 최우수 평균 자책점
선동열(해태 타이거즈)정민철(한화 이글스)조계현(해태 타이거즈)
1994년 한국프로야구 탈삼진왕
김상엽(삼성 라이온즈)정민철(한화 이글스)이대진(해태 타이거즈)
1997년 한국프로야구 탈삼진왕
주형광(롯데 자이언츠)정민철(한화 이글스)이대진(해태 타이거즈)
1993년 한국프로야구 승률왕
오봉옥(삼성 라이온즈)정민철(빙그레 이글스)김홍집(태평양 돌핀스)
빙그레/한화 이글스 등번호 55번
김태민정민철(1992~1999)조규수(2000~2001)
한화 이글스 등번호 55번
조규수(2000~2001)정민철(2002~2004)윤규진(2005~2012)
한화 이글스 등번호 23번
엔젤 페냐(2004)정민철(2005~2009)영구결번[3]
한화 이글스 영구결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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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 이글스 역대 주장
이도형
(2005~2006)
정민철
(2007)
신경현
(2008~2010)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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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스의 영원한 에이스

90년대 KBO 최고의 선발투수

한화 이글스의 투수이자 투수코치, 현 MBC 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 등번호는 55→23번.

통산 다승 2위(161승)를 비롯하여 1992년부터 1999년까지 8년 연속 10승 이상, 평균자책점 2.80, 연당 평균 투구 이닝 188이닝, "퍼펙트 게임에 가장 근접했던 투수" 등의 기록을 가진 1990년대를 대표하는 선발 투수이다. 반면 단 한 번도 다승왕을 기록하지 못하는 등 은근히 '비운의 투수'이기도 하다.

1990년대 전체에서 보았을 때, 선발 투수 중 평균자책점 1위(2.80), 완투 1위(59), 완봉승 1위(19)이며, 정민철이 데뷔한 1992년도부터 1999년까지 다승, 탈삼진, 이닝, 방어율, WHIP, 완투, 완봉승 모두 정민철이 1위이다.# 실제로 어느 분이 1990년대 선발 투수들을 분석한 결과 정민철이 1위로 나왔다.# 이런 엄청난 성적에도 불구하고, 비인기팀이라는 이유로 정민철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이런 이유로 정민철의 대단함은 최근에 와서야 주목받기 시작했다. 참고로 조계현이 노쇠하기 시작한 97년을 제외해도 1992~96 사이 완투 1위에 투수 WAR 1위. 데뷔 이후 이글스의 소년가장의 활약을 했다. 물론 장종훈이나 96년 구대성 등이 있었기에 상대적으로는 류현진보다 덜 외롭긴 했다.

꼴통쇼라는 정민철이 참여한 강연회가 있다. 정민철의 인생관과 유년시절 그리고 깨진 퍼펙트게임 에피소드 등을 자세히 알 수 있다.# 밑에서 언급될 정민철의 입담을 확인할 수 있다 겸손함의 아이콘

다만 아쉬운건 이종범과 비슷하게 일본진출 before/after 수준으로 차이가 심하다는것. 정민철은 더 심한 수준.

당대 언론의 취재 환경 탓에 신인 때는 인지도에서 염종석에게 밀렸고, 그 이후에는 이상훈, 조계현에게 밀렸으며 그 이후 일본진출 즈음에는 정민태에게 인지도에서 밀렸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저어어기 아래 떡밥들 항목에서 다루고 있다.

2 투구 스타일

전성기 시절 주무기는 빠른 공. 훗날의 인터뷰에 따르면 전성기 시절 최고 구속은 152km/h##였다고 하나, 실제 경기에서 찍히는 최고 구속은 145~8km 정도로, 강속구 투수이긴 했으나 “리그에서 가장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라고 보기엔 살짝 애매했던 정도.
사실 정민철의 강점은 구속보다도 구위 자체 였다. 테일링이 좋은, 소위 말해서 공 끝이 좋은 타입. 즉, 원조 돌직구. 동시대 선수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대 최고의 구위로 평가 받는다. 특히 역대급 우타 장타자인 박경완과 역대급 우타 교타자인 이종범이 본인이 경험한 최고의 공으로 정민철의 공을 꼽았고, 전성기 정민철의 볼끝은 임창용과 오승환보다 더 좋다고 평가하였다.
슬라이더와 커브, 포크볼 등 당시 언론에서 설레발 언급되었던 변화구의 레퍼토리 자체는 다양했으나, 어느 하나 주무기라고 할 수준은 아니었다. 철저하게 빠른공 위주로 던지되 유인구로 간간히 슬라이더를 써먹던 전형적인 투피치 스타일. 제구력이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칠 테면 쳐보라고 가운데로 팡팡 꽂아 넣었던 탓에 볼넷이 상당히 적었다. 스태미너도 좋아서 완투를 밥 먹듯이 한 전형적인 우완 정통파 파이어볼러 이닝이터 선발투수.

