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 FIFA 월드컵 프랑스/대한민국

여러분의 참담한 심정. 저와 똑같을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 절대로 좌절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한국축구는 다시 일어설 겁니다.

- 네덜란드전을 직관한 이경규가 이경규가 간다에서 한 클로징 멘트.

1 개요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에서 있었던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경기내용과 이런저런 사연들을 정리. 몇몇 이들에겐 심한 상처를 남기기도 해서 대한민국 축구계에서 거의 흑역사 취급을 받고 있었지만, 16년 후 이보다 더한 흑역사를 맞게 되었다. 차범근은 2010년 6월경 기사에서 무릎팍도사 출연 제의에 98년 월드컵이 자신과 가족들에게 큰 상처였음을 말하며 아직 출연할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무릎팍도사는 종방했지만(…) 차범근과 가족들이 받은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2 조편성

본선 이전까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미국 월드컵에서의 선전과 더불어 아시아 지역예선을 통쾌한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을 상대로 극적인 역전승을 하는 도쿄 대첩을 거치면서 가볍게 통과한 상태여서 조편성 여부에 따라 사상 최초의 조별 리그 통과도 가능하다는 장밋빛 전망에 빠져있었다.

조추첨 결과 멕시코, 네덜란드, 벨기에와 E조에 편성되었고, "별로 좋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못할 것도 없다."라는 평가를 했다.

사실, 이 때 본선경기 이전까지는 세계축구와 한국과 아시아 축구의 현실을 인식하고 있던 극히 일부 계층을 제외하면 그나마 "해 볼만 하다.", "차범근 감독이 있기 때문에 그를 믿는다."라는 풍조가 강했다. 바로 이전 1994 미국 월드컵에서 당시 같은 조였던 스페인, 독일, 볼리비아라는 국가들의 면면은 일단 겉보기로는 1998 월드컵보다 오히려 더 어려워 보으나, 한국은 이들을 상대로 2무 1패를 거뒀고 경기 내용까지 따지면 아깝게 16강 진출 실패했다고 볼 수도 있을 정도였다.[1] 그리고 1994 월드컵 조별예선은 이른바 도하의 기적이라는 똥줄 진출을 했으나 1998 월드컵은 놀라울 정도로 쾌승을 거듭하며 비교적 간단하게 아시아 예선을 통과했기에 언론의 쓸데없는 호들갑과 설레발에 힘입어 기대감은 부풀어 오를 만했다.

3 본선전의 기대감

사실 아시아 지역예선이 시작되는 1997년 초에만 해도 분위기는 매우 좋지 않았다. 바로 얼마 전에 아랍에미리트에서 열린 1996 아시안컵 8강전 이란과의 경기에서 전반전을 2-1로 앞서고도 후반전 이란의 축구영웅 알리 다에이에게 완전히 농락당하며 4골을 허용하여 지금도 붉은 악마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일명 '씩스투 참사', 2-6 역전패라는 최악의 스코어로 패배를 한 뒤 박종환 감독이 경질되는 우여곡절을 겪었기 때문.[2] 새로이 대표팀 사령탑을 맡은 차범근 감독으로서는 이 난관을 뛰어넘어서 월드컵 본선에 진출해야 하는 무거운 과제를 안게 되었다.

차범근호가 높은 기대를 받은 것은 이런 상황에서 최종예선을 압도적인 호성적으로 극복했다는데 기인했다. 물론, A조에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3]라는 중동 호랑이들이 몰리는 바람에 이룬 성과였지만.

그리고 차범근호는 그런 우려를 불식시키는 가공할 성적으로 손쉽게 월드컵 본선티켓을 획득했다. 첫 4경기에서 카자흐, 우즈벡, 일본, UAE를 모조리 쓸어버리며 4전 전승을 기록함으로 고작 절반밖에 안 왔는데도 사실상 조1위로 본선을 확정지었던 것이다.[4] 특히 3차전 도쿄대첩은 가히 절정이었는데, 일본이 한국과 함께 조1위를 다툴 막강한 라이벌이었고 실제 경기 내용도 일본의 우세로 기울어지다가 경기종료 8분을 남겨두고 역전승을 거뒀기 때문. 또한 일본을 제치고 한국과 자웅을 겨루게 된 복병 UAE조차 3-0으로 잠실에서 뭉개버렸으니.....

이때 일본은 1승 2무 1패로 UAE의 2승 1무 1패에 밀려 자력 진출이 불가능한 조3위로 전락하면서 당시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의 가모 슈 감독 교체론까지 나올 지경이었고 결국 경질되었다.[5]

물론 첫 4경기 중 일본전을 제외한 3경기가 홈이었기에 실제보다 과대평가되었다는 말도 있었으나, 뒤이은 5~6차전 중앙아시아 원정을 1승1무로 가볍게 마무리를 지은 것은 그런 비판을 해소하기에 충분했다. 특히, 우즈베키스탄 원정 경기에서 1:5 대승을 거둔 것은 한국의 본선 진출을 확정지은 화룡정점.

8전 6승1무1패 승점 19점 19득점 7실점 골득실+12라는 가공할 성적은 아시아의 경쟁국들을 공포에 휩싸이게 했고, 국내 여론에게는 "이번에야말로 16강에 갈 수 있다!"라는 높은 기대감을 갖게 해주었다. 최종예선 B조는 결국 한국이라는 깡패에게 얼마나 잘 선방하면서 착실히 승점을 모으냐가 관건이었을 정도. 한국의 1패는 서울 홈경기에서 일본에 0:2로 패한 것인데, 이때 한국은 이미 본선행을 확정지은 상황에다가 일본은 지면 UAE와의 2위 경쟁에서 완전히 밀려 광탈이었고 비겨도 나머지 경기에서 계속 경우의 수를 따져야 하는 불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말 그대로 총력전을 펼쳤다. 이런 명분이 있었기 때문에 한일전 패배였음에도 의외로 비난의 목소리가 크지 않았고[6] 다만 한국이 일부러 일본에게 져준게 아니냐는 얘기가 나돌긴 했다.[7] 결국, 일본은 한국에 승리한 여세를 몰아 마지막 카자흐와의 홈경기에서 승리하여 기적같은 2위 플레이오프 티켓을 따낸다.

사실 차범근호의 이러한 최종예선 호성적은 운이 굉장히 크게 작용했다. 당시 한국이 월드컵 연속 3회 진출의 업적을 이룩한 아시아의 강자 중 하나이긴 했지만 지금처럼 월드컵은 당연히 나가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절대적인 위상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아시아 최종예선에서 한국은 언제나 진땀을 흘리며 겨우겨우 진출하는 편이었고, 특히나 바로 전 대회인 1994년 미국 월드컵은 자력진출에 실패해서 도하의 기적이나 바래야 했을만큼 월드컵은 결코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8] 98년 예선은 월드컵 진출국이 32개국으로 늘어나면서 아시아의 출전권도 3.5장으로 늘어나 어느정도 문턱이 낮아졌고[9], 그 이전까지 최종예선 진출팀을 전부 모아 조 구분없이 풀리그로 벌이던 방식에서 벗어나 두개조로 나누어 최종예선을 치루게 되었는데 한국의 발목을 수도없이 잡아챘던 중동의 강호들이 모조리 A조로 들어가고 상대적 약체라 할수있는 팀들이 한국이 속한 B조로 몰리는 행운의 연속이었다. [10] 이렇게 한국의 호성적이 행운적인 측면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성적의 실체에는 신경쓰지 않고 지금껏 빌빌대왔던 아시아 예선을 이렇게 시원하게 돌파해주니 본선에서도 뭔가 해줄것이다 하고 기대하게 돼 버린 것이다.

어찌되었던 이런 압도적인 성적을 배경으로 하는 데다가, 이기고도 자만하지 않고 다음 상대를 대비하는 듯한 겸손한 발언과 컴퓨터로 데이터를 관리한다고 알려진 차범근 감독에 대한 인기와 신뢰감은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차범근의 리더십'류의 처세술류 책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차범근을 대통령으로'라는 반농담도 회자되었다. 당시 중앙일보에 도올 김용옥의 차범근 감독의 경기 후 기독교적 언행에 대해 자제를 부탁하는 정중한 칼럼이 실렸고, 차감독이 회답을 했는데 그 두 칼럼이 화제가 될 정도로 국민적 관심이 대단했다.[11]

역시 지역예선에서 바게리를 누르고 아시아 지역예선 득점왕을 한 독수리 최용수는 이번에야말로 확실한 골잡이가 생겼다는 기대감을 모았다. 그리고 황선홍은 94년 월드컵 볼리비아전에서의 부진을 씻을 기회로 절치부심하고 있었고, 대한민국의 불세출의 골키퍼인 김병지가 있었으며, 94년 월드컵에서 수비수이면서도 2골을 넣은 홍명보가 있는 등 선수진의 면모도 화려해 보였다. 이대로 16강에 진출하기라도 하면 차범근은 스타선수 출신 감독으로서 가히 한국의 프란츠 베켄바우어, 요한 크루이프가 될 기세였다.

