튜더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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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과 아일랜드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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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dor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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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더 왕조의 문장

1 개요

영국의 역대 왕조 중 하나. 1485년 랭커스터 공작가의 방계 헨리 튜더가 장미전쟁을 끝내고 헨리 7세로 즉위하면서 시작되었다가 엘리자베스 1세 이후로는 직계 후손이 없어 단절되었다.

본래 튜더가는 본래 웨일즈의 미미한 가문이었다. 웨일즈 공[1]의 후손이라곤 하는데 이미 몰락해서 한미한 가문이고, 중앙정계에선 듣보잡에 가까웠다. 그런데 헨리 7세의 조부였던 오웬 튜더가 프랑스 발루아 왕조 샤를 6세의 딸이자 랭카스터 왕조 헨리 5세의 미망인인 케서린을 부인을 맞이하며 듣보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헨리 7세는 그의 이부 형이었던 헨리 6세로부터 공식적으로 형제임을 인증받았다.

무엇보다 헨리 7세가 왕위를 주장한 근거가 '멀리보면 나도 플랜태저넷...'[2]이라서 모계로 봐도 상당히 좀 거리가 있는 상태였지만 [3] 거기에 헨리 7세는 요크 왕조의 에드워드 4세의 딸 엘리자베스와 결혼하여 그래도 모계로 랭카스터 가문의 피를 이은 사람으로 요크 가문의 여자와 결혼하여 두 가문의 융합을 이뤘다. 이미 왕위에 등극할 무렵은 플랜태저넷 혈통들이 서로 죽이는 바람에[4] 그 후손들이 많이 도륙나 있었고 왕위에 위혐을 끼칠만한 왕족은 리처드 3세의 조카 워릭백작과 링컨백작이 남았는데 그나마도 철없는 소년들이라 큰 위협은 되지 않았다.[5]


대체로 영국 역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시기'로 꼽힌다. 헨리 8세의 경우 막강한 왕권을 제멋대로 휘둘렀으나 복잡한 사생활결혼을 6번이나 한덕에 대중죽으로 많은 관심을 끌고있고 오늘날까지도 대중매체의 인기 소재로 자주 다뤄진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경우 영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왕 중 한 명이다. 이 탓에 영국에선 지금도 여왕이 나라가 잘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권리장전과 이후 하노버 왕조 이후엔 왕이 정치에 큰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2 시대상

경제적으로는 젠트리와 요크 세력이 성장하면서 상업이 발달하여 근대 자본주의 경제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대외적으로는 네덜란드스페인 세력을 물리쳐 해상에서의 주도권을 장악할 기초를 쌓았다. 세계 각지에 식민지를 침략건설하면서 영국 정부의 재정이 건실해지던 시기였다.[6]
문화적으로는 토마스 모어, 존 던 등 지금도 영국에서 손꼽히는 문학가들이 활동했으며, 무엇보다도 영문학계의 본좌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이 시기 사람이다. 활발하고 진취적인 분위기의 튜더 왕조의 문화는 엘리자베스 1세의 이름을 따서 '엘리자베탄(Elizabethan)' 문화라고도 이름 붙여졌다.[7]
그러나 종교적으로는 헨리 8세가 가톨릭-영국 국교회(성공회)[8]-청교도의 삼자구도를 짜면서 종교적으로는 아주 피곤한 시기가 되었다.

3 기타

헨리 8세, 앤 불린, 메리 1세, 엘리자베스 1세 등 유난히 극적인 일생을 살다간 인물이 많아 창작물의 소재로 자주 활용된다. 대표적으로 드라마 튜더스.

여담으로 희고 붉은 꽃잎의 문장에는 한 가지 이야기가 있다.

1455년부터 1485년에 이르기까지, 영국의 잉글랜드는 두 가문의 왕좌 다툼으로 시끄러웠다. 붉은 꽃잎을 문장으로 삼은 랭카스터 가와, 흰 꽃잎을 문장으로 쓰던 요크 가의 싸움이었기 때문에 '장미전쟁'이라 불린 이 30년의 전쟁으로 국토가 피폐해질 무렵, 흰 꽃잎과 붉은 꽃잎이 섞인 장미가 피어 결국 싸움을 그만두었다는 이야기.
다만 장미전쟁이라 이름 붙힌건 후대 작가 월터 스콧이 처음이고 실제 시기엔 장미전쟁이니 하는 타령도 않았다는게 통설이다.

다만 유럽 재래 장미품종 중 꽃잎에 흰빛과 붉은빛이 같이 나타나는 품종이 있기는 하다. 바로 Rosa gallica 'Versicolor'.
  1. 에드워드 1세시기 웨일즈 공이 왕세자 직위로 넘어가지만 그전에 웨일즈 공이 존재했었다.
  2. 할머니는 프랑스 공주인데 영국과 프랑스 왕가는 혼인이 잦았기에 헨리 3세의 후손이며, 외가로는 에드워드 3세의 후손인데 랭커스터, 요크 가문 모두 에드워드 3세의 후손이다.
  3. 그의 외가쪽 가문인 보퍼트 가문은 에드워드 3세의 사남 랭카스터 공작 곤트의 존의 후손으로 세번째 결혼이었지만 리처드 2세 시절 적자로 인정받았다. 다만 적자이나 왕위 계승권은 주지 않았는데 랭커스터가가 거의 멸종하면서 세번째 결혼에서 태어난 후손들까지도 랭커스터가로 치게 된다. 어디까지나 헨리 7세가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이 장미전쟁으로 계승자들이 죽어나갔기 때문이었다.
  4. 요크나 랭커스터나 플랜태저넷의 방계다. 가문명이 요크나 랭커스터가 아니라 작위가 요크공 랭커스터 공작에서 유래이지 원래 성은 플랜태저넷이다. 리처드 2세이후 플랜태저넷 본가는 절손. 그 삼촌들이 랭커스터, 요크 가문 시조.
  5. 런던탑에 가두었다가 반란에 연루되어 처형하긴 하는데 반란들은 리처드 3세가 죽인 요크공작 이름으로 내세울 정도로 명분이 시덥잖았다. 애초에 요크가가 분열된게 리처드 3세가 에드워드 4세의 아들들 에드워드 5세와 요크공작을 죽인거에 반발해서 망한거라..
  6. 이 시기를 영국의 전성기로 아는 사람들이 있으나, 정확히는 전성기로 향하는 토대가 쌓이는 시기였다. 앤 서머싯의 엘리자베스 1세 전기를 보면 재정 때문에 늘 노심초사하고, 강대국 스페인과 (펠리페 2세 시절) 프랑스를 되도록이면 자극하지 않으려는 여왕의 모습이 보인다.
  7. 반면 18세기에 들어 스튜어트 왕조가 옹립되었는데, 제임스 1세가 통치를 막장으로 하자 꿈도 희망도 없어하고 현실에 절망하는 어두운 분위기의 문화는 제임스 1세의 이름을 따서 '자코뱅(Jacobean)' 문화라 불린다.
  8. 당시 성공회란건 존재하지 않았다. 영국 국교회가 19세기에야 성공회로 명칭을 변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