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삼국지)

1 후한 말의 인물

의 군권 1인자
주유노숙여몽육손주연제갈각손준손침주적정봉육항
오서 「주유노숙여몽전(周瑜魯肅呂蒙傳)」
주유노숙여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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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씨네 무서운 아이 계책에 가장 뛰어나고 魯家狂兒策最長,

이끌고 조화롭게 한 자로는 주랑이 있었네 倡而和者有周郎

─ 공평중(孔平仲), 「자염장군(紫髥將軍)」

魯肅
(172 ~ 217)

후한 말의 인물. 손권 휘하의 장수. 는 자경(子敬). 임회군 동성현 사람.

적벽대전의 주유, 번성 공방전의 여몽, 이릉대전육손에 비하면 포스가 조금은 떨어져보이나 대세를 보는 안목과 방침을 설계하는 기획력은 이들을 압도했다.

1.1 생애

1.1.1 초기 생애

부유한 호족의 집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사망하여, 할머니와 생활하게 되었다. 집안의 재산이 부유했지만 베푸는 것을 좋아하여, 천하가 난세이니 가업을 그만두고 재산을 털고 농토를 공개적으로 판매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고 지방의 명사들과 교분을 맺어 고향 사람들의 환심을 얻었다.

노숙전에 주석으로 달린 오서에 따르면 노숙은 체구가 사내답고 훌륭하였으며 젊어서부터 대업을 이루기 위한 뜻을 지니고 기략을 생각하는 것을 좋아했다. 난세가 이어지자 격검, 기마술, 궁술을 익혔다. 또한 젊은이들을 구제하여 사병을 모았고 사냥을 하고 무술과 병법을 가르쳐 군사 훈련에 힘을 쏟았다. 이러한 행동을 보고 가문의 어른들은 "노씨 가문은 대를 거듭하면서 쇠퇴하여졌는데, 이렇듯 기백이 우리들과는 다른 아이가 태어났구나!"라고 말했다.

그는 고향에서 재산이 많은 유력자였다. 주유가 거소현의 장이었을 때, 일부러 노숙을 방문해 자금과 군량미 지원을 요청하자 노숙은 각각 쌀이 3000곡씩 있는 집의 2개의 창고 중 한쪽 창고를 개방하여 전부 주었다. 한 번에 자신이 갖고 있던 쌀의 50%를 증여한 것으로 이러한 일화는 훗날 '친구에게 분연히 돈을 빌려준다.'라는 뜻을 가진 지균상증(指囷相贈)이라는 사자성어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주유는 노숙의 비범함을 안 뒤 이를 계기로 친한 친구가 되었다.

노숙의 명성이 높아지자, 원술의 요청으로부터 그의 부하가 되어, 동성현의 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노숙은 원술은 기강이 없고 함께 큰 일을 하기엔 마땅치 않다고 여겨 그로부터 도망치기로 한다.

노숙은 중원이 혼란하다며 일족을 설득하여 안전한 강동으로 이사한다. 남녀 삼백 여명이 무리를 이루어 이동하는데 주의 관청에서 기마 무사들이 쫓아오자 노숙이 그들에게 말한다.

경들은 장부이니 천하의 정세를 이해할 수 있을 터이다. 오늘 날, 천하에는 병란이 일어났으니, 공적이 있더라도 이를 포상 받지 못하고, 추적하더라도 처벌할 수 없을 것이다. 어찌 우리를 쫓는 것인가!

노숙이 방패를 세워 놓고 활을 쏘자 화살이 전부 방패를 관통했다. 기마 무사들은 노숙의 언변에 감동도 했고 노숙의 무예를 보자 포기하고 돌아갔다.

노숙은 남쪽 거소현까지 가서 주유에게 의탁했고 이윽고 주유와 함께 장강을 건너 곡아(曲阿)에 머물르며 손책을 만나니 손책도 그를 훌륭한 인물이라 여겼다. 그런데 자신의 할머니가 사망하자, 노숙은 다시 고향인 동성현으로 돌아와 할머니를 안장시켰다.