그러나 이렇게 월드컵 첫 16강 진출을 기대하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큰 암운이 드리워졌으니 그것은 황선홍의 부상이었다. 본선을 앞두고 벌였던 중국과의 평가전에서 황선홍이 문전으로 쇄도하다가 중국 골키퍼 장진과 충돌, 공중에서 옆으로 한 바퀴 회전 후 떨어져서 큰 부상을 당해 출전이 불가하게 되어버린다.

당시 차범근 감독은 황선홍이 부상당하기 전까지 그에게 깊은 신뢰감을 표시하였고, "황선홍은 대표팀 전력의 절반이상", "유럽 수비수들에게 통할 선수는 황선홍 정도"라는 이야기를 공공연하게 할 정도였기에 심대한 타격이었다. 단, 황선홍이란 표현을 썼는지는 확실치 않다.

당시 대표팀에서 황선홍이 차지하는 비중에 대해서는 다소 논란이 있다. 사실, 황선홍은 한국이 피크였던 아시아 예선전에서는 엔트리에도 없었고 예선이 끝난 이후에 팀을 재편하며 합류했지만 그 시기도 늦었다. 때문에 당시로선 팀 전체의 전력을 논할 정도로 유력한 선수는 아니었다는 의견도 있다. 월드컵 직전에도 공격수는 단연 예선에서 폭풍활약을 했던 최용수에게 시선이 모아져 있었다. 그러나 통산 커리어에서는 물론 최용수의 전성기 시절 기량을 비교하더라도 황선홍과 비교하기는 힘든 것이 사실이다. 어쨋거나 황선홍의 부상이 대표점에 악재가 된 것은 사실이다.

94년 월드컵에서 황선홍의 삽질이 일반 국민에게 워낙 크게 각인되어 있는 터라 98년 당시에도 황선홍에 대한 인식과 이미지는 별로 좋지 않았다. 황선홍이 중국 전에서 부상을 당했을 때도 언론이든 국민여론은 아쉽지만 별 상관없다 수준. 되려 황선홍을 94년 이후로 좋게 보고 있지 않은 일부에선 차라리 잘되었다 소리까지 나오던 판국이다.[12] K리그의 팬이 아닌 국대축구만 보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리그에 황선홍의 활약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황선홍의 부상을 언론이 걸고 넘어진건 월드컵 본선에서 참패한 이후로 패배의 원인을 이것저것 가져다 붙이다가 그 와중에 황선홍의 부재가 팀에 타격이 컸다는 식으로 지나치게 확대해석을 했다는 의견도 있다.

까놓고말해 황선홍이 있고 최용수, 서정원 다 만전이었던들 한국이 멕시코, 네덜란드, 벨기에에게 이겼을거 같은가?

4 본선 최종 엔트리

괄호 안은 당시 소속팀이다.

5 본선 경기 전적

경기일시라운드상대국점수승패
6월 13일조별리그 1멕시코1-3
6월 20일조별리그 2네덜란드0-5
6월 25일조별리그 3벨기에1-1

총 1무 2패로 16강 탈락

5.1 첫번째 경기 : 대 멕시코

나넣고

점이나
다니 - 경기 후 한 PC통신 유저가 축구 게시판에 하석주 이름으로 지은 3행시.

일순간에 영웅에서 죄인에 역적신세로 전락한 하석주 선수. 이대로 프랑스를 통한의 무대로 남겨둘 것인지 주목됩니다. - MBC 기자 리포트 중에서.
서정원 선수가 아직 회복이 안 되어서 기대보다는 못 미쳤지만, 최성용 선수의 부상도 오늘 경기에서 간접적으로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 차범근(경기 이후 가졌던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 때까지로서는 김도훈 선수가 유일한 희망이었기에 김도훈 선수에게 기대를 걸었다. 최용수 선수의 경우, 체력이 약해서 기용했을 필요가 없었다. - 차범근(경기 후 가졌던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대한민국 월드컵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역전패

시작은 좋았다. 한국은 전반 28분경 하석주의 프리킥이 점프한 멕시코 수비수 다비노의 머리를 맞고 굴절되며 들어가 선제점을 얻는다. 이 선취골은 한국이 월드컵 본선에 출전한 이래 최초로 넣어본 선제골이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무대에서 이기고 있었다. 그러나 골에 대한 기쁨이 가시기도 전에 하석주는 3분만에 거친 백태클로 레드카드를 받고 퇴장을 당하고, 그렇게 수적 열세에 몰리게 된 한국은 경기주도권을 멕시코에 완전히 빼앗기게 된다. 그나마 전반전은 김병지의 선방 덕에 1 대 0으로 앞선 채 마쳤지만, 후반 5분만에 교체투입 된 펠라에스에게 코너킥 상황에서 동점골을 내주고 말았고, 이후 각각 29분과 39분에 멕시코의 스트라이커 루이스 에르난데스에게 2골 더 허용하여, 1 대 3으로 참담한 역전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 당시 하석주에게 내려진 레드카드 판정을 놓고 말이 많았는데, 아무리 백태클에 대한 제재가 강화하겠다는 언급이 있었더라도 상대 선수가 크게 다치지도 않은 상황에서 방금 전에 프리킥 골을 성공시킨 선수를 퇴장시킨 것은 누가 봐도 뻔한 편파판정이라는 주장이었다. 또한, 차범근 감독의 부인이 언론 인터뷰를 통해 그 당시 FIFA 부회장이었던 정몽준이 이 경기를 보고 있었다면 기껏해야 경고에 그쳤을 것이라는 식의 말을 하면서 축구협회와 차범근의 갈등은 극에 달한다. 그리고 정몽준이 관전하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상기한 이유 때문이라는 것이 당시 국대 축구팬들의 공통된 견해였다. FIFA 부회장이면서 자국 선수들의 첫 경기를 관전하지 않았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가는 부분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이 레드카드는 편파판정이라기 보단 재수없게 걸려든 시범케이스라고 보는게 더 맞다. 하석주 이후로 독일-크로아티아 8강전에서도 크리스티안 뵈언스도 백태클을 시도하다가 걸려 레드카드를 받고 즉시 퇴장당했다. 뵈언스의 태클은 하석주와는 달리 크로아티아 공격수 수케르가 루즈볼을 잡기 위해 뛰어드는 것을 막기위해 발을 높게 들어 넘어뜨린 것으로 완벽한 백태클을 시전했던 하석주와는 상황이 다르다.[13]

하지만, 정몽준의 관전 여부를 제외하고라도 차범근 감독의 선수 기용에도 의문점이 있었다. 예선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으며 아시아 예선 득점왕이자 팀의 주축인 최용수를 내보내지 않았던 점,[14] 골대 윗그물에 맞는 위협적인 중거리슛을 날리며 펄펄 날아 다니던 고종수를 갑자기 교체해버린 점,[15] 경기 전 몸풀기에서 김태영이 찬 볼에 관자놀이를 정통으로 맞아서 기절한 뒤 간신히 깨어나 제정신이 아니었던 이상윤을 풀타임으로 뛰게 한 점[16] 그리고 원톱으로 출전한 김도훈은 다리에 쥐가 나서 벤치근처로 달려와서 침을 맞아 피를 빼고 들어가는 등 전반적으로 문제점을 드러냈다. 즉, 10 대 11로 불리한 경기를 하긴 했지만 퇴장만 아니었으면 문제가 없었다고 할만한 경기 운영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경기 후 비판의 도마에 오르며 여론의 십자포화를 맞은 (반쯤 마녀사냥에 가까웠다) 하석주는 경기 이후 두문불출하며 연락도 끊고 칩거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한국축구 사상 최초로 월드컵 본선 선제골을 기록한 주인공으로서 구국의 영웅이 될 뻔했다가 2분만에 망국의 죄인이자 역적으로 급변한 충격과 후유증이 컸던 것으로도 알려졌다. 다음 경기인 네덜란드전에는 퇴장 페널티로 출전조차 하지 못했고.