다만 2000년대 이후로 직구 구속과 구위가 급격히 떨어진 탓에 커브와 커맨드(제구력) 위주의 기교파 투수로 폼을 바꿔야 했다. 선수시절 후반기에 사용한 주무기는 커브였는데, 본인 스스로가 너클커브라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닌 탓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3 선수시절

항목참조

4 코치로서의 모습

4.1 지도자 생활 초기

201401271532772219_52e5fdd34ab35.jpg[4]

은퇴 이후 2010년 한대화 감독 체제에서 바로 코치진으로 이동했으며 코치로써 한화 마운드를 볼 때마다 속이 타들어갔을 것이다. 한 명 잘하면 다음 날 바로 털리는 선발진… 물론 루헨진은 제외

2010년 당시엔 불펜코치인데다가 별다른 언급도 없어서 그냥 평범한 투코로 1년을 보냈으나, 특이한 투구폼으로 10여 년간 코치들에게 투구폼을 변경해야 한다는 강요와 투구폼을 변경하면 오는 어깨의 통증 때문에 투구폼을 바꿔야하나하는 고뇌와 자괴감에 빠져있던 박정진에게 네가 정말 던지고 싶은 투구폼으로 던져라라는 조언과 신뢰를 보내줘서 2010년 그의 각성을 이끌어내 한화 이글스불펜의 핵심으로 만들었다.

2011년 1군 서브코치로 코치 생활을 시작하여 한용덕 코치와 함께 장민제, 안승민을 성장시키고 양훈을 부활시켰다!
2011년 5월 2군으로 내려간 한용덕 코치 대신 1군 메인코치(?)가 되었다.

한화 투수들에게 자신이 현역시절 즐겨 던졌던 슬로커브[5]를 전수시켰으며 실제로 2010시즌에 유원상이 슬로커브를 장착하면서 꽤나 재미를 봤다. 그래봤자 5승. 지못미 ??:한화에 슬로커브를 잘 던지는 재미있는 투수가 있다

2011년 시즌이 지나가면서, 투수 교체가 서툰 한대화 감독을 대신해 투수교체 전권을 잡았다.[6] 그래서 생긴 별명이 바람돌이, 정간신(…). 선발 투수를 한계 투구수까지 던지게 하면서 최대한 긴 이닝을 먹게 했다. 이런 방향성에서 가장 극적인 변화를 보인 투수가 양훈. 조금 투구수를 많이 가져가게 하면서 완봉승을 하게 된 뒤로 급격히 변화하기 시작했으며, 10이닝 연장전에서 선두 타자에게 2루타를 맞으면서 무사 2루의 위기를 처하게 되었음에도 한대화 감독을 설득해 양훈 스스로 이닝을 끝내게 하였고, 이후 양훈은 기복이 심했지만 퐁당퐁당 2경기에 한 경기꼴로 류현진에 버금가는 성적을 내주게 되었다.

다만 부정적인 측면도 있었는데, 이렇게 어지간한 상황은 선발 투수에게 맡긴 탓에 투수교체가 계속 한 타이밍씩 늦어져 결국 상황을 수습하지 못하고 날려먹은 경우가 있었다. 이 때문에 정민철의 투수 교체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팬들도 다수.

그래도 이때까지는 박정진, 양훈, 김혁민,[7] 안승민을 키워낸 명코치라고 찬양받았다.

4.2 혹평과 함께 2군으로

2012년 들어 이해할 수 없는 투수 교체로 이길 수 있는 경기를 줄줄이 말아먹으며 돌민철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붙었고, 선수시절 그를 사랑하던 팬들도 한대화와 세트로 물러나기를 바라는게 현실이 되었다.

2012년 5월이 되자 2년동안 팀을 위해 몸이 부서져라 던졌던 박정진을 5월 25일에 2군 가기 전까지 21경기 중 14경기에 올리는 백정질을 하였다. 박정진이 정상이 아닌 상태로 콜업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나올 때마다 두들겨 맞으며 몸과 멘탈이 함께 붕괴되었고 결국 다시 2군으로 내려갔다.