1.1.2 손권에게 임관

유엽 역시 노숙과 친구였는데 거소(소호)에 웅거하여 1만의 병사를 모으고 있다는 정보(鄭寶)라는 사람을 섬기자고 권유한다.[1] 노숙은 유엽에게 동의했고 곡아로 돌아왔다. 마침 주유가 노숙의 어머니를 오군에 이주시켜 놓았는데 당시 손책이 죽어 손권이 뒤를 이은 상황이었다. 노숙은 사정을 주유에게 설명하니, 주유는 복파장군 마원의 말을 인용하여 신하가 주인을 선택할 때라며 손권의 후계자로서의 자질과 강남(江南)의 천운의 존재를 들며 거꾸로 손권을 섬기라고 노숙을 설득하였다.

주유에게 설득당하여 유엽의 요청을 씹은(?) 노숙은 북쪽으로 가는 것을 단념하고 주유의 추천을 받아 손권을 처음 알현한다. 손권은 즉시 노숙을 만나 함께 이야기를 하고 매우 기뻐했다. 다른 손님들이 돌아가자 노숙도 인사하고 나가려고 했는데 손권이 노숙만을 데리고 돌아와 앉아서 술을 마시며 노숙에게 어떻게 나를 보좌할 것이냐고 묻는다. 노숙은 '조조라는 항우가 있기 때문에 손권은 제환공이나 진문공이 될 수 없다.'며 우선은 가만히 정세를 살피다가 북방의 소란을 틈타 황조와 유표를 쳐서 장강 유역(강동과 형주)을 차지해 제왕을 칭하고 천하통일을 꾀하는 한고조의 사업을 하라고 한다. 이것이 노숙의 천하삼분지계 비스무리(?)한 것인데 갓 계승하여 위태로운 손권에게 황제가 되라는 제안도 한 것이다. 손권은 한왕실을 보좌하기만을 원한다면서 이를 합당하지 않다고 물리쳤지만, 내심 기뻐했던 것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중신인 장소는 노숙의 불손하고 나이가 어려 임용할 수 없다며 자주 비난했다. 그러나 손권은 개의치 않고 점점 더 노숙을 존중하고 후대하였기 때문에 노숙의 모친은 손권이 하사한 옷과 휘장, 생필품 덕분에 과거처럼 부유해졌다.

1.1.3 적벽대전

노숙은 손권 진영의 대표적인 친유비파였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의 공로로 되어있는데 사실상 유표가 죽을 때부터 빠르게 손을 써 유비와 손을 잡은 것도, 그를 바탕으로 (연의에는 제갈량의 공로로 되어있는) 손권과 주유를 설득한 것도 모두 노숙의 공이었다.

형주는 유기, 유종 두 파벌로 나뉘어 있었는데 형주자사 유표가 사망한다. 노숙은 손권에게 앞서 말했던 천하삼분지계 비스무리(?)한 것에 대한 전략을 말한다.

  • 강동과 인접한 형주는 강과 산, 견고한 성이 방어에 좋고 평야, 관리, 백성이 풍부해서 제왕의 자본으로 얻어야한다.
  • 유표가 죽은 상황에서 유표의 두 아들에 따라 두 파벌로 갈린 유표군은 대립 중이다. 천하의 영웅 유비가 유표에게 의탁했지만 유표는 유비의 재능을 밉게 봐서 중용하지 않았다.
  • 만약 유비가 유종, 유기와 화합, 협력하면 우리는 그들과 결맹해야하고, 만약 그들의 사이가 나빠지면 새롭게 계획하자.
  • 내가 조문 사절로 가서 형주의 군실권자들을 위로하고 유비로 하여금 유표의 부하들을 설득시켜 모두 결탁해 조조에게 대항하자. 유비는 반드시 기뻐하며 따를 것이다.

노숙은 이 결맹이 만일 성공하면 천하도 평정할 수 있을 것이니 조조가 기회를 잡기 전에 지금 즉시 가야한다고 재촉했다.

