캡틴 필립스

1 개요

2009년 4월 발생했던 화물선 머스크 앨라배마 호의 피랍 사건 때 선원들을 대신해 홀로 인질로 잡힌 리차드 필립스 선장에 관한 실화를 폴 그린그래스 감독 연출로 제작한 영화이다.
홈페이지

2 시놉시스

소말리아 인근 해상,
리차드 필립스 선장이 이끄는 화물선 머스크 앨라배마 호가 해적의 공격을 받는 사건이 발생한다.
필립스 선장은 순간의 기지로 해적들의 1차 공격을 막는데 성공하지만
해적들은 곧 머스크 앨라배마 호를 점령한다.
선원들을 대피시킨 채 홀로 해적들과 대치하는 필립스 선장.
숨막히는 경계와 팽팽한 심리전 속
필립스 선장은 19인 선원들을 대신하여 홀로 해적들의 인질이 되는데…!



3 배역

톰 행크스 - 리차드 필립스 선장
바크하드 압디 - 해적단 선장
맥스 마티니[1] - SEAL 지휘관

4 논쟁

뉴욕 포스트의 기사에 따르면 영화를 본 앨러배마호의 선원들이 실제와는 다르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필립스 선장의 평판은 20년 전부터 거만하고 음침하고 이기적이라 나빴다고 한다. 선원 중 11명은 사건 후에 필립스가 그들의 안전을 의도적으로 위험에 빠지게 했다고 고용사에 5천만 달러 상당의 소송을 걸었다. 기사에 따르면 필립스는 7건의 해적 경고 메일을 받았지만 경고를 무시했고 선원들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선원들은 필립스가 경비를 절감하기 위해 경고를 무시했다고 주장했다.

제작사인 소니에서는 영화화에 앞서 일부 선원들에게 5,000달러를 주면서 이를 발설하지 않겠다는 동의서를 쓰도록 했다고 한다. 나머지 선원들은 선박회사 등을 상대로 고소하여 재판을 진행 중. 결국 <캡틴 필립스>는 또 한 명의 영웅 만들기에 전념한 미국 선전물이라는 비난도 있었다. 이에 필립스 선장조차도 선원들의 문제 제기를 모두 인정했으며, 본인은 절대 스스로를 영웅시하려고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정작 영화에서는 필립스가 경비를 절감하려고 상황에 무심한 회사를 비판하는 듯한 부분이 나온다.[2] 이는 영화감독폴 그린그래스의 의중이 어느 정도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영화 초반 휴식시간에 맞춰서 선원을 닥달하는 장면이나, 아침 일찍 업무를 지시하는등 까탈스러운 상사라는 모습을 보여준다.

5 내용/실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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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 7천톤의 화물[3]을 실은 머스크 앨러배마 호는 케냐뭄바사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2009년 4월 8일 네 명의 해적이 배에 다가왔다. 미 국방장관 로버트 게이츠에 따르면 4명 모두 17세에서 19세 사이였다. 배의 선원들은 노조훈련소에서 대(對)해적 교육을 받았고 그 전날에도 훈련을 받은 바 있다. 4월 8일 아침에 해적 경보가 선내에서 발령됐는데 기관장인 마이크 페리는 14명의 선원을 안전장소로 대피시켰다. 남은 선원들은 해적들이 다가오자 조명탄을 쏘며 저항했고 기관장과 1등 기관사(1st A/E) 매트 피셔는 배의 각도를 흔들며 해적이 탄 소형선박이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해적은 머스크 앨라배마 호에 탑승했다. 기관장 페리는 주전원을 껐다. 해적은 선장인 리처드 필립스와 몇 명의 선원을 선교에서 납치했지만 선박을 조종하지는 못했다.[4] 페리와 소말리아인 승무원[5]이 안전장소 밖에서 칼을 들고 기다렸다가 해적이 다른 선원을 찾으러 오자 어둠 속에서 그들의 우두머리 무세를 덮쳐 포로로 잡았다. 다른 선원들도 합류해 무세를 붙잡았다.

