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어: Simón José Antonio de la Santísima Trinidad Bolívar Palacios y Blanco
한국어 : 시몬 호세 안토니오 데 라 산티시마 트리니다드 볼리바르 팔라시오스 이 블랑코
1783~1830
"El Libertador" (해방자)
베네수엘라의 독립운동가이자 군인이자 대지주. 남아메리카 6개국의 영웅.
1 생애
1.1 탄생과 성장
1783년 카라카스(독립 후 베네수엘라의 수도)에서 후안 비센테 볼리바르와 마리아 콘셉시온 데 팔라시오스 사이의 2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를 잃고 병약한 어머니 슬하에서 자라서 흑인 노예 이폴리타의 보살핌받으면서 자랐지만 그게 흑인 노예를 해방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흑인 노예 해방 이야기하게 된 건 아이티에서 지원받게 된 다음 이야기다. 정작 그러고도 여전히 pardocracia(거칠게 번역하면, '깜둥이 정치?')를 두려워한다.
1792년 모친이 죽자 누나인 마리아 안토니아와 후아나는 시집을 가고 형인 후안 비센테도 다른 곳에 맡겨지면서 남매들이 뿔뿔히 흩어진다. 시몬 볼리바르는 처음엔 외조부 집에서 자라다가 곧 외삼촌인 카를로스 팔라시오스 집에서 머무나 성격이 엄격한 외삼촌과 계속 갈등하다가, 결국 큰누나인 마리아 안토니아 집에서 살기로 한다. 이때 스승인 시몬 로드리게스(1769~1854)를 만나 계몽사상에 눈뜬다. 당시 에스파냐에 독립하겠다는 크리올[1]이 많았고 시몬 로드리게스도 그 중 하나였기에 볼리바르가 자유주의 사상을 신봉하게 되었다. 조선 식민지에서 투표권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 참정권 운동을 벌였던 조선 거주 일본인들이 느낀 설움(?) 같은 거라고 보면 된다.
그러나 로드리게스가 독립운동에 가담했다가 적발되어 망명하면서 안드레스 베요(1781~1865)에게 새로이 지도받는다. 이때 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
1.2 독립운동
시몬 볼리바르는 1799년에서 1802년까지 멕시코와 프랑스 혁명의 열기에 끓어오르던 유럽을 여행하면서 많은 것을 깨달고 특히 에스파냐의 지식인인 후작 우스타리스와 만나면서 풍부한 학식을 갖추었다.
또한 볼리바르는 마드리드에서 외삼촌인 페드로 델 토로의 딸 마리아 테레사와 결혼하여 귀향하는데 아내가 황열병으로 9개월만에 쓸쓸히 죽는다. 그 후 볼리바르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
유럽으로 돌아가 이곳저곳을 떠돌던 볼리바르는 스승 로드리게스를 만나 로마의 아벤티노 언덕에서 그 유명한 '산상 선언'[2] 을 외쳤다.
귀향한 시몬 볼리바르는 독립운동으로 잔뼈가 굵은 노장군 프란시스코 미란다(1750~1816)과 안드레스 베요와 함께 1811년 베네수엘라 제일 공화국을 세웠다. 이 제일 공화국은 에스파냐 섭정 행정부에서 '유색인종'에게 인정했던 투표권과 참정권을 부정하고 일정 이상 재산을 갖춘 이만 참정할 수 있도록 헌법을 개정했고 에스파냐 왕이 명했던 여러 유색인을 배려한 법을 없애려고 하자 당시 베네수엘라 인구 80% 이상을 차지하던 비'백인'들이 반발했고 이것은 1812년 지진을 기점으로 폭발하였다. 발렌시아에서 행정부의 조치에 반발하여 '유색인종'이 저항을 선언하자 제일 공화국은 전원 백인으로 구성한 군대를 보내 저항을 억눌렀으나 에스파냐 왕정과는 달리 인정사정없는 백인 우월주의를 표방하는 제일 공화국에 반발한 절대 다수 베네수엘라 사람들의 지원으로 왕당파가 세를 얻었고 그러한 왕당파의 카라카스 점령으로 볼리바르는 퀴라소 섬으로 망명하여 생활해야했다.
