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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군사력 감축 배경
미군은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 당시 해외 주둔군 750만 명을 포함하여 1,200만여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242개의 항공단과 100척의 항공모함을 보유하고자 하였다. 동원해제가 마무리될 무렵인 1947년 6월말에는 육군 684,000명, 육군항공대 306,000명, 해군 498,000명, 해병대 93,000명 등 158여 만명이었다.
그러나 “병사들을 집으로 보내라(Bring Boys Home)"는 사회 각계 계층의 강압적인 요구에 의해 한국전쟁 발발 당시 미군은 146만 명까지 급속히 줄었다. 그 당시 소련은 175개 사단에 430만 명의 병력을 유지하였고 전쟁 잠재력 면에서도 1952년까지 475개 사단을 동원 할 수 있었다. 1950년 기준으로 소련과 세부적으로 비교하자면 다음과 같다.
체계 | 미군 | 소련군 |
병력 | 146만명 | 430만명 |
핵무기 | 295개 | 5개 |
항공모함 | 15척 | 0척 |
전략폭격기 | 114기 | 0기 |
국민총생산 | 2,500억 달러 | 650억 달러 |
철강생산 | 8천만톤 | 21만톤 |
알루미늄생산 | 61.7만톤 | 13만톤 |
경유생산 | 27.6만톤 | 3.3만톤 |
전략폭격기 중에서 미국의 B-36 전략폭격기는 핵무기 투발수단이다.
다만 미국에서는 단 몇 만 명 정도 죽는다면 여론이 악화되고 염전사상이 번져 전쟁 지속능력에 문제가 생길 수 있지만 소련은 성인 남자가 싹 날아가더라도 감당하는 게 불가능하지 않았다. 2차 대전까지는 별다른 문제가 안 되었지만 한국전쟁부터 시작되어 이후 베트남전과 이라크전, 아프간전까지 미국의 사망자 증가 -> 염전사상으로 이어지는 악성 도미노 현상은 미국으로서는 감당이 안 되었던 것이다.
한국전쟁 직후인 6월 30일 기준으로 미군 병력은 다음과 같다.
군종 | 인가병력 | 실병력 | 실병력비율 |
육군 | 837,000 | 593,167 | 70.8% |
해군/해병대 | 666,882 | 456,908 | 68.5% |
공군 | 502,000 | 411,227 | 82% |
전병력 | 2,005,882 | 1,461,352 | 72.8% |
육군은 59만 명(10개 사단)중 36만 명은 본토에 있었고 나머지 23만 명은 해외에서 점령군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이는 기본적으로 비용이 많이 드는 병력을 감축하여 운용하기 위해 핵/해/공군에 의존하는 전쟁 계획과 전략을 수립하였기 때문이다.
해외주둔 병력을 보자면 독일에 80,000명, 오스트리아에 9,500명, 베네치아 옆이자 이탈리아와 슬로베니아 국경에 접한 도시로 중부유럽을 배후에 둔 중요한 항구 도시인 트리에스테에 4,800명, 태평양 지역에 7,000명, 카리브 지역에 12,200명이 있다. 일본에 가장 많은 병력이 있었는데 108,500명이었다.
사단별로 보자면 본토에는 2기갑사단, 2보병사단, 3보병사단, 2공수사단, 11공수사단 등 5개 사단과 3기갑연대가 주둔하고 있으며, 유럽에 1개 사단, 1개 연대전투단, 3개 기갑연대, 1개 독립보병연대, 카리브 지역에 2개 독립보병연대가 있었고, 알레스카에 1개 보병연대, 하와이에 5연대전투단, 일본에는 4개 보병사단과 1개 연대 전투단이 주둔 중이었다. 해군은 총병력 337,000명에 함정 670척과 항공기 4,300대 보유, 공군은 411,000명에 48개 전투 비행단, 해병대는 74,000명이었다.
2 미국 극동지역의 군사력 규모
미국 극동군으로는 미 제8군을 비롯하여 미 극동해군과 미 극동 공군이 각각 일본 및 인근 도서지역에 주둔하고 있었다. 지중 요코하마에 사령부를 두고 있던 미 제8군은 2차 대전 중인 1944년 9월에 뉴기니와 레이테 전투에서 육군 전투부대를 통합 지휘하기 위하여 창설된 부대이다. 예하 부대로 1군단과 9군단이 있었지만 한국전쟁 발발 3개월 전인 50년 3월 28일 국방부 감축으로 군단이 해체되었다(...).
그리하여 바로 사단으로 넘어가는데 북쪽부터 보자면 홋카이도에 7보병사단, 혼슈 중부에 1기병사단, 혼슈 남부에 25보병사단, 큐슈에 24 보병사단, 오키나와에 29연대+제9방공 포병단이 있었다. 6월 25일 기준으로 인가병력중 93% 편성이라는 제법 준수한 편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2차대전 종전후 군에 들어와 전승국 병력으로 떠받들어지며 호의호식하느라 전투력이 떨어져서 그렇지 병력은 충분하였다. 이때 미군들은 일본에서 한반도에 나쁜 조선인이 산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얼마나 정신이 썩었냐면 미군이 일본에 있는데 북한군 따위가 감히 쳐들어 올 리 없다며 작전 계획 자체를 수립 안했을 정도이다.나의 맥아더 장군은 그렇지 않아
육군의 각 사단은 병력이 7천명이나 부족했고, 편제상으로는 3개 소총대대, 6개 중전차중대, 3개 105밀리 포대, 3개 대공포대가 부족하였다. 병력 부족과 빈번한 병력 교체로 전투 훈련을 제대로 실시하지 못하였다...고 하지만 그게 말이 되나? 사단장과 예하 연대가 수시로 바뀌던 한국군도 나름 연대급 훈련까지 했는데... 국방부 장관이 인민영웅 신성모장관이고 총참모장이 한국판 하후무 채병덕이라서 그렇지... 그래도 딘 소장이 이끄는 미 24사단과 김종오 사단장이 이끄는 국군 6사단을 비교했을 때 국군이 더 강해보인다면 기분 탓입니다
극동공군 전력은 18개 전투 및 전투폭격비행단, B-26 경폭격기로 편성된 1개 경폭격기 비행단, B-29 중폭격기로 편성된 1개 중폭격기 비행단, 그리고 몇 개의 병력 수송부대로 편성되었다. 극동공군의 주요부대로는 일본 나고야에 주둔한 제5공군, 필리핀 클라크 공군기지에 주둔한 13 공군, 오키나와 카데나 공군 기지에 주둔한 제20공군이 있었다.
