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이맹희(李孟熙) |
출생 | 1931년 6월 20일, 경남 의령 |
사망 | 2015년 8월 14일, 중국 상하이 |
본관 | 경주 이씨 |
학력 | 경북고등학교[1], 가쿠슈인대학교 |
가족 | 부모 : 이병철, 박두을 아내 : 손복남[2] 자녀 : 이재현, 이미경, 이재환, 이재휘[3] 형제 : 이인희, 이창희, 이건희, 이명희 |
경력사항 | 삼성그룹 회장 대행 (1966 ~ 1968) 삼성물산 부사장 (1968 ~ 1987) 삼성전자 부사장 (1968 ~ 1987) 제일모직 부사장 (1968 ~ 1987) 제일비료 회장 (1993 ~ 2003) CJ그룹 명예회장 추대 (2015) |
1 소개
장남은 안습이라는 법칙을 한국 재계에서 처음 보여준 사례
삼성그룹의 창업주 호암 이병철의 장남.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큰형이며 현 CJ그룹 이재현 회장과, 이미경, 이재환의 아버지이다. 한국전쟁 발발기에 일본유학을 떠나 가쿠슈인을 졸업하였는데, 이로 인해 여론이 좋지는 않았다. 그의 절친 고향친구들이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학도병으로 자원입대를 했던 것 과 대조되므로 비난을 받고 있는 것.
이병철 자녀들 중에 맏아들로서[4] 1960년대부터 삼성전자, 중앙일보, 삼성물산, 제일제당, 신세계 백화점, 동방생명, 안국화재, 제일모직, 성균관대학교, 삼성문화재단 등에서 부사장, 전무, 상무 등 17개 그룹 주요 계열사 임원직을 도맡으며 삼성그룹 후계구도에서 선두주자로 활약하였고, 1966년 사카린 밀수 사건을 책임지고 회장직에서 사퇴한 아버지 이병철을 대신해 삼성그룹의 회장직까지 대행 했을 정도[5]로 그룹 내에서의 위상은 이병철 다음으로 대단했다.
하지만, 불같고 저돌적이며 급한 성격 탓에 아버지뻘인 이병철의 창업공신들과의 관계에 있어 마찰이 심해 뒷말이 많았고, 그가 회장 대행을 맡고 난 후 부터 경영실적도 좋지 않아 그룹전체가 휘청이는 지경까지 가게 되는 바람에, 결국 2년 뒤인 1968년 이를 더 이상 두고볼 수만 없던 이병철이 경영 일선에 복귀하면서 이맹희는 자연스레 회장직에서 물러나게 되어 그룹 후계구도에서의 독보적 위상도 점차 흔들리기 시작했다. 거기에다가 엎친데 덮친격으로 1969년 동생 이창희가 일으킨 왕자의 난으로 이병철 회장의 눈밖에 함께 나면서 한때 17개 계열사 임원직을 맡았던 그가 1973년 부사장 자리 3개만 남겨놓게 되며 사실상 후계구도에서 좌천 통보를 받게 된다.[6] .[7]
자신이 아버지에게 이용만 당하고 철저히 버림 받았다는 생각에 크게 좌절한 이맹희는 이후 일본으로 잠시 떠나있다가 1975년 귀국 후 겨울에는 사냥하러 다니고 여름에는 워커힐에서 말을 타는 야인에 가까운 생활을 하는 수순에 이른다. 1987년 이병철이 사망하고 후계자로 내정된 셋째동생인 이건희가 삼성그룹 회장이 되면서 그나마 유지하고 있던 직책에서도 완전히 물러난 뒤, 삼성그룹과는 상관없이 본인이 별도로 설립한 기업인 '제일비료'의 대표가 되기도 했었으나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고 결국 사업을 접었다.
이병철의 유언에 따라 장손이자 이맹희의 맏아들인 이재현의 몫으로 내정되었던 제일제당은 1993년 삼성그룹에서 분리 독립한 뒤 오늘날의 CJ그룹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분리 당시 이재현이 대기업인 제일제당을 완전히 장악하여 이끌기에는 경력도 부족하고[8] 연륜도 적었던 탓에[9] 경영 일선에 들어가기 원치 않았던 이맹희 대신에 이맹희의 처남이자 이재현의 외삼촌인 손경식이 후견인 역할을 담당하면서 이재현과 손경식 두 사람이 CJ그룹의 공동회장을 맡아 지금에 이르게 된다. 이후 이맹희는 회고록인 '묻어둔 이야기'를 집필 하고서는 공식 석상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그의 행보는 정확히 알려진 것은 없다. 다만 중국, 몽골 등지에 머물고 있다는 근황이 나오거나, 최근엔 건강 등이 좋지 않아 모 병원에 입원 중이란 소문이 있더니 폐암으로 투병중이었다.