그 후 콜롬비아 카르타헤나로 옮겼다가 여기서 '카르타헤나 선언' 으로 베네수엘라와 누에바 그라나다[3]의 독립을 선언하고 1814년 8월 4일 3년 만에 카라카스에 재입성하여 '해방자' 라는 칭호를 받는다.
그러나 그의 부대는 경험 부족과 물자 부족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려 연전연패해서 아이티로 결국 망명했다. 당시 남부 아이티의 대통령이던 페숑은 흑인 노예의 독립을 조건으로 1,200명으로 구성된 부대를 지원했으나 볼리바르는 계속 패배한다.
이 난관을 타개하고자 볼리바르는 야노스 군벌인 호세 안토니오 파에스와 손을 잡고 게릴라전을 벌여 에스파냐 군을 이기고 이어서 1819년 피스바 산을 넘어 콜롬비아로 쳐들어간다. 여기서 볼리바르는 영국군과 아일랜드군에 지원받아 콜롬비아를 정복하고 '그란 콜롬비아 Grand Colombia 공화국'[4]을 선언한다.
잠시 휴전으로 병력을 추스린 볼리바르는 1821년 6월 24일 카라보보 전투에서 승리하고 키토에서 친에스파냐 세력을 몰아낸다.[5]
그 후 아르헨티나와 칠레에서 에스파냐 세력을 물리친 호세 데 산 마르틴과 과야킬 회담[6]을 하고서 산 마르틴이 유럽으로 망명하자 부장인 안토니오 호세 데 수크레를 보내 아야쿠초와 후닌 전투에서 부왕(副王, Viceroy)[7]을 사로잡는 성과를 올리면서 페루마저 휩쓴다. 남아메리카에서 에스파냐 세력이 물러났다.[8]
1.3 몰락
그 후 그란 콜롬비아의 종신 대통령을 지내던 시몬 볼리바르는 연이은 반란과 권력투쟁 등으로 오명을 뒤집어쓰고 결국 1830년엔 대통령직마저 사임한 채 콜롬비아로 떠나간다. 그 후 호아킨 미에르의 별장에서 살던 볼리바르는 폐결핵으로 산 페드로 알레한드리노 농장에서 죽는다. 이 사람도 최후는 초라하였다.
2 평가
남아메리카의 조지 워싱턴. 그러나 조지 워싱턴이 독립시킨 13개 식민지는 한 연방으로서 슈퍼파워로 성장했지만, 볼리바르가 독립시킨 6개의 식민지는 각각으로 성장하여[9] 그만그만한 나라들이 되었다. 후속국이 잘나가지 못해서 어떻게 보면 워싱턴보다 훨씬 고생하고도 덜 알려진 비운의 인물. 이게 다 미국이 센 탓이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워싱턴은 1732년생이라서 볼리바르보다 활약 시기가 빠른 터라 이렇게 말하는 것이라 하겠지만. 물론 후속국들이 잘 못나간 것은 자업자득인 면도 있다. 종신 대통령을 하려다가 결국은 자신이 새로 세운 공화국을 망치기도 했다. 실제로 옆의 사람들이 종신 대통령의 자리를 권했고 딱히 반대할 만한 세력도 여론도 없었던 상황에도 자기 자신이 "나쁜 선례를 남기지 않겠다"며 두번 재임 후 은퇴한 워싱턴과는 비교되는 부분.
들여다 보면 독립 과정까지는 뛰어난 장군이었지만, 독립 이후 정치로 들어가면서 갓 독립한 나라를 제어하지 못해 헬게이트로 이끌고 가는데 영향을 끼치는데 특히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 사이의 갈등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이를 보여주는 것으로 한 가지 일화가 있다.
