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 문서 : 허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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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슨슈 갱롁
취소선이 안 보이는건 기분탓이다
갱남고덩핵꾜 - 샹업은행 야구단 - 고레대학교 븝학과 - 한일은행 야구단. 햰얙 때 포지숀은 내야수. 특히 2루수가 주 포지숀이어쓰요.
1967년 제 21회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우승한 후. 등번호 3번이 허구연이다. |
경남고등학교 시절 허구연. 참고로 1960년대라 경남고 건물이 목조 건축물이었다. |
갱남고 시즐부터 준슈한 뱃띵 능렉을 지닌 슨슈다, 라고 팽가할수 있게쓰요. 졔가 1학년이든 츤구백육십췰(1967)년에 항금샤쟈기에서 팀을 우싕으로 이끌면서 주목받기 시작해쓰요. 층소는대표-국가대표 테크를 그쳈는데, 즈는 공부를 하고 싶읐는데[1] 샹업은행 야구단이 '흐구옌이 입단하면 팀 동료들을 샹업은행에 늫어주겠다'고 통보헀고, 이에 우리 갱남고 감독이 나를 설득해가 츤구백췰십(1970)년 샹업은행 야구단에서 뛰게 되어쓰요. 그러나 나는 공부를 드- 하고 싶읐으요. 야구단에 있던 시기에도 공부를 했으나, 구단에서 예비고사를 응시하지 못하게 했고, 결국 츤구백췰십일(1971)년에 고레대학교 쳬육학과[2]로 진학하믄서 팀을 나왔으요. 고레대 체육과에 입학한 나는 고레대 야구부 4븐을 칐는데 이는 고레대 야구부 옉사상 츠음으로 1학넨이 4븐타자로 기용됐다라고 할 수 있겠으요.
고려대 시절 허구연 |
1974년 고연전 당시 각 종목별 주장들 사진. 앞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허구연 |
알려주지않아도 될것같아... 한결같으시네요...
그러나 쳬육과의 턱성상 공부와는 거리가 므-은 분위기였고 그게 마음에 안 들었던 나는 낮에는 즌공과목을 공부하면서 야구옌습도 하고, 옌습을 마치므는 밤에 도셔관에 죽치고 앉아서 공부하는 옐의를 보였고 몰래 예비고사를 다시 응시하여 고레대 븝과대학으로 옮깄으요.[3] 그래서 고레대학교 븝과대학 72학번인데, 이 때 냬 인기는 샹당했다라고 팽가할 수 있으요. 남자다운 외모에[4] 학챵시절부터 밸멩이 뱅마 탄 왕쟈님이었고 이화예자대학교에서는 7개 학과 옌합 팬클릅이 존재할 증도였으요.
고레대학교 졸업 후 한일은행 야구단[5]에 입단하여 미샤일 타선의 일원으로 활약하는 등, 실읍 무대에서도 잘 나가는가 싶읐는데... 문졔는 그 젼셩기 때 일어나쓰요. 츤구백췰십육(1976)년 대즌에서 열린 한일 올스타즌에서 슨슈 섕맹을 위햽하는 큰 부샹을 입은 긋인데,[6] 당시 2아웃 주자 1루인 상황에서 팽범한 유곅슈 땅뽈을 유곅슈가 1루로 던지지 않고 2루로 송구, 응겝겔에 2루에서 공을 받은 2루수인 내가 후속 동작을 취하지 못한 와중에 일본 팀 1루 주자의 거친 스라이딩에 받히면셔 내 증걍이뼈가 그대로 작살났으요ㅠㅠ. 당시 공쥬고에 쟤학중이었던 깅갱문이가 이 걩기를 직관하고 있었는데 부딪힐 때 '빡'소리가 걩기쟝 전체를 울릴 정도였다고 하니 음-층난 충돌이었던 셈이 아닐슈 읎으요. 당시 구급차가 읎으서 야전용 들것에 실려나갔고이떄는 지금보다 인뿌라가 증말 많이 열악했으요, 이때 다리가 들릉그릴 증도로 심한 뷰상이었는데, 대즌에서 스울까지 올라오는 차안에서 마취를 했음에도 음층난 고통을 느꼈으요. 이후 4차례의 슈술 끝에 겨우 일상섕할이 가능한 정도로 회복되었으요. 츤구백췰십팔(1978)년, 인뿌라도재활시스템도 제대로 읎든 시졀에 잘 뛰지도 못하는 나를 김엉령 감독이 대타로 기용했고 그 타셕에서 홈런을 쳤는데 그것이 내 슨슈섕할 마지막 타석이었으요. 같은 해 5월 김감독이 말렸으나 졍샹적인 걸음도 완벽하지 않은 샹태였기에 어사의 권유대로 언퇴를 했으요.
