펑더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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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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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새롭게 제정된 원수 군복을 입은 펑더화이

彭德怀·彭德懷(팽덕회) / Péng Déhuái (1898년 1월 24일 ~ 1974년 11월 29일)

중화인민공화국군인, 정치가이다. 한국전쟁 시에 중국 인민지원군(중공군)을 지휘했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마오쩌둥과 같은 후난 성 출신이다. 유년기의 삶은 상당히 기구한데 부모를 잃고 할머니의 손에서 자랐지만 할머니가 엄청 학대해 어려서 부터 광부나 노비 등 막일을 전전했다.[1] 16세에 탕셩즈 군벌의 사병으로 들어갔다가, 이후 후난군관강무당(군사학교)에 입학하여, 국민당군의 장교가 되었다. 이후 국민당군의 북벌에 참가하고, 1928년 2월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다. 국공합작 결렬 이후, 휘하 부대를 이끌고 후난 성 핑장에서 봉기하였다가 후에 마오쩌둥과 주더의 해방구에 합류했다.

2.2 홍군 시절

이후 홍군(공산군)을 지휘하여 국민당군의 소탕전을 몇 차례나 분쇄했고, 대장정에도 참여하여 옌안까지 이동하였다. 펑더화이는 린뱌오와 함께 홍군에서 제일 유능한 야전지휘관으로 꼽혔다.

제2차 국공합작이 결성되자 팔로군을 이끌고 항일전에 나서, 1940년 화북지역에서 100여 개의 연대를 동원한 백단대전을 지휘했다. 이때 일본군에 큰 피해를 입히기는 했으나 팔로군의 희생도 매우 컸다. 이때 빈약한 무장의 팔로군이 일본군과 싸우다가 당한 피해가 워낙 극심했기 때문에 팔로군은 몇년간 직접적인 나서기 보다는 전투보다는 배후지역을 공고화하는 것에 (국민당측의 주장으로는 공산당 세력확대)에 더 매진한다.물론 일부 화북지역에서는 백단대전과 같은 대규모 회전은 아니었지만 계속 소규모 교전이 일어나고 있었다.

일본의 항복 이후, 제2차 국공내전이 시작되자 서북인민해방군(후에 제1야전군)을 맡아 1948년에는 국민당군에 함락되었던 옌안을 수복하였고, 이후 계속 서진하여 서부의 국민당군을 소탕하였다.

2.3 한국전쟁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펑더화이는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을 맡았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는데 유엔군이 개입하여 북한군이 위기에 처하자 마오쩌둥은 순망치한(脣亡齒寒)[2]이라는 사자성어를 내세워 출병을 결정하고 펑더화이를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관에 임명[3]하여 1950년 10월 북한에 파견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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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더화이와 김일성[5]

펑더화이는 38선을 넘어 쇄도해 오는 유엔군을 여러 차례의 공세를 통해 저지시키고 38선까지 물러나게 만들었다.

출병 후 펑더화이는 미군이 매우 강력한 화력과 물량의 강점을 지니고 있지만, 도보 행군을 싫어하며, 야간전투에 약하고, 과도하게 공중지원공군!!!!에 의존하는 약점을 꿰뚫어보았다.[6] 이를 이용해서 펑더화이는 산악지역에 대군을 매복시켰다가 깊숙이 들어온 미군과 한국군을 공중지원이 어려운 야간에 포위하여 섬멸하는 전법을 사용했다.[7] 전쟁은 원점으로 되돌아갔고, 이때부터 3년간 계속 휴전선 부근에서 고지전 중심의 교착상태가 벌어진다.

이 과정에서 평안도에 있던 펑더화이의 사령부에서 러시아어 통역과 행정을 담당하던 마오쩌둥의 큰 아들 마오안잉이 1950년 11월 25일에 미 공군기 F-80의 네이팜탄 폭격으로 사망하였다. 펑더화이는 마오안잉이 사망했다는 보고를 일부러 미뤘는지 아니면 바빠서 못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마오안잉의 전사 보고를 마오안잉이 죽은 지 3개월이나 지난 후에야 보고했다. 마오쩌둥은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듣고는 한동안 아무 말도 못하고 눈시울을 붉히다가 "전쟁은 희생이 따르는 법이지..."라고 말했고, "그는 어쨌든 마오쩌둥의 아들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마오쩌둥이 그나마 멀쩡하던 시절. 이로 인해 펑더화이와 마오쩌둥은 불편한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다만 평더화이도 6.25전쟁에서 아들을 잃었다.[8]

펑은 전선이 교착상태에 있던 1952년 귀국하였고, 1953년 7월 27일 지난했던 한국전쟁 휴전협정 조인식에 공산군 대표 중 한 명으로 참석해 휴전협정서에 조인하고 전쟁을 끝낸다. 1954년 국무원 부총리 겸 국방부장에 임명되었다.