선원들은 필립스 선장과 그들이 붙잡은 수괴를 교환하려고 했지만 선원들이 수괴를 풀어준 데 비해 해적들은 필립스 선장을 풀어주는 걸 거부했다. 필립스는 해적들을 구명정으로 안내했고 작동법을 알려줬지만 해적들은 필립스를 데리고 배를 탈출했다. 다음 날인 2009년 4월 8일 미 해군 소속의 알레이 버크급 구축함인 USS 베인브리지 함이 아덴 만에서 인질 구출을 위해 출발했고 9일에 머스크 앨러배마 호와 접촉했다. 머스크 앨러배마 호는 무장한 대원들의 에스코트를 받고 새로운 선장인 1등 항해사 래리 D. 에어셰임의 지휘를 받아 뭄바사로 출발했다. 필립스는 9일 전에 직무대행자로 에어셰임을 지정해뒀다. CNN폭스뉴스는 사건을 보도했다.

200px-Surveillance_photo_of_Maersk_Alabama_lifeboat%2C_hijacked_by_pirates_090409-N-0000X-926.jpg
무인기 스캔이글이 실제로 촬영한 당시의 사진.

구명정에는 식량과 물이 있었지만 머물 곳이 부족했고 화장실이나 통풍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USS 베인브리지는 스캔이글로 구명정을 확인했고 다른 올리버 해저드 페리급 프리깃 USS 핼리버튼은 헬리콥터를 함상에 탑재했다. 두 군함은 해적들의 총기가 닿지 않는 수백 야드 뒤에서 따라갔다. 정찰기가 항공궤적을 파악했다. 두 배 사이에 무선통신이 이뤄졌다. 그 외에 해적에게 납치당한 4척의 외국 배가 구명정을 따라왔는데 중국, 독일, 러시아, 필리핀, 투발루, 인도네시아, 타이완 등의 국적자 54명이 납치당했다.

2009년 4월 10일에 필립스는 배를 탈출하려고 했지만 해적들이 사격을 하자 다시 잡혔다. 해적들은 미군이 필립스 선장에게 지시를 할까봐 겁이나 바다에 휴대폰을 버렸고 미 해군은 해적들에게 쌍방 교신이 가능한 무전기를 줬다. 와스프급 강습상륙함 USS 박서도 접근했다. 해적들의 전략은 그들의 동료와 합류하는 것이었는데 동료들은 다른 국적의 선박을 납치한 상태였다. 그리고 해적들은 필립스를 숨기기 위해 소말리아로 가려고 했다. 협상은 FBI 협상가에 의해 USS 베인브리지의 함장과 해적 사이에서 진행됐다. 납치범들은 위성전화로 다른 해적선과 연락하기도 했다. 한편 협상이 실패할 것에 대비해 4월 10일, 미 해군의 최정예 대테러부대 DEVGRU 대원들이 미 본토에서 현지로 급파되었다. 상황이 매우 급박했기에 DEVGRU 대원들은 수송기에서 해상으로 HALO 강하를 한 후 USS 박서 함에 승선하여 작전을 대기하였다.[6]

그러나 협상은 해적들이 토요일 일출 후에 USS 핼리버튼에 사격을 하면서 중단됐다. 미군은 반격을 하지 않았고 사태가 바뀌는 것을 원치 않았다. 사격으로 부상을 입은 사람은 없었고 우연히 해적 중 하나가 구명정의 해치 쪽에 사격을 했다.

해적 중 하나는 위성전화로 로이터 통신에게 자신들은 안전하며 미국인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공격 받을 때 방어할 것이다라고 진술했다. 필립스의 가족은 상황의 해결을 기다리며 버몬트에 모였다.

2009년 4월 11일 토요일 머스크 앨러배마 호는 뭄바사에 도착했다. FBI[7]는 배를 억류하고 조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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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당시의 USS 베인브리지의 함장(왼쪽)과 리처드 필립스(오른쪽)의 실제 사진.

USS 베인브리지의 함장이었던 프랭크 캐스텔러노(Francis Xavier Castellano) 대령[8]은 바람이 거세서 해적들이 흥분했고 그들을 진정시키려고 했다고 밝혔다. 4월 12일 일요일에 DEVGRU 대원들이 해적 셋을 사살했다. 파도가 출렁거리는데도 사살시킨 건 대단하다 필립스는 건강한 상태로 구출되었다. 캐스텔러노 대령은 상급자의 허가를 받은 상태에서 필립스의 생명이 위험했기에 발포했다고 밝혔다. 해적들이 AK-47로 필립스의 등을 겨눴기 때문이었다. DEVGRU 저격수는 USS 베인브리지의 고물(함미)에서 저격했고 모두 머리를 맞췄다. 당시 USS 베인브리지는 구명정과 25에서 30야드 떨어진 수준이었다. 죽은 해적의 이름은 알리 아덴 엘미, 성이 하막으로 알려진 자, 그리고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자였다. 압두왈리 무세는 작전 직전에 필립스의 석방을 두고 USS 베인브리지에 협상을 하려고 승선했다가 체포되었다.