1.1 평어체
경남고등학교 - 샹업은행 야구단 - 고려대학교 법학과 - 한일은행 야구단. 현역 때 포지션은 내야수. 특히 2루수가 주 포지션이었다.
1967년 제 21회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우승한 후. 등번호 3번이 허구연이다. |
경남고등학교 시절 허구연. 참고로 1960년대라 경남고 건물이 목조 건축물이었다. |
경남고 시즐부터 준수한 배팅 능력을 지닌 선수였다. 1학년이던 1967년에 황금사자기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청소년대표-국가대표 테크를 거친 엘리트 선수로 활약하던 도중 공부가 하고 싶었던 허구연이었지만[7] 상업은행에서 "너가 오면 경남고 팀 동료들을 샹업은행에 넣어주겠다"고 통보헀고, 이에 경남고 감독의 설득에 1970년 상업은행 야구단에서 뛰게 되었다. 그러나 공부를 하고싶었던 허구연은 야구단에 있던 시기에도 공부를 했으나, 구단에서 예비고사를 응시하지 못하게 했고, 결국 1971년에 고레대학교 쳬육학과[8]로 진학하면서 팀을 나왔다. 고려대 체육과에 입학한 허구연은 고려대 야구부 4븐을 칐는데 이는 고려대 야구부 역사상 처음으로 1학년이 4번타자로 기용된것이다.
고려대 시절 허구연 |
1974년 고연전 당시 각 종목별 주장들 사진. 앞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허구연 |
알려주지않아도 될것같아... 한결같으시네요...
그러나 체육학과의 특성상 공부와는 거리가 먼 분위기였고 그게 마음에 안 들었던 허구연은 낮에는 전공과목을 공부하면서 야구연습도 하고, 연습을 마치면 밤에 도서관에 죽치고 앉아서 공부하는 열의를 보였고 몰래 예비고사를 다시 응시하여 고려대 법과대학으로 재입학 했다.[9] 그래서 고려대 법과대학 72학번이 되었는데, 이 때 허구연의 인기는 샹당했다고 한다. 남자다운 외모에[10] 학챵시절부터 별명이 백마 탄 왕쟈님이었고 이화여자대학교에서는 7개 학과 연합 팬클럽이 존재할 정도였다.
고려대학교 졸업 후 한일은행 야구단[11]에 입단하여 미샤일 타선의 일원으로 활약하는 등, 실업 무대에서도 잘 나가는가 싶었는데... 문졔는 전성기때 발생했다. 1976년 대전광역시에서 열린 한일 올스타전에서 선수 생명을 위협하는 큰 부샹을 입은 것.[12] 당시 2아웃 주자 1루인 상황에서 평범한 유격수 땅볼을 유격슈가 1루로 던지지 않고 2루로 송구했고, 엉겹결에 2루에서 공을 받은 2루수인 허구연이 후속 동작을 취하지 못한 와중에 일본 팀 1루 주자의 거친 슬라이딩에 받히면셔 정강이뼈가 바스라 진 부상을 입은 것. 당시 공주고에 쟤학중이었던 김경문이 이 경기를 직관하고 있었는데 부딪힐 때 '빡'소리가 경기쟝 전체를 울릴 정도였다고 하니 엄청난 충격이었다. 당시 구급차가 없으서 야전용 들것에 실려나갔고, 이때 다리가 덜렁거릴 정도로 심한 부상이었는데, 대전에서 서울까지 올라오는 차안에서 마취를 했음에도 엄청난 고통을 느꼈다고 한다. 이후 4차례의 수술 끝에 겨우 일상섕할이 가능한 정도로 회복되었고 1978년, 재활시스템도 제대로 없던 시졀에 잘 뛰지도 못하는 나를 김응용 감독이 대타로 기용했고 그 타셕에서 홈런을 쳤는데 그것이 허구연의 마지막 타석이었다. 같은 해 5월 김감독이 말렸으나 정상적인 걸음도 완벽하지 않은 샹태였기에 의사의 권유대로 은퇴를 했다.