휴전협상 중에는 언제나 미소를 잃지 않는 침착한 모습으로 일관하여 제국주의자의 주구 운운하며 발광하는 북한측 대표들과 크게 대비되었고 이에 적인 미군 장성들도 그에게 호감을 품어 중국어가 가능했던 백선엽 장군에게 간단한 중국어를 배워 그에게 중국어 인사를 건네기도 했는데 펑더화이가 크게 반색하며 좋아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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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시절의 펑더화이와 마오쩌둥.

2.4 토사구팽

중국에 돌아와 한국전쟁을 원점으로 돌린 공로로 국방부장 겸 부총리를 맡았다. 그는 자신이 국방부장시절이던 1955년에 군에 계급제도를 도입했고, 자신은 군서열2위에 중화인민공화국 원수 계급을 부여받았다. [9] 인민해방군은 원래가 지원병+혁명군의 전통으로 병사 개개인의 당성을 전력의 뿌리로 삼았기 때문에 계급이 없어도 잘 돌아갔지만, [10][11]펑더화이는 소련군과 미군을 모델로 삼고 인민해방군을 아마추어적인 의용병에서 프로페셔널한 기술군으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이를 도입한 것이다. 이것은 병사 개개인의 당성을 강조하던 마오쩌둥의 노선과는 모순적이기 때문에 후에 숙청의 빌미가 된다.

마오쩌둥이 의욕적으로 추진하던 대약진운동이 대실패로 끝났을 때, 펑더화이가 1959년 7월에서 8월에 걸쳐 열린 루산 회의에서 한 발언은 펑더화이 자신을 비극적인 운명으로 몰아넣고 말았다.

이 회의를 앞두고 고향인 후난성의 농촌 시찰을 실시한 펑더화이는 대약진 운동과 인민공사화에 의한 경제 피폐를 목격하고, 회의 기간 중에 마오쩌둥에게 서신 형식으로 이 정책의 문제점을 전달하고 정책 전환을 요구했다. 이 서신에서는 마오쩌둥의 지도권을 존중하는 것을 명시하고 있었지만, 마오쩌둥는 이것을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 들였다. "저 새퀴는 해로운 새퀴다." 마오쩌둥는 이 자료를 비판을 추가하여 회의 참가자에게 토론 의제로 채택하게 했으며 펑더화이가 19년 전,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 8월 백단대전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허락없이 승리했던 것까지 가져와서 펑더화이를 맹렬히 비판했다. 이러한 마오쩌둥의 배반적인 행동에 펑더화이도 회의 석상에서 반박했지만, 결국 펑더화이는 국방부장과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의 지위에서 해임된다. 이 해임은 후임 국방부장이 된 린뱌오의 지위를 높여 문화대혁명의 단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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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위병에게 조리돌림 당하는 펑더화이. 이런 치욕이..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마오쩌둥에게 반기를 들었던 펑더화이는 마오쩌둥를 종교적으로 숭배하는 홍위병의 공격대상이 되어 박해를 받았고, 폭행과 조리돌림을 당하기도 했다. 그는 1974년 암으로 베이징에서 사망하였다.

1978년 마오쩌둥 사후, 중국 공산당 제11차 중앙군사위원회에서 그의 사건이 재조사되어 사면이 이루어졌고, 덩샤오핑에 의해 모든 명예가 회복되었다.

여담으로 시진핑의 아버지인 시중쉰[12]은 제2방면군 시절부터 펑더화이의 정치장교였다. [13] 이 당시 펑더화이의 측근이었다는 이유로 가문이 몰락했다. 그 때문이 시진핑은 태어나기는 명문가에서 태어났지만 밑바닥에서부터 자신의 실력으로 차근차근 올라와야 했다.

3 평가

국공내전 때부터 그 능력을 인정받았으며, 한국전쟁에서도 중국군에 제해권, 제공권 자체가 없는 상황에서 유엔군과 한국군을 대규모의 병력을 이용한 포위작전으로 궤멸시켰다. 이 때문에 1.4 후퇴를 겪은 유엔군사령부와 미국 정부가 비밀리에 한국에서 유엔군을 철수시키는 계획까지 진지하게 고려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유엔군의 주력을 끝내 궤멸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전세를 완전히 뒤집지는 못하고 결국 38선 부근에서 휴전을 맞이하게 된다.

