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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청천(池靑天, 1888년 2월 15일 ~ 1957년 1월 15일)
이범석 장군과 더불어 한국 무장독립전쟁사의 양거두[1]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군인. 본명은 지대형(池大亨)이고 아명은 수봉(壽鳳), 호는 백산(白山), 자는 석규(錫奎)이다. 독립운동 때문에 도망을 다니다 보니 아무래도 이름을 자주 고칠 수 밖에 없었다. 지청천이라는 이름 이외에도 호나 자, 외가의 성인 이(李)를 이용하여 지수봉(池壽鳳), 지을규(池乙奎), 지석규(池錫奎) 이청천(李靑天), 이대형(李大亨) 등 여러 이름을 사용하였다.
2 상세
1888년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1908년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는데 당시에는 대한제국 군대해산이 이뤄진 뒤라 조선보병대 정도만이 유일하게 남은 군사조직이어서 사관학교에 들어가는 일이 쉽지 않았다. 1909년에는 육군무관학교마저 폐쇄되면서 1, 2학년 사관생도들은 일본 도쿄의 육군중앙유년학교[2]로 유학을 선택하거나 자퇴하게 되었다. 지청천은 일본으로 갔고 1914년에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이때 일본행을 택한 각오가 흠좀무한데,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마음으로 일본에 맞설 능력을 키우기 위해 갔다고 한다. 실제로도 졸업과 동시에 탈영, 만주로 넘어가 한평생을 독립군으로서 활동한다. 26기로 동기는 쿠리바야시 타다미치(1891년생), 이응준(1891년생), 홍사익(1889년생), 김경천(1888년)이 있다. 병과는 보병이었고 일본군 육군 장교로 근무하던 중에 동기 김경천과 함께 1919년에 남만주 삼원보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이 되었다. 망명 당시에 일본군 교범 등을 들고 갔다.
서로군정서 등에서 근무하면서 1920년 북만주에서 청산리 대첩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신흥무관학교를 폐쇄, 북만주로 이동하였다. 1930년대 중국의 호로군과 함께 한중연합작전을 펼쳐 쌍성보 전투, 대전자령 전투 등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일본의 만주사변으로 만주 전역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확대되어 감에 따라 만주에서 더이상 활동하기가 어렵게되자 지청천 장군은 중국본토로 이동, 1934년에 김구가 설립한 뤄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의 교관으로 활동하였으나, 김구와 갈등으로 결별, 1935년에 김규식, 김원봉과 접촉하여 조선민족혁명당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좌익 성향의 김원봉과 우익 성향의 그는 잘 맞지 않아 탈당하였고, 다시 김구의 한국독립당에 들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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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절 지청천. 오른쪽은 김구 선생.
1940년에 충칭으로 가, 임시정부 한국광복군에 창설에 참여하였다. 1942년 김원봉은 조선의용대를 데리고 광복군에 편입하였는데, 김원봉이 부사령관이었고 지청천은 총사령관이었다. 과거의 앙금 때문에 서로는 부대를 따로 돌렸고 이 때문에 지청천이 온전히 부대를 운용하지 못했다. 당시 장준하는 광복군 제2지대 소속으로 지청천의 밑에서 복무했다.[3]
광복이 이뤄지자 1946년에 귀국해 광복군을 재건하려고 하였으나 미군정의 반대로 실패하고 우익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단을 세웠다. 남북협상에 반대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했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 때 서울특별시 성동구로 출마하여 국회의원이 되었다. 대한국민당(1948년)에 대동청년단의 잔존 정치세력을 이끌고 합류하였다. 대한국민당(1948년)이 민주국민당(1949년)이 합류하면서 민주국민당에 합류하게 된다. 지청천은 당시 민주국민당의 최고위원으로 활동했다.
1957년 1월 15일에 급서하였다. 향년 68세.
3 여담
일제의 감시에 시달리던 1930~40년대 독립투사의 숙명과도 같이 가명을 꽤 많이 썼다. 그 중 지씨 대신 어머니의 성을 쓴 이청천이란 가명이 특히 많이 쓰였는데, 실제로 좀 오래된 기록이나 서적에는 본명 못지 않게 이청천이라는 이름으로도 많이 등장하며 적잖은 사람들은 아예 본명이 이청천이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나무위키의 본 문서 역시 이청천이라 검색해도 들어올 수 있다.
아들인 지달수와 지정계도 한국광복군에서 활동했고 뒤에 대한민국 국군에 입대하여 중령으로 전역했다.
그의 외손자인 이준식 교수는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핵심 인사중 한명이었고,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환수위원회에서 위원장으로 활동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