2 선수은퇴 후
한일은행에서 선수 은퇴는 해도 은행 일은 계속 하길 바랐으나 자신과 맞지 않다고 거절하였다. 그 후 추가수술 등으로 1년 넘게 병원생활을 하면서 책을 보다가 학구열에 불타 아예 대학원에 도전을 하였는데, 하루 8~10시간씩 병상에서 공부하는 열의를 보인 끝에 1979년 고려대학교 대학원 법학과에 입학했다. 본인 기억으로는 53명 응시 13명 합격이라고.
참고로 허구연의 고려대학교 대학원 입학당시에는 학부 입학 때보다 더 난리였고, 덕분에 당시 법과대 학장의 총애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대학원은 학부와 달라 만만한 곳이 아니다'라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는 사람도 있어서 매우 열심히 했다고 한다. 그리고 1981년 2월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법학석사 학위를 취득했는데, 전공은 상법으로 이윤영 교수가 지도교수였으며 석사학위 논문은 「이사회 제도에 관한 연구」였다. 당시 프로야구가 없었기에 내심 교수의 인생을 꿈꾸기도 했었다고.[13]
참고로 본인이 밝히지 않아서 아는 사람이 없는데, 허구연은 회사생활을 하였다. 금성계전(주)[14]을 다니면서 대학원을 다녔던 건데 심지어 그러면서 결혼까지 한 능력자였다. 회사에서는 인기도 좋고 일도 잘 해서 서로 자기 부서로 데려가려고 했으며 친화력이 좋고 유머감각이 있었다고 한다. 사내 야구 동호회를 만들어 대회에 나가 선수 겸 감독으로서 우승도 쉽게 하자 경기에 직접 나오지 말라는 상대팀의 불만까지 생긴 적이 있었다고. ## 허구연이 회사를 떠난 것은 1984년이라고 하니 회사원이면서 동시에 얼마나 많은 일을 해낸 사람인지 알 수 있다.
경기대학교 법학 강의를 하는등 강단에서 활동하다가 1982년 KBO 리그 원년부터 MBC 야구 해설위원이 되어 KBO 리그 중계활동을 하며 야구팬들에게 해설가 허구연으로 다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추가하자면 프로야구 출범 전에도 간간히 해설을 해왔다.
초창기 故 김용 MBC 아나운서와 함께 잘생겼다!!
3 지도자 갱롁
청보 핀토스 역대 감독 | ||||
김진영 (1983~1985) | → | 허구연 (1986) | → | 강태정[15] (1987~1988) |
역대 전적 | ||||
팀 | 경기 | 승 | 패 | 무 |
총계 | 57 | 15 | 40 | 2 |
파일:Attachment/허구연/Example.jpg
슈빈아 식샤하자 오늘은 밥이 증말 잘대쓰요
청보 핀토스 감독 시절
1985년 시즌 중에 MBC 청룡으로부터 감독 오퍼가 왔지만 본인이 고사했다.# MBC 이웅희 사장이 독대를 여러 번 하면서 감독을 해달라고 했으나 거절하다가 결정적으로 당시 MBC 청룡의 감독이자 허구연으로서는 경남고 은사인 어우홍 감독을 내리고 어떻게 자기가 그 자리로 가겠느냐고 말해서 MBC 감독 제의는 그렇게 끝났다.
그러다가 삼미 슈퍼스타즈를 인수하여 청보 핀토스를 창단한 풍한방직 회장이던 김정우 구단주는 1985년 시즌 종료 후 김진영 감독을 낙마시키고 참신한 인물을 감독 후보로 탐색했는데, 그의 눈에 들어온 이가 당시 야구해설가로 해박한 이론을 자랑하던 허구연이었으니, 당시 허구연의 나이 불과 35세[16]로 감독으로서는 젊다 못해 새파란 나이였다. 부상 외에는 늘 순탄한 선수생활을 해 온 허구연은 한 번은 고생하자는 심정으로 청보 감독에 취임한다. 그리고 MBC로부터 해설자도 잃고 새 감독도 잃었다면서 서운한 소리를 듣는다. MBC와 비교할 수 없는 약체였지만 허구연은 김명성, 강태정 등 야구 선배들을 코치진으로 거느리고 한번 해보자는 심정으로 1986년 시즌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개막전부터 내리 7연패를 당하는 등 8승 23패란 처참한 성적을 거두고 전기리그 도중인 5월 11일, 휴양이라는 명목으로 강태정 수석코치에게 감독대행을 맡기고 일본 단기연수를 다녀왔다. 이후 6월 18일 후기리그 개막 후 감독에 복귀하였지만 7승 2무 17패라는 전기리그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성과를 남긴 채 사의를 표명하였다(…) 그리고 청보는 허구연 임기 전이나 후나 역시 못 하는 팀이었다.
