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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博士 / Epak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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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명 | 이박사(李博士 / Epaksa) |
본명 | 이용석 |
출생일 | 1954년 10월 5일 |
출생지 | 경기도 남양주시 |
신체 | 160cm, 55kg |
1 개요
“나는 나예요, 그냥. 음악은 모방이 없다. 창작이다. 개발이다. 노력이다. 예술은 멀다. 질리지 않는다. 재밌다. 재밌는 삶이다!” - 2012년 9월 10일 동아일보 인터뷰# 中
"안녕하십니까? 저는 대한민국의 호리호리한 신바람, 李博士[1]~~!!"
자신만의 음악 철학으로 성공한 트로트의 전설
한국 일렉트로니카의 선구자
한국의 스캣맨 존
90년대 한류 스타[2]
한국 최초의 해피 하드코어 음악가
모든 이 씨 성을 가진 박사학위 소지자의 친구
2 이력
2.1 성장기
1954년 10월 5일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현 남양주시 화도읍) 출생. 본명은 이용석. 기존의 트로트 가수들과는 상반된 자신만의 영역을 개척하고 있는 가수이다. 젋은 나이와 세련된 편곡으로 어필하고 있는 요즘의 신세대 트로트 가수와는 달리, 다른 장르와의 접합 등으로 '테크뽕'을 만들어낸 선구자이기도 하다.
초등학교 때 부터 가요를 시작하여 신동 소리를 들었으며, 15살때 부터 락에 심취하더니 부모님으로 부터 경기민요까지 접하였다가, 결국 19세에 들어서 뽕짝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고 한다. 관광버스 가이드로 일한 경력이 있으며, 관광객들에게 안내와 더불어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다. 유년시절 경기민요를 배운 경험을 바탕으로, 노래 중간중간에 독특한 추임새를 넣어 관광객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다. 이러한 추임새는 현재까지도 '이박사'하면 먼저 떠오르는 그만의 트레이드 마크로 자리잡고 있다. 당시 MBC 인간시대에 '신바람 이박사'라는 제목으로 출연한 적이 있는데, 머리속에 넣고 있는 노래가 3000개였다고. 또 이박사의 노래를 틀어놓고 즉석에서 도너츠를 반죽해서 만드는 분의 사연도 소개된 적이 있다. 방송은 이쪽이 먼저.
2.2 전성기
살충제 광고. 원조 저질 댄스
1989년 가수로 데뷔한 그는 신바람 이박사 Vol.1 을 출시한다. 기존 고속도로 뽕짝과는 사뭇 다른 노래들로 테이프 판매량 1백만 장 이상을 기록하는 놀라운 인기를 얻게 된다. 이 인기의 여파로 각종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되며, 그 이후 19개의 앨범을 내고, 앨범마다 큰 인기를 얻으며 고속도로에서 신바람나게 팔려나갔다.
하지만 제한된 영역에서의 히트였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 이박사 측은 1995년 일본 진출을 기획하게 된다. 일본의 모 인디 레이블을 통해 일본 진출 가능성을 점쳐보려 했는데, 샘플을 들었던 사람 중에 운 좋게도 소니 뮤직 대표가 있어, 쉽게 앨범을 내고 일본에 진출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일본에서 상당한 인기를 얻어 현재까지도 활동 중이다.
1999년 일본의 전위예술 그룹인 메이와 덴키(명화전기)와의 공동작업으로 オレは宇宙のファンタジー(나는 우주의 판타지)라는 제목부터 우주적인 센스를 가진 곡을 발매했다. 이 곡은 국내에서 1집 발매 때 테크노 뮤지션인 가재발의 재편곡으로 스페이스 판타지로 리메이크되었다. 이 외에도 의외로 일렉트로니카 영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임으로써 일본 등지에서는 상당한 인지도를 얻고 있다.
특히 1996년 전기 그루브와 함께 '이박사 덴키그루브 : 열려라 뽕짝'이라는 앨범을 작업, 크게 히트시킴으로써 본격적으로 테크노씬에 손을 댄 탓에 당시 국내에서는 흔치 않았던 일본식 테크노 음악을 만드는 것으로 우리나라 일렉씬에서도 많이 알아주는, 어쩐지 평가가 묘하게 엇갈리는 가수.
이 앨범의 인기를 몰아 덴키 그루브의 무도관 공연 오프닝 무대에도 섰다. 그리고 도쿄대학의 초청을 받아 한국 트로트의 역사와 전통을 주제로 한 강연도 했다. 트로트가 엔카의 하위장르로 인식되던 시절의 일이다.