2015년 8월 14일 폐암으로 중국에서 타계했다. 사후에 CJ그룹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었다.
2 왕자의 난
1969년 말에 일어난 삼성가의 흑역사로,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회장직에 물러나 있던 이병철이 1968년 부터 경영 일선에 복귀하자, 차남이었던 이창희가 정부와 갈등을 빚는 아버지의 복귀가 그룹의 미래에 이롭지 않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자신의 아버지 이병철 회장이 부정한 일을 저질렀으니 그를 기업에서 영원히 손을 떼게 해야 한다는 탄원서를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냈는데, 이병철 회장이 해외로 100만달러를 밀반출하고 현충사를 지을 때 경비를 부풀리고 제일모직과 제일제당이 탈세했다는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당시 탄원서를 확인한 박정희 대통령은 위법사항을 떠나 아들이 아버지를 고발하는 것 자체가 천륜을 어기는 것이라 판단하여 탄원서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박정희로 부터 탄원 사실을 전해들은 이병철은 왕자의 난을 진압하고 이창희를 후계구도에서 완전히 축출시킨다.[10]
그런데 문제는 당시 이맹희가 동생이 왕자의 난을 일으킨 것에 협조 혹은 공모를 했다는 논란이 있었던 것이다. 일각에서는 해당 탄원서를 이맹희와 가까운 청와대 사람들[11]이 중간에 만지게 된 것이 밝혀지면서, 이맹희가 아버지를 몰아내고 실권을 쥐기 위해 고향친구인 전두환과 노태우를 매개체로 공작을 꾸몄다는 의혹이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이맹희가 쓴 회고록인 '묻어둔 이야기'에 따르면 이에 정면으로 반박하였는데, 왕자의 난이 일어나기 한참 전부터 동생인 이창희가 아버지를 내치려는 음모 시도를 눈치채어 화가 난 나머지 이창희의 벤츠 자가용을 때려 부수며 크게 혼낸 적이 있었다고 서술하고 있으며, 왕자의 난이 일어나던 무렵 자신은 해외기업들과의 기술제휴 협상차 해외출장 등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보니 경영일선에서 복귀를 시도하던 아버지를 방해하는 듯한 행동으로 비춰질 수도 있었기에 아버지가 그런 의심을 할 수도 있는 것[12]이라 주장했다. 전두환, 노태우를 중심으로 하는 청와대 사람들과의 관계와 왕자의 난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사카린 사건 이후 청와대 쪽과의 관계가 나아지는 상황이다 보니 그렇게 비춰질 수도 있으나 애초에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결정적으로 회고록을 작성하는 시점에서 관련 주변인들도 생존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거짓말로 회고록을 쓸 수 있겠냐며, 본인은 맹세코 왕자의 난에 대해 완전 결백함을 맹세할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맹희의 주장과는 반대로 2012년 이맹희 회장과의 재산 소송 당시 이건희 회장의 이맹희와 관련한 인터뷰에 따르면 30년전에 자신을 군대에 고소하고 아버지를 형무소에 넣겠다고 하고 청와대 그 시절에 박정희 대통령한테 고발했다가 가문에서 이미 퇴출당한 양반이라며, 자기 입으로는 장손이다, 장남이다 그러지만 이미 아버지께서 "맹희는 완전히 내 자식 아니다"라고 못 박았으며, 지금도 자신을 포함해서 누구도 장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이창희의 왕자의 난과 관련하여 이맹희는 적어도 방관 혹은 다소 소극적으로 협조했다고 보는 시각이 중론이라 할 수 있지만 전후사정을 감안할 때 이병철은 왕자의 난 사건으로 인해 장남인 이맹희까지 한 통속으로 의심한 듯하며, 충격이 컸던 이병철로서는 이맹희의 적극적 해명에도 불구하고 의심을 떨쳐내기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13] 종합해 보자면 자식에게 뒤통수를 맞은 이병철이 경영권과 관련하여 한층 예민해지기 시작한데다, 결정적으로 자존심이 센 이맹희가 왕자의 난 이후에도 아버지의 권위에 대항하는 듯한 처신[14]이 문제가 되면서 부자지간의 정에 금이 심하게 가는 바람에 이맹희가 그룹의 후계구도에서 완전히 멀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1976년 후계자로 내정된 삼남 이건희의 경영권 승계에 있어서 장남인 이맹희가 방해가 될까 싶어 정신병원에 감금하려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삼성의 이런 움직임을 우연히 알게 된 친구 검사가 귀띔을 해준 덕에 지방 별장에 기거하면서 사냥용 총을 가지고 있다가 자신을 잡으러 온 삼성의 인력들에게 총을 겨누어 위기를 모면했다는 것이다. 실제 MBC 드라마 영웅시대에서는 이러한 에피소드들을 꽤 비중있게 그리기도 했다.
