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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김동주(金東柱 / Dong-joo Kim) |
생년월일 | 1976년 2월 3일 |
신장 | 180cm 100kg, B형 |
출신지 | 부산광역시[1] |
학력 | 중대초-배명중-배명고-고려대 |
포지션 | 내야수(3루수)[2]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1998년 OB 베어스 1차 지명 |
소속팀 | OB 베어스/두산 베어스(1998~2014) |
응원가 | 입장시: Pirates of the Caribbean OST 《He's a pirate》 타격시: 동요《비행기》[3][4] |
역대수상 | ||||
2000년, 2007년, 2008년 한국프로야구 3루수 골든글러브 수상자 2003년 한국프로야구 지명타자 골든글러브 수상자 | ||||
2003년 한국프로야구 타격왕 | ||||
2007년 한국프로야구 최고 출루율 | ||||
2009년 한국프로야구 준플레이오프 MVP |
OB/두산 베어스 등번호 18번 | |||||
여준홍(1995~1997) | → | 김동주(1998~2014) | → | 성영훈(2015) |
두산 베어스 역대 주장 | ||||||
안경현 (2004) | → | 김동주 (2005) | → | 홍성흔 (2006~2007) | ||
두산 베어스 역대 주장 | ||||||
홍성흔 (2006~2007) | → | 김동주 (2008~2009) | → | 손시헌 (2010~2011) |
목차
1 소개
선수로는 한대화와 더불어 한국 사상 최고의 3루수로 꼽히지만 인성면으로 문제를 제기할 필요가 있는 선수
전 두산 베어스 소속의 야구선수. 두산의 프랜차이즈 선수였다. 밑의 항목에 나오는 비판거리들로 인하여 타팀팬들에게 김동주의 이미지는 최악을 달리며 말년의 행보로 인해 두산팬들 가운데서도 호불호가 엇갈리는 선수가 되어 버렸으나, 단순히 커리어만으로 따졌을 때 김동주가 한국프로야구 역대 최고의 3루수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15년 이상 두산 베어스를 이끌고 있던 선수로, 대표적인 별명은 두목곰. 일본 프로야구로 진출하는 것을 희망했으나 1회 WBC 헤드퍼스트슬라이딩 부상 등이 부정적인 영향을 주어 바라던 일본행은 결국 무산되었다. 두산에서의 마지막 시즌이었던 2014년 시즌 기준 두산에선 홍성흔과 함께 두산에서 우승반지를 낀 적이 있는 둘 뿐인 현역이었다. 그리고 다음해 두산은 우승한다.
2 아마추어 시절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 70주년 기념 OB All-Star in 2016. 동아일보 | ||||
장효조 OF / 상원고 | 이정훈 OF / 상원고 | 박재홍 OF / 광주제일고 | ||
류중일 SS / 경북고 | 김성래 2B / 경북고 | |||
김동주 3B / 배명고 | 남우식경북고 송진우세광고 | 유지홍 1B / 선린상고 | ||
백인천 C / 경동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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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고등학교 시절 김동주 |
고교 시절엔 저래보여도 늘씬한 유격수였다. 아마추어 때부터 천재 야구선수로 유명했으며 주로 유격수를 봤으나, 사실은 포수를 제외한 전 포지션에서 뛰었다.[5] 물론 주 포지션은 어디까지나 유격수였다. 유격수로 뛴 경험을 바탕으로 벌크가 붙은 프로시절까지 3루 수비를 소화할 수 있었던 것. 한 마디로 야구천재. 또한, 같은 시기 신일고에서 맹활약하던 김재현과 라이벌 관계를 구축하기도 했다.
투수로서는 최고 145km에 이르는 강속구를 던질 수 있었고,[6] 타자로서는 정교한 컨택능력과 강력한 파워를 모두 갖춘 대형 내야수감으로 각광받았다. 고려대학교에 입학했는데, 1학년 애송이가 그 군기잡힌 고려대학교 야구부[7]의 감독에게 "공격력을 살릴 수 있게 유격수가 아닌 다른 포지션에서 뛰게 해 주세요."라고 요청했다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2016년 5월 23일, 더그아웃에서의 인터뷰에서 기자가 이와 관련한 질문을 던졌고 본인의 언급에 따르면 당시 고려대 야구부의 군기가 군대보다 셌기 때문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며, 단지 김종국, 홍원기 같은 선배들에게 밀린 거라고 한다. 이 인터뷰에서 두루뭉실하게 넘겼던 가정사 부분과, 당연히 부인할 수밖에 없는 국밥사건과 달리 20년 전의 일이자 따로 부인할 필요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부인한 부분이기 때문에 김동주 본인의 말이 더 진실에 가깝다고 판단할 수 있다.
당시 대학이나 프로나 할 거 없이 김동주와 김재현을 잡으려고 구단들과 대학의 물밑작업이 치열했다. 결국 프로로 직행한 김재현이나 대학을 거친 김동주나 모두 잠실을 홈으로 쓰는 팀에 입단했고 각각 팀의 주축이 되어 우승까지 시키며 좋은 결말을 맞이했다.
당시 고려대학교 투수 인스트럭터였던 김인식은 그를 투수로 키우려 했으나, 본인은 타자쪽으로 의향을 굳혔다고 한다. 그리고 감독의 결정에 따라 김동주는 최고의 아마추어 타자로 이름을 높였다. (1학년때 우익수, 2학년 이후로는 2루 및 3루수로 출장했다고 본인이 밝혔다.)
아마추어 시절 그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몇가지 이야기가 있는데 김성근감독이 고교야구를 보러갔을때 김동주가 당겨서 홈런 치는 모습을 보고 감탄하자 당시 배명고 감독이 "밀어서 치라고 해볼까요?"라고 하고 김동주에게 밀어치라고 말했더니 다음타석에 바로 밀어서 홈런을 쳐냈다고 한다. 2학년땐 충암고와의 경기에서 8-0으로 지는경기를 만루홈런 두방으로 동점을 만들더니 끝내 연장에서 쓰리런 홈런을 쳐서 혼자 11타점으로 경기를 11-8로 뒤집어 버린적도 있다. 정말 무시무시했던 4번타자.