극동해군은 해군 중장 찰스 조이 제독이 지휘하고 있었다. 미 극동해군에는 상륙부대의 핵심인 제90기동부대와 소수의 전투함정을 보유하고 있는 제96기동함대가 있었다. 이들 극동해군의 전력으로는 1척의 경순양함, 4척의 구축함, 6척의 어뢰정, 보조함 및 상륙용 주정을 보유하고 있었다.
위와는 별도로 필리핀 해역에 해군 중장 아더 스트러블 제독이 지휘하는 미 제7함대가 있었다. 보유 함정은 1척의 항공모함, 1척의 중순양함, 8척의 구축함, 3척의 잠수함이 있었다.
이상의 미 극동군 전력은 소련과의 전면전을 수행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었을지 몰라도, 북한을 상대로 한 한국전과 같은 국지전을 수행할 수 없을 정도로 군사력이 부족했던 것은 아니었다.
3 미국 합동참모본부의 한국에 대한 전략적 평가
미 합동전략분석위원회는 보고서에서 “미국의 국가안보에 중요한 지역을 주변지역(Peripheral)과 핵심지역(Vital)로 분류하고, 그 중요도에 따라 우선순위를 정한 후 여기에 맞춰 대외 원조를 실시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은 주변지역으로 분류 되었고 미국의 우선 지원 순위에서는 18개국 중 5위, 안보 우선순위에서는 16개국 중 15위였으며 이상 두 가지를 종합한 우선순위에서는 16개국 중 13위를 차지하였다.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1947년 9월 15일 한국의 군사 전략적 가치에 대한 평가를 해 달라는 국무부의 요청에 대한 9월 26일 답신에서 "한국은 군사적으로 전략적 가치가 낮다"라고 통고했다. 즉 합동참모본부는 "군사적 관점에서 한국에 군대나 기지를 유지할 전략적 가치가 거의 없다"고 말한 것이다.
또한 국무부, 육군부, 공군부, 해군부등 4부(Department)로 구성된 4부정책조정위원회에서도 "만약 극동지역에서 적대행위가 발생할 경우 현재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은 오히려 군사적 부담이 될 것이며, 적대행위가 발생하기 이전에도 주한미군의 전력을 실질적으로 보강하지 않고는 유사시 지탱하기 어려울 것", "장차 미국이 아시아 대륙에서 수행하게 될 어떠한 지상 작전도 한반도를 우회하게 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머리 아프니 국방성인지 국방부인지, 육군부인지 육군청인지 논쟁은 잠시 잊읍시다 참고로 4부정책조정위원회는 2차대전 때는 3부정책조정위원회였지만 육군항공대가 공군으로 독립하면서 4부가 되고 이후 1949년 6월에 NSC가 창설되며 폐지되었다.
주일미국대사를 지낸 에드윈 라이샤워 박사도 한국은 군사적인 견지에서 미국에 불필요한 국가라고 단정하면서, 한국의 공군기지는 소련지역과 가깝지도 않고 오키나와 기지처럼 안전하거나 편리하지도 않다고 하였다.
결국 1947년 9월 26일 합동참모본부의 판단은 "미군의 현 병력 수준이 명백히 부족함을 감안할 때 현재 한국에 주둔 중인 미군 2개 사단 총 4만 5천명의 군단 병력은 다른 지역으로 전용될 수 있다. 한국에서 이만큼의 병력을 철수시켜도 그 결과는 소련이 남한과 일본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대병력을 집결시키지 않는 한 미 극동군의 군사태세를 손상시킨다고 생각할 수 없다"였다.
종합하여 보자면 이 당시 미국은 소련과의 전면전 상황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느라 북한 등에 의한 국지전은 거의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소련과 전면전을 위해서는 차라리 주한미군 2개 사단을 후방으로 돌리는게 낫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즉, 남침유도설은 개소리라는 것이다
한편 이때 미군 극동사령관은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였다. 맥아더는 4부정책조정위원회의 육군참모총장 아이젠하워 원수마저 부관으로 9년간 굴렸을 정도로 탄탄한 경력을 자랑하는 장성이었다. 이 상황에서 맥아더가 한반도가 심상치 않다고 언급했으면 위의 기류를 변화시킬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여순사건 + 이승만 대통령 주특기인 미국에 징징 + 이범석 국방장관의 요청으로 한국 국회에서 미군주둔결의안 채택 크리 3단 콤보라는 한국 상황을 고려하여, 미국 국무부가 1949년 1월 25일 주한미군의 철수 완료 시한을 견기해줄 것을 정식으로 요청하자 합참에서는 맥아더에게 의견을 구했는데, 이에 맥아더는 "한국군이 공산주의자들이 도발하는 국내 소요와 전면적인 침략에 대처할 정도의 수준까지 장비 및 훈련 면에서는 아직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고 평가한 후 "한국에 있는 잔류 미군을 1949년 5월 10일까지 완전히 철수할 것"을 합참에 건의 하였다.
이에 최종결정타인 애치슨 국무장관의 1950년 1월 12일 전국 기자클럽 연설이 있었다.애치슨 선언(Acheson line declaration)이라고 쓰고 "웰컴 투 중공군"이라고 읽는다 대충 "알루샨 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까지는 미국 꺼임, 대만/한국/인도차이나는 제외한다"라는 뜻인데 한국 입장에서는 충격적인 선언이며, 김일성의 징징거림에 대한 스탈린의 한국전쟁 승인의 결정적인 계기라 고등학교 국사책에도 상세히 나와 있다. 덕분에 당시 대한민국 외교부 장관 이름이 임병직이라는 건 기억 못해도 미국 국무부 장관이 딘 애치슨이라는 건 외우게 되었다 이 서술은 애치슨 선언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애치슨 라인 항목에서 확인.