2012년 6월 7일 류현진 선발 경기에서는 7:3으로 이기고 있는 상황에 불펜 정민혁이 흔들려 연속 안타를 맞았는데도 바꾸지 않고 기어이 무사 만루를 만들어 3점을 내주고 볼넷머신으로 전락한 바티스타를 9회에 올려 결국 경기를 내지고 에이스의 승리까지 날려먹는 최악의 투수교체를 보여주었다.

2012년의 정민철의 투수 기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무원칙이라 할 수 있으며, 필승조 역할을 하는 선수를 대패하는 경기에 무조건 연투시켜 정작 이기고 있는 경기에 내보낼 필승조가 없거나 지친 상태로 내보내게 하여 망친 사례가 끝도 없다.

또한 김인식 감독 밑에서 배웠는지 불펜투수를 무조건 혹사시키는 것에 재미를 들려 박정진, 정민혁, 안승민, 마일영한화에서 얼마 남지 않은 쓸만한 불펜들이 모두 맛이 갔다.

결국 2012년 7월 6일 자로 2군으로 내려가 2군 투수코치를 맡게 되었다. 반대급부로 1군 투수코치를 맡은 이는 다름아닌 송회장님. 그리고 송회장님도 마찬가지로 말아드셨다

4.3 2013 시즌, 1년만에 다시 1군으로

전반적으로 투수 육성에는 일가견이 있지만 실전에서 굴리는 데에는 서투른 듯. 그러니까 투수코치판 박종훈 2013년 조지훈, 송창현, 이태양 등의 신인투수들이 2군을 다녀온 후 괜찮은 모습을 보이면서 육성능력을 다시금 주목받았다.

2013 시즌 전반기가 종료된 7월 18일 자로 1군 투수 코치로 승격되었다. 팀의 전면 리빌딩, 그리고 분위기 쇄신 차원에서 1군과 2군 코치간의 보직이 맞바뀐 것. 이로서 1년 전 보직을 맞바꿨던 송진우 코치와 다시 한 번 보직을 맞바꾸게 되었다.

4.4 2014 시즌

1군 투수코치직을 맡게 되긴 했지만 경기 중 잠깐잠깐 보여지는 덕아웃 광경으로는 실제 실권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5이닝 63구밖에 안 던진 앤드류 앨버스를 강판시킨 경기만 봐도 알 수 있다. 정민철은 퀵후크를 좋아하는 투수코치가 아니다. 선발투수를 조금이라도 더 믿고 조금이라도 더 지켜보는 스타일. 그러다가 털리고 나서야 바꿔줘서 문제지만 팬들은 투수 교체는 김응용 감독이 실질적으로 다 하고 있으며 정민철은 불펜에 전화거는 셔틀에 불과하다고 대체로 생각하고 있다.

5월 8일에는 선발투수 송창현이 7이닝 2실점 호투를 이어가고 있던 터라 8회에도 올릴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감독 쪽을 한 번 바라보고 나서 마운드에 오를 준비를 하던 송창현을 돌려보내고 어깨를 툭툭 쳐 주는 장면이 중계 카메라를 탔다. 이로써 투수교체에 관해 투수 코치가 전혀 권한이 없음을 인증했다. 사실상 투수교체에 있어 전권을 쥔 한대화 시절과는 상황이 다르기에 현재 본인에게 향하는 비판이 억울할 수도 있는 셈.

그리고 밑에 나오는, 그의 선수시절 등번호인 55번을 달 정도로 그를 존경하는 이태양윤규진. 속칭 "정민철 키즈"가 이번 시즌 각성해 각자 팀의 에이스와 마무리로 자리잡음에 따라. 정민철의 대한 평가와 기대치가 올라갔다. 송창현유창식의 볼질까지 잡는 데 성공한다면 투수코치로의 역량을 스스로 증명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시즌이 흘러감에 따라 정민철 역시 팬들의 질타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특히 한화의 투수진이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렇듯이 리그 최악인 관계로 투수코치인 정민철이 집중포화를 받게 되었다. 특히 투수교체 절대 만능론(...)을 펼치는 대다수의 팬들은 2014년도의 투수교체의 책임자가 정민철이라는 논리로 극렬비판하고 있는 상황.