받아라 오심심판아 퍽
경기 중 사진이라고 남아있는 것은 온통 빡쳐있는 것들 뿐... 참고로 이 당시 나이 35세이시다
프로야구 감독으로서의 경력은 2015년 기준으로 1986년이 유일하고 전후기를 합산한 통산 성적은 15승 2무 40패. 승률 0.273[17]이다(…) 그래서 인천팬들 사이에 "허구헌날 지는 허구연"이란 드립이 한때 유행하기도 했다고. 당시 삼성 라이온즈의 감독이었던 김영덕은 그런 허구연에게 "구연아, 프로 감독은 무조건 센 팀에서 하는거다."라는 희대의 명언를 남기기도 했다. 특히 첫 감독직은
역시 제 3자 입장에서 야구를 논하는 것과 현장에서 직접 지휘를 하는 것은 넘사벽급의 괴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롯데팬들의 양가놈이 이런 사례를 한번 더 남겼다. 이쪽은 현장에서 먼저 뛰었지만 근데 2014년 LG는... 허구연 자신도 가끔 해설 도중에 청보 시절의 이야기가 나오면 매우 좋아하지 않는 기색이 역력하며, 자신에게 상당히 아픈 기억이라고 털어놓았다. 허구연 야구 인생 최대의 흑역사로 남아 있는듯.[18] 실패의 이유를 코치 등 실전 지도자 경험 없이 현장에 바로 뛰어든 것을 들었다. 또 자신은 감독에게 필요한 단호하고 모진 성격을 가지지 않아서 애초에 자리와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고.
훗날의 인터뷰에서 회고하길, 당시 주심들이 "허구연에게 지면 안된다"라고 하여 청보 핀토스에 불공정한 편파판정을 내리는 경우가 많아서 마음 고생이 매우 심했다고 한다. # 이후 2015년 5월 30일 한화 이글스 대 롯데 자이언츠와의 해설에 참여했을 당시에도 옆에 같이 해설하던 정민철이 표를 구하지 못 해 문수 야구장 외야석 뒤에서 야구를 관람하는 사람들을 쳐다보며 숭의야구장[19] 이야기로 화제를 바꾸려는 순간, 청보 감독 시절이 떠오른 나머지 숭의야구장 이야기를 하고 있는 정민철의 입을 다급하게 막은 적도 있었다.
파일:Attachment/lottegura.jpg
1987년부터 3년 동안 롯데 자이언츠 코치직을 맡았는데 재임 마지막 해 롯데의 성적은 꼴찌…. 이후 1년 간 토론토 블루제이스 마이너 팀에서 지도자 연수를 받은 후 1991년 다시 해설계로 복귀하였다.
이후 섬성 LG 모팀과 현대까지 4개의 팀에서 감독 제의가 왔으나 감독 경험에서 느낀것이 있어서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지도자 이외의 곳에서 야구계에 헌신하려는 목표가 있었다. 현대가 태평양을 인수해 프로야구에 진입했을 때도 감독직 제의가 왔지만 거절했는데, 심지어 정부 고위 인사까지 찾아왔다고 한다. 정주영 현대 회장도 관심을 많이 보였던 상황. 결국 김재박을 감독으로 추천하는 것으로 마무리지었다. 김재박은 4번의 한국시리즈 우승과 1번의 준우승을 거두며 현명한 추천이었음을 입증하였다.[20]
여담으로 청보 감독 시절, 모기업의 청바지 브랜드 '핀토스' 광고에 출연한 전력이 있다. 진의 새바람이 불어온다!
4 해설자 갱롁
육중완 닮았다.