여담으로, 멕시코의 콰우테모크 블랑코는 볼을 양다리 사이에 끼워 잡더니 펄쩍 개구리 점프를 하며 볼을 수비수 뒤로 던져넣는 돌파를 수차례 시전했다. 한국 수비는 그걸 못막고 번번히 뚫렸다. MBC 아나운서 송재익은 "아~ 저 짓을 또하는군요!"라고 중계했다. 이 개구리 점프는 일명 쿠아테미나, 피파온라인 게임에선 블랑코 바운스라고 부른다. 즉, 블랑코 특유의 기술인 것.

이후 한국과 멕시코는 2001년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재격돌했는데, 한국은 이 경기에서 멕시코를 2:1로 이기며 월드컵에서의 패배를 설욕했다. 이 경기에서도 블랑코는 개구리 점프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한국 선수들에게 공을 빼앗겼다. 이 때 홈팀인 한국 관중석에선 비웃음이 흘러나왔고, 당시 경기를 중계하던 해설진은 통쾌하다는 듯 '이제는 안 통하죠!' 라는 멘트를 던지기도 했다. 또한 2006년 일본에서 열린 FIFA 클럽 월드컵에서도 전북현대와 멕시코의 클럽 아메리카와의 경기에서도 시도했지만 최진철의 수비에 막혔다. 이후 한국은 멕시코에 16년동안 무패행진을 이어갔으나 2014년 1월 평가전에서 4:0 완패를 당하며 이 기록이 깨졌다. 대단해 홍명보호

여담으로, 이경규가 간다 월드컵 특집 촬영차 이 경기를 직관한 이경규는 나중에 녹화본을 보았을 때, "내내 욕만 하고 있더라."는 이야기를 후에 털어놓기도 했다. 결국 방송에 나간 분량보다 방송에 못나간 분량이 더 많다고.

한편, 같은 조에 속했던 네덜란드와 벨기에는 0 : 0 무승부를 기록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서 한국팀의 16강 진출은 더욱 어려워지게 되었다.

5.2 두번째 경기 : 대 네덜란드

속수무책이네요. - 신문선 해설위원
완전히 오늘, 완패입니다. - 이용수 (당시) KBS 해설위원
A 신문 : 네덜란드전에서의 승리는 바로 우리나라의 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시사저널 : 개소리 집어쳐!

이번 경기를 끝으로 현 감독인 차범근을 전격 해임한다. - 대한축구협회
차범근 감독의 전술은 이미 실패작 수준이었고 선수기용도 도저히 이해못할 고집스런 수준이었다. - 축구협회 기술위원
2002 월드컵을 대비하여 다음 벨기에전 때 신인 선수들을 포함하는 새 진용을 갖추겠다. - 차범근(네덜란드전 경기 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더 많은 득점을 할 수 있었지만, 대한민국의 골키퍼(김병지)가 너무 뛰어나서 더 많은 골을 넣지 못했다. - 1998년의 마르세유의 치욕 당시,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이었던 거스 히딩크.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지만, 당시만 해도 더욱 개념따윈 없었던 한국의 황색언론에 가까운 언론매체들(특히 스포츠 신문들)은 멕시코전의 패배는 잊었다는 듯 앞다투어 "네덜란드 해볼만 하다.", "네덜란드 약점은?" "네덜란드 격파 비책" 같은 제목으로 망상스러운기사를 쏟아냈다. 경기 당일 신문 제목들은 더욱 가관이었는데 "오늘 네덜란드 잡는다.", "차범근 비책", "네덜란드 잡으면 16강 청신호." 등이었으며 비겼을 때 경우의 수를 논하는 글들도 있긴 있었다.

네덜란드가 1차전인 벨기에전 에서 비기는 것을 보고 우리도 해 볼만 하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더욱 커진 것 이었다. 이때의 네덜란드-벨기에전의 결과는 순수히 양 팀의 실력만 보고 선수들의 멘탈을 좌우하는 양국 관계를 몰라서 나왔던 말이다. 비록 벨기에는 유럽 중위권 팀이고 객관적인 전력으로 보면 네덜란드에 처지는 상태였지만, 과거 벨기에는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다가 독립한 국가였고, 그것 때문에 네덜란드를 숙적으로 여기고 있어서 네덜란드와 경기를 할 때이면 항상 자기 실력 이상의 힘을 발휘하는 면이 있었던 것이다[17] . 무엇보다도 네덜란드는 경기 중 클루이베르트가 레드카드를 받으면서 퇴장당하는 바람에 후반전 절반 이상을 10:11로 싸우고도 벨기에를 상대로 우세한 경기를 했다.

심지어는 네덜란드 팀의 치명적인 약점으로 흑백갈등을 지적한 기사가 나오기도 했는데, 이는 파트릭 클루이베르트에드가 다비즈, 클라렌스 세도르프를 두고 한 얘기인 듯 한 얘기였고 실제로 당시 악동으로 불렸던 클루이베르트가 훈련 중 다툼을 일으켰다는 기사가 있기는 했으며 당시 네덜란드 팀 내에 흑백갈등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히딩크가 그 문제를 잘 통제, 관리하고 있었다는 것. 기사를 쓰려면 끝까지 보고 쓰는 게 기자인데, 자기가 좋아하는 말만 대충 듣고 쓰는 게 기자냐?[18]

정작 차범근 감독 본인은 "네덜란드와는 비기고 벨기에를 꺾는 것이 목표다" 라고 말했다. 당장 4년 전 월드컵에서 사우디가 돌풍을 일으킬 때 사우디를 꺾고 그 조 1위로 16강 진출했었고 8강에서 브라질 상대로 패하긴 했지만 2:3 접전승부를 연출했던 게 네덜란드 였다는 걸 감안하면 얼마나 기자들이 멍청했는지 알 수 있다.

그나마 유일하게 "월드컵 16강? 꿈 같은 소리 집어쳐!"라라고 쓴소리를 한 언론이 딱 하나 있었는데 바로 주간지인 시사저널이었다. 이 당시는 외압에 흔들리지 않는 독립언론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시사주간지 중에서 판매량도 1~2위를 다투고 있었고... 2005년 삼성비판 기사 삭제에 따른 파업으로 주력기자들이 빠져나가기 전이다.

시사저널은 월드컵이 열리기 직전에 당시 기사를 통하여 상대들을 몰라도 너무 모르면서도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허접으로 본다면서 당시 여론 및 언론 보도를 비난했다. 시사저널에서 예상한 한국팀의 경기 결과는 그야말로 경악스러운 선견지명을 보여줬다!

"네덜란드에겐 한 0:4로 지며, 벨기에에겐 1~2점차로 지고 멕시코와 죽어라 경기를 해서 겨우 비긴다. 16강? 1승? 천만에, 1무 2패가 한국축구의 수준이다."

당시 월드컵 전, 시사저널 홀로 이렇게 이게 한국 축구 수준이라고 매섭게 따지며 현실을 알라고 일침을 가하는 기사를 올려서 당시 많은 비난을 듣었으나 알다시피 벨기에와 멕시코가 바뀐 것 빼고 거의 들어맞았기에 경기 끝나고 나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월드컵이 끝나고 시사저널 독자란에 "어쩜 그렇게 예언 수준으로 잘 예측했느냐?"라는 글을 올렸는데 시사저널 측은 그게 한국 국대축구 실력이거든요."라고 응답했다.

물론 상대에 대한 정보가 없던 시절이긴 했어도 요즘처럼 정보를 얻을 수 있었어도 글쎄? 홍명보호/2014 FIFA 월드컵 브라질를 봐도 알겠지만 어차피 언론이 묻지마 기사를 써재끼는 투로 쓰기에 "16강 가능성 크다. 네덜란드 이긴다~"라고 설레발로 썼을 것이다.