그나마 일부 코어팬들에게선 "그래도 엉망징찬 수준의 한화 코치진 중에서 정민철만은 그럭저럭 쓸만하지는 않냐?"라는 이야기를 듣긴 하였다. 그래도 성실함과 선수들과의 인간 관계, 선수 관리 측면에서 정민철은 어느 정도 성과를 내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

프런트도 비슷하게 평가하고 있었던 것인지, 신생 김성근 체제 출범 하에서 수많은 칡무원 코치들이 옷을 벗게 된 와중에도 이상군, 장종훈과 함께 살아남은 몇 안 되는 레전드 출신 코치가 되었고, 29일 마무리 훈련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본인 스스로가 부담스러웠던 것인지 10월 30일 결국 자진사퇴하였다. 팀에서 물러나 좀 더 경험을 쌓을 계획이라고. 정민철의 코치 사퇴 소식이 전해지자 절친한 박찬호가 직접 해외에 자리를 알아봐주고 있다는 기사가 흘러나오는 등 해외연수를 가능성이 타진되었으나...

11월 6일 [[MBC SPORTS+|]] 해설위원 확정. 같은 팀 주루코치였던 이종범 코치와 함께 가게 되었다.

솔직담백한 인터뷰로 코치에서의 실패와는 별개로 훈훈한 반응을 얻고 있다.

5 해설자로서의 변신

2014시즌 종료 후 MBC 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으로 영입되면서 해설자로서 변신하게 된다.

뚜껑을 열어봐야 결과를 알 수 있겠지만, 일단 성공 가능성을 높게 치는 사람들이 많다. 이전부터 선수 출신 가운데 외모와 언변이 역대 최고 수준이라는 이야기를 들어왔던 탓에, 꽤 오래전부터 방송계나 팬들로부터 해설가로 전향해도 성공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꾸준하게 흘러나왔었기 때문. 하지만 이분을 보면 무조건 그렇다는 보장은 없다(...)

실제로 정민철이 코치직에서 물러나자 방송 3사 모두에게서 해설위원 제의가 들어왔다고 한다.

2015년 3월 7일 대전 한화생명 이글스 파크에서 열린 한화 이글스LG 트윈스의 시범경기 개막전에서 이종범과 함께 해설위원 데뷔를 했다.
3월 28일 목동 야구장에서 열린 넥센 히어로즈한화 이글스의 개막전에서 첫 중계를 맡았다.
대체적으로 무난하다는 평가. 젊은 선수 출신 해설자 중에서는 박재홍 위원의 뒤를 이어 성공적으로 자리잡을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하지만 정작 친정팀이었던 한화는 12회말 서건창에게 끝내기를 얻어맞고 5:4로 패배를 당했다

같은 해에 은퇴해 영구결번을 받고 같은 해부터 해설을 시작한 선배투수가 구설수에 오르고, 친정팀으로 부터 거부받은 것과는 달리 다행히 선방하고있다.