3 프로 생활
3.1 두목곰의 전성시대
OB 베어스의 1차지명을 받았고, 1998년 데뷔하여 그 해부터 심정수, 타이론 우즈와 우동수 트리오를 구축하며 베어스의 전성기를 연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다. 심정수가 트레이드된 이후에는 심재학, 타이론 우즈와 우동학 트리오, 혹은 우재주 트리오를 구축하여 두산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프로 입성 첫 해에는 좌익수로 뛰었고, 그 다음 해부터 3루수로 전향하였다. 프로에 와서도 그 활약상은 계속 이어져서 통산타율 3할을 넘는 정교한 타격(통산 타율 .312)을 자랑했고, 역시 4할을 훨씬 넘어가는 통산 출루율, 5할대 중반의 통산 장타율을 기록하는 대타자로 거듭났다.
홈런 숫자는 이승엽에 비하면 많지 않지만 넓은 잠실구장을 홈으로 사용하면서도 한 시즌 20여개의 홈런을 쳐낼 수 있는 장타력을 갖췄으며, 2000년 5월 잠실구장에서 최초로 장외홈런을 기록한 일도 있다. 통산 기록만 보면 홈런을 제외하곤 양준혁의 기록과 비슷하게 가고 있다. 김동주는 부족한 홈런 수에 대해 넓은 잠실을 홈으로 쓰기에 타격 어프로치를 다르게 가져간 데 기인한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나이가 들면서 노쇠화가 진행되긴 했으나 3루 수비 또한 매우 안정적이었다. 벌크를 불린 탓에 좌우 횡 수비 폭은 그렇게 넓은 것은 아니지만 안정적인 포구와 순간적인 대쉬능력, 투수를 볼 수 있었을 정도의 강력한 어깨를 바탕으로 좋은 3루 수비를 보여주는 선수였다. 2010년 시즌부터는 이원석이나 윤석민 등에게 3루를 맡기고 지명타자로 주로 나왔다.
또한, 의외로 주루 플레이도 거포라는 이미지에 비해 뛰어났는데 벌크업에 의해 스피드가 그렇게 빠른 것은 아니었지만 주루 센스만큼은 매우 뛰어났다. 2007년도에는 두자리수 도루를 기록할 정도.[8] 그의 뛰어난 주루 센스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 바로 베이징 올림픽 일본전 김현수의 역전 적시타 장면이다.[9]
단점이라면 신인시절부터 잔부상이 많은 유리몸이라서 경기에 빠질 때가 많았다. 전 경기 출장 시즌은 한 시즌도 없다. 심지어 2009년 여름에는 봉와직염으로 2군으로 내려갔던 적도 있다. 그리고 2010년에도….
공/수에서 모두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1998년 아시안게임을 시작으로, 국제대회가 열리면 꼬박꼬박 차출되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마지막으로 국가대표에서 은퇴한다고 밝힌 바 있다.[10]
김한수의 현역 시절에는 김동주와 최고의 3루수 자리를 놓고 경쟁을 벌였다. 타격 성적에서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으나 기자단 인기투표라는 특성상 골든글러브 부문에서는 2000년에만 김동주가 수상하였고, 이후 2001~2004년까지 모두 김한수가 수상.[11] 김한수 은퇴 후엔 이렇다 할 경쟁자 없이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나 했지만 2005, 2006년에는 이범호가 수상하였으며, 2009년에는 김상현이, 2010년에는 이대호가 골든글러브를 수상하였다. 그리고 2011, 2012년에는 최정이 수상. 하지만 골든글러브를 제쳐두더라도 김동주의 커리어는 역대 한국 3루수 중 단연 최고다.
대체로 큰 경기에 약하다는 소리가 있지만 딱히 그렇지만도 않다. 투수들에게 가장 위압감을 주는 타자로 꾸준히 거론되기도 하고, 역대 포스트시즌 성적도 시즌 성적보다는 못하지만 나쁘진 않은 편. 느낌이 잘 오지 않는다면 김거김을 생각해보자. 2001년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박동희를 상대로 역전 만루홈런을 날렸는데 1982년 한국시리즈 김유동(OB) 이후 한국시리즈 사상 두 번째 만루홈런이었다. 포스트시즌 타점 기록 1위의 주인공이다.
롯데 자이언츠와의 2010년 준플레이오프에서 19타수 6안타 4볼넷 1타점 3득점, 타율 .316, 장타율 .368, 출루율 .435를 기록했고, 팀은 2연패 뒤 3연승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시리즈 전적 1승 1패인 2010년 10월 10일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와의 2010년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팀이 스코어 4:0으로 지던 2회말 무사 1, 3루에서 상대 선발 투수 장원삼을 상대로 1타점 적시타를 날리며 포스트시즌에서 37타점째를 기록하며 포스트시즌 타점 1위에 등극했다.
이날 김동주는 4타수 3안타 2볼넷 1타점을 기록했고, 팀은 연장 11회초에 2점을 내줬으나 11회말에 3점을 뽑아 스코어 8:9로 이겼다.
2010년 플레이오프에서 21타수 10안타 1홈런 3볼넷 8타점[12] 3득점, 타율 .476, 장타율 .714, 출루율 .542로 맹활약했지만, 팀은 시리즈 전적 2승 3패로 탈락했다.
2010년 포스트시즌에서 40타수 16안타 1홈런 7볼넷 9타점 6득점, 타율 .400, 장타율 .550, 출루율 .489를 기록했다.
2011년 7월 21일 롯데와의 3연전 마지막 경기에서 장원준에게 동점홈런을 뽑아내면서, 5년 연속 두자리수 홈런 달성에 성공했다.
3.2 몰락
김진욱 감독이 부임한 2012년 시즌에는 부상 때문인지 1군 경기에서 뛰는 모습을 좀처럼 보기 힘들었다. 이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2012년 시즌 두산 타선의 무게감이 많이 줄었다.[13] 9월 이후로 부상은 다 나은 듯했으나, 여전히 1군으로 올라오지 못하였다. 포스트시즌에서도 그의 이름은 엔트리에 없었다. 아직 김동주가 꼰대짓을 한다는 심증이 없었던 대다수의 두산 팬들은 김동주를 그리워하면서 김진욱 감독을 자기 입맛에 맞는 선수만 기용한다면서 깠다. osen의 박현철 기자가 2012년 9월 9일 라디오볼에서 "김동주는 언제 올라오나요? 1군에서 볼수 있나요?"라는 청취자의 질문에 "2군에서 깽판친 게 김진욱 감독 귀에 들어갔다. 팀케미를 먼저 생각하지 않으면 1군에 올라오기는 힘들 것"이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2012년 시즌 후 두산 구단이 팀의 구심점이 될 선수가 필요하다며 홍성흔을 다시 영입하면서, 김동주가 프론트나 코칭스탭들에게 찍힌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돌았다. 여론을 의식했기 때문인지, 김진욱 감독은 2013년에도 김동주를 끌어안고 가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
2013년 스프링캠프 기사에서 당뇨병을 지병으로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14][15] 당뇨가 있음에도 몸관리를 소홀히 하여 선수생활을 일찍 접은 사례가 있는지라 팬들은 걱정. 결국 시즌이 시작된 후 예년에 비해 부진하다가 5월 17일 또 부상으로(...)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된 뒤 2012년 시즌과 마찬가지로 시즌 마지막 경기까지 1군에 복귀하지 못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기량 저하가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2011년까지만 해도 팀내 최다 홈런을 기록하며 팀을 이끌었던 4번타자가 바로 다음 해부터 벤치도 아닌 2군에만 머무르는 모습은 팬들의 마음을 씁쓸하게 하는 일.