아무튼 스포츠 신문과 방송의 희망적인 예측에 들뜬 많은 국민들도 네덜란드 정도면 그래도 해볼만하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만 해도 위성방송이나 케이블이 널리 퍼지지 않았을 때였고 해외 축구의 흐름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PC통신 축구게시판에서 활동하는 몇몇 사람들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대부분의 국대팬들은 축구강국하면 브라질, 아르헨티나, 독일, 이탈리아 정도를 생각했고, 유럽 만년 콩라인 네덜란드가 어느 정도로 강팀인지는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독일은 원래 강호라는 인식이 있었지만 바로 4년전에 미국에서 패배했기 때문에 더욱 잘 알려진 상태. 하지만 98 월드컵 당시에는 녹슨 전차였지? [19]
결국 대다수 국민들은 언론의 보도대로 네덜란드를 '유럽의 강호이긴 하지만 해볼만한 팀' 정도로 알고 있었다. 우승후보라는 이야기가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여담으로 경기 끝난 다음 여러 사람들 인터뷰가 보도되었는데 한 직장인은 동료들과 내기에서 그냥 생각없이 네덜란드에게 5점차 정도로 크게 질 것같다며 1만원 내기를 했단다. 그리고 경기 끝나고 30만원이 넘는 내기금을 받았다고(...). 그 때 스포츠토토가 없어서

프랑스 월드컵에 출전한 당시 네덜란드 대표팀은 상당히 강력한 스쿼드를 갖춘 강팀이었다.[20] 당시 스쿼드만 봐도 꽤나 화려하다.

면면을 살펴보면 당시 최고의 전성기에 접어들고 있었던 셰도우 스트라이커의 교과서 데니스 베르캄프를 필두로, 세계 정상급 스피드 윙어였던 마크 오베르마스, 1994-95 시즌 아약스UEFA 챔피언스리그의 우승을 안긴 최강의 타깃맨 파트릭 클루이베르트,[21] 중원의 싸움닭 에드가 다비즈프랑크 데 부어-로날드 데 부어 형제[22], 루드 굴리트 이래로 네덜란드 최고의 테크니션이라 평가받던 클라렌스 세도르프, 철의 장막 약쟁이 야프 스탐, 그리고 최고의 골키퍼 에드윈 반 데 사르 등 당대 세계 올스타급 수준의 선수들이 즐비했다. 그것도 포지션 편중은 커녕 공수 전반에 걸쳐 고루 분포함은 물론 골키퍼까지 완벽했던 것이 1998 네덜란드의 스쿼드였다. 네덜란드는 결국 이 대회 준결승전 에서 브라질에 패했지만 객관적인 경기력은 브라질을 앞섰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으며, 히딩크가 1998 월드컵 이후 사임한 것도 저런 스쿼드를 가지고 우승을 못해서 실망스러운 결과였기 때문이라는 말이 신빙성있게 들릴 정도. 그리고 이 감독님은 4강 전문이기 때문에 2002년에 이변을 일으킨다.

물론 상기한 대로 당시는 유럽축구에 대한 인식이 지금에 비하면 너무나 떨어졌던 시기였기에[23] 많은 국내의 축구팬들에게 기껏해야 베르캄프를 제외하고 나머지 선수들의 이름이 낯설게 들렸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24] 경기를 중계하던 송재익과 신문선은 영상 자막에서 다비즈의 영문 스펠링만 보고 "다비드스"라고 발음했을 정도로 유럽 선수들의 정보에 무지했다.

게다가 네덜란드는 경기 전날의 연습시간에 자신들의 연습시간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경기장을 내주지 않고 슈팅연습을 계속 해댔고,[25] 강력하고 정교한 슈팅들이 골문 안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을 본 한국 선수들은 경기시작 전부터 이미 기가 죽어버리고 말았다. 이는 히딩크 감독의 고도의 전략으로 후에 자신의 자서전에서도 언급하였다.[26] 게다가 경기날 경기장 분위기도 한국팀의 기를 꺾기에 충분했다. 당시 55,000명의 관중 가운데 70%가 오렌지색 유니폼을 입은 네덜란드 응원단이었고, 한국은 완벽히 원정의 분위기에서 압도당한 채 경기를 치러야만 했다.

결국 대표팀은 거스 히딩크가 이끄는 네덜란드에게 5 대 0으로 선전 참패했다. 그나마 김병지의 선방이 아니었다면 5:0으로 끝나지 않고 더 많은 실점을 당했을 것이다.

전반 초중반까지는 그런대로 잘 싸웠으며, 종종 기회를 만들기도 했다. 전반 8분에 김도훈이 옆그물을 맞추는 강력한 슈팅을 날렸는데, 이 때 카메라 각도가 절묘해서 해설진과 팬들이 잠시 골로 착각하고 환호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경기는 하프코트 게임으로 돌변하기 시작했고, 한국은 전반전부터 아예 노골적인 시간 끌기 전략으로 전환한다. 골킥을 차려던 김병지가 일부러 느릿느릿 최대한 늦게까지 미적대다가 관중들의 야유를 받았고, 프리킥 때는 최용수가 자꾸 킥을 하지 않고 도움닫기 거리를 최대치로 잡으며 무한정 뒷걸음질을 시전하다가 이를 보다 못한 심판에게 경고를 먹기도 한다. (...) 결국 전반 37분 필립 코쿠에게 선제골을 허용한 데 이어 42분 마크 오베르마스에게 추가골까지 허용하면서 0대2로 전반전을 마쳤다. 이 때 이용수 KBS 해설위원은 전반전을 마치고 "아이, 37분까지는 잘 개겼는데~" 라고 말하기도(...).

그리고 후반전 헬게이트가 열렸다. 전반전을 통해서 대한민국의 전력을 간파한 네덜란드에 대한민국의 수비진은 더 이상 상대가 되지 못했다. 후반 26분 베르캄프가 대한민국의 수비진을 완벽히 농락하면서 세번째 골을 넣었고[27] 후반 33분 교체되어 들어온 반 호이동크가 오베르마스의 크로스를 받아서 헤딩으로 골을 기록했고, 후반 37분 로날드 데 부어가 다섯번째 골을 넣으면서 마지막 남은 자존심마저 처참하게 구겨버렸다. 이는 50년대 처음으로 본선에 진출했을때를 제외하면 가장 큰 대패기록이었고 내용은 더 참혹했기에 많은 국대팬들에게 트라우마를 안겨준 경기이다. 홍명보는 네덜란드 전에 대해 후일담에서 "경기가 빨리 끝나기를 바랐다."라고 회고하였고, 당시 경기를 생중계하던 KBS 서기철 캐스터 역시 5번째 골이 들어가자 망연자실하여 "차라리 경기가 빨리 끝났으면 좋겠네요"라는 말까지 남겼다. 그때 새벽잠 설쳐가며 경기를 시청한 사람들 대부분 역시 맨 정신으로 끝까지 경기를 지켜볼 수 없어 경기 종료 전에 TV를 껐을 듯. 많은 축구팬들에게 네덜란드 트라우마를 안겨 준 경기이다. 이 경기 이후로 네덜란드 대표팀이 국내 팬들의 관심팀이 되는데 잊혀질만하면 유로 예선에서 중하위권 팀들에게 대량 득점을 하며 "역시 네덜란드는 양민학살의 달인"이라는 평을 하게끔 하였다. 98년 이후 네덜란드와 몇 차례 평가전을 하였지만 히딩크 이후로 네덜란드 축구를 이식한 대한민국 대표팀은 데드카피의 한계인지 원조를 상대로 좋은 경기를 펼쳐본 적이 없어서 더욱 네덜란드 공포증을 갖게 했다. 특히 당시 국내 최고의 준족을 자랑하던 서정원이 앞이 탁 트인 상황에서 공을 잡았음에도 뒤따라오던 다비즈에게 따라잡히는 모습을 보이는 등,[28] 지역예선의 선전으로 우쭐해있던 한국축구가 우물안 개구리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줬다.

당시 이 경기를 광화문에서 단체 관람한 초창기 붉은악마들은 새벽이슬을 맞으며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직관한 이경규는 네덜란드전에 대해서 "멕시코전 녹화분을 보고 2차전에서는 울어서 감동을 줘 보자고 생각했는데, 경기를 보고 진짜로 울게 되더라."며 이때를 회고했다. 그리고 경기를 직접 보러온 가수 김흥국도 방송 카메라로 안타까워하는 얼굴을 하며 보고 있던 게 찍혔다. 이 경기가 새벽 6시경에 끝난는데, 패배가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경기종료 직후에 시작된 아침뉴스 오프닝에서 앵커가 사색이 된 얼굴로 잠시 말문을 열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경기 후 나온 석간판 신문 제목들은 흔한 클리셰 중 하나인 "세계의 벽 높았다." 일색… 그나마 일간지들은 저 정도였지, 이날 저녁에 나온 스포츠신문 석간판 1면은 온통 "이 치욕 잊지말자"라느니, "김병지가 불쌍했다"라느니 "이날 전국은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등등 원색적인 병맛헤드라인으로 도배되었다. 특히 스포츠조선은 이날 저녁에 나온 석간판 헤드라인에 아예 5대빵이라는 문구를 선보이기까지 했다.