  • 주로 박재홍과 함께 해설을 맡는데 퀄리티 높은 해설로 호평을 받고 있다.
  • 기본적으로 데이터에 기반한 해설을 하고 선출 특유의 볼배합, 투수의 심리전에 대한 해설에 능하다.
  • 투구이론에 능통한 모습을 보인다. 구위가 떨어지거나 제구에 난조를 보이는 선수의 문제점을 정확히 짚어낸다.[8]
  • 알려진 바 대로 기본적으로 언변이 좋아서인지 한번 말을 시작하면 더듬거나 비문이 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 톤과 억양이 좋다. 지방 출신임에도 특유의 사투리 억양이 없는것이 다른 선출 해설들과 비교된다. 보이지 않는 분이라던가... '어-예'로 굳어진 이 분이라던가...
  • 다소 투수쪽으로 치우칠 수 있는 해설을 박재홍의 타격 중심의 해설로 적절히 밸런스를 맞춰 박재홍, 정민철, 한명재 조합은 3사 최강이라고 불릴 정도.
  • 중계 도중 가끔 깨알같은 개드립을 시전할 때가 있다. 김인식 감독과의 공동해설 때는 성대모사로 터뜨리거나 박지영 아나운서가 벌에 습격당했을 때 양봉드립을 친다던가...
  • 다만 한화와 타팀간의 경기의 해설을 맡을 때는 친한화 성향의 해설을 하는 경향이 종종 있어서 그 경우에는 까인다. 그렇다고 이분처럼 대놓고 편파중계하지는 않는다
  • 간간히 메이저리그 해설도 하고 있는데 2016년에는 MLB 올스타전 중계를 위해 정용검 캐스터와 함께 샌디에이고로 가게 되었다.
  • 최근에는 이종범 해설과 함께 MBC 공중파에서도 허구연 해설과 공동으로 하고 있다.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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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한일 프로야구 레전드 슈퍼 매치에서 한국 대표로 역투하는 모습.
  • 한화 구단이 영구결번한 번호는 23번. 문제는, 정민철이 전성기 동안 달았고 가장 오랜 기간 달았던 번호는 55번이라는 점이다.[9] 23번의 경우, 2004년 부진한 성적 탓에 다음해인 2005년 기분 전환으로 바꾼 번호. 원래 번호인 55번은 후배 윤규진이 물어받았다가 윤규진이 군에 입대하는 바람에 2012년에는 신인 이태양이 이 번호를 달았다.
때문에 정작 23번을 달고 제대로 활약한 건 2007년밖에 없으며 55번을 달던 전성기 시절과는 비교 자체가 안 된다는 게 중론이다. 그런데 정작 전성기 시절 포함, 선수생활 내내 달다시피했던 55번이 아닌 23번이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었으니... 그래서 정민철의 영구결번은 논란이 많은 편.
다만 일이 이렇게 된 것이 프런트의 책임이라고 보기에는 애매하다. 윤규진에게 번호를 물려준 것이 정민철 본인의 의사였기 때문. 윤규진은 정민철의 초-중-고 직속 후배로 어렸을 때부터 민철빠 55번을 달았다고 한다. 은퇴 당시 프런트에서 영구 결번으로 55번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 묻기도 했다지만, 그 경우 후배가 사용 중인 번호를 뺏는 셈이 되기 때문에 정민철 스스로 포기, 결국 23번을 선택했다. 그리고 윤규진은 매년 번호값 못한다고 욕먹었다(....) 애초에 윤규진 네 녀석이 번호 안 가져갔으면 됐던 거잖아!! 그리고 소집해제한 2014년, 윤규진이 다시 55번을 가져왔다. 이에 마찬가지로 민철빠인 이태양은 55를 거꾸로 한 22번으로 번호를 변경 코치님 번호 가지고 무슨 짓이야 2014년부터 윤규진이 중무리로 살아났다는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