설상가상으로 2군 경기중 찍힌 사진에서 이게 김동주인가 오재원인가 싶을 정도로 살이 많이 빠진 모습을 드러냈다. 사실 당뇨가 본격적으로 문제가 되는 건 체중이 빠지면서부터다.[16] 즉 당뇨로 인해 체중 관리가 힘들어진 것이 급격한 부진의 원인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본인이 아직 죽지 않았음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2014년 시즌 초부터 다시 2군을 폭격하기 시작했다. 2014년 5월 3일 기준 퓨처스리그에서 22경기에 출장해서 타율 .463 출루율 .516 장타율 .722 3홈런 14타점 OPS 1.238의 맹활약을 하였다.
송일수 감독은 시즌 초 부진한 홍성흔을 꾸준히 5번타자로 기용하면서도 김동주를 1군에 콜업하지 않았는데, 급기야 7월 5일 인터뷰에서 지금 김동주는 필요없다는 발언을 하였다. 5월 말부터 성적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대다수 팬들은 김동주에게 은퇴를 종용하는 뜻으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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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것이 뜨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 후...
7월 9일 김동주, 두산에 자리 없다면 풀어 달라.라는 기사가 떴다. 김동주 본인이 “2군에서 열심히 몸을 만들면서 퓨처스리그 경기를 뛰었다. 그러나 이렇게 전반기가 끝난다. 계속 희망을 안고 기다렸지만, 이제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 팀에서 다시 기회를 얻지 못할 것 같다.”라며 구단에 풀어줄 것을 요구한다고 한다.
2014년 10월 14일 "김동주, 짐 싸서 두산 떠났다"는 기사가 떴다. 기사가 뜨고난 뒤 몇 시간 뒤 두산 프런트는 김동주가 떠난 것이 아니며, 이천 베이스볼 파크에 있는 2군 선수들이 일본으로 훈련을 가 지금 10명 남짓 남아 있기에 김동주가 개인훈련을 할 수 있도록 조치한 것이라고 해명했으나, 결국 2014년 11월 20일, 구단과 본인의 합의 하에 보류선수 명단에서 제외되어 두산을 떠나게 됐다.
3.3 방출 이후
두산에서 방출된 이후 김동주 본인과 팬들에게는 씁쓸한 현실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기존의 구단들은 물론이요 심지어는 팀내 고참리더가 부족한 KT마저도 "김동주가 이호준처럼 팀내 어린 선수들의 롤모델이 되거나 다독여줄 수 있을지 의문이며, 김동주를 컨트롤할 만한 고참선수들도 없다."라며 대놓고 디스하였다. 한 마디로, 김동주가 팀워크를 깨고 막나갈 것을 우려한 것이다.
사실, 선수가 나이가 들면 자연스레 기량이 떨어져서 전성기 시절보다 못한 성적을 내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현상이다. 하지만, 나이가 어린 선수들에게 고참으로서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해주면서 후배들에게 아낌없는 조언과 팀 케미스트리를 향상시키는 선수들도 많다.
2014년 기준으로 이런 덕아웃 리더로는 위에 언급한 호부지 외에도 삼성의 이승엽, SK의 박진만, 롯데의 조성환, 넥센의 송지만 등이 있다. 또 KIA의 이종범이 2012년 강제은퇴를 했을 때 팬들이 걱정했던 것도 형저뫼와 서재앙을 믿을 수 없으니 다 이런 이유에서였다. 즉 두산이 홍성흔을 영입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
결국 김동주에 대한 저런 평가는 포지션이나 기량 문제는 둘째치고 팀 사기를 저해한다는 소리밖에 안된다. 더욱 비참한 것은 언론마저도 김동주에 우호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동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팬들은 도대체 평소의 경기외적 행실이 간통말고 또 있었구나! 얼마나 개판이었길래 현장과 구단들 그리고 언론마저도 한마음이 되어서 저런 모욕을 당해야하는 것이냐며 안타까움을 표시하고 있다.
KT 조범현 감독은 원한다면 입단테스트 기회는 주겠다고 말했다. 영입한다곤 안했다. KT 팬들의 반응은 좋지 않은 편. 한화 김성근 감독도 기회를 줄 수 있다고 언급했으나, 필요한 선수는 바로 영입하는 것이 김성근 스타일인 것을 감안하면 저렇게 프런트와 협의해야 한다는 식의 발언은 별로 원하지 않는다는 말을 돌려말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참조 게다가 한화에는 김재현이 코치로, 조인성이 고참으로,[17] 김태균이 거포 내야수로[18] 자리잡고 있는데다, 3루수, 1루수, 지명타자 자리 모두 경쟁이 치열하고, 장기적인 전력 재정비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김동주가 낄 자리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김동주에 대한 우호적인 의견 조차 스스로 없애버리는 인터뷰가 두 개 연달아 터져버렸는데...
2014년 11월 24일 아침에 kt든 한화든, 어느 팀이든 믿어주시면 헌신이라는 기사가 떴다. 하지만 기사 말미에 늦게 얻은 아이들에게 야구선수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동정심을 유발하는 바람에 엠엘비파크 한게는 순식간에 화이야. 전처 소생의 자녀들을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는 인터뷰에 그나마 있던 쉴더들조차 돌아섰다. 오죽하면 댓글 중에 하나가 '인간쓰레기 셀프 인증'일 정도.
11월 26일 KT가 베테랑 역할을 할 선수로 롯데에서 방출된 장성호를 입단테스트도 없이 영입하면서, 김동주의 KT 입단 가능성은 더욱 낮아진 상황.
결국 사실상 은퇴를 선언할 것으로 보였으나...