손권은 노숙을 사자로 보냈으나, 노숙은 하구(夏口)까지 온 곳에서 이미 조조가 형주를 정벌할 군을 일으킨 것을 알게되자 즉각 남군(南郡)으로 급행했다. 노숙이 남군까지 왔을 때, 유표의 아들 유종이 이미 조조에게 항복했고 유비는 두려워 강하(江夏)로 도주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노숙은 당양의 장판파까지 가서 유비와 대면한다.

노숙은 강동이 강대하고 견고하다며 손권의 의향을 전하고 유비와 동맹을 맺어 조조와 대치할 것을 진언했고 유비는 크게 기뻐했다. 또한 유비와 동행한 제갈량에게 자신이 제갈량의 형인 제갈근의 친구임을 밝히며 친교를 맺었다. 유비가 하구에 이르자 유비는 제갈량을 사자로 삼아 노숙에게 동행시켜 손권에게 보낸다.

노숙은 제갈량과 동행하여 손권에게 귀환한다. 손권은 조조가 강동으로 침입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되어 장수들과 상의를 했는데 모두 조조에게의 항복하자고 한다. 노숙은 혼자 침묵하고 있다가 손권이 옷을 갈아입으러 뒷간으로 가자 처마 아래까지 쫓아 갔다. 노숙의 마음을 눈치챈 손권은 노숙의 손을 잡고 생각을 물었더니, 노숙은 손권은 자신과 달리 조조에게 항복해도 몸 둘 곳이 없다고 말하고 항복론에는 손권에게 이익이 남지 않음을 논하였다. 손권은 사실은 항복론에 실망하고 있었다는 것을 털어놓고 노숙의 존재를 하늘이 내려준 것이라 칭하게 된다.[2]

주유는 사자로 파양에 있었으나, 노숙은 손권에게 진언하여 주유를 불러들이도록 권하였다.[3] 파양에서 귀환한 주유도 항전을 주장했고 손권은 주유를 총지휘관으로 임명하고 노숙을 찬군교위(贊軍校尉)로 임명하여 보좌하도록 하였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주유가 제갈량을 죽이려 들 때마다 힘써 말리며 왠지 주유와 제갈량의 머리 싸움 사이에 끼인 다소 어리숙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이는 연의의 허구로 노숙은 그렇게 우왕좌왕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이후 적벽의 대승으로 손권은 기뻐하며 장수들에게 노숙을 영접하게 했다. 노숙이 궁전으로 돌아와 손권을 알현하려고 하자 손권은 일어나 그에게 예의를 다하며 "장졸과 군신들 앞에서 그대의 손을 잡고 직접 말에서 내리도록 하면 그대의 공에 보답할 수 있을까?"라고 묻자 "아닙니다. 전하께서 천하를 얻으시고 천자의 신분으로 절 맞이하여 주신다면 그때 만족하겠습니다."라고 알랑방귀를 뀌며(?) 함께 웃는다.

유비는 형주 남부의 4군인 무릉, 장사, 계양, 영릉을 조조로부터 빼앗았고, 주유가 쪼개어 준 남군의 공안(公安)도 넣었다. 후에 유비가 경구로 와서 손권을 알현하고, 형주를 관할하기를 청했을 때 주유와 여범은 손권에게 유비를 묶어두라고 권한다. 그러나 오직 노숙만이 유비에게 땅을 빌려주어 함께 조조에게 대항하도록 손권에게 권유했다. 손권은 노숙의 말을 들어 유비에게 형주를 빌려줬다. 위나라에도 손권이 유비에게 형주를 빌려줬다는 소식이 들어가는데 이런 엄청난 사실을 들은 조조는 편지를 쓰고 있다가 들고 있던 붓을 떨어트리기까지 했다.[4]

서천의 유장의 기강이 쇠퇴해지자 주유와 감녕은 손권에게 촉을 취하도록 권했다. 손권은 유비에게 자문을 구했는데 유비는 속으론 자신이 그 땅을 차지하려고 엿보고 있어서 거짓으로 보고하여 서천 정벌을 반대한다.