  • 손가락이 긴 것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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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때부터 화제가 되었을 정도. 특히 선동열이 "내 손가락이 정민철만큼 길었으면 슬라이더를 더 잘 던질 수 있었을텐데..."라며 부러워한 것도 꽤 유명한 이야기. 이때문에 손가락이 길어서 조금만 더 갈고 닦으면 변화구를 잘 던질 수 있을거라는 식의 이야기를 선수생활 내내 들어야 했다. 물론 크다고 다 정력이 좋은 게 아니듯 손가락이 길다고 변화구를 잘 던질 것이라는 것은, 지금까지도 야구계 일각에 존재하고 있는 대표적인 편견. 정민철 본인은 코치 시절에 이런 견해를 밝혔다.기사
  • 선수생활 동안 맞은 홈런 중 본인에게나 당시 팬들에게나 가장 임팩트가 컸던 홈런은, 1996년 8월 23일 이종범에게 바깥 높은 공을 던져 허용한 홈런. 9회초 2사 만루 4대1로 앞서던 중 맞은 역전 만루 홈런이었기 때문. 이날 정민철은 잘 먹지도 못하는 소주를 혼자서 2병이나 깠다고(...).기사
한편 이 홈런이 나온 경기가 바로 이종범이 9회말에 포수마스크를 쓴 경기이다. 즉, 9회초에 총력전을 펼치느라 포수가 교체 되었는데 역전 만루홈런을 치고 9회말에 포수가 없어서 대신 그 자리에 들어갔다. 사실 이런 역전패의 결과가 나오게 만든 최고 원흉은 다름아닌 감독 강병철이다. 애초에 정민철은 이 경기 선발이 아니었다. 송진우가 8회까지 1실점으로 던지고, 9회에 힘이 떨어져 연속해서 주자를 내보내자 갑자기 정민철을 구원등판시켰던 것.
그리고 구원등판까지는 이해한다고 쳐도, 이 경기에 패한 후 강병철의 인터뷰가 그야말로 걸작. "정민철 정도의 베테랑이라면 알아서 거를 줄 알았다"라나 뭐라나... 정민철은 통산 BB/9가 2.81에 불과할 정도로 볼넷을 꺼리는 타입으로 유명했으며, 1996년은 패스트볼 구위가 하늘을 찌르는 전성기 때였다. 그런 정민철이, 아무리 상대가 전성기 이종범이라고 해도 밀어내기를 감수하며 2사 만루에서 유인구로 승부한다? 그야말로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 정말로 강병철이 2사 만루에서 이종범을 걸러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명확하게 사인을 냈어야 한다. 그것도 아니라면 경기 끝난 후에 선수탓으로 돌리며 입을 털어서는 안 되었던 일. 사실 강병철이나 정민철이나 설마 만루홈런 맞을 줄은 몰랐을 게다 그렇다해도 강병철은 그런 식으로 선수탓으로 돌리면 안됐던 거고
  • 서울 삼성 썬더스이상민 감독과는 대전고등학교 재학시절부터 친구였다고 한다. 홍대부고 재학중이던 이상민이 매년 대전고로 전지훈련을 오게 되면서 우정을 쌓았다고 한다.
  • 선굵고 조각같은 외모는 아니지만 모난 데 없는 순한 성격에 특유의 눈웃음과 선한 미소가 잘 어울리는 선남형 미남인데다 대전 최고의 프랜차이즈였기 때문에 연고지에서의 인기가 대단하였다. 은퇴 직전인 2009년에 살이 엄청 불어버렸지만 코치 선임 이후 마음고생 때문인지 다시 살이 빠져 예전의 모습을 많이 되찾았다.
  • 지역의(정민철-대전, 김원형-전주) 프랜차이즈에 커브가 주무기[10]인 미남 투수라는 점에서 김원형과 비견되는 경우도 꽤나 있었다.
  • 선동열의 후계자라는 별명답게 선동열이 아끼는 선수였다. 정민철이 결혼을 전후로 해서 체격이 불자[11] 타팀선배인 선동열이 따로 불러 몸관리 안하나고 타박을 주었다.[12]
  • 박경완이 평생에 잡아본 최고의 직구로 꼽았다.기사 선동열의 직구가 돌덩어리를 잡는 느낌이라면 정민철의 직구는 공을 잡아도 그 안으로 파고드는 독수리 같다고... 역시 이글스의 상징다운 독수리 직구. 사실 박경완의 발언이 2000년대 후반의 팬들에게 유독 널리 알려졌을 뿐, 애초에 정민철은 90년대 초중반부터 계속해서 이런 식의 평가를 받아왔다.
이종범 역시 최고 직구로 정민철의 공을 뽑으며, 오승환, 임창용보다 낫다고 평가하기도 했다.기사