4 미국의 참전 논의
운명의 1950년 6월 25일. 한국 정부요인과 장성들만 휴일이라고 술먹고 처자고 있는게 아니라 미국의 주요 인사들 역시 휴일을 만끽하고 있었다. 미국 쪽에 더 우호적인 표현이 들어간 것처럼 느껴진다면 기분 탓이다. 사실 몇천km 떨어진 딴나라 사람이 휴일에 자든지 말든지 상관없잖아 애초에 6월 25일 새벽에 북한군이 쳐들어 온다는 정보부 및 전방 부대의 보고를 받고도 국방부 장관이 "신사는 일요일에 근무하지 않습니다."라면서 전화코드 뽑고 자는 행태는 도저히 곱게 봐줄 수가 없으니...
공식적으로 미국에 보고가 들어간 것은 주한미국대사 존 무초가 전쟁난지 7시간 26분 만에 미국무부에 전문을 보낸 것이고, 실질적으로는 UP통신의 서울주재특파원 잭 제임스 기자의 1보 → 워싱턴 본사 도널드 곤잘레스의 전쟁사실 여부 확인 요청 → 국무부 극동과 공보관 브래들리 커너스 → 그날 워싱턴에 남아있던 국무부 최고 책임자 러스크 차관보 루트로 최초 첩보를 받았다.
러스크 차관보는 당시 파티에 참석하고 있었고 페이스 육군 장관도 함께 있었다. 애치슨 국무장관은 주말을 맞이하여 메릴랜드의 개인농장에서 휴식중, 존슨 국방장관+합참의장은 버지니아 주 노포크에서 열린 민간 행사 참석중, 트루먼 대통령은 미주리주의 개인 저택에서 휴식중. 즉 주요 지휘라인이 죄다 부재중이었다. 이것은 미국은 북한의 침입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미국의 대응은 매우 신속하였다. UP통신의 확인 요청을 받고 국무부로 복귀한 러스크 차관보와 페이스 육군 장관은 6월 24일 22시 30분(한국시간 25일 12시 30분)에 무초 대사의 "북한이 지금까지 취한 공격의 성격과 수법으로 볼 때 그것은 대한민국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행위"라는 전문을 애치슨 국무장관에게 전화상으로 보고하고 이 문제를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상정하겠다고 말했다. 보고를 받은 애치슨 국무장관은 미주리 주 인디펜던스의 개인 저택에서 휴식을 취하던 트루먼 대통령에게, "대통령 각하! 중대한 뉴스입니다. 북한군이 남한을 침략하였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
보고를 받은 트루먼 대통령은 워싱턴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북한의 공격을 "제2차 세계대전을 유발했던 독일/이탈리아/일본의 침략과 그 성격이 유사하다."고 생각하였다. 알다시피 미영프소는 독일이 라인란트 점령 → 오스트리아 병합 → 체코 병합하는 동안 손가락 빨고 보고만 있었다. 또한 일본이 한국침략 → 만주침략 → 중국본토(상하이)침략하는 동안 역시 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제2차 세계대전.
결국 트루먼은 공산주의의 침공을 지금 차단하지 않으면 결국 3차대전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세계대전이라는 큰 희생을 치르기 전에 지금 바로 지원군을 투입하여 북한의 야욕을 막아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것은 미국과 UN이 참전하는 주요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 마가렛 히긴스 뉴욕 헤럴드 트리뷴 종군기자가 1951년(서문은 이미 1950년에 썼다. 덜덜…)에 쓴 <War In Korea>라는 책에서 이러한 사상이 잘 나와 있다. "독일이 유럽을 집어 삼키는 동안 가만히 있다가 미국은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공산주의가 우리 안방까지 쳐들어 올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지금 한반도에서 막아내자." 감사합니다. 히긴스 아줌마[1]
또한 트루먼이 비행기 타고 있을 때 이미 소련을 제외한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열리고 있었다. 미국의 그로스 대리대사가 "북한군은 물러가라! 그렇지 않으면 필요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결의안을 내고 장면 대사의 도움 요청이 들어오자 이사회는 미국의 결의안을 찬성 9대 기권 1표로 가결하였다. 기권은 누구게?소!련! 이 결의의 중요성은 미국이 유엔안보리의 결의에 따라 한국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트루먼이 워싱턴으로 복귀하고, 6월 25일 19시 40분에 미리 모여 있는 13명의 외교 국방 수뇌부와 회동하여 비공개 회의를 열고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다. 조낸 신속하다. 당사자인 대한민국은 27일 새벽 4시에 국무회의 열었는데. 히히 미국과의 시차가 얼마인지 알려고 하지 마라. 그딴거 알면 더 비참해진다[2] 싸우는건 참 열심히하는데 머리를 굴리는건 귀찮다.
1.맥아더 장군에게 한국에 조사단을 파견하도록 한다. 2.맥아더 장군에게 한국이 제안한 군수물자를 보내도록 한다. 3.이미 지시된 제7함대를 일본으로 파견한다. 4.미 공군은 극동지역에 있는 소련 공군기지를 제거할 계획을 수립한다. 5.소련의 다음 행동 지역이 어느 곳인가를 신중하게 판단하되, 이는 국무부와 국방부가 철저히 조사하여 판단한다. |
5 선전포고 논란
네이버 지식IN에서 자주 나오는 글이 "제가 듣기로 선전포고를 안하고 공격하면 전 세계 단합해서 그 나라를 공격한다는데 맞나요?"인데 정답은 "미국은 선전포고 같은거 모른다"이다. 사실 북한도 그렇고 일본도 그렇고 먼저 미국을 공격해서 그렇지 미국도 선전포고 할땐(?)한다. 아니, 2차 세계대전까지만 해도 미국은 전 세계에서 선전포고를 제일 까다롭게 하는 나라였다.[3] 지금은 시간에 쪼달리는 현대전 특성상 편법적으로 전쟁을 진행하고 있지만...