12월 11일 놀랍게도 kt와 계약 직전까지 갔던 것이 드러났다. "팀 케미스트리를 해칠 수 있다"라는 얘기가 많이 나왔고아니, 평소 평판이 어떻길래 이런 말이 대놓고 기사에 나오나 조범현 감독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조 감독이 김동주를 만나보고 멘탈면에서 큰 문제가 없을 거라고 판단해서 계약을 추진했다고. 그러나 세부 조율에서 김동주가 사인을 하지 않아서 계약이 물건너갔다는 내용이 보도되었다. kt행 무산 기사 김동주의 입장 기사 말미에는 김성근 감독이 테스트 기회를 줄 것이라고 멘트했던 것을 언급하고 있으나 한화는 kt보다도 김동주의 자리가 없다. 김동주가 무슨 생각으로 밥상을 걷어찼는지 모두가 어리둥절해하는 중. 네티즌들은 후배한테 패드립하면서 국그릇을 집어던졌던 인물이 뭘 잘했나는 반응이다. 순순히 두산에서 은퇴했더라면 이런 꼴은 안 봤을 것이라는 것이 중론
12월 15일 엠스플 스포츠투나잇에서 박동희가 밝힌 바에 따르면 kt와의 결렬 원인은 전적으로 금액차이라고 한다. 김동주는 기존에 받던 금액의 절반을, kt는 1억을 제시했다고. 링크 '기존에 받던 금액'을 명목연봉인 7억으로 보느냐 14시즌 2군에 내내 있어서 절반으로 깎인 금액인 3.5억으로 보느냐에 따라 김동주가 얼마를 요구했는지가 갈리겠지만, 3.5억을 요구했든 1.75억을 요구했든 kt가 제시한 1억도 은퇴 직전의 베테랑 예우로서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며[19], 한화에서는 입단 테스트 기회를 주겠다고 했지만, 테스트해서 뽑은 선수에게 1억 이상을 줄리가 만무하다는 점에서 김동주가 아직도 제대로 현실 인식을 못 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오고 있다.
물론 2015년 시즌이 시작된 후 kt 위즈가 소홀한 전력 보강 등으로 빈약한 타선 등의 문제가 이어지며 1할대 승률을 올리면서 김동주를 영입하지 않은 것을 비판하는 일부 팬들도 있었으나 그래도 김동주 같이 팀 분위기를 저해할 수 있는 선수를 일찌감치 영입하지 않은 것이 잘 된 것이라는 여론이 압도적이다. 이후 kt의 시즌 중의 트레이드[20]와 외국인 용병 교체[21] 등으로 타선이 재미를 보면서, 김동주 영입 이야기는 더 나오지 않았다.
2014년 5월의 기사에 의하면 연봉은 7억이지만 실수령액은 2억이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김동주가 요구한 '기존 연봉의 절반'의 기준이 실수령액이 아닌 명목연봉(7억)일 가능성도 있다. 실수령액의 절반을 요구했다면 kt의 1억을 거절할 이유가 없기 때문.
다음 날 12월 16일 김성근 감독은 언론과 인터뷰에서 김동주를 영입할 생각이 없음을 밝혔다. 게다가 테스트 제안을 했다는 소문도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베테랑을 중시하는 김성근 감독조차도 영입을 꺼렸을 정도면 말 다한거다 다른 팀들의 입장도 "기존 선수들의 사기가 우려된다", "데려오는 것 자체가 부담이다" 등으로 한결같이 부정적이다.
12월 18일 kt는 '백의종군'을 기대하며 1억을 책정해놓고 있었으나 김동주의 요구와 큰 차이가 있었다는 기사가 났으며, 장성호는 비슷한 제안을 받고 kt행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19일에 나온 새 기사에 따르면 "김동주는 kt에 고액 연봉을 요구했다. kt는 베테랑을 예우하는 상징적인 액수를 제시했고 당연히 도장을 찍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빗나갔다. 객관적인 평가와 팀 내부 형평성 등을 고려할 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김동주가 요구한 금액이 명목연봉 7억의 절반인 3.5억일 거라고 거의 확정되는 분위기. 거기다 26일 "김동주는 kt가 제시한 것보다 훨씬 많은 금액을 원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작은 차이는 만나면서 천천히 조율할 수도 있지만, 이번에 양측이 확인한 금액의 차이는 그런 수준을 크게 뛰어 넘었다. 단번에 무산된 것이 당연하다고 보일 정도였다."라는 기사가 나오면서 확인사살.
2015년 1월 27일 정수근이 자신의 SNS에 김동주가 복귀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남겼으나, KT에서는 낮은 연봉을 감수하면서 야구를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보이지 않는 한 영입할 생각이 없다고 밝혔다.# 네티즌들은, 추하다! 은퇴해라!라는 반응과 정 실력에 자신이 있으면 손민한이나 박명환처럼 5천만원이라는 푼돈[22]이라도 일단 받고 활약도에 따른 옵션을 걸어서 실력으로 돈을 따내면 될 거 아니냐, 왜 그러니? 라는 반응.
결국 1월 31일, 은퇴를 선언했다. “현역 생활 동안 정말 최고의 팬들과 함께 했다. 팬들에게 꼭 고맙다는 말을 꼭 하고 싶었다. 끝까지 믿어준 김인식 감독님과 팬들에게 마지막으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서 죄송하다”는 말을 남겼다. 이로써 여러 의미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의 선수생활은 17년만에 막을 내렸다. 관련기사 그러나 해당 기사 마지막에 실린 사진의 플래카드는 2014년 7월경의 것이며, 국밥 사건이 터진 후 조강지처와 아들을 버린 과거사가 재조명되면서 우호적인 여론은 사그러드는 분위기. 여기에 은퇴 발표 후 이어진 2군에 관심 가져달라, 가족들이 받을 상처가 두렵다라는 기사들로 인해 이미지는 점점 나빠지고 있다 그놈의 가족드립 참 대단한 가장 나셨다 그죠
연봉 협상에서도 백의종군하여, 선수로 뛸 수 있는 마지막 기회 조차 뻥 차버리고, 그렇게 야구계를 떠났다.
4 은퇴 이후 근황
2015년 12월 중순에 모 처호프집이다에서 팬들이 조촐하게 은퇴식을 해주었다.#
최근 박재홍 야구 해설위원이 출연중인 mbc sports+ 구구절절 프로그램에서 김동주가 화장품 사업을 준비중이라는 사실을 밝혔고, 인터뷰에서도 '아내의 화장품 사업을 돕고 있다'고 밝혔다.