결국 차범근은 네덜란드전 참패 직후 전격 경질되었고, 대표팀은 김평석 수석 코치를 감독 대행으로 하여 마지막 벨기에전을 준비하기에 이른다. 이에 앞서 당시 사우디 대표팀 감독으로, 94년 월드컵에서 브라질을 우승으로 이끈 카를로스 알베르토 파레이라 감독이 프랑스에 0:4로 참패한 직후 대회 도중 경질된 바 있다.

당시 한국과 네덜란드가 경기를 벌였던 곳이 프랑스 마르세유 축구 경기장이었기 때문에 마르세유의 치욕 또는 마르세유의 굴욕이라고도 불렸다.

그러나 이 경기에서 빛났던 한국 선수가 있었으니 바로 김병지. 자세한 사항은 김병지 항목 참조. 또 당시 19세의 이동국은 후반에 교체로 들어가 네덜란드의 골문을 위협한 날카로운 중거리슛과 코너킥에서 골키퍼 정면으로 향하는 강한 헤딩슛을 날리면서 실의에 빠진 국민들에게 다음 혹은 다다음 대회를 기약하는 희망을 주기도 하였다.[29] 경기가 끝난 후 외신과 네덜란드 언론이 김병지와 이동국만 언급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부상이 심했으나 혹시 나을지도? 하는 생각에 데려갔던 황선홍은 벤치에서 분루를 삼키며 진통제를 맞고라도 뛰겠다는 이야기를 했으나 차범근 감독이 이 대회가 끝이 아니라며 만류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 경기를 계기로 처음으로 한국인들에게 알려지게 된 당시 네덜란드 축구팀 감독 거스 히딩크는 이 때까지는 한국팀에게 통한의 눈물을 흘리게 하고 비수를 꽂은 적장(敵將)이라는 인식을 만들게 하였다. 그러나 4년 후 바로 이 적장이 대한민국 대표팀 감독이 되어서 대한민국 팀을 4강 신화로 이끌어내게 된 역사적인 영웅이 되리라는 것은 이 때까지는 한국인 그 누구도 생각하였거나 예상하지 못 하였으니.

한편, 같은 조에 속했던 멕시코와 벨기에는 2 : 2 로 또 무승부를 기록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서 한국팀의 16강 진출은 사실상 물건너 갔다. 같은 조 4팀 중 한국만 유일하게 패배, 그것도 2패가 있기 때문이었다.

여담으로 이 때 히딩크는 대한민국의 문제점을 확실하게 파악하게 되는 계기가 되고 이 때 보니 문제가 하나 둘이 아닌 것으로 보았다고 말했다.
일단 선수들이 체력이으로, 이 경기를 다시 돌아보면 선수들이 전반 30분 경을 넘기고서 확실히 지친 모습이었다. 연장 전반이 아닌 그냥 전반전을 다 뛰지도 않았는데 지친 것은 적장의 눈으로도 체력이 약점임이 들어난 경기였다.

두번째는 선수들의 순진한 정신상태였고 주변요소에 너무 쉽게 흔들리는 것이 눈에 띄게 보일 정도였다. 다음은 히딩크 항목의 각주를 일부 따온 것이다. 훗날 인터뷰에서 경기 전 우리나라 선수들의 긴장과 두려움으로 가득찬 눈빛을 보고 대승을 확신했다고 한다. 2002년 이전 월드컵만 나가면 쫄아서 자멸했다던 많은 국대선수들의 인터뷰와 일맥상통한 이야기다. 일부러 쫄게 만들기도 했다. 당시 한국과 네덜란드는 같은 연습장을 썼는데, 한국대표팀이 도착한 후에도 히딩크는 일부러 훈련을 계속했다. 그런데 30분이 넘도록 한국쪽에서 아무런 항의가 없어서 '얘들이 단단히 쫄았구나...'라고 확신했다고. 당시에 우리나라 선수들이 죄다 순박해 빠져서 그랬지, 만약 이천수나 기성용같은 한 성질(...)하는 선수들이 있었다면 역효과가 났을지 모른다.
저랬으니 당연히 한국대표팀의 성적이 바닥을 기는 것이 댱연한 것. 여기에 선수들이 상대팀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고 보았던 것과 잘못된 훈련과 겹치고 거기다 상대팀에 대해서 너무 두려워했던 것도 문제였다.

세번째는 차범근의 경험 부족과 자질 문제였다. 일단 차범근의 경험 부족이 제일 큰 문제로 브라질 월드컵 홍명보 못지 않은 초보감독인 차범근을 덜컥 대표팀 감독에 앉힌것 부터가 문제였다.[30] 히딩크가 그가 문제라고 봤던 것이 전부 차범근 감독의 경험 부족을 정확히 파악했던 것이다. 현역시절 뛰어난 선수였다고 해서 명감독이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차범근이 지도자로서 어떤 자질을 가졌던 간에 98년 당시로서는 차범근이 대표팀 감독이라는 중책을 맡기에는 지도자 경험이 상당히 짧았던 것은 사실이다. 3년간 울산 현대의 감독을 맡은 것이 지도자 경력의 전부였다. 이런 상황에서 언론 통제를 제대로 못한 본인의 실수가 겹치면서 결국 5:0 대패를 기록하는 단초를 마련한다.

또 한가지 주목할 부분이 있는데, 이 경기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처음으로 문화충격을 받았던 경기이기도 하다. 킥오프 직전 관중석을 온통 오렌지색으로 뒤덮은 스타디움의 장관이 중계화면을 통해 비춰지면서 사람들은 그야말로 시각적 쇼크를 받았던 것이다. 지금이야 응원팀과 같은 유니폼을 입거나 같은 색깔로 깔맞춤을 하고 경기장을 찾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그 당시까지만 해도 한국에서는 붉은악마 같은 특수한 응원단체가 아닌 일반관중이 응원팀과 똑같은 유니폼을 입고 응원한다는 개념이 거의 없던 시절인 것이었다. K리그 서포터즈 문화도 이제 막 태동하던 단계였고, 프로야구조차도 아직 유니폼을 상품화해서 제작판매한다는 개념조차 상상도 못하던 시기였다. 하여튼 경기 킥오프 전부터 그라운드 관중석 전체가 오렌지 빛으로 뒤덮인 광경을 신기하게 바라보면서, 선수들도 선수들이지만 시청자들조차 상당한 충격을 받은 경기였다[31]. 여러모로 대한민국 축구사에 임팩트를 안겨주었던 경기라 할 수 있다. 이게 국민들의 뇌리에 깊이 박힌 탓인지 4년 후 한일월드컵에서는 전국민이 붉은악마 티셔츠를 입고 경기장이며 길거리며 온통 붉은색으로 채워버리는 기염을 토한다.

그리고 이로부터 15년 후, 종목은 달라도 또 네덜란드에게 0-5 대패가 재현된다.

5.3 세번째 경기 : 대 벨기에

이것이야말로 축구! 이것이야말로 월드컵! - 이 경기를 중계한 일본 아나운서
오늘같이만 싸운다면 2002년 때 우리나라는 16강에 꼭 들어요[32] - 시민 그리고 4년 후.....

잃을 게 없는 놈들과 반드시 이겨야 하는 놈들의 단두대 매치.

네덜란드전 대패로 조별예선 광탈이 확정된데다 감독까지 잘린 가운데 맞이하는 벨기에전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는 그야말로 땅에 떨어져 있었다.만약 패하기라도 한다면 전체 32개국 중 32위를 할수도 있는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대표팀 선수들은 1승이라도 국민들에게 선사하고자 했고, 벨기에 또한 최소 3골차 이상으로 이겨야만[33] 16강에 진출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나마 긍정적인 면이라면 멕시코전에서 경고 없이 퇴장을 당했던 하석주가 1경기 출전불가로 징계가 완화[34]되어 출전할 수 있다는 정도였다.