트루먼 대통령은 26일 아침에 그의 집무실에 있는 대형 지구본에 있는 한국을 가리키면서 "이곳은 극동의 그리스다. 만일 우리가 강경한 조치를 취하기만 하면 다음 단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으며 백악관을 방문한 상원외교위원회 위원장 톰 코널리 의원에게 "의회의 사전 승인 없이 한국에 미군을 투입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가?"라고 질문하자, 코널리 의원은 "만약 강도가 각하 집에 침입했다면 각하는 경찰서에 가서 허락을 받지 않고도 강도를 쏠 수 있습니다. 각하는 의회에서의 오랜 토의로 인해 두 손을 완전히 잡힐 수도 있습니다. 각하는 군 통수권을 가진 분으로서, 또 유엔 헌장 아래에서 그러한 행동을 위할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답변하였다. 정당방위
6 미군 투입 결정
서울이 함락 후인 50년 6월 28일(한국은 29일) 17시 국가안보회의 직전 있었던 대통령 기자회견에서 기자가 "미국의 한국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유엔의 경찰행위라고 부를 수 있느냐?"라고 하자 트루먼 대통령은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면서 "한국에서 미국의 행동은 악당들의 기습(Bunch of bandits)을 유엔이 격퇴시키는 것을 도우려고 취해진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이어진 국가안보회의에서 가능한 지상군을 배재하고, 될 수 있으면 소만 국경에서 멀리 떨어진 범위 내에서 해공군 위주의 소극적인 지원을 맥아더에게 지시했다. 그리고 방금 취한 결정이 한국 사태에 대처하는데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맥아더가 다음날 새벽인 6월 30일에 보낸 전문은 "자신이 한국전선을 시찰한 결과 한국군은 붕괴되었으며, 한강방어선을 고수하고 실지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미지상군 투입이 불가피하다"였다. 그러면서 세부적으로 연대 단위의 미국 전투 부대를 긴급 투입하고 이를 지원하기 위해 2개 사단 정도가 더 필요하다고 했다. 전문을 받은 콜린 육참총장은 오마 브래들리 장군과 상의 후 페이스 육군장관을 통해 대통령에게 건의하여 1개 연대 전투단만 투입하기로 했다. 그리고 국가안보회의와 이어진 의회지도자들에게 브리핑에서 맥아더 장군에게 확실한 지상부대를 사용할 권한을 부여하였다.
유엔 역시 잠자코 있지만은 않아서 59개 회원국 중 33개국이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안을 지지하면서 유엔의 깃발 아래 모였고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뉴질랜드, 네덜란드 등 6개 국가가 군대 파견을 약속하였다.
이 때까지만 해도 전방 사령관인 맥아더의 판단에 의해 2개 사단+1개 연대면 상황 끝일 것으로 예상했지만 아시발꿈이었다
7 미 해군의 한국전선 전개와 활동
한국전쟁 발발 당시 미 극동해군은 극동군 사령부의 일부였다. 당시 극동해군에는 상륙부대인 90기동부대와 소수의 전투함정을 보유하고 있는 96 기동부대가 있었다. 미 해군의 주력은 하와이의 태평양 함대사령부 예하 필리핀 주둔하고 있는 미 7함대 였다. 그러나 6월 27일부터 한국전쟁을 위해 극동해군 산하로 재 배속 되었다.
초대 극동해군 사령관은 찰스 터너 조이 해군중장으로 이후 휴전회담 개최시 유엔군 대표로 활동한다. 그리고 휴전회담 즈음인 52년 6월 4일에는 로버트 브리스코우 해군중장으로 교체되어 1954년 4월 2일까지 그 직책을 수행하게 된다.
한국전쟁 중 미 극동해군은 4개 작전 사령부를 통제하는데 다음과 같다.
- 제77기동부대(제7공격함대)는 빠른 항공모함을 이용하여 한국의 동해안에서 주로 작전 활동을 하였다.
- 제95기동부대(봉쇄 및 호위함대)는 주로 한국 서해안에서 활동하였다. 경항모, 호위항모, 해병항공대, 일부 동해안에서 활동하는 부대, 소해함대와 함께 유엔군과 한국해군도 모두 이쪽으로 배속 되었다.
- 제90기동부대(극동상륙군)는 포항 상륙작전, 인천상륙작전, 원산상륙작전, 흥남 철수 작전을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 제96기동부대(주일 미 해군)는 대잠수함 활동과 일본 내 미 해군 기지에 대한 방호임무를 수행하였다.
당시 미해군이 보유하고 있는 항모는 총 15척이었다. 여기에는 7척의 공격용 항공모함(CV), 4척의 경항공모함(CVL), 4척의 호위항공모함(CVE)이 있었다. 2차대전때 항모만 백척 이상 있지 않았나? 그래도 이만큼이라도 남아있는게 어디야 전쟁이 종결될 무렵에는 CV 17척, CVL 5척, CVE 12척등 총 34척으로 늘었다. 이중에서 한국전쟁에서는 정규 항공모함만 11척이 77기동함대에 배속되어 주로 한국 동해안에서 활동하였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11척의 항모는 모두 에식스급으로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USS 에식스 (CV-9), USS 복서 (CV-21), USS 본 홈 리처드 (CV-31), USS 레이테 (CV-32), USS 키어사지 (CV-33), USS 오리스카니 (CV-34), USS 앤티텀 (CV-36), USS 프린스턴 (CV-37), USS 레이크 챔플레인 (CV-39), USS 밸리 포지 (CV-45), USS 필리핀 시 (CV-47).
경항모 1척과 호위항모 5척은 제95기동부대 소속으로 해병항공편대와 함께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쪽은 서해안이 주 활동구역이었다. 구성은 인디펜던스급 경항모 USS 바탄(CVL-29)과 카사블랑카급 호위항모 USS 코레이도르 (CVE-58), USS 싯코 베이 (CVE-86), 커멘스먼트베이급 호위항모 USS 렌도버 (CVE-114), USS 시실리 (CVE-118), USS 포인트 크루즈 (CVE-119).
여기에 제95기동함대에 배속된 유엔군 항모가 호주의 시드니 호, 영국의 유니콘 호, 워리어 호, 글로리 호, 오션 호, 테세우스 호, 트라이엄프 호 등 총 7척이 있었다. 물론 북한+중공+소련 3형제에게는 항모는커녕 비슷하게 생긴 것도 없었으니 결국에는 지상폭격용 함재기 셔틀 역할을 하였다.