그는 전쟁터에서 항상 부하들을 걱정하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들것에 실려가는 부상병을 직접 나르는 모습에 부하들이 감동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1950년 10월부터 1951년 1월까지 3번의 공세를 펼쳐 심각한 인력손실과 물자부족에 시달리던 중국군의 상황을 충분히 인지해 마오쩌둥에게 2~3개월간 전군에 휴식 명령을 내리고 이듬해 3월쯤에 공세를 시작하자는 전보를 보냈다. 이에 김일성이나 북한 주재 소련 대사 라자예프는 지금 당장 부산까지 밀고 내려갈 것을 주문했지만, 펑더화이는 그런 무리한 요구를 듣지도 않았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이에 관해 독전파들의 요구가 부당하다고 지적하고 펑더화이가 옳은 선택을 한 것이라고 치켜세웠다.

이러한 생각은 당시 중공군과 대치하고 있던 유엔군의 미8군사령관 매튜 B. 리지웨이의 생각과도 비슷했는데, 두 사람은 무리한 진격보다는 충분한 물자와 인력 보충을 도모하고 차근차근 전략적 요충지를 점령해가는 쪽을 선호했다. 또한 이러한 생각은 8월 15일 광복절까지 전쟁을 끝내겠다고 무리한 남진을 선택한 김일성이나, 인천 상륙작전 이후 기고만장해져서 크리스마스 전까지 전쟁을 끝내겠다고 무리한 북진을 선택한 더글러스 맥아더의 생각과는 반대되는 것이었다. 미군이나 공산군이나 어쩜 이렇게 생각하는게 비슷한지 참...