스포츠 매거진 더그아웃 과의 인터뷰가 2016년 3월호부터 5월호까지에 실렸다. 2016년 5월 23일자 더그아웃에 나온 인터뷰에서는 아래에 나온 국그릇 사건이 왜곡되었다고 해명한 바 있다.
한 때 영구결번까지 노릴법했고, 베어스를 17년간 이끌었던 선수치고는 너무 쓸쓸한 퇴장이었다.
5 김동주에 대한 비판
우타자 중에서도 톱으로 꼽히는 성적이지만, 김동주에 대한 평은 다른 레전드급 선수들에 비해 한참 낮은 편이다. 물론 누적스탯이 다소 약한 탓도 있지만, 아래에 기술하는 야구 외적인 이유들이 한 몫 하기도 한다.
통산 타출장 3-4-5를 찍어주고 전성기에는 한 시즌에 20개 정도의 홈런을 거뜬히 때려내는 등 뛰어난 성적[23][24]을 남겼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공사 양면으로 잡음이 많았다. 때문에 야갤 등지에서는 간통주, 버비오빠, 합법갑[25], 사랑은 김동주[26]라 불리기도 한다. 그나마 프랜차이즈 스타 대접을 해주던 두산 팬들도 김동주와 두산의 결별 과정과 결별 이전 2군 시절 때 이야기, 결별 이후 행적 등으로 인해 대부분 등을 돌렸다.
5.1 재계약 잡음
소속팀에 대한 애정이 없고[27] 돈을 밝힌다고 하여 김돈줘, 그 과정에서 연봉 9억을 달라고 해서 김구억이라는 별명이 있다[28]. 2009년에 팀의 주장을 맡기도 했지만…. 2007시즌이 끝나고 첫 번째 일본 진출을 타진했을때 두산에 60억이 넘는 금액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막상 일본 구단에서는 김동주에게 전혀 관심이나 접촉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김동주 본인이 집요하게 일본 진출을 노렸었다. 이때문에 일본 진출이 목적이 아니라 이혼 소송중에 있는 전처에게 줄 위자료를 떼먹기 위해 일본에 진출한다는 썰이 돌게되었다. 당시 팬들의 반응은 '설마 그 정도로 XXX는 아니겠지 였지만.....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본인이 직접 인터뷰를 통해 사실 인증을 해서 팬들을 맨붕시켰다[29]' 2009시즌에는 연봉 7억을 받았다.
그 때문에 KIA 타이거즈에 트레이드될 뻔했다. 2002시즌 전이었다. 당시 두산이 요구한 트레이드 조건은 20억+후보급 선수였는데 여기에 유동훈이 끼어 있었다. 그런데 트레이드 내용이 까발려지는 바람에 무산. 비슷한 시기에[30] 삼성 라이온즈와도 트레이드 썰이 있었다. 트레이드 상대자는 김한수였지만, 두산측이 현금을 끼워달라고 요구하는 바람에 삼성 측에서 그냥 김한수를 믿기로 해서 협상은 결렬되었다. 그리고 김한수는 골글 라이벌로 각성한다
2011년에는 두산과 계약기간에서의 입장 차이로 인해 우선협상 기간에 타결을 보지 못하고 FA 시장에 뛰쳐나갔고, 11월 20일에는 롯데 자이언츠 이적설이 나왔다. 당시 감독이었던 양승호와 과거 팀 동료였던 홍성흔까지 나서서 적극 추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막대한 연봉으로 인한 보상금 문제 때문에 롯데도 발을 뺐고, 결국 FA시장에서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고 두산과 재계약을 하게 되었다. 전구단 상대 협상기간이 되면서 바로 두산과의 계약이 타결되지 않을까 했으나 김동주 개인 사정으로 협상이 계속 연기되었다. 팬들은 당연히 두산의 프랜차이즈 스타인만큼 두산에서 뛰다가 은퇴하기를 바랐지만, 김동주는 계속해서 돈좀 더 만져보겠다고 이러니 속이 타들어가던 상황.
결국 2012년 초에 김동주가 바라던 대로 3년 32억에 두산과 재계약했다. 하지만 2012년 시즌은 부상과 부진에 시달리다가 1군 엔트리에서 말소되었으며 시즌이 끝나고 몇 년이 지나도록 복귀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로 김돈줘 행위 FA 때문에 두산 프런트 및 그룹진들에게 밉보이고, 마침 부진하니까 비싼 김동주를 2군에 박아놓는다는 의견도 존재한다.[31] 마침 두산그룹 상황도 안 좋고 하니까
5.2 팀 케미스트리 잡음
상술했듯 김동주는 팀 캐미스트리에 잡음을 일으키는 선수로 찍혀 여러 구단들이 영입을 꺼렸다. 그나마 kt 위즈에 갈 수도 있었지만 결국 무산되었다.
고참 선수가 구단 수뇌부에게 미운털 박혀 팽당하는거야 드문일이 아니지만 김동주 정도의 커리어를 가진 선수가 타 구단, 동료, 언론 그 누구의 옹호도 받지 못한채 쓸쓸히 은퇴하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다. 그의 현역 시절 행실이 어떠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부분. 되려 그간 쉬쉬해왔던 그의 고참, 프로답지 못한 행실들이 속속 드러나면서 비판 여론만 커지고 있다.
한 동료 선수는 “시즌 때 방망이 스폰서에서 나오는 배트 티켓 여유분이 꽤 많았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주위에서 티켓을 좀 나눠줄 수 있는지 묻자 현금화해야 한다며 매몰차게 거절하더라. 잘 나갈 때 대인배적인 씀씀이를 보여줬더라면 어땠을까 싶다”라고 증언했다.
또 다른 기사에서는 김동주가 그라운드 안팎 정도가 아니라 아예 타석 안팎에서 행실이 달라졌다거나, 선수생활 말미에는 강한 투수가 나오자 출장을 피하고 약한 투수가 나오자 출장하려 했다거나 하는 등의 사례를 밝히기도 했다. 이게 사실이라면 김진욱 감독이 김동주를 배제한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팬들은 그를 두목곰이라 불렸지만 그는 전혀 고참답지 못했다.