2.3 현재
한국에서 한창 인기있을때 집앞의 나무를 다듬다가 다리를 다쳐 몇년간 활동을 못했다. 2012년 MBC 놀러와에도 출연해서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현재 서울특별시 성북구 월곡동 인근에 살고 있는 듯 하다. 날씨가 좋은 날 동네를 지나다니다 보면 금발머리를 휘날리며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간지쩌는 모습을 간혹 볼 수 있다. 천마산 인근에서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듯 하다.링크
2010년 8월 4일에는 MBN 뉴스M에 출연하여, 앵커들에게 굴욕을 주기도 했다. 야~ 야야야야! 신나게! 관련 내용
2012년 8월 '인천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에서 스페셜 게스트로 출연했다고 한다!
2012년 8월 23일 미니앨범 "레알 뽕짝커"를 통해 컴백했다. 아수라발발타, 다른 오빠(feat. 미미시스터즈), 몽키매직 - 스페이스 몽키 (feat. 윈디시티) 세 곡이 수록되었다. 그리고 컴백과 함께 엠넷의 '비틀즈 코드'에 출연했다.
한국 품바 예술협회에 고문으로 가입되어있다. 링크 (임원소개를 누르고 두번째 페이지를 보면 이박사님의 증명사진을 볼 수 있다!)
2012년 싸이 의 강남스타일 의 열풍에 대해 내 전성기에 유튜브 있었으면 싸이처럼 월드 스타가 되었을것이라고 인터뷰를 했다. #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다른 가수가 이런 말을 했으면 아무리 인기가 많은 가수라도 '싸이 인기에 편승하려는 것이냐' 라는 소리를 들었겠지만 이박사가 한 이 말에 반문을 던지는 사람은 많이 없다. 충분히 그랬을 것 같다
2013년 11월 3일 자 도전 1000곡에 출연하였다. 관련 영상
2013년 11월 26일에는 MBC 컬투의 베란다쇼 '싼티의 매력 속으로' 편에 출연하였다.
2014년 11월 21일에 홍대 롤링홀 공연 "이박사x이랑"에서 팬클럽 재창단을 선언했다.
2014년 11월 23일 발매된 임창정의 임박사와 함께 춤을이라는 곡에 피쳐링했다. 여전한 뽕짝끼는 일품. 노래도 좋다!
3 평가
3.1 일본에서의 평가
한국에서 온 스타
디스코 메들리 뮤직비디오. 식당차 배경이 정겹다. 개그맨 컬투가 언제 이박사를 만날 일이 있어서, "일본에서 그렇게 인기던데, 그 비결이 뭡니까?" 라고 물었더니, 진지하게 "그 비결은…… '아이좋고!'에 있어. 여기에 열광하더라구." 라고 답했다고 한다(…).
일본에서의 평가는 높아서, 후지테레비의 HEY!HEY!HEY!에 2번째로 출연한 외국인가수 타이틀도 가지고 있다. 니코니코 동화에 올라오는 그의 영상에는 한국인에게 흔히 붙는 비하나 욕이 전혀 달리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영상에 붙는 태그가 '한국을 싫어하는 나도 인정하는 한류 슈퍼스타'. 일본에서 한국어로 노래하는 가수가 이 정도로 대우받을 수 있다는 건 역시 그의 범우주적 센스를 보여주는 듯. 반대로 팝송이나 일본 음악을 자신의 스타일로 체화시키기도 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곡이 빌리지 피플의 YMCA와 고다이고의 Monkey Magic.[3]
가히 한류스타 1세대라 하기에 손색이 없다.. 국내에서는 보기도 힘든 80년대 테이프나 음원들도 죄다 일본의 코어 팬들이 발굴해서 유튜브 등지에 올릴 정도이니.. 흠좀무. 국내에서 뽕짝 가수라고 은근히 무시당하는 풍조와 참 대조된다. 유튜브에 음악과 라이브 영상이 업로드되면서 서구권 사람들에게도 컬쳐 쇼크와 재미를 동시에 주고 있다. 하여튼 간에 일본에서 워낙에 인기가 많다보니 처음 일본에 진출했던 90년대 당시에는 일본인들이 "한국하면 Pon-chak아닌가요."라고 여기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여기서 저 pon-chak이란 곧 뽕짝을 이른다. 이미 그 당시부터 뽕짝하면 낡은 음악 취급하던 한국의 상황과는 판이하다.