유장은 저와 종친이니 용서해주십시오. 만일 저의 청을 받아 주지 않는다면, 저는 관직을 버리고 산림 속으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주유는 손유와 함께 서천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지만 병에 걸려 실행하지 못한다.

1.1.4 익양대치

병으로 사망한 주유는 유언으로 노숙을 후계자로 지명한다. 손권은 노숙을 분무교위로 임명하고 주유의 병사 4천 명과 영지로 4현을 노숙에게 줬다. 정보(程普)가 남군태수로 임명되는 한편, 노숙은 강릉(江陵)에 주둔했으나 이윽고 육구로 주둔지를 옮겼다.

여몽전에 따르면 노숙이 육구로 진지를 옮기는 도중에 평소 어리석다고 경시하던 여몽을 방문했는데 이전과 다르게 똑똑해진 여몽에게 거꾸로 계략 지도를 받게 되어 감탄했다. 그리곤 여몽의 어머니에게 절하고 우호를 맺었다. 지방에서도 노숙의 훌륭한 정치로 병사는 1만 명 정도로 증강되었고 노숙은 한창태수, 편장군이 되었다. 214년엔 손권을 따라 환성 전투에도 참전했고 횡강장군이 되었다.

이후 유비가 유장의 익주를 침공하고 형주에는 관우를 남겨 지키게 했다. 종친이라서 공격 못한다는 이전의 말과 다르니 손권은 빡쳐서 말한다.

교활하게 포로가 감히 속이다니.

형주에선 노숙과 관우가 경계를 인접하게 되자 경계 지역에서 종종 분쟁이 일어났는데 노숙은 항상 우호적으로 분쟁을 가라 앉혔다.

여대전에 따르면 안성현의 장 오탕과 중랑장 원룡이 관우와 결탁해 반란을 일으킨다. 그러나 손권이 파견한 노숙이 유현의 오탕을 격파하고 여대는 예릉의 원룡을 참수시켜 사건 종료.

유비가 익주를 얻자 손권은 제갈근을 사자로 보내 형주의 반환을 요구했지만 유비는 거절했다. 그러자 손권은 여몽을 파견하여 무력으로 삼군을 빼앗게 했고 장사와 계양이 함락된다. 유비는 이 소식을 듣자 직접 공안으로 돌아왔고 관우를 익양에 파견한다. 노숙군은 관우군과 대치하는데 감녕전에 따르면 노숙은 감녕의 건의를 받아들여 감녕으로 하여금 관우가 강을 건너지 못하게 한다.

노숙은 관우와 일대일로 대면을 요구하였다. 관우도 그에 따라 각각의 병마를 100리 떨어지도록 하고 서로 호신용 검 한 자루씩만 지니고 회담에 임하게 되었다. 이를 두고 칼 하나만 가지고 회장에 참석한다고 하여 단도부회라는 대장부의 패기(?)를 나타내는 고사성어가 생겼다. 오서에 따르면 노숙의 부하들이 노숙에게 위험이 생길 것을 우려하여 만류했지만 노숙은 유비가 나라의 일을 맡았으면서 시비도 제대로 못가렸는데 어찌 관우가 이 명령을 어기겠냐며, 서로 뱃속의 생각을 드러내야 한다고 말하면서 무시한다. 노숙의 대범함을 엿볼 수 있는 일화.

관우가 "주군께서 잘 때도 갑주를 벗지 않을 정도로 고생해서 얻은 땅인데 왜 빼앗는거요?"라고 말하자 노숙이 그 자리에서 도리와 이치를 설명하며 따져 관우가 할 말이 없게 만들었다.

  • 과거 장판파에서 유비를 봤는데 군사는 적고 전의와 기세도 없고 도망쳐 숨을 생각 밖에 없었으니 형주를 얻는 것은 불가능했다.
  • 유비를 불쌍히 여긴 손권께서 토지, 군사를 보태주며 보호해줬는데 사욕을 부린 유비는 배신하여 근거지로 익주를 얻고도 형주까지 가지려하는데 이는 차마 군주가 할 바가 아니다.
  • 탐욕에 따라 의를 버리는 것은 재난을 불러오는데 관우 그대는 중임을 맡았음에도 도리와 의로움을 지키지 못하고도 분수도 모른 체로 연약한 군세로 싸우려하니 이길 수 없을 것이다.