그렇게 빗속에서 벌어진 혈투의 결과는 1:1 무승부. 후에 이 경기는 98 월드컵 최고의 명승부 중에 하나로 꼽히기도 하며 한국 축구 명승부를 거론할 때 언급되는 경기가 되었다. 경기는 한국 대표팀이 강팀을 만나면 늘 그랬듯, 먼저 골을 먹고 나중에 따라잡는 경기가 됐다. 전반 7분에 코너킥 혼전상황에서 흘러나온 공이 당시 PSV 소속으로 뛰고있던 닐리스의 강력한 중거리 슈팅으로 연결되면서 선취골을 내줬지만, 대표팀은 계속된 벨기에의 공세를 온몸으로 막아내면서 간간이 역습의 찬스를 만들어 나갔다. 당시 대표팀의 중앙 수비수였던 이임생은 이마가 깨져 피가 나던 상황에도 교체카드를 다 써버려 붕대를 감고 다시 운동장으로 들어가야만 했다.[35]

그리고 후반 26분 마침내 하석주가 중원 왼쪽에서 얻은 속죄의 프리킥을 유상철근성으로 골 에어리어 오른쪽에서 발을 대 득점을 했다. 이후 경기의 주도권을 잡은 대표팀은 여러 차례 벨기에의 골문을 두들겼지만, 최용수가 문전에서 2차례나 크로스바 위로 넘어가는 헤딩슛을 날리며 안타깝게 찬스를 무산시켜 결국 이기지는 못하고 1:1 무승부를 기록하게 된다. 최용수의 골 결정력이 참 아쉬웠던 경기였는데, 후반 막판 결정적인 헤딩 슛 두 개를 크로스바 위로 날려버리기도 했고, 중앙에서 스루패스를 받아 단독 돌파로 골키퍼와 일대일로 맞서는 상황에서 골대 옆그물을 때리는 슛을 날리며 찬스를 놓치기도 했다.

여러모로 처절한 경기였다. 앞서 언급한 이임생의 붕대 투혼 뿐만 아니라, 중앙수비수였던 김태영도 무릎 부상 때문에 경기 중 수시로 그라운드에 드러누워 무릎을 감싸며 고통을 참아가며 뛰어야 했다. 그럼에도 교체카드가 없는 상황에서 경기가 끝날 때까지 점프를 하며 공을 커트해내는 투혼을 보여주었다. 경기 막판에는 한 골이 절실한 벨기에 선수들이 전원공격으로 슈팅을 무지막지하게 때렸는데 그때마다 한국 선수들이 맨바닥에 몸을 날리며 등짝으로 슛을 막아내는 장면이 압권이었다. 후반 종료 로스타임때는 벨기에 선수들이 이판사판으로 미들진까지 생략하고 모아니면도 식으로 골키퍼까지 공격에 가담하여 미친듯이 공세를 퍼부었고, 한국도 이에 질세라 공만 잡으면 벨기에 진영으로 돌진하는 그야말로 처절한 혈투를 양팀이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대로 경기 종료.

한국 선수들은 이길 수도 있는 경기를 이기지 못했다는 생각에 허탈해했고, 벨기에 선수들은 만만하게 봤던 한국을 이기지 못하면서 3무무재배로 16강 진출이 좌절된 분을 이기지 못하고 단체로 통곡해 동병상련을 겪었다.[36] 벨기에 축구의 레전드 빈첸조 시포는 벤치에 앉아 쓸쓸하게 자신의 마지막 국가대표 경력의 끝을 지켜봐야 했다. 당시 벨기에 감독 레겐은 경기종료 휘슬 소리가 들리자마자 곧바로 라커룸으로 들어갔다. 여담으로 이 경기를 뛰었던 홍명보와 빌모츠는 16년뒤 각자 모국의 국대감독으로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그리고 이번에는 벨기에가 이기며 빌모츠는 16년전 무승부로 인한 탈락 설욕을 하고 자국을 8강까지 진출시킨 반면, 홍명보는 16년전 차범근 호랑 같은 1무 2패를 거두며 국대 감독에서 물러나야 했다.[37]

멕시코전과 네덜란드전에서 대량 실점을 한 탓에 만약 이 경기에서도 패배를 했더라면 이 대회에서 3전 전패를 기록한 일본과 미국에게도 골득실이 밀려 전체 꼴등을 찍을 뻔도 했으나 유상철의 골로 무재배를 해서 위기를 모면했다. 그래봤자 32등에서 30등으로 겨우 2계단 올라간 거지만... 그리고 이 경기의 1실점까지 합쳐 총 9실점으로 똑같이 9실점을 기록한 나이지리아, 자메이카와 함께 대회 실점 공동 1위를 기록하는 굴욕을 남기게 될...뻔 했으나, 조별리그부터 실점을 착실히 쌓아 총 7실점으로 결승에 진출한 브라질이 프랑스한테 0:3으로 거하게 털리는 바람에 한 골 차이로 세 팀의 실점 공동 1등은 면했다. 더 자세한 내용을 보고 싶으면 이곳을 참조.

한편, 같은 조에 속했던 네덜란드와 멕시코는 2 : 2 로 또 무승부를 기록하게 되었다. 결국 이 조에서는 한국 빼고 다 비겼는데 그 중에서 유일하게 한국을 이기지 못한 벨기에가 탈락했다.

6 후일담

차범근 호가 지역 예선에서 준수한 성적을 거둘 때는 칭찬하고 띄워주기에 바빴던 언론들은 본선 경기에서 패배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비난 일색으로 돌아섰고 차범근은 국민영웅에서 순식간에 패장을 넘어 역적의 위치까지 떨어진다. 그리고 결국 네덜란드 전에서의 5대0 패배 이후 전격 경질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차범근의 언론 대응도 그다지 좋지 못했는데, 1차전 패배 원인으로 퇴장 판정 탓만 한 것. 특히 앞서 언급한 부인의 쉴드는 납득이 가는 면이 분명 있는 얘기였으나, 되려 '자신의 잘못은 생각도 않고 남 탓만 하는 감독' 이미지를 키우며 역풍을 불러왔다. 조선일보 광수생각에서도 이 부분을 깠다. 누가 할 소린데?

이후 차범근은 한국 축구의 승부조작과 여러 어두운 면을 폭로했고 축구협회에선 5년 동안 한국축구계 활동을 금지한다는 엄벌에 처하려다가 아시아축구연맹(AFC)에게 아시아 축구영웅을 박대한다는 비난을 듣고 3년으로 줄인다. 결국 차범근은 중국 슈퍼리그에서 활동하며 지내며 한동안 국내 축구계에서 자취를 감췄다가 2002년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에서 MBC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며 좋은 모습을 보여 명성을 약간이나마 회복한다. 이제와서는 1998년 언론의 '차범근 죽이기'가 과도했다는 것이 축구 팬들의 중론이지만 이미 당사자와 그 가족에게는 지우기 힘든 상처[38]가 남기며 좀처럼 언급조차 되지 않는 흑역사가 되어버렸다.

언론에서는 겉으로는 16강 진출에 대해 '해볼만 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으나, 언론사들의 해당 기자들이 실제로는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불분명하다. 당시 월드컵 취재 기자들 중 아무도 조별 예선 이후의 숙박 예약을 잡아 놓지 않고 전부 조별 예선 후 귀국하는 비행기를 예약했다는 말이 었었는데, 사실 여부는 확인바람. 그러나 숙박예약은 물론이요 이미 축구협회에서는 16강 이후의 일정까지 선수단의 비자 기간이 발급되어 있지 않았었다.

월드컵 직전 가진 중국과의 친선경기에서 당한 부상 때문에 벤치에 앉아있다가 돌아온 황선홍은 '또 실수할까봐 겁먹고 일부러 안 나온 거 아니냐?' 라는 비난까지 받자 '한국에서는 도저히 축구를 할 수 없겠다' 라고 판단해 일본 J리그로 진출한다. 2010년 6월 방송한 무릎팍도사에서 털어놓은 바로는 동네 수퍼마켓에 갈 수조차 없었다고... 그리하여 일본에서의 영입 제의가 없었음에도 본인이 건너가 적극적으로 알아봤다고 한다.

