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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렬왕후(莊烈王后) | ||
시호 | 자의공신휘헌강인숙목장렬왕후(慈懿恭愼徽獻康仁淑穆莊烈王后) | |
출생지 | 직산현 관아 | |
사망지 | 창경궁 내반원 | |
본관 | 양주(楊州) | |
배우자 | 인조(仁祖) | |
아버지 | 한원부원군 조창원 | |
어머니 | 완산부부인 최씨 | |
생몰 기간 | 음력 | 1624년 11월 7일 ~ 1688년 8월 26일 |
양력 | 1624년 12월 16일 ~ 1688년 9월 20일(향년 65세, 만 63세) | |
재위 기간 | 1638년 ~ 1649년(왕비) 1649년 ~ 1659년(왕대비) 1659년 ~ 1688년(대왕대비) |
1 개요
1624(인조 2) ~ 1688(숙종 14). 조선 제16대 국왕 인조의 계비. 본관은 양주. 대비로서의 존호는 자의대비이다.
초년엔 후궁 소용 조씨에게 밀려 숨죽여 살고, 중년엔 예송논쟁의 요인이 되고, 말년엔 기센 손자며느리 명성왕후 김씨[1]에게 치이는 등 고생 많은 삶을 산 여인.
권력 기반과 자식이 없는 왕실 웃어른의 처지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조선 왕실에서 '조 대비'라고 불리는 여인이 2명 있는데 이 중 한 사람이 바로 장렬왕후 조씨이다. 다른 조 대비는 흥선대원군, 고종 시기의 신정왕후 조씨.
2 생애
인열왕후 사후 1638년 15살의 나이에 인조의 계비로 책봉되었다. 인조와 29살 차이였다고 한다. 무적핑크의 말을 빌리자면, 외로운 15살 급식이 왕비라고 한다..
장렬왕후가 입궁했을 때는, 인조의 총애를 받고 있던 후궁인 소용 조씨가 모략을 일삼으며 궁중을 쥐락펴락하고 있었다. 조 소용은 투기와 이간질까지 심했기 때문에 장렬왕후는 자연 인조의 관심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녀와 인조 사이에는 소생이 없었고, 왕비 자리는 허울뿐이었다. 왕비 시절 소생이 없고 권력 기반을 형성하지 못한 것은, 이후 그녀가 대비-대왕대비 자리에 올랐을 때 권력을 행사하지 못한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장렬왕후가 아들을 낳았다고 해도 그녀의 상황이 더 나았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인조에게는 이미 소현세자, 효종 등 장성한 적자들이 여럿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장렬왕후가 인조의 사랑을 받아 아들을 낳았다면 정통성 문제를 놓고 헬게이트가 열렸을지도 모른다. 광해군과 영창대군처럼
생애 6번이나[2] 상복을 입었다. 상복을 입은 일이 많다 보니, 현종 시절에는 효종과 인선왕후가 승하[3]했을 때 장렬왕후가 상복을 입어야 하는 기간을 놓고 서인과 남인 사이에서 논란이 인 적도 있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예송논쟁이다.
세월이 지나 숙종이 즉위하고, 쓸쓸히 지내던 장렬왕후 조씨가 한 궁녀를 총애하게 되어 처소로 들였는데 이 궁녀가 바로 훗날의 희빈 장씨이다. 장씨는 곧 숙종의 눈에도 띄어 두 사람의 사이는 매우 가까워졌다. 그런데 장씨는 출신도 미천하고 남인 쪽 사람이었기 때문에, 서인 세력의 중심인 대비 김씨(명성왕후)가 곱게 볼 리 없었다. 명성왕후 김씨는 현종의 정비이자 숙종의 어머니로 당시 정권을 쥐고 있던 서인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여성이지만 성격이 괄괄해서 남편인 현종이 후궁을 못 뒀다(...)는 말이 있고[4], 정사에 관여하기도 했다. 오죽했으면 신하들이 문정왕후를 거론하며 명성왕후의 행동을 깠을 정도였다. 이렇게 화려한 배경과 강한 성격을 지녔던 명성왕후는 기어코 시할머니가 아끼는 궁녀를 내쫓아버렸다. 21세기에 봐도 무례한 행동인데, 지금보다 훨씬 더 유교적 질서를 강조했던 조선시대에 그랬으니 명성왕후가 얼마나 기세등등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훗날 장렬왕후가 궁녀 장씨를 다시 궁중으로 불러들이기는 했지만 그것도 명성왕후 사후의 일이었다. 이런 사례를 보면 장렬왕후는 말년에는 손자며느리에게도 치인 것으로 보인다.
1688년 9월 20일, 창경궁에서 승하하였다. 능은 동구릉 안의 휘릉이다.
정치적으로는 남인들과 자주 소통을 했지만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다.
효종 항목에도 있는 '숙명신한첩'처럼 효종의 딸이자 양손녀들인 숙명공주나 숙휘공주와 한글로 편지를 교환한 자료가 남아 있는데, 장렬왕후의 편지를 보면 예법 상으로 두 공주와 할머니와 손녀의 관계이지만, 실제로는 효종보다도 5살이 어리기 때문에 두 공주에게 보낸 편지에서 해라체가 아니라 하게체를 써서 편지를 쓰고 있다. 이 역시 장렬왕후의 미묘한 입지를 보여준다고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