관우는 이에 답하지 못했다. 노숙은 관우를 여러 차례 질책하며 말했다.

우리 군주가 본래 성의껏 그대들에게 토지를 빌려준 것은 그대들이 전쟁에서 패하여 멀리서 왔고, 의지할 곳이 없었기 때문이요. 오늘날, 벌써 익주를 얻었으면서 형주를 봉환하려는 뜻도 없소. 우리들은 단지 그대들이 세군만 반환해 줄 것을 요청하는데도, 명에 따르지 않고 있소.

노숙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나름대로 반박한다고 자리에 앉아있던 한 이름이 없는 장수[5]가 "천하는 덕있는 사람의 땅인데 어찌 영원히 소유하려 하시오!"라고 말했다. 노숙이 절절하게 큰 소리로 질타하니 관우는 "이것은 국가의 일인데, 이 사람이 어찌 알겠소!"라며 눈빛으로 이 사람을 쫓아버린다. 회의가 파탄 난 후 조조가 장로의 한중을 얻자 둘은 어쩔 수 없이 화친하고 상수로 형주를 분할한다. 결국 유비는 형주 3군을 오에 할양해주게 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이 회담이 관우를 암살하려는 노숙의 책략으로 각색된다. 노숙은 연회장에 복병을 숨겨두고 관우가 만약 형주 반환을 거부할 경우에는 그를 죽인다는 속셈이었다. 회담 도중 끼어든 주창을 관우가 참견한다며 쫓아버리자 주창은 기회를 틈 타 연회장을 빠져나와 미리 대기시킨 관평 등에게 연락하여 배를 접응토록 한다. 관우는 술주정을 빙자한 인질극으로 빠져나오고 복병들은 노숙이 다칠까봐 감히 움직이지 못한다. 그러나 이는 나관중이 각색한 허구로 정사에서는 오히려 위처럼 관우가 굴욕을 당했다.

1.1.5 죽음

오서에 따르면 노숙의 사람됨은 근엄하여 겉을 꾸미지 않았고, 공사에 걸쳐서 검약에 힘썼고, 저속한 취미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군세를 통솔하는 때에도 질서있고 금령은 반드시 시행되게 하였고, 진중에서도 서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또한 담론에 뛰어났고, 문장 솜씨도 뛰어났으며, 사려는 원대하여 다른 이의 배나 되는 총명함을 갖고 있었다. 주유 이후의 세대에서는 노숙이 제일가는 인물이었다.

노숙은 217년에 46세로 사망했다. 손권은 애도하고 장례식도 직접 참가하였다. 또 제갈량도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삼국지연의 한정으로 관로의 예언의 희생양이 되었다 조조좌자에게 농락당해 있을 때 관로가 그의 병을 치료해 주었는데 조조가 이것저것 물어보다가 "동오와 촉한에 대해 점을 쳐 주시오."라고 하자 관로는 점을 치고는 "오나라는 장수 한 명을 잃을 것이며, 촉한에서는 경계를 침범해 올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몇 주 후에 노숙 사망. 물론 이 사망 플래그 이야기는 연의의 허구다.

엄준전에 따르면 손권은 노숙의 후임으로 처음엔 학자인 엄준을 기용할 생각이었으나, 엄준이 학문에 열중한다며 사양해서 여몽을 후임으로 기용했다. 그의 사후 여몽이 군권을 이어받음으로써 과 오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게 된다.

1.1.6 사후

손권은 후에 황제가 된 뒤 "옛날 노자경은 일찍이 내가 제위에 오를 것을 말했는데 그는 형세의 변화에 밝았다고 할 수 있소."라고 말하며 노숙은 이 일을 예견하고 있었다고 하며 다시 경의를 표했다.