게다가 2014년 11월 29일 인터뷰에서 2군 후배가 선배밥을 안 챙긴다는 이유로 15일간이나 꽁하니 지켜보다가 국그릇을 엎었다는 개 꼰대짓 일화를 미담이랍시고 자랑해서, "저게 지난 2년간 많이 깨지고 느낀 바가 많다는 사람이 할 말이냐?" 라는 평을 들었다. 장성호를 선택한 KT의 안목이 탁월했음을 알 수 있다 논란이 일자 국그릇 부분이 기사에서 삭제됐으나 이미 엎질러진 국(...). 그리고 국동주, 국밥갑이라는 별명이 추가로 생겼다(...).
기자 : 베테랑은 남이 하기 싫은 말을 앞서서 해야 한다.김동주 : 지금은 군에 입대한 유망주 후배가 있다. 함께 2군에서 점심을 먹는데 늘 자기 식사만 챙기더라. 15일을 지켜봤다. 내 연차에 할 말인지 아닌지 생각했다. 그러다가 국그릇을 엎었다. '너는 선배 없냐. 동료 없냐. 부모님 없냐'라고 야단쳤다. 나중에 입대할 때 문자를 보내왔더라. '선배님. 저 제대하면 꼭 큰 사람 될게요'라고. 고마웠다. 후배들을 1~2년 가까이에서 보니까 이제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알겠더라. 후배들이 술 먹고 사고 치지 않게, 다른 길로 빠지지 않고 야구를 하도록 잡아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 삭제된 국밥 부분 전문
이 말이 공개되자마자, 네티즌은 분개했고, 두산 팬이건 아니건 간에 모두 열 받아서 김동주한테 남아있던 감정 조차 모두 떨어졌다며 온갖 욕을 퍼붓는 중. 물론, 막내가 온갖 심부름을 도맡아하는 선후배 문화야 김동주만의 문제는 아니니 그렇다쳐도 부모님 없냐는 등의 패드립을 친 건 도저히 쉴드가 불가능한 사건.
이러한 병크 및 상술된 말년의 행보들로 인해 두산 구단 내부에서조차 영구결번은 언감생심이고 은퇴식조차 회의론이 나오고 있을 정도로 김동주의 입지는 좁아졌다.# 이미 그의 배번이었던 18번은 성영훈에게 돌아간 상황. 한때 두산 구단 홈페이지에는 성영훈의 번호가 27번으로 표시되었던 적이 있었기에 정수근의 SNS와 엮여서 김동주가 두산으로 복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설레발이 있었으나, 홈페이지가 미처 정비가 되지 않아서 그랬을 뿐이었다.
레전드급 타자임에도 이래저래 참 씁쓸한 말년이다. 김동주가 은퇴를 선언한 이후, 박동희는 단 한마디의 직접적인 비판도 없이 팬을 대하는 태도, 사람을 대하는 태도, 가족 생활에 임하는 태도의 세 가지 측면에서 간접적이지만 신랄하게 김동주를 비판하는 칼럼을 써서 존경받는 레전드의 자격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하기도 했다.[32]
현재 두산 베어스 갤러리 에서는 '인성이 좀 별로인 정도면 레전드 대우 받을 선수인데 나쁜 정도가 아니라 쓰레기(...) 수준이라 레전드 대우는 못해준다'고 조롱말하는 분위기. 은퇴 직전의 삽질과 진상짓 때문에 실망할대로 실망해서, 실력과 재능은 인정하고 아까워 하지만 선수에 대한 쉴드는 아예 찾아 볼수가 없다.
5.3 사생활에 대한 비판
가장 크게 비난받는 부분, 김동주에게 있어서 평생을 따라다닐 주홍글씨.
간통 혐의 관련 문제는 두산 베어스/사건사고와 합법드립을 참조.
6 기타
2010년 시즌 중반에 광고 하나를 찍었다. 제품은 비듬샴푸광고이다.
진짜 저렴하다.[33]
싸움 실력이 아주 절륜하다고 한다. 바람의 파이터괜히 타팀에서 두산하고 벤치클리어링 붙는 걸 두려워하는게 아니다. 매번 두산과 벤치클리어링 붙는 상대팀은 4~5명이서 김동주를 막아야 할 정도니깐….
하지만 채병용이나 송신영이 나온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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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주심마저도 쫄게 만드는 김동주의 위엄.[34] 가르시아와 로이스터에게는 위엄을 세우기 바쁜 심판들이 이 때는 아는 사람만 알 정도로 그냥 넘어갔다. 입모양을 보면 고운 말은 오고가지 않은 듯[35]. 근데 김동주도 못 건드는 사람이 있다!
조인성이 자신의 배트를 자주 빌려간다고 한다. 실제로 조인성과 김동주는 고교때부터 동기생인 친구였다고 한다. 벤클에서의 카리스마와 다혈질적인 성격을 생각해보면 의외의 일면이다. 야구계의 투 페이스
넥센 히어로즈의 한현희가 경기중 쓸데없이 웃는 버릇이 있었는데, 김동주의 따뜻한(?) 조언 한마디로 버릇을 고쳤다는 아주 훈훈한(?) 일화도 있다.너 결혼했지?? 참고로 그 조언을 한 날 김동주는 한현희에게 데뷔 첫 삼진을 조공했다. 조언의 의도가 의심스럽다
2004년 1월 8일 리니지를 하다가 현피 뜨러 가서 사인만 해주고 왔다는 기사가 발굴되었다.
2015년 한국시리즈 두산과 삼성의 2차전에서 대구 구장에 바람이 많이 불어 홈런성 타구들이 외야에서 잡히자 돡갤에서 바람의 가호(...)라고 칭송받았다(...)
7 기록
김동주의 기록은 좋은 비율 스탯에 비하면 누적스탯이 떨어지는 편인데, 이는 상술했듯이 오만가지 부상 때문에 경기 출장수 자체가 적은 탓이 크다. 아래 기록들은 2012년 시즌 후 기준. 여담으로, 부상으로 거의 대부분을 제대로 못 나온 2006년을 제외하면, 딱 두번 빼고 홈런이 두자리 수다!
- 통산 안타 1710개로 16위에 기록 되어있다. 그런데 이게 왜 후달리는 거냐면 김동주의 개인 통산 타율이 무려 0.309로, 전체 타율 순위 중 9위에 든다.[36] 그런데도 통산 안타수는 다소 적은 편. 경기 출전수나 타석 수가 적기 때문이다.