1982년 MBC 야구 해설위원을 맡아 1985년까지 활동하다 1986년에서 1989년까지 감독, 코치 등을 맡아 잠시 공백기를 갖고 난 이후 1991년부터 현재까지 해설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1990년대에는 KBS에서 야구 해설을 담당하던 하일성과 더불어 대표적인 야구 해설위원이었으나, 대중적인 인지도와 선호도에서는 하일성에게 많이 밀리는 편이었고, 그 때문에 해설계의 2인자라는 이미지가 강하였다.[21] 허나 변화구 그립이나 해외야구의 흐름 등 접하기 쉽지 않은 지식을 전달해주는 역할을 하였기에, 당시 일부 젊은 야구팬층에서는 더 지지를 받기도 하였다.
2000년대 중반, 하일성이 KBO 사무총장에 임명되며 해설계를 잠시 비운 사이에도 허구연은 계속 야구중계를 하였는데, 많은 젊은 해설위원들과 비교되며 비판을 받기도 하였으나, 오랜 해설 경력과 국제 경기 중계에서의 좋은 반응, 그리고 국내의 열악한 야구 환경에 대한 거침없는 쓴소리로 많은 지지를 받아 해설계의 1인자 자리에 올랐다고 평가받기도 하였다.
2000년대 후반 하일성이 해설계에 복귀하고, 허구연 본인의 해설 방식에 대한 논란[22]이 야구팬들 및 커뮤니티 사이에서 많이 부각되면서 2000년대 초중반기에 비해 그의 해설에 대한 선호도가 많이 떨어진 상태이다.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야구팬들로부터 편파 중계가 매우 심하다고 평가받는다. 엘롯기 같은 팬이 많은 인기팀들은 상당히 편파적으로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반면, 샴셩 라이온즈, 하나 이글쓰, 에쑤께이 와이반슈, 녝쉔 히로즈 등은 상당히 편파적으로 마치 WBC같은 국제대회 때 일본戰에서 일본 팀 바라보듯 해설 중계한다는 원성이 많았다.
그래도 2014년에는 삼성 라이온즈도 젊은 선수들의 활약 덕에 호의적인 해설을 해 주는 편.
여담으로 LG에서 은퇴한 차명석을 해설가로 이끈 장본인이기도 하다. 2014시즌 이후 FA가 되지만 본인과 방송사 모두 재계약을 원하고 있기에 잔류가 유력하다.
5 기타 갱롁
- 1991년 국내 최초 ARS 스포츠 정보 서비스 업체를 창업해서 성공을 했다.
- 2000년 일간스포츠와 함께 '허구연 야구발전 장학회' 설립했다. 2002년에는 야구정보회사인 KSN주식회사의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기간에는 직접 기자 역할까지 겸하며 선수단을 인터뷰하고 다음 경기 전망을 해설하기도 했다.
그나마 일반인에 가까운 발음평소에 루헨진으로 발음하던 걸 류현진이라고 발음할 정도였다!그러나 콘디숀 발음은 어쩔 수 없었다.
- 2009년 MBC 연기대상에서 공로상을 받았다. 윤태영이 나온 주말 드라마인 2009 외인구단에서 구수한 해설을 한 공로로 받았다(…).
- 2010년 3월부터 일구회 부회장을 맡게 되었다.
- 2011년 7월 22일 목동 야구장에서 한국 고교야구 부흥 및 1976년 청룡기 대회의 재대결의 의미로 가진 군산상고와 경남고 레전드 리매치에서 경남고 감독으로 나왔다. 이날 경기는 경남고가 스코어 4:0까지 앞서다 5회에 들어와 군산상고가 단번에 4:4로 동점을 만든 뒤 다음 회에 역전, 결국 5:7로 경기가 끝났다. 5회에 동점을 허용했을 때의 감독 허구연의 표정은 심히 압권(…). 국내야구 갤러리에서는 그 표정 때문에 개념글에 갔다. 사나이 눈물.JPG
사나이 눈물 약하다 욕하지마, 허구라 고급 표정, 허구라 공황장애허황장애, 요리왕 허구라 등(...) 여담으로 이 레전드 리매치는 최동원이 살아 생전 대중들에게 마지막으로 모습을 보였던 행사였다.
- 야구에 대한 대중 해설서를 몇 권 집필한 적이 있다. '프로야구 10배 즐기기', '허구연의 야구', '여성을 위한 야구 설명서' 등이 있다.