죽은 세 해적의 시체는 2009년 4월 마지막 주에 소말리아의 밝혀지지 않은 수습자에게 미 해군이 인도했다.

생존한 해적 압두왈리 무세는 USS 박서에 구금됐고 미국으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았다. 뉴욕의 법원에서 검사는 해적과 완력으로 배를 억류하려 한 음모, 인질 납치 등의 죄를 주장했다. 무세의 변호사는 무세가 청소년(15-16세라고 주장했는데 나중에 무세는 범행 당시 18세였다고 인정했다.)이란 점을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무세가 청소년이 아니라 성인으로 보았다. 무세는 해적죄와 기타 여죄로 2011년 2월 17일, 33년 9개월을 선고받았다.

2010년에 리처드 필립스는 이 일을 책으로 썼다. 선장의 의무(A Captain's Duty)란 책으로 이 책은 영화의 원작이 되었다. 또한 이 작전에 참가했던 DEVGRU 대원 맷 비소넷은 후일 오사마 빈 라덴 을 사살한 넵튠 스피어 작전에 참가한 후 마크 오언이란 필명으로 빈 라덴 사살 작전을 다룬 회고록 노 이지 데이(No easy day)를 집필하면서 한 챕터를 필립스 선장 구출 작전에 할애하였다.

6 트리비아

  • 실제로 톰 행크스와 해적 역을 맡은 배우들은 촬영전까지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고 한다.이유는 해적을 처음으로 만났을때 필립스 선장이 느낀 그 낯설음과 두려움을 톰 행크스가 더 자세하게 연기하기를 바랐던 감독의 의도였다.
  • 북미 개봉 첫 주에 그래비티에 이어 박스오피스 2위를 차지했다. 그래비티와 타깃층이 겹쳐 묻히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입소문이 좋았던 탓인지 꾸준함을 보이며 박스오피스닷컴의 예상 수익 7천2백만 달러를 뛰어넘어 1억 달러를 돌파했다. 해외수익 또한 영국에서의 흥행에 힘입어 1억 달러를 돌파, 월드와이드 2억 달러를 넘겼다.
  • 한국에서는 11월 17일자 전국 3개 상영관에서 상영하고 있지만 사실 막내린 셈이다. 전국관객 집계는 19만명으로 흥행은 참혹했다.
  • IMDB 평점 8.1, 로튼토마토 신선도 93%, 메타크리틱 메타스코어 83점을 받았다.
  • 실제 리처드 필립스는 매사추세츠 주 윈체스터 출신으로 윈체스터 고등학교를 1973년에 졸업한 뒤 매사추세츠 대학교에 입학해 국제법을 공부하려고 하였으나 자퇴하고 매사추세츠 해양대학교에 들어가 1979년에 졸업했다. 그 후 간호사인 앤드리아 코기오(Andrea Coggio)와 1987년 결혼하여 대니얼과 마리아를 낳았다. 영화에서는 아들이 둘인 것으로 나온다. 2009년 4월 7일에 20인 규모의 선원상선 앨라배마 호를 타고 동아프리카 공해[9]를 지나가던 중 해적의 공격을 받았다. 이는 19세기 이후 미국 국적에 등록된 선박에 해적질이 성공한 첫 사례이다. 해적들은 몸값으로 수천만 달러를 요구했다.
  • 해적들의 우두머리 갈비씨 무세 역을 맡은 바르하드 압디(Barkhad Abdi)는 소말리아계 미국인으로 배우 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연기력을 선보이며 아카데미를 비롯 왠만한 어워드의 남우조연상 후보에 무더기로 이름을 올리는 기염을 토했다. 필립스 선장과 처음 대면하는 장면에서 나오는 "날 똑바로 봐. 이제부터는 내가 선장이다"라는 대사는 압디의 애드립이다. 참고로 개런티는 65,000달러였다고 한다... 1985년생이며 영화감독 겸 제작자로 미국에서 뮤직비디오 연출 등을 맡은 바 있다. 1985년 모가디슈에서 태어나 예멘에서 자랐고 1999년에 미국으로 건너와 미니애폴리스의 미네소타 주립 대학교를 나왔다. 현재 자신의 영화를 감독 중이라고 한다. 그 밖에 다른 해적 배역들도 모두 소말리아 이민자들이 맡았는데 이들 모두 실감나게 해적을 연기했다.