유명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손권이 어느 날 병에 걸렸는데 무당이 와서 말하길 비단 두건을 쓴 장군 귀신이 나타났기에 물러나라고 소리쳤으나 궁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날 밤 손권은 죽은 노숙의 귀신을 봤는데 무당이 말한 옷차림 그대로였다.

여몽전에 따르면 훗날, 손권은 육손과 대화하던 중에 주유, 노숙, 여몽을 평하며, "주유가 짱임. 근데 주유가 노숙도 보내줬지. 첫째로 제왕 되라고 해서 기뻤어. 둘째로 장소 등이 조조한테 항복하라 하는데 주유 불러서 싸우라 해서 좋았어. 근데 형주 빌려줬잖아? 넌 안될거야 아마 게다가 관우 이길 방법도 없었으면서 허세부리고. 그렇지만 여몽이가 관우 잡았잖아. 언변은 주유보다 딸려도 형주건은 노숙보다 위임. 그래도 노숙이 행정하거나 애들 다스리는거 잘 하긴 했어. 군대는 금령이랑 잘 지키고, 백성은 땅에 떨어진 물건도 안 줍고." 정도로 평했다.

여범전에 주석으로 달린 강표전에 따르면 손권이 황제가 된 이후 연회에서 엄준에게 자신이 이전에 노숙을 등우에 비교하고 여범을 오한에 견주었던 것에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엄준이 자리에서 물러나며 말했다.

신(臣)은 아직 그 취지를 이해할 수 없는데, 노숙과 여범이 총애를 받는 것은 두터우며, 실질 이상의 칭찬을 받았다고 합니다.

손권은 "등우는 광무제에게 의 대업을 회복시키도록 부하 중에서 처음으로 권해서 제왕의 뜻이 없던 광무제가 황제까지 되었다. 노숙은 능력도 있었던 데다가 노숙이 맨 처음 말했던 나에게 제왕이 되라했던 것이 이루어져 내가 황제까지 되었으니 등우랑 닮은 것이다. 그리고 여범은 비록 사치스러웠지만 충성스럽고 곧고 형(손책) 휘하에서 열심히 일했으니 오한과 견준 것이다. 그들을 편애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변호하자 엄준이 알겠다고 따른다.

1.2 평가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지방의 유력한 호족들의 힘이 강하여 중앙 정부가 힘을 쓰지 못하고 정책의 방향도 수성을 빙자한 유지에 전력했던 오나라에서 주유와 함께 국가가 진취적으로 성장해야 할 비전을 제시한 마지막 인재라 할 것이다.[6] 노숙의 사후를 기점으로 오나라는 촉한과의 동맹 관계를 깨고 형주를 점거하고 유비는 이릉으로 쳐들어가니 강력한 위나라를 옆에 두고 두 약소국이 소모전을 벌이는 병크를 걷게 된다.

장기적인 국가적인 전략의 관점에서 두 약소국이 힘을 합쳐 강대국 하나를 상대해야 하는 것이 정상적인 개념이라는 관점에서 이후 촉한과 관계과 회복된 이후에도 이전과 동일하게 합비도 넘지 못하는 안습한 상황이 이어지고 촉한에게 탈취한 형주를 이용해 북상하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는 점에서 오나라의 대외 정책은 노숙의 사후를 기점으로 전후로 나뉘어야 할만하다.[7] 무리수가 많이 따르지만 관우의 번성 공략 당시 노숙이 살아 있어서 공격의 방향을 촉한이 아니라 위로 향했다면 아마도 역사의 흐름도 많이 변했을 거라는 점에서 아쉬움을 가지는 사람도 있다.