또한 기존에 있던 해군수송근무단과 육군수송단을 합쳐서 1949년 10월에 창설된 해상수송근무부대(MSTS) 화물 52,111,209톤, 유류 21,828,879톤, 인원 4,918,919명을 수송하여 천조국의 위상을 뿜어대며 한국전에 기여하였다.
항모를 제외한 아이오와급 전함들도 대활약하였는데 16인치 함포가 포함된 4백만발의 포탄을 발사 하여 지상군에 대한 화력 지원을 하였다. 한국측 수기에는 주로 미해군의 16인치 함포의 위력에 대한 기록이 많다.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 진지를 달세계처럼 만들어서 놀랐다던지 하는 식으로 기술되었다.
그에 반해 공산측 수기에는 신기하게 터널 뚫어놓고 그 안에 촛불만 켜놓고 있어도 불빛을 보고 정확하게 구멍 안으로 쏘아대는 항공기들 때문에 밤이고 낮이고 박살나는 얘기만 쓰여 있다. 추측하자면 함포 한방에 실내수영장이 제조되는 관계로 당시 공산측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없어서 수기로 작성되기 힘든 게 아닌가 싶다. 어쨌든 당시 한국군측 기록에서는 항공기보다는 주로 함포 사격의 위력과 고마움에 대해 자주 언급된다. 미 해군 장병들은 그 모습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저기 캐딜락이 날아간다"
이러한 지구방위대급 미 해군의 활약에 비해 미 해군이 받은 피해는 4척의 소해함정과 1척의 원양 예인선이 적 기뢰에 의해 침몰한 것이 전부일 정도로 거의 일방적인 게임이었다. 그 외 미 해군 함정 73척이 해안포대에서 발사된 화력과 기뢰에 의한 피해를 입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함정에 기스난 것까지 다 포함한 것으로 보인다. 애당초 전사자가 진주만 공습의 1/10도 안될 정도이니...
미 해군 항공대 소속인 제24항모항공단(CAG)은 정규함공모함 함재되어 해군 예비항공편대 22개를 포함하여 총 100개의 편대가 한국전에서 활약하였다. 이들과 지상기지 해병항공대는 미 공군 출격횟수인 392,139회의 70%에 달하는 275,912회 출격하여 북한-중공군을 항공기 공포증에 걸리게 만들었다. 피해는 적 대공화기에 의해 599대, 사고 등으로 인해 85대 등 총 684대가 손실을 입었으며, 피해를 입은 항공기는 전투기 400대, 공격기 140대, 관측기 12대, 헬기 8대, 초계기 2대, 순찰기 1대, 수송기 1대이다. 사망자가 거의 없는 걸로 보아 역시 기스난 것까지 포함한 것으로 추정된다.
미 해군의 전체 피해는 전사 364명, 사고사 등 128명이다.
8 미 공군의 한국전선 전개와 활동
가장 빠르게 한국전에 개입한 것은 미 공군이었다. 6월 26일에 북한군 야크기가 민간인 철수에 분주한 미수송기를 공격하자 F-82 트윈 머스탱이 출격하여 북한군 전투기 3대를 격추시켜 버렸다. 그럼 백선엽 장군이 6월 25일에 들었다는 괴방송 "미공군이 참전하고 있으며 전군이 북진하고 있으니 국민 여러분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시라"가 완전히 날조는 아니라는 것인가? 물론 미공군의 참전은 사실이겠으나 전선은 형편없이 밀리고 있었고 안심하라며 국민들을 내팽개치고 정부가 도주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 극동공군은 44개 편대, 항공기 657대, 33,625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69개 편대, 항공기 1,536대, 112,188명의 병력으로 확대된다. 초대 사령관은 조지 스트레이트 메이어 장군이며, 그가 1951년 5월에 심장마비로 물러나자 오토 웨이랜드 장군이 한국전쟁을 끝마칠 때까지 재임하였다.
미 극동공군은 한국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일본에 있는 15개 공군기지를 이용하고 한국 내에서는 55개의 비행장을 보수하거나 새로 건설하여 이용하였다. 다만 이중에서 평양에 설치된 K-24 공군기지는 포기하였다. 언제 다시 찾아오나... 아! 눈물이 앞을 가린다
당시 극동공군에는 일본 나고야에 제5공군, 필리핀 클라크 기지에 제13공군, 오키나와 나하의 카데나 공군기지에 제20공군이 있었지만 고유의 방위 임무 때문에 13공군과 20공군은 현 주둔지에 위치하여 임무를 수행하고 제5공군만 한국전선으로 이동시켜 작전 활동을 하였다. 이후 폭격사령부, 전투화물사령부, 일본항공단을 창설하여 한국전에 참전한 부대는 다음과 같은 4개 부대였다.
- 제5공군은 가장 많은 활동을 하였는데 주로 지상군에 대한 근접항공지원과 적 보급 및 병참선 차단 작전을 지원하였다.
- 전략폭격사령부는 미 본토의 전략공군사령부로부터 B-29 장거리 중폭격기를 배속 받아 편성한 부대였다. 정확히는 본토의 전략공군 사령부인 제15공군 산하 19전략폭격비행대를 제20공군을 위임받았다가 너무 원거리여서 통제 불능이라 극동 공군 산하 전략폭격사령부를 창설시켜 재배속 하였다. 전략폭격 사령관은 어메트 오도넬 소장으로 훌륭한 석기시대 매니아 였다. 각 31대의 B-29 중폭격기로 구성된 98, 307 폭격비행대로 편성되었다. 이들의 대활약은 "더 이상 폭격할만한 건물이 없다."라는 보고로 유명해진다.
- 전투화물사령부(후에 제315항공사단으로 개칭)는 환자공중수송과 공중보급작전을 담당하였다.
- 일본 공중방위군(후에 제314항공사단으로 개칭)은 일본 본토의 방공을 담당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위에서 언급한 미 해군의 해상수송근무부대(MSTS)처럼 공군 역시 항공수송근무부대(MATS)가 이들을 백업하였다. MSTS는 병력과 장비, 그리고 군수물자를 전장으로 수송하였다.