  • 엔딩에서 필립스와 의무부사관들(상사(여)와 중사(남))의 대화는 모두 애드립이다. 원래 필립스 선장이 구조된 뒤 혼자 남겨지는 장면을 찍었으나 필립스를 구하자마자 의무실로 보냈다는 말을 들은 감독이 즉석에서 엑스트라를 했던 의무사를 불러 대강 상황 설명만 한 뒤 대사조차 주지않고 촬영했다.[10] 편하게 실전연습하듯 하면 됩니다. 단지 환자가 톰 행크스일 뿐 아이러니하게도 즉석에서 애드립으로만 촬영된 이 장면은 톰 행크스의 장년기 필모그라피에서 손꼽히는 명장면으로 꼽힌다. 연기라고는 해본 적도 없는 의무사들이 실제 응급처치마냥 전혀 위화감 없이 명장면의 요소로 녹아들 수 있었던 것은 톰 행크스의 관록에서 비롯된 명연기 덕이었다는 평가가 있다.
  1. 퍼시픽림 호주팀 아빠
  2. 영화의 초반부에 보면 해적과 관련된 위험에 대해서 수신한 메일을 보고 넘기는 장면이 이에 해당한다. 사실 이미 다음항구가 케냐 뭄바사라는 자체가 소말리아와 인접국가라 해적의 위험이 극도로 높은 지역이니 이런 정보를 꼼꼼히 챙겨야한다. 실제로는 해적의 위험으로 인한 소말리아 인근 항행금지구역을 피해가며, 해적 목격지역 및 출몰지역에 대한 정보들을 무시하는게 아니라 이러한 위치를 표시해서 최대한 피해서 간다. 이러한 정보를 무시하는 행위는 결국...
  3. 그런데 피터 아이흐스테드 기자가 쓴 책에서는 무려 600만 톤에 달하는 곡물 화물선으로 기재하고 있다. 화물 내용은 옥수수 및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생필품인 곡물 지원화물이었다고 한다.
  4. 이는 해적을 상대로 할 때 기본적인 메뉴얼이다. 물론, 해적들도 진화해갈수록 어느 정도 선박 운용법을 익힐 수도 있긴 하지만, 이 정도의 고급 기술을 배웠다면 그냥 해외 선박회사에 취업해 제대로 된 급여를 받고 안정적으로 일하지 해적질 따위를 하진 않는다. 소말리아/해적 항목 참고.
  5. 이 승무원이 해적두목인 무세를 잡을때 가장 큰 활약을 했다고 한다. 칼로 무세의 팔을 찔러 무세가 절규하자 "다음에는 목에 칼이 박힐테니 그땐 절규도 못할거다!" 라고 차겁게 말하여 기선을 제압했다고 한다. 그는 이 활약으로 업체로부터 따로 위로금 1만 달러를 받았다. 더불어 무세의 재판에서 통역으로도 일했다.
  6. 이 작전에 참가한 전직 DEVGRU 대원 맷 비소넷의 수기 노 이지 데이에 따르면 DEVGRU 대원 이외에 공군 기술통신병 등 3명이 추가로 동행했다고 한다.
  7. 해상 범죄 수사는 코스트 가드가 아니라 FBI의 영역이다. 현행범 체포는 해군이나 코스트 가드도 할 수 있으나, 상황 종료 후 FBI에게 인계한다.
  8. 당시에는 중령.
  9. 소말리아의 동남부 도시 Eyl에서 440km 떨어진 곳이었다.
  10. 미 해군의 협조를 받아 군함에서 촬영했기에 가능했다. 촬영을 허락받은 시간이 얼마 남지않아 다급히 진행되었다. 40분에 걸쳐 4번 찍었는데 처음은 연기경력이 없던 의무사가 패닉에 빠졌고, 영화에 주로 사용된건 두번째 촬영분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