당시 베네수엘라 부통령은 파에스(야노스 군벌 출신)였고 콜롬비아 부통령은 프란시스코 파울라 데 산탄데르(법학도 출신)[10]였는데 파에스가 자기가 대통령을 해먹고 싶어서 반란했다가 항복하자 볼리바르는 아무런 처벌 없이 부통령직을 계속 맡기는데 산탄데르는 중앙 행정부의 권력과 법이 땅에 떨어졌다 느끼면서 분노하고 이후 볼리바르의 정책에 계속 태클을 건다.[11]
이후 둘은 계속 갈등하여 결국 볼리바르는 부통령직을 없애기에 이르고 산탄데르의 반란을 유발한다.[12]
또한 신생국을 유럽이 달가워할 리가 없었고 내부에서도 각 계층과 인종 간의 여러 갈등 탓에 그란 콜롬비아가 해체되는 원인이 된다. 볼리바르 자유주의에 영향받기는 했어도 인종주의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았고 원주민은 잠재된 '적'으로 여기고 '유색인종'은 멸시했다.[13]시몬 볼리바르가 원주민 공동체 토지 제도를 공식 폐기하는 바람에 고생한 원주민들을 생각하면 새로운 식민 지배자면 몰라도 영웅이란 말은 매우 아깝다. 시몬 볼리바르가 영웅으로서 대접받는 건 여전히 히스패닉 출신이 대세를 이루는 현실 때문이다.
3 어록
세상에는 가장 멍청한 바보가 셋 있다. 첫째는 예수, 둘째는 돈키호테, 그리고 나 볼리바르다.
아메리카 독립을 위해 싸운 우리들은 바다 위에서 쟁기질을 했을 뿐이다.
나의 죽음이 동맹을 가져올 수만 있다면 평온한 마음으로 임종을 맞이할텐데.
우리는 과거의 유산을 거의 지니고 있지 못하며, 그렇다고 원주민이나 유럽인도 아니다. 이 땅의 합법적인 소유자와 에스파냐 침략자 사이 중간 쯤에 위치한 메스티소다. 태생으로는 아메리카인이며, 법적으로는 유럽인이다. 우리는 원주민과 소유권을 놓고 다퉈야 하는 반면, 침략자에 맞서 이 땅에서 우리의 지위를 유지해야 하는 이중의 갈등 상태에 놓여 있다.[14]
4 트리비아
- 시몬 볼리바르 교향악단과 시몬 볼리바르 청소년 교향악단이 이 사람에게서 따온 것이다.
-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국명을 베네수엘라에서 '베네수엘라 볼리바르 공화국(Republica Bolivariana de Venezuela)' 로 바꿨다. 참고로 볼리비아라는 국명도 볼리바르에서 따온 것이다.[15] 그 외에도 미국 미시시피 주에 있는 볼리바르 카운티 외의 많은 미국 지명[16]과 볼리바르가 해방시킨 나라들의 '볼리바르'라는 지명도 그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 남미합중국(United States of South America
USSR도 아니고 USA도 아닌USSA 말이다우싸)을 꿈꿨을 정도로 미국의 정치 체제에 깊은 인상을 받았지만[17] , 미국을 매우 경계하였다. 당시 미국은 대서양 연안에만 발을 걸친 2류국가였지만[18], 시몬 볼리바르는 남미에 큰 위협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국은 남미 쪽에는 당시에는 털끝만큼도 관심을 쏟을 수 없었으며[19] 볼리바르가 활동하던 19세기 초 당시 미국은 북미대륙 동부 대서양 연안을 중심으로 갓 독립한 나라에 불과했다. 나폴레옹이 대륙 중심부의 프랑스령을 팔아넘겼지만 개척은 고사하고 이제 막 탐사대가 오가던 정도. 제국주의는 고사하고 집안살림 챙기기에 급급하던 시절이었음을 감안하자. 그러나 볼리바르의 우려대로 "먼로 독트린"을 앞세운 미국은 남미를 뒷마당으로 여기며 현재까지도 남미의 정치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괜히 우고 차베스같은 사람이 이 사람을 떠받드는게 아니다.