참고로 E조의 조별예선 6경기 중, 승패가 갈린 건 한국이 패한 2경기 뿐이었다. 나머지 4경기는 전부 다 무재배. 결국 한국을 더 큰 점수차로 바른 네덜란드가 조 1위, 한국을 적당히 발라먹은 멕시코가 조 2위로 16강에 진출했고, 한국과 비겨버린 벨기에는 예선 탈락했다.[39]

참고로 같은 조에서 16강에 진출한 네덜란드와 멕시코의 운명은 다음과 같다. 멕시코는 16강에서 완전히 쇠락해버린 이빨 빠진 호랑이 독일을 상대로 난투극 끝에 1 : 2로 털리고 떨어진다. 만년 16강 멕시코 반면 네덜란드는 16강에서 유고슬라비아를 2 : 1로 이기고 8강에 진출한 뒤 8강에서 거함 아르헨티나를 난투극 끝에 2 : 1로 간신히 쓰러뜨렸으나 힘이 다 소진되어서인지 4강에서는 브라질과 승부차기까지 가는 혈투 끝에 패하고 3/4위전으로 가고 말았다. 거기서는 8강에서 독일을 3 : 0으로 학살해버리고 4강에 왔지만 프랑스에게 막혀서 3/4위전으로 온 크로아티아에게 1 : 2로 패하면서 이 월드컵을 4위로 마감했다.