제5공군이 적기 950대를 격추하는데 66,977회 출격, 제5공군+전략폭격사령부가 수행한 공중차단 작전에 192,581회 출격, 근접항공지원에 57,665회 출격, 전투화물 수송부의 화물 수송에 181,650회 출격, 기타 항공정찰 및 훈련에 222,078회 출격하여 총 720,980회 출격이라는 위업을 달성하였다. 다만 피해도 커서 1,466대의 비행기를 잃었다. 유엔공군 152대 피해, 미 해병항공대 368대의 피해를 포함하면 945대는 사고 등으로 피해를 입고, 1,041대의 항공기는 적과의 전투에서 피해를 입었다. 이중 공중전에서 147대, 방공화기에 의해 816대, 기타 교전에서 78대를 피해입어 전사자 198명을 포함하여 1,198명의 사상을 입었다.
미 해군과 육군과 달리 미 공군의 주적은 소련 공군이었다. 소련군은 비밀리에 공군과 방공군으로 참전하여 미공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6.25를 다룬 서적을 봐도 북한 공군에 대한 이야기는 소련군에 비교하면 거의 나오지 않는 수준이다.
9 미 육군의 한국전선 전개와 활동
맥아더 장군은 "불이 났을 경우 화재진화 우선순위가 1~4번까지 있는 상황에서 우선순위가 떨어지는 4번 지역에서 불이 났다고 해서 1번 지역에 사용될 화재진압 장비를 사용하지 않을 수 있느냐?"라고 말하였다. 미국의 전략사상은 그동안 최우선 순위를 서유럽으로 하였다. 미국에서는 서유럽을 '사활적 이익지대'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2위가 중동, 3위가 극동이었다. 맥아더는 극동군 투입 외에 1번 지역인 서유럽 등의 병력의 전용을 말한 것이다.
합참의장 오마 브래들리 장군은 "미국이 어느 지역에서든지 공산주의자들의 침략행위에 어떤 명백한 선을 그어야 하는데, 바로 그 지역이 한국."이라 하면서 "소련이 미국과 싸우려고 준비를 갖추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미국의 결의를 시험해 보는 행위로 본다."라고 말하였다.
참고로 브래들리 장군은 1950년 9월에 원수로 진급했다. 6.25 전쟁은 시기상으로 미군 역사상 최후의 원수가 배출된 전쟁이기도 하다. 물론 브래들리 장군이 2차대전의 영웅이라는 점이 더 크게 작용했을 테지만 적어도 시기상으로는 6.25 전쟁이 최후의 원수를 배출한 전쟁이다.
어찌 되었거나 지원 병력 규모가 문제였는데 맥아더는 극동지역의 최고 책임자이면서 북한과 가장 가까운 데 위치한 사령관임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침공을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한국 측의 끊임없는 6월 24일 또는 25일 남침 정보보고를 무시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였다. 하지만 이건 미 정부에서도 예상 못했다고 쉴드칠 수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넘어가는 편이며, 미국 군사전문가들이나 장성들이 맥아더를 까는 논지는 주로 북한군을 과소평가하여 병력을 축차투입했다는 것이다. 맥아더의 축차투입과 지상군의 전개는 다음과 같다.
- 최초 6월 29일 한강방어선을 시찰한 이후에는 "현재의 전선을 고수하고 차후에 빼앗긴 땅을 다시 찾을 능력을 갖추기 위해.... (필요한 지상군의 규모는) 미 1개 전투단 및 2개 사단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 불과 며칠후인 7월 5일 스미스 특수 임무부대가 오산에서 개발살나자 깜놀하여 "북한군은 전차로 증강된 잘 훈련된 병사로 구성되었으며, 북한군의 장비 중에는 미군의 것보다 우수한 것이 있으며, 적 지휘관의 지휘능력도 뛰어나다. 북한군을 저지하고 격퇴시키기 위해서는 완전 편성의 4개 사단 내지는 4.5개 사단, 1개 공수연대전투단, 1개 기갑부대가 필요하다."라고 하였다.
- 꼴랑 3일후인 7월 8일 미 제24사단장 딘 소장에게 보고받은 후에는 "한국의 사태는 매우 심각하며 그곳에는 이미 대규모 작전이 전개되고 있다. 나는 전에 요청한 병력에 부가해서 모든 지원부대를 갖춘 4개 사단의 병력이 지체없이 모든 가용한 수송수단을 이용하여 투입되어야 한다고 말하였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콜린스 참모총장에게 1개 야전군 사령부와 8개 보병사단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 8야전군, 1군단, 1기병사단, 2·24·25사단, 5·29연대전투단, 6개 기갑대대로 구성된 세계최강의 미 육군 4개 사단과 유엔군+한국군의 방어선에서 북진하는것 보단 손쉽게 올라가기 위해
당시 북한군이 꼴랑 5만명+현지에서 소집한 남한출신 의용군 5만명으로 총병력이 UN군의 절반밖에 안되던건 비밀♡[4] 허리를 끊기 위한 인천상륙작전 기간인 50년 9월 15일부터 10월 17일까지 32일동안 미 2개사단과 1개 독립연대전투단을 전개하였다. 구성은 미 9·10군단, 1해병사단, 7사단, 187 공수연대전투단.
- 중공군 개입한 50년 12월에는 미 3보병사단 전개
- 1951년 12월에는 40 주방위보병사단, 1952년 1월에는 45 주방위보병사단을 전개하였다. 물론 맥아더가 원하는건 만주에 핵폭탄 쏘고, 대만군으로 중국을 남쪽에서 진격하는 등 제3차 세계대전 지휘권이었지만 다행히 트루먼 대통령과 전쟁지휘부는 맥아더의 폭주를 제지하였다.
한국전쟁 기간 중 미국은 제8군, 1·9·10군단, 1기병사단, 2·3·7·24·25·40·45 보병사단, 1해병사단, 5·29보병연대전투단, 187공수연대전투단, 80개 보병대대, 54개 포병대대, 8개 기갑대대라는 미군의 총 지상 전력의 절반 이상을 한반도에 전개하였다.
미 지상군의 최고지휘관은 미8군사령관으로 총 4명이 재임하였고 그 순서는 다음과 같다.