정사에서 관우가 보였던 행보를 생각해보자면, 이미 노숙 시기에 익양대치처럼 전쟁 직전까지 갔던 일도 있었고 관우는 파견된 손권의 관리를 내쫒을 정도로 오나라에 대해서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손권의 말마따나 노숙은 관우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 방안은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이후 익양대치 때 노숙과 관우의 문답에서도 나왔듯이 노숙은 명분과 말로써 관우를 제어해내고 관우와 회담 때 관우의 행동에 대해서 질책하여 관우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강의 상류를 차지하면서도 오나라에 강경했던 관우 문제에 대한 해결 없이는 손유 간의 관계는 해결이 불가능했는데 전쟁으로 양국 국력을 까먹는 일 없이 이끌어나가는데는 대오 강경파인 관우마저 포용하고 제어하여 갈 수 있었던 능력과 명분이 있던 노숙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그렇게 노숙이 죽자 손유 동맹은 대놓고 오나라를 경계하여 적대적으로 나가는 관우 VS 겉으로는 호의를 닦으며 호시탐탐 형주 병탄을 노리는 여몽의 관계[8]로 전개 되었고 결국 두 세력은 커다란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1.3 기타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이 육전은 노숙이 뛰어나다며 노숙에 대해서 말하는 내용이나 노숙이 도독이 되어 관우와 대치하는 등의 무관의 모습이 조금 나오긴 하지만, 그가 전쟁에 직접 참여하는 모습은 없는 반면에 촉나라와의 외교와 관련된 일에서 주로 활약하기 때문에 문사(文士)의 이미지로 오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노숙은 무관과 관련된 관직에 종사했었고, 주유 사후 도독이 되어 전군을 통솔했다. 자신의 무용을 보여주기 위해 활을 쏘아 방패를 관통시켜 추격군들을 물러나게 한 일화도 있는데 여포의 원문사극이 정확도를 과시한 일화라면 노숙이 방패를 관통시킨 것은 용력을 과시하는 일화라 할 수 있다.[9]

즉 부자에다가 성품 좋고 활 잘쏘고 외교도 잘하고 더불어 융중대를 세운 대전략가. 중국에서는 노숙의 진언을 탑상책이라고 따로 부르기도 한다. 이는 침대 위에서의 계책. 노숙이 손권에게 침대맡에서 진언을 했다는 데에서 유래. 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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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후난성 웨양현(호남성 악양현)에는 노숙의 묘가 남아있는데[10] 묘 높이가 8m에 전체 면적이 약 800여㎡나 된다고 한다. 광서(光緖) 15년에 묘비와 정자가 정비되었으나, 문화대혁명에 의해 파괴되었다. 1986년에 재건되어, 비양에 「오(吳) 한창태수(漢昌太守) 노숙묘(魯肅墓)」라고 기록되있다. 묘에 있는 패방[11]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扶帝燭曹奸(부제촉조간) : 황제를 도와 조조가 간웅임을 밝혔으니,

所見在荀彧上(소견재순욱상) : 그것을 보면 순욱의 모습이 있으며
侍吳亲漢胄(시오친한주) : 오를 받들어 한의 혈통과 친하게 지내니,
此心與武侯同(차심여무후동) : 이 마음은 무후(제갈량)와 같도다.

아마도 관도전에서 원소와 싸우는 것을 돕던 순욱의 모습과 촉오 간의 동맹을 위해 여러모로 힘쓰던 제갈량의 모습을 노숙에게 비유한 듯. 괜히 노숙이 죽었을 때 촉과 오 모두가 슬퍼하고, 제갈량이 조의를 표한 게 아니다.

1.4 미디어 믹스

2 삼국시대 오나라의 인물

魯淑
(217?/218? ~ 274년)

노숙의 아들로 유복자.

아버지와 한글 이름이 같은데다가 훨씬 능력이 출중한 아버지에 이름이 가려진 케이스로 열전 자체도 아버지인 노숙의 열전에 딸린 형식으로 아주 짧게 남아있다.

노숙이 장성하면서 유수도독 장승에게 인정을 받아 그의 후계자로 주목받았고 장승이 그를 훗날 당연히 이 곳으로 와서 유수독이 될 거라고 했다. 유수독은 아니지만 도독으로 임명되었는데, 영안 연간(258 ~ 264년)에 소무장군 도정후 무창독에 임명되었다.

건형 연간(269 ~ 271년)에는 부절을 받아 하구독으로 승진했으며, 임지에서는 항상 엄정한 통치를 실시했고 지략과 재간이 있었다.