미국의 논픽션 작가 데이비드 핼버스탬의《콜디스트 윈터》에서 글쓴이는 리지웨이를 중국군으로, 펑더화이를 미군으로 옮겨놨어도 두 사람은 실제 역사와 같은 판단을 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중국에서는 한신[14], 관우와 같은 용장으로 추앙을 받지만, 한국전쟁에 중공군을 이끌고 북진통일을 방해했다는 점에서 국내에선 호불호가 엇갈린다. 한국전에서의 전쟁 참전으로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한국전쟁 이후 마오쩌둥의 대약진 운동에 반대하다 권력에서 축출되어 쓸쓸하게 최후를 맞이한 것 때문에 안타깝게 보는 사람도 있다. 결론은 중국의 원수, 한국의 웬쑤
  1. 후에 펑더화이가 장교가 된 이후 할머니를 다시 찾았는데 그땐 집안의 난 인물이라고 칭송했단다. 후안무치
  2.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는 뜻으로, 당시 중국은 자국을 이(齒)로, 조선, 즉 한반도를 입술(脣)로 표현하면서 한반도를 중국의 안보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으로 보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일본한반도를 발판으로 삼아 중국침략을 시작한 것을 보면 이들의 인식이 꼭 과장된 것만은 아니다.
  3. 원래는 린뱌오가 임명되었으나 린뱌오가 병을 핑계로 거부하는 바람에 한반도 출병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던 펑더화이가 맡게 된 것이다. 사실 평소에 한반도의 정세에 관심이 많던 펑더화이가 마오쩌둥의 한반도 출병안에 찬성표를 던지면서 출병안에 대해 비관적이었던 중국 지도부의 마음을 돌려놓은 것도 크게 작용했다. 어떤 반공주의 한국 작가의 괴서적 <모택동과 임표>에는 린뱌오가 출병했다는 괴설을 싣고 있으나, 린뱌오는 한국전 개입에 매우 소극적이었다.
  4. 파병된 부대는 모두 인민해방군 부대였으나, 이들 부대에 굳이 '중국 인민지원군'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는 중국이 유엔군과 직접적으로 맞붙는다는 인상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즉, "이 군대는 우리 중국인민들이 미 제국주의자들로부터 핍박받는 조선인민들을 가없게 여겨 스스로 참전한 것임. 그러므로 우리 중국 정부와는 아무런 관계 없음"이라면서 전쟁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중국인민지원군이 참가하자마자 유엔군은 이들이 중국 정부에서 보낸 것이라는 걸 곧바로 알아차렸다. 참전한 중공군 공군도 자기네들은 인민해방군 공군과 관계 없다고해서 한자로 "중국인민지원군"이라고 기수에 한자로 써붙이고 나왔는데, 그럼 자기돈으로 전투기 사서 출전? 이뭐병
  5. 사진상으로는 훈훈해 보이지만 펑더화이와 김일성은 전략적 견해차가 달라 사이가 매우 험악했다. 한번은 언쟁하다가 (김일성은 중국어에 상당히 능통했기 때문에) 육두문자까지 쓰다가 주먹싸움 직전까지 갔다고 한다. 기사 루머이긴 하지만 어느 전투에서 인민군과 중공군에게 전황이 불리해져 김일성이 인민군을 통보도 없이 빼 중공군이 큰 피해를 입자 화가 난 펑더화이가 김일성의 뺨을 때렸다고 한다.
  6. 이에 대해서는 당시 미8군사령관이던 매튜 B. 리지웨이도 자신의 저서《한국전쟁》에서 "이놈들은 차만 타고 다니려고 하지 자기 발로 걸어 이동하는 것을 도저히 모른다. 이런 꼴을 조상님들이 보신다면 땅 속에서 목놓아 우시겠다"면서 비판한 부분이다.
  7. 한국에는 인해전술로 알려져 있지만, 엄연한 포위작전(구대전법)이었고, 중공군이 단순히 병력으로만 밀어붙인 건 아니었다.
  8. 마오쩌둥은 주석이 본을 보여야 한다라 듣고 정통성 다지기 라 이해한다 라며 장남 마오안잉을 참전시켰지만 참전사실을 알았던건 펑더화이와 주변 몇몇 인물 뿐 이었을 정도로 극비리에 붙혀졌다. 폭격 때문에 사령부는 동굴과 같은 구조였는데 마오안잉이 김일성 한테 받은 계란을 요리하려다 폭격당하자 펑더화이는 사색이 되서 불길에 뛰어들어 마오안잉을 구하려 했는데 불속에서 죽어가던 사람이 최고권력자 아들이었던걸 알 리가 없던 다른 장교들은 펑더화이를 붙잡았다고 한다. 마오쩌둥은 전쟁에는 희생이 따르는 법 이다 라고 쿨하게 넘기는 듯 했지만 후에 펑더화이를 극히 조진거 보면 그 원한도 있었을지 않을까 라고 많은 사람들이 회자한다.
  9. 군서열 1위인 주더가 건국후 거의 퇴역상태였기 때문에, 펑더화이는 현역으로는 군내 최고 서열이었다.
  10. 전 버전에서는 인민해방군의 계급폐지가 삽질이라고 했는데, 계급이 없는 상태에서 국공내전 승리, 한국전쟁의 무승부를 볼때, 중국군은 계급이 없어도 그런대로 잘 돌아갔다고 봐야 한다.
  11. 계급폐지는 '노동자인민의 자발적인 혁명무력, 평등한 군대'를 꿈꾸던 소련도 시도했던 일이다. 10월 혁명으로 권력을 장악한 볼세비키는 계급을 폐지했지만, 적백내전이 시작되자 트로츠키 국방장관은 '전쟁전문가들이 필요하다'면서 구 러시아제국 군인들을 대거 영입하고 계급을 부활시켜서 이들의 지휘권을 보장하였다. 다만 이들의 충성심을 믿을 수 없었기에 정치장교를 한명씩 붙이는데... 중국군도 1960년대에는 무계급으로 잘 돌아갔지만 계급 없이 입대한 세대가 주요 간부직에 진출하면서 문제가 심각히 발생했고 1980년대에 들어 계급을 부활시킨다. 인민해방군이 지녔던 여러 혁신성이 세대가 바뀌며 오히려 단점으로 바뀐 사례.
  12. 習仲勳, 1913~2002. 국가부주석까지 지낸 인물로 혁명 원로 중 한 명이다.
  13. 중국은 소련과는 달리 지휘관들이 대부분 골수 빨갱이들이었기 때문에, 정치장교(중국에서는 정치위원이라고 한다)라고 해봤자, 감시하는 역할이 아니라 그저 사기 및 사상교육 담당 참모에 불과했다. 다만 마오쩌둥은 명목상 주더의 정치장교였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홍군의 총사령관 역할을 했고, 명목상 총사령관인 주더가 오히려 마오쩌둥의 군사 참모역할을 했다.
  14. 실제 군사적 천재였다가 정권 수립 후 섬기던 주군(유방, 마오쩌둥)에 의해 토사구팽을 당해 비참한 죽임을 당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