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포트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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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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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심장이 인류의 심장과 함께 박동하거나, 참된 시인으로서 인간의 숨결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졌다면, 당신 주위에서 요동치는 이 고통의 바다 가운데서, 굶주림으로 죽어 가는 사람들과 광산에 쌓인 시신들, 바리케이드 둔덕 위에 쓰러져 있는 부상자들과 시베리아 벌판과 열대 섬 해안에 자신을 묻으러 가는 추방자들의 행렬 가운데서, 숭고한 투쟁이 전개되고 패배한 자들의 고통스런 신음 소리와 승리한 자들의 술판, 비겁에 맞서 싸우는 용맹, 숭고한 열성과 비열한 악의가 요동치는 와중에 당신은 중립인 채로 있을 수 없습니다. ​당신은 억압받는 사람들의 편에 설 것입니다. 당신은 아름다운 것이, 숭고한 것이, 그리하여 생명 자체가 빛을 위해, 인류와 정의를 위해 싸우는 자의 편에 서야 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 청년에게 고함, p. 54

Peter Kropotkin 피터 크로포트킨 1842. 12. 21 ~ 1921. 2. 8 모스크바 출생
정식 표기는 Pyotr Alekseyevich Kropotkin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

러시아의 혁명가,지리학자,아나키스트.

미하일 바쿠닌,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과 같은 인물들과 함께 19세기 아나키즘 운동을 대표 했던 인물로 19세기 서유럽에서 널리 인정 받던 다윈주의에서 파생된 적자생존의 반기를 들고 "모든 만물은 서로 돕는다"는 상호부조론으로 크게 주목 받았다. 한국에서는 20세기 초반 독립운동가 신채호를 통해 아나키스트 사이에서 널리 알려 졌다.

그의 사상의 핵심은 인간은 경쟁이 목표가 아닌 상호부조하며 함께 발전 할수 있다는것 이였고 일종의 노동조합 형태의 보험제도를 핵심으로 삼고 있다. 사적재산권위주의를 부정 했으며 중앙집권적 정치 형태가 아닌 자발적 참여에 기인한 지역공동체적인 사회 구조를 주장했다. 러시아 혁명 발생후 러시아에 돌아와 새로운 사회에 대한 기대감에 한껏 부풀 었지만 얼마 가지 않아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하자 전체주의적 볼셰비키를 비난 하며 "이것은 혁명의 매장이다"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블라디미르 일리치, 당신의 행동은 지금 당신이 믿는다고 주장하는 원칙들과 완전히 반대편에 있소... 혹시나 변명이랍시고 정치인으로서 권력 그 자체를 추구하는 건 의무라는 둥 요즘 절대군주들도 하지 않는 말 따윈 하지도 않길 바라오. 당신이 전 유럽 공산주의의 선구자로서 이런 추악한 방법으로는 당신이 추구한다는 원칙을 이룰 수 없다는 걸 모를 만큼 자신의 권위주의적 착각에 빠져있는 것이오? 전 세계 공산주의의 수호자라고 자처하는 이가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순수한 의사표현조차 이렇게 짓밟으면 그 이념의 미래는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이오?

- 레닌에게 쓴 편지, 1920년 12월 모스크바와 나머지 러시아 볼셰비키 당국의 사회혁명당 숙청 밑 인질 사태를 두고

러시아 혁명의 주도권을 탈취한 볼셰비키가 권위주의적 행보를 보이기 시작하자마자 맹렬히 비판하였으며, 특히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 중심으로 아나키스트 밑 사회혁명당, 멘셰비키 같은 다른 정파에 대한 박해를 두고 "동서고금을 들어 참 레닌만한 혁명가도 없다. 다른 혁명가들은 어떠한 도덕적 이상을 위해 싸우는 반면 레닌은 그런걸 전혀 신경쓰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통열한 비난을 가했다. 한편 그러면서도 외국의 친구와 동지들에게 "혁명이란건 원래 결코 깨끗할 수 없고, 무질서는 변화의 필수적인 부분이다"라며 볼셰비키 정권을 초월한 러시아 민중의 자유를 향한 순수한 열정 자체는 수호하려 했다. 이 시점에서는 크로포트킨 본인은 당파적 분열과 박해를 넘어 19세기 브나로드 운동과 닫아있는 러시아 혁명적 인텔리 전통의 살아있는 거두이며, 특히 개인적으로 제정 러시아의 좌파/자유주의 세력 전체의 적이 없는 큰아버지 뻘 인물이라 볼셰비키 정권의 직접적인 박해는 받지 않았으나 말년에 소련 정권의 기계적이고 비인간적인 폭력성을 좌파 내에서 처음부터 통찰한 인물 중 하나가 되었다.