진나라의 공격 때문에 오나라에서 진나라로 투항하는 사람이 많아지기 시작했고 273년에 설영과 함께 군사 10만이라 칭하고 서진으로 출병했는데, 그 때 병사들 다수가 휴가를 나갔기 때문에 왕혼에게는 그 당시에는 일족의 병사들 밖에 없는 상태였지만 오군의 허를 찌르면서 익양 전투에서 왕혼에게 격파되었다.

274년에 죽자 아들 노목이 후사를 잇고 병마를 통솔했다.

2.1 미디어 믹스

삼국지 12,13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역대 시리즈 대대로 등장한다. 아버지의 마이너 버전. 아버지의 무력을 제외한 모든 능력치를 10~15 정도 칼질하면 아들 노숙의 능력치가 된다. 보통 그 유명한 노숙이 등용된 줄 알고 설랬다가 능력치를 보고 실망한다. 하지만 전체 시리즈에서 노숙은 적당히 굴릴 수는 있을 정도의 능력치로 나온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74/52/71/78의 아버지의 마이너 능력치. 무력 제외 능력치가 90대 였던 아버지에 비해 무력 제외 능력치가 70대. 연사, 누선, 혼란을 가지고 있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70/55/76/77/73에 명사 특기를 가지고 있다. 후기 장수 중에선 그래도 쏠쏠한 편. 그런데 왠지 모르게 208년생이다.

삼국지 11에서는 출생지를 임회군 동성현이라 기록했다. 특기는 조타로 능력치 자체는 무력이 평범한 것을 빼고 대부분의 능력치는 준수한 편이다.

삼국지 12에서는 능력치가 더 올라가 모든 능력치가 꽤나 괜찮고 특기도 꽤나 많이 가지고 있으며, 군사 특기도 있어 비책도 쓸 수 있다. 아버지가 가지고 있지 않은 병기나 공성 특기도 가지고 있고, 전법도 전군원사로 쓸만하다. 즉, 아버지의 마이너 버전. 특기가 진정인 아버지보다 전법 면에서는 훨씬 좋은 것 같다.
  1. 정작 유엽은 훗날 이 정보를 베어 죽인다.
  2. 참고로 위서와 구주춘추에는 노숙이 손권에게 일부러 항복을 권하며 도발했고 손권이 자신을 베려고 했다는 것을 갈파했다고 하는 기록도 있지만 배송지는 이를 부정했다.
  3. 삼국지연의에서는 동생 오국태가 손권에게 주유를 부르게 한다.
  4. 삼국지연의에서 정욱은 유비를 형주에 놓고 조조를 막게 하는것 뿐이지 실제로 유비와 손권 사이가 별로 안 좋다는 것을 간파해내지만 연의의 허구.
  5. 삼국지연의에서는 주창이 말한다.
  6. 후대의 제갈각이 있으나 뛰어난 능력에 비해 그릇이 너무 작아 몰락한다.
  7. 결국 노숙이 추구했던 양국의 동시 압박은 석정 전투가 발생한 228년부터 제갈량의 마지막 북벌이 있었던 234년 무렵에나 제대로 기능했다. 그러나 여러 방면으로 활발하게 잘 찔러보다가 하필 234년에 오가 도로 합비를 공격하다 막히고 촉은 제갈량이 병사하면서 실패.
  8. 노숙 사후엔 관우는 육손을 가볍게 여기고 상관의 쌀까지 털어먹었고 여몽은 아예 뒤통수 칠 목적으로 내부 배신자를 만들었다.
  9. 화살로 방패를 꿰뚫는건 웬만한 장력의 활로는 힘들며 그만큼 장력이 강한 강궁을 당겼다는 말이니 그 정도로 노숙의 용력이 굉장했음을 보여준다.
  10. 이 웨양현에는 노숙묘 외에도 태사자묘라든지 여러 삼국지 유적이 남아있다고 한다.
  11. 뛰어난 인물을 기리기 위해 묘 앞에 세운 일종의 문짝 없는 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