3 이건희 회장과의 소송전
삼성전자 회장이자 셋째동생인 이건희와 이병철의 재산상속 문제 등을 놓고 갈등을 빚고 있으며 두 사람의 관계 또한 좋지 않다. 이것은 결국 삼성그룹과 CJ그룹의 갈등으로 번져갔으며 한때 삼성전자 전무였던 사람의 CJ그룹 이재현 회장 미행설이 나돌면서 삼성과 갈등을 빚었고 2012년 이병철 추모식 때는 삼성이 CJ 관계자들의 방문을 불허했다는 소문이 나면서 형제간의 갈등과 기업간의 갈등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이에 대해 언론에서는 이건희의 정권 무시적 발언[15]에 분노한 정권이 이건희를 차마 어쩌지는 못하고, 친밀했던 CJ에 소송을 권유하여 일을 벌였다는 후일담을 보도하기도 했다.
본디 이맹희는 왕자의 난이 실패하면서 이병철의 눈에서 완전히 벗어나 파문 위기까지 몰린 처지였다. CJ그룹이라는 형태로 부친의 유산을 사실상[16] 물려받은 것 조차도 기실은 과분한 처지. 고령에 접어들어 스스로 자초한 결과를 뒤집으려 한 것도 무리수[17]이지만, 애시당초에 삼성의 법률시장 파워에 맞선다는 게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이건희의 두 형에 대한 경계는 철저해서 형제들의 집에 CCTV까지 설치해서 서로를 감시할 정도. 함께 지내던 호암 제사조차도 이제는 완전히 따로 지내게 되었다. 결국 싸움은 이건희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18]관련기사 설상가상으로 2013년 중반 아들인 이재현 회장은 버진아일랜드 탈세 혐의로 구속되어 CJ그룹의 위기까지 와버린 상황이니(...)
결국 2014년 2월 26일, 상고를 완전히 포기하면서 공식적으로 gg를 선언했다.
4 여담
미디어에서는 주로 삼성가의 잊혀진 비운의 황태자 정도로 가끔씩 거론되는 정도다.
2004년에 방영되어 국내 대표 재벌인 현대그룹과 삼성그룹의 일대기를 그린 MBC 드라마 영웅시대에서 그를 모델로 한 캐릭터인 국철민이 등장하기도 했는데, 그의 회고록인 '묻어둔 이야기'가 주요 참고 자료였던데다 드라마가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부분에서 조기종영되는 바람에 이건희 회장보다 훨씬 비중있게 나온다. 그의 배역을 맡았던 연기자는 이효정으로 외모상 싱크로율이 높다는 평.
굽시니스트의 시사만화에서 오듀세우스 우 브리타니아로 그려지기도 하였다.- ↑ 32회로 절친동창이 노태우, 정호용, 김윤환, 김복동, 이원조 등이 있는데 묻어둔 이야기에 의하면 김윤환 오줌사건이 언급되어 있다. 그외에도 윤필용, 전두환, 박종규와도 친분을 과시했다.그땜에 이미 아버지한테 눈밖에 났다.
- ↑ CJ그룹 고문, 이재현 회장의 어머니, 손경식 회장의 누나.
- ↑ 영화배우 박모씨 사이에서 생긴 혼외자.
- ↑ 이전 문서에는 자녀들 중 가장 연장자로 나와 있었는데 가장 연장자는 1928년생인 장녀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이다.
- ↑ 정식 경영권 승계도 아니고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인해 이병철 회장이 자숙의 의미로 물러나서 임시로 대행한 것이기에, 삼성그룹에서는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을 잇는 2대 회장을 이건희 회장으로 공식표기하고 있다. 실제 2008년 이건희 회장이 삼성그룹의 비리사건으로 잠시 회장직에서 물러났을때, 회장직을 대행했던 이수빈을 정식 후계자로 생각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의 의미라 보면 된다.