파일:Attachment/정민철/2014-04-12-17-22-51-1.jpg

  • 마구마구2015의 정민철(가명:윤지현) 레전드카드는 유니폼은 빙그레인데 한화 소속 선수로 적용되는(...) 오류가 있었으나 2014년 4월 20일 현재는 제대로 한화 유니폼 착용 상태. 그리고 커리어 하이는 1999년인데 1994년이 엘리트카드로 되어 있다.[13]
  • 유머감각이 뛰어난 것으로 매우 유명하다.## 송진우에 따르면, 자기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웃긴 사람이 바로 정민철이라고. 안타깝게도 팬들이 이런 정민철의 면모를 직접 목격할 수 있는 기회는 극히 드물었다. 그나마 2008년 두시탈출 컬투쇼에 출연한 것이 거의 유일무이한 예능출연. 이때, 프로선수가 던진 몸에 맞는 공이 얼마나 아프냐는 질문에 김태균이 "민철이형 공은 맞아도 안아프다" 라는 말을 하자 정민철은 "태균이는 살이 쪄서 공에 맞아도 괜찮다" 라고 받아쳤다(...).## 은퇴 당시 감독이었던 김인식은 정민철의 성격이 좋고 유머감각이 뛰어나기 때문에 지도자로 성공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 실력과 외모, 인성을 겸비하고도 이래저래 팀이 암흑기를 거친 데다 비인기팀이었고, 정민철 자신이 임팩트 있는 시즌이 없어서 생각보다 유명하지 않은 투수라 마구마구에서도 상대적으로 쓰는 사람이 적다. 덕분에 오랫동안 특이구종도 없었다가, 나중에 구종 패치에서 재평가 받아 MC투심이 추가되었다.
  • 2000년대 초중반, 1972년생이라 다른 팀 가면 최고참 급이지만 소속팀이 노인정 한화 이글스라서(…) 커피 심부름을 했던 사진도 있다. 흠좀무. 물론 기자들 앞에서 장난 삼아 한 것. 류현진한테 시켰으면 되니까 리그 최고 에이스들이 커피 나르게 만드는 한화의 클래스 정민철 이후에는 현대에서 수혈한 새로운 한화의 영건이 이러한 기믹을 물려받기도 했었다(…).
  • 리그 구조상 프랜차이즈가 많은 한국프로야구, 그 중에서도 특히 프랜차이즈 스타가 많은 한화 이글스지만, 대전광역시만으로 따졌을 때 한화에서도 보기 드문 대전 사람.[14] 그런 걸 떠나서 2014년까지 평생 동안 대전을 벗어나 살아본 것은 단 2년뿐이다. 대전성애자 요미우리에서 선수생활을 했던 2000년, 2001년을 제외하고는 남들처럼 대학에 진학하느라 다른 도시에서 살아본 적도 없고, 코치 연수한다고 외국으로 나가 생활한 적도 없다.
  • 국가대표와 별로 인연이 없었다. 아시안 게임이나 올림픽에 출전한 경험이 전무. 처음으로 프로가 아시안 게임 등에 출전하게 된 것이 1998 방콕 아시안 게임인데 이때는 엔트리가 100% 미필자로만 채워졌었고, 2000 시드니 올림픽은 일본 진출 첫해라서 자연스럽게 이름이 거론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2007년 추가 엔트리에 이름을 올렸던 것이 전부. 다만 시드니 올림픽의 경우, 올림픽 예선전인 1999 서울 아시아 선수권 대표로 출전했었다. 또한 한일 슈퍼게임에도 1995년과 1999년 2회에 걸쳐 출전하여 호투했다.
  • 상복하고도 담을 쌓았다. 신인시절 염종석에게 신인상에서 밀린 것은 유명하지만, 그 이후로도 골든글러브 수상을 한 적이 없다. 두 자리 숫자 패전 때문에 번번이 발목을 잡혔기 때문.
  • 팬서비스와 관련해서 역대 최고의 수준이다. 신인 시절부터 팬들의 사인 요청을 거절한 경우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하며, 늘 친절하고 웃는 낯으로 대했다고 한다. 그밖에 일일이 거론하기 어려울 정도로 훈훈한 일화들이 잔뜩 존재하고 있다. ###
  • 90년대를 풍미했던 일본 여자아이돌 SPEED의 팬이라 카더라. 그래서 요미우리를 갔었나 AKB48팬이 아닌게 어디야
  • 위에도 언급했지만 방위병 출신인데 32사단에 입소해서 훈련 받았었다고 한다. 본인 말로는 32사단의 슈퍼스타였다고 하는데 옆에 있던 고유라 기자가 취재차 갔을때 32사단 근처에서 박찬호 얼굴 봤다고 자랑하는 슈퍼마켓 주인만 봤다고 디스했다

016 시즌, 대전 한화생명 이글스 파크 중계 당시 을 발에 묻히고 중계석에 들어온적이 있다. 당시 같이 중계를 했던 박재홍은 이를 회상하며 "해설 4년 하면서 똥을 밟고 중계실에 와서 중계실 바닥에 뭍인 사람은 정민철이 처음일꺼다"라고 하기도 했다. 그리고 에서 골프 치던 도중에 똥을 밟아서 잔디에다 똥을 닦아 낸적도 있다고(...)