- 시몬 볼리바르가 사용했던 검이 콜롬비아에 보관되어 있다. 원래 보고타의 볼리바르 생가에 보존하고 있었는데 1973년 2월 17일 콜롬비아의 반군인 M-19가 이걸 훔쳐가버렸다. 이때 M-19는 "볼리바르 당신의 검이 전쟁터로 돌아갑니다"(Bolívar, tu espada vuelve a la lucha)라는 똘기넘치는 글을 벽에 남기고 돌아왔다. 그리고 이 훔친 검의 행방을 두고 여러 설이 있는데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부터 콜롬비아의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까지 다양하다. 특히 파블로 설은 파블로의 아들인 후안(Juan Pablo Escobar)가 증언한 부분이라 신빙성이 높다(출처:스페인어). 이후 여러 곳을 떠돌던 검은 1991년에 다시 콜롬비아 정부로 돌아왔다. 여담으로 이 검의 상징성 때문인지 베네수엘라 같은 상당수의 남미국가들이 예검으로 볼리바르 검의 모조품을 지급하고 있다.
5 게임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3에서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 캠페인 등장인물 목록 | ||||||||
-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 | 대전사 | 아시아 왕조 | |||||
액트1. 피 | 액트2. 얼음 | 액트3. 강철 | 액트1. 불 | 액트2. 그림자 | 액트1. 일본 | 액트2. 중국 | 액트3. 인도 | |
주인공 | 모건 블랙 | 존 블랙 | 아멜리아 블랙 | 나다니엘 블랙 | 체이튼 블랙 | 사쿠마 키치로 | 지안 후앙 | 나니브 사히르 |
서브 영웅 | 엘리자벳 램지 | 카넨케 | 조지 워싱턴 | 성난 말 | 토리이 모토타다 | 라오 첸 | 프라바르 파텔 | |
사힌 | 노나키 | 쿠퍼 소령 | 카넨케 | 도쿠가와 이에야스 | ||||
적 | 알레인 매그넌 | 워릭 | 피에르 보몽 | 스벤 쿠첼러 | 윌리암 홈 | 이시다 미츠나리 | 왕 진하이 | 조지 에드워드슨 |
델가도 |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 |||||||
NPC | 칠체 | 스튜어트 블랙 | 시몬 볼리바르 | 노나키 | 아멜리아 블랙 | - | - | 바하두르 샤 |
조지 워싱턴 | 칠체 |
왼쪽의 남자. 오른쪽은 아멜리아 블랙.
영어식 발음을 참조해서 그런지 이름이 볼리바로 나온다. 한국판 성우는 정승욱. 스페인군에 맞서 독립 운동을 전개하던 중, 잉카의 후예들을 만나러 온 아멜리아 블랙과 카넨케와 만난다. 볼리바르는 아멜리아에게 자신들을 도와주면 파카마요 계곡을 통과할 안내자를 붙여주기로 약속한다.
시몬 볼리바르와 그의 군대는 아군이 조작 불가능한 동맹군으로 나오며, 일정 시간이 지나면 각 마을을 해방하기 위하여 이동한다. 해방된 마을의 시설은 아군이 이용할 수 있게 된다. 본 전투에서 스페인군의 사령부를 무너뜨리면 승리하게 된다.
전투 후 볼리바르는 약속대로 안내자를 붙여주고 아멜리아는 그를 격려하며 헤어진다. 근데 안내자로 붙여준 병사 중 하나가 쓰레기잉여 유닛중 하나인 스트렐치이다. 가뜩이나 체력이 계속 감소하는 어려운 미션인데...
6 참조
- ↑ 식민지에서 태어난 스페인계 백인들. 하지만 식민지 출신이라는 이유로 스페인 본토 사람들에게 온갖 차별당하였고 군인들도 최고로 높게 진급을 해야 대위다.
이러니 독립을 안 생각할 수가 없지... - ↑ 라틴 아메리카의 독립을 얻을 때까지 내 팔에 자유를 주지 않겠다로 시작되는 유명한 선언이다.
- ↑ 훗날의 콜롬비아와 파나마.