현대에는 아나코-코뮤니즘(무정부 공산주의)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크로포트킨 이전 까지만 하더라도 마르크스프루동의 주장을 철학의 빈곤이란 저서를 통해 반박한 것 처럼 아나키즘은 특히 마르크스주의 계열에 비해 이론적, 사상적 기반이 약하다고 평가 받고, 충동적인 테러리즘에 의지하는 경향이 강했으나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은 프랑스의 엘리제 레클뤼엘리 레클뤼 형제의 지질학적 연구와 함께 본격적으로 인간의 노동, 사회적 관계를 생태학적 관점에서 파악하여 하부 구조로부터 자발적인 조직화를 통한 아래로부터의 대안 권력 구조 형성이란 노선을 주장하면서 국제 아나키즘 운동의 새로운 지평선을 열었다. 이런 크로포트킨의 생태주의적 수평적 자유 연대 노선은 훗날 스페인 내전 당시 카탈루냐아라곤 중심으로 사회 혁명을 주도했던 CNT의 기본적인 조직적 방침이 되었으며, 현대까지 멕시코의 사파티스타 혁명과 미국의 생태운동가이자 사회학자 머레이 북친의 영향력을 통해 작금 시리아 쿠르디스탄인민민주당이 추구하고 있는 민주적 공동체주의[1]의 이론적 기반이 되었다. 간단하게 말하면 크로포트킨의 생태주의적 아나키즘은 19세기 말 까지만 하더라도 유행하던 테러리즘 중심의 아나키즘에 종지부를 찍고 하부 구조로 부터의 체계적이고 치밀한 노동자, 농민, 시민 사회의 자발적, 수평적 연대와 조직화를 통해 장기적인 관점에서 사회적 인식 혁명과 정치적 혁명을 향한 역량 축적이라는 현대 아나키즘의 기본적인 이데올로기적 토대를 깔았으며, 이에 기반하여 동시대 네스토르 마흐노우크라이나 자유령과 훗날 스페인 내전기 CNT의 혁명 활동이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이론적 비중으로만 본다면 국제 공산주의의 역사가 레닌 전후로 나뉘듯 현대 아나키즘의 역사는 크로포트킨 전후로 나누어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생애 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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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 시절

차르시절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크로포트킨 공의 아들로 태어나[2]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그 당시 귀족들만 다니는 수습기사단에서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1862년 ~ 67년 근위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장교로 시베리아에 전출되어 기병대 장교와 시종무관을 지내기고 했으며 군업무 이외에 동물과 생태환경을 연구 하고 이때 지리학을 습득 하게 된다. 이때 연구를 기초하여 산맥구조선 이론을 구상 했으며, 이 연구결과로 지도작도법을 새로 수정하게 했다고 하며 빙하작용 현상에 대해서도 논문을 발표 한다.