0. 1944년 9월, 태평양 전쟁 도중에 뉴기니와 레이테 해전에서 미 육군 전투부대를 통합 지휘하기 위하여 미8군 창설. 초대 사령관은 로버트 아이첼버거 중장. 1. 2대 사령관은 월튼 워커 중장으로 1948년부터 재임 중 한국전쟁 발발. 50년 12월 23일 교통사고로 순직했다. 당시 전쟁 중 한국의 도로 같지 않은 도로를 지프로 과속으로 달리다가 교통사고로 죽은 한미 장성들의 숫자만 해도 상당하다. 2. 워커 중장의 전사 후 매튜 B. 리지웨이 중장이 잠시 미8군을 맡다가, 제3차 세계대전을 벌이자며 폭주하던 맥아더가 결국 해임당하는 바람에, 리지웨이가 대장으로 승진 후 맥아더의 뒤를 이어 연합군 최고사령관 겸 유엔군 사령관이 되었다. 이후 그는 NATO 사령관,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한다. 3. 리지웨이의 유엔군사령관 부임 이후 공석이 된 미8군 사령관직을 제임스 밴 플리트 중장이 53년 2월 11일까지 가장 오랜 기간 재임하였다. 그리고 53년에 대장으로 승진하며 전역한다. 전쟁 중 공군 장교인 그의 아들이 북한으로 폭격 임무를 갔다가 실종된 것으로 유명하다. 그 영향인지 전쟁 이후 그는 한미재단을 만들고 한국 육군사관학교를 지어주는 등 한국에 대한 무한 애정을 쏟아부었다. 4. 그 후임은 밴드 오브 브라더스 당시 제101공수사단 사단장으로 유명한 맥스웰 테일러 중장이나, 한국전쟁에서의 경력으로만 보자면 대부분의 회고록이나 한국전쟁을 다룬 책에서 아예 다루지 않은 시기에 재임하여 본의 아니게 듣보잡. 미군 역사상 처음으로 완전한 군사적 승리를 거두지 못한 장군이기도 하다. 이후 육군참모총장을 거쳐 합동참모의장까지 지냈다. |
10 미 군수지원부대의 전개와 활동
미 군수지원부대는 미군뿐만이 아니라 한국군과 유엔군 전체에 대한 군수지원을 책임졌다. 최초에는 1950년 7월 4일 미 8군이 부산기지사령부를 설치한 것으로 시작되어, 7월 13일 제8군 예하인 편제표상 10만 명 이하의 전투부대를 지원하는 군수부대인 B형 군수부대로서 부산군수사령부로 개편되었다. 당시는 일선부대의 요청->부산군수사령부->미8군 후방사령부->후방사령부(본토) 체계였다. 미 제8군은 부산군수사령부를 통하여 예하 부대 및 한국군에 대한 군수지원, 보급품 조달, 수송, 항구운영, 보관, 분배임무 이외에도 후방사령부를 통해 일본 점령임무도 책임지고 있었다.
미8군 후방사령부의 경우 한국에서 전장이 확대 될 것을 예상하고 50년 8월 25일 제8군 후방사령부를 기간으로 하여 극동군사령부 예하에 주일군수사령부를 일본에 창설하였다.
그러나 50년 9월 19일 부산군수사령부는 전투부대가 늘어나 군수지원의 요소도 늘어나게 되어 C형 군수부대(40만 명 이하의 전투부대를 지원하는 군수부대)인 제2군수사령부로 확대 개편되었다.
같은 시기에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편성된 제10군단을 지원하기 위해 제3군수사령부를 인천에 설치하였다. 그러다 이게 꼬여서 원산상륙작전때는 3군수사령부는 미 8군을 지원하고 오히려 2군수사령부가 원산으로 상륙하는 미 10군단을 지원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맥아더의 직속 부대인 미 10군단이 미 8군과 별도로 노는 괴랄한 사태가 벌어져 중공군 개입당시 패전의 중요한 원인이 되어 결국 그 책임을 지고, 결국 미 10군단이 맥아더 직속에서 미 8군 예하로 들어오고, 3군수 사령부 역시 2군수 사령부 예하로 들어가 흡수 통합된다.
1952년 7월 10일에는 미 8군이 전방작전에만 전념하기 위해 한국병참지구사령부(KCOMZ)를 설치하여 북위 37도 이남의 후방지역에 대한 책임과 미 8군의 군수지원을 맡게 되었다. 예하로는 실질적인 군수지원 활동을 보장하기 위해 한국군수기지국(KBS)을 설치하였다. 한국병참지구사령부는 동년 10월 1일부터 미 육군 극동군 사령부가 일본 점령임무를 맡게되자 미 8군 소속에서 미육군극동군 사령부 산하로 예속변경되었다. 주일군수사령부 역시 같은 시기에 미육군극동군 사령부에 흡수되었다.
11 미 동원령 선포와 예비군 투입
문제는 미국의 ‘사활적 이익지대’인 서유럽과 그 다음 순위인 중동에 주둔한 미군 병력들을 건드리지 않고 극동과 본토 병력만으로는 이러한 어마어마한 대군이 나올 수가 없었다. 결국 미 의회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1951년 6월 30일 선별징집확대법안을 통과 시켜 예비군과 주방위군을 개별 또는 부대단위로 21개월 동안 현역 연방군으로 소집할 권한을 부여하였고, 7월 9일 이전 전역하는 병사들을 1년간 더 복무하도록 할 권한을 부여하였다. 흑흑. 대체 김일성이 누군데 나보고 군생활을 더하라는 거야 또한 선별 징병제에 따라 5만 명의 장정들을 소집하여 보충해 나갔다. 또한 주방위군과 예비군을 소집하여 병력을 충원하였다.
한국전 발발 당시에는 미 육군 예비군 266,726명, 주방위(National Guard)군 324,761명, 현역예비군 184,015명, 비현역지원예비군(Inactive Volunteer Reserve) 324,602명, 비현역예비군 91,800명이 있었다. 현역예비군과 비현역예비군의 차이점은 추가바람.