- ↑ 현재 베네수엘라, 누에바 그라나다(콜롬비아와 파나마), 키토(에콰도르), 페루, 그리고 볼리비아지역을 포괄하는 지역.
- ↑ 키토는 에콰도르의 수도가 된다.
- ↑ 이 회담은 역사상 밝혀진 것이 거의 없는 미스터리한 회담이다. 둘이 좋게 끝내지는 못했다는 점은 확실하다.
- ↑ 본국 군주를 대신하여 한 지역을 통치하는 직책으로 다른 나라의 총독에 해당한다. 참고로 19세기 독립하기 전 멕시코를 비롯한 중앙아메리카 일대는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령(領)' 이었고 페루에는 페루 부왕령이 설치되어 있었다.
부왘과 혼동하지 말자 - ↑ 우루과이는 1830년 독립되었으므로 여기서 제외.
- ↑ 심지어는 볼리바르 사후 서로 전쟁까지 했다.
- ↑ 그러나 볼리바르 밑에서 군인으로 상당히 오래 재직했다. 또한 그란 콜롬비아 초대 부통령이었다.
- ↑ 그러나 산탄데르가 소인배라고만 볼 수 없는 것이, 산탄데르의 경제 정책 상당수를 볼리바르가 폐기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자업자득인 셈이다.
- ↑ 다만 산탄데르가 정말 반란했는지는 아직도 의문점이 상당하다. 불참했지만 알고 있었다.적극으로 참여했다. 누명이다. 라는 이야기 등등... 산탄데르는 군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볼리바르는 이를 사면하고 유배를 보냈으며, 산탄데르는 볼리바르 사후 1832년부터 1836년까지 누에바 그라나다 대통령직을 맡는다.
- ↑ 이건 훨씬 이후에도 마찬가지긴 해서 볼리비아에선 1940년대까지 원주민의 투표권이 인정되지 않았고 아르헨티나도 후안 페론이 아니면 원주민들이 다 멸족되었다는 소리가 나왔을 정도로 원주민들을 남쪽으로 몰아내거나 가혹하게 마구 죽인 역사가 있으며, 칠레는 마푸체 원주민을 향한 차별이 현재진행형이고 우루과이에서는 아예 독립을 지원한 원주민들의 뒷퉁수를 쳐서 원주민들을 쏴 죽이거나 노예로 팔기도 했으며, 에콰도르나 페루, 베네수엘라, 콜롬비아도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에는 원주민을 그리 좋게 대하지 않았다.
- ↑ 그러니까 자기는 침략자가 아니고 원주민은 적이란 소리다. 메스티소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남미 국가들의 경우 순수 백인이나 순수 원주민보다 두 혈통을 모두 이어받은 혼혈이 더 다수의 비중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원주민과 백인 사이의 혼혈이 드문 케이스라 비교적 쉽게 침략자 백인 vs 피해자 원주민의 구도를 만들 수 있는 북미의 경우와는 다르다. 이런 혼혈적 정체성은 남미 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로, 단순히 볼리바르의 개소리로 치부할 것이 아니다.
- ↑ 볼리바르의 수도 중 하나인 수크레는, 볼리바르의 부하 장군이자 페루와 볼리비아의 대통령을 지냈던 그 수크레에서 따온 게 맞다.
- ↑ 이 중에서는 '볼리버' (Oliver 앞에 B 발음 넣은 것)처럼 발음되는 경우가 많다.
- ↑ 당시 미국처럼 안정적인 공화정은 매우 드물었고, 혁명으로 왕정을 폐지한 프랑스 공화정은 혼란의 연속이었다. 당연히 계몽주의의 전통에 있는 미국의 정치제도에 깊은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다.
- ↑ 본격적으로 서부개발이 시작된 시기는 1860년 이후 남북전쟁 이후이다.
- ↑ 어떤 작가가 스페인 문학사를 쓰려고 했더니 스페인어 사전이 하나도 없어서 유럽에 요청해야 했을 정도. 먼로 독트린도 남미 독립이 완전히 끝난 1830년에 발표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