이때에 연구결과로 과학자로서의 길이 열리고 지리학회 회장직 제안이 들어 왔지만 뿌리치고 봉건제적 모든 귀족세습을 부정하고 아나키즘 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그의 신문 칼럼식 기고문인 청년에게 고함에서 크로포트킨의 과학에 대한 견해를 살펴보면 과학은 근본적인 목적과 방향성을 잃었으며 사회적으로 권력집단에 의해 잘못 사용 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유물론적 사상이 토대가 되어 지식의 평등을 주장 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당신이 참으로 당신의 학문에서 인류의 번영을 꾀한다면, 굉장한 질문이 야기될 것이다. 당신의 비판적인 정신이 아무리 작다고 하더라도, 우리 사회에서 과학은 소수의 삶을 더 기쁘게 만들 뿐이지 인류 전부에게는 미칠 수 없는 사치한 종목임을 당신은 단번에 관찰해야만 한다. 1세기 전에 과학은 우주의 기원에 관한 건전한 가정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섭렵하였거나 혹은 비판적인 참된 과학적 정신을 소유하고 있는가? 야만인 같은 편견과 미신을 소유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몇 천명은 방향을 잃어버리고 종교적 사기꾼의 꼭두각시로서 봉사할 준비가 되어 있다. 혹은 과학이 신체적 도덕적 건강을 위한 이성적 기초를 세우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를 살펴보자. 과학은 우리에게 우리가 어떻게 신체의 건강을 유지할지를 말해 주고, 그리고 도덕적 지적 행복에 이르는 길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우리들 책 속에 사장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그것은 왜 그런가? 왜냐하면 오늘날 과학이 몇몇 특권층 사람만을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불평등, 임금 노동자와 자본주의 주인들의 두 계층으로 나누어진 사회가, 이성적 삶의 원칙의 모든 가르침을, 인류의 10분의 9를 위해 아픈 아이러니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 An Appeal to the Young ,1880 일부 - P.A 크로포트킨

3 아나키스트 활동


펠릭스 나다르(Nadar, 1820 ~1910)가 촬영한 크로포트킨

1871년 지리학회 회장직을 거절한후 1872년 스위스 쥐라산맥의 시계제조 공동체를 방문 하면서 이들의 노동조합 형태의 자발적인 상호부조 협동을 보며 신념에 대한 확신을 가지기 시작했고. 그 후로 러시아에 돌아와 상트페테부르크 지역의 노동자와 농민들과 연계하여 혁명단체(차이코프스키단)에서 활동을 전개하다 러시아 정부에 진압 당하여 1874년 감옥에 투옥 됐다. 2년뒤 극적인 탈출을 성공하면서 서유럽 아나키스트들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이후 미하일 바쿠닌을 만나 교류 하기 시작했고 제1인터네셔널 에서 활동하며 권위주의공산주의 이론가인 칼 마르크스마르크스주의자들을 비판 했다. 그리고 훗날 바쿠닌과 마르크스의 격한 대립으로 인해 축출크리를 맞게 된다.

이때 부터 아나키스트들의 왕자라는 별칭이 생겼다. 혁명가들에게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 당한뒤 러시아 정부에 요청에 의해 스위스에서 추방되어 옆동네 프랑스로 건너갔지만 날조된 폭동죄라는 명목으로 붙잡혀 3년간 옥살이를 하게 됐다. 1886년 석방되어 1917년 러시아 혁명 발생전까지 영국에 거주하며 아나키즘 운동과 저작활동을 하며 30년간 타향살이를 했다.

러시아 혁명이 터진 이후 크로포트킨은 러시아로 돌아와 이때만 해도 상당한 세력을 자랑했던 모스크바 아나키스트들을 중심으로 정치 활동을 펼치려고 했으나, 볼셰비키들의 좌파 내 숙청 작업에 아나키스트들이 대러시아 내부 아나키스트 서클 탄압, 크론슈타트 봉기 진압, 우크라이나의 마흐노 흑군 탄압을 통해 하나둘씩 쓸려가는 꼴을 말년에 구경해야했었다. 크로포트킨 본인은 이 시대 쯤 오면 사상적, 계파적 분열을 초월한 러시아 혁명가 전체의 대선배 대원로 대접을 받아 직접적으로 해코지 당하기에는 본인의 위상이 너무 높았으나, 정치적 탄압과 갈수록 노골적인 볼셰비키 일당독재에 관하여 레닌에게 지속적으로 한 항의는 묵살 당하고, 결국 1921년 2월에 있었던 그의 장례식은 레닌의 특별한 허락 아래 소련 역사상 거의 유일하게 공개적으로 반볼셰비키, 반정부 구호, 플래카드, 선동 등이 동원 된 소련 붕괴 이전 최후의 반정부 집회이자 이때만 하더라도 마르크스주의 만큼이나 러시아 혁명 사상에 큰 역할을 했던 러시아 아나키스트들의 마지막 공개 집회가 되었다.