- ↑ 참고로 5남매 중 4남으로 태어났는데 위의 세 형들은 전부 서울대 상대, 공대를 입학한 엘리트 들이었다. 그래서 집안에서는 허구연이 야구를 하지 말고 서울대 법대로 가기를 원했다고.
고려대 법대로 퉁쳤다. - ↑ 당시에 예비고사를 응시하지 않으면 갈 수 있는 곳이 체육과 뿐이었다고 한다.
- ↑ [1] "체육과"를 특기자로 들어간 거고 법학과는 공부해서 간것이다.
- ↑ 당시에는 요즘같은 꽃미남형 얼굴보다 남자답고 선이 강한 외모를 더 선호했다. 나훈아나 남진만 봐도 진한 눈썹에 얼굴이 정말 날카롭다. 신영균(1번 항목)이나 남궁원 등 당시의 인기배우들도 선 굵은 호남형 스타일이 대세.
- ↑ 한국상업은행과 한일은행 전부 우리은행의 전신이라 우리은행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
- ↑ 이때 1·2차전에서는 한국팀의 유일한 타점을 모두 허구연이 기록했다. 그리고 3차전 가던 도중에 꿈자리가 뒤숭숭해 감독님에게 오늘만 빼달라고 했는데 감독이 "지금 네가 제일 잘치니까 한 타석만 더 서라."라는 지시를 내렸고... 그 결과...
- ↑ 참고로 5남매 중 4남으로 태어났는데 위의 세 형들은 전부 서울대 상대, 공대를 입학한 엘리트 들이었다. 그래서 집안에서는 허구연이 야구를 하지 말고 서울대 법대로 가기를 원했다고.
고려대 법대로 퉁쳤다. - ↑ 당시에 예비고사를 응시하지 않으면 갈 수 있는 곳이 체육과 뿐이었다고 한다.
- ↑ [2] "체육과"를 특기자로 들어간 거고 법학과는 공부해서 간것이다.
- ↑ 당시에는 요즘같은 꽃미남형 얼굴보다 남자답고 선이 강한 외모를 더 선호했다. 나훈아나 남진만 봐도 진한 눈썹에 얼굴이 정말 날카롭다. 신영균(1번 항목)이나 남궁원 등 당시의 인기배우들도 선 굵은 호남형 스타일이 대세.
- ↑ 한국상업은행과 한일은행 전부 우리은행의 전신이라 우리은행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
- ↑ 이때 1·2차전에서는 한국팀의 유일한 타점을 모두 허구연이 기록했다. 그리고 3차전 가던 도중에 꿈자리가 뒤숭숭해 감독님에게 오늘만 빼달라고 했는데 감독이 "지금 네가 제일 잘치니까 한 타석만 더 서라."라는 지시를 내렸고... 그 결과...
- ↑ 부상 이후 대학원 졸업까지의 내용이 완전하지 못한 이유는 오래되어서 주요 근거인 본인의 이야기가 약간 안 맞기 때문이다. 병원 생활을 하면서 공부한 부분은 78년 경기 복귀 전으로 추정되지만 대학원 진학 동기를 생각하면 은퇴 직후로 추정되므로 은퇴 후 추가수술을 하면서 공부한것지 확실하지가 않다.
- ↑ 현 LS산전. 당시 허구연은 인사과에서 근무했다.
- ↑ 시즌 도중 해임으로 임신근 코치 대행체제로 잔여 시즌 마무리.
- ↑ 그때도 그랬고 지금까지도 역대 최연소 감독 취임 기록으로 남아있다.
- ↑
백인천의 02롯데보다는 낫지만웬만한 선수들의 타율 수준이다.타격왕 김청보 - ↑ 실제로 태평양 돌핀스가 인천 연고팀 최초로 한국시리즈에 올랐을 당시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팀을 망쳐놓은 것 같아 태평양 경기만 보면 애잔하다는 얘기를 했었다.
- ↑ 그 당시 숭의야구장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인근의 광성고등학교 교문 쪽 언덕이나 옥상 등에 올라가서라도 몰래 야구를 관람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응? - ↑ 신동아 이영미의 스포츠 줌인 http://shindonga.donga.com/3/all/13/113343/1
- ↑ 무릎팍도사 출연 시에 건방진 도사가 이를 두고 계속 놀렸다.
- ↑ 특히 편파 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