원래 전쟁이 6월 25일에 일어난 이유가 북한이 8월 15일까지 남한을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필요기간인 50일을 역산하여 나온 날짜이다. 8.15까지 통일은 물 건너갔으니 이때 북괴군은 8.15까지 대구를 점령하겠다며 낙동강 전선에서 공세를 취하고 있었다. 당시 미군은 맥아더가 인천상륙 작전을 해야 한다며 배에 태웠다가, 낙동강이 무너지게 생겨서 배에 내려 긴급 땜빵하고 다시 배에 타기를 반복하고 있었던 시기가 바로 8월 14일이었다.
낙동강 전투가 한참이던 그 8월 14일, 육군 주방위군 27개 사단중 8개 사단과 20개 연대전투단중 3개 연대전투단을 포함하여 1,457개의 주방위군 부대가 동원되었다. 이들 부대로는 28·31·37·40·43·44·45·47 보병사단과 3개 연대전투단, 그리고 43개 대공포 대대로 총 138,600명이 현역으로 소집되었다. 이중 40·45사단은 한국전선에 투입되어 1951년 중공군으로 인해 전선이 고착화된 이후 전선교대 부대가 되었다. 28·43사단은 유럽의 나토 방위를 위해 파견되었다.
주방위군과 마찬가지로 동원령에 따라 육군 예비군은 6,687개 부대중 934개 부대가 현역으로 소집되었고 이에 따라 장교 46,920명, 사병 150,807명 등 총 197,727명이 동원되었다. 전쟁 기간 중 초기 현역으로 전환된 43,000명의 예비역 장교를 포함하여 244,300명의 장병이 소집되어 임무를 수행하였다. 사단이나 연대 단위로 소집되어 현역으로 전환되어 투입된 주방위군과 달리 예비군은 원래 개인적으로 소집되어 현역부대를 보충하는 용도이다.
병력들을 소집하여 투입한 육군과 달리 미 해군은 퇴역한 군함 등 장비에 대한 보충에 중점을 두었다. 전쟁이 일어난 해 8월 28일에는 수많은 예비군과 함께 예비항공모함 프린스턴함(USS Princeton, CV-37)을 재취역하여 한국전에 투입하였고, 이어 1951년에는 순양함 본 홈 리차드, 에식스, 앤티텀함이 재취역하였으며, 약 22개 해군 예비 전투기편대가 제7함대기동군(Striking Force)에 현역으로 편입되어 한국 상공에서 전투 임무를 수행하였다.
미 공군의 경우 공군 주방위군 소속의 F-51전투기 145대를 소집하여 한국전선에 보낸다. 당시 한국전선에서 보여준 F-51 무스탕의 성능이 워낙 넘사벽이여서 미군의 최신예 전투기로 오인될 수 있으나, 당시 주방위군에서도 최신예 전천후 기종인 F-80 슈팅스타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었다. 사실 극동공군에서도 F-80을 요청했지만 어른들의 사정으로 주방위군은 F-51 무스탕을 보냈다.
또한 437 예비병력수송항공단, 452 예비항공폭격단, 403 예비병력수송한공단을 현역으로 소집하고 51년에는 주방위군의 116·136 전투폭격비행단을 현역으로 동원하여 극동군 사령부로 보내어 52년 7월까지 임무를 수행하였다. 전쟁기간중 공군 주방위군 22개 비행단과 공군예비군 10개 비행단, 그리고 10만 명의 공군예비군이 현역으로 소집되었다.
미 해병대의 경우 전쟁발발시 현역은 74,279명이었다. 팬들턴 캠프에 주둔하고 있던 제1해병사단은 제5해병연대만 보유하고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을 다룬 도서를 보면 미 해병 1사단이 이름만 존재하지 실병력이 없어 미전역+예비군을 소집해서 채워넣어 작전에 투입했다는 기술이 나온다. 대체 태평양 전쟁 때 날고 기던 수많은 미해병사단이 어디 갔냐 싶어 어안이 벙벙하지만, 알고 보면 다른 군종처럼 전후 예산 감축의 철퇴를 맞아 병력이 대폭 쪼그라들었던 것이다.
1950년 7월 그나마 남아있던 제5해병연대는 제1임시해병여단의 모체가 되어 한국으로 출발하였고, 전 세계에 있는 해병부대들은 1사단의 깃발아래 모이기 위해 해체되었다. 또한 해병편성예비군 33,528명을 현역으로 소집하였고 해병지원예비군 90,944명 중 51,942명이 현역으로 복무하였다. 이들 예비역 중 장교 79%, 사병 77.5%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용사들이었다.- ↑ 참고로 이 분은 북한군이 쳐들어오는 동안 피난길에서 타자기로 기사를 쓸 정도로 배짱있는 사람이었으며 한국전쟁 말기에 전라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치열한 빨치산 토벌 작전을 취재한 비범한 아주머니이시다.
- ↑ 한국은 UMT+9, 미국 동부(워싱턴)는 UMT-5, 즉 미국이 14시간 더 늦다. 미국 수뇌부가 회동한 것은 한국 시각으로 26일 오전 9시40분이다.
- ↑ 선전포고문이 제일 정형화 되어있고, 선전포고를 미국법상 합법적으로 하기 위한 조건은 상원-하원 동시 결의, 즉 Joint Resolution이다. 당연하지만 전쟁 승인을 받는데 시간이 정말 더럽게 오래걸린다. (...) 거기다가 전쟁을 위해 대통령에게 어떤 권한을 주느냐도 결정해야하고, 대통령이 받은 권한을 선전포고문에 작성한다. 미국이란 나라가 서류를 정말 중요하게 취급하는 전통이 뿌리박혀있기 때문에 미국의 역대 선전포고문들은 연설(...)등으로
왕정국가답게포고하는 영국과 비교해보면 정말 까다롭기 짝이 없다. 이것은 현재 미국이 제대로 선전포고문을 쓰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진짜 천인공노할 사태로 인해 미국 시민권자가 모조리 전쟁을 외치는 상황이라면야 금방 결의되갰지만,진주만 공습그것도 하루는 걸린다. - ↑ 전쟁초에는 북한 병력만으로도 19만이고 국공내전을 통해 실전경험이 풍부한 팔로군 출신 조선의용군만 3개사단이였다. 그런데 앞의 미군이 투입될 무렵, 그러니까 인천상륙작전 시기에는 극심한 병력 소모로 북한군 출신은 겨우 5만명 밖에 안남았다.