-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선구안이 좋아서 볼넷으로 나가는 능력이 뛰어난 선수들은 타석에 비해 타수가 적기 마련이다. 타수가 적어지니 그만큼 안타를 기록할 수 있는 경우도 줄어드며, 김동주는 타율보다 1할 가량 높은 출루율을 기록하는 눈야구의 달인 중 한명이다. 매년 타율 1위 선수가 안타와 출루율에서도 반드시 1위를 차지하는가를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다는걸 알 수 있다. 타율은 어디까지나 안타/타수 라는 공식으로 계산하는 만큼 타수로 기록되지 않은 타석에서의 상황은 우리가 타율만으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마지막 4할 타자라고 잘 알려져있는 테드 윌리엄스는 시즌 200안타를 넘긴 적이 한번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타율과 출루율은 매년 압도적인 최상위권이었다. [37] 즉 똑같은 경기 수에 출전해서 똑같은 수의 타석에 들어섰다고 가정하더라도, 안타를 많이 때린 선수가 그보다 적은 안타를 기록한 선수보다 반드시 타율이 높은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러므로 김동주의 타율에 비해 안타수가 적은것을 특별히 희귀하고 이상한 케이스라고 생각하는것은 오류의 여지가 있다.
- 장타로 넘어가면 상황이 더 안습해지는데, 통산 장타율이 0.517로 8위다. 그런데도 정작 홈런수는 272개로 8위에다가 루타수는 2820루타로 7위를 먹고 있다. 송지만하고는 300루타 가량 차이가 난다. 이렇게 된 원인은 안그래도 출장 경기수가 적은 것에다가 국내에서 가장 큰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을 홈으로 쓴 탓으로 추정된다.
- 2011년 4월 22일 넥센 히어로즈와의 경기에서 5회말 1사 만루 상황에서 이정훈의 공을 받아 치면서 3타점 2루타 장식. 이로써 개인 통산 1,000타점의 고지에 도달했다. 이 날 김동주는 인터뷰를 통해 양준혁 선배의 기록을 넘고 싶다고 말했으나 4년도 못 가 은퇴했다. 참고로 1,000타점이 넘는 타자는 김동주를 포함해 11명이며[38], 타점 부문 1위를 달리고 있는 선수는 양준혁 선수의 1389타점. 2016년 현재 이호준이 1289타점까지 달성하며 김동주를 뛰어넘었고, 홍성흔도 2015년 1100타점을 넘겨, 2016년 종료 기준 1120타점 이다.
8 역대 성적
- 타자 기록
역대기록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장타율 | 출루율 |
1998 | OB 베어스 | 125 | 457 | .265 | 121 | 21 | 1 | 24 | 89 (5위) | 69 | 4 | 37 | .473 | .320 |
1999 | 두산 베어스 | 114 | 399 | .321 | 128 | 25 | 3 | 22 | 84 | 62 | 2 | 51 | .564 | .394 |
2000 | 127 | 469 | .339 (2위) | 159 (3위) | 29 | 1 | 31 | 106 (4위) | 78 | 5 | 64 | .603 | .414 | |
2001 | 103 | 364 | .324 | 118 | 18 | 0 | 18 | 62 | 49 | 2 | 51 | .522 | .401 | |
2002 | 120 | 415 | .318 (5위) | 132 | 21 | 0 | 26 | 79 | 63 | 1 | 65 | .557 | .405 (4위) | |
2003 | 118 | 401 | .342 (1위) | 137 | 23 | 2 | 23 | 89 | 61 | 3 | 90 | .581 (4위) | .450 (2위) | |
2004 | 124 | 430 | .286 | 123 | 19 | 1 | 19 | 76 | 72 | 4 | 85 | .467 | .402 | |
2005 | 94 | 268 | .302 | 81 | 13 | 1 | 10 | 50 | 51 | 1 | 69 | .470 | .444 | |
2006 | 43 | 140 | .250 | 35 | 7 | 0 | 4 | 16 | 19 | 0 | 24 | .386 | .360 | |
2007 | 119 | 382 | .322 (5위) | 123 | 24 | 0 | 19 | 78 | 68 (4위) | 11 | 97 | .534 (5위) | .457 (1위) | |
2008 | 109 | 363 | .309 | 112 | 12 | 2 | 18 | 104 (2위) | 55 | 2 | 75 | .501 (5위) | .415 (4위) | |
2009 | 105 | 354 | .353 (4위) | 125 | 28 | 0 | 19 | 86 | 63 | 3 | 69 | .593 (2위) | .455 (2위) | |
2010 | 110 | 387 | .295 | 114 | 22 | 0 | 20 | 67 | 60 | 0 | 77 | .506 | .407 | |
2011 | 120 | 406 | .286 | 116 | 24 | 1 | 17 | 75 | 57 | 6 | 74 | .475 | .393 (5위) | |
2012 | 66 | 223 | .291 | 65 | 5 | 0 | 2 | 27 | 18 | 3 | 18 | .341 | .339 | |
2013 | 28 | 82 | .256 | 21 | 2 | 0 | 1 | 9 | 6 | 1 | 15 | .317 | .356 | |
2014 | 1군 기록 없음 | |||||||||||||
KBO 통산(16시즌) | 1625 | 5540 | .309 (8위) | 1710 | 293 | 12 | 273 (8위) | 1097 (4위) | 851 | 48 | 961 | .514 (9위) | .405 (5위) |
역대수상 | |
연도 | 수상내용 |
2000년 | 골든글러브 3루부분 수상 |
2003년 | 골든글러브 지명타자 부분 수상 |
2007년 | 골든글러브 3루부분 수상 |
2008년 | 골든글러브 3루부분 수상 |
- ↑ 태어난 곳은 부산이지만 어렸을 때 서울로 이사갔다고 한다.
- ↑ 학창 시절엔 유격수로 뛰었고 프로입단 후 1998년에만 외야수로 뛰었다.
- ↑ 동~주 동주 김동주~ 헤이! 김동주~ 헤이! 김동주~ 헤이! 동~주 동주 김동주~ 헤이! 홈런 김동주~ 홈런!
- ↑ 원래 이명수의 응원가였다. 그가 현대로 옮기면서 김동주가 물려받은것.
- ↑ 2학년때인 1992년 봉황대기 고교야구대회에서 소속학교 배명고의 우승을 이끌었고 당시 최우수투수상을 거머쥐기도 하였다. 멤버로는 이경필과 당시에 포수였던 황두성이 있다.
- ↑ 더그아웃의 인터뷰에 따르면 150km 이상의 공을 던질 수 있었다고 본인이 밝혔다.