  1. 그러나 1994 월드컵은 본선진출팀이 24팀이여서 조 3위를 해도 2/3의 확률로 16강에 진출하는데 반해 1998 월드컵은 32개팀으로 늘어났기 때문에 16강에 진출하려면 반드시 조 2위를 해야 한다.
  2. 여기에 관해서 당시의 대표팀 일부 선수들이 박종환 감독을 쫓아내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태업성 플레이를 해서 대패했다는 설이 있고 심지어는 사실상 정설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3. 쿠웨이트는 지금은 호구지만, 90년대 후반~2000년 초반까지 한국의 발목을 번번히 잡았던 강호였다.
  4. 우즈벡 국가대표팀에게 5:1 승리를 거뒀는데, 우즈벡 원정에서 한국대표팀이 쾌승한 것은 이 때가 유일하다. 이것은 당시 대회 특성상 원정 2연전을 하게 됐는데, 당시 가삼현 국제부장이 일정을 카자흐-우즈벡으로 뽑으면서 한국대표팀이 본의 아닌 본의로 우즈벡 대비 전지훈련을 하게 된 격이 되었다. 우즈벡은 원정은 해발 500m 정도에서 싸우기 때문에 항상 고지대 적응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데 이 때는 오래 체류하면서 적응했다.
  5. 실제로 가모 슈 감독은 명목상 건강상의 이유로 자진사퇴했으나, 누가 보더라도 성적에 따른 경질이라는 평가가 대부분이었다. 일본은 이후 남은 예선 기간을 당시 수석코치의 감독대행 체제로 마무리 하며 예선 이후 이 사람을 정식 감독으로 임명한다. 그 인물이 바로,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일본을 16강으로 이끌었던 오카다 타케시 감독. 같은 기간동안 감독직을 수행한 탓인지 차범근 해설의 말에 따르면 특별한 선물까지 줄 정도로 절친한 관계라고 한다.
  6. 물론 '의외로 별로 없었을' 뿐 당연히 홈에서 완전 쳐발린 경기이기에 당연히 욕은 먹었다. 상대적으로 덜했단 얘기.
  7. 실제로 차기 월드컵 공동 개최국이었으니.....
  8. 한국이 월드컵은 당연히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02년 월드컵에서의 대 성공과 함께 이때부터 아시아 월드컵 진출권이 4.5장으로 고정되면서 웬만큼만 하면 월드컵 진출권이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아시아 진출권이 2.5장, 아니 3.5장으로만 줄여도 지금보다 훨씬 위험해지는게 한국의 전력이다.
  9. 직전의 대회까지 아시아의 출전권은 2장밖에 되지 않았다. 이전까지 한국에게 아시아 지역예선이 그렇게 피튀기는 혈전이었던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아시아의 월드컵 진출권은 70년대까지 1장 이하였기 때문에 아시아에서 좀 한다고 해도 원탑은 아니었던 한국은 번번히 마지막 관문에서 좌절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다른 아시아 팀들 다 물리치고 정상에 선 적도 몇번 있었는데 그럴때마다 타대륙과 플레이오프 벌여서 깨진 바람에..... 한국이 80년대에 와서 월드컵에 진출하게 되는것은 프로화와 더불어 아시아 출전권이 2장으로 확대된 것도 크게 작용한다. 원톱은 하기 힘들어도 아시아 tpo2에 들기는 쉬운게 한국이니까. 사실 82년에도 출전 가능 할수 있었는데 이땐 쿠웨이트의 심판매수로 1차예선에서 탈락한 바람에 월드컵 진출이 물건너 갔다.... 94년도의 경우는 최종예선에 아시아의 온갖 강팀들(사우디, 이란, 이라크, 한국, 일본, 북한)이 하나의 조에 모여서 2팀을 뽑는 풀리그 형식이었기에 그리 빡셌던거고. 사실 저런 조편성이면 지금도 한국이 2위 안에 확실히 들거라고 장담하긴 힘들다. 하물며 그때야.....
  10. 당시 A조는 이란과 사우디, 중국, 쿠웨이트, 카타르였고, B조는 한국과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UAE, 그리고 일본이었다. 지금 기준으로도 B조가 훨씬 낫다. 지금도 원정에선 카타르나 시리아, 레바논같은 중동 2류팀들 상대하는 것도 쉽지않은 한국인데 A조는 10경기 중 4경기가 중동원정이다. 더군더나 당시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은 구소련 해체이후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 나라꼴이 엉망진창이라 정상적인 전력을 내기도 힘든 상황이었고, 우즈벡은 한국 원정때 주전 공격수 쉬크비린(공미 카시모프와 함께 1994년 우즈벡이 한국에 유일한 A매치 승리를 거둘때 한몫했다.)이 비행기 놓쳐서 참여못하는 불운도 있었다. UAE는 무시할만한 팀은 아니지만 예나 지금이나 중동팀들 중에선 가장 쉬운 상대였다. 일본은 당시만해도 월드컵 한번도 못 나가본 팀이었다. 라이벌이라 그에 대한 부담은 있었지만 원정에서의 어려움은 중동팀들의 그것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11. 차범근 감독이 노트북을 그라운드에 가지고 다니면서, 하프타임이나 경기가 끝나고 난 후에 컴퓨터를 사용하여 무엇인가를 하는 장면이 예선전에서 방송국 카메라에 여러 차례 잡혔다.
  12. 황선홍이 없었다 하더라도 지역예선 때 최용수를 받쳐줬던 김도훈이 있었기 때문에 저런 반응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김도훈 자체도 상당히 준수한 플레이를 했던지라 큰 걱정을 하지 않았던 셈이다.
  13. 당장 판정 강화를 감안해 봐도, 조별 예선에서만 16장의 레드 카드가 나왔다. 32개팀으로 늘은 걸 감안해도, 이전에는 조별 예선에서 10장 넘게 나온 적이 없었고, 16개팀 출전 시절에는 5장 전후에 그쳤다는 걸 생각하면.....월드컵이라는 대회의 중요성이 겹쳐 과격한 반칙이 나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디에고 마라도나가 대표적인 희생자. 헐리우드 액션과 신의 손 사건으로 욕도 많이 먹었지만.) 피파가 마음 먹고 판정을 강화시켰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
  14. 공식적인 이유는 연습 중에 당한 부상 때문이었다. 이후 최용수는 네덜란드전에서는 여론에 떠밀려 출전은 했지만 팀 전체 조직력이 붕괴된 속에 아무런 활약을 못했고, 마지막 벨기에전에서도 최용수는 세 번의 결정적인 찬스를 날려먹는 등, 매우 부진했다.
  15. 이후 고종수와 차범근은 은근히 사이가 안좋달까 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대표적으로 차범근이 수원의 감독으로 오자 고종수는 방황하다가 수원을 떠났다.
  16. 물론 이는 이상윤 본인의 책임도 있다. 본래라면 경기를 빠졌어야 정상인 상황에서 경기에 대한 사명감 때문에 차마 팀닥터에게 상황을 말하지 못하고 경기를 그냥 뛰어버린 것, 이상윤 자신도 이를 매우 후회했다고 한다.
  17. 실제로도 1974년 월드컵, 1978년 월드컵예선 에서는 네덜란드가 벨기에를 1986년 월드컵 에서는 벨기에가 플레이오프 끝에 네덜란드를 밀어 버리고 월드컵에 올라갔다. 근데 이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벨기에가 네덜란드에게 홈과 어웨이에서 다 발려서 2패를 떠안았으니 정작 본선의 무승부가 네덜란드 입장에서 좀 안습하긴 했다
  18. 실제로 차범근 감독의 아들 차두리는 스포츠 기자를 꿈꾸는 지망생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아버지를 반쯤 매장에 가까운 기사를 써재낀 기자들에게 학을 떼고 꿈을 축구선수로 바꿨다고. 그리고 차두리의 선택은 매우 옳았다.
  19. 그럴만한 이유가 독일은 이 대회때 처녀출전국 이었던 크로아티아에게 완패해 충격의 8강 탈락을 맛보면서 녹슨전차라는 이미지를 굳히기 시작하였다. 이미 그 전 대회였던 94년 월드컵때에도 역시 돌풍의 팀이었던 불가리아(이 대회에서 4강 진출)에게 패해 8강탈락을 한 독일은 이 대회에서도 똑같이 8강에서 탈락해 체면 살리기는 물론 대 굴욕을 얻고 말았고 두 대회에서 만났던 8강전 상대들 모두가 동유럽 팀들이었다지만 하나같이 젊고 유능한 선수들로 무장하였다는 점에서 평균 나이대가 어느정도 높았던 독일 선수들에게는 버거운 상대들 이었기에 8강탈락으로 초래된 녹슨전차의 이미지는 독일에게는 치명타 그자체였다. 어느정도 였냐면 크로아티아 전 당시, 독일 선수들은 다 막아낼수 있는 여건을 가졌지만 체력적인 한계로 인해 막지를 못하였고(즉 머리는 예측하는데 몸이 안따라준격) 이는 연이은 실점으로 이어져 충격의 8강 탈락이라는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패배의 영향으로 독일은 이후에 열린 유로 2000에서는 조별예선 탈락이라는 최악의 성적표를 받았고 유로 2004에서도 역시 조별예선 탈락을 맛보며 절대 강자라 불리웠던 독일의 모습을 구현해내지 못한채 한동안은 녹슨전차라는 비판에 시달려야 했다. 물론 2002년 한일 월드컵 준우승이 그나마 위안거리이긴 하지만 토너먼트 내내 만났던 상대들이 독일보다 실력이 어느정도 낮은 팀들만 만났다는 지적이 일어서 이 마저도 운빨이 가득한 준우승으로 기억되고 있다.
  20. 네덜란드 대표팀의 전성기로는 1974년과 1978년 연이어 월드컵 준우승을 이룬 시절, 1988년 유로 우승을 차지했던 시절, 2010년 월드컵 준우승을 했던 시절 등이 꼽힌다. 프랑스 월드컵 전대회인 94 미국 월드컵 때도 네덜란드 대표팀은 매우 인상적인 경기력을 보여줬다. 8강전에서 우승국 브라질을 만나 3대2로 패했지만 이 경기는 미국월드컵 최고의 명경기로 꼽혔다. 88년 유로 우승 당시 네덜란드는 마르코 반 바스텐, 루드 굴리트, 프랑크 레이카르트를 앞세운 환상의 삼각편대로 유로 88 우승을 차지했었는데 삼각 편대 외에도 현재 사우스햄튼 감독인 발렌시아 팬들의 주적 수비수 로날드 쿠만과 그의 동생인 에르빈 쿠만, 얀 바우터스, 제랄트 바넨부르그, 아론 빈테르, 반 티그렌과 골키퍼 한스 반 브루켈렌등이 포진될 정도로 막강한 스쿼드를 가졌다. 참고로 이때 네덜란드는 유로 대회 직전에 열린 챔피언스리그에서 자국 명문팀인 PSV 아인트호벤이 우승을 차지하는 등의 면모를 과시해 나름대로는 절정의 상승세를 보여주고 있었다.
  21. 다만, 클루이베르트는 벨기에전에서 퇴장을 당해 한국전은 결장했다.
  22. 일란성 쌍둥이
  23. 그나마 월간축구(현 베스트 일레븐)을 통해서 유럽축구가 많이 알려지긴 했다.
  24. 그나마 해외 유선방송이나 신문, 잡지등을 통해 유럽축구를 어느 정도 알고 있던 극소수의 축구팬들은 대한민국이 1~2점차로 진다면 정말 잘한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25. 놀랍게도 다른 유럽국가들 같으면 노발대발 하면서 항의를 해야 정상인데 한국 대표팀은 그 누구도 네덜란드에 항의를 하러 온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26. 히딩크 감독은 이를 한국대표팀에도 적용하여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에도 연습시간이 지났음에도 연습장을 내주지 않고 훈련을 계속했다.
  27. 간결한 볼컨트롤만으로 수비수들을 제끼고 골을 넣었다.
  28. 물론 당시 서정원은 프랑스에 오기 전 아들에게 옮은 수두 때문에 정상 컨디션이 아니긴 했다.
  29. 이동국이 교체로 막 들어갔을 때 송재익 캐스터는 이동국 이름을 헷갈려서 '김동국이네요'라고 소개했다(...)
  30. 월드컵 당시 차범근의 나이는 만45세였는데, 2014 월드컵때의 홍명보 감독 나이와 똑같다(...)
  31. 꼭 이 경기에서 '신천지'를 본 것만은 아니다. 1997년11월1일 잠실 서울종합경기장에서 열린 월드컵 최종예선 일본전에서 많은 관중들이 빨간색 옷을 입고 오는 등, 자생적으로도 빨간색 옷을 입는 응원이 태동하고 있었다
  32. 1분 10초.
  33. 이긴다 해도 2골차 이하일 경우 멕시코가 네덜란드와 비기면 다득점에서 밀리는 상황.
  34. FIFA에서 '고의성이 없고 심판의 미숙함도 있다고 판단되어' 완화했다.
  35. 이 붕대 임팩트의 감동이 꽤 컸기 때문에 이임생은 월드컵 후에 나름 스타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나중에는 K리그 소속팀에서 이임생 캐릭터를 붕대감은 모습으로 캐리커쳐를 만들어 홍보하기도(...)
  36. 그런데 이듬해 친선 경기에서 한국 선수들을 상대로 폭력을 휘둘렀다. 프랑스에서 뺨 맞고 한국에서 화풀이?
  37. 하지만 같은 1무 2패지만 내용은 전혀 다르다. 차범근호는 2득점 9실점, 홍명보호는 3득점 6실점이다. 일단 기록으로만 보면 홍명보호의 기록이 더 좋아보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차범근은 멕시코, 네덜란드, 벨기에와 싸우다 이렇게 된거지만 홍명보는 러시아, 알제리, 벨기에와 싸우다 1무 2패를 한거다. 벨기에가 1998년 때보단 강해진건 맞지만 누가봐도 홍명보가 상대한 나라가 상대적으로 약한 나라이다. 그럼에도 브라질 월드컵이 프랑스 월드컵보다 낫다는 개소리말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럼 만약 2014년에 멕시코, 네덜란드와 같은 조에 들어갔으면 어땠을까? 오초아의 미친 선방에 힘입어 브라질 안방에서 열린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무재배를 거둔 멕시코, 티키타카 파훼법으 나타났고, 티키타카 핵심선수 이탈이 있기는 했지만작년 월드컵 우승팀 스페인을 5:1로 떡실신 시킨 네덜란드가 같은 조에 있다면 어떻게 됐을까? 멕시코전 7:0, 네덜란드전 9:0 나왔으려나? 이렇기 때문에 차범근과 홍명보는 비교 자체가 차범근에게 실례이다.
  38. 그리고 16년 뒤 또 한국 축구가 월드컵에서 똑같이 1무 2패로 탈락함에도 당시 감독이던 홍명보를 유임시킨다는 반응에 차범근 아들 차두리는 그럼 16년전 아버지는 왜?"라고 하면서 무척 섭섭한 감정을 SNS으로 쓸 정도였다. 결국 알다시피 홍명보도 비난 여론 속에 똑같이 모가지...
  39. 사실 지금까지의 대회에서 한국을 이긴 팀은 단 한 번을 제외하고는 무조건 16강에 진출했다. 유일한 예외는 1954 스위스 월드컵 당시 터키 뿐. 여담으로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의 경우 대한민국은 3전전패를 기록했는데 이 때 한국과 같은 조의 3위를 기록한 우루과이는 1승1무1패로 3위 6개국 중 상위 4개팀의 자격으로 16강에 진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