4 그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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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포트킨을 유럽에 널리 알린 상호부조(Mutual Aid, a Factor of Evolution, 1902)는 걸작의 반열에 올랐으며 다윈주의에서 파생된 적자생존을 비판하며 인간은 상호부조를 통해 발전 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적재산을 부정하고 4~5시간의 필요노동만을 하고 필요한 만큼 창고에서 꺼내가는 무상분배를 주장했다.

공산주의와 얼핏 비슷해 보이나 결코 화합할 수 없는 이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공산주의는 궁극적으로는 공산주의가 군대와 정부, 국가가 사라진 노동자 중심의 이상사회로 귀결될 것이지만,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한시적으로 중앙집권효율성을 강조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필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아나키즘 입장에서는 권위주의적 공산주의는 철학적으로 모순 그 자체이며, 마르크스주의에 기반한 공산주의는 권력의 자기 보존 본능에 따라 새로운 형태의 영구적 봉건제의 실현을 초래할 수 밖에 없으므로 애초에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단어 자체가 철학적 사기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따라서 아나키스트들은 마르크스공산당 선언을 발표한 순간부터 마르크스식 공산주의는 사이비종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고 강하게 비난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의 관점에 따르면, 혁명에 대한 방법론 이외에는 공산주의의 어떤 것도 아나키즘과 비교 대상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자유에 따르는 책임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했으며 군대, 종교, 계급, 감옥(처벌방법), 화폐의 가치와 사적소유 또한 부정함과 동시에 관념론적인 모든 구질서를 부정하였고 범죄자 자체도 사회적, 정신적, 교육적 치료 대상일 뿐이라고 생각했으며 소유물 자체가 없기 때문에 가치에 기반한 절도 범죄도 없앨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요약하자면 그는 유물론적 자연법칙을 통해서 인간중심의 세상을 실현하고,사적재산을 부정함으로서 평등한 세상이 올 것이라고 생각한 급진적인 유물철학사상을 가진 인물이였다.

크로포트킨은 무정부 공산주의의 시초로 평가된다. 그는 집산주의와 공동소유를 강조했고, 이러한 방식은 훗날 사회주의 운동가들에게 지역 단위의 조합 설립과 공동작업장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이는 모택동 시기의 인민공사에 고스란히 영향을 주었고,[3] 모택동주의의 영향을 받은 북한에도 지역조합 설립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4] 또한 이 당시 막 태동기에 있었던 스페인 전국 노동 연맹 소속 아나키스트들에게 큰 영향을 주어 훗날 스페인 내전 당시 혁명적 노동 자치 꼬뮨들의 형성에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현대까지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크로포트킨의 사상에 기반하여 생태주의적, 성해방주의적 관점을 더 덛붙힌 미국의 아나키스트 사회운동가 머레이 북친의 사상에 터키에서 장기수 신세에 있는 쿠르드족 독립 운동가 압둘라 오잘란이 투신하여 지금 벌어지는 시리아 내전의 로자바 쿠르드 독립군에게 영향을 주었다.

5 여담

일반인들에게 아나키즘은 체계도 없는 공산주의 분파나 상대주의라고 오해 받고 있는대 이건 명백한 오류이며 아나키즘에 대해서 전혀 이해 조차 못하고 있는것이다.사실 19세기 마르크스주의에 기반한 공산주의가 태동할 시절부터 마르크스식 공산주의에 모순을 발견하고 철학적,과학적 모순점을 가장 신랄하게 비판했던 세력은 자본가도 아니였고 귀족도 아니였으며 제국주의 세력도 아닌 아나키스트였다.

19세기 출현했던 여러 사상들의 집합접은 헤겔관념론이였다는 데에 이의가 없을 것이다. 이때 청년 헤겔파 중심으로 여러가지 조류 중 두 가지 큰 조류가 생겨 났는데 한쪽은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을 수용하고 헤겔의 관념철학을 비판한 카를 마르크스였고 한쪽은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조차 관념적이라고 비판하며 헤겔의 관념철학을 비판한 막스 슈티르너다.