- ↑ 고려대학교 야구부는 구타로 좀 많이 유명했다. 그것도 2000년대 초반까지도. 박진만이 구타에 질려 고려대학교 입학을 포기했다는 이야기도 있다.(공식적으로는 체육특기자 수능 점수 상한선(40점)을 넘지 못한 것으로 발표되었다.) 이 구타 문제를 깔끔히 들어낸 것이 양승호 감독(2007~2010)이다.
- ↑ 삼성 라이온즈의 1번 타자였던 박한이 보다도 도루를 더 많이 했다.
- ↑ 홈플레이트를 막고 있던 상대 포수 아베를 피해 슬라이딩을 하면서 손으로 홈플레이트를 터치하는 센스를 보여줬다.
- ↑ 김동주의 경우 국가대표 차출로 인해 자신의 커리어 손해를 본 케이스인데, 2006년 WBC에서 주전 3루수로 차출되었으나 아시아예선 대만전에서 자신의 야구인생 최초이자 마지막인 1루 슬라이딩 과정에서 어깨에 큰 부상을 입어 정성훈으로 교체된 바 있다. 이 때문에 2006 시즌 43경기밖에 출장하지 못 했으며 FA 취득도 1년 늦어지고 말았다. 만약에 1년 일찍 일본 진출에 도전했을 경우 계약이 성사되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는 점에서 김동주에게는 2006년 WBC가 상당히 뼈아픈 국제대회로 남을 것이다.
- ↑ 단 김동주는 2003년에 지명타자로 골든 글러브를 수상한 적이 있다.
- ↑ 2010년 포스트시즌에 출장한 모든 선수 중 가장 많은 타점이다.
- ↑ 팀 홈런이 59개로 LG와 공동 6위. 꼴찌 KIA는 54개다. 안타 대비 장타율은 더 심해서, 7위 KIA .243에도 한참 밀리는 .226이다.
- ↑ 김동주가 당뇨병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2012년경부터 공공연히 카더라로 돌았었다. 당뇨병은 유전성이 강한 질병으로 김동주의 어머니도 당뇨병 합병증으로 세상을 떴다.
- ↑ 선수 커리어 내내 연조직염으로 자주 엔트리에서 빠진 것도 당뇨로 인한 면역력 저하를 추측케 하는 부분이다.
- ↑ 살이 쪄 있을 때는 오히려 당뇨가 없거나 심각하지 않은 상황이다.
- ↑ 김재현과 조인성 모두 김동주와 친구 사이이다. 그들이 코치나 고참 입장에서 김동주를 통제하는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것.
- ↑ 게다가 김태균이 3루 훈련도 하고 있다!
- ↑ 기존 구단에서 방출된 후 NC에 입단한 손민한이나 박명환은 5천만원으로 시작했다.
- ↑ 타자로는 윤요섭, 장성우, 하준호, 오정복 등을 영입했다.
- ↑ 투수 앤디 시스코를 퇴출하고 타자 댄 블랙을 영입했다.
- ↑ 김동주의 공식연봉이 7억이었다는걸 생각하면 푼돈이다. 그리고 손민한, 박명환 기준에서도 전성기에 5억 이상은 받던 사람들이 5천만원 받는 거였다보니 이들 기준에서는 푼돈이라고도 볼 수 있다.
- ↑ 신인 데뷔 시즌부터 121안타 24홈런을 기록했다는 점이 김동주의 기량이 보통이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 ↑ 통상적으로 타자의 홈런 갯수를 줄이는 크기의 잠실구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한 것을 감안하면 20개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 ↑ 헌법재판소에 간통죄가 위헌이냐 아니냐를 심의해달라라는 소청이 올라왔었기 때문이다. 자세한 건 아래에 서술. 합법갑에서 파생된 별명으로 법을 풀어쓴 단어인 버비오빠가 있다. 더 나아가서 버비오빠를 뒤집어 뚜오뜨또(…)라고 하기도.
- ↑ 투수는 선동열, 타자는 이승엽, 야구는 이종범, 인생은 이호준, 사랑은 김동주
- ↑ 하지만 이건 좀 이해가 갈 수도 있는게, 두산은 프랜차이즈에게까지 냉담하기로 유명한 구단 중 하나다. 그리고 김동주가 OB-두산에서만 뛰기는 했지만 부산 출신이다.
- ↑ 일본 못가니까 그냥 남은 감이 있다. 사실 일본구단측 에선 김동주에 그다지 관심이 없어 그냥 몸값 부풀리기 라고 봤으나...김동주 본인이 병크를 터트리는데...
- ↑ 김동주 본인이 한 인터뷰에서 한국에서 버는 수입의50%는 위자료로 나가야 할 상황이였는데 이게 너무 아까웠다고....물론 이후 지속적인 소송,전부인을 정신병자로 모는 언론플레이등을 통해 위자료를 아꼈다.
- ↑ 2000 혹은 2001 시즌 전이었으며 정확한 일시는 추가 바람.
- ↑ 2군에 박아놔야 연봉 부담을 덜 수 있으니까.
- ↑ 기사에 언급은 안되어 있지만 롯데 조성환의 은퇴식 장면도 나왔는데 이건 한때의 잘못으로 비난받아도 그걸 달게 받아들이고 묵묵히 뛰다 은퇴할때는 박수를 받으며 간걸 의미한다고 보는 팬들이 많다.
- ↑ 원래 히어로즈시절 이현승이 광고모델을 하였다가 모델이 바뀌었다.
- ↑ 2011년 5월 15일 SK와의 경기 중 6회말 무사 삼진 아웃을 당한 후 김정국 주심에게 항의하는 장면이다. 79년생으로 KBO 최연소였던 주심이 김동주의 기세에 눌려서 위축된 게 보일 정도였다.
- ↑ 김정국주심은 김동주보다 3살 어리다, 선수가 심판을 권위
협박으로 찍어누르는 기똥찬 그림이 그려진 것, 또한 이날 게임에서는 김동주의 시비 외에도 양의지의 장작패기, 김경문 감독의 배치기 등의 볼거리가 펼쳐졌다.팀컬러 작렬이에 대해 임태훈 사건등으로 인한 팀분위기를 쇄신시키기 위해 어린 주심을 상대로 고양책양아치짓을 쓴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 ↑ 1위부터 차례로 장효조, 손아섭, 김태균, 김현수, 양준혁, 제이 데이비스, 이병규, 이대호, 김동주 순이다.
- ↑ 통산 비율성적 0.344/.482/0.634
- ↑ 1위부터 양준혁, 이승엽, 장종훈, 이호준, 홍성흔, 김동주, 박재홍, 장성호, 송지만, 심정수, 마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