- ↑ 이맹희가 쓴 회고록인 '묻어둔 이야기'에서 이병철 회장이 이맹희를 자신의 집무실로 불러 임원직을 맡고 있는 17개 계열사 명단을 쭉 써보라 한 뒤, 맡고 있는 직함이 너무 많다며 삼성물산, 삼성전자, 제일제당 부사장 자리 세 개만 남겨놓고 나머지 모두 취소선을 그어버리며 그 자리에서 해고 통보를 전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 ↑ 이맹희씨가 쓴 자서전에 따르면 6개월이 아닌 7년짜리 경영대행이며, 후계구도의 흔들림을 방지하기 위하여 삼성그룹에서 이맹희씨의 직무기간 1967~1974년을 모호하게 기록하였다고 쓰여있다. 어느쪽이 진실인지는 읽는이의 판단에 맡긴다.
- ↑ 창업주이자 할아버지인 이병철과 사이가 좋지 않아 눈밖에 났던 아버지 이맹희의 모습을 보고 자랐기에 본인 스스로 삼성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실제로 이재현은 1983년 삼성과 관계없는 시티은행에 입사해 사회생활을 시작했는데, 창업주의 장손이 남의 집살이를 하는게 말이되냐는 이병철의 호통에 결국 2년만인 1985년 제일제당 쪽으로 직장을 옮겼다. 참고로 이 시기가 이병철이 타계하기 불과 2년 전이었기에 당시 이병철이 이런 사정들을 모두 짐작하고 제일제당을 물려줄 심산으로 장손인 이재현을 강제로 불러 들인 것으로 보인다.
- ↑ 1960년 생으로 1993년 당시 그의 나이는 34세에 지나지 않았다.
- ↑ 삼성과는 달리 현대가에서 일어난 왕자의 난은 성공하였으나 그 주인공인 정몽헌은 2년만에 자살로 죽음에 이르렀다.
- ↑ 대표적인 인물들로 이맹희와 고향 친구이기도 한 전두환과 노태우다.
- ↑ 실제로 사건이 터지던 무렵에도 자신은 필립스와의 합작 문제로 독일에 출장중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 ↑ 그럼에도 이병철이 결혼문제도 있어 완전히 포기한 듯한 차남과 달리, 장남인 이맹희에 대해서는 종종 탄식을 했다는 증언도 있다.
- ↑ 계열사 임원직에서 대거 해고된 후 일본으로 건너갔을때, 이병철 회장이 일본을 찾았는데도 공항에 마중나가지 않았고, 이병철 회장이 도쿄지점 직원들과 회식을 하며 지시를 하는데 제동을 걸기도 했다고 한다. 이에 이병철 회장은 자신의 권위에 대한 반기를 든 것으로 보고 관계가 더 멀어지게 됐다고 이맹희는 회상했는데, 자식으로서 자존심을 죽이고 아버지에게 숙였으면 후계구도 개선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 보지만 굳이 그렇게 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면 이맹희 역시 아버지에 대한 마음이 멀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 ↑ 2011년 3월 11일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하여 "낙제점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당연히 대통령과 청와대에서는 격노.
- ↑ 실제로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상속되지 않고 아내에게 상속되긴 했지만, 현재 아들인 이재현과 딸인 이미경 부회장에게 경영권이 가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찌감치 본인이 CJ그룹의 경영에서 완벽히 손을 떼었고 CJ그룹의 도움없이 혼자 비료 사업을 하다 말아먹은거 보면 경영권 자체에 욕심이 있는건 전혀 아닌듯.
- ↑ 그런데 이게 알고보면 배경은 이건희의 삼성 편법 상속의 결과물이다. 이재용에게 삼성을 물려주면서 상속세를 안내려고 머리를 굴리고 그게 검찰조사를 거치는 과정에서, 이건희의 비자금을 이병철이 물려준 유산이라고 둘러댄 것이 일단은 직접적 배경이다. 이맹희는 자기도 모르는 이병철의 유산이 발견되었으니, 그 유산에 대한 지분을 요청한 형상을 취했다. 즉 소송을 걸 명분 자체는 있었던 셈이다.
- ↑ 이건희의 승리라기보단 변호사들이 진정한 승리자들이 되었다. 세계 굴지의 대기업 오너 일가의 소송에서 변호사들에게 돈을 얼마나 주었을 지는..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