이때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 태제를 발표하면서 마르크스주의 체계를 만들기 시작했고 슈티르너유일자의 그 소유를 발표하면서 아나키즘의 철학적 기틀을 제공했다. 그 후 슈티르너의 유물철학은 프루동, 미하일 바쿠닌, 크로포트킨 등이 당대의 좌파 프롤레타리아 노동 해방 운동과 접목 시키면서 공산주의, 사회주의와 궤도를 공유하는 좌파 이데올로기 중 하나로 부상한 것이다. 이런 아나키스트 사상 체계는 이후 스페인 내전 당시 전국 노동 연맹을 주축으로 이루어진 사회 혁명을 기점으로 20세기까지 이어져 대표적으로 파이어아벤트촘스키 같은 학자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고, 21세기에도 살아있는 철학적 주제이며 현대 과학에 근본적 사상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반면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은 19세기에 이미 아나키스트들에게 그 모순점이 신랄하게 비판되었으며 현대에 와서는 철학적으로 관심에서 벗어난 주제가 되었다. 말하자면 아나키즘은 정치사회적 이데올로기로서의 방향성은 마르크스-엥겔스 철학에 기반한 공산주의와 궤적을 같이 하나, 그 사상적, 철학적 기반은 뿌리 자체가 마르크스가 나온 계몽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계몽주의의 이성 절대적 관점에 반발하여 역사적 순간 순간에서의 인간의 자발성과 다양성을 강조한 반계몽주의 좌파에서 나왔다고 보는게 맞다. 자세한 내용은 아나키즘 문서 참조.

경쟁과 개인주의를 조장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연구해 볼만한 사상가이다.

6 대표 저서

  • Mutual Aids - 국내에는 수 차례 번역되었다. 일제시대부터 해방 후 까지 활동한 몇 안되는 아나키스트였던 허유 하기락 선생이 해방 후 최초로 1983년에 번역하였고(당시 제목은 상호부조론), 현재에는 "만물은 서로 돕는다", "상호부조 진화론"등의 제목으로 다양하게 번역이 되어 있다.
  • A Memoir of a revolutionary - 국내에는 1985년 한겨레 출판사에서 하기락 선생에 의해 처음 번역되었고, 현재는 크로포트킨 자서전, 어느 혁명가의 회상 등의 제목으로 다양하게 번역되었다.
  • Fields, Factories and Workshops - 이 책은 국내에는 1993년, 역시 하기락 선생에 의해 "정원, 공장, 작업장"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번역되었다. 아쉽게도 이 이후 번역된 바 없다. 도서관에나 가야 구할 수 있을듯.
  • In russian and french prisons - 크로포트킨의 옥중수기.
  • 아나키즘 - 크로포트킨의 논문 5개를 묶어서 번역해서 국내에 출간된 책의 제목.#
  • The Conquest of Bread - "빵의 쟁취" 라는 제목으로 행성B에서 출판했다.
  • An Appeal To The Young - 진보신당 대표를 역임한 홍세화씨가 "청년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했다.
  1. democratic confederalism
  2. 농노를 무려 2000명 이나 가지고 있는 귀족 가문이었다.
  3. 모택동도 시기가 시기인 만큼 신해혁명 직후에는 "나는 무정부주의자다"라고 이야기를 하던 시기가 있었으며, 아나키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4. 여담으로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김일성도 크로포트킨의 저서를 읽었다고 한다. 해방 직후, 김일성의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던 일본인들에게 마르크스와 크로포트킨의 책을 전달했다는 일화가 있다(...). # 김일성이 일본 공산당 기관지 '赤旗'(아카하타)를 보면서 당시 공산당 당수 노사카 산조를 대단한 사람이라고 일본인 가정부들에게 설명했다. 그러자 일본인 가정부들은 "이제 일본도 공산국가가 되었나"하며 울었다고 한다(...). 그러자 김일성이 "공산당이 싫어요?"하고 물었고, 가정부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계면쩍었는지 김일성은 허허 웃더니 며칠 뒤 일본인 가정부들에게 일어판 마르크스 책과 크로포트킨 책을 건네주었다고 한다(...). 도대체 크로포트킨을 어떻게 읽었으면 공산주의를 빙자한 인종적 순수주의에 집착하는 봉건 왕국을 만들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