물론 당시 일본이 뽕짝을 완전히 새로운 음악으로 받아들인것은 아니다. 1988 서울 올림픽 이후, 일본은 그때까지 관심이 없던 한국에게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당시 일본의 관점은 독특한 문화를 가진, 한국은 복잡하고 키치적인 나라였다. 그래서 한국 문화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집중되면서 한국의 음악도 받아들이게 되었는데, 사실 당시 대중음악의 수준은 한국보다 일본이 몇 수 위였고, 새로운 것을 요구하는 출판계와 대중의 입맛에 맞는것을 쉽게 찾을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발굴한 인물이 이박사인 것이다. 서양이나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창법에 미니멀한 연주에 동양적인 멜로디를 지닌 이 독특한 아이덴티티가 인기를 끌게 되었고, 뭔가 싸구려같지만 새로운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비유를 하자면 미국에서 영국으로 건너간 개러지 록이 펑크 록으로 발전하여 미국으로 역수입된 격이랄까? 좀 더 쉽게 얘기하면,80년대 후반에 테크노 등의 전자음악들이 치고 나오자 이탈로 디스코가 유럽에서 끝물을 뽑고 일본에서 유로비트로 발전됐다고 볼수도 있다.
3.2 한국에서의 평가
저급한 뽕짝 가수
천편일률적인 뽕짝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추임새와 곡들로 주가를 올리기는 했지만, 여전히 한국에서는 '이박사'라고 하면 뽕짝 가수라며 별 가치없는 가수로 생각하고 있다. 그가 한국에서 활동하던 시기는 젊은이들 사이에 뽕짝은 하급문화라는 인식이 강하게 퍼져있던데다 그의 음악에서 90년대 중반까지 길에서 흔히 보던 리어카 사운드가 연상되었다는 점도 작용했다. 즉 레코딩이 저질. 더욱이 이러한 이유로 2000년대 초반 엽기열풍이 불 때 웃기기 위한 BGM으로 활용되다 보니 '싸구려' 이미지가 굳어진 점도 있다.
이에 소위 '정통'을 주장하는 트로트 가수들은 이박사를 안 좋게 보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태진아는 이박사가 잘나갈 시절 뮤지션이 아니라 그냥 광대라면서 폄하성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정작 태진아나 송대관의 음악도 배호 같은 가수들에 비하면 엄청나게 싸보이긴 마찬가지다
엠넷의 트로트 오디션 트로트 엑스에 참가자로 출연했는데축하공연이 아니다. 싸이가 슈퍼스타K6 지원하는 격, 이미 이전에 이박사를 폄하했던 태진아는 똥 씹은 얼굴을 하며, 까마득한 후배인 홍진영, 뮤지, 박현빈은 '이박사 아냐?'라면서 삿대질을 하고, 음악과는 전혀 무관한 유세윤조차 '이박사 공연 처음 봐'라면서 존칭조차 안 붙인다. 이러한 행동 때문에 모든 심사위원이 찰지게 까이고 있다. 물론 심사위원들의 태도만 탓할 것이 아니라, 이박사의 음악이나 뽕짝 자체를 천박하게 생각하던 한국의 풍조에 더 큰 책임이 있을 듯. 강조하지만, 뚝심있게 자신만의장르음악을 한다는건 무시받기는 커녕 존경받아야할 진정한 음악인의 자세다.
자신만의 영역을 개척하여 새로운 음악을 일구어낸 뮤지션에 대한 예우가 전혀 갖추어지지 않은 현실을 볼 수 있다. 특히 90년대 이후 발전을 멈추고 그저 그런 양산형 음악만을 쏟아내어왔던 '정통' 트로트 업계에서 이박사를 폄하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이다. 현 트로트계에서 가장 젊은 세대인 20~30대 가수들도 기존 트로트에서 박자만 빠르게 바꾸거나 기존 히트곡의 변주나 복제에 그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더.
특히 갈라파고스화에서 문화는 자유롭다지만, 타국 문화에 대해서 그것도 좀 더 경제적으로 뷰우하고, 문화적으로도 나름 이끌었던 국가가 더욱 부유한 시대에 인정받은 인물에 대한 예우가 마이클 잭슨이 당했던 것과 생각하면, 아직 대한민국의 문화 수준은 암울하다는 것을 몸소 겪은 산증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