  • 허구연의 말로는 선수 시절 잘 생겼었기 때문에 전 경기를 중계했었다면 여성 팬들이 많았을 것이라고 한다. 그 정수빈보다 더 많았을 거라고

7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기록
연도소속팀경기수이닝승률ERA피안타피홈런4사구탈삼진실점자책점WHIP
1992빙그레 이글스33195⅔
(5위)
1447-0.778
(3위)
2.48
(2위)
1411571145
(2위)
61541.068
199318148⅓1331-0.813
(1위)
2.24
(5위)
117104611040371.058
1994한화 이글스28218
(1위)
14100-0.5832.15
(1위)
156663196
(1위)
59520.972
199522162⅔1370-0.6503.21152125012765581.180
199632219⅔
(1위)
13121-0.5203.031731657203
(2위)
81741.006
199731208⅔
(2위)
14
(3위)
110-0.5602.46
(4위)
1721149160
(1위)
69571.040
199823148⅓1070-0.5883.1613312379755521.133
199932201⅔
(2위)
18
(2위)
81-0.6923.751792269151
(5위)
92841.170
연도소속팀경기수이닝승률ERA피안타피홈런4사구탈삼진실점자책점WHIP
2000요미우리 자이언츠418⅔200-1.0004.8221441610101.286
2001840⅔120-0.3334.65438182822211.451
연도소속팀경기수이닝승률ERA피안타피홈런4사구탈삼진실점자책점WHIP
2002한화 이글스26138713000.3505.35144194811683821.326
200326139⅔1110000.5244.0013218557365621.310
2004135406000.0007.677611212250461.741
200525115⅔93000.7504.8212414325670621.297
200625130⅔713000.3503.9314218476268571.408
200726155⅓12
(5위)
5000.706
(4위)
2.90
(3위)
15511406658501.204
200825127⅓610000.3755.2314413455678741.445
200983106000.0009.87547182136342.323
KBO 통산(16시즌)3932394⅔
(2위)
161
(2위)
1281000.5573.5121942157481661
(4위)
10309351.190
NPB 통산(2시즌)1259⅓320-0.6004.706412224432311.399
완투, 완봉기록
년도완투완봉
1992년10완투
(5위)
3완봉
(1위)
1993년10완투
(4위)
0완봉
1994년9완투
(3위)
4완봉
(2위)
1995년8완투
(5위)
2완봉
(6위)
1996년9완투
(3위)
4완봉
(1위)
1997년10완투
(1위)
4완봉
(1위)
1998년2완투0완봉
1999년2완투1완봉
(2위)
2000년1완투1완봉
2001년1완투0완봉
2007년1완투
(5위)
1완봉
(2위)
KBO 통산60완투20완봉
(2위)
NPB 통산2완투1완봉
보유 기록
최연소 100승27세 3개월 2일
  1. 네이버 프로필에서 한때 광주광역시 출신으로 잘못 기입된 적이 있었다. 정민철 본인은 좀 어이없어했다고. 그 뒤로는 대전광역시 출신으로 제대로 나온다.
  2. 생년대로라면 고졸신인이라도 91년도 데뷔가 맞지만, 중학교 시절 왜소한 체구 탓에, 그리고 자신이 원했던 대전고 야구부에 가기 위해 학업을 1년 쉬었다.
  3. 이 영구결번은 논란이 좀 있다. 자세한 건 밑의 내용을 참조.
  4. 한화 이글스 투수코치 시절의 모습.
  5. 현역시절 정민철의 커브는 '백팔번뇌 커브'라고 할 정도로 위력이 좋았다. 150Km/h에 육박하는 직구를 던진 후 낙차폭이 큰 100km/h대의 슬로커브를 던져서 타자들을 많이 고뇌시켰다(…). 이 슬로커브 말고도 12시에서 6시로 낙차 크게 떨어지는 파워커브도 보유했다.
  6. 표면상으로만 한대화 감독이 투수 교체 타이밍을 정민철 코치에게 물어보고, 대게 그의 의견을 거의 따랐다.
  7. 김혁민은 2군에서 갑자기 달라져서 돌아와서 당시 2군 코치였던 송진우의 공이라는 말이 많았다.
  8. 코치때 욕먹은걸 생각해보면, 역시 이론과 실전은 다르다.
  9. 1992년 입단할 때, LA 다저스의 에이스 오렐 허샤이저를 좋아해서 달았다고 전해진다.
  10. 전성기 정민철의 커브는 주무기였던 돌같은 직구를 받혀주기 위한 부무기였고 전성기 김원형의 커브는 희대의 마구인 주무기였던 점에서 차이가 있긴 하지만...
  11. 솔직히 배가 나오기 시작(...).
  12. 이런 저런 정황으로 볼때 선동열은 팀을 가리지 않고 좋은 투수가 나오면 애착을 갖는듯하다. 인터뷰를 봐도 자기와 같은 케이스인 직구-슬라이더를 잘쓰는 김광현, 심지어 같은팀 후배겸 제자인 윤석민보다 타팀 에이스 류현진을 더 아끼는 발언이 있다.
  13. 다승을 기준으로하면 99년이 커리어하이겠지만 94년 방어율을 생각해보자.
  14. 한화의 레전드 중 대전 출생은 정민철과 강